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5 광복 8·15 光復 National Liberation of Korea | |||
미군의 한반도 진주 | |||
소련의 대일전 | |||
날짜 | |||
1945년 8월 15일 | |||
지역 | |||
한반도, 전 세계 한인 거주 지역 | |||
원인 | |||
일본 제국의 제2차 세계 대전 패전 | |||
당사자 | |||
[[대한민국 임시정부| ]][[틀:국기| ]][[틀:국기| ]] 조선건국준비위원회 그 외 대부분의 한민족 | [[일본 제국| ]][[틀:국기| ]][[틀:국기| ]] 조선총독부 | ||
결과 | |||
일본 제국의 한반도 강점 종료 미군정 및 소련군정 수립 | |||
영향 | |||
한민족의 자주독립국가 건설, 해외 거주 한인들의 귀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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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 제국의 지속적인 타지 식민지화로 인하여 1910년에 경술국치로 대한제국이 일본 제국에 강제 합병된 이후, 35년이라는 시간동안 한반도는 일제의 식민지 상태였다. 식민지 조선 후기인 1941년에 일본 제국의 진주만 공습으로 개전한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 제국은 초반에는 선방하였으나, 미드웨이 해전에서 패한 후 밀리고 밀려 1945년이 되면서 일본 본토까지 미군에게 공습당하는 등 전황이 악화되고 있었는데, 결국 미국에 의하여 두 차례에 걸쳐서 원자폭탄을 투하당하고 소련이 불가침조약을 파기하여 침략해오자, 일본 제국이 전황을 도저히 뒤집을 수 없음을 완전히 깨닫고 포츠담 선언을 수락해 항복을 선언함으로서, 한반도가 일제로부터 해방된 사건이다.일본 제국의 천황이었던 히로히토가 8월 15일에 일본방송협회 라디오 방송을 이용해서 옥음방송을 하여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연합군이 내민 포츠담 선언을 수락하고, 한민족은 카이로 선언에서 연합군이 약속한 바대로 일본 제국의 식민지에서 해제되었으며, 이에 따라서 조선총독부는 해체되었고 경술국치로 일본 제국이 흡수한 옛 대한제국의 모든 영토를 포기하게 됨으로써 한반도의 주류 민족[1]인 조선인[2]들은 식민지 치하에서 해방[3]되었다.
2. 상세
광복은 일제강점기 말기에 시작된 일본의 수탈로 인하여 도탄에 빠진 한민족을 일시적으로 구원했으나 곧 이어서 미국과 소련의 점령통치를 받게 되었다.(미군정, 소련군정) 다만 이 점령통치는 한반도에서 일본군을 무장해제시켜서 일본 제국의 영향력을 제거하고 한반도에 새로운 국가를 수립하기 위한 것이었으므로 사람들은 1945년 8월 15일 당시를 일본의 지배로 벗어난 날로 여긴다.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대한민국에서는 이날을 기념하기 위해 양력 8월 15일을 광복절로 지정한 뒤 현재도 매년 기리고 있다.
3. 8월 15일
이날 아침 여운형은 엔도 정무총감과 교섭을 벌여 일본인들의 무사 귀환을 조건으로[4] 5개 조항[5]을 요구했다. 당혹스러운 조건이었지만 소련군의 경성 입성 소문이 돌던 상황에서 다급했던 총독부는 여운형의 요구를 받아들였다.[6]이날 '중대 발표가 있으니 조선인들은 경청하라'는 벽보가 나붙었다.[7] 그러나 당시 라디오를 가진 조선인들은 많지 않았고 천황의 종전 발표 방송은 잡음이 심했고 어렵고 난해한 한자어가 섞여 있었던 데다 구어체도 아니고 문어식 일본어로 방송되었다. 때문에 방송 내용을 제대로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들은 극소수였다.[8][9][10]
결정적으로 히로히토는 '전쟁을 끝내고 평화시대를 연다', '연합국의 공동성명을 수락한다'는 내용의 종전만을 언급했을 뿐, 연합군에 무조건 항복한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11] 때문에 대다수의 조선인 민중들로서는 뭔가 긴가민가하는 상황이었고 해방의 첫날은 조선 민중에게는 전혀 예기치 않게 찾아온 셈이었다.[12] 당시 정오에는 조용했지만 반복된 라디오 방송과 일본인들의 이상한 분위기, 행정의 공백(배급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든지), 그리고 광복을 맞았다는 입소문 등으로 당일 오후와 밤 동안 도시 지역에는 광복 소식이 퍼지고 있었다고 한다.
8.15 당시 광화문 사거리의 모습이라고 하나 정확하지는 않다. [13]
마침내, 최종적으로, 미국의 소리 방송에서 1945년 8월 15일 오전 8시에 미국, 영국, 중국, 소련에 대한 일본의 항복 사실을 한국어로 올바르게 알렸다. 그리고 애국가도 함께 송출하였다.[14]
4. 8월 16일과 조선건국준비위원회
다음날이 되자 비로소 조항 내용대로 형무소에 있었던 정치범과 경제범이 석방되기 시작했다.[15] 그때서야 경성[16] 시민들은 어제 방송이 일본 천황의 항복 방송인 줄 알게 되었고 해방을 환호하기 시작했다.
전국 각지에서 파도처럼 휘몰아쳤던 광복의 기쁨은 다음과 같이 나타난다.
8.15 광복 전후의 모습 | |
경성부 | 경기도 서울시 휘문중학교 앞 여운형 연설 모습 |
전남 광주부[17] | 전남 광양군 광양읍[18] 출처.글 삭제됨 |
그대로 시민들은 계동에 있는 여운형의 집에 몰려가 연설을 해 달라고 요구하였고 여운형은 집 바로 뒤에 있는 휘문중학교 운동장으로 가서 광복을 맞이하는 연설을 했다.[19](위 사진 참고)
"조선민족의 해방의 날은 왔다. 어제 15일에 원등(엔도 정무총감을 말한다)이가 나를 불러가지고 '과거 두 민족이 합하였던 것이 조선에게 잘못 됐던가는 다시 말하고 싶지 않다. 오늘날 나누는 때에 서로 좋게 나누는 것이 좋겠다. 오해로 피를 흘리고 불상사를 일으키지 않도록 민중을 지도하여주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나는 5가지 조건을 요구하였다. 우리 민족해방의 제일보를 내딛게 되었으니 우리가 지난날의 아프고 쓰리던 것을 이 자리에서 다 잊어버리고 이 땅에다 합리적·이상적 낙원을 건설하여야 한다. 이때는 개인적 영웅주의는 단연 없애고 끝까지 집단적으로 일사불란의 단결로 나아가자! 머지않아 연합군 군대가 입성할 터이며, 그들이 오면 민족의 모양을 그대로 보게 될 터이니 우리들의 태도는 조금도 부끄럼이 없이 하자. 세계 각국은 우리들을 주시할 것이다. 그리고 백기를 든 일본의 심흉을 잘 살피자. 물론 우리는 통쾌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 그러나 그들에 대하여 우리들의 아량을 보이자. 세계문화 건설에 백두산 밑에서 자라난 우리민족의 힘을 바치자. 이미 전문·대학·중학생의 경비대원이 배치되었다. 이제 곧 여러 곳으로부터 훌륭한 지도자가 들어오게 될 터이니 그들이 올 때까지 우리들의 힘은 적으나마 서로 협력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곧 여운형은 기존에 자신이 운영했던 비밀결사 조직인 조선건국동맹을 기본으로 조선건국준비위원회(건준)를 조직하였고 YMCA 건물에서 건준 강령[20]을 발표하였다.
YMCA 건물의 건준회의에서 연설하는 여운형.
그리고 건국준비위원회 부위원장 안재홍은 며칠간 전국에 조선이 광복되었다는 소식을 대대적으로 보도하였다.[21]
한편 건준은 8월 말까지 전국에 145개 지부를 두고 일본인 자본가와 지주로부터 재산과 토지를 접수하여 조선인들에게 배분하는 것을 도와주었으며 경찰들이 도망간 빈 자리를 대신하여 전국의 청년들을 모집해 치안대를 결성해 치안을 유지하였다.[22]
5. 당시 상황
광복 소식을 듣자 반일 인사들을 옥에 가두고 고문했던 친일 경찰들은 도망가기 바빴으며 일본군과 일본 경찰은 미군에 의해 무장해제되는 9월 9일까지 시내를 돌아다니며 광복을 환호하는 군중들에게 집으로 돌아가라고 지시하느라 분주하게 움직이면서 조선인들이 소요사태를 일으킬 것을 염려해 비행기로 "경거망동을 삼가라"는 건준 명의의 선전물을 뿌렸다.[23]조선동포여!
중대한 현 단계에 잇어 절대의 자중과 안정을 요청한다
우리들의 장래에 광명이 잇스니
경거망동은 절대의 금물이다
제위(諸位)[24]의 일어일동(一語一動)[25]이 민족의 휴척(休戚)[26]에 지대한 영향이 잇는 것을 맹성(猛省)[27]하라!
절대의 자중으로 지도층의 포고에 따르기를 유의하라.
8월 16일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재조선 일본인들은 황급히 재산을 팔아 치우고 일본으로 밀항하거나 그러려고 노력하였다.[28] 치안이 유지되었으나 일본인들이나 친일 조선인들에 대한 보복도 있었으며,[29]역으로 광복이 기정사실화되었는데도 여전히 치안을 유지한답시고 일본 제국 경찰이나 군인이 총격을 가해 조선인이 사망하는 사건도 있었다. [30][31]중대한 현 단계에 잇어 절대의 자중과 안정을 요청한다
우리들의 장래에 광명이 잇스니
경거망동은 절대의 금물이다
제위(諸位)[24]의 일어일동(一語一動)[25]이 민족의 휴척(休戚)[26]에 지대한 영향이 잇는 것을 맹성(猛省)[27]하라!
절대의 자중으로 지도층의 포고에 따르기를 유의하라.
8월 16일 조선건국준비위원회
6. 기타
- 강준만 같은 경우는 '방송 직후 바로 조선 민중들이 반응하지는 않았지만 오후부터 서서히 마포형무소와 서대문형무소의 정치범들이 석방되기 시작했고, 이 사실이 퍼져 나가면서 경성이 들썩이기 시작했다'고 한다. 기타 증언들도 마찬가지다.
- 일부 사람들 사이에서는 1945년의 해방과 1948년 8월 15일 독립정부 수립을 묶어서 광복으로 부르는 경향이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광복절을 해방으로 부르는 경향이 있지만 1945년 8월 15일은 한민족이 일본 제국으로부터 해방된 날이고 미군정 체제가 종료되고 대한민국 정부가 세워져서 외국의 통치로부터 공식적으로 독립한 날은 1948년 8월 15일로 연도가 다르다.
- 일본에서는 이날을 종전기념일이라고 기리고 있다.[33] 일본 제국이 정식으로 항복문서에 서명한 날은 1945년 9월 2일이며 실제로는 천황이 서명한 것이 아니라 천황 및 일본국 정부, 대본영의 명에 따라 외무대신 시게미쓰 마모루[34]와 육군참모총장 우메즈 요시지로가 서명했다.
- 1948년의 대한민국 정부 수립도 8.15 광복의 3주년 날짜로 맞추었고 1974년 8월 15일 역사적인 대한민국의 첫 지하철인 서울 지하철 1호선(종로선) 개통식이 이날 개최된 것을 보면[35] 이날이 얼마나 의미있게 쓰였고 지금도 쓰이고 있는지는 분명하다.
- 일제의 패망으로 8월 15일 광복 당일 소련군은 이미 만주 전략 공세 작전으로 8월 9일부터 만주와 함경북도까지 들어온 상태였다. 일본의 항복 이후에도 소련군은 진군을 멈추지 않아 결과적으로 38선 이북의 한반도 북부 전체를 점령한다. 이 때문에 8월 15일 광복에 소련군이 경성역에 도착했다는 괴소문이 돌았다. 아무리 정예병력들이 다 빠지고 잡병이 되었다지만 만주의 70만명에 달하는 관동군이 옥음방송 이후 제대로 싸우지도 않고 소련군에게 7일만에 항복해버렸기에 미군도 소련군이 이렇게 빠른 속도로 남하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으며, 결국 한반도는 미군과 소련군의 협상으로 삼팔선으로 분단된다.
- 3.1 운동 이후로 태극기를 모조리 압수당한 지 26년이 지났기 때문에 대부분의 시민들은 대한제국 시기를 경험했던 노인들 또는 중장년층들이나 어렴풋한 기억으로 태극기를 그리고 청년층 아래로는 생전 처음 태극기를 보는 상황이었다. 애당초 태극기의 형태가 확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일제강점기가 이루어졌기 때문에 광복 당시 태극기 문양이 맞네 틀리네 하는 서술 자체는 의미가 없다. 독립문과 가까운데 살았던 지역 주민들은 독립문 태극기를 보고 태극기를 그렸지만 급한대로 기존에 있던 일장기에 아래쪽을 먹칠하고 사괘를 그려 태극기를 만들어 사용한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 참고로 다수는 아니었다지만 8.15 광복이 선언되고도 몇 달 동안 일본으로 돌아가지 않고 위와 같은 깽판을 치는 일본인들이 일부 존재했었다. 당시 조선에 있던 일본인들 중에는 "항복은 천황 폐하의 뜻이니 받아들일 수 있지만 조선 반도를 포기하는 것은 천황 폐하의 뜻이라도 받아들일 수 없다"는 극단적인 주장까지 외치는 이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이 정도로 극단적인 주장까지는 아니더라도 당시 일본에서는 조선 반도가 일본령에서 떨어져 나감에 따라 일본이 곡창 지대를 잃고 앞으로 주기적인 기아에 시달릴 수 있다는 비관적 전망이 제시되었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이건 틀린 전망이었다.[36]
- 부산광역시의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인 집중거주지역은 변천정(弁天町, 벤텐초), 금평정(琴平町, 고토히라초) 일대였는데, 매우 일본스러운 지명이었기 때문에 독립 이후 광복을 기념해 동네 이름을 '광복동(光復洞)'으로 바꾸었다.
- 위와 비슷한 사례로 일제강점기 경성부의 일본인 위주의 상업지역이었던 혼마치(本町)는 과거 왜적을 물리친 충무공 이순신에서 따 온 충무로로 바꾸었다. 그 외의 도시들도 대개 중심 번화가에는 본정 즉 혼마치(本町)라는 이름이 붙어 있었는데[37] 해방 후 각자 다른 이름으로 바뀌었다.[38]
- 광복을 기억하기 위해 광복절에 태어난 아기에게는 이름을 ‘광복’이라고 붙이기도 한다. 이런 경우는 광복절에 태어난 남자아이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 한국과 인도의 해방 날짜가 같다. 다만 요일은 한국 쪽이 수요일, 인도 쪽이 금요일로 달랐다. 인도네시아 역시 일제 패망으로 주권을 회복하였으나 독립선언문을 낭독한 8월 17일이 국경일이다.
- 일제강점기에 태어난 세대는 ‘해방됐을 때 몇 살’ 하는 식으로 본인의 나이를 세기도 했다.[39] 해당 세대는 대다수가 중학교 입학 시험을 치르고 중학교에 들어간 세대였다. 광복 당시 졸업을 앞둔 국민학교(초등학교) 6학년이었던 세대의 경우 1학년부터 6학년까지 일본어로만 수업을 듣다가 졸업 직전에 해방되는 바람에 한글을 배우느라 학교를 1년 더 다녔다는 증언도 있다.
- 1945년 8월 15일에 대한민국 법조계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사건이 있었다. 일제는 1년에 한 번씩 조선변호사시험을 실시해서 조선인을 대상으로 변호사를 뽑았다. 그리고 1945년도 조선변호사시험은 8월 14일부터 17일까지 4일간 치러질 예정이었다. 첫날 시험은 정상적으로 치러졌지만 두 번째 날인 8월 15일 시험은 오전만 치러지고 중단되었다. 응시생은 200명이었는데 이 중 106명은 변호사 자격을 달라고 항의하는 일이 벌어졌다. 일제는 처음에는 거부했지만 계속되는 항의에 지쳐 106명 전원에게 변호사 자격을 줘 버렸다. 그리고 이들 106명의 조선변호사가 대한민국 법조계의 근간이 되었다. 관련 기사
- 2021년 8월 15일 한국이 광복절 76주년을 맞이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아프가니스탄에서는 정부가 탈레반에게 항복하고 주권을 탈레반에게 빼앗겨 버렸다. 한국이 나라를 되찾은 날 아프가니스탄은 자유를 잃은 것.
- 북한 함경북도 지역 일부는 8월 15일 이전에 일제의 통치에서 벗어났다. 소련군이 8월 9일 대일 선전포고 이후 만주 전략 공세 작전에 따라 8월 11일 한반도로 진입해 웅기군, 나진시 등을 점령했기 때문이다. 이후 청진시에서 전투를 벌이던 중 일본이 항복했다. 하지만 북한 지역의 일이라 관심이 적기도 하고 북한 당국도 소련군의 자리에 김일성의 조선인민혁명군이라는 존재 자체가 허구인 군대를 대입하여 8.15 해방이 된 것이라고 선전하며 시기적으로도 8.15 광복과 며칠 정도밖에 차이가 나지 않기 때문에 중요하게 다뤄지는 경우는 별로 없고 8.15 광복으로 퉁쳐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 북한 청진, 나진 일대에 거주하던 피난민은 소련군의 남하를 기억하기도 했다. 그러나 38선 이북의 내부에서도 이런 나남 일대와 멀리 떨어진 곳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몰랐다고 한다. 평양에서는 해방 직후까지에도 일본 군경에 의해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를 외치는 사람들을 체포하는 일이 있었다고 한다. #
- 주로 남초 커뮤니티에서는 특정 팬덤의 커뮤니티 점령을 일제강점기에 비유하는 경우가 잦은데, 비슷하게 특정 사건으로 그 팬덤이 몰락한 경우 이 문서 4문단에 있는 사진과 함께 광복절이라고 표현하고 보통 OO강점기의 기간도 함께 적는다.
7. 대중매체에서
한국 근현대사 관련 매체에서도 필연적으로 자주 다루어지는 소재인데 대다수 매체는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외친다는 등의 소소한 고증 오류들이 있다.- 1981년 MBC 드라마 <제1공화국> 1회, 1998년 SBS 드라마 <삼김시대> 1회 등지에서 비중 있게 다루어졌다.
- 1999년 MBC 드라마 국희에서는 어린 국희가 장태화의 심부름으로 떡판 영업을 하다가 거리에 사람이 한 명도 없이 유난히 한적한 것에 뭔지 모를 위화감을 느끼고 멍해 있을 때 갑작스레 태극기를 들고 달려오는 시민들에 의해 넘어진다. 이때 어린 국희는 광복의 기쁨이 뭔지 알지 못해 어리둥절해 있었으나 다음 회에 역사적 의식이 제대로 된 장태화의 교육을 통해 우리 민족에게 광복이 얼마나 중대한 일인지 배우게 된다.
- 2003년 SBS 대하드라마 야인시대 50화에서 일제가 항복하고 광복을 맞는다. 서울 시내에서 사람들과 거지촌 거지들 등 온갖 사람들이 '해방조선' 깃발과 태극기를 들고 뛰어다니고 미와 경부는 일본의 항복 소식을 듣고 멘붕하여 그냥 경찰서에 남아 김두한을 만나 죽기를 택한다. 이때 김두한의 우미관 패거리도 독립 소식을 기뻐하는데 정진영은 기뻐하며 '드디어 모든 인민이 평등하게 잘 사는 독립 공화국이 만들어질 겁니다!'라고 말하며 이는 광복 후 좌우대립 속에서 정진영이 공산주의자로 빠져서 김두한과 대립하게 된다는 복선 중에서도 절정에 달한 복선이다.[40] 해당 회차에서 김두한이 뒤를 돌아보는 장면 다음에 주연 배우들이 바뀌면서 시청자들의 입장에선 2010년대 이후 '시청률 반토막나는 회차'로 손꼽히게 됐고 이는 MBC <라디오스타> 2020년 2월 5일 방영분에서 언급되었다.
- 2006년 KBS 대하사극 서울 1945 21회에서 8.15 해방 장면이 나왔다. 몽양 여운형이 엔도 총감을 만나 정치범 석방과 함께 건준의 설립을 선포하며 해방을 선포할 당시, 같은 친일파라도 일본의 패망을 미리 알고 준비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희비가 엇갈리는 장면이 나온다. 작중 이동우의 아버지 이인평은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 아들 이동우의 편지를 통해 일본의 패망을 눈치챈 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익명으로 돈을 보내고 영수증까지 받는 한편 친일행위에 관련된 덕산 구리광산 지분을 동업자 문정관에게 모조리 팔아치우고, 자신은 나이가 너무 많은데, 미국에 간 아들의 생사를 알 수 없게 됐다는 걸 구실로 마치 문석경의 앞날을 배려해주는 것처럼 이동우와 문석경의 혼담을 깼다. 덕분에 광복 당일 일가친척들과 옥음방송을 들을 당시 이인평은 예상했던 일이라 차분했지만, 문정관은 하늘이 무너진 것처럼 허탈해하며 눈물을 흘렸다. 훗날 문정관이 자살한 후 이인평은 최소한의 귀띔은 해줬어야 했다고 양심의 가책을 느낀다.
- 2015년 개봉된 영화 암살의 마지막 부분에 잠깐 나온다.
8. 관련 어록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며는
삼각산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한강물이 뒤집혀 용솟음칠 그날이,
이 목숨이 끊기기 전에 와주기만 하량이면,
나는 밤하늘에 날으는 까마귀같이
종로의 인경(人磬)을 머리로 들이받아 울리오리다.
두개골은 깨어져 산산조각 나도
기뻐서 죽사오매 오히려 무슨 한이 남으오리까
그날이 와서 오오 그날이 와서
육조(六曹) 앞 넓은 길[41]을 울며 뛰고 뒹굴어도
그래도 넘치는 기쁨에 가슴이 미어질 듯하거든
드는 칼로 이 몸의 가죽이라도 벗겨서
커다란 북을 만들어 둘쳐메고는
여러분의 행렬에 앞장을 서오리다.
우렁찬 그 소리를 한 번이라도 듣기만 하면
그 자리에 거꾸러져도 눈을 감겠소이다.
- 심훈, 〈그날이 오면〉[42]
삼각산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한강물이 뒤집혀 용솟음칠 그날이,
이 목숨이 끊기기 전에 와주기만 하량이면,
나는 밤하늘에 날으는 까마귀같이
종로의 인경(人磬)을 머리로 들이받아 울리오리다.
두개골은 깨어져 산산조각 나도
기뻐서 죽사오매 오히려 무슨 한이 남으오리까
그날이 와서 오오 그날이 와서
육조(六曹) 앞 넓은 길[41]을 울며 뛰고 뒹굴어도
그래도 넘치는 기쁨에 가슴이 미어질 듯하거든
드는 칼로 이 몸의 가죽이라도 벗겨서
커다란 북을 만들어 둘쳐메고는
여러분의 행렬에 앞장을 서오리다.
우렁찬 그 소리를 한 번이라도 듣기만 하면
그 자리에 거꾸러져도 눈을 감겠소이다.
- 심훈, 〈그날이 오면〉[42]
흙 다시 만져보자 바닷물도 춤을 춘다
기어이 보시려던 어른님 벗님 어찌하리
이날이 사십 년 뜨거운 피 엉긴 자취니
길이길이 지키세 길이길이 지키세
꿈엔들 잊을 건가 지난 일을 잊을 건가
다같이 복을 심어 잘 가꿔 길러 하늘 닿게
세계에 보람 될 거룩한 빛 예서 나리니
힘써 힘써 나가세 힘써 힘써 나가세
- 정인보 작사, 윤용하 작곡, 〈광복절 노래〉
기어이 보시려던 어른님 벗님 어찌하리
이날이 사십 년 뜨거운 피 엉긴 자취니
길이길이 지키세 길이길이 지키세
꿈엔들 잊을 건가 지난 일을 잊을 건가
다같이 복을 심어 잘 가꿔 길러 하늘 닿게
세계에 보람 될 거룩한 빛 예서 나리니
힘써 힘써 나가세 힘써 힘써 나가세
- 정인보 작사, 윤용하 작곡, 〈광복절 노래〉
조선의 대중들아 들어보아라
우렁차게 들려오는 해방의 날을
시위자가 울리는 발굽 소리와
미래를 고하는 아우성 소리
노동자와 농민들은 힘을 다하야
놈들에게 빼앗겼든 토지와 농장
의의 손으로 탈환하여라
제놈들의 힘이야 그 무엇이랴
- 임화 작사, 김순남 작곡 〈해방의 노래〉[43]
우렁차게 들려오는 해방의 날을
시위자가 울리는 발굽 소리와
미래를 고하는 아우성 소리
노동자와 농민들은 힘을 다하야
놈들에게 빼앗겼든 토지와 농장
의의 손으로 탈환하여라
제놈들의 힘이야 그 무엇이랴
- 임화 작사, 김순남 작곡 〈해방의 노래〉[43]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고
먼 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단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靑袍)를 입고 찾아 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 먹으면
두 손은 함뿍 적셔도 좋으련.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
-이육사〈청포도〉[44]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고
먼 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단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靑袍)를 입고 찾아 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 먹으면
두 손은 함뿍 적셔도 좋으련.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
-이육사〈청포도〉[44]
나는 이 소식을 들을 때 희소식이라기보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갈라지는 느낌이었다. 몇 년을 애써서 참전을 준비했다. 산동반도에 미국의 잠수함을 배치하여 서안훈련소와 부양훈련소에서 훈련받은 청년들을 조직적 계획적으로 각종 비밀무기와 무전기를 휴대시켜 본국으로 침투케 할 계획이었다.[45] 국내 요소에서 각종 공작을 개시하여 인심을 선동하며, 무전으로 통지하여 비행기로 무기를 운반해서 사용하기로 미국육군성과 긴밀한 합작을 이루었는데, 한 번도 실시하지 못하고 왜적이 항복한 것이다. 이제껏 해온 노력이 아깝고 앞 일에 걱정이었다.
- 백범 김구가 일본의 항복 당시 상황을 술회하며.[46]
- 백범 김구가 일본의 항복 당시 상황을 술회하며.[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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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일본인들이 한반도에서 쫓겨나기 전까지 한반도에는 40만 명이 넘는 일본인들이 있었고, 소수지만 화교들도 존재했다.[2] 대한민국 건국 이전에 한민족은 조선민족이라고 불렸다.[3] 대한민국 정부 수립은 광복 3년 후에 일어난 사건으로 광복과는 다른 이야기다.[4] 조선 거주 일본인에 대한 조선인들의 증오가 극에 달해 있었던 상태였기 때문에 일본인들의 두려움 역시 매우 컸다. 자세한 건 히키아게샤 참조.[5] 1.전국적으로 정치범, 경제범을 즉시 석방할 것. 2.서울의 3개월 분 식량을 확보할 것. 3.치안 유지와 건국 운동을 위한 정치 운동에 대하여 절대로 간섭하지 말 것. 4.학생과 청년을 조직, 훈련하는 데 대하여 간섭하지 말 것. 5. 노동자와 농민을 건국 사업에 동원하는 데 대하여 절대로 간섭하지 말 것.[6] 총독부는 8월 17일 정도면 소련군이 경성에 진주할 것이라고 예상했으나 당시 소련군은 청진에서 일본군과 한창 전투 중이었다. 일본군이 예상보다 격렬하게 저항하는 바람에 청진에서의 교전은 8월 18일이 되어서야 끝났다.[7] 자세한 방송 내용에 대해서는 옥음방송 참고.[8] 제2차 세계 대전 이전까지의 일본에서는 천황의 조서, 칙명 등등 온갖 공문서에 문어체가 사용되었고 항복 발표 방송도 마찬가지였기에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들이 소수였다.[9] 그나마 매일신보 등의 신문 매체에는 해당 조서의 원문이 실려 있었기에 한문을 읽을 수 있는 지식인은 표면적인 내용을 한결 수월하게 알아들을 수 있었다.[10] 하지만 조서는 물론이고 당시 신문에 실린 아베 노부유키 총독의 논고 역시 장황하고 암호문 같은 문체로 쓰인 탓에(아베 총독의 논고 내용을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지금껏 30여년 간 일본과 조선은 한 몸으로 지내 왔고 전쟁에서도 함께 싸우며 고생해온 사이였다. 그랬는데 이제 전쟁을 그만두게 되었으니, 지금 이 소식이 충격적일 것임은 모르는 바 아니나, 경거망동하여 동족상잔의 비극을 일으키지 말라." 그의 경고가 무색하게도 방송 하루 만에 일본의 항복 소식이 조선 전역에 퍼지면서 조선 전역의 일본인들은 가진 것을 대부분 잃은 채로 쫓겨나 일본으로 돌아가야 했다.) 행간의 의미를 바로 이해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11] 따라서 위 방송을 전부 이해하는 조선인이 있었다 하더라도 종전이 당장 조선의 일제강점기가 끝나고 광복을 뜻한다는 것을 알기는 어려웠다. 그리고 이런 방송을 했다고 해서 15일에 바로 일본군들이 일본으로 철수하여 빠져나간 것도 당연히 아니였다.[12] 그렇기 때문에 그날 바로 태극기를 들고 쏟아져 나와 만세를 부르며 환호한 것은 아니었다. 거기다 광복 당일에는 히로시마에서 원자폭탄에 피폭사당한 이우 왕자의 장례식이 거행된 것도 한몫했다.[13]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8월 15일 당일에 저렇게 사람들이 모여들었을 가능성은 거의 희박하며 이후의 사진일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당시 8월 15일 경성운동장에서 이우 왕자의 장례식이 있어 사람들이 이미 많이 모였었다. 원래는 12시에 치룰러했으나 일본항복으로 오후 5시로 미뤄진것이다. 그리고 사진에 태극기하나만 보이는점도 있다. 사진의 태극기의 태극 무늬가 비정상적으로 큰데 일장기에 덧칠한 태극기다.[14] 한국어 방송 주인공은 황성수 전 국회부의장이다.[15] 위의 사진은 그날 아침 9시 마포형무소에서 출소한 독립운동가들이 광복을 환호하는 모습이며 이들 중 기를 높이 든 사람이 서대문형무소 출소자이자 단파방송 연락운동 관련자인 성기석(1920~1990)이다. 저 사진은 금성출판사의 한국근현대사 교과서의 표지를 장식하고 있다.[16] 지금의 서울(경기도 서울시로 바뀐 건 일본이 제2차 세계 대전에 완전히 항복서를 적은 9월 2일이다.)[17] 현 광주광역시. 아직까진 광역시(직할시)로 승격되기 전이기에 전남 광주가 맞다.[18] 조선도 아니고 한국도 아닌 "'고려독립축하"'라는 문구가 보인다.[19] 그런데 이 연설은 중간에 소련군이 서울역에 도착했다는 이상한 소문이 나면서(소련군이 북위 38도 선 이하로 내려오지 않기로 미군과 미리 합의되어 있던 것은 차처하더라도, 당시 소련군은 한반도에 발을 디디긴 했지만 가장 깊숙이 진격한 병력도 서울은커녕 청진에서 일본군과 격렬한 전투 중이었다.)군중들이 서울역으로 몰려가면서 중단되었다. 소련군의 경성 입성 소문 헛소문의 실상은 조선인들의 습격을 두려워한 조선총독부 관료들이 변절자들을 동원해서 벌였던 공작이었다. #[20] 강령은 다음과 같다. 1.우리는 완전한 독립국가의 건설을 기함. 2. 우리는 전 민족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기본 요구를 실현할 수 있는 민주주의적 정권의 수립을 기함, 3. 우리는 일시적 과도기에 있어서 국내 질서를 자주적으로 유지하며 대중생활의 확보를 기함.[21] 이 소식을 들은 조선인들은 거리로 쏟아져나와 며칠간 광복을 환호하며 태극기를 흔들었고 집집마다 태극기를 게양했다.[22] 그러나 조선총독부는 본국의 지시로 건준에 내주기로 되어 있었던 행정권, 치안권 등을 제대로 이양하지 않았고 조선군을 동원해 행정 기관들을 봉쇄하여 이로 인해 행정의 공백 혹은 중첩이 생기기도 했으며 결국 행정권 등은 미군정에 이양되었다.[23] 상술했듯 조선인들의 보복이 매우 우려되는 상황이었다. 실제로 시골의 몇몇 일본인들은 보복을 당했다.[24] 여러분[25] 한 마디 한 행동[26] 편안함과 근심[27] 깊이 반성함[28] 그런데 몇몇 조선 출생 일본인들이나 처분할 재산이 많은 일본인들은 조선 땅을 고향으로 생각했기에 일본으로 돌아가는 걸 오히려 꺼렸다고도 한다. 실제로 아예 눌러산 사람들도 있다.[29] 의외로 전국이나 남쪽에서는 그리 크지 않았으며 이북에서 좀 더 많았다고 한다.[30] 조선을 떠나며라는 책에 당시 상황이 소상히 나왔다. 특히 퉁허사건(通化事件)이 유명하다.[31] 광복 후 한참이 지난 9월 미군 진주 때도 미군을 본다고 모여든 구경꾼들을 통제하던 일제 경찰이 구경꾼 조선인 2명을 현장 사살하기도 했다.[32] 8.15 광복을 '8.15 해방'이라고도 부르는데 한국 정치권이나 언론에서는 광복이라는 표현을 주로 사용하는 편이다. 한민족만의 힘으로 쟁취한 게 아니라 연합국의 도움으로 된 측면이 있기에 (미국과 소련의 연합군에 의한) 해방이 더 알맞는 용어라는 시각도 있다. 그러나 임시정부의 문서와 소련 붕괴 이후 소련의 기밀문서들이 정확하게 공개되면서 특정 시기, 외국의 특정 정부만을 위한 '해방' 대신 '광복'이라는 표현이 일제강점기 독립을 위한 모든 기간을 포괄하는 역사와 대한민국 임시정부 한국인의 민족자결적 의미를 담기에 더 적절하다고 여겨지고 있다. 즉 광복이라는 표현이 역사성과 민족성을 반영한 표현이다.[33] 1984년에 "전몰자를 추도하고 평화를 기념하는 날" 로 이름이 바뀌었으나 여전히 일반인들은 종전기념일이라고 부른다.[34] 윤봉길의 의거 때문에 다리 한쪽을 잃어 절뚝거리며 갑판에 올라 서명했다.[35] 하지만 이날 육영수 여사가 사망하는 박정희 저격 미수 사건이 일어났다. 이때 광복절 행사에 합창단원으로 참석했던 성동여자실업고등학교 2학년 장봉화 양도 억울하게 사망했다.[36] 이는 일본 제국 시절에 몇 차례 벌어졌던 쌀 소동들의 영향이 크다고 보인다. 실제로 이들 중 제일 사회적 피해가 컸던 1918년 쌀 소동을 예시로 들자면 서기 1918년에 벌어진 일이니 일본 제국의 국력이 쇠락하기 전, 즉 아직 영일동맹이 깨지지 않고 굳건했을 때였는데도 벌어진 사태다. 당시 일본인들의 입장에서는 조선 반도 독립이라는 대사건까지 벌어지고 나면 쌀 소동이 앞으로 아예 그냥 지속적으로 있을 것이라고 우려했을 만도 하다.[37] 지금도 일본에서는 도시 중심가를 이렇게 부른다.[38] 예) 대전 본정통(本町通)→인효로(仁孝路)[39] 나이가 더 많은 경우는 ‘3.1 운동 때 몇 살’ 하는 식으로도 나이를 셌으나 이런 경우는 대부분이 고인이다. 학교를 다녔다면 '어느 학교 몇 학년 때 해방됐다.'는 말을 쓰기도 한다.[40] 광복이 한여름 8월에 이루어진 것과 달리 이 장면 촬영은 한겨울에 이루어진 탓에 거리에서 대한 독립 만세를 부르는 사람들이 겨울옷을 입고 목도리를 두르고 있으며 입에서 입김이 나오는 것도 포인트.[41] 육조 건물들은 일본에 의해 헐렸다.[42] 안타깝게도 심훈은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하고 9년 전인 1936년 9월 16일 사망했다.[43] 들어라 만국의 노동자와 가사가 거의 비슷하다.[44] 불행히도 이육사 역시 광복을 보지 못하고 사망하였다. 1944년 1월 16일, 광복을 1년 앞둔 때였다.[45] 이 내용은 김구가 오판했거나 과장된 내용으로 봐야 한다. 당시 미국은 오키나와까지 점령한 상태여서 바로 일본 본토를 공격할 작정이었지 중국 대륙이나 한반도는 논외였다. 자세한 사항은 몰락 작전 참조.[46] 이후 백범의 우려대로 광복 직후 눌러온 문제가 터지고 미소 신탁통치 오보사건으로 인해 뒤숭숭해졌으며 결국 최악의 동족 상잔으로 나타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