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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25 11:09:50

청보식품

주식회사 청보식품
株式會社 靑寶食品 | Chungbo Food Co., Ltd.
파일:청보식품 로고.svg[1]
국가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설립 1984년
파산 1987년 4월
본사 서울특별시 강남구 서초동 1328-2 기남빌딩
(現 서초구 강남대로 405 통영빌딩)
공장 경기도 평택군 청북면 용성리 산 44-4
(現 평택시 안중읍 덕우로 423 오뚜기라면 공장)
업종명 식품 제조업

1. 개요2. 풍한방직은 어떤 회사?3. 전두환 파워를 둘러싼 진실 게임4. 마케팅5. 맛없는 라면6. 청보의 유산7. 제품 목록
7.1. 라면7.2. 스낵
8. 광고9.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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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청보식품 런칭 티저 CM (1984년)

라면, 스낵 등을 제조하던 식품 회사. 1984년부터 1987년 4월까지 존속했다. 후술하겠지만, 청보식품은 현재 오뚜기라면㈜의 전신 회사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오뚜기라면과 청보식품은 법인 자체는 다른데 오뚜기라면의 법인 설립일은 1987년 12월 1일로, 오뚜기에서 오뚜기라면이라는 신설 법인을 설립하고 오뚜기가 인수한 청보식품이 신설 법인인 오뚜기라면에 흡수되는 식으로 인수를 하면서 존속 법인이 오뚜기라면, 해산 법인이 청보식품이 되었기 때문이다. # 청보식품의 라면 생산 설비도 모두 오뚜기라면으로 이전했다. 청보식품의 모회사는 풍한방직으로 방직과 의류가 주력 사업이었던 업체였다. 당장에 청보 핀토스로 유명한 프로 야구단의 구단명인 '핀토스'부터가 풍한의 청바지 브랜드였다.

그러나 라면 맛이 떨어지는 데다가 정치적 논란 때문에 판매가 썩 좋지 못해서 단명했다. 얼마나 맛이 없었냐면, 라면도 그 따위로밖에 못 만드는 놈들이 야구는 똑바로 하겠냐?라고 비아냥을 샀을 정도로 못 먹을 맛이었다고 한다.

2. 풍한방직은 어떤 회사?

풍한방직은 일제강점기 내외흥업이 전신으로, 평양 출신인 김영구(1911~1999)가 설립한 기계 판매 업체였다고 한다. 그러다 8.15 광복 후 일본의 방직 관련 적산을 불하받은 것을 계기로 방직업에 진출하여 1952년 풍한방직이 생겼다. 기업 연고지는 당시 충청남도 대전시(現 대전광역시)였다.

그런데 지금은 사라진 방직 회사라고 해도 무시해서는 안 될 것이 리즈 시절1960년대까지는 한때 삼성그룹제일모직에 버금갈 정도로 방직업계에서는 큰 기업이었다. 그러나 무리한 사업 확장으로 1970년대에 제대로 휘청거리면서 풍한방직 자체는 정부지원금을 받고도 부도를 냈고 한때 대우그룹김우중 회장이 주식을 잠깐 가진 적도 있으나 잠깐뿐이었다. 다만 이 와중에 사장인 김영구 본인은 본업이 망했어도(...) 부동산 사업으로 돈을 많이 벌었기 때문인지 풍한방직 자체가 매각되는 일이 벌어지지 않은듯했다.

어쨌든 창업주 김영구의 아들 김정우가 경영을 맡으면서 1980년대 들어 식품사업에 뛰어드는데 이것이 청보식품의 시작이었다. 청보식품이 오뚜기에 매각된 뒤, 모기업은 풍한산업으로 바뀌고 신라종합개발에 인수되어 이름만 유지하다가 2004년 법정관리를 졸업했으나,[2] 1년 뒤인 2005년에는 풍한방직 최후의 회장이었던 김정우 회장은 암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났다.

풍한방직터는 두 군데가 있었는데 하나는 대전시 중구 오류동 공장부지였고 하나는 대덕군 신탄진읍 석봉리[3]의 부지였다. 대전 토박이들 사이에서 풍한방직 터라 하면 보통 후자를 지칭하는데 석봉동 공장은 1983년 10월 13일에 한번 화재 사고가 났었다.[4] 오류동 공장은 1985년 2월에 335억 원의 가격으로 삼성종합건설에 팔렸으며,# 1986년 12월에 삼성아파트가 준공되었고, 석봉동 공장은 2000년대 중반까지 폐건물로 남아 있다가 철거되고 그 자리에는 초고층 아파트 금강 엑슬루타워가 들어섰다. 철거되기 전 석봉동 풍한방직 터 사진

3. 전두환 파워를 둘러싼 진실 게임

그런데 청보식품은 갑툭튀에 가까운 과정으로 시장에 모습을 드러낸 나온 기업이었던 바, 루머가 굉장히 많았다. 사실 그룹의 모체인 풍한방직 자체가 좀비상태의 기업이었고, 사장이 부동산을 통해 벌어들인 돈으로 연명해나가는 기업이라 해도 무방했던지라 이 상황에서 계열사를 낸 것을 두고 루머가 안 나오는 것이 이상할 상황이었기는 했다. 그러나 황색지 루머 이상으로 나간 것은 없다.

군납업체에 선정되어 대량의 라면 납품권을 손에 넣은 것을 두고 당시 영부인인 이순자 소유 혹은 풍한방직 회장이 영부인과 친인척 관계라는 루머가 그럴듯 하게 퍼져있었는데, 청보가 와대 줄임말이라는 얘기까지 있었다. 이에 대한 이설로 청보식품 사장이던 장기하[5]하나회 출신이라 그렇다고도 한다.

그 외 카더라로는 여의도순복음교회 설, 통일교 투자설[6], 대우그룹 위장 계열사 설도 있었다.

4. 마케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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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청보식품이 런칭되자 마자 공격적으로 다른 회사 출신의 관련 인력들을 영입해갔다. 당시 업계에서 잘 나가던 삼양식품의 전직 간부 출신에 직원들을 무더기로 영입하고, 마침 농심 전속 광고 모델이었다 막 계약이 끝났던 이주일을 영입하려 했다.

1980년대 초 이주일은 농심라면 뿐만 아니라 크레오파트라 광고 등 농심의 과자 광고에도 나오는 등 농심의 광고에 단골로 나왔었다. 처음에 이주일은 농심과의 의리를 생각해서 거부하려고 했지만 하도 청보가 닥달하다 보니 결국 광고에 나왔다.[7] 그리고 당대 최고의 가수였던 김수철과 함께 광고를 찍었다. 요즘으로 치면 신생 식품 회사가 창업하자마자 유재석 같은 인물을 광고 모델로 내세운 셈이었다.

그렇게 초기 마케팅을 공격적으로 해서 런칭한 지 4개월만에 업계 점유율 5%를 잠깐 찍었는데, 그 영향인지 당시 라면 사업에 뛰어드는 신생회사들이 잘 나가는 개그맨들을 광고 모델로 많이 썼다. 팔도는 심형래를, 빙그레는 김병조를 광고모델로 썼다.

또한 각종 영화 책갈피를 부록으로 주기도 했다.

5. 맛없는 라면

그러나 광고를 잘 찍었고 타 사 라면에 비해 가격이 저렴했지만 막상 생산장비와 기술이 저질이었던지라 정작 당시 기준으로도 맛이 형편없었다.[8] 당대 청보라면에서 내놓는 라면 맛이 어느 정도의 평을 들었냐면 영라면을 예를 들면 면은 푹 익혔음에도 쫄깃하지 않은 설익은듯한 식감에 국물 맛도 영 싱거워서 간이 맞지 않는다는 평을 들었다. 이러니 소비자들에게는 그저 튀긴 밀가루 덩어리 정도의 취급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단순히 맛이 나쁜 것 뿐만 아니라 포장 기술도 형편 없어서 청보라면은 봉지 밑부분이 잘 빠지기로 유명했다. 해당 회사 라면이 군납 라면이었었는데 당시 배고프고 고달팠던 군인들 입장에서도 짬통 직행이었을 듯. 대표적인 라면인 영라면과 곱배기라면은 많은 양을 장점으로 내세워서 처음에는 날개 돋친 듯 팔렸지만 아무리 광고료로 돈을 쏟는다 한들 가장 중요한 맛이 없었으니 점유율은 오래 유지될 리가 없었고 얼마 안 가 적자가 쌓이기 시작한 것은 당연했다. 이후로 여러 가지 라면 개발에 몰두하면서 이중 747라면 등 몇 개는 맛이 있다고 평가 받기는 했지만 이미 실망한 소비자들의 발길을 되돌리기에는 너무 늦었다.

당연히 야구단 운영한다고 청보 핀토스의 홈경기 때마다 자사의 라면, 컵라면을 관중들에게 배포했는데, 주로 4각 용기면의 원조인 '팔도 도시락'의 아류작 '4번타자'였다. 나름 야구단 이미지에 맞게 제품명도 4번타자로 기획한 듯 했으나, 애초에 봉지면부터 맛이 그 모양인데 그 허접한 기술력으로 만든 용기면이 맛있을 리가 없었다... 삼미 슈퍼스타즈 시절보다도 나아질 것 없는 팀 성적에 라면까지 맛이 없다 보니 경기가 끝나면 도원야구장포장도 안 뜯은 라면들이 관중석 바닥에 엄청나게 굴러다녔다는 이야기가 전설처럼 내려온다. 청보가 태평양에 인수된 1990년대 초반까지도 도원구장 스탠드 판매상들에게 사발면 하나 달라고 하면, 4번타자에 뜨거운 물을 부어서 줬다. 생소한 라면에 신기해 하는 것도 잠시, 몇 젓가락 떠먹다 반 넘게 국물 째로 내다버리는 경우가 많아서 아예 국물 버리는 쓰레기통이 따로 놓여있을 정도.

이렇게 된 원인은, 다른 라면 회사에서는 라면 하나 개발할 때마다 의도한 맛, 생산성, 원가 등 많은 조건을 맞추기 위해 연구를 게을리 하지 않으며 수많은 시행착오를 반복하는 것과 달리[9] 청보식품은 라면 회사를 차린 이유부터 라면에 대한 애착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냥 라면을 팔면 돈을 엄청나게 벌수있다는 단순무식한 이유로 라면 회사를 차린거라(...) 식품 개발이나 연구를 게을리 했기 때문이다. 다만 무조건 맵게만 만든 열라면은 그 매운 맛 덕분에 다른 맛이 가려져서 다른 청보라면에 비해 잘 팔린 아이러니한 상황에 직면하기도 했다. 면발 역시 마찬가지로 다른 라면회사는 면을 반죽해서 튀긴 뒤 생으로 맛보고[10] 끓여서 맛보는 2회의 실험을 한 뒤 수정하고 버리는 작업을 수도 없이 반복한 끝에 가장 적당히 쫄깃한 면발이 나올 때까지 계속 개발한 반면에 청보라면의 면발은 그냥 반죽해서 끓이고 맛 검사도 안 해보고 그냥 판매한 탓에 면발도 그 지경이었던 것이었다. 그래서 청보식품의 라면 공장을 인수한 오뚜기는 다른 라면 회사들보다 훨씬 더 악착같이 달라붙어서 어떻게든 맛있는 라면을 만들기 위해서 고생했다. 그 결과 청보식품에서 개발만 하고 판매되기 전에 망했기 때문에 생산은 오뚜기로 넘어갔던 라면박사는 상당히 맛있는 라면으로 환골탈태했다.[11]

6. 청보의 유산

청보의 라면 생산라인은 이후 오뚜기에게 넘어가서 현재의 오뚜기 라면이 됐다. 그 대표적인 흔적이 열라면과 진곱배기라면을 계승한 진라면이다. 이후에도 오뚜기 비빔4총사의 스파게티가 직접적으로 계승한 제품들이며 알짜배기라면은 상술했듯 그 기본적인 측면에서 오뚜기 용기제품군의 베이스가 되기도 했다. 오뚜기 육개장도 사실 알고보면 청보 육개장을 계승한 셈.

그러나 오뚜기 라면도 청보라면의 선례 때문에 인스턴트 라면 매니아들에게는 팔도보다 못한 괴식라면 제조업체라면서 꽤나 박한 평가를 한동안 받았다. 청보의 그늘에 한동안 씌여서 설움을 꽤나 먹고 자라왔지만, 대신 참깨라면 같은 오뚜기 오리지널 제품이 의외로 호평을 받았으며, 플래그십 제품인 열라면과 진라면까지 맛 개선을 거쳐서 2010년대 이후에는 삼양라면을 위협할 정도의 위치가 되었고, 2013년에는 드디어 삼양식품을 제치고 업계 2위로 올라오게 되었다. 1위는 당연히 농심.

7. 제품 목록

7.1. 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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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 스낵

스낵류들 역시 라면과 마찬가지로 맛은 별로였다.

8. 광고

회사 설립 초반부터 이주일을 기용한 회사답게 광고는 잘 만들었다. CM송은 거의 다 들어갔으며, 가끔 애니메이션도 넣었다.


영라면. 후반부에 곱배기라면 광고도 붙어 있다.
이주일 왼편에 있는 안경 낀 여성이 바로 김미화.


열라면. 아마도 초기의 이주일 출연 CM일듯 하다.


곱배기 라면. 이주일과 김수철이 함께 나왔다.


청보 육개장. 내부는 비둘기호 또는 통근형 전동차인데 광고 효과음은 증기 기관차. 아날로그 영상을 디지털로 복원하는 과정에서 복원이 잘못되어, 색상이 이상해진 것으로 보인다.


아줌마 우동. 배우 엄유신이 출연했으며 배고픈 하숙생들이 엄유신이 아줌마 우동을 대접하는 컨셉. 이 시절에 굉장히 흔한 성우한명의 다중 배역의 폐해가 드러났다.


아줌마 매운탕면. 그나마 우동편은 하숙집 아줌마라는 인물도 있었는데 뜬금없이 조선시대로 넘어가서 왜 아줌마라는 라면이름이 붙여졌는지 더 알수 없게 되었다. 이주일이 임금님 역할을 맡았다. 촬영 세트장에서 사극 녹화중에 왕으로 분장한 출연자 이주일이 출출하여 녹화를 중단하고 상궁으로 분장한 엄유신에게 아줌마 라면을 찾는다는 컨셉이다. 참고로 생전의 이주일은 엄청난 라면 덕후였다.


홈라면. 후반부에 진곱배기 광고도 덤으로 붙어있다.


우짜짜 라디오 광고. 원시인처럼 우가우가우짜짜~가 포인트. 티비광고에서는 이 곡조에 맞춰서 이주일이 박수를 친다.


새우야.

9. 관련 문서



[1] 해당 로고는 설립 당시부터 오뚜기에 인수되기 전까지 사용되었다.[2] 현재 사명은 (주)풍안건설. 방직 부문은 물적분할되고 영동으로 옮겨졌다.[3]대덕구 석봉동. 대덕군은 1989년 대전시가 대덕군과 통합하여 직할시로 승격되면서 대덕구가 설치되었다.[4] 화재사고가 나기 전에 1982년 말에 보험에 가입을 했는데, 건물 38억 4천 2백 53만 원, 기계 72억 9천 5백 94만 원, 동산 45억 원 등 총 157억 7587만 1천 원에 보험에 가입했다고 한다.당시 기사[5] 1933년 울진군 출생. 육군사관학교 14기로 제22보병사단 사단장 재직 중 조준희 일병 월북 사건으로 강제 예편했다. 5공 시절 청보 사장을 역임하다 1985년부터 (주)진로 사장이 되고, 1990년 진로그룹 주류/식음료부문 부회장, 1992년 회장, 1995년 고문으로 승진해 1997년까지 재직했다.[6] 그러나 통일교 설은 1980년대 후반에 있던 개신교의 통일그룹 생산 제품 불매운동과 연계된다. 통일그룹 산하 일화가 음료를 주력으로 했던 회사였다는 점에서 이 헛소문은 논파된다.[7] 이주일은 청보식품 모델 외에도 청보 핀토스의 홍보 대사로도 활약한 적이 있다. 당시 인천춘천 홈 경기에 종종 등장해서 등번호 100번이 새겨진 청보의 유니폼을 입고 관중들에게 사인볼과 맛 없는 라면(...)을 건네고 때로는 파도타기 응원을 주도하는 역할을 했다고 한다. 공교롭게도 청보 핀토스의 제2연고지였던 춘천은 이주일의 고향이기도 하다.[8] 다만 좋아하는 사람도 있었다고 하지만 다른것과 오해를 했거나 청보식품 후반에 여러모로 개선된 일부 제품을 접해서 그랬을 것이다. 아니면 취향이 진짜 특이했거나...[9] 농심, 삼양식품 등은 40년 이상 라면을 만들어 온 노하우가 상당히 쌓여서 어떻게 하면 라면 맛이 더욱 좋아질 지 개발과 연구를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청보는 그저 돈벌이용으로만 식품 회사를 창립한 것 때문에 그런 연구를 아예 등한시 한 것이 결국 회사의 파산으로 이어지고 말았다.[10] 생으로 맛보는 이유는 생라면과 끓인 라면의 면발 간 맛의 간극을 계산해서 끓였을 때 쫄깃한 면발을 만들기 위한 예측을 하기 위해서이다. 뿌셔뿌셔와 일반 라면의 면발 질이 다른 이유도, 스낵면이 출시될 수 있었던 이유도 다 이렇게 생라면과 끓인 라면의 맛을 전부 검토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특히 스낵면의 경우는 끓인 라면에서 아직 생라면의 맛이 약간 남아있으면서도 거부감이 없게 만들기 위해 만든 라면이다.[11] 당시 오뚜기의 전속 모델이었던 김영애연규진이 CF에서 "오뚜기에서 맛있게 만들었습니다"라는 코멘트를 했을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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