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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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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a52a2a><colcolor=#fff> 소속 <colbgcolor=#fff,#1c1d1f>삼도수군통제사 · 선무공신
가족 아내 방수진
장남 이회, 차남 이예, 삼남 이면
맏형 이희신의 아들 이완 · 딸의 시아버지 홍가신
먼 친척 형 이광 · 19촌 이이
후손 (이봉상 · 그 외 후손)
관련 인물 친구 류성룡 · 류성룡의 제자 허균
육군 동료 (이일 · 신립 · 권율 · 이경록)
수군 동료, 부하 (이억기 · 권준 · 김돌손 · 김완 · 김억추 · 나대용 · 무의공 이순신 · 배흥립 · 안위 · 오계적 · 이영남 · 이운룡 · 정운 · 준사 · 최호 · 송희립 · 우치적 · 어영담 · 황세득 · 송여종 · 김인영 · 신호 · 원균 · 배설 · 이언량 · 류형 · 진무성)
주군 (선조 · 선조비 의인왕후 · 분조 광해군)
생애 생애 · 전투 관련 · 여담
관련 장소 이순신이 태어난 곳 한양 건천동 · 이순신 일가의 생가 아산
이순신의 묘소 장군묘 · 이순신의 사당 현충사
명량해전이 벌어진 곳 명량수도 · 노량해전이 벌어진 곳 남해 관음포
관련 사건 탄신일 · 니탕개의 난 · 녹둔도 전투 시전부락 전투 · 이몽학의 난 · 백의종군
임진왜란, 정유재란 해전 (옥포 해전 · 합포 해전/적진포 해전 · 사천 해전 · 당포 해전 · 당항포 해전 · 율포 해전 · 한산도 대첩 · 안골포 해전 · 장림포 해전 · 절영도 해전 · 초량목 해전 · 부산포 해전 · 웅포 해전 · 장문포 해전 · 명량 해전 · 절이도 해전 · 왜교성 전투 · 노량 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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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물 성웅 이순신(1962) · 성웅 이순신(1971) · 난중일기(영화) · 칼의 노래 · 천군(영화) · 명량 · 한산: 용의 출현 · 노량: 죽음의 바다 · 칼의 노래(뮤지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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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a52a2a><colcolor=#fff>
조선 삼도 수군통제사 증 영의정
덕풍부원군(德豐府院君) 충무공(忠武公)
이순신
李舜臣 | Yi Sunsin
[1]
파일:이순신 정부표준영정.png
이순신 표준 영정[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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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이순신 영정(조선시대).jpg
조선 시대에 그려진 이순신의 영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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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545년 4월 28일[3]
(인종 원년, 음력 윤3월 8일)
한성부 건천동 이정 자택
(現 서울특별시 중구 을지로18길 19[지번주소])
사망 1598년 12월 16일 (향년 53세)
(선조 31년, 음력 11월 19일)
경상도 남해현 군내면 관음포 인근 판옥선 선상
(現 경상남도 남해군 고현면 차면리)
전사(흉부 유탄[5]피격)
묘소 충청남도 아산시 음봉면 고룡산로 12-37
(충무공 이순신 장군묘)
본관 덕수 이씨[6]
여해(汝諧)[7]
기계(器溪), 덕암(德巖)
재임 기간 전라도 정읍현 현감 겸 태인현 현감
1590년 1월 6일 ~ 1591년 2월 24일
(음력 1589년 12월 1일 ~ 1591년 2월 1일)[8]
전라좌도 수군절도사[9]
1591년 3월 8일 ~ 1597년 4월 12일
(음력 1591년 2월 13일 ~ 1597년 2월 26일)
1597년 9월 3일 ~ 1598년 12월 16일
(음력 1597년 7월 22일 ~ 1598년 11월 19일)
전라좌도 수군절도사 겸 삼도 수군통제사
1593년 8월 26일 ~ 1597년 3월 14일
(음력 1593년 8월 1일 ~ 1597년 1월 27일)
1597년 9월 3일 ~ 1598년 12월 16일
(음력 1597년 7월 22일 ~ 1598년 11월 19일)
서명 파일:이순신 서명.svg파일:이순신 수결 흰색.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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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a52a2a><colcolor=#fff> 부모 부친 덕연부원군 이정 (李貞, 1511 - 1583)
모친 초계 변씨 (草溪 卞氏, 1515 - 1597)
형제자매 첫째 형 이희신 (李羲臣, 1535 - 1587)
둘째 형 이요신 (李堯臣, 1542 - 1580)
막냇동생 이우신 (李禹臣, ? - ?)
배우자 본처 방수진 (方守震, 1547 - 17세기 초)
첩 해주 오씨 (海州 吳氏), 부안댁
자녀 적장남 이회 (李薈, 1567 - 1625)
적차남 이예(李䓲, 1571 - ?)[10]
적삼남 이면 (李葂, 1577 - 1597)
적장녀 덕수 이씨 (? - ?)
서장남 이훈 (李薰, ? - ?)
서차남 이신 (李藎, ? - ?)
서장녀 덕수 이씨 (? - ?)
서차녀 덕수 이씨 (? - ?)[11]
학력 무과 식년시 병과 급제 (1576년 4월 30일)[12]
종교 유교(성리학)
신장 6척 (약187cm)[13]
붕당

[[무소속(정치)|
무소속
]][14]
경력 한성부 권지 훈련원 봉사[15](1576)
함경도 동구비보 권관(1576)
한성부 훈련원 봉사(1579)
충청도 해미읍성 병마절도사 휘하 군관(1579)
전라도 고흥 발포 수군만호(1581)
함경도 건원보 권관(1583)
한성부 훈련원 참군(1583)
사복시 주부(1586)
함경도 조산보 만호(1586)
전라도 조방장(1589)
한성부 선전관(1589)
전라도 정읍현 현감(1589)
전라도 강진현 가리포진 수군첨절제사(1591)
수군절도사 전라좌도 수사(1591)
삼도 수군통제사(1593, 1597)
공훈 효충장의적의협력 선무공신(效忠仗義迪毅協力宣武功臣, 1604)
시호 충무(忠武)
봉호 덕풍부원군(德豐府院君)
추증 의정부 영의정(議政府領議政)[16]
저서 난중일기(亂中日記)》
충무공이순신전서(忠武公李舜臣全書)》
《임진장초(壬辰狀草)》
}}}}}}}}}

1. 개요2. 행적과 위상3. 역임 관작4. 용모5. 생애
5.1. 전투 관련5.2. 연표
5.2.1. 임진왜란 이전5.2.2. 임진왜란5.2.3. 사후
6. 가족
6.1. 부모6.2. 부인
6.2.1. 첩
6.3. 형제, 자녀6.4. 후손
7. 인간관계8. 묘소9. 어록 및 장계10. 평가11. 의문점12. 대중매체에서13. 관련 영상14. 관련 단체15. 관련 문서16. 여담17.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ruby(戰方急, ruby=전 방 급)] [ruby(愼勿言我死, ruby=신 물 언 아 사)]
싸움이 급하니, 내가 죽었다는 말을 하지 마라.
16세기조선명장이자 구국 영웅. 임진왜란 및 정유재란 당시 조선 수군을 지휘했던 제독이었다. 시호충무공이다.

2. 행적과 위상

우리는 영예로운 충무공의 후예이다.
대한민국 해군의 다짐
한국 민족의 역사는 이웃 민족의 침략에 항쟁한 고난의 역사다. 그러나 매양 그 고난을 헤치고 이겨 낸 극복의 역사이기도 하다. 이 극복의 역사를 통하여 하나의 힘이 움직였음을 볼 수 있으니 그 힘이 바로 민족을 죽음 속에서도 건져낼 수 있는 민족 정기요 이 정기의 가장 대표적인 발양자가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시다.

서기 1545년 4월 28일 음력 3월초 8일 서울에서 탄생,
1598년 12월 16일 음력 11월 19일 노량에서 순직,
54년 동안의 일생을 통해 오직 정의에 살고 정의에 죽은 이다.

특히 1592년으로부터 7년 동안 싸운 저 유명한 임진란 때 왜적의 침략으로 종사는 위태롭고 민생은 도탄에 빠졌을 적에 쓰러지는 국가, 민족의 운명을 한 손으로 바로잡아 일으켰으니 창생의 생명을 살리고 역사의 명맥을 잇게 한 크신 공로야말로 천추에 사라지지 않을 것이요 만대에 겨레의 제사를 받으리라.

비록 육신의 몸은 마지막 해전에서 최후의 피를 흘렸을지라도 꽃다운 혼은 저 태양이 되어 조국과 함께 길이 살아 계실 것이니 과연 우리 역사의 면류관이요 또 빛과 힘과 자랑이 아니겠느냐.

아! 님이 함께 계시는 이 나라여 복이 있으라.
광화문 광장에 설치된 이순신 장군 동상의 건립기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수많은 국민들이 존경과 흠모의 대상으로 삼으며, 그 존재만으로 애국심자부심을 갖게 해주는 한국사의 대표적인 구국 영웅이다. 세종대왕과 함께 한국사 최고의 위인으로 높은 위상과 명성을 자랑하는 인물로,[17] 대한민국 수도 서울의 중심 광화문 광장에 세워져 있는 대형 동상의 주인공이다.[18] 또한 이순신의 이름을 딴 대교, 학교, 함선과 거리 등이 조성되어 있어서 한국인에게 이름이 가장 많이 언급되는 역사적 인물 중 하나이기도 하다.

국내를 넘어 세계적으로 살펴보아도 이름을 떨친 호레이쇼 넬슨 같은 명장들은 모두 정부의 많은 지원을 받고 전쟁에서 승리했다. 그러나 이순신은 정부와 외부에서 아무런 지원도 받지 못한 채 오히려 반대로 이순신이 정부와 명나라 육군에게 식량, 무기, 종이, 부채, 조총 등 각종 물자와 진상품을 지원해야 하는 것도 모자라 몰려드는 피난민들의 생계까지 직접 돌보면서 힘겹고 외롭게 전쟁을 수행해야 했다. 심지어 권율 휘하의 육군이 허락도 없이 이순신이 어렵게 마련한 수군이 먹을 식량을 시도 때도 없이 징발하고 수군 병력을 마음대로 빼내어 육군으로 편입시키는 그야말로 최악의 상황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오직 자신의 노력만으로 자급자족했으며, 휴전기 당시 수군 기지에 전염병이 크게 퍼져 막대한 병력 손실을 입었음에도 아픈 몸을 이끌고 군비를 꾸준히 확장하여 최강함대를 만들었다. 그리하여 7년간 수군을 이끌고 뛰어난 지략과 용맹함을 발휘하여 모든 전투에서 승리한 끝에 군함을 단 한 척도 잃지 않고 23전 23승 불패의 신화라는 역사상 유례가 없는 전무후무기적을 이뤄냈다.

이순신은 제해권을 장악하여 전쟁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적의 보급을 완벽히 차단함으로써 전쟁의 흐름 자체를 바꿔 망국으로 치닫는 나라를 구해낸 불세출의 명장이다.[19] 특히 임진왜란 초기 2차 출동 당시 첫 해전이었던 사천 해전에서 전투를 지휘하다가 적이 쏜 총탄에 왼쪽 어깨를 관통당해 중상을 입는 큰 부상을 당하여 피가 발꿈치까지 흐르는 상황임에도 전투가 끝날 때까지 고통스러운 기색도 없이 아무렇지 않은 듯 태연하게 지휘하여 적의 함대를 전멸시켰으며, 칼로 살을 찢어 박혀 있는 탄환을 제거한 뒤 부하들과 평소처럼 담소를 나눴다고 한다. 명량에서 단 12척의 함대로 일본군을 대파하여 나라를 구했으며 임진왜란 마지막 전투 노량 해전에서 명나라 수군도독 진린과 함께 조선에서 철수하는 일본군 함대 500척을 맞아 최후의 일전을 펼쳤다. 이 해전에서 이순신은 바람을 이용한 화공 전술을 펼쳐 적선 200척을 격파하고 100척을 포획하였으며 일본군 수만 명을 섬멸하는 큰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날이 밝아 올 무렵 적이 쏜 총탄에 맞아 장렬한 최후를 맞았다.

이순신은 인간이 발휘할 수 있는 능력의 극한을 펼친 인물이었다. 크나큰 공을 세웠기에 융숭한 대접을 받았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사실은 국가와 의심이 많고 시기 질투가 강했던 임금에게 철저하게 버림받았고 원균의 모함으로 억울하게 파직되어 고문을 당하고 옥살이를 했으며, 피땀 흘려 키워놓은 군대가 원균칠천량 해전으로 완전히 궤멸되고, 어머니와 막내아들을 잇따라 잃는 등, 인간으로서 도저히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비참하고 절망적인 고난과 역경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삶을 살았지만, 그 모든 것을 이겨내고 마침내 난을 평정한 뒤 홀연히 성스러운 자태를 감춰서 그런지 대한민국에서는 단지 영웅이라 부르기에는 부족할 정도로 너무나 위대한 인물이기에 성웅이라는 칭호로 불리는 유일한 위인이다. 즉 능력도 인격도 최고인데 인생마저 끝없는 고난의 서사, 그럼에도 꺾이지 않은 불굴의 정신과 의지, 그리고 모든 과업을 완수하자 운명처럼 사라진, 영웅 소설의 주인공 같은 삶을 실제로 살았기에 추앙받는 것이다.

조선 후기 효종, 숙종, 정조도 이순신을 매우 존경했다고 한다.[20]

일본군의 조선 침략 당시 3주 만에 수도 한양, 2개월 만에 평양을 함락시키는 등 전세가 일본군에게 압도적으로 유리하게 전개되던 차에 수군을 거느리고 전투마다 앞장서서 진두지휘하며 뛰어난 지략과 용맹함을 발휘하여 승리했고, 이를 통해 일본군의 북진 중단, 명나라군 파병 등에 일조하며 참화 속의 조선을 구해내고 침략군인 일본군의 야욕을 완전히 꺾어버린 명장으로 평가받는 인물이다. 군공 이외에도 휘하 장병과 자기 사람들을 원리 원칙에 기반해 철두철미하게 관리 및 대우하고 상업에도 종사하여 자급자족을 이루어 군을 자립시켰으며, 왜란 이전에도 이이 등의 고위 관료와 접선을 수차례 거절하거나 축재를 하지 않았고, 현감 재임기에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푸는 등 지휘관이요 목민관으로서 매우 모범적인 관리상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수많은 고난과 핍박을 겪고도 마지막까지 직접 출전해 분투한 철인의 면모까지 갖춰, 조선 중기의 명장을 넘어 한국사 최고 위인의 반열까지 오른 인물이다. 저서로 난중일기, 서간첩, 이충무공전서, 전시 장계(보고서)를 모은 것으로 임진장초, 충민공계초가 있다.

생전부터 그를 사적으로 알고 있던 인근 백성이나 군졸, 일부 장수와 재상들에게 뛰어난 인물로 평가받았고 안면이 없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명성이 제법 있었으며, 전사 소식이 알려지자 많은 이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크게 슬퍼했다고 전해진다. 사후 조정은 관직을 추증했고 선비들은 찬양 시(詩)를 지었으며 백성들은 추모비를 세우는 등, 이순신은 오래도록 많은 추앙을 받아왔다. 이는 일제 강점기를 거쳐 현대에도 마찬가지로, 이순신은 대한민국 국민들이 가장 존경하는 위인 중 한 명으로 꼽히며 앞서 말했듯이 현대 한국에서 성웅이라는 최상급 수사가 이름 앞에 붙어도 어떤 이의도 제기받지 않는,[21] 세종과 함께 한국인에게 가장 사랑받는 조선사 양대 위인이다. 가장 존경하는 위인을 묻는 설문 조사에서도 세종 대왕과 1, 2위를 다투며[22] 충무공이라는 시호도 실제로는 김시민과 같은 여러 장수들이 함께 받은 시호이지만 현대 한국인들은 대부분[23] 이순신의 시호로 인식한다. 일반적으로 이러한 평가는 정치적인 성향이 영향을 끼치기 마련인데 이순신은 그런 부분에서도 거의 영향을 받지 않는, 말 그대로 민족을 구한 영웅으로 존경받는 인물이라 할 수 있다.

몇몇 전투는 너무나 비현실적인 공적을 세워 어떻게 이뤄낸 것인지 아직도 학설이 분분할 정도이다.[24] 가령 명량 해전 초반부에서 물살이 바뀌기 전까지 약 2시간가량 이순신은 대장선 1척으로 일본 측 함선 133척과 정면으로 붙어 하나하나 박살 내고 있었다.[25] 분명히 조선 측과 일본 측의 풍부한 사료로 교차 검증이 가능한 기록임에도 너무 믿어지지 않아서 사람들이 오히려 왜곡된 유사 역사학자들의 주장을 믿고 마는 것이다.

이처럼 도저히 말이 안 되는 전투 수행 능력이 익히 알려져 있지만 기록을 보면 전략적인 식견 자체가 압도적으로 뛰어난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다. 당시 이순신의 지휘를 받는 조선 수군의 총전력은 일본군보다 열세였지만 대부분의 전투를 수적 우위를 점한 채로 압승을 거두며 심할 때는 이러한 각개 격파가 하루 동안 5~6번이 일어나 그 전투들만으로 출정한 조선 수군의 전력을 넘어서는 일본군을 수장해 버리는 일도 있었다. 기본적으로 연합 함대를 중시하여 항상 만전의 화력을 갖추고 싸우는 이순신 휘하의 조선 수군이 적보다 열세인 상황에서 전투를 벌인 때는 전력의 열세를 극복할 만한 완벽한 함정을 팠거나(한산도 대첩),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정치적 이유로 출정해야 했거나(장문포 해전), 그 이상 전투를 피하면 나라가 망하는 때(명량 대첩)뿐이었다.

이순신은 함대 설계 및 훈련, 운영에도 탁월한 능력을 보였다. 전 국토가 전쟁의 화마로 초토화되는 바람에 교지를 쓰거나 기록을 남길 종이마저 부족했던 중앙 정부에게 종이를 바치기도 했다.[26] 남해안 여러 섬에 둔전(屯田)을 만들어 식량을 자급자족했으며 어로 활동으로 군량과 군비를 충당하기도 했다. 당시에는 기피 대상이었던 수군의 병력 유지를 위해 직접 발벗고 뛰어다닌 결과 1만 명 이상의 병력을 중앙 정부의 지원 없이 유지했다. 이순신이 중앙 정부에 무언가를 요구했던 것은 역병으로 병사들이 죽어나갈 때 의원을 보내달라는 것과 화포를 만들 철이 부족하여 조정에 철을 조달해 줄 수 없는지에 대해서 장계를 올린 것 정도다. 원균이 5천 명의 병력을 지원받고도 칠천량 해전에서 대패한 것과는 너무나 대조적이다. 특히 자기 휘하로 피난 온 백성들을 잘 보살피고 다스려 칭송을 받으며 목민관으로서도 훌륭한 면모를 보였다. 다방면으로 뛰어난 업적과 충성심 덕에 적국이었던 일본조차 사후 연구 대상으로 삼기도 했다.

이 밖에도 독보적인 정직함과 청렴함[27]과 공정함도 현대 한국인들에게 매우 존경받는 이유 중 하나다. 이순신은 장수이자 목민관으로서 그야말로 공명정대했는데, 백성들과 일개 병졸부터 시작해서 승려노비까지 하나 하나 그들의 이름과 그들이 이룩한 공을 빠짐없이 세세히 적어 장계를 올려 포상을 받게 했으며, 여차할 땐 자신의 공적을 부하들에게 돌려주는 경우도 허다했다.[28] 허나 자기 휘하 사람들을 마냥 너그럽게 대했냐고 했다면 그것도 아닌데, 훈련을 게을리하거나 군법을 어기는 병사들을 매우 엄히 다스렸기에 조선 수군이 제일 무서워하는 것은 왜군이 아닌 이순신[29]이었다는 평가도 있을 정도다. 고로 이순신은 당근과 채찍을 정확히 다루어 부하들을 부렸다고 할 수 있겠다. 또 이런 사람이 임진왜란과 같은 전란기에 때맞춰 등장하여 경이로운 활약상을 남긴 것도 기적에 가까운 일이 되겠다. 만약 이순신 같은 인물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조선은 수륙 협공을 통하여 일본에게 순식간에 먹혔을 것이고, 이후 명과 일본의 땅따먹기 전면전으로 조선은 말 그대로 가루가 됐을 것이다.

이렇듯 이순신을 뜯어 보자면 기승전결이 모두 완벽해 '존경하지 않을 이유를 찾는 게 더 어렵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이순신은 완벽한 인물이었고, 이러한 덕에 400여 년 가까이 한민족이 존경하는 인물 순위에서 부동의 1위를 굳건히 지키고 있다.

3. 역임 관작




상기된 80여 자의 기나긴 직위명들을 현대식으로 풀이하자면, 이 충무공은 생전에 대한민국 해군참모총장으로서 장관급의 명예직에 상당하는 의전 예우를 받은 뒤[44], 해군작전사령관함대사령관을 겸직하고, 미국 대통령으로부터도 미 해군 원수직을 수여받은 셈이 된다. 나아가 사후에는 대한민국장과 태극무공훈장을 수여받았고, 총리급의 명예직과 예우를 수여받은 것이 된다. 훈장의 경우에는 다소 애매한 비유이지만[45], 수여된 관직들의 경우 일반인들이 쉽게 인식하는 현재의 관제로 비교하자면 위와 같은 셈이다.

여기에 덧붙이자면, 미 해군 대원수직[46]을 동시에 받은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즉 군사적 업적을 인정 받아 예우에서 밀리지만 미국에서 명예 원수로 대우하는 셈이고, 죽은 뒤 200년 가까이 되어서 국무총리를 부여받은 격이다.[47]

3.1. 장군?

생전에 이순신이 계급이 낮을 때 장군이라고 불린 적은 있었겠지만, 이순신이 수군을 지휘하던 시절이나 최종 계급을 생각하면 장군이라고 부르는 것은 엄밀히 따지면 틀린 호칭이다. 상기된 직책들 가운데 가장 품계가 낮은 직책이 전라좌도 수군절도사인데, 수군절도사면 절충장군 품계로 장군이라는 글자가 들어가는 품계 중 최상의 품계이며, 또한 당상관에 해당되었다. 당연히 조선시대에 정3품 당상관 이상의 관리에게, 통제사또영감이라고 부르지, 장군이라는 호칭을 쓰는 일은 없었다.[48] 게다가 삼도 수군통제사 자리는 종2품 직으로 가의/가선대부 품계가 필요했는데 이는 엄연히 영감이라고 불리는 문반 품계였으니 장군이라고 부르면 모욕이었다.

시대적으로도 장군이라는 명칭은 맞지 않고, 당시 기준으로 정3품부터는 군대를 전역하고 문관으로서 올라가야 했기에 더 이상 장군이 아니라 사또나 영감 그리고 정2품부터는 대감이라고 불러야 한다. 따라서 수사또, 수사 영감, 통제 사또, 통제사 영감, 통상 대감(정헌대부 시절), 종3품 이하일 땐 전부 나리(나으리) 등으로 부르는 게 올바른 역사적 고증이다. 이순신/평가 문서로.

3.2. 제독?

현대 기준에서는 제독 혹은 원수라고 부르는 것이 더 적절하다. 실제로 대한민국 해군이나 관련 관계자들은 현대에 육군 계열의 칭호로 쓰이는 장군보다는 해군이 사용하는 제독을 붙여서 이순신 제독이라고 부르는 편이다. 현대 대한민국 국군에서 대한민국 육군 및 육군에서 파생된 대한민국 공군장성급 장교는 장군, 해군 장성은 제독 칭호를 쓰기 때문이다. '해군의 자존심 문제'라는 건 이진삼 의원과 해군 간의 갈등 사례에서 알 수 있듯 단순한 농담이 아니다. 육군 일색인 국군의 상황으로 인해 대한민국 해군은 '제독' 칭호 고수에 민감한 편이다. 외국에서도 이순신 같은 해군 지휘관은 철저히 제독(Admiral)이라고 붙여 부른다.[49]

그리고 명칭의 역사적 유래와 직무 유사성의 측면에서 따져본다면, 충무공의 최종 직책인 삼도 수군통제사는 현대의 해군 원수에 해당한다고 보는 것이 적절하다. 영국식 영어에서 해군 원수를 지칭하는 '함대 제독'[50]의 기원 자체가 사실상 영국 해군의 삼도 수군통제사였기 때문이다. 이 관직은 14세기 잉글랜드 왕국에서 등장한 관직인 '남과 북, 서쪽의 제독'[51]인데, 말 그대로 남북서 잉글랜드의 3개 주력 함대의 지휘권을 쥔 직책이었다. 이 긴 명칭을 줄인 것이 바로 Admiral of the Fleet이다. 이후 ADMF는 최고 등급의 해군 장성 계급으로 굳어졌고, 영국 해군이 세계 해군의 표준으로 자리 잡자 각국 해군에 전파되어 오늘날에 이른다. 한국으로 치면 삼도 수군통제사를 줄인 '통제사'가 훗날 한국 해군의 공식적인 원수 명칭으로 정착했다고 보면 된다.

반면 당시 조선군의 육해군 구별이 유별하지 않아서 장군으로 불러도 문제없다는 주장도 있는데, 그 논리가 성립하려면 이순신이 오늘날의 장성급 지휘관에 해당하는 보직을 육군에서 맡았던 적이 있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순신의 최종 육상 보직은 조산보 만호(혹은 정읍 현감. 정읍에는 해안선이 없다.)이고, 병마 절도사나 관찰사처럼 오늘날의 ‘장군’에 해당하는 직책을 맡지 않았다. 즉슨 그의 최종 관직을 일일이 붙여서 호칭하는 게 아닌 이상 국제적인 관례대로 제독이라고 부르는 것이 맞는다.

다만 현대에는 장군이란 단어가 실제 장성급 장교를 지칭하는 것뿐만 아니라 무(武)의 최고봉 격인 인물에게 흔히 사용되는 호칭이다.[52] 또한 당장 충무공을 이순신 '장군' 대신 이순신 '제독'이라 호칭하는 경우를 상상해 본다면 일반 언중들이 받아들이기에 어색함을 느낄 것이다. 따라서 엄격히 충무공의 호칭을 구별 짓는 것이 아닌 이상, 대중적으로 이순신을 장군이라 칭하는 것을 틀렸다고 할 수는 없다.

4. 용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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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해군사관학교에 세워진
이순신 동상[53]

5.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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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전투 관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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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연표

모든 날짜는 음력으로, 이순신의 나이는 세는나이로 기재했다. 서기와 함께 조선 국왕의 재위 연도를 표시했다.

5.2.1. 임진왜란 이전

5.2.2. 임진왜란

5.2.3. 사후

6. 가족

아버지 이정(1511~1583), 어머니 변씨 부인(1515~1597) 슬하 3남으로 보성 군수를 지낸 방진(方震)의 외동딸 방수진을 아내로 들였고 병마사 오수억(吳壽億)의 서녀인 첩 해주 오씨가 있었다.

방수진과의 사이에 장남 이회, 차남 이예[69], 3남 이면[70]과 딸 하나를 두었는데, 장녀는 홍가신의 아들 홍비와 혼인했다. 해주 오씨와의 사이에서 서자 이훈(李薰)을 두었고, 오씨 소생인지 아니면 또 다른 첩 소생인지 알 수 없는 서자 이신(李藎)과 서녀 2명이 있었다.

오씨외에 이순신에게 '부안댁'이라는 첩이 있었고 이신과 두 서녀가 그녀 소생이라는 주장이 있는데 이건 전적으로 난중일기의 번역자들의 창조 번역이다.
1594년 8월 2일. 꿈을 꾸었는데, 부안 사람(扶安人)이 아들을 낳았다. 달수를 계산했더니, 태어날 달이 아니었다. 꿈이었지만 쫓아 보냈다.
1594년 11월 13일. 저녁에 윤련이 왔다. 그의 누이 편지를 갖고 왔다. 헛된 말이 많았다. 우스운 일이다. 버리고 싶어도 버릴 수 없는 사람이 있다. 이는 곧 남은 어린 세 자식이 끝내 돌아가 의지할 곳이 없기 때문이구나.
1597년 10월 25일. 몸이 몹시 불편했다. 윤련(尹連)이 부안에서 왔다.

난중일기 원문에는 그냥 부안 사람이라는 뜻의 부안인(扶安人)이라고만 적혀 있었는데 난중일기를 번역한 홍기문, 이은상 등은 아무런 문헌 근거도 없이 부안댁이라는 첩이 있다는 사족을 붙였고 윤련이 누이 편지를 갖고 왔다, 윤련이 부안에서 왔다는 기술을 근거로 윤련이 이순신 첩 부안 윤씨의 오라비라 주장했다. 근거는 전혀 없다. 부안인, 윤씨는 덕수 이씨 족보에 나오지 않는다. 난중일기 원문에는 그저 부안 사람과 윤련의 누이로 적혀 있다. 아무 근거 없이 부안 사람, 혹은 윤련의 누이를 '이순신의 첩'이라는 쓸데없는 사족을 달아 번역하는 것은 과잉 번역이다.

이순신의 서녀 중 1명은 윤효전(1563~1619)의 첩이 되었는데, 윤효전은 바로 현종~숙종 연간 남인의 중심 인물이었던 윤휴의 아버지다. 다만 윤휴는 이순신 서녀의 소생이 아니라 윤효전의 적자고, 윤효전과 이순신의 서녀 사이에 태어난 사람은 윤영(1611~1691)으로 그가 윤휴의 이복 형이다.

6.1. 부모

이순신의 부친 이정은 음서로 벼슬에 올라[71] 최종 직위는 종5품 창신 교위에 이르렀으나 실무를 맡은 게 아니었고 일종의 임시직이나 명예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72] 1583년 11월 15일 타계했는데, 고향의 소식이 늦어 이순신은 부친의 부고를 50일이나 지난 후에야 접하고 뒤늦게 달려가 3년상을 치렀다. 사후 1604년에 아들 이순신의 막대한 훈공으로 좌의정에 추증되고 덕연부원군에 추봉되었다.

전라 좌수사에 취임한 직후 어머니 변씨를 여수의 고움내(현대의 여수시 웅천 지역)라는 곳에 모시고 봉양했는데, 현대에도 여수에는 '이순신 자당기거지'[73]라고 해서 변씨가 살던 집이 남아 있다. 어머니도 상당히 강직한 여성이었는데, 《난중일기》를 보면 문안 인사를 하고 떠나는 아들 이순신에게 "가거라. 부디 나라의 치욕을 크게 씻어라."고 격려한 기록도 남아 있다. 이때 이순신은 어머니의 모습을 "두세 번 타이르시고 조금도 헤어지는 마음으로 탄식한 빛이 없으셨다"라고 묘사했다.[74] 1597년 이순신이 파직당하고 백의종군을 떠날 때, 변씨가 아들을 만나기 위해 배를 을 싣고 오다가 병사했는데, 이순신은 어머니의 임종조차 지키지 못하고 소식을 듣고 달려온 것도 모자라, 임지로 떠나는 길이라 장례식도 치르지 못하고 바로 떠나야 했다. 참으로 기가 막히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때의 이순신이 느낀 애통함은 난중일기에 잘 나타나 있다.
"어머니를 마중하려고 나가는 중에 아들 울이 종을 보내 "아직 배 소식이 없다."했다. (중략) 조금 있으니 종 순화가 와서 어머니의 부고를 알렸다. 뛰쳐나가 가슴을 두들기고 발을 동동 굴렀다. 하늘이 캄캄하다. 즉시 갯바위로 달려나가니 이미 배가 와 있었다. 이 애통함을 글로 다 적을 수가 없다."
정유년 4월 13일(1597년 5월 28일) 《난중일기》
竭忠於國而罪已至
나라에 충성을 다하고자 했으나 죄가 이미 미쳤고
欲孝於親而親亦亡
부모에게 효도를 다하고자 했으나 부모마저 돌아가셨네.
天地安如吾之事乎
세상에 어찌 나 같은 사람이 있으랴?
不如 早死也
속히 죽느니만 못하다.
정유년 4월 19일(1597년 6월 3일) 《난중일기》

글을 보는 사람마저 눈물이 날 지경. 더 기가 막힌 것은 모친의 본관이 초계인데, 이 지역은 다름아닌 이순신의 귀양지다. 어머니의 죽음에는 선조도 일정 부분 기여한 공이 있다. 아들이 의금부에 잡혀갔다는 소식에 놀란 어머니가 연로한 나이에다 건강도 나쁜 몸인데도 아들을 보기 위해 아산까지 직접 오기로 했고 결국 아산에 오기 전 건강이 악화되어 배 위에서 세상을 떠난 것이다.

6.2. 부인

이순신의 아내인 방수진(方守震)은 무관 출신으로 보성 군수를 역임한 방진의 딸인데, 대단한 여장부 기질이 있었던 모양. 어린 시절 방씨 집에 도적들이 쳐들어오자 방진이 방문을 열어놓고 앉아 활을 쏘며 저항했다. 화살이 다 떨어지자, 방수진이 베틀에 쓰는 대나무 가지 더미를 바닥에 와르르 쏟아 요란한 소리를 내며 "아버지!! 여기 화살들이 있습니다!!"라고 소리쳐 화살이 많이 남아 있다고 속여서 도적들이 도망갔다는 야사가 있다. 또한 류성룡의 글[75]에 따르면, 사위인 홍비가 체구가 작아서 마음에 차지 않다며 집에도 들이지 못하게 하고, 집안 노비들을 거느리고 직접 농사를 지어서 집안을 유지하며, 대단히 성격이 강해서 집안 사람들 중 아무도 그녀의 말을 거역하지 못한다고 나온다. 이에 대해 류성룡은 "참으로 장수(將帥)의 집안에는 장수의 아내가 있다"며 감탄했다. 방씨가 사위를 박대한 이유로 단순히 사위의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라, 상대 집안에 대한 항의라는 해석도 있다. 이 사위의 아버지는 이순신의 친구인 홍가신이다.[76] 그런데 홍비는 이 결혼이 재혼이었다. 홍비의 첫 번째 부인이 일찍 죽어서 이순신의 딸과 재혼한 것. 첩으로 들인 것이 아니라 재혼한 것이므로 딱히 문제 될 것은 없어 보이지만, 조선 시대에 재취로 딸을 시집보내는 것은 그다지 반기지 않는 게 당시 풍습이었다. 이를 불편하게 여긴 방수진이 사위를 박대함으로써 홍가신 집안에게 항의 표시를 했다는 해석이다.

방수진의 본명은 오랫동안 알려져 있지 않아 후세에 와서는 그냥 '방씨', 혹은 본관을 붙여 '상주 방씨'라고 불려졌다. 일부 야사 및 창작물에서 '연화', '태평'' 등의 이름이 나오긴 했지만 이를 증명할 근거는 등장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난중일기, 임진장초와 함께 국보 76호로 지정된 서간첩[77]을 연구한 결과 본명이 '수진'임이 밝혀졌다. 다만 이에 대해선 '수진'은 방씨의 이름이 아니라 이순신의 장인인 방진을 지칭하는 것이라는 반박도 있다. 하나, 위 기사 속 반박은 시대상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의견이라 아쉽다. 이순신이 부계 쪽인 살던 서울에서 출생하여, 모계 쪽이 있던 아산으로 온 것이나 자신의 사후부터 장인으로부터 받은 현충사가 자신의 부계로 이어진 것을 생각하면, 타당성도 있을 것이다. 난중일기에는 그녀도 병을 앓아서 전란 중에 사경을 헤맸다는 기록도 있는데, 아들 이회가 1603년 어머니의 병환 때문에 사직하는 상소를 올린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이순신의 전사 후인 1603년까지는 생존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6.2.1.

당시 시대상에 따라 이순신도 본부인 방씨 외에 첩을 두었는데, 난중일기 등 기록에 나오는 첩으로는 '해주 오씨'와 '부안댁' 두 사람이 있다. 해주 오씨는 양반가의 서녀로 추정되며, 오씨에게서 서자로 이훈, 이신과 서녀 2명을 낳았다. 부안댁은 상민이나 노비 출신으로 추정되며 자녀가 있다는 기록은 없고, 난중일기에 꿈에서 부안댁이 다른 남자와 불륜하여 자식을 낳았기에 내쫓는 꿈을 꿨다는 기록이 있다.

6.3. 형제, 자녀

류성룡은 저서인 《징비록》의 평가에서, 모두가 이순신 장군을 영웅적이고 위엄 있는 인물이고 장수로 생각하지만, 장수로서 위엄 있는 외모와는 거리가 멀었으며, 글을 읽는 단아한 선비 같다고 했다.

가족에 대해 자상한 부친의 모습을 보여주는 일화가 몇 있다. 이순신의 두 형 이희신(1535~1587)과 이요신(1542~1580)은 각각 4명과 2명의 자식을 남기고 벼슬을 얻지 못한 채 비교적 일찍 죽었는데,[78] 이순신은 이 6명의 조카를 친자식 못지않게 잘 키워냈다. 특히 정읍 현감으로 부임할 당시에 이들 조카들을 데려가면 파직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낳기도 했다. 조선은 유교 사상 덕에, 기본적으로 세금 = 백성의 부담으로 보고, 최대한 세금을 적게 걷어 필요한 데만 쓰는 식의 굉장한 긴축 재정을 강요받는 행정 체제를 가지고 있어서, 행정관이 가솔들을 데려와 먹여 살리는 것은 충분히 탄핵의 대상이 될 만한 일이다. 이른바 남솔(濫率)이라고 해서, 지방관이 가솔을 제한 이상으로 데리고 다니는 것이 당대의 문제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이순신은 "조카들이 부모가 모두 죽어 천애고아라 의지할 곳이 나뿐인데, 어찌 두고 갈 수 있겠는가? 차라리 파직당할지언정 조카들을 버릴 수는 없다!"라고 말하면서 눈치 안 보고 조카들을 다 부임지로 데려갔다. 하지만 그가 정읍 현감으로 있는 동안 가족들이 보여준 처신은 정읍 백성들에게 칭찬을 받을 만큼 대단했다고 한다. 이 조카들의 혼례를 다 치러낸 후에야 자기 친자식의 혼례를 했을 정도.
晨昏戀慟淚凝成血
조석으로 그립고 애통하여 눈물이 엉겨 피가 되어 흐르거늘
天胡漠漠不我燭兮
하늘은 어찌 무심하게도 나를 굽어살피지 않으시던가?
何不速我死也
어찌 속히 죽이지 않으시나?
정유년 5월 6일(1597년 6월 20일), 《난중일기》, 꿈 속에서 죽은 두 형을 만난 후[79]

아들 사랑 또한 지극하기 이를 데 없었는데, 셋째 아들 이면이 아산에서 전사했다는 소식을 들은 날의 《난중일기》는 자식을 먼저 보낸 부모의, 심금을 울리는 애틋한 문장으로 가득하다.
"새벽 2시쯤 꿈에서 말을 타고 언덕을 달릴 때 말이 실족하여 내가 물에 빠졌다. 그런데 물에는 빠졌으나 쓰러지지는 않았으므로 보니 면이 나를 끌어안고 있는 듯했다. 이것이 무슨 징조인지 알 수가 없다."
(중략)
"천안에서 사람이 와서 집 편지를 전했는데, 겉봉을 뜯기도 전에 눈앞이 아찔하고 골육이 진동했다. 대충 뜯고 겉을 보니 '통곡'이란 두 글자가 써 있어 면이 전사했음을 알았다. 통곡하고 또 통곡하도다! 하늘이 어찌 이렇게 어질지 못하실 수가 있는가. 내가 죽고 네가 사는 게 올바른 이치인데 네가 죽고 내가 사는 것은 무슨 괴상한 이치란 말인가. 온 세상이 깜깜하고 해조차 색이 바래 보인다. 슬프다, 내 작은 아들아,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갔느냐! 네가 유독 출중하고 영민하여 하늘이 세상에 남겨두지를 않으시는 것이냐, 나의 죄가 네게 화를 미쳤느냐. 나는 세상에 살아있지만 장차 어디에 의지하랴. 함께 죽어 너와 지하에서 지내며 울고 싶으나 네 형, 누나, 어미가 의지할 곳이 없어질 것이니 참고 연명하겠다만 혼은 죽고 가죽만 남아 부르짖고 서글피 울 뿐이다. 하룻밤을 넘기기가 한 해와 같도다."
정유년 10월 14일(1597년 11월 22일) 《난중일기》
"나는 내일이 막내 아들(이면)의 죽음을 들은 지 나흘이 되는 날인데도, 마음 놓고 울어보지도 못했다."
정유년 10월 16일(1597년 11월 24일) 《난중일기》
"새벽 나절에 꿈속에서 고향의 종자 진(辰)이 찾아왔기에 면이 생각나 통곡했다."
(중략)
"한밤에 생각하자니 눈물이 흐르는데, 어찌 다 말하겠는가. 기어이 내 불효함이 예까지 이를 줄 누가 알았으랴.
가슴이 찢어지는 듯하니 이 마음을 억누를 수가 없다."
정유년 10월 19일(1597년 11월 27일) 《난중일기》

이순신은 이때 부하들이 있는 곳에서는 울지 않았는데, 이를 두고 《난중일기》에서는 종 강막지(姜莫只)의 소금 창고에 "숨어서 울었다."고 나와 있다. 이분의 《이충무공행록(李忠武公行錄)》에 보면 "공이 이로 인해 정신이 쇠약해졌다"라고 하는데, 이순신이 그리도 슬퍼했던 이유는 물론 자식을 잃은 아비의 슬픔과 이면이 자신을 많이 닮아서 유독 귀여워하던 자식이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면은 명량 해전 직후 이뤄진 보복성 침략 때문에 죽었으므로 비록 전투는 이겼으나 자신 때문에 자식이 죽었으니 그 자책감은 이루 말하지 못했을 것이다.

셋째 아들 이면에 대해서는 후에 야사가 하나 전해 내려오는데, 죽은 면이 꿈속에 다시 나타나 울며 "소자를 죽인 자가 근처에 있나이다." 하고 사라졌다. 이순신이 꿈에서 깨고는 이상히 여겨 한참을 생각하다가 문득 아산에서 전투를 벌였던 일본군 포로들을 끌어와 심문하니 과연 그중에 면을 죽인 자가 있어 즉시 그를 베어버렸다고 한다.#

그럼에도 공사 구분은 융통성이 없는 수준으로 엄격해서 아무리 상관이나 친인척이라도 예외가 없었다. 35세에 종8품 훈련원 봉사 시절에는 병조 정랑 서익이 원칙에 어긋나는 인사를 지시하자 칼같이 거절했다가[80] 이듬해 종4품 수군 만호로 재직 중, 병조 정랑이었던 서익이 군기 경차관으로 와서 감찰로 트집을 잡아 파직되기도 했다. 같은 덕수 이씨였던 율곡 이이[81]가 이순신이 초급 군관 시절 한번 만나보고 싶어 했는데, 당시 이율곡은 지금의 행정부 장관에 해당하는 이조 판서로 지낼 무렵이었다(1년 뒤 국방부 장관급인 병조 판서가 됨). 당시 이런 장관급이 호의를 보인다면 출셋길 열렸다며 튀어가고 현대에도 이런 고위 인사를 등에 업고 각종 청탁이나 비리를 저지르는 경우가 비일비재한데, 이순신은 "(율곡께서) 이조 판서로 있으신 동안은 인사권이 있으시니, 저는 만날 수 없습니다."라며 딱 잘라 거절했다. 물론 그 외에도 크고 작은 '로비' 권고에도 절대 흔들리지 않았는데 병조 판서 김귀영이 자신의 서녀를 첩으로 주고 싶어 매파를 띄웠으나 단칼에 거절하기도 했다.

이같은 엄격함은 자신의 친인척들에게도 마찬가지여서 이순신의 장남인 이회와 조카 이분, 이완, 이봉[82]은 전쟁 내내 별다른 무관 관직조차 없이 일개 의병 신분으로 참전했다. 조선 시대에는 부정부패를 막기 위해서 친인척끼리는 같은 임지에서 관직을 하지 못하도록 규정하는 상피제가 있었는데 이를 충실하게 지킨 것이다.

이완은 임진왜란이 끝난 뒤에야 무과에 급제하고 본격적으로 무관의 길을 걸었으며, 후에 정묘호란이 발생하자 의주성에서 후금군을 상대로 분전하다가 종제 이훈과 함께 전사한다. 서자 이훈과 이신은 무과에 급제했는데 이신은 이괄의 난 때 격전지였던 안현 전투에 참전했다 전사하고, 이훈은 정묘호란 때 이완과 함께 의주를 지키다 전사했다. 두 사람 모두 시신조차 수습하지 못해 무덤을 만들지 못했다. 정유년에 아산에서 일본군과 싸우다 전사한 삼남 이면까지 포함하면 다섯 아들 중 4명과 조카 3명이 아버지와 숙부를 따라 전장에서 분골쇄신했다. 집안의 이단아(?) 차남 이예[83]는 순수 문관으로 형조 정랑을 역임했으며 사후 좌승지에 추증되었다.

6.4. 후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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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의 활약으로 인해 덕수 이씨는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무반 가문으로 손꼽히게 된다. 무과 급제는 267명[84]인데 반해 문과 급제는 단 1명[85]에 불과하다. 이순신의 조상 대에선 성균관 대제학을 역임하거나(이변) 병조 참의로 재직하며 세자의 스승 노릇을 했고(이거), 할아버지 이백록과 아버지 이정도 미관말직이나마 지낸 적이 있는 전통적인 문반 가문이었는데 이순신을 기점으로 무반 가문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86]

이렇듯 그의 후손들은 충무공의 후예라는 이유 때문에 진로 선택 시 무반을 강요당한 정황이 보이지만, 정작 실록에 기록될 때는 충무공에 비해서 어떤 점이 부족하다는 식으로 꾸준히 조상과 비교당했다. 그래도 한몸을 바쳐 종묘사직을 지켜낸 영웅의 후손이라 조선 시대 내내 특별 대우를 받았다.

5대손인 이봉상(李鳳祥, 1676~1728)은 무능하게 여겨졌던 사람으로, 오죽하면 잘못한 것도 없는데 그저 무능하다는 이유만으로 탄핵 상소까지 올라왔다가 기각됐을 정도였다. 하지만 이는 진짜 무능했기 때문이 아니라 조상과 저울질 당한 탓이 큰 듯하다. 실제로 이봉상은 숙종 시기에 무과 급제 하고, 경종 시기에 포도대장, 삼도 수군통제사, 총융사에 영조 때는 훈련대장까지 승진했기 때문이다.

이런 이봉상은 충청 병사로 재임하던 시절 이인좌의 난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해 사로잡혔으나 투항을 거부하여 피살되었는데, 이때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 바로 "너는 충무공 집안에 충의가 서로 전해져 오고 있음을 듣지 못했느냐? 왜 빨리 나를 죽이지 않느냐?"였다. 충무공 이순신의 후예라는 자부심이 상당했던 모양이다. 결국 조정도 이 점을 높이 사 이봉상은 사후 충민공(忠愍公)[87]으로 추존되고 조상인 이순신과 함께 현충사에도 배향되었다.

이 밖에도 정조 시기에는 이인수, 이승권 등이 있었다고 하며, 흥선 대원군 시기 이문영 또한 직계 12대 종손이다. 근대에는 독립운동가를 여럿 배출하면서 독립 유공자 집안이 되었다. 대표적으로 12, 13, 14대 종손인 이세영, 이종옥, 이응렬이 있다. 이순신 장군 후손, 일제 강점기 3대 걸쳐 항일 독립운동 투신, 이순신 장군 13대 종손도 항일 무장 투쟁 첫 확인. 9대 종손 이필희, 10대 종손 이규풍, 이규갑, 이규현, 11대 종손 이민호, 이민화, 12대 종손 이길영, 이일영도 독립운동가다. 다만 모두 그런 것은 아니고 부계 후손은 아니지만 친일파권중현도 있다.[88]

현대에는 방송인 이종환배우 이미숙, 역사 강사 김종웅 등이 있다.

7. 인간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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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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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어록 및 장계

'(전라)좌우도의 전선은 본시 있던 것과 새로 만든 것을 물론하고 먼저 집합한 것이 110척이요, 사후선도 110척이라 사부, 격군을 합해서 무려 1만 7,000여 명이나 됩니다. 1명당 아침, 저녁으로 각각 5홉씩 나누어 준다면 하루 먹을 것이 적어도 100여 석이요, 1달에 드는 것이 3,400여 석 입니다. 경상우도는 벌써 바닥이 나서 식량을 각출할 도리가 없고, 전라도 열 고을만 쳐다보는데, 열 고을에서도 남아 있는 군량에서 백성들을 구제할 식량을 제하고 나면 수군들 먹을 군량은 겨우 앞으로 2달 남짓, 5월 보름께밖에 더 계속되지 못할 실정입니다.'
《청조획군량장》 갑오년 3월 10일 中 - 군량미를 걱정하는 이순신 장군
'수전과 육전의 어렵고 쉬운 점, 그리고 지금의 급한 일들을 들어가며 다음과 같이 망령되이 진술하는 바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십중팔구는 겁쟁이이고, 용감한 자는 열에 한둘밖에 없습니다. 평상시에는 분간되지 않고 서로 섞여 있지만 일단 소문만 들리면 그저 도망갈 생각만 하고 놀라서 달아나는데...... [생략]...... 수전의 경우에는 수많은 군사들이 모두 다 같은 배 안에 있으므로 적선을 바라보고 비록 도망치고 싶어도 도망갈 수가 없으며 노질을 재촉하는 북소리가 울리면, 그 뒤를 군법이 따르니 모두 전력을 내어 싸우게 됩니다. 이것은 수전의 쉬운 점입니다.'
선조실록 계사년 9월 10일》 中 - 이순신 장군이 바라본 육군과 수군의 통솔 차이
수사가 수군의 대장으로서 호령을 내리더라도 각 고을의 수령 등은 자신의 소관 사항이 아니라고 핑계 대면서 전혀 시행하지 않고 있습니다. 심지어 군사상 중대한 일까지도 내버려두거나 등한시하는 일이 많아서 매사가 이완되고 있으므로 이런 큰 사변을 당하여 도저히 일을 처리해 나갈 수 없습니다. 반드시 감사와 병사의 예에 따라서 고을의 수령들까지 수사의 지휘를 받도록 해 주시기 바랍니다.
《선조실록 계사년 9월 10일》 中 - 이순신 장군이 바라본 전시 행정
[ruby(三尺誓天, ruby=삼 척 서 천)] [ruby(山河動色, ruby=산 하 동 색)]
[ruby(一揮掃蕩, ruby=일 휘 소 탕)] [ruby(血染山河, ruby=혈 염 산 하)]
석 자 칼에 맹세하니 산과 강이 떨고
한 번 휘둘러 쓸어버리니 피가 강산을 물들이도다
이순신의 장검 2자루에 새겨져 있는 문구이며, 해당 문구는 이순신의 친필이다.[89]

[ruby(鑄得雙龍劍, ruby=주 득 쌍 룡 검)] [ruby(千秋氣尙雄, ruby=천 추 기 상 웅)]
[ruby(盟山誓海意, ruby=맹 산 서 해 의)] [ruby(忠憤古今同, ruby=충 분 고 금 동)]
쌍룡검을 만드니 천추에 기상이 웅장하도다
산과 바다에 맹세한 뜻이 있으니 충성스런 의분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같도다
쌍룡검에 새겨져 있는 문구

[ruby(閑山島月明夜上戍樓, ruby=한 산 도 월 명 야 상 수 루)]
[ruby(撫大刀深愁時, ruby=무 대 도 심 수 시)]
[ruby(何處一聲羌笛更添愁, ruby=하 처 일 성 강 적 경 첨 수)]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혼자 앉아
큰 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 하는 차에
어디서 일성호가[90]는 남의 애를 끊나니
이순신의 시조 ‘한산섬 달 밝은 밤에’[91]

[ruby(勿令妄動, ruby=물 령 망 동)] [ruby(靜重如山, ruby=정 중 여 산)]
망령되이 움직이지 마라! 산처럼 무거이 침착하라!
옥포 해전을 개시하면서

[ruby(祭死亡軍卒文, ruby=제 사 망 군 졸 문)]

[ruby(親上事長, ruby=친 상 사 장)] [ruby(爾盡其職, ruby=이 진 기 직)]
[ruby(投醪吮疽, ruby=투 료 연 저)] [ruby(我乏其德, ruby=아 핍 기 덕)]
[ruby(招魂同榻, ruby=초 혼 동 탑)] [ruby(設奠共享, ruby=설 전 공 향)]

윗사람을 따르고 상관을 섬기는 등 너희는 그 직책을 다했건만
막걸리를 주고 종기를 뽑는[92] 등 나는 그런 덕이 모자랐도다
혼을 한 자리에 부르노니 차린 제물 받으오시라
죽은 군졸을 제사하는 글

[ruby(今臣戰船, ruby=금 신 전 선)] [ruby(尙有十二, ruby=상 유 십 이)]
[ruby(戰船雖寡, ruby=전 선 수 과)] [ruby(微臣不死則, ruby=미 신 불 사 즉)] [ruby(不敢侮我矣, ruby=불 감 모 아 의)]
지금 신에게 아직 12척 전선이 있사옵니다.
전선이 비록 적으나 미천한 신이 죽지 않았으므로 적들이 감히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입니다.[93]
『이충무공전서』, 이분, 「행록」에 실려있는 명량 해전에 앞서 올린 장계.

[ruby(必死則生, ruby=필 사 즉 생)] [ruby(必生則死, ruby=필 생 즉 사)]
죽고자 하면 살 것이고,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다.[94]
난중일기[95]

[ruby(此讎若除, ruby=차 수 약 제)] [ruby(死即無憾, ruby=사 즉 무 감)]
이 원수를 갚을 수 있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나이다.
이충무공행록에 기록된 노량 해전을 앞두고 한 맹세

[ruby(今日固决死, ruby=금 일 고 결 사)] [ruby(願天必殲此賊, ruby=원 천 필 섬 차 적)]
오늘 진실로 죽음을 각오하오니, 하늘에 바라옵건대 반드시 이 적을 섬멸하게 하여 주소서.
백사집에 기록된 노량 해전을 앞두고 한 맹세

[ruby(戰方急, ruby=전 방 급)] [ruby(愼勿言我死, ruby=신 물 언 아 사)]
싸움이 급하다. 내가 죽었다는 말을 하지 마라.
노량 해전에서 전사하면서 남긴 유언[96] - 이분[97]의 충무공행록


임진장초 및 난중일기 원문 번역 사이트들[98]##임진장초 원문
自壬辰至于 五六年間 賊不敢直突於兩湖者 以舟師之拒其路也 今臣戰船 尙有十二 出死力拒戰則猶可爲也 今若全廢舟師 是賊所以爲幸而由 湖右達於漢水 此臣之所恐也 戰船雖寡 微臣不死 則不敢侮我矣
임진년부터 5·6년간 이 감히 호서호남으로 직공하지 못한 것은 수군이 그 길을 누르고 있어서입니다. 지금 신에게는 아직도 12척의 전선이 있사오니 죽을힘을 내어 맞아 싸우면 이길 수 있습니다. 지금 만약 수군을 모두 폐한다면 이는 적들이 다행으로 여기는 바로서, 말미암아 호서를 거쳐 한강에 다다를 것이니 소신이 두려워하는 바입니다. 전선이 비록 적으나, 미천한 신은 아직 죽지 아니했으니, 적들이[99] 감히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입니다.

─ 『이충무공전서』, 이분, 「행록」
명량 해전 이전, 조정에서 '수군을 해산하고 육군에 합류하라'라는 명령을 내리자 이를 반박하며 수군을 끝까지 지휘하겠다는 주장이다.
招集諸將約束曰 '兵法云, 必死則生, 必生則死。又曰, 一夫當逕, 足懼千夫, 今我之謂矣。爾各諸將, 勿以生爲心, 小有違令, 卽當軍律。'再三嚴約。
여러 장수들을 불러 모아 약속하되, "병법에 이르기를 '반드시 죽고자 하면 살고 반드시 살려고 하면 죽는다.'고 했고, 또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 명도 두렵게 할 수 있다.'고 했는데 이는 오늘의 우리를 두고 이른 말이다. 너희 여러 장수들이 조금이라도 명령을 어기는 일이 있다면 즉시 군율을 적용하여 조금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고 재삼 엄중히 약속했다.
난중일기, 정유년 9월 15일(명량 해전 전날)
'죽고자 하면 살고 살려고 하면 죽을 것이다'라는 발언은 흔히 이순신이 직접 한 말이라고 알려져 있으나, 난중일기에서도 언급했듯이 병법, 정확히는 오자병법의 내용을 인용한 것이다. 그리고 이를 '무조건 죽을 각오로 옥쇄해라'라고 잘못 해석하기도 하나, 사실이 아니다. 이에 대한 정확한 해석은 필사즉생행생즉사 문서로.
日本之人, 變詐萬端, 自古未聞守信之義也。兇狡之徒, 尙不斂惡。
일본인은 간사스럽기 짝이 없어, 예로부터 신의를 지켰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습니다. 그들은 교활하고 흉악하여, 그 악랄함을 감추질 않습니다.
답담도사금토패문(答譚都司禁討牌文, 담종인에게 보내는 답장 중에서.-이충무공전서 1권 잡저中)
강화 협상을 하며 전쟁이 소강 상태가 된 1594년, 명나라 칙사인 담종인이 '함부로 왜군과 교전하지 말고 자리를 지킬 것'이란 내용의 통보인 금토패문(禁討牌文)을 보내자, '답담도사금토패문'이라는 이를 반박하는 글을 올렸다. 현대에는 이 중 '저 왜적은 간사스럽기 짝이 없어, 예로부터 신의를 지켰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습니다.'라는 구절이 특히 유명하다. 2010년대 이후 한일 관계가 크게 나빠지고 한국 내 반일 감정이 더 강해지면서, 저 문구를 인용하는 사례가 크게 늘었다. "왜인은 간사스럽기 짝이 없어~"로 번역되는 경우도 많으나, 원문은 보다시피 일본. 조선 시대에 일본을 가리킬 때 가장 많이 쓰이는 글자는 왜(倭)였으나, 일본도 함께 쓰였다.
이어서 투항해 온 왜놈에게 술과 음식을 먹였다.
1596년 1월 15일 자(양력 2월 12일) 일기 中
어두울 무렵 항복해 온 왜놈들이 광대놀이를 차렸다. 장수된 사람으로서 가만히 두고만 보고 있을 수는 없지만, 붙좇은 왜놈들이 놀이를 간절히 바라기에 못 하게 하지 않았다.
1596년 7월 13일 자(양력 8월 6일) 일기 中
항왜 관련. 조선에 충성하는 항왜에게는 공정한 대우를 하는 모습이다.
승장 의능에게 천민의 신분을 면해준다는 공문을 봉하여 올렸다.
1594년 1월 14일 자(양력 3월 5일) 일기 中
장언춘(張彦春)을 천민에서 면하게 하는 공문을 만들어 주었다.
1595년 2월 14일자(양력 4월 4일) 일기 中
면천 관련. 조선은 제아무리 천민이라도 장영실과 같이 비상한 재주가 있음이 인정되거나 중종 때의 정막개[100]처럼 나라를 위해 공을 세운 경우 얼마든지 면천을 허락하고 관직을 내렸다. 즉 이순신이 특이한 것은 아니다.
잠깐 비가 내렸다. 나라 제삿날[101]이라 공무를 보지 않았다. 홀로 다락 위에 기대어 나라의 돌아가는 꼴을 생각하니 위태롭기가 마치 아침 이슬과 같다. 안으로는 정책을 결정할 만한 기둥(棟樑) 같은 인재가 없고 밖으로는 나라를 바로잡을 주춧돌(柱石) 같은 인물이 없으니 나라의 운명이 어떻게 되어갈지 모르겠다. 심사(心思)가 번란해서 종일 엎치락뒤치락했다.
1595년 7월 초1일 자(양력 8월 6일) 일기

10.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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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의문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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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대중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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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관련 영상

역사 스페셜 <특별기획 2부작 이순신>

14. 관련 단체

15. 관련 문서

16.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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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4년 한국갤럽이 창립 30주년을 맞이하여, 다양한 분야에서 한국인이 좋아하는 것들에 대해 알아보는 한국인이 좋아하는 조사 시리즈를 기획해 2004년부터 5년 주기로 발표하고 있다.
2014년
※ 2014년 한국갤럽한국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한국인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을 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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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정 당시 기관명은 문화부(1990~1993) → 문화체육부(1993~1998) → 문화관광부(1998~2005)였다.
이달의 문화인물(1990-199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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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을 빛낸 백명의 위인들
등장인물 및 단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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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접적으로 언급된 인물/단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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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길동전의 저자 허균[1]
기울임체 는 부정적으로 언급된 인물이다.
[1] 실제 홍길동을 언급한 건지 후대 인물 허균이 창작한 의적 홍길동을 언급한 건지 논란이 있지만 간접적인 언급으로 소설 홍길동전에서 대중화된 의적 이미지를 노래 가사로 사용했으므로 저자 허균을 생각하고 언급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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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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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림 (류형)
참고 : 윗첨자의 경우에는 독립적인 열전으로 기록된 것이 아니라 해당 인물의 열전 속에서 함께 설명되는 인물들이다. }}}}}}}}}


[1] 로마자로 표기할 시 현행 국어의 로마자 표기법을 따르면 'I Sunsin', 매큔-라이샤워 표기법을 따르면 'I(Yi) Sunsin'이다. 관습을 고려해 성씨는 Yi로 표기한다.[2] 장우성 화백의 1953년작 조복 좌상 영정으로, 현충사에 소장되어 있다. 1973년 정부에서 표준 영정으로 지정했다. 이순신의 얼굴을 직접 보고 그린 초상화들이 1960년대까지도 남아있었으나 일제 강점기와 1960년대를 거치면서 확실한 초상화는 해외로 반출되거나 도난을 당하는 등 없어졌기에 현재 전하는 초상화나 동상에 묘사된 이순신의 얼굴은 전부 지어낸 것이다. 그외 이순신 장군과 함께했던 장수들의 영정이나 다른 위인들의 초상화도 비슷한 이유로 행방이 묘연하다. 이 영정은 류성룡징비록에서 이순신을 일컬어 '용모가 단아하고 단정했다(容貌雅飭)'고 묘사한 것에 근거하여 그린 것이지만, 복장이 19세기의 것으로 고증 오류가 있으며 작가의 친일 논란도 있어 표준영정 해제가 추진되고 있다. 자세한 내용은 '이순신/용모' 문서의 표준 영정 논란 단락에 나온다.[3] 이순신의 출생일은 음력 1545년 윤3월 8일이다. 이를 양력으로 환산할 때, 당시 유럽에서 사용하던 율리우스력으로 환산하면 1545년 4월 18일이 되고, 그레고리력을 소급 적용 하여 환산하면 1545년 4월 28일이 된다. 율리우스력은 기원전 45년부터 1600여 년간 사용되어 오면서 약 10일이 늦어지는 오차가 발생했고, 이를 보정하기 위해 1582년 10월 4일 다음 날을 10월 5일이 아닌 10월 15일로 하여 기산하는 그레고리력으로 개력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우리나라는 1896년 대한 제국 칙령으로 양력인 그레고리력을 처음 도입하여 사용하여 왔다. 따라서 그레고리력 개력 전인 1582년 10월 4일 이전의 날짜를 양력으로 변환할 경우 굳이 우리나라가 사용하지도 않았던 율리우스력으로 변환하지 말고 그레고리력을 소급 적용 하여 변환하자는 의견이 나오기도 했다. 문교부는 이러한 견해를 기반으로 충무공 탄신일을 양력으로 기념하기로 하면서 그레고리력을 소급 적용 하여 환산한 4월 28일로 정했고 현재에 이르고 있다. 참고로 한글날인 10월 9일의 경우는 조선왕조실록에 훈민정음 관련 기사가 실린 음력 1446년 9월 29일의 날짜를 율리우스력으로 환산한 것이다.[지번주소] 인현동1가 31-2번지.[5] 流彈, 빗나간 탄환[6] 충무공파의 개조(開祖), 시조 12세손.[7] <<서경(書經)>>에서 순임금우 임금을 후계자로 지목하며, "오직 너(汝)여야 (세상을) 화평(諧)케 하리라"(제왈무帝曰毋 유여해汝諧)고 말한 대목에서 추려 따왔다. 이충무공의 휘 2음절은 "순(舜)임금 같은 성군을 모시는 신하(臣)"라는 의미이니, 자와 이름자가 상보적이다. 이러한 방식은 조선 시대에선 자를 짓는 대표적인 방식이었다. 기존 모친 초계 변씨가 자를 지었다고 한 서술은 오류다. 신도비명에 근거할 때 모친 변씨가 꿈에 시부가 이름을 '순신'으로 하라는 것을 듣고 그렇게 이름 붙이게 된 것이다. 자는 이름에 맞추어 지은 것이다. 참고로 이순신의 형제의 이름이 희신(羲臣), 요신(堯臣), 우신(禹臣)인데 형제의 이름을 각각 복희, 요임금, 순임금, 우임금을 따라 지은 것이다. 둘째 형 요신의 자는 훈보(勳甫)인데 요임금을 지칭하는 표현 가운데 방훈(放勳)의 글자를 가지고 이름과 맞추어 자를 지은 것이다. 이순신의 자 여해 역시 이렇게 지은 것이다. 읽어볼 만한 기사[8] 선조수정실록 1591년 2월 1일 자 기사에서 이순신을 정읍 현감에서 진도 군수, 다시 가리포 첨사에 제수했으나 둘 다 부임지에 도착하기도 전에 전라좌도 수군절도사에 임명했다고 한다.[9] 요직은 맞으나 후방 부대이다. 진짜 중요한 경상 우수사의 1선 부대는 맡지 못했기 때문이다. 한국 육군 기준상 2작사령관 정도로 보면 된다.[10] 승정원일기에 인조 9년 당시 충훈부 도사로 재직 중이었다는 기록이 있기에 1631년 이후 사망 추정.[11] 서출 자녀들은 전부 해주 오씨의 소생들이다.[12] 음력 3월 22일[13] 키가 6척이라는 기록에 따라 추정한 수치로 조선 시대의 세종 시기 1척이 31.1cm인 것을 보아 31.1*6, 약 187cm로 환산할 수 있다. 조선 중기와 후기 기록에 대략 1척을 28.6cm 정도로 잡고 있는 것을 대입하여 약 172cm로 환산할 수도 있는데 당시 조선 시대 남성 평균 신장이 161cm였던 만큼 이 역시도 조선 시대 기준으로는 현재의 180대 중반 정도의 큰 키다.[14] 이순신을 류성룡과 친분으로 남인으로 보는 경우가 있지만 생전에는 사실상 무소속이었다.[15] 권지는 임시직 또는 실습생이라는 뜻이다.[16] 이순신 본인이 영의정이었던 적은 없고 사후 정조 시기 추증된 것이다.[17] 보통 한국인이 존경하는 인물 순위를 꼽을 때 전근대사 인물 중 세종대왕과 이순신은 늘 1~2위를 차지하며, 특히나 이순신은 위기에 빠진 조선을 구했다는 특수한 업적 때문에 어지간해서는 1위로 평가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대한민국의 현대 정치사에서 각각 보수, 산업화 진영과 민주 진영을 대표하는 인물인 박정희와 노무현이 보통 그 뒤를 이으며, 이 넷은 대부분의 조사에서 거의 항상 1~4위를 독차지한다. 그러나 박정희와 노무현이 각 진영을 상징하는 인물인 데다, 각자의 공과가 있고 평가가 극히 갈릴 수밖에 없는 현대사 인물이기에 진영에 따라 이견이 나오는 반면 세종 대왕과 이순신은 모든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거의 이견이 없이 한국사 최고의 위인으로 평가된다.[18] 1968년 4월 28일 건립되어 현재까지 56년 동안 수도 서울을 굳건히 지키고 있다. 단 갑옷이 두정갑, 두석린갑 등의 일체형이 아닌 중국식인 점이 아쉽다. 또 검을 든 모습인 것도 문제 삼기도 하는데, 검은 근거리 무기인 반면 실제 이순신은 판옥선과 거북선 등을 이용한 포격전 위주로 싸웠기 때문이다. 다만 검은 고대 이래로 한국을 비롯한 여러 문화권에서 지배층과 지휘를 상징하는 무기였기에, 검도 중국식이라면 모를까 검을 든 것 자체는 아주 틀린 것은 아니다. 해군사관학교에는 활을 든 동상이 세워지기도 했다.[19] 평가 목록에도 나와 있듯이,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서방권 장군들도 이순신을 알고 있었다. 심지어 전승했을 뿐만 아니라 배를 단 한 척도 잃지 않았다.[20] 조선 제22대 임금 정조가 말하기를 "이순신의 경우는 참으로 천고 이래 충신이요 명장이다. 그가 만약 중국에서 태어났더라면 한나라제갈공명과 자웅을 겨룬다 할지라도 누가 우세할지 장담할 수 없을 것이다. 그의 명성과 의열은 아직도 사람에게 흠모하는 마음을 일으키게 한다."라며 매우 존경했다고 전해진다. 연의의 전략가 제갈량과 정사의 명재상 제갈량 가운데 어느 쪽을 일컬은 것인지는 불분명한데, 당시 사대부들이 중국사에 빠삭했다는 점, 정조가 삼국지연의수호전과 더불어 잡서 취급하며 읽지 않았다는 점(승정원일기 정조 23년 5월 5일)으로 미루어 보면 후자로 추측된다. 반면 이순신은 명나라 수군 도독 진린과 서신을 교환할 때(이충무공전서), 자신의 충성과 덕망과 재주 모두 무후(제갈량)만도 못하다고 직접 말하기도 했다.[21] 애초에 한국에서 이 수사는 이순신만을 위해서 사용된다. 이해가 안 간다면 한국 사람들이 이순신 말고 다른 위인을 성웅이라고 부르는 적이 있는가 생각해 보자.[22] 위의 한국갤럽 조사만 보아도 이순신과 세종 대왕이 각각 1, 2위를 차지하고 있다. 물론 세종이 1위를 차지한 다른 설문 조사들도 많고 확실한 건 둘 중 누구도 3위로 떨어지는 경우는 거의 없다는 것이다.[23] 진주시에선 김시민 충무공을 지명으로도 쓰고 적극적으로 홍보해서 다른 충무공도 있었다는 사실이 어느 정도 알려져 있다.[24] 김유신 문서에도 서술되어 있듯이, 김유신도 뛰어난 영웅인데도 사람을 초월한 행적을 보여온 이순신과 비교하면 현실적인 영웅이라는 서술이 있을 정도이다. 그리고 김유신에 관한 유일한 기록인 삼국사기 김유신 열전은 삼국사기의 저자인 김부식이 열전을 쓰기 위해 참고할 삼국 시대 당시의 기록이 부족했던 탓에 김유신의 후손이 쓴 김유신 행장록 원본 총 10권 중에서 내용을 추려서 옮긴 것이다. 그 때문에 실제 역사와 교차 검증을 하게 되면 맞지 않는 경우도 발생한다. 김유신 열전에서는 김유신이 전투에 나갔다 하면 매번 승리를 거두고 돌아왔다고 묘사되지만 실제 당시의 신라는 오히려 수도 서라벌까지 적국에 위협을 당하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이순신의 경우에는 비교적 근대의 일이고 조선왕조실록, 난중일기 같은 풍부한 조선 측 기록과 일본 측 기록들을 통해 교차 검증이 된 것도 많아서 사실로 인정된다.[25] 물론 울돌목은 좁았기에 병목 현상이 발생해 133척 전부가 싸울 수 있던 건 아니다. 문제는 그렇다고 해도 울돌목이 배가 1척씩만 드나들 수 있는 구역인 것도 아니었고 설령 그렇다고 해도 기술이나 화력이 압도적인 격차를 보인 것도 아닌데 대장선 1척이 적군을 죄다 두들겨 팬 건 보기 드문 일이다.[26] 난중일기의 1592년 9월 18일 자(갑술 양력 10월 22일) 기록에서 <"행재소에서 쓸 종이를 넉넉하게 올려 보내라"고 했으나, 계본을 받들고 가는 사람이 고생스럽게 길로 무거운 짐을 가지고 갈 수 없으므로 우선 장지(狀紙) 열 권을 올려 보냄을 써 올렸다.>라고 썼고 이튿날에는 배로 행재소에 실어 간 이야기까지 썼다. 행재소는 왕이 상주하는 궁궐을 떠나 거둥할 때 임시로 머무르는 별궁이며, 계본은 조선 시대에 왕에게 제출하던 문서 양식이고 장지는 지방 벼슬아치들이 임금에게 보고하는 글을 쓴 종이를 뜻한다.[27] 아무리 찾아도 부정 축재 기록은 전혀 없다.[28] 대표적으로 명량 해전 때 자신의 공로를 안위에게 몰아준 것이 있는데, 그 덕에 안위는 초고속 승진을 하게 된다.[29] 실제로 이순신이 지휘하던 조선 수군은 전투에 따른 사상자보다 군율 위반으로 인한 처형자가 더 많았다.[30] 한자는 '있을 유'이지만 옛 한자 문법으로 말을 시작할 때 관용적으로 붙이는 글자로 영어로 치면 'the' 정도에 해당한다. 단순 문법으로 중국만 쓰라는 법은 없고 '有朝鮮' 등으로 쓸 수 있으며, 고려가 금석문에 '有高麗'를 많이 썼다.[31] 추증받은 품계와 직위. 이순신에 대한 추증은 하도 여러 번 이루어져, 최종판이라 볼 수 있는 충무공 묘표를 따른다.[32] 직위가 아니라 말 그대로 직위들을 겸했다는 뜻으로 사용된다.[33] 시호란 뜻이다.[논란] 최초 출전은 조선왕조실록이다. 정조 38권, 17년 7월 21일(임자) 첫 번째 기사. 명나라에서 도독 벼슬은 '정1품'이다. 다만, 이와 관련하여 실제로는 명 도독직이 수여된 것이 아니라는 논란이 있는데, 정작 수여를 한 명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명사(明史)와 명실록(明實錄)에는 수록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충렬사에 소장된 도독인(印)의 글씨체도 다른 명나라 도독인의 글씨체와 전혀 다르다.연구 결과 현대 학자들도 여러 의견이 상충되고 있으며, 명확한 진실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보통 벼슬을 제수할 때는 현재의 계급과 보직에 해당하는 산직과 실직이 주어지게 되는데, 이 '수군 도독'이라는 벼슬은 보직에만 해당하고 '대광보국숭록대부'나 '특진보국삼중대광'과 같은 산계 즉 계급이 없다. 산직이 없이 실직만 가지고 있는 벼슬아치는 없기 때문이다. 해당 사항에 대해서는 이순신/논란 문서로.[35] 선무공신은 임진왜란에서 공을 세운 신하들에게 내려졌는데, 그중 1등급이 효충장의적의협력선무공신이다. 한 등급이 낮아지면 두 글자씩 뺀다. 1등 공신을 받은 사람은 딱 3명인데, 이순신, 권율 그리고 원균이다. 심지어 선조는 조정 신료들이 탐탁지 않게 여겼음에도 아득바득 우겨서 원균을 상기 등급에 봉한 반면, 이순신을 최고 등급 공신으로 봉하는 것에 대해서는 굉장히 껄끄러워하는 기색을 보였다. 하지만 이미 공이 천하를 덮었고, 아무리 가리려 해도 가릴 수 없었기에 당연히 공신에 책봉되고 그것도 으뜸인 원훈으로 봉해진다. 공신 책봉 과정에서 선조가 보여준 모습은 이순신 장군에 대한 질투와 공포가 얼마나 막장까지 치달아 있었는지 잘 알 수 있는 부분이다.[36] 정1품의 품계. 그것도 같은 정1품인 보국숭록대부보다 상위 품계이다. 조선에서는 삼정승 및 각부 영사만 이 품계를 가지고 있었다.[37] 임진왜란 종전 직후에는 우의정, 그 후에 선무공신에 봉하며 좌의정에 추증되었다. 영의정으로는 정조 때 가증. 이때 정조가 말하길, "충무공이 돌아가신 이래로 아직까지 영의정에 봉하지 않은 것은 잘못된 일이다." 과연 조선 시대 충무공 1등 팬이라고 할 만하다.[38] 풀어쓰면 영경연, 영홍문관사, 영예문관사, 영춘추관사, 영관상감사이다. 영의정이 당연직으로 겸직하는 관직들이라 여기 같이 붙었다. 영의정이 겸직하는 관직 중에 세자시강원의 세자사(世子師)도 있지만 무관인지라 빠진 듯하다. 같은 품계를 추증받은 권율은 문관 출신이라 그런지 세자사가 같이 추증되었다. 이순신이 사후 받은 현대식 정의의 직위는 수군 도독, 영의정, 2가지다. 다른 영경연, 영홍문관사, 영예문관사, 영춘추관사, 영관상감사는 영의정이 오르면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명예직들이다.[39] 개풍 지역의 부원군. 덕풍은 본관인 덕수(德水)의 별칭이다.[40] 역대 임금이나 공신들에게 내리는 이름이다. 문반은 '文', 무반은 '忠'으로 시작하는 시호가 가장 격이 높다.[41] 행수법(行守法)에 따라 붙은 것이 아니고, 사후 증직이 되었을 경우 살아 있을 때 지냈던 관작 앞에 붙인다. 행수법을 쓸 경우 품계가 아니라 실무직 앞에 붙어 '정헌대부 행삼도 수군통제사'가 되어야 한다.[42] 정2품의 품계로, 고려와 마찬가지로 조선문반우대를 보여준 예시로서 고위직을 문반이 장악하고 통제하기에 용이하고 군사 분야에서도 군 고위직에 문반들을 임명하는 것에 이상이 없게 하기 위한 장치이다. 무반도 병마절도사가 되려면 종2품 가의대부 / 가선대부를 받아야만 한다. 무반 품계는 정3품 당상관인 절충장군이 최고이고, 그 이상으로 가려면 문반 테크를 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순신이 정유년 파직되기 전 품계는 정2품 상계인 정헌대부였다. 그러나 이후 이순신이 다시 복직될 때 품계는 정3품 절충장군인데 이는 선조가 "내 무슨 할 말이 있으리오."라며 겉으로는 사과를 하면서도, 한편으론 이순신에게 엿을 선사한 것이다. 오늘날로 치면 해군작전사령관에게 반란죄 누명을 씌워 남영동 분실로 끌고 가 물 고문하고 이등병으로 강등시킨 뒤 상황이 급해지니 다시 군사령관으로 복직시키면서 계급은 투스타로 준 격이다. 명량 해전의 기적 같은 대첩 이후에도 선조는 이순신의 품계를 올려주는 것을 꺼렸다. 1년 전만 해도 정헌대부의 품계를 받은 분이었기 때문에 그냥 기존의 품계를 돌려주면 되지만 선조는 끝까지 버틴다. 결국 명나라 경리 양호나 군문 형개 등이 끈질기게 선조를 압박하며 "이순신 장군의 벼슬을 올려주라"고 조르자 그제서야 정헌대부의 품계를 돌려주는 천하제일의 찌질함을 선보인다.[43] 이순신이 생전 받은 직위를 현대식으로 옮겨보면 직속 함대사령관해군작전사령관해군참모총장이라고 할 수 있다. 삼도 수군통제사가 현대의 해군참모총장 개념이 아니라는 주장이 있는데 사실 어느 정도는 맞는 말이긴 하다. 당시 편제를 봐도 각 함대의 사령(경상 좌/우수사, 전라 좌/우수사, 충청 수사)이 각각 따로 있는 상태에서 5명의 수사(水使)의 총사령을 맡는 직책이며(이외 다른 수영은 삼도 수군통어사가 지휘한다.) 수사가 삼도 수군통제사보다 한 직급 아래(수사는 정3품, 삼도 수군통제사는 종2품)라는 걸 감안하면 더욱더 해군참모총장보다는 해군작전사령관에 비유하는 게 맞는다. 현대 대한민국 해군해군본부가 아닌 해군작전사령부에 각 함대사령부와 작전전단의 지휘권이 있다. 다만 삼도 수군통제사는 현대로 비유하면 군령권(작전권)과 군정권(작전 이외 교육, 인사, 기술 행정)을 모두 가지고 있으므로 군정권을 가지는 해군참모총장이 군령권을 담당하는 해군작전사령관까지 겸임하는 경우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44] 실제로 대한민국의 해군참모총장은 대장 계급으로 장관급의 의전을 받는다. 그런데 조선 후기의 관직 체계상 통제사는 종2품직으로 차관급이며, 이순신이 칠전량 패전 이후 복귀할 때에는 정3품직으로 어쩔 수 없는 전시 상황에 발탁된 것이지, 잘못된 모함에 대한 해결을 받지 못한 채 있었다. 다만, 삼도 수군통제사직이 만들어 졌을 때, 이미 이순신은 국방부장관이라 할 수 있는, 병조판서와 동급인 정2품 상계 정헌대부의 품계였고, 또한 일시 파직으로 인해 몰수된 정2품 품계를 명량 해전 이후 명나라 경리 양호의 압박 때문에 선조가 돌려 주었으므로, 현대에 빗대봤을 때, 대장 계급으로 해군참모총장을 역임했다 봐도 무리는 없다. 게다가 현재 국군을 기준으로 봐도 비록 장관급 대우를 받긴 하지만 해군참모총장은 엄연히 장관인 국방부장관 아래다. 삼도 수군통제사가 국방부장관 격인 병조 판서의 바로 아래인 종2품이라는 걸 감안하면 종2품이더라도 현대의 해군참모총장으로 봐도 별 무리가 없다.[45] 애초에 조선 시대와 현대의 관직과 사후 추증을 정확히 대응하여 논할 수는 없다. 하지만 충무공의 사후 당시 충무공에 대한 위상이나 현재 대한민국에서 이순신에 대한 국민감정을 모두 고려해도 이러한 훈장이 무리라고 볼 사람은 없을 것이다. 아니, 오히려 사후에 어떠한 대접으로도 이순신의 업적과 희생을 온전히 아우르긴 힘들다고 보는 편이 적절하다.[46] 친왕급으로서 당시 선조와 동일한 품계다. 다만 실제 의전에서 황제의 친족인 친왕이나 제제후국왕 중 제일인 조선 국왕과는 비교할 수 없다.[47] 다만 동양 관직에서 최고직은 실제로는 비워 놓은 적도 있었던 점, 영의정이 아니더라도 좌의정만 있어도 의정부 운영이 가능한 점을 생각해 보면 국무총리=영의정은 아니다. 삼정승이 합의해 국무총리직을 수행한 셈이다.[48] 오늘날로 치면 국방부 장차관을 장교라고 부르는 꼴이다.[49] e.g. Admiral Nelson(넬슨 제독).[50] 애드미럴 오브 더 플리트, Admiral of the Fleet, ADMF[51] Admiral of the South, North and West[52] 예) 저 아이 힘이 좋은 게 장군감이다. 또한 반쯤 조롱 격이지만 미국 총기 난사의 범인인 조승희를 장군이라 칭하기도 한다. 그리고 북한에서는 그들의 영도자를 지칭하는 칭호로 쓰인다.[53] 광화문광장에 있는 충무공 이순신 동상보다 더 실제에 가깝다는 평가가 많다.[54] 늦은 나이에 급제했다고 설명하는 경우가 많은데, 실제론 거의 평균적인 나이에 급제했다.[55] 종4품 이상의 무관부터 장군.[56] 일종의 병기고 임시 검열관.[57] 순서를 따지지 않고 채용하다. 1587년에 전라도 손죽도를 왜구가 침범하는 사건이 벌어졌는데, 전라 좌수군은 싸울 생각을 하지 않고 피하기 바빴으며, 녹도 만호 이대원만이 장렬하게 싸우다 전사하게 되었다. 이 사건 이후 일본에서 전쟁을 준비한다는 첩보와 징후를 감지하자, 조정에서 유능한 무관들을 특채로 채용하기 위해 이러한 제도를 시행한 것이다.[58] 이순신의 일대기를 볼 때 이 정읍 현감 시절이 인생에서 그나마 평온했던 시기였다 할 수 있다. 정읍 현감 이전엔 파직과 강등, 백의종군을 겪어야 했고 정읍 현감 이후 전라좌도 수군절도사가 되어선 전쟁을 준비하느라 분주했다. 1년 뒤 임진왜란이 발발한 다음 충무공의 삶은 그야말로 눈물이 앞을 가린다. 무엇보다 정읍 현감으로 재직하던 때는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 지내던 시기였다. 이때 고향에 있던 노모와 조카들을 정읍으로 옮겨 살게 했다.[59] 변방 수령은 만 1년이 되지 않으면 자리를 바꿀 수 없다.[60] 만포 첨사는 특별히 정3품(소장) 당상관으로 임명하는 자리다. 성종 15년(1484년) 8월 8일(임술) 1번째 기사 경연 후 지평 한건 등과 위장 김유완의 체직·영안도의 양전 등을 논의하다. 연산 2년(1496년) 11월 13일(병진) 2번째 기사 정언 조원기가 이윤종을 만포 첨사로 제수하지 말 것을 건의하다, 연산 2년(1496년) 12월 9일(임오) 2번째 기사 가자, 김효강, 노사신 부자 등의 일로 구치곤 등이 경연에서 아뢰다, 연산 3년(1497년) 1월 22일(갑자) 4번째 기사 만포 진장에 무신으로 당상관인 재주 있는 자를 보내기를 의정부가 청하다, 중종 20년(1525년) 11월 29일 갑신 4번째 기사 헌부가 김안정·서수천의 체직과 서원정 이구의 죄상에 대해 아뢰다, 명종 12년(1557년) 1월 12일(병인) 3번째 기사 조광원·이명·목첨·강섬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등의 실록 기사를 보면 만포 첨사를 당상관(정3품 上 절충 장군)으로 보임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61] 거북선에 대한 기록은 태종 때부터 있었다. 다만 태종실록에서 언급되는 귀선과 이순신이 건조했다는 귀선이 같은 종류의 배인지는 현재까지 불분명하다. 그리고 거북선이 전쟁 발발 하루 전에 완성되었다는 것은 잘못 알려진 것이라고 한다. 하루 전날은 총통을 발사한 날이다. 유튜브 '역사기행 그곳 여수/보성 충무공 루트 1부'에서도 최태성 교수가 이를 지지하였다. 유튜브 부산MBC에서 방영한 '부산포해전 1부'에서도 이를 지지하였다.[62] 합참의장) 권율이 이 계급이었으니 사성 장군으로 봐도 무방하다.[63] 난중일기에 의하면, 이때 가장 먼저 찾아온 사람이 바로 무의공 이순신이라고 한다.[64] 난중일기 中: 丁酉 4월 19일: 일찍이 길을 떠나며, 어머님 영전에 하직을 고하고 목놓아 울었다. 어이할꼬, 어이할꼬. 천지 간에 나 같은 자 또 어디 있으랴. 차라리 빨리 죽느니만 못하도다.[65] 난중일기 中: 1597년 10월 14일: 저녁에 천안에서 사람이 와서 집 편지를 전하는데 겉봉을 뜯기도 전에 골육이 떨리고 심기가 혼란해졌다. 겉봉을 대강 뜯고 열의 글씨를 보니 바깥 면에 '통곡'이란 2자가 쓰여 있기로 면이 전사했음을 알고 간담이 떨어지는 것도 모르고 목놓아 통곡, 통곡했다. 하늘이 어찌 이리 어질지 못하시더냐, 간담이 타고 찢어지는 듯하다. 내가 죽고 네가 사는 것이 이치에 맞거늘 네가 죽고 내가 살아 있으니 이렇게 어긋난 이치가 어디 있으랴. 천지가 흑암에 덮이고 해조차 빛이 변했구나. 슬프다 내 아들아. 네가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갔느냐. 네 재주가 뛰어나 하늘이 이 세상에 놔두지 않는 것이냐. 내 죄가 많아 네 몸에 미친 것이냐. 내 지금 세상에 살아 있으나, 이제 어디에 의지하랴. 너를 따라 죽어 지하에서 같이 울고 싶지만 네 형, 네 누이, 네 어머니가 의지할 곳이 없겠으니 아직은 참고 살겠으나 마음은 죽고 몸만 남아 통곡하고 통곡할 따름이다. 하룻밤 지내기가 1년 같도다.[66]전라남도 여수시 율촌면 장도리에 있는 섬으로 지금은 산업 단지로 인해 매립되었다.[67] 부인의 사촌 오빠를 이르는말[68] 다만 이 책봉에는 여러 논란들이 잇는데, 대표적인 경우가 이순신과 악연 중에 악연이던 원균이 이순신과 같이 1등 공신에 봉해진 것이다.[69] 이열 또는 이울로 불린다.[70] 李葂, 1577 ~ 1597. 부친을 따라 종군한 형을 대신해 고향 아산에서 가족들과 살고 있었는데, 명량 대첩 직후 이순신 일가를 해하려 온 일본군에 맞서다 죽었다. 아직 어려서인지 결혼하지 않아 자녀가 없었다. 난중일기에서는 이 충무공이 2번째 백의종군 중 모친의 부고와 연이어 3남의 죽음을 전해듣고 비통해한다. 아산 현충사 권역에 묘가 있다.[71] 이정의 조부인 이거(?~1502)가 정3품 당상관을 역임했다. 이순신에게 증조부가 되는 이거는 연산군의 세자 시절 스승이었고 강직한 간쟁으로 이름이 높아 '호랑이 장령'이라는 별명이 있었다고 한다.[72] 창신교위는 무관 품계이다. 이는 조부 이거의 공적을 생각해서 주는 것으로 무반직을 역임한 것으로 보인다.[73] '자당'은 상대방의 어머니를 높여부르는 호칭이다. 말 그대로 이순신 어머니가 기거한 곳이라는 뜻이다.[74] 《난중일기》, 1594년 1월 12일[75] 출처: 문집인 《서애집(西厓集)》[76] 실제 살던 곳도 가까웠다. 이순신이 성장한 곳은 염치읍 백암리 현, 현충사 일대이며, 홍가신은 이웃한 염치읍 대동리였다.[77] 이순신이 친지들에게 보낸 편지들을 모은 글.[78] 이우신은 생몰년 미상에 참봉.[79] 두 형이 함께 손을 잡고 울면서 "네가 장례도 못 치르고 이 천 리 길을 떠나와 있으니 이제 누가 모든 일을 주장하겠느냐. 통곡한들 도리가 있겠느냐"하고 슬퍼했다고 한다. 이순신은 이 다음 문장에 '형님들이 이 먼 곳까지 혼령으로서 따라와 걱정해 주셨다'며 두 형을 슬피 그리워했다.[80] 병조 정랑은 품계상 정5품이지만, 그 유명한 '이조 전랑' 자리와 비슷하게 무반직 인사권을 가진 핵심 보직이었다.(이조의 정랑과 좌랑을 전랑이라고 지칭하는 것처럼 병조의 정랑과 좌랑도 전랑이라고 지칭한다)[81] 단, 이이와 이순신은 19촌 관계로 당대에도 덕수 이씨라는 가문만 같지 사실상 남남이었다.[82] 이분과 이완은 큰형 희신의 이남, 삼남이고 이봉은 작은형 요신의 맏이다.[83] 이열, 이울 등 남아있는 이름이 여럿인데 덕수 이씨 세보에는 이예(李䓲)로 적고 있다.[84] 덕수 이씨 세보에 의한 숫자이다. 무과방목에 의하면 덕수 이씨 전체 무과 급제자 수는 79명으로 전체 64위이다.[85] 그것도 다름 아닌 이순신의 차남 이열이었다. 다시 말해 이열 이후로 과거에 급제한 이순신 가문 사람들은 전부 무과였던 셈.[86] 심지어 율곡 이이도 덕수 이씨 가문이었으나 이순신에게 밀렸다. 성리학을 우선하던 조선 중후반 시기에 공자와 동급으로 올리는 문묘 배향에 종묘에도 배향된 공신인 이이가 밀린 것만 봐도 충무공을 위한 대우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알 수 있다.[87] 충성 충, 애쓸 민. 나라에 대한 충심을 지켜 안타까운 최후를 맞이했기에 붙은 시호.[88] 권중현은 권율의 10대손으로 어머니가 이순신의 둘째였던 이예의 7대손인 이승권의 딸이다.[89] 해당 검은 현재 현충사에 보관되어 있다.#[90] 한 곡조의 풀잎피리 소리라는 설과, 일본 피리 소리라는 설이 있다.[91] 노산 이은상의 번역문.[92] 부하를 위로하고 사랑하는 것을 뜻한다. 오자병법에 나온다.[93] 원문: "임진년부터 5~6년간 적이 감히 호서호남으로 돌입하지 못한 것은 수군이 그 길을 누르고 있어서입니다. 지금 신에게 아직 12척 전선이 있사오니(尙有十二 상유십이) 죽을 힘을 내어 막아 싸우면 이길 수 있습니다. 지금 만약 수군을 모두 폐한다면 이는 적들이 다행으로 여기는 바로서, 이로 말미암아 호서를 거쳐 한강에 다다를 것이니 소신이 두려워하는 바입니다. 전선이 비록 적으나, 미천한 신이 아직 죽지 않았으니(微臣不死 미신불사) 적들이 감히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입니다." 죽을 힘을 다해 적을 막겠다는 필승의 신념과 함께, 수군을 폐하면 적이 즉시 서울까지 갈 수 있다고 선조의 경각심을 일깨우고 있다. 이 문구는 대한민국 해군의 큰 가치로서 지금 이 순간에도 해군 장병들의 가슴속에 살아있으며, 대한민국 해군 기초군사교육단에도 적혀 있다.[94] 이순신 만화를 그리고 있는 미국인 만화가 온리 콤판은,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이순신의 명언으로 이걸 꼽았다.[95] 명량 해전 전날인 1597년 9월 15일.[96] 많은 사람들이 흔히 "적에게 알리지 마라"라고 알고 있지만, 이는 틀린 것이다. 보다시피 이 유언 중에 "적에게"라는 말은 한글이든 한자든 단 한 글자도 적혀 있지 않으며, 후세 사람들이 전쟁의 분위기에 맞추어 추가한 것으로 보인다. 전장에서 적에게 아군 지휘관의 죽음을 알리면 안 되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이며, 꼭 지휘관뿐만 아니더라도 부상자 발생, 포탄 및 보급품 잔여량 등등 아군의 정보는 그 중요성을 떠나서 당연히 적에게 알리면 안 된다. 다만, 내용 자체는 적에게 알리지 말라는 내용이 맞다. 자신의 죽음이 알려짐 = 아군 수군들의 사기가 하락함 = 적이 자신의 죽음을 눈치채고 사기가 증가할 수 있으니 아군에게(= 적에게) 죽음을 알리지 말라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사람에 따라서는 내 죽음은 승리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니 적을 물리치는 데 집중하라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어 "적에게"란 표현이 빠진 원문이 더 비장하다고 느끼기도 한다.[97] 이순신 장군의 조카.[98] 정조 때 편찬된 이충무공전서 원문이 많고, 초고본은 원문은 매우 드물다. 대신 초고본 한글 번역문은 꽤 많은 편.[99] 원문상에는 '적' 자가 없지만 주어를 넣어서 의미를 이해한다. 한문에서는 주어를 자주 생략하기 때문이다.[100] 반역 모의를 사전에 고발한 공을 인정받아 정3품 상호군에 임명되었다. 다만 성격이 영 개차반인 데다 모의가 있었음을 알고도 바로 고하지 않았던 것, 반역 모의를 고발한 것을 관직을 줄 만한 공으로 친다면 거짓 고발이 있을 것임이 우려된 것 등으로 인해 결국 관직을 박탈당했다.[101] 인종(仁宗)의 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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