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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21 13:38:56

삼정승

<colcolor=#fff> 삼정승
좌의정 영의정 우의정
육판서
이조판서 호조판서 예조판서 병조판서 형조판서 공조판서


1. 개요2. 역할3. 평가4. 여담

1. 개요

삼정승()은 의정부영의정·좌의정·우의정을 말하며 조선 시대 백관의 장으로서 국정을 통괄하던 최고위 관리인 정승을 통칭하여 이르던 말이다.

2. 역할

조선의 통치시스템, 즉 정치적 의사결정 과정은 왕의 독단으로 결정하지 못하게끔 시스템화되어 있었다. 가령 광해군인목대비를 폐위할 때나, 성종숙종이 각각 폐비 윤씨인현왕후를 폐비할 때, 대신 즉 의정부 삼공의 합의가 이루어져야 했다. 국가의 대소사는 왕과 삼정승[1]의 합의가 있어야 시행될 수 있는 구조였다.

또한 9경이라 불리는 정2품의 6조 판서한성부의 장인 한성판윤, 의정부의 좌참찬우참찬을 발탁하는 것도 의정부의 권한이었다. 그래서 의정부를 정부(政府)라고 칭했으며, 지금으로 치면 내각과 같다고 볼 수 있다. 의정부는 영의정과 좌의정, 우의정으로 구성되었으며, 합의체제로 운영되었다. 영의정은 수상으로 불렸으나, 실제 좌·우의정과 같은 정1품의 품계로서, 영의정이 특별히 더 많은 권한을 행사한 건 아니었다.[2][3]

이처럼 의정부는 나라의 국정을 주관하고 백관을 통솔하고 서정을 총리하던 조선시대 최고의 정무기관이며, 묘당이라고도 한다.

신흠의 묘지명에서는 정승인 자신이 대간에 의해 탄핵되자, 다음과 같이 상소한다.
"신이 비록 보잘 것은 없으나 대신의 반열에 있으니 지위와 예우가 대간보다 조금 중하고 또 사단칠정(四端七情)을 보통 사람처럼 똑같이 갖고 있는데 신이 무엇이 남에게 뒤지기에 수오(羞惡) 하나만을 버리겠습니까. 2백 년 동안 정부는 중요한 자리로서 여러 상신(相臣)이 역임하였는데 마침 신을 만나 이처럼 더렵혀졌으니 어찌 신만의 불행이겠습니까.

그런데 성상의 비답을 받아 보건대 “스스로 체면을 이지러뜨렸다.”라고 하교하시니, 신이 더욱 황공함을 견딜 수 없습니다. 이른바 ‘체면’이란 것은 신이 욕을 당하던 날에 이미 이지러졌습니다. 신이 비록 무릅쓰고 나간다 한들 이미 이지러진 체면에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대체로 대신이란 반드시 사람들의 기대가 모아져 한때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자라야 체면을 이지러뜨리지 않을 수 있는 것인데, 사람들에게 짓밟히고 유린당한 신과 같은 자로써 이를 담당하게 하였으니, 체면을 이지러지지 않게 하고 싶어도 어려운 것입니다. 원하건대, 성명께서는 어서 면직하시고 반드시 현명하고 덕있는 사람을 구해 제수하여 백관으로 하여금 법받을 수 있게 하고 조정의 기강이 통속될 수 있게 하소서."

이후에도 특정 인물이 인망이 부족하거나 당색을 달리하면 정승에 임명 자체를 비판하기도 한다.
선조실록 99권, 선조 31년 4월 26일 경진 2번째기사 1598년 명 만력(萬曆) 26년

우의정 이덕형[4]이 연소함을 이유로 사직을 청하였다.

우의정 이덕형(李德馨)이 【젊은 시절 재화(才華)로 이름을 날리기도 하였으나 임진 왜란을 당하여 서쪽으로 파천했을 때 군소배(群少輩)들과 어울려 예절을 상실하였고, 또 유성룡(柳成龍)과 함께 일하였는데 모든 일들이 보탬은 없고 해만 있었다. 일찍이 중국 장수의 접반관으로 있으면서 통진(通津) 쌀 1백 석을 어디에다 쓰는 양 통첩을 하고 통진으로 달려가 관가가 비어있는 시기를 이용하여 쌀 1백 석을 자기의 고을 농사(農舍)로 보냈었는데, 아전들이 붙들고 울면서 뒤에 오는 수령은 무엇을 먹을 것이냐고 호소하였으나 들은 체도 아니하고 공공연히 싣고 갔다. 】 상소하기를.......

정승의 임명은, 정승이 죽거나 면직되는 경우, 왕이 복상(매복)을 명하고, 나머지 현임대신이 2품 이상 판서 중에 3인을 추천해 올리면, 왕이 그중 한 명을 낙점함으로써 임명된다. 보통 매복단자에는 왕의 의중이 반영되는데, 왕이 생각하는 인물이 없을 경우 "가복", 즉 인원을 더 추천해 넣으라 명하여 임명되는 경우도 있다. 숙종 때에는 이조판서 조사석(서인)을 임명하기 위해 8번이나 가복을 하기까지 하였다. 또는 임금이 현 의정부를 불신하여 삼정승을 모두 파직하는 환국을 단행할 경우, 특배로 정승을 제배하기도 하였다.
정조실록 51권, 정조 23년 4월 3일 신묘 2번째기사 1799년 청 가경(嘉慶) 4년 이조 판서 이시수를 의정부 우의정으로 삼다.

정승을 뽑았다. 【전에 김희(金憙)와 심환지(沈煥之)를 의망하고 이시수(李時秀)를 추가로 의망하였다.】 이시수를 의정부 우의정으로 삼았다.

상이 정승을 가려 뽑을 것을 명하니, 좌의정 이병모(李秉模)가 입대하여 상이 선발할 것을 청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옛날 선묘조(宣廟朝) 때에, 정승의 일에 맞고, 정승의 명망이 있고, 정승의 재주가 있는 자를 뽑아들이라고 하교하였었는데, 돌아보면 지금은 인재들이 매우 적다. 이 몇 가지를 겸한 사람은 물론 얻기 쉽지 않겠지만 인재는 다른 시대에서 빌리지 못하며 구하는 방법도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경은 인재를 천거하는 것으로 인군을 섬기는 직책에 있으니, 경의 의중에는 반드시 적임자가 있을 것이다."

하니, 이병모가 아뢰기를,

"신은 하찮고 식견이 얕아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성상께서 정승의 일, 정승의 명망, 정승의 재목에 맞는 인재를 찾으라고 하교하셨는데, 정승의 명망은 비록 정승의 후보자를 추천하기 전에 있는 것이지만 정승의 일과 정승의 재목감에 대한 것은 정승이 된 뒤의 일이니, 무엇으로 미리 헤아리겠습니까. 오직 성상께서 어떻게 선발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선정(先正)과 고 봉조하가 경연에서 아뢴 뒤에도 이미 이조 판서를 거친 뒤에야 비로소 정승으로 추천받는 디딤돌이 되었으니, 마땅히 이런 이력을 일일이 들어서 대답해야 할 것입니다.

정민시(鄭民始)와 김재찬(金載瓚)은 인망이나 지위로 볼 때 합당하고, 송환기(宋煥箕)는 비록 공무를 보지는 않았지만 유현(儒賢)으로 특별합니다. 이시수(李時秀)는 정승 집안 사람이고 경력이 많습니다. 신의 소견은 대체로 이와 같습니다."

하였다. 상이 판중추부사 심환지에게 이르기를,

"좌의정이 아뢴 것이 어떠한가?"

하니, 심환지가 아뢰기를,

"네 사람의 지위, 명망, 그리고 이력은 비할 사람이 드뭅니다. 신 또한 다른 의견이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맨 처음 거론한 사람에게는 정승직을 주고 싶지 않다. 그 다음은 고 정승의 아들인데, 고 정승은 내가 정승에 임명했던 사람으로 항상 쉽게 얻을 수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다. 지금 대를 이은 자식이 이미 높은 품계에 올라 이 벼슬에 의망되기까지 하였구나. 지금의 형세는 좌의정 혼자만이 수고한다는 탄식이 있다. 이 중신은 이따금 큰 병을 앓아 건강을 회복하려면 아직 멀었다. 유현은, 우리 나라의 고사에도 많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전후로 내려준 벼슬에 대해서 아직 명을 받지 않았으니 갑자기 이 벼슬을 주기는 어렵다.

이조 판서는 그 집안이 옛 정승이었고 그 또한 어진 대신이니, 대를 이어 등용하는 것은 매우 좋다. 이조 판서의 종숙(從叔)은 판의금부사로서 대간의 상소로 인하여 체직된 사람이니, 비록 이조 판서를 지내지 못하였으나 또한 좋다."

하였다. 이병모가 아뢰기를,

"두 중신은 비록 이조 판서의 경력은 없지만 보잘것없는 신에 비하면 월등할 뿐만이 아닙니다."

하고, 심환지가 아뢰기를,

"만일 품계와 경력으로 논한다면 이미 이조 판서를 지낸 사람보다 나은 사람이 없을 것이지만 사람이 정말 적합하다면 어찌 이런 것에 구애받겠습니까."

하였다. 이병모가 아뢰기를,

"상께서 정승을 임명하신다면 오직 어떻게 특별히 선발할 것인가에 달렸습니다. 아래에서 거행한다면 대부분 이조 판서의 이력을 가진 사람을 취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의 말이 이와 같으니, 이조 판서를 정승에 임명하겠다. 나의 정승은 결정되었다."

하였다. 이에 이시수가 이조 판서로서 정승에 들어갔다.

미수 허목은 조선 예학에 종주로 추앙받은 남인 인물이었다.
숙종실록 4권, 숙종 1년 6월 23일 경진 2번째기사 1675년 청 강희(康熙) 14년

허목을 우의정을 삼다.

허목(許穆)을 우의정(右議政)으로 삼았다. 허목이 어제 저녁에 복상(卜相)의 명(命)이 내렸음을 보고 자기의 이름이 금구(金甌) 속에 있을 것을 알았다. 그래도 혹시 얻지 못할까 염려되어 급히 전서(篆書)로 고요모(皐陶謨)를 써서 새벽을 기다려서 임금께 올림으로써 자기의 기예를 과시하였다. 그리고 그 글씨에 ‘하늘이 죄 있는 이를 치고 하늘은 예(禮) 있는 이에게 관질(官秩)을 준다.’는 말이 있었다. 허목이 바야흐로 죄를 치고 예(禮)를 밝힌 것을 자기의 공(功)으로 여겼기 때문에 임금이 이를 보고 정승으로 삼아주기를 바란 것이다. 허목은 80세의 나이로 관직(官職)의 욕심이 동(動)하여 분주하고 급급(汲汲)함이 이와 같았다.

영의정(領議政) 허적(許積)은 명패(命牌)로 불렀어도 나오지 아니하였다. 우의정(右議政) 권대운(權大運)이 대궐에 나가면서 허적에게 묻고는 민희(閔熙)와 허목(許穆)을 새로 복상(卜相)하여 들였다. 그 때에 문안(問安)을 왔던 여러 재신(宰臣)들이 다 파(罷)하여 갔는데도 민희만이 홀로 이유도 없이 머물러 있으면서 희망하는 빛이 현저(顯著)하게 있었는데, 그의 이름이 첫머리에 천거되었음을 듣고서야 나갔다. 자전(慈殿)이 겨우 통박(痛迫)한 하교를 내리니 조야(朝野)가 크게 놀랬으며, 임금도 또한 병으로 몹시 괴로와서 바삐 서둘러서 허목을 정승으로 삼았으나, 외부의 사람들은 이를 깨닫지 못하였다. 허목은 노직(老職) 첨지(僉知)로서 겨우 반년(半年)을 지나는 동안에 벼슬을 다섯 번이나 옮겨서 삼공(三公)에 이르렀으니, 이는 전고(前古)에 없던 일이다. 이보다 앞서 동요(童謠)가 있었으니, ‘허허 우습다[許許又所多].’라 하였다. 방언(方言)에 웃음[笑]을 ‘우습다[又所多]’라고 하므로, 사람들은 두 허씨(許氏)가 나란히 정승이 된다는 보응이 이에 이르러 과연 징험하였다고 하였다. 허목은 10여 년 전에 건저(建儲)의 소를 올린 바 있었는데, 당시 사람들이 이를 큰 공(功)으로 여겼다. 민희는 맨손으로 〈정승에게만 잘 보여서〉 도리어 그 위에 있으려 하였으니, 우원(迂遠)하다고 이를 만하다.

그 이외에 정승 임명이 부적절하다고 생각되면 사관은 이를 가차없이 비판하였다.
영조실록 40권, 영조 11년 11월 20일 을묘 3번째기사 1735년 청 옹정(雍正) 13년

김재로를 좌의정으로, 송인명을 우의정으로 삼았다.

김재로(金在魯)를 좌의정으로, 송인명(宋寅明)을 우의정으로 삼았다. 김흥경(金興慶)이 차서대로 영의정으로 승진하였는데, 처음에 상신을 매복(枚卜)하라는 임금의 명령이 내려지니, 김흥경(金興慶)이 청대(請對)하여 임금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고 물러나와 매복한 다음에 들어왔다. 송인명은 탕평책(蕩平策)의 이론을 주장하여 임금의 뜻을 교묘하게 맞추어서 과거에 급제한 지 겨우 17년 만에 갑자기 상신의 자리에 올랐다. 김재로는 변변치 못한 재주로써 까다롭고 잗단 성품으로 아첨하며 간사한 짓을 하였으나, 임금이 그의 지론이 과격하지 않다고 하여 송인명과 함께 아울러 상신의 자리에 승진시켰으니, 대개 탕평책을 책임지워 이루려 한 것이었다. 이날 조현명(趙顯命)을 이조 판서로 삼았는데, 조현명도 또한 탕평책을 주장하는 자였다. 신사철(申思喆)을 판의금부사로 삼았다.
영조실록 44권, 영조 13년 6월 12일 기사 4번째기사 1737년 청 건륭(乾隆) 2년

송인명을 다시 우의정으로 삼다

다시 송인명(宋寅明)을 임명하여 우의정(右議政)으로 삼았다.

사신은 말한다. 보상(輔相)은 나라의 고굉지신(股肱之臣)이니, 백성이 다 함께 우러러보는 바이다. 죄가 있다면 비록 용서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그 미세한 잘못과 대수롭지 않은 실수로써 경솔하게 출척(黜陟)을 더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송인명(宋寅明)이 10년간 국권을 잡고 탕평(蕩平)의 이름을 빌려서 간사함을 농락하며 나라를 병들게 하였으니, 이것을 죄로 삼는다면 그가 진실로 한마디 말도 할 수가 없다. 한낱 이현필의 일로 인하여 잠깐 파직되었다가 도로 복관(復官)하기를 미관(微官)과 서료(庶僚)같이 하였으니, 정말 애석하다.
선조수정실록 29권, 선조 28년 2월 1일 갑진 2번째기사 1595년 명 만력(萬曆) 23년
정탁을 우의정으로 삼다.

정탁(鄭琢)[5]을 우의정으로 삼았다.

정탁은 본래 영남의 한족(寒族)으로서 젊어서부터 명성이 없었는데, 일찍이 이황(李滉)의 문하에 수학하여 동배들의 끌어줌을 입었기 때문에 드디어 현달한 관직에 올랐다. 문학과 재국이 모두 일시의 명류(名流)에 미치지 못하였는데, 오직 비순(卑順)하고 겸공(謙恭)하여 남들에게 원망이나 미움을 받는 일이 없었기 때문에 정승에 이르게 된 것이다. 그는 몸가짐을 산승(山僧)처럼 하고 모습도 역시 이와 같았으므로 사람들이 그를 승상(僧相)이라 칭하였다.
영조실록 122권, 영조 50년 6월 28일 경술 4번째기사 1774년 청 건륭(乾隆) 39년

신회를 영의정으로, 이사관을 우의정으로 삼다.

신회(申晦)를 영의정으로, 이사관(李思觀)을 우의정으로 삼았는데, 모두 중비(中批)였다.

사관(史官)은 말한다. "신회는 탐욕스럽고 음탕하며 방자하고, 이사관은 몸가짐이 비천(卑賤)하였는데, 이들 모두가 재상의 자리를 차지하였으니, 나라 사람들이 모두 놀랐다."
영조실록 70권, 영조 25년 12월 13일 정해 3번째기사 1749년 청 건륭(乾隆) 14년

김약로가 우의정으로 정우량을 복상해 들이니 정승으로 제배하다.

이조 판서 정우량(鄭羽良)을 제배하여 우의정으로 삼고, 우의정 김약로를 좌의정으로 승배하였다. 처음에 임금이 김약로를 불러서 복상(卜相)할 것을 명하니, 김약로가 여러 옛 정승의 이름을 열거해 써서 올렸다. 임금이 또 가복(加卜)할 것을 명하니, 김약로가 이어서 청대(請對)하여 들어와 뵙고 임금의 뜻을 탐지한 다음에 이에 정 우량으로 복상해 들이니, 드디어 정승을 제배하였다. 김약로가 임금 앞에서 칭찬하기를,

"여망(輿望)이 돌아간 바이니, 현상(賢相)입니다."

하니, 임금이 기뻐하였다. 김약로가 말하기를,

"세도(世道)를 조제(調劑)하는 것은 오로지 이판(吏判)에게 달려 있습니다. 조재호(趙載浩)와 이천보(李天輔)는 이를 맡길 만하며 탕평(蕩平)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그렇게 여겼다. 김약로가 말하기를,

"지금 사람들이 만약 성상의 뜻을 우러러 본받는다면 세도가 어찌 이와 같겠습니까? 원컨대 수시로 살피시고 조절하시기를 엄하게 하소서. 그렇게 하지 아니하면 궤렬(潰裂)의 현상이 사방에서 나올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은 마땅히 새 정승과 더불어 더욱 힘쓰도록 하라. 만약 세도가 이에서 더함이 있다면 마땅히 선정전(宣政殿)에 앉을 것이다."

하였다. 이는 대개 정아(正衙)에 임어하여 당인(黨人)을 베어 버린다는 것을 이름이었다. 김약로가 말하기를,

"신이 전하를 받들어 국사(國事)를 위하고자 한다면 늙음이 장차 닥치는 줄도 모를 것입니다."

하였다.

그렇다면 정승은 왕과 어떻게 국정을 운영했을까?
경종실록 14권, 경종 4년 3월 7일 신사 2번째기사 1724년 청 옹정(雍正) 2년

이진검·김시환의 품계를 올려서 육조 판서에 수용하게 하다.

우의정 이광좌(李光佐)가 약방(藥房)의 입진(入診)으로 인하여 아뢰기를,

"바야흐로 육경(六卿)에 사람이 모자랍니다. 아경(亞卿) 가운데 기절(氣節)을 세우고 인망이 드러난 사람이 있으니, 그 중 이진검(李眞儉)·김시환(金始煥)이 서차(序次)가 가장 오래되었습니다. 청컨대 품계(品階)를 올려서 수용(需用)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사신은 논한다. "이광좌가 비록 백관을 진퇴(進退)시키는 직임에 있기는 하지만 두 달이 채 못되어 네 사람이나 승진시켜 정경(正卿) 에 임명한지라, 사론(士論)이 그의 전제(專制)를 비난하였다고 한다."
영조실록 2권, 영조 즉위년 12월 18일 정해 2번째기사 1724년 청 옹정(雍正) 2년

대사헌 오명준이 이광좌를 비난하는 상소를 올리자 삭탈 관작하여 문외 출송하라고 명하다.

대사헌(大司憲) 오명준(吳命峻)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그리하여 무릇 천거하거나 빼버리는 데 관계되는 일은 오직 사랑과 미움에 달려 있습니다. 만약 그의 사당(私黨)일 경우라면 반드시 탁용(擢用)하고자 하되, 사람들의 말이 있을까 염려가 되면 수망(首望)과 부망(副望) 두 망(望)은 낙점(落點)을 받을 수 없는 사람으로 의망(擬望)에 채워넣고, 그 좋아하는 사람을 말망(末望)에 두어 천점(天點)을 받기를 바랐습니다. 만약 사람들의 말이 있을 경우, ‘성간(聖簡)이었다.’고 하며, 아무리 극선(極選)·중임(重任)이라도 제멋대로 취허(吹噓)하였던 것입니다. 지난 겨울에는 원접사(遠接使)가 채 회정(回程)하기도 전에 질병이나 긴급한 일이 있는 것이 아닌데도, 곧장 아경(亞卿)을 승진시켜 반송사(伴送使)로 삼을 것을 청하고, 또 두 사람의 가선(嘉善)을 곧장 자헌(資憲)으로 승진시킬 것을 청하여, 한 정목(政目)에 두 사람을 초자(超資)하는 일을 승전(承傳)으로 써서 냈습니다. 국조(國朝) 이래로 대신(大臣)이 사람을 천거할 때 혹 어필(御筆)로 특제(特除)하기도 하고 말망(末望)으로 낙점을 받는 경우도 있었습니다만, 승전을 받들어 초자한 경우는 3백 년 이래로 있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당(黨)을 부식(扶植)하는 데 급하다 하지만, 유독 국정(國政)을 천단(擅斷)하는 혐의(嫌疑)는 돌아보지 않는단 말입니까?

올해 해서(海西)에는 이미 병란(兵亂)도 없었고 또 적지(赤地)도 아닌데, 새 감사(監司)를 갈아치우고자 하여 6품계(品階)에 있는 사람을 초탁(超擢)하였습니다. 눈썹을 한 번 꿈틀하자 후사(喉司)에서는 까닭도 없이 간장(諫長)의 사단(辭單)을 봉입(捧入)했고, 전조(銓曹)에서는 새 감사를 간장으로 옮기더니, 얼마 안 있어 차자(箚子)를 올려 윤용(尹容)을 탁용(擢用)할 것을 청하였습니다. 그래서 윤용은 출륙(出六)한 지 겨우 여섯 달 만에 2품에 올랐으니, 그 권세(權勢)를 뒤흔듦을 알 만합니다. 위력으로 양전(兩銓)을 제어하되, 청한 바대로 시행하지 않으면 그 대신한 사람을 출사(出仕)하지 못하게 만들었으니, 전(前) 주부(主簿) 이세복(李世澓)이 곧 그 일례(一例)입니다. 권세가 중외(中外)를 기울이고 위세가 온 나라에 횡행하여 팔도 곤수(閫帥)의 반수가 그의 집 문(門)에서 나오고 사방의 선물 꾸러미가 그의 집으로 몰려드니, 그가 세상을 그르치고 나라를 병들게 한 것이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이미 선조(先朝)에 허물을 진데다 장차 신화(新化)에 누를 끼치려 하므로, 사람들이 모두 깊이 우려하고 몰래 한탄하고 있으나, 그 당원(黨援)의 위세가 두려워서 감히 말하는 자가 없으니, 신은 적이 통탄스럽게 여깁니다. 원하건대, 공정하게 들으시고 아울러 살펴 보시어 총행(寵倖)에 가리워지지 마시고 그 권병(權柄)을 빼앗아 권위(權威)가 아래로 옮겨지지 않게 하소서.

하였는데, 답하지 않았다. 이광좌가 금부(禁府)의 문 밖에서 대명(待命)하니, 임금이 사관(史官)을 보내어 별도로 효유(曉諭)하고 함께 들어오게 하였다. 이어 하교하기를,

"한 번 붕당(朋黨)이 생긴 이후로 공의(公議)가 막히고 호오(好惡)가 분명하지 않게 되었다. 더욱이 대신(大臣)은 나라의 주석(柱石)으로서 비록 과실(過失)이 있다 하더라도 양사(兩司)에서 합의(合議)하는 법이니, 사체(事體)를 중히 여기기 때문이다. 수규(首揆)는 명신(名臣)의 손자로 양조(兩朝)를 두루 섬겨 한 마음으로 봉공(奉公)하였으니 해를 꿰뚫는 듯한 충성을 신명(神明)에게 물어볼 수 있는데, ‘아첨하며 은총을 굳힌다.’느니, ‘위세가 온 나라에 횡행한다.’느니 하는 말을 제멋대로 더하였다. 대사헌 오명준을 우선 체차(遞差)하라."

하고, 곧이어 오명준을 삭탈 관작(削奪官爵)하여 문외 출송(門外黜送)시키라고 명하였다. 다음날 이광좌가 도성(都城) 밖으로 나갔다.

사신은 말한다. "오명준(吳命峻)은 명상(名相)의 손자로서 참하(參下)에 있을 때부터 조경(躁競) 한다는 비난이 있어 사류(士類)가 침을 뱉으며 더럽게 여겼다. 이광좌(李光佐)가 그의 사람됨을 더럽게 여겨 이조·병조·호조의 천망(薦望)을 굳게 막고 의망(擬望)하지 않았으므로, 오명준이 이 때문에 원한이 뼈에 사무쳐 있었는데, 시세(時勢)가 이미 위태롭고 임금의 마음이 벌써 바뀐 것을 보자 이에 군척(捃摭)한 것이 이에 이르렀던 것이다. 오명준은 푸르뎅뎅한 얼굴에다 귀신 같은 피부색을 가졌고, 생김새는 노기(盧杞)와 같았다고 한다."
영조실록 2권, 영조 즉위년 12월 25일 갑오 1번째기사 1724년 청 옹정(雍正) 2년
우의정 조태억이 오명준을 처벌하기를 청하니 오명준이 서산에 유배되다.
우의정 조태억(趙泰億)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오명준(吳命峻)은 젊어서부터 비방이 많았는데, 이광좌(李光佐)가 그의 사람됨을 박하게 여긴 나머지 전후의 천망(薦望)을 한결같이 모두 아끼고 막아 종백(宗伯)366) 에 수의(首擬)되는 것을 저지하기까지 하였고, 또 주사(籌司)의 옛자리를 막았으므로 오명준이 원한을 품은 것이 하루이틀이 아니었습니다. 공제(公除)하던 날 병조와 호조의 판서를 낼 때 또 그가 탈락된 것을 한스럽게 여겨 인정문(仁政門)의 사람들이 빽빽하게 앉아 있는 가운데에서 여러 재신(宰臣)들더러, ‘우상(右相)은 나를 사람 취급도 하지 않는 것인가?’ 하고 하였습니다. 산릉(山陵)의 역사(役事)를 감동(監董)하였을 때에는 이광좌가 누차 조당(朝堂)에서 오명준의 처사(處事)에 어긋난 점이 많고 징구(徵求)가 너무 지나침을 말하였습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오명준은 심지어 ‘애증(愛憎)’이란 말로 앞자리를 차지한 여러 재신(宰臣)들을 두루 침척(侵斥)하였으되, 자기에게 절실한 혐애(嫌礙)는 또한 조금도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이광좌는 집안에서는 효우(孝友)하고 조정에서는 충직(忠直)하며, 평생 자신을 단속하여 속류인(俗流人)으로 자처하고자 하지 않았으니, 진실로 일대의 위인이며 국가의 신신(藎臣)입니다. 거처하는 집이 벽을 바른 것이 다 떨어졌으나 종이 한 장을 들여 다시 바르지 않으며 ‘만약 직명(職名)을 벗는다면 곧 마땅히 돌아가야 할 것이니, 집을 꾸며 무엇을 하겠는가?’라고 하였습니다. 언제나 ‘나는 형제나 아들·조카가 없으니, 내 한 몸이 우러러 믿고 사는 것은 오로지 나라와 임금일 뿐이다.’라고 했으니, 정성은 금석(金石)을 뚫을 만하고 충성과 사랑은 신명(神明)에게 질정(質正)할 만합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조신(朝臣)이 혐의(嫌疑) 때문에 사람을 해치는 것은 작은 일이 아닙니다. 만약 엄하게 금하지 않는다면 뒷날의 폐단은 말하기 어렵게 될 것입니다. 따로 처분(處分)을 내리심이 마땅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오명준의 일은 지금 경(卿)의 상소를 보건대 더욱 지극히 놀랍다. 엄하게 악(惡)을 징계하는 도리에 있어서 삭출(削黜)에 그칠 수 없다."

하고, 특별히 부처(付處)의 율을 베풀었다. 오명준이 드디어 서산(瑞山)에 유배되었다.
영조실록 58권, 영조 19년 9월 5일 갑신 7번째기사 1743년 청 건륭(乾隆) 8년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여 천거, 진연 등을 의논하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오직 대관(大官)이라야 사람을 천진(遷進)할 수 있는 것이다. 전번에 한 승선이 사람을 임용하는 방도를 올렸는데 감히 영성(靈城)을 천거했으니, 영성(박문수)이 어찌 승선의 말을 기다리겠는가? 이광덕(李匡德)에 이르러서는 나라를 위하는 마음은 있으나, 연좌된 죄가 매우 무거운 때문인데, 내가 아니었으면 어떻게 다시 장해(瘴海)를 건넜겠는가? 승선의 일은 그르니, 중추하도록 하라."

하였다. 임금이 하교에서 지적한 승선은 곧 신치운(申致雲)이었는데, 좌의정 송인명(宋寅明)이 파직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실록에서 볼 수 있듯, 영의정 등 정승은 백관의 인사권을 쥐고 있는 막중한 자리였다. 또 인조가 소현세자빈 강씨를 사사하려 하자 대신이 반대하니 임금이 크게 노한 적도 있고, 왕의 생모를 추승하는 논의도 세자를 삼는 논의도 대신과 합의가 있어야 했다.
숙종실록 14권, 숙종 9년 윤6월 26일 병인 3번째기사 1683년 청 강희(康熙) 22년
우의정 김석주가 동서로 나뉜 당파의 고질과 신완·조지겸 등에 대한 견벌을 아뢰다.
우의정(右議政) 김석주(金錫胄)가 청대(請對)하여 임금께 아뢰기를,

"우리 나라는 불행하게도 동서(東西)로 당파(黨派)가 나뉜 것이 백 년 동안의 고질(痼疾)이 되었는데, 근래에 와서는 조정[朝著]이 편안하지 못하여 스스로 문호(門戶)를 분할(分割)하고 각자 사당(私黨)을 세우고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동서(東西)로 당파(黨派)가 나뉜 것을 마음 속으로 항상 걱정스럽게 여겼는데, 지금 또 각기 당(黨)을 나누어 한 덩어리를 이루었으니, 대신(大臣)이 진달(陳達)한 바 저지하고 억눌러 진정(鎭定)시켜야 한다는 말이 마땅함을 얻었다. 그러나 견벌(譴罰)이 너무 지나치면 또 반드시 전격(轉激)할 것이니, 참작(參酌)해서 처분(處分)하는 것이 어떠한가?"

하였다. 김석주가 이어서 신완(申琓)은 체직(遞職)시키고 조지겸(趙持謙)·한태동(韓泰東)은 파직(罷職)하며, 오도일(吳道一)은 멀고 외진 고을에 보임(補任)시킬 것을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르고, 오도일은 강원도(江原道)의 군읍(郡邑)에 출보(出補)하라 명하였다. 김석주가 말하기를,

"뒷날의 정사(政事)를 기다릴 것 없이 탑전(榻前)에서 처분(處分)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고, 이어 승지(承旨) 홍만종(洪萬鍾)을 돌아보며 말하기를,

"관안(官案)이 없는 것이 한스럽다."

하니, 【관안(官案)은 곧 내외(內外)·관직(官職)을 열거해 써놓은 책이다.】 환관(宦官)이 즉시 관안을 가지고 와서 임금 앞에 올렸다. 임금이 말하기를,

"김화(金化)로 출보(出補)시켜라."

하니, 김석주가 말하기를,

"김화는 도리(道里)가 가까우니 적환(謫宦)의 땅이 아닙니다. 영동(嶺東)의 아홉 군(郡) 중에서 골라 출보(出補)시키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평해(平海)로 출보시켜 즉일로 발송(發送)케 하라."

하니, 김석주가 말하기를,

"신이 오도일(吳道一)을 출보시키는 일에 대하여 그 장소까지 아뢰게 되었으니, 지극히 황공(惶恐)합니다. 그러나 한기(韓琦)가 임수충(任守忠)을 출보시켰을 때 먼저 공두칙(空頭勑)을 가져다가 이름을 메꾸어 넣게 한 일이 있었으므로, 신 또한 적이 이 뜻에 비기고자 합니다."

하였다. 오도일은 전(前) 평해 군수(平海郡守)와 상피(相避)됨이 있었으므로 다시 울진(蔚珍)에 제수(除授)하라 명하고,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도임(到任)하는 날짜를 계문(啓聞)하게 하였다. 옥당관(玉堂官) 남치훈(南致熏)·이시만(李蓍晩)이 청대(請對)하여 조지겸과 오도일 등을 신구(伸救)하고 재삼 진달하였으나, 임금이 청납(聽納)하지 않았다. 다음날 장령(掌令) 한구(韓構)가 환수(還收)할 것을 아뢰었는데, 그 죄의 경중(輕重)과 유무(有無)는 우선 버려두고 논하지 말라는 말이 있었으므로, 젊은 무리(소론)들이 떠들썩하게 일어나 비난하였다. 헌납(獻納) 서종태(徐宗泰)와 정언(正言) 신계화(申啓華)가 소(疏)로 오도일 등을 구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판부사(判府事) 이상진(李尙眞)이 또한 차자(箚子)를 올려 극력 논하였으나, 임금이, 진감 격당(震撼擊撞)하게 되고 신감 조습(辛甘燥濕)하게 되는 것은 스스로 대신의 책임이니, 의당 같은 소리로 죄를 청하고 밝게 분변해서 통렬히 배척해야 할 것인데, 도리어 환수(還收)의 청이 나옴은 뜻밖이다.’는 비답을 내렸다. 이상진이 차자(箚子) 가운데서 승지(承旨) 등이 복역(覆逆)하지 않은 것은 잘못되었다고 하였으므로, 여러 승지들이 모두 인혐(引嫌)하고 진소(陳疏)하였는데, 김진귀(金鎭龜)와 심수량(沈壽亮)의 소(疏)에서는 이르기를,

"조지겸(趙持謙)과 오도일(吳道一) 등은 박태유(朴泰維)를 신구(伸救)하려다가 죄를 얻었는데, 신 등은 항상 마음속으로 잘못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다투어 고집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그대들은 조금도 잘못한 바가 없다."

하였다. 또 사관(史官)을 보내어 봉조하(奉朝賀) 송시열(宋時烈)에게 전유(傳諭)하기를,

"경(卿)이 서울을 떠난 지 넉 달이 되었다. 젊고 부박한 무리들이 여러 모로 침모(侵侮)하고, 박태유의 소(疏)에 이르러서는 욕하고 꾸짖은 것이 더할 여지가 없었는데도, 언책(言責)을 맡은 신하가 공의(公議)를 생각하지 아니하고 사당(私黨)을 편벽되게 두둔하였으므로, 시비(是非)가 전도(顚倒)되고 처치(處置)한 것이 어긋나 유현(儒賢)을 더욱더 불안하게 만들었다. 이 무리들의 심술(心術)이 바르지 못하니, 사림(士林)들이 공분(共憤)을 느끼고 온 나라에 말이 떠들썩하다. 만약 엄하게 징치(懲治)를 더하지 않는다면 뒷날의 폐단을 이루 다 말할 수 없겠기에, 대략 견벌(譴罰)하여 길이 미워하고 통렬히 배척함을 보였다.".

하고, 이어 마음을 바꾸어 올라오라고 유시(諭示)하였으니, 김석주(金錫胄)의 말을 따른 것이었다. 영의정(領議政) 김수항(金壽恒)과 좌의정(左議政) 민정중(閔鼎重)이 청대(請對)하여 힘써 조지겸 등이 입은 죄가 너무 무겁다고 말하였다. 김수항이 또 말하기를,

"한태동(韓泰東)이 대신 말한 것 가운데서 ‘마음속에 만약 흠이 없다면…’ 따위의 말은 범론(泛論)이며, 신을 기롱(譏弄)한 것이 아닙니다. 이를 죄로 삼는다면 신의 마음이 불안할 뿐 아니라, 국체(國體)에 또한 마땅하지 아니한 것입니다."

하였으나, 임금이 끝내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김수항 등이 끝에 또 박세채(朴世采)를 소환(召還)할 것을 청하였는데, 박세채는 김수항과 의논이 맞지 않아 진실로 이미 떠날 뜻을 갖고 있었는데다가, 김수항이 심극(沈極)을 비난하고 배척하여 심극을 외방의 현(縣)에다 출보(黜補)시킨 것을 보고서 드디어 돌아갈 것을 결정하니 당시의 의논이 김수항에게 그 허물을 많이 돌렸으므로, 김수항이 따로 소환(召還)하자는 뜻을 진달(陳達)하여 자신이 다른 뜻이 없었음을 밝혔던 것이다.

삼가 살펴보건대, 지금 이와 같이 분분(紛紛)한 것은 그 근원이 실로 시론(時論)(소론)을 주장하는 자들이 몰래 송시열(宋時烈)을 배척하여 그 등을 밟아 그 위에 서서 스스로 표수(標樹)가 되려고 한 데서 비롯된 것이었으니, 그 헤아릴 줄을 알지 못함을 많이 볼 수 있다. 그 말은 반드시 흉당(凶黨)(남인)을 보합(保合)<탕평>하고 훈척(勳戚)을 척퇴(斥退)하는 것을 가장 첫번째 뜻으로 삼았는데, 송시열이 이 논의와 어긋나자, 훈척의 당(黨)(노론)이 되고 편벽(偏僻)된 논의를 준엄(峻巖)하게 한다 하여, 이로써 온 세상을 시끄럽게 하였으므로 붙는 자들이 많았으니, 대개 그 명호(名號)가 아름답고 뒷날 화복(禍福)의 염려가 없으며, 편의(便宜)한 방법을 차지하는 것으로서 이보다 더 나은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말을 살펴보고 논파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 보합(保合)을 논의하는 자는 걸핏하면 남인(南人) 중에 이원익(李元翼)·정경세(鄭經世)·이수광(李睟光) 등 여러 사람을 전적으로 배척하지 않은 것을 증거로 삼지만, 이는 정말 그렇지 아니하다. 남인(南人)이 이미 변(變)해 대북(大北)이 되어 폐모론(廢母論)을 주장하였으나, 이 몇 사람은 모두 의견이 달랐고 수립(樹立)한 것 또한 일컬을 만한 것이 많았으니, 곧 다른 당(黨)인 것이다. 반정(反正)한 뒤에 차별없이 임용(任用)하였어도 진실로 마땅했던 것이다. 그러나 갑인년의 흉당(凶黨)은 일찍이 다른 바가 없었고, 또 말할 만하게 수립(樹立)한 것도 없었으니, 비록 스스로 서로 권세(權勢)를 다투느라 청(淸)·탁(濁)의 구분이 있기는 하였지만 폐간(肺肝)은 한 가지였다. 그러므로 허목(許穆)은 청남(淸南)의 괴수(魁首)였지만 정(楨)과 연(㮒)을 부호(扶護)하였으며, 고묘(告廟)·친경(親耕)의 의논은 모두 그가 주장한 것이었으니, 다르다고 하면서 그 당류(黨類)를 수용(收用)할 수 있겠는가? 기사년[6]에 이르러서는 드디어 임사홍(任士洪)·이이첨(李爾瞻)과 같은 경우가 되어(인현왕후 폐비에 소극이었다 하여 폐모론을 주장한 이이첨등을 비유) 더욱 갑인년(甲寅年)(이는 갑인예송으로 서인이 쫒겨고 남인이 집권을 가리킴.)에 비할 바가 아니었는데도, 일종(一種)의 논의는 도리어 참용(參用)하고자 하여 심지어 한때의 책임을 면하려는 소(疏)로써 이봉징(李鳳徵)을 권장(勸奬)하여 썼으며, 신사년(인현왕후가 죽은 해. 이봉징은 남인으로 희빈을 왕비에 올려야 한다고 상소) 에는 또 흉소(凶疏)를 올려 심적(心跡)을 완저히 드러내었으니, 조금 낫다고 하는 자([7])들도 이와 같은데 다른 경우야 어찌 논할 것이 있겠는가? 경신년(삼복 즉 인조의 세 아들 소현세자, 효종, 인평대군 중 인평대군의 세 아들 복선군, 복평군, 복창군 등이 남인들과 역적으로 몰려 죽고 남인이 실각한 경신환국을 의미) 후에 훈척(勳戚)이 나라일을 맡았는데, 시행(施行)한 바에 어찌 의논할 만한 것이 없었겠는가마는 그러나 요컨대 환하게 역적(逆賊)을 토벌(討伐)하여 종사(宗社)와 국가의 위험을 부호(扶護)하였으니, 그 공(功)은 끝내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남인이 처음 정(楨)·남(柟)[8]과 결탁하여 들어와 권세(權勢)를 잡은 경우에 이르러서는 진실로 성인(聖人)이 이른바 이르지 못하는 곳이 없다는 것이었으니, 비록 단지 송시열을 얽어서 죽인 죄로 말한다 하더라도, 또한 남곤(南袞)·심정(沈貞)과 같은 경우인 것이다. 남곤·심정의 당(黨)도 오히려 그 보합(保合)을 의논할 수 없거늘, 하물며 그 무리 중 추악한 윤휴(尹鑴)·조사기(趙嗣基)는 동조(東朝)(명성대비)를 무방(誣謗)하고, 고묘(告廟)·친경(親耕)의 논의로 곤극(坤極)을 동요(動搖)시켰으며, 그리고 마침내는 역적 남(柟)을 추대(推戴)해, 흉역(凶逆)이 아님이 없었으니, 단지 나라를 병들게만 하였다고 하면서 그 도당(徒黨)을 수용(收用)할 수 있겠는가? 또 남인(南人)의 영흉(逞凶)함이 이에 이르렀음에도 도리어 애석하게 여기며 전불(剪拂)하였으니, 훈척(勳戚)이 비록 잘못한 바가 있다고 하더라도 어찌 같은 날 말할 수 있겠으며, 이에 도리어 저를 부추기고 이를 억누름은 또 무슨 뜻인가? 또 병인년(중종반정) 의 세 대장(大將) 【박원종(朴元宗)·성희안(成希顔)·유순정(柳順汀)이다.】 과 계해년(이는 인조반정이 일어난 해)의 여러 훈귀(勳貴)는 모두 사사로움을 좇는다는 나무람이 있었고, 그 당시에 또한 비난받았으나, 국사(國事)로 말한다면 모두 배척해 버릴 수 없었던 것이다. 만약 이 사람들을 배척해 버리고, 다시 유자광(柳子光)·임사홍(任士洪)의 남은 당류(黨類)와 이이첨(李爾瞻)·정인홍(鄭仁弘)의 나머지 종자(種子)들을 조정(朝廷)에 늘어놓고서 ‘이것이 탕평(蕩平)의 뜻에 합치(合致)되는 것이다.’라고 한다면 과연 어떠한 의리(義理)를 이루겠는가? 이 마음을 미루어본다면 무엇이라도 사사로움이 아닌 것이 없으니 그 배척한 것이 준엄하다고 할 수 있다. 시론(時論)(소론을 의미)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어찌, ‘주자(朱子)를 외고 본받는다.’고 하지 않겠는가마는, 그 말과 의논은 모조리 배치(背馳)되니 무엇 때문인가? 대개 처음에는 한 사람의 혼탁한 사사로운 뜻에서 나왔으나 필경에는 국가가 그 패퇴(敗頹)함을 크게 받을 것이니, 그 통탄스러움을 이루 다 말할 수 있겠는가? 김석주(金錫胄)는 곧 훈척(勳戚)의 신하이므로, 이 일을 사람들이 혹 그 공심(公心)에서 나오지 않은 것이라 의심하나, 그 재경 보편(裁傾補偏)한 것은 뜻이 그 반이라도 구하고자 하는 것이었으니 또한 대신(大臣)의 역량(力量)인 것이다. 그런데 김수항(金壽恒) 등은 혹 이로 인하여 논의가 더욱 격렬해질까 두려워하여 이와 같이 청대(請對)하였던 것이고, 이상진(李尙眞)은 젊은이들의 당(黨)이었기 때문에 그 말이 자못 분기(忿氣)를 띠고 불평(不平)스러웠던 것이다.
인조실록 47권, 인조 24년 2월 4일 신사 5번째기사 1646년 청 순치(順治) 3년
영의정 김류 등이 지난날 빈청에 내린 하교[9]로 빈청에 모여 아뢰다.

영의정 김류 등이 빈청에 모여 아뢰기를,

"어제 감히 혈성(血誠)을 펴 상의 마음을 돌리기를 바랐는데 윤허하지 않는다고 하교하시니, 신들은 몹시 답답한 마음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삼가 전대 제왕을 보건대, 골육(骨肉)의 변을 당하여 변을 처리하는 데 있어 잘되고 잘못된 점이 있었습니다. 오늘의 처치하는 바가 옛날 성인의 도리에 부합되어야만 바야흐로 신민의 마음이 화합하고 종사의 복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전하께서 전후 옥사를 다스리면서 혹시라도 지나칠까 염려하셨으므로 비록 미천한 백성이라 하더라도 누구나 지극히 보살피는 사랑을 입었는데, 어찌 천륜의 지친에게만 곡진히 보전해 줄 수 있는 방도를 생각하지 않는단 말입니까. 삼가 바라건대, 다시 상량하시어 깊이 선처할 수 있는 방도를 생각하소서."

하니, 상이 윤허하지 않는다고 답하였다. 김류 등이 다시 아뢰기를,

"오늘의 망극한 변은 차마 입에 담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신들이 연일 우러러 호소하는 것은 단지 옛날 성인이 변을 처리한 도리처럼 하시기를 전하께 깊이 바라고 있기 때문입니다. 왕법(王法)과 사사로운 은혜가 때로는 경중이 있습니다. 전하께서는 은혜를 굽히고 법을 펴려고 하시는데, 법을 굽혀 은혜를 펼 수는 없단 말입니까. 삼가 바라건대 어질고 자애로운 상께서는 다시 곰곰이 생각하시어 고율(考律)하라는 분부를 도로 거두소서."

하니, 상이 노하여 답하지 않았다. 정원에 하교하기를,

"오늘의 일로써 본다면 이중형(李重馨)은 큰 죄가 없는 것 같으니 석방하라."

하였다. 이중형은 일찍이 상소하여 김류를 공격한 일로 인해 멀리 북쪽 변방으로 귀양갔기 때문에 이런 하교가 있었다. 이에 김류가 황송하고 두려워서 나가니, 이경석 등과 여러 재신들이 김류가 나가는 것을 보고 모두 불안해 하였다. 예조 판서 김육(金堉)이 말하기를,

"영상이 비록 이중형의 일로 인해 나갔으나, 다른 재신들 또한 어떻게 감히 태연히 있을 수 있겠는가."

하니, 이경석이 말하기를,

"진퇴를 경솔히 할 수 없을 듯하니 조용히 상의하여 처리해야 할 것이다."

하자, 여러 사람의 의논이 모두 나가는 것을 타당하게 여겼다. 이경석이 저지하지 못하고 선인문(宣仁門) 밖에 나가 명을 기다렸다. 상이 또 정원에 하교하기를,

"대신이 이른바 옛날 성인 중에 변에 대해 처리를 잘한 사람은 누구인가? 승지는 살펴서 아뢰라."

하니, 좌부승지 여이재(呂爾載)가 아뢰기를,

"전대 제왕이 변을 당하여 처리하는 데 있어서 각각 잘하고 잘못한 점이 있습니다만, 변을 잘 처리한 옛 성인은 대신의 계사에 반드시 가리킨 바가 있을 터인데 창졸간에 기억하지 못하겠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대신에게 물어서 아뢰라."

하였다. 여이재가 또 아뢰기를,

"대신에게 물었더니, 말하기를 ‘변을 잘 처리하여 중도를 잃지 않는 것은 오직 성인만이 가능한 일이기 때문에 이로써 말씀드린 것이다. 이른바 예전의 제왕으로서 변을 처리하는 방도를 제대로 한 자로는 당(唐)나라 태종(太宗)이 있다. 태자 승건(承乾)이 후군집(侯君集) 등과 반역을 꾀하다 발각되었는데, 방현령(房玄齡)·두여회(杜如晦) 등 여러 사람으로 하여금 이 일을 다스리게 하였다. 태종이 승건을 처리할 방도에 대해 묻자, 내제(來濟)가 말하기를 「폐하께서 자애로운 아버지의 도리를 잃지 않고 태자는 제명대로 살 수 있게 된다면 좋을 것이다.」 하니, 태종이 따랐다. 그래서 그 의리를 취한 것이다.’ 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태종은 성인이 아니고 강빈은 내 자식이 아닌데, 이렇게 말하니 이상하지 않은가."

하였다. 정원이 아뢰기를,

"대신 이하가 대궐문 밖에서 분부를 기다린다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대궐문 밖에서 명을 기다리는 것은 무슨 뜻에서 그런다고 하던가?"

하니, 여이재가 아뢰기를,

"대신에게 물었더니, 말하기를 ‘신들이 재차 아뢰고 나서 삼가 성상의 비답이 내리기를 기다렸는데, 정원에 내린 하교를 보고 영의정 김류가 황공하여 물러갔습니다. 신들도 영상과 조금도 다른 바가 없으므로 감히 태연하게 빈청에 앉아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비답을 받지 못하였으므로 감히 각자의 집으로 물러가 있을 수도 없는 일이기에 대궐문 밖에서 분부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또 하교하기를,

"예전에도 또한 이와 같은 예(禮)가 있었는가? 정원은 살펴서 아뢰라."

하니, 여이재가 아뢰기를,

"영상이 이미 물러갔기 때문에 대신들이 모두 불안하여 대궐문 밖에서 분부를 기다린다고 합니다만, 옛날에 이런 예가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신들도 상세히 알 수가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또 하교하기를,

"영상이 나간 뒤에 어떤 대신이 맨 먼저 나갔는가?"

하니, 여이재가 아뢰기를,

"재차 올린 계사가 들어간 뒤에 완성 부원군 최명길이 병이 나서 먼저 나갔고 영상이 나간 뒤에 이경여 및 우상이 여러 재상들과 상의하고는 함께 나갔다 합니다."

하였다.

위 실록기사에 앞서 인조는, 소현세자가 죽자 원손이 아닌 봉림대군으로 세자를 책봉한다고 선언한다. 당시 소현세자가 인조에게 독살당하였다는 혐의가 파다하였는데, 이때 차기 후계자는 당연히 인조의 적장손이었으나, 인조가 이를 바꾸려 하여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정승과 합의한다.
인조실록 46권, 인조 23년 윤6월 2일 임오 1번째기사 1645년 청 순치(順治) 2년
정부의 당상·육경 등을 인견하여 후사를 바꿀 일을 의논하다.

상이 대신 및 정부의 당상·육경·판윤·양사의 장관을 인견하였는데, 영의정 김류, 좌의정 홍서봉(洪瑞鳳), 영중추부사 심열(沈悅), 낙흥 부원군 김자점(金自點), 판중추부사 이경여(李敬輿), 우찬성 이덕형(李德泂), 병조 판서 구인후(具仁垕), 판윤 허휘(許徽), 공조 판서 이시백(李時白), 이조 판서 이경석(李景奭), 예조 판서 이식(李植), 좌참찬 김수현(金壽賢), 호조 판서 정태화(鄭太和), 우참찬 김육(金堉), 부제학 이목(李楘), 대사간 여이징(呂爾徵) 등 16인이 입시하였다. 상이 여러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나에게 오래 묵은 병이 있어 이따금 심해지고 원손은 저렇듯 미약하니, 내가 오늘날의 형세를 보건대 원손이 성장하기를 기다릴 수가 없다. 경들의 뜻에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니, 김류가 대답하기를,

"조야가 한창 전하의 강릉(岡陵)처럼 높고 큰 복을 송축(頌祝)하고 있는데, 전하께서 갑자기 이런 말씀을 하시니, 신들은 진달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나의 질병만 이와 같을 뿐 아니라, 국사가 날로 어렵고 위태로운 데로 내리닥치니, 만일 내가 죽고 나면 어린 임금으로서는 임금 자리를 담당할 수 없을 듯하다. 그래서 나는 대군(大君)들 가운데서 선택하여 세우고자 한다."

하니, 김류가 아뢰기를,

"지금 이 하교는 비록 종묘 사직의 대계를 위하시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지만, 신들은 두렵고 의혹스러워서 말할 바를 모르겠으니, 의당 여러 신하에게 널리 물으셔야 합니다."

하고, 홍서봉이 아뢰기를,

"옛 역사를 상고해 보건대, 태자(太子)가 없으면 태손(太孫)으로 이었으니, 이것이 곧 바꿀 수 없는 떳떳한 법입니다. 상도를 어기고 권도를 행하는 것은 국가의 복이 아닌 듯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아무리 잘 다스려진 세상에도 반드시 나라에 장군(長君)이 있는 것을 복으로 여겼는데, 더구나 오늘날 같은 때이겠는가."

하니, 심열이 아뢰기를,

"홍서봉의 말이 신의 뜻과 정히 부합됩니다. 전하께서 비록 사소한 병환이 있으시기는 하나 아직 춘추가 한창 때이시고, 원손이 비록 미약하기는 하나 이미 10세에 이르렀습니다. 예로부터 어린 임금이 왕위를 이은 경우가 어디 한량이 있었습니까. 종통은 매우 중대한 것이니, 가벼이 의논할 수 없을 듯합니다."

하고, 김자점이 아뢰기를,

"전하께서 질병이 쾌차하지 않으시고 국사가 어려워진 것 때문에 종사와 생민의 대계를 위하여 이 말씀을 내신 것이니, 다시 여러 신하에게 물어서 결정하셔야 합니다."

하고, 이경여가 아뢰기를,

"신의 어리석은 소견은 홍서봉과 다름이 없습니다. 세적(世嫡)이 계통을 잇는 것은 고금의 떳떳한 법이니, 떳떳한 법 이외에는 다시 진달할 것이 없습니다. 대체로 떳떳한 법을 지키면 비록 어려운 시기를 당하더라도 오히려 나라를 보전할 수 있지만 만일 갑자기 권도를 쓰면 인심이 복종하지 않아서 흔히 환난을 일으키게 됩니다. 지금 온 나라가 원손에게 기대를 건 지 이미 오래인데, 만일 이 말을 듣는다면 중외의 인심이 반드시 모두 소란해질 것이니, 매우 두렵습니다."

하므로, 상이 이르기를,

"우리 세조(世祖)께서는 원손에게 자리를 전하지 않고 예종(睿宗)에게 전하였는데도, 당시 조신(朝臣)들이 이의가 없었으니, 그렇다면 과연 그 조신들이 모두 불충한 자들이었단 말인가. 대신이 국가의 대사를 당해서는 의당 그 책임을 져야 할 것인데, 한갓 평범한 얘기로써 책임 메꿀 거리로 삼으니, 이것이 어찌 대신의 도리이겠는가. 이른바 인심이 소란해질 것이라는 말도 그렇지가 않다. 권도를 행해서 중도를 얻는 것이 바로 인심을 진정시키는 도리인데, 무슨 소란해질 걱정이 있단 말인가."

하고는, 상이 김류에게 이르기를,

"이 일은 오로지 영상에게 달려 있으니, 경이 결단하라."

하였다. 김류가 아뢰기를,

"신이 비록 수상의 자리에 있기는 하나 어찌 감히 혼자 결단할 수 있겠습니까. 만일 종사의 존망이 이 일에서 결판난다는 것을 분명히 안다면 뭇 신하들 가운데 진실로 감히 다르게 의논할 자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일이 존망에 관계된다고 반드시 볼 수 없는데도 비상한 도리를 행하려고 하시니, 이것이 바로 신들이 감히 함부로 의논하지 못하는 까닭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옛날 대신들은 국사를 스스로 담당하여 자기 몸 생각할 줄을 몰랐다. 우리 태종조(太宗朝) 때 양녕 대군(讓寧大君)이 동궁에 있을 적에 백관이 그를 폐할 것을 청하여 정청(庭請)에까지 이르렀으니, 이는 모두 나라를 중히 여겨 후환을 돌아보지 않은 것이다. 그때 만일 태종께서 윤허하시지 않았더라면 후일의 화를 헤아릴 수 없었는데도 오히려 그렇게 하였는데, 지금 경들은 옳은 줄을 알면서도 말하려 하지 않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하였다. 김류가 아뢰기를,

"덕종(德宗) 동궁에 계시다가 천순(天順) 정축년에 승하하시고, 예종(睿宗)이 무자년(1468)에 계통을 이었고 보면, 당시 성종(成宗)의 나이는 12세였고 월산 대군(月山大君)은 또 나이가 더 많았는데도, 광묘(光廟)께서 왕세자를 이렇게 세우신 것은 무슨 까닭인지 모르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월산 대군은 자질이 총명하지 못했다고 하는데, 당시 성종의 나이도 10세가 넘었던가?"

하자, 김류가 아뢰기를,

"성종이, 덕종이 승하하시던 정축년에 탄생하였으므로, 세조가 승하하시던 무자년에 이르러 12세가 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서열로 말하자면 세자로 세워야 할 사람이 월산 대군이었으나, 일에는 때에 따라 변통하는 것이 있으므로 이렇게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만일 상도를 반드시 지켜야 한다면 세조께서 왜 월산 대군에게 전하지 않고 예종에게 전했겠으며, 만일 장유(長幼)의 차례로 말한다면 예종이 어째서 월산 대군을 그만두고 성종을 세웠겠는가."

하니, 김류가 아뢰기를,

"세조의 세대에는 국가가 무사하였는데도 상도에 위배되는 이런 거조가 있었으니, 대성인의 처사를 진실로 헤아릴 수 없으나, 이것은 아마도 현명한 이를 가리는 데서 나온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자, 상이 이르기를,

"세조조 때에는 의심스럽고 불안한 일이 많았기 때문에 반드시 장군(長君)을 세우고자 했던 것이니, 만일 현명한 이를 가리는 데서 나온 것이라면 성종의 성스러움이 어찌 꼭 예종에 미치지 못하겠는가. 나 역시 순서에 따라 전하는 것이 매우 순리임을 어찌 모르겠는가. 다만 생각건대, 오늘날의 형세는 반드시 나라에 나이 찬 임금이 있는 다음에야 막중한 종사를 보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였다. 이덕형이 아뢰기를,

"신의 뜻도 홍서봉의 말을 옳게 여깁니다."

하고, 구인후가 아뢰기를,

"전하의 뜻은 종사의 대계를 위하심이니, 오직 성상의 결단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하고, 이시백이 아뢰기를,

"홍서봉과 이덕형 두 대신의 말은 모두가 경상(經常)의 도리이므로, 신은 두 대신의 뜻을 옳게 여깁니다."

하고, 이경석이 아뢰기를,

"나라에 장군(長君)이 있는 것을 비록 사직의 복이라고는 하지만, 수자(樹子)를 바꾸지 말라는 것이 바로 선왕(先王)의 법입니다. 또 국가 안위의 기틀을 만일 촛불로 비추어 보듯이 거북으로 점을 치듯이 환히 알 수 있다면 성상께서 생각하시는 것에도 견해가 없지 않겠으나, 만일 한번 변통하여 처리하는 거조를 행했다가 도리어 사방의 의혹을 불러일으키게 된다면, 비록 이로움으로 말하더라도 그것이 옳을지는 모르겠습니다."

하고, 이식이 아뢰기를,

"서생(書生)의 소견은 상도만을 지킬 뿐이니, 어찌 임시 응변을 알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른바 서생은 평소에 글을 읽는데도 때에 맞추어 쓰는 도리를 모른다면, 비록 머리 속에 시서(詩書)가 들어 있은들 또한 어디에 쓰겠는가. 또 오늘날 임금을 정하는 계책이 어찌 알기 어려운 권모 술수 같은 것이겠는가."

하였다. 이식이 아뢰기를,

"상도만 지키다가는 종사가 반드시 위태롭게 되고, 권도를 행하여야 국가가 편안해질 수 있다면 이 거조가 불가하지 않겠으나, 신의 생각에는 상도를 지키지 않으면 도리어 편안하지 못할 듯합니다."

하고, 김수이 아뢰기를,

"국가의 중대한 일은 한두 사람의 소견으로 결단할 수 없으니, 모름지기 대신에게 익히 강구하게 해서 결단해야 합니다."

하고, 김육이 아뢰기를,

"세조조에는 국가가 평온하였기 때문에 상도에 위배되는 처사를 할 수 있었지만, 오늘날의 형세는 그 당시와 다르니, 가벼이 행해서는 안 될 듯합니다."

하고, 정태화가 아뢰기를,

"신의 뜻은 김육과 같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양사의 장관들도 각각 자신의 뜻을 말하라."

하니, 이목이 아뢰기를,

"삼대(三代) 이후 왕통을 이은 것이 정연하니, 만일 권도를 갑자기 행한다면 반드시 큰 걱정이 있게 될 것입니다."

하고, 여이징이 아뢰기를,

"종사의 계책은 모름지기 대신과 의논하여 결정해야 하는데, 꼭 신에게 물으시고자 한다면 신에게는 상도를 지키는 것만이 있을 뿐입니다."

하였다. 그러자 상이 성난 어조로 꾸짖어 이르기를,

"이 일은 반드시 대신이 결단해야겠다. 경들은 이렇게 평범한 말만 하고 있으니, 어느날 갑자기 내가 죽기라도 한다면 경들은 어떻게 할 생각인가."

하니, 좌우가 말이 없이 잠잠하였다. 이윽고 김자점이 아뢰기를,

"이 일은 성상의 깊고 원대한 생각에서 나온 것이니, 의당 속히 단정해야 할 일인데, 어찌 우물쭈물하여 미룰 필요가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기뻐하여 이르기를,

"그 말이 옳다."

하였다. 김류가 아뢰기를,

"뭇 신하들의 말이 신의 뜻과는 어긋나는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경의 소견으로는 과연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자, 김류가 아뢰기를,

"계해년 반정(反正)의 거사와 남한 산성 출성(出城)의 일이야말로 어찌 비상한 조처로서 모두가 종사의 대계를 위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신은 성상을 받들고 의심없이 그런 일을 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신민들의 기대가 모두 원손에게 이미 붙여졌는데도 전하의 하교가 이러하시니, 이는 필시 궁중(宮中)의 일로서 바깥 사람이 미처 알 수 없는 것이 있는 듯합니다. 그러니 만일 상의 뜻이 이미 정해졌다면 신이 어찌 감히 그 사이에서 가부를 논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의 뜻이 나와 부합된다. 대군이 비록 둘이 있어도 모두 취할 만한 것은 없으나, 장성한 사람이 어린 사람과는 다르기 때문에 이런 계책을 한 것이다."

하였다. 김류가 아뢰기를,

"양녕 대군은 덕망을 잃고 법도에 어긋난 일이 많았기 때문에 조신들 간에 폐립(廢立)의 청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원손이 어려서 아직 덕망을 잃은 것이 드러나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오늘의 하교가 있으므로, 인심이 놀라 의혹하고 뭇 신하들의 의논이 귀일되지 않은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원손의 사부가 【 사부는 김육·이식·이경석·이목을 가리킨 것이다.】 모두 이 좌중에 있으니, 어찌 원손이 현명한지 불초한지를 분명히 모르겠는가."

하자, 김육이 아뢰기를,

"원손이 아직 어려서 덕망을 잃은 것이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원손이 비록 나이가 어리지만, 그 기질을 본다면 어찌 장래에 성취할 바를 모르겠는가."

하였다. 그러자 김류가 갑자기 아뢰기를,

"상께서 만일 분명한 전교를 내리신다면 당장에 결단할 수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원손은 자질이 밝지 못하여 결코 나라를 감당할 만한 재목이 아니다."

하므로, 이식이 아뢰기를,

"진강(進講)할 때에 원손의 재기(才氣)가 드러난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하고, 이경석이 아뢰기를,

"신도 강서(講書)의 반열에 나가 참여하고 있으나, 어린 소년에게 어찌 장래의 성취를 미리 점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이때 이목은 병이 발작하여 미리 나갔기 때문에 미처 대답하지 못했다. 상이 이르기를,

"한갓 그 현명함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나이를 가지고 또한 말한 것이다."

하고, 또 이르기를,

"낙흥 부원군은 앞서 하던 말을 끝내지 못했는데, 어찌 말을 끝내지 않으려는가?"

하니, 김자점이 앞서와 같이 대답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경은 원훈 대신(元勳大臣)인데도 이와 같이 흐리멍덩하게 말을 하는가."

하니, 김자점이 아뢰기를,

"성상께서 종사를 위해 깊고 원대하게 계획하시는데 어찌 소견이 없으시겠습니까."

하므로,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경의 뜻은 이 일을 불가하게 여기지 않는 것이다."

하였다. 김류가 아뢰기를,

"성상께서 이 일을 하심은 천하를 만인과 함께 하는 공심에서 나온 것이니, 어찌 그 사이에 사적인 뜻이 있겠습니까."

하고, 홍서봉이 아뢰기를,

"신이 계달하는 것은 경상의 도리일 뿐이니, 권도를 쓰는 경우는 성상께 달려 있습니다."

하니, 상이 발끈 성을 내어 불쾌한 안색으로 이르기를,

"대신의 의논이 모두 동일한 다음에야 큰 계책을 결단할 수 있는데, 매양 경상(經常) 두 글자를 고집하여 말하는 뒷받침으로 삼아, 흐리멍덩하게 견강부회하여 분명하게 말을 하려 하지 않는구나. 이런 큰일을 당하여 따르려면 즉시 따르고, 따르지 않으려거든 끝까지 따르지 않고 관직을 버리고 떠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사군자의 몸가짐과 마음가짐이 어찌 이처럼 흐리멍덩할 수가 있단 말인가."

하였다. 이때 상이 매우 노하였으므로, 좌우에서 모두 감히 말을 하지 못했다. 이윽고 심열이 아뢰기를,

"경상으로 말하자면 신민의 촉망이 절로 소재처가 있는데, 뜻밖에 오늘날 이런 비상한 거조가 있으므로 신들의 말이 이러한 것입니다. 만일 반드시 이렇게 하여야만 종사와 신민을 편안히 할 수 있다고 여기신다면 또한 어찌 권도를 쓰는 도리가 없겠습니까. 시임 대신 및 원훈 대신이 모두 이 자리에 있으니, 다시 물어서 결단할 수 있습니다."

하고, 이경여가 아뢰기를,

"상의 뜻은 비록 원손이 나이가 어리기 때문에 장군(長君)을 얻을 것을 생각하신 것이지만 비상한 거조를 어찌 감히 함부로 의논할 수 있겠습니까. 또 그 나이를 논하는 것은 현명함을 논하는 것만 못합니다. 그런데 지금 성상의 하교에서 원손의 현명함은 언급하지 않고 나이만을 가지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예로부터 어린 나이로 왕위를 이어 덕을 성취하고 나라를 보전한 사람 또한 한둘이 아닌데, 어찌 나이 어린 것 때문에 함부로 폐립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원손이 전하의 슬하에 있은 지 이미 오래이니, 전하께서는 원손의 현명한지 여부에 대해서 아마 진작 환히 알고 계실 것이나, 외정(外庭)의 신하들은 그 내막을 알 길이 없으니, 더욱 감히 함부로 의논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 신민들이 모두 이미 원손에게 기대를 걸어 적자손(嫡子孫)이 당연히 왕위를 계승할 줄로 알고 있을 뿐인데, 만일 신들이 경솔하게 전하의 뜻을 따라버린다면 어찌 신하의 도리이겠습니까. 전하께서 애당초 털끝만큼의 사의(私意)도 없이 종사의 대계만을 위하신 것이니, 만일 상도를 뒤엎고 권도를 행해서 종사가 영원히 이를 힘입게만 된다면 옛날에도 이런 일이 있었으므로 신 또한 제왕의 경상적인 전법만을 변통성 없이 고수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고, 심열이 아뢰기를,

"오늘 여러 신하들이 우물쭈물하며 결단하지 못하는 것은 과실이 아닙니다. 세자가 이미 졸하였으면 뒤를 이을 사람은 원손인데, 국본(國本)을 바꾸어 세우는 일을 어찌 말 한 마디에 당장 결단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이덕형이 아뢰기를,

"이미 원손의 명호가 바로잡아졌고 또 보양관(輔養官)도 세웠으니, 위호(位號)가 정해진 지 오래입니다. 게다가 바꿀 수 없는 경상의 전법은 옛 역사에서 그 증거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신하의 도리에 있어, 갑자기 상도에 위배되는 일을 당했을 때는 의당 경도를 지키는 것으로 논쟁해야겠습니까, 아니면 장차 권도를 쓰는 것에 순종해야겠습니까. 오늘 성상의 하교는 비록 종사를 위한 계책으로 말씀하셨습니다마는 갑자기 하루아침에 이미 바로잡힌 명호를 바꾸려고 하시는데, 뭇 신하들이 만일 모두 바람에 쏠리듯이 따라버린다면 장차 저런 신하들을 어디에 쓰겠습니까."

하니, 상이 한참 동안 묵묵히 있다가 이르기를,

"대신들의 뜻은 모두 일치되었는가?"

하므로, 김류가 아뢰기를,

"이의가 없는 듯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불행하여 자식들이 다 죽고 둘만 남아 있으니, 대신이 그 중에 나은 사람을 가려서 결정하라. 이는 적장자(嫡長子)를 세우는 경우와도 다르니, 오직 그 중 나은 사람을 가릴 뿐이다."

하니, 홍서봉이 아뢰기를,

"대군은 조신들과 서로 접한 일이 없는데, 어떻게 그 우열을 알 수 있겠습니까. 옛사람이 이르기를 ‘자식을 알기로는 아버지만한 이가 없다.’ 하였으니, 이는 성상의 간택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두 사람이 다 용렬하니 취하고 버릴 것도 없다. 나는 그 중에 장자를 세우고자 하는데 어떤가?"

하니, 김류가 아뢰기를,

"장자로 적통(嫡統)을 세우는 것이 사리에 순합니다."

하므로,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 청나라 사신이 오면 반드시 국본(國本)을 물을 것이므로, 급급하게 의정하지 않을 수 없다."

하였다. 김류가 또 아뢰기를,

"이 밖에는 더 이상 의논할 것이 없으니, 모름지기 명백하게 하교하여 뭇 신하들로 하여금 확실히 알도록 해야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봉림대군(鳳林大君)을 세자로 삼노라."

하였다. 김자점이 아뢰기를,

"승전(承傳)을 받들어야겠습니까?"

하니, 좌우에서 모두 속으로 웃었다. 상이 이르기를,

"그렇게 할 것이 없다."

하였다. 김류가 예조로 하여금 받들어 거행하도록 청하니, 상이 이르기를,

"천천히 하여도 늦지 않다."

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일찍이 선왕조의 실록을 상고해 보건대, 덕종(德宗)이 동궁에 있다가 천순(天順) 정축년에 승하하였는데, 당시 월산 대군(月山大君)도 아직 어렸고 성종(成宗)은 막 태어났었다. 그래서 곧바로 그해 12월에 예종(睿宗)을 세자로 책봉하고 명(明)나라에 주청 자문(奏請咨文)을 보냈는데, 그 자문에 이르기를 ‘전 세자 장(暲)의 동모제(同母弟)인 황(晄)이 현재 나이 9세인데, 나라 사람들이 그를 후사로 세우기를 원한다….’고 하였다. 이리하여 예종이 세자로 책봉된 지 12년째인 무자년에 광묘(光廟)가 승하하였다. 그런데 지금 김류가 이른바 ‘광묘가 승하할 때에 성종의 나이 12세이고, 월산 대군은 또 더 많았는데도 오히려 예종을 후사로 삼았다.’ 한 것은 김류가 예종의 세자 책봉이 성종이 막 태어나던 해에 있었음을 몰랐던 것이 아니다. 거짓 모르는 체하고 ‘성종이 12세이고 월산 대군의 나이가 또 더 많다.’는 말만을 하여, 마치 선왕의 세대에도 이미 장성한 원손(元孫)을 세우지 않고 차자(次子)에게 후사를 전한 사실이 있었던 것처럼 해서 그 일을 끌어다가 오늘날의 증거로 삼은 것이니, 그 임금의 비위를 미리 알아 받든 정상을 표출(表出)하지 않을 수 없다. 또 상이 처음 말을 냈을 때는 ‘나라에는 장군(長君)이 있어야 한다.’는 것만을 말했을 뿐, 원손의 불초에 대해서는 애당초 언급하지 않았었는데, 김류가 이내 덕망을 잃고 법도를 어그러뜨린 양녕 대군(讓寧大君)의 사실을 끌어다 말하여 상으로 하여금 반드시 원손의 불초함을 말하게 하려고 한 것은 또한 무슨 마음이던가. 김자점은 불학무식한 사람으로 다만 원훈(元勳)이라는 것 때문에 재상의 지위에 이르렀고 보면, 그가 임금의 뜻대로 하기를 도리어 권유하고 순종한 것은 진실로 책망할 거리도 못 된다. 홍서봉이 맨 처음 경상(經常) 두 자를 발론하자, 심열 이하가 모두 그 말을 따랐으나 결국은 다 아첨하는 말로 끝내고 말았으니, 그 중에는 이덕형이 조금 나은 사람이라 하겠다. 또 이식·이경석·김육·이목은 모두 보양관(輔養官)으로 일컬어진 사람들이고 보면, 사체가 다른 신하들과는 같지 않은데도 끝내 할 말을 감히 기탄없이 다하지 못하였으니, 이목이 먼저 나가버린 것이 과연 병이 발작해서 일어났던 것인가, 아니면 왕의 후사(後嗣)를 바꾸자는 의논에 참예할 수 없다고 여겨 거짓 병을 핑계하고 지레 일어났던 것인가. 아마도 이목의 힘으로 미칠 수 있는 일이 아니어서 그런 것인 듯하나 알 수 없다. 아, 곧은 도리를 따르는 것을 군자라 하고, 무조건 순종하는 것을 비부(鄙夫)라 하니, 임금의 뜻을 미리 알아 비위를 맞추는 경우는 소인일 뿐이다. 신은 누가 군자이고 누가 비부이고 누가 소인인 줄을 모르겠으나, 말이 입에서 나오면 그 마음을 덮을 수 없는 것이니, 그 말을 가지고 그 마음을 찾아볼 경우 후세에 반드시 이를 분변해 낼 자가 있을 것이다. 이 때문에 낱낱이 기록하여 모두 남겨두는 바이다.

【태백산사고본】 46책 46권 49장 A면【국편영인본】 35책 229면

숙종이 왕비 인현왕후([10])를 폐비할 때도 이미 서인에서 남인으로 환국이 일어났고 장씨덕에 정권을 잡은 남인들이 폐비에 반대한다. 희빈장씨는 분노했을 것이다. 남인들을 집권가능케 한건 희빈장씨의 역할이 결정적이었기때문이다. 숙종도 서인계 인현왕후 폐비에 남인이 반대하고 나오자 적잖이 당황하였다.
이때 박태보 등 서인이 상소를 올리자 숙종이 남인들 앞에서 잔인하게 박태보를 형신하여 폐비의지를 확인하고서야 합의가 되었다.
숙종실록 20권, 숙종 15년 4월 21일 정해 1번째기사 1689년 청 강희(康熙) 28년
대사헌 목창명 등이 송시열의 처벌을 상소하다
대사헌(大司憲) 목창명(睦昌明), 응교(應敎) 이식(李湜), 지평(持平) 정선명(鄭善鳴)·배정휘(裵正徽), 헌납(獻納) 이만원(李萬元), 교리(校理) 강선(姜銑)·이윤수(李允修), 부교리(副校理) 권규(權珪), 정언(正言) 성관(成瓘)·조식(趙湜), 수찬(修撰) 심계량(沈季良)·심벌(沈橃)이 청대(請對)하여, 송시열(宋時烈)의 죄를 논하고 잡아다가 엄히 국문(鞫問)해서 빨리 나라의 형전(刑典)을 바룰 것을 청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단지 송시열의 일만 그런 것이 아니고 궁위(宮闈) 사이에도 변괴(變愧)가 있으니, 대간(臺諫)이 다 논진(論陳)한 다음 말하겠다."

하니, 목창명(睦昌明) 등이 또 홍치상(洪致祥)을 율(律)에 의거하여 처형할 것을 청하였다. 이만원(李萬元)이 아뢰기를,

"홍치상은 위를 무함하는 부도(不道)를 범하였고, 송시열은 위복(威福)의 권한을 마음대로 휘둘렀습니다. 그런데도 베지 않는다면 조정의 법을 어디다 쓰겠습니까?"

하고, 목창명은 아뢰기를,

"송시열은 효묘(孝廟)의 죄인이고, 홍치상은 동조(東朝)[11]의 죄인입니다. 결단코 용서해서는 안 됩니다."

하니, 여러 신하들이 차례로 극력 요청하였다. 이식(李湜)이 아뢰기를,

"전하께서 기미년에 대론(臺論)에 따라 송시열을 죄주었다면 인심(人心)과 세도(世道)가 지금처럼 함닉(陷溺)되는 지경에는 이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고, 배정휘(裵正徽)는 아뢰기를,

"한(漢)나라 때 공주의 아들은 사죄(死罪)를 속바치는 은전(恩典)이 있었지만 임금은 오히려 법을 굽히는 것을 어렵게 여겨 결국 용서하지 않았습니다. 대저 교만 방자한 죄에 대해서도 오히려 이와 같이 하였거늘, 더구나 홍치상은 동조(東朝)를 무함하고 사류(士類)를 모해(謀害)했는데야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하고, 이만원(李萬元)이 아뢰기를,

"선왕(先王)께서 온천(溫泉)에 행행(行幸)한 것은 부득이해서였던 것인데, 송시열이 해마다 온천에 행행하면서도 한 번도 능침(陵寢)을 배알(拜謁)하지 않았다는 등의 말을 사서(私書)에 기재하여 마치 수죄(數罪)하듯 하기까지 하였으니, 이것이 신하로서 차마 할 수 있는 일이겠습니까?"

하고, 승지(承旨) 이시만(李蓍晩)은 아뢰기를,

"전하께서는 나이 많은 귀주(貴主)[12]를 생각하시어 즉시 홍치상을 베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홍치상은 전하께서 주가(主家)를 대우함에 있어 후박(厚薄)이 있다는 것을 김석연(金錫衍)에게 말하였으니, 이러한 그의 죄는 용서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고, 성관(成瓘)은 아뢰기를,

"송시열과 홍치상의 죄를 용서한다면 하늘에 계신 선왕(先王)과 선후(先后)의 신령(神靈)을 위로할 수 없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전하께서도 천하 후세의 비난을 면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고, 심계량(沈季良)은 아뢰기를,

"전하께서 처음 홍치상에게 사형에 처하지 않을 것을 허락하고 그에게 사실대로 고하게 하였는데도 숨겼습니다. 그러다가 이사명(李師命)과 대질(對質)하여 변석(辨釋)할 때에서야 비로소 말이 궁하고 안색이 저상되어 그 사실을 다 진술하였으니, 이는 홍치상이 스스로 전하를 끊은 것이요, 전하께서 실신(失信)한 것이 아닙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말세(末世)로 올수록 인심이 점점 나빠지는 것이기는 하지만 어찌 내가 당한 것 같은 일이 있겠는가? 경들에게 발본 색원(拔本塞源)할 뜻이 있으니, 나도 말하고 들은 것이 있다. 궁위(宮闈)에 【중궁(中宮)을 가리킴이다.】 관저(關雎)의 덕풍(德風)은 없고 투기(妬忌)의 습관이 있어서 병인년 희빈(禧嬪)이 처음 숙원(淑媛)이 될 때부터 귀인(貴人)에게 당부(黨付)하였으며, 분을 터뜨리고 투기를 일삼은 정상은 이루 다 말할 수가 없다. 어느 날 나에게 말하기를, ‘꿈에 선왕과 선후를 만났는데 두 분이 나를 가리키면서 말하기를 「내전(內殿)과 귀인(貴人)은 선묘(宣廟) 때처럼 복록(福祿)이 두텁고 자손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숙원(淑媛)은 아들이 없을 뿐만 아니라 복도 없으니, 오랫동안 액정(掖庭)에 있게 되면 경신년[13]에 실각(失脚)한 사람들에게 당부(黨付)하게 되어 국가에 이롭지 못할 것이다.」 했습니다.’ 하였다. 부인(婦人)의 투기는 옛날에도 있었지만 어찌 선왕·선후의 말을 가탁(假托)하여 공동(恐動)시킬 계책을 세운 것이 이토록 극심한 지경에 이를 수가 있겠는가? 투기가 통하지 않게 되자 이러한 헤아릴 수 없는 말을 만들었는데 삼척 동자인들 어찌 이 말을 믿겠는가? 간교한 정상이 폐부(肺腑)를 들여다보듯 환하다. 이런 사람은 고금(古今)에 다시 없을 것이다. 그리고 숙원에게 아들이 없는 것이 사실이라면 원자(元子)는 어떻게 탄생되었는가? 그 거짓된 작태가 여기에서 더욱 증험되었다."

하였다. 이시만(李蓍晩)이 아뢰기를,

"전하께서 신들을 자식처럼 여기시고 신들은 전하를 아버지처럼 섬기고 있습니다. 여염(閭閻)의 가정으로 말하면, 부모가 불화(不和)한데 자식의 마음이 편안할 수 있겠습니까? 궁위(宮闈) 사이에 미안(未安)한 일이 있더라도 서서히 진정하시면 될 것인데, 이와같이 드러내어 말하실 필요가 뭐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원자(元子)가 탄생하자 더욱 기뻐하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실로 이는 뜻밖이다.’ 하였다. 일찍 국본(國本)을 정한 데에는 뜻이 있는 것이다."

하였다. 목창명 (睦暢明)이 아뢰기를,

"신들이 내전(內殿)을 어머니처럼 우러르고 있는데 이러한 하교(下敎)를 듣고 어찌 마음이 편할 수가 있겠습니까? 궁인(宮人)들이 이런 말을 했다면 어찌하여 대내에서 처분하지 않으시고 외신(外臣)에게 말씀하시십니까?"

하고, 이시만은 아뢰기를,

"옛사람이 말하기를, ‘어리석지 않고 귀먹지 않으면 가장(家長) 노릇을 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범인(凡人)도 이러한데 더구나 군주(君主)야 말할게 무어 있겠습니까? 장공예(張公藝)는 참을 인(忍)자 하나로 9대(代)가 한 집에 동거할 수 있었습니다. 필부(匹夫)가 가정에 살면서도 오히려 용납하려고 힘쓰는데, 군주야 말할 게 무어 있겠습니까? 여염집으로 말하건대 부인이 어떻게 일마다 사리에 합당하게 할 수가 있겠습니까? 내전(內殿)께서도 여염집에서 생장(生長)하셨는데 여염집 부인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오직 용납하고 참음으로써 진정시켜야 합니다."

하고, 이식(李湜)은 아뢰기를,

"이시만의 말은 충심으로 전하를 사랑하는 데서 나온 말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고, 조식(趙湜)은 아뢰기를,

"전하께서는 신들에게 아버지이시고 내전께서는 신들에게 어머니이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성교(聖敎)가 이에 이르렀으니 진실로 대답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신이 바라는 바는 더욱 정가(正家)에 힘쓰고 화평(和平)에 힘을 다하여 주시라는 것뿐입니다."

하고, 강선(姜銑)은 아뢰기를,

"중궁(中宮)께서 일국의 국모(國母)로 군림하여 온 지가 우금 10년인데, 무슨 실덕(失德)이 있었기에 용납하여 참으려는 도리를 생각하지 않으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비단 신료(臣僚)들만 차마 들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후세에 전해지면 실로 성덕(聖德)에 누가 되는 일입니다. 신이 어찌 감히 이 한 몸을 아껴 전하를 저버릴 수가 있겠습니까? 신의 이 말은 중궁(中宮)을 위한 것이 아니라 실로 전하를 위한 것입니다."

하고, 이시만은 아뢰기를,

"부인들은 귀천(貴賤)을 가릴 것 없이 으레 편색(褊嗇)한 이가 많습니다. 어찌하여 너그러이 참는 도리를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성학(聖學)이 고명(高明)하신데 어찌 이를 헤아리지 못하십니까?"

하고, 이만원은 아뢰기를,

"정가(正家)하는 방법은 상하가 모두 같습니다. 부인의 성품이 편색할지라도 반드시 교회(敎誨)를 받게 되어 무사한 지경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지금 이 하교는 삼가 깊이 생각하지 않으신 것인가 합니다."

하고, 이윤수(李允修)는 아뢰기를,

"고사(古史)를 살펴보더라도 태평한 세상에는 진실로 이런 일이 없었습니다. 전하께서 제가(齊家)하는 방법에 힘을 기울이신다면, 이 어찌 신민(臣民)의 복이 아니겠습니까?"

하고, 심벌(沈橃)은 아뢰기를,

"신들은 매양 문왕(文王)의 주남(周南)의 덕화를 우리 전하께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갑자기 이런 분부를 받들게 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하였습니다."

하고, 강선(姜銑)은 아뢰기를,

"중궁께서 원자에 대해 곧 자신이 낳으신 것이나 다름이 없으니, 사랑하는 마음이 전하와 다름이 없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더욱 노여운 안색으로 말하기를,

"내가 어찌 제가(齊家)하려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투기할 뿐만이 아니라 선왕(先王)과 선후(先后)의 말이라고 속이는 것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내가 무엇을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외인(外人)으로 말하더라도 구고(舅姑)의 선령(先靈)을 가탁하여 근리(近理)하지 않은 말을 칭도(稱道)한다면, 그 심술(心術)이 어떠하겠는가? 그의 마음이 이러하니 원자를 자기가 낳은 것으로 여긴다는 것은 나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다."

하였다. 이시만(李蓍晩)이 아뢰기를,

"궁위(宮闈)를 모시고 있는 자들에게 혹 불선(不善)한 점이 있더라도 전하의 성명(聖明)함으로 어찌 포용하여 참을 것을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신이 이른바 어리석지 않고 귀먹지 않으면 안된다고 한 것은 진실로 격언(格言)입니다. 옛사람이 통곡할 만한 것이 있고, 눈물 흘릴 만한 것이 있다고 하였는데, 이는 바로 오늘의 일을 가리킨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외(內外)를 교결(交結)하여 임금의 동정(動靜)을 살핀 것이 김수항(金壽恒)이 죽게 된 이유이다. 이 사람을 그에 비기면 어떠한가?"

하였다. 임금의 의도는 귀인(貴人) 김씨(金氏)를 가리킨 것인데, 척언(斥言)하지는 않았다. 이시만이 아뢰기를,

"이는 김수항의 죄입니다. 그러나 부인(婦人)은 지식(知識)이 없으니 책할 것이 무어 있겠습니까?"

하고 이윤수(李允修)는 아뢰기를,

"이시만(李蓍晩)의 말은 잘못된 말입니다. 어머니로 섬겨야 할 지위에 계신 분에 대해서는 진실로 극력 간쟁(諫爭)해야 되는 것이요, 그 나머지는 말할 것이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윤수의 말은 그 의도가 무엇인가?"

하자, 목창명(睦昌明)이 아뢰기를,

"이시만이 전하의 분부를 모르고 언단(言端)을 바꾸었다는 것입니다."

하였다. 이윤수가 아뢰기를,

"어머니로 섬겨야 할 지위에 계신 분에 대해서는 극력 간쟁해야 되는 것이지만, 그 나머지 궁위(宮闈) 사이의 일은 오직 전하의 처분에 달린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더욱 진노하여 말하기를,

"내간(內間)의 일에 대해서 이시만과 나 사이에 누가 더 상세히 알겠는가?"

하였다. 이시만이 아뢰기를,

"부인에게는 삼종(三從)의 의(義)가 있습니다. 진실로 성덕(盛德)이 있는 분이 아니면 으레 조그만 과실을 저지르는 것을 면할 수 없는 것입니다. 때문에 부인에게 관계된 일은 비록 미안한 점이 있더라도 깊이 책하지 않는 것입니다. 단지 성상(聖上)께서 화평하게 처분하시기를 바란 것뿐입니다. 어찌 감히 귀인(貴人)을 비호할 계책에서 그랬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홍치상(洪致祥)과 김수항(金壽恒)이 서로 교통하여 임금의 동정을 살폈다. 속담에 ‘손바닥 하나로는 소리를 낼 수 없다.’고 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홍치상이 혼자서 한 일이겠는가? 하루는 빈청(賓廳)에서 인견(引見)할 때 그 연석(筵席)에서의 이야기를 소지(小紙)에 직접 기록하여 좌석(座席) 곁에다 놓아두었는데 곧바로 잃어버렸다. 귀인(貴人)이 마침 건즐(巾櫛)을 받들면서 소매 속에 숨겨 놓은 것이다. 철저히 수색을 하자 비로소 마지 못하여 환납(還納)하였다. 그 이유를 하문하니, 쓸데없는 휴지(休紙)인 줄 잘못 알았다고 했다. 이것은 한때에 우연히 저지른 일이 아닌 것으로, 유언 비어를 날조한 것은 홍치상 뿐이 아니다. 국가에 대환(大患)이 발생하게 되었으므로 내가 이를 우려하고 있는 것인데, 이시만이 어떻게 감히 구해(救解)하려 한단 말인가? 이윤수(李允修)의 말이 옳다."

하였다. 제신(諸臣)들이 이시만을 위하여 구해(救解)하는 이가 많으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시만은 무례(無禮)하기 그지 없다. 통곡할 만하고 눈물 흘릴 만하다는 말까지 하여 마치 절의(節義)를 세우려는 자처럼 하였으니, 참으로 놀랍다. 파직(罷職)하라."

하였다. 목창명이 아뢰기를,

"이시만이 결단코 다른 뜻을 품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오늘 대신(大臣)들이 입시(入侍)하지 않았는데 이런 분부가 계시니, 신들은 실로 대답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궁위(宮闈) 사이의 일은 중대한 데에 관계되므로 반드시 대신들과 상세히 의논하여 조처하셔야 합니다."

하고, 심계량(沈季良)은 아뢰기를,

"신들은 전하를 아버지처럼 우러르고 중궁을 어머니처럼 우러르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어머니의 과실(過失)을 자식에게 말하였을 경우 그 자식이 어떻게 감히 시비(是非)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1년 2년 하다가 이미 난감한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그렇지 않다면 무엇 때문에 말하겠는가? 속담에 부인은 교화(敎化)시키기 어렵다고 하던데, 이 말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하였다. 제신들이 이시만(李蓍晩)을 파직시키라는 명을 환수(還收)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파직도 가볍다."

하였다. 이만원(李萬元)이 환수할 것을 계청(啓請)하였으나 역시 따르지 않았다. 임금이 다른 승지(承旨)를 부르니 승지 김해일(金海一)이 입시하였다. 임금이 드디어 합사(合司)로 논계(論啓)한 의논을 따랐다. 임금이 이어 말하기를,

"재차 하교했는데도 【귀인(貴人)의 일을 가리키는 것 같다.】 삼사(三司)가 한마디도 없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하니, 목창명(睦昌明)이 아뢰기를,

"어머니로 섬기는 지위에 계신 분에 대해서 신들은 죽음이 있을 뿐 감히 다른 것을 말할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참으로 이런 일이 있었다면 어찌 일을 처리해 갈 방도가 없겠습니까? 그러나 경솔히 할 수는 없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하교가 이미 상세하였는데 경솔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하고, 인하여 해조(該曹)에 명하여 전례(前例)를 고찰해서 품처(稟處)하게 하였다. 드디어 전지(傳旨)를 내리기를,

"귀인(貴人) 김씨(金氏)가 김수항(金壽恒)과 내외에서 교통하여 임금의 동정을 살폈으므로 궁위(宮闈)의 일이 누설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리고 주가(主家)와 교결하여 유언 비어를 날조하고 못하는 짓이 없었으니, 처치(處置)할 방도가 없을 수 없다."

하였다. 임금이 또 목창명 등의 아룀을 따라 가을헌(加乙憲)을 정형(正刑)에 처하도록 하였다. 이만원이 아뢰기를,

"조정(朝廷)에서는 오로지 당론(黨論)에만 뜻을 두고 있을 뿐 백성들의 일은 돌보지 않고 있는데, 이것이 오늘날의 고질적인 병폐(病弊)입니다."

하였는데, 말이 채 끝기 전에 임금이 말하기를,

"인심이 나쁜 데로 빠져들어 당여(黨與)를 비호하는 것이 풍조를 이루고 있다. 김만중(金萬重)이 자기 사위를 비호하기 위해 아들에게 형(刑)을 받게 하였고, 저 자신도 누차 엄한 형신(刑訊)을 받고도 끝내 사실대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이사명(李師命)이 자복(自服)함에 이르러서야 모든 것이 다 드러난 것이다. 내간(內間)에서도 당여를 비호한 일이 있으니, 세도(世道)가 너무도 괴이하다."

하였다. 이만원이 아뢰기를,

"을묘년에 제도(諸道)에 명을 내려 양민(良民)을 조사하게 하였다가 곧이어 정지하였습니다. 그러나 충홍도(忠洪道)만은 이미 조사하였기 때문에 양민을 양여정(良餘丁)이라 하고, 서얼(庶孽)을 유음여정(有蔭餘丁)이라 하여 해마다 군포(軍布)를 거두어 들이므로 이들의 원망이 극심하니, 마땅히 그 법을 혁파해야 합니다. 그리고 대왕(大王)의 6대손(代孫) 이하를 군정(軍丁)에 충정(充定)하였기 때문에 이름은 선보(璿譜)에 있지만 몸은 천례(賤隸)에 편입되어 있으니, 이는 있을 수 없는 일로 당연히 고쳐야 합니다."

【태백산사고본】 22책 20권 47장 B면【국편영인본】 39책 174면
숙종실록 20권, 숙종 15년 4월 24일 경인 3번째기사 1689년 청 강희(康熙) 28년
영의정 권대운 등이 빈청에서 재차 전의 내용을 아뢰니 인견하.

영의정(領議政) 권대운(權大運)·병조 판서 민암(閔黯)·이조 판서(吏曹判書) 심재(沈梓)·좌참찬(左參贊) 이관징(李觀徵)·형조 판서(刑曹判書) 이우정(李宇鼎)·우참찬(右參贊) 유명천(柳命天)·좌윤(左尹) 윤이제(尹以濟)·이조 참판(吏曹參判) 유하익(兪夏益)·우윤(右尹) 권열(權說)·훈련 도정(訓鍊都正) 노정(盧錠)·행사직(行司直) 정후량(鄭后亮)·공조 참판(工曹參判) 신후재(申厚載)·공조 참의(工曹參議) 박정설(朴廷薛)·예조 참의(禮曹參議) 유하겸(兪夏謙)·호조 참의(戶曹參議) 이의징(李義徵)이 빈청(貧廳)에 모여 전에 아뢴 내용을 다시 아뢰었으나, 임금이 답하지 않고 인견(引見)할 것을 명하였다. 이때 대사헌(大司憲) 목창명(睦昌明), 장령(掌令) 이원령(李元齡), 지평(持平) 배정휘(裵正徽), 헌납(獻納) 이만원(李萬元), 교리(校理) 강선(姜銑)·권규(權珪), 수찬(修撰) 심벌(沈橃)·심계량(沈季良)도 함께 청대(請對)하니, 임금이 함께 들어오게 하였다. 또 하교(下敎)하기를,

"어제 인견할 적에 병조 판서 민암이 눈물을 흘리면서 진달하였기 때문에 내보내게 하였다. 그런데 오늘 빈청의 계(啓)에 감히 연명(聯名)할 수가 있는가? 나오지 못하게 하라."

하였다. 임금이 권대운 등에게 말하기를,

"경(卿)들이 어제 정녕(丁寧)한 분부를 들었는데, 어찌하여 또 이렇게 어기는 것인가?"

하니, 권대운이 아뢰기를,

"신들이 비록 변변치 못하기는 합니다만, 어찌 성상(聖上)의 의중(意中)을 모르겠습니까? 그러나 그래도 화평하게 진정시키기를 바라서 감히 갑자기 받들어 따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어제 비답(批答)하신 분부는 더욱 신하로서는 차마 들을 수 없는 것이어서 신들은 황공스러워 움츠린 채 어찌할 줄을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홍치상(洪致祥)의 죄악에 대해 심장(心膓)을 가진 사람이라면 통분해 하겠는가, 않겠는가?"

하니, 권대운이 아뢰기를,

"홍치상의 일에 대해서는 누군들 통분해 하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이제 모두 말하겠다. 그가 선왕(先王)과 선후(先后)의 분부를 가탁(假托)하여 한 말은 실로 총애를 독점하기 위한 데서 나온 것인데, 원자(元子)가 탄생하자 그 말이 모두 거짓임이 드러나고 말았다. 국모(國母)가 된 몸으로 간특한 것이 이와 같은데도 경들은 매양 ‘한때의 조그만 잘못이니 끝내는 반드시 감화될 것이다.’ 하니, 이것이 무슨 말인가? 저번 삼사(三司)가 청대(請對)하였을 때 홍치상(洪致祥)과 송시열(宋時烈) 등을 율(律)에 의해 다스릴 것을 청하는 아룀을 따르면서 은미하게 그 단서를 발론(發論)했었고, 또 어제도 문안(問安)을 받지 말라고 하였다. 그렇게 했으면 당연히 송구스러워 불안해 하는 마음가짐으로 징계받는 태도가 있어야 하는데, 끝내 스스로 반성하지 않은 채 문득 성난 말로 ‘진실로 나의 죄이다. 어찌 할 것인가? 폐출(廢黜)시키려거든 폐출시키라.’ 하였다. 그의 마음이 이러한데 어떻게 감화되기를 바랄 수 있겠는가? 옥당(玉堂)에서는 성명(成命)을 환수(還收)한 것을 종사(宗社)와 신민(臣民)의 다행이라고 하니, 참으로 너무도 통분스러운 일이다."

하니, 강선(姜銑)이 아뢰기를,

"중궁(中宮)께서 일국의 국모로 군림해 오신 지 이제 10년이 다 되었습니다만, 실덕(失德)한 일이 있다는 것을 듣지 못하였습니다. 전하께서는 어찌하여 갑자기 이렇게 차마 들을 수 없는 분부를 내리십니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름이 국모였지 실제로는 그런 덕이 없는데도 국모로 대우할 수가 있겠는가? 홍치상(洪致祥)은 왕실(王室)의 지친(至親)으로 군상(君上)을 무함한 정상(情狀)이 드러났는데도 오히려 말하기를, ‘홍 주부(洪主簿), 홍 주부’하면서 그가 죄를 받은 것을 매우 애석히 여기는 듯이 하였으니, 이것이 무슨 심정인가? 김씨(金氏)를 폐출할 적에 그로 하여금 전교(傳敎)에 따라 내보내게 하고서는 이어 사람을 시켜 살펴보았더니 마음이 태연 자약하였고 그의 가인(家人)을 재촉해 불러 도보(徒步)로 나가게 하면서 딱하게 여기는 빛이 있었다. 이런 사람을 오장 육부(五臟六腑)가 있는 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정궁(正宮)에 거하여 부도(不道)한 사람을 말할 적에도 반드시 그 관명(官名)을 일컬으면서 전혀 두려워하는 바가 없었다. 이런 잡류(雜類)들이 궁중에 모여 있으니, 앞으로 어떻게 감당할 수가 있겠는가?"

하니, 목창명(睦昌明)·권대운(權大運) 등이 또 간략히 아뢰었다. >임금이 노하여 말하기를,

"저 사람의 입장에서 말한다면 홍치상은 자기 남편을 무함한 자인데도 오히려 애석히 여기면서 대의(大義)를 볼아보지 않으니, 그래도 감화되기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하니, 이우정(李宇鼎)이 아뢰기를,

"어제는 차마 듣지 못할 전교를 받들었습니다. 지금은 전하께서 노여움을 돌려 화평하기를 바랐었는데 성교(聖敎)가 또 이와 같습니다.…’

하여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임금이 말하기를,

"어제부터 이우정과 민암이 같은 말로 극력 말하면서 절의(節義)를 세우려는 자 같이 하고 있다. 이우정을 파직(罷職)하라."

하였다. 이우정이 추주(趨走)해 나가니, 권열(權說)이 아뢰기를,

"신은 늙고 병든데다가 귀까지 먹어서 입으로 대답할 수가 없습니다만, 오늘의 일은 결단코 불가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고, 이어 소매 속에서 소지(小紙) 한 장을 꺼내려 하였는데, 이는 소회(所懷)를 써서 올리려 한 것이었다. 임금이 급히 말하기를,

"권열이 이미 비망기(備忘記)의 내용을 보고서도 오히려 결단코 불가하다고 하였으니, 잡아다가 추문하라."

하니, 권열이 또 나갔다. 이만원(李萬元)이 고개를 들고 우러러 아뢰기를,

"진언(進言)한 신하가 잇따라 죄를 받았으니, 신이 어찌 감히 죄가 두려워 말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전하께서 옛사람 가운데 가려서 신하로 삼으려 하신다면 공도보(孔道輔)와 여이간(呂夷間) 가운데 누구를 택하시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만원(李萬元)의 말이 무례하기 그지없다. 창읍왕(昌邑王)은 임금인데도 오히려 폐출되었다."

하였다. 이만원이 임금의 뜻을 깨닫지 못하고 이에 아뢰기를,

"신이 아뢴 것은 바로 송(宋)나라 때의 신하인 공도보를 말한 것이요, 창읍왕 때 사람을 말한 것이 아닙니다."

하면서, 이만원의 어성(語聲)이 조금 높아지자, 임금이 더욱 노하여 말하기를,

"내가 어찌 공도보의 일을 모르겠는가? 창읍왕은 임금인데도 오히려 종묘 사직을 위하여 폐출하였는데, 하물며 후비야 말해 무엇하겠는가?"

하였다. 강선(姜銑)이 이만원에게 다른 뜻이 없다는 것을 아뢰려고 발언하려 하자마자 임금이 앞에 있는 궤안(几案)을 밀치면서 성난 목소리로 꾸짖기를,

"내 말이 끝나지 않았는데 그대들이 어떻게 감히 말할 수 있겠는가? 이만원과 강선을 모두 파직하라."

하고, 이어 하교(下敎)하기를,

"이만원은 분의(分義)를 돌아보지 않고 기필코 절의를 세우려 하니, 어찌 이렇게 무례한 대간(臺諫)이 있을 수 있겠는가? 극변(極邊)에 원찬(遠竄)하라."

하였다. 목창명이 이만원을 구원하기 위해 아뢰었는데,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임금이 갑자기 분부하기를,

"내가 종묘 사직의 원대한 앞날을 위하여 걱정한다는 것을 반복해서 하유(下諭)했는데도, 경들은 나의 뜻을 모르고 기필코 부인(婦人)을 위하여 절의를 세우려고 하고 있다. 이제부터는 다시 나를 아버지처럼 섬기지 말라."

하고 또 말하기를,

"제신(諸臣)들은 나를 향하여 북면(北面)하지 말고 속히 나가라."

하니, 제신(諸臣)들이 감히 말하지 못하고 물러갔다. 권대운 등이 궐문 밖으로 나가서 연명(聯名)으로 상소를 올려 진달하고 대죄(待罪)하니, 임금이 안심하고 대죄하지 말라고 유시(諭示)하였다.
숙종실록 20권, 숙종 15년 4월 26일 임진 2번째기사 1689년 청 강희(康熙) 28년
영의정 권대운과 좌의정 목내선이 정청을 정지하다.

영의정 권대운(權大運)과 좌의정 목내선(睦來善)이 폐비의 정청(庭請)을 정지하였고, 대사헌 목창명(睦昌明)과 대사간 유명현(柳命賢) 등이 복합(伏閤)을 정지하였다.

사신(史臣)은 논한다. "후비(后妃)를 폐치(廢置)하는 것은 국가의 큰 변고이고, 정청과 복합은 조정의 대대적인 거사이다. 국가의 큰 변고를 당하여 조정의 대대적인 거사를 함에 있어 이틀 사이에 시작했다가는 곧 그침으로써 마침내 국모(國母)를 폐출(廢黜)되게 하였고, 끝내는 군부(君父)의 잘못된 거조(擧措)를 완성시켜 주었다. 그러니 지위가 백료(百僚)의 우두머리요, 벼슬이 양사(兩司)의 장관인 자들이 어떻게 그 죄를 피할 수가 있겠는가?

이뿐만이 아니라 후임 대신을 임명하는 것(복상이라고 한다)도 왕과 대신이 합의하여야했다.
정조실록 12권, 정조 5년 12월 9일 정축 2번째기사 1781년 청 건륭(乾隆) 46년
복상(卜相)하라고 명하다.

복상(卜相)하라고 명하였다. 영의정 서명선이 아뢰기를,

"오늘의 복상은 진실로 차대(次對)가 있기 전에 먼저 행했어야 합니다. 신은 사의(私義)에 있어 편안하기 어려운 점이 있기 때문에 이에 대해 품정(稟定)하기 위해 입시(入侍)하기를 기다렸습니다. 신의 형(兄)의 이름이 전망(前望)에 들어 있었는데, 구례(舊例)를 거슬러 상고해 보니 혹 발망(拔望)하기도 하고 혹 서입(書入)하기도 하여 일정한 법규가 없었습니다. 매복(枚卜) 은 사체가 중하여 거취(去就)를 스스로 마음대로 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 점이 있기 때문에 감히 우러러 진달합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상망(相望) 은 사체가 다른 경우와는 자별한 것이니, 어찌 친혐(親嫌)이 있다는 것으로 발망(拔望)할 수 있겠는가? 전의 망단자(望單子)에 의거하여 써서 들이라."

하였다. 복상(卜相)하였는데, 【봉조하(奉朝賀) 김치인(金致仁), 영중추(領中樞), 김상철(金尙喆), 영돈녕(領敦寧) 이은(李溵), 판중추(判中樞) 정존겸(鄭存謙)·정홍순(鄭弘淳)·이휘지(李徽之), 봉조하 서명응(徐命膺)이다.】 이휘지(李徽之)를 의정부 우의정으로 삼았다.

【태백산사고본】 12책 12권 72장 B면【국편영인본】 45책 285면

후임 정승 임명문제로 군신간 기세싸움이 나기도 하였다.
숙종실록 42권, 숙종 31년 11월 8일 무진 1번째기사 1705년 청 강희(康熙) 44년
우의정 이유에게 명하여 정승이 될 만한 사람을 가리게 하다.

임금이 우의정 이유(李濡)에게 명하여 복상(卜相)하게 하였는데, 복상하여 봉입(封入)하니, 전교하기를,

"가복(加卜) 하라."

하였다. 홍수헌(洪受瀗)을 가복하여 들이니, 전교하기를,

"가복하라."

하였다. 또 최규서(崔奎瑞)를 가복하여 들이니, 또 전교하기를,

"가복하라."

하였다. 이유가 청대(請對)하여 말하기를,

"새로 복상하는 일은 사체(事體)가 중대하므로, 수상(首相)이 아니면 감히 할 수 없는데 세 번이나 가복을 명하셨으니, 더욱이 황공합니다. 예전부터 ‘임금이 불러서 복상하게 하면 과연 누가 하겠느냐?’는 말이 있으니, 그 신중한 뜻을 알 수 있습니다. 신하를 아는 것은 임금 만한 이가 없으니, 뭇 신하의 장단점을 성명(聖明)께서 스스로 아실 것입니다. 군신(君臣) 사이에는 열어보이는 것이 귀중하니, 전석(前席)에서 논란한들 무엇이 해롭겠습니까? 근래 조신(朝臣)은 형세도 비슷하고 덕(德)도 비슷하여 그리 높낮이가 없으므로, 그 자급(資級)의 선후를 취하여 차례로 씁니다. 이번 복상에는 먼저 자급을 취한 뒤에 인망(人望)을 취하였는데, 이제 재차 삼차 가복하였으니, 이는 신의 식견이 미치지 못한 죄이니, 또한 어찌 국체(國體)에 손상이 없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세도(世道)가 예전만 못하여 일찍이 가복하는 일 때문에 참혹한 말을 들었다. 이번에 재차 가복한 것은 정승을 신중히 생각하는 뜻에서 나왔는데, 최규서로 말하자면 너무나도 뜻밖이다. 최규서는 당초 불안할 만한 일이 없음에도 까닭없이 시골로 내려갔고, 나라에 큰 일이 있는데도 한 번도 들어오지 않았다. 산림(山林)의 속세를 떠난 선비일지라도 임금이 간절한 뜻을 두면 어찌 마음을 움직이지 않겠는가? 신하로서 분의(分義)를 모르는 것을 이제 이 사람에게서 비로소 보았다. 오늘의 가복은 참으로 뜻밖이다."

하였다. 이유가 말하기를,

"인망이 있기 때문에 감히 복입(卜入)한 것입니다. 정승에 제배(除拜)하는 것은 다른 벼슬과 다르니, 저가 어찌 감히 오지 않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나는 최규서를 괴이한 사람으로 여긴다. 오늘날 조정에 인재가 모자란다고는 하나, 어찌 달리 매복(枚卜)할 사람이 없겠는가? 대신의 뜻으로는 지금 복상에 합당한 사람이 몇이나 된다고 생각하는가?"

하였다. 이유가 말하기를,

"서종태(徐宗泰)·조태채(趙泰采)·이이명(李頤命)·김창집(金昌集) 네 사람이 있는데, 이 가운데에 주의(注意)하는 사람이 있으니, 물러가서 복입(卜入)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물러가서 복입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이유가 나가서 또 조태채를 복입하니, 임금이 비망기(備忘記)를 내려 이르기를,

"매복(枚卜)은 나라의 중대한 일이다. 재차 가복하라는 명을 내린 것은 정승을 신중히 생각하는 뜻에서 나왔는데, 전리(田里)에 누워 분의(分義)에 아주 어두운 사람을 모두가 바라보는 지위에 두려 하였으니, 오늘의 복상은 이미 매우 한심하다. 마지막에 가복한 사람은 본디 내가 여러 번 초탁(超擢)한 자이니 매복에 맞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아니나, 오랜 차서로 말하더라도 마땅한 사람이 없지 않으니, 이번의 매복은 매우 공정하지 못하다. 정원(政院)은 알도록 하라."

하였다.
영조실록 125권, 영조 51년 11월 20일 계사 1번째기사 1775년 청 건륭(乾隆) 40년
《어제자성편》《경세문답》을 진강하도록 명하고 세손에게 전선하는 것 등에 대해 논의하다
임금이 집경당에 나아가 시임 대신·원임 대신을 불러 보고 《어제자성편(御製自省編)》, 《경세문답(警世問答)》을 진강(進講)하도록 명하였다. 동궁(東宮)과 영돈녕(領敦寧) 김양택(金陽澤), 영의정 한익모(韓翼謨), 판부사(判府事) 이은(李溵), 좌의정 홍인한(洪麟漢), 우부승지 안대제(安大濟), 가주서(假注書) 박상집(朴相集), 기사관(記事官) 서유련(徐有鍊)·성정진(成鼎鎭)이 앞으로 나와서 엎드리자, 임금이 이르기를,

"탕평(蕩平)이 어느 때에 있었느냐?"

하니, 한익모가 아뢰기를,

"홍범(洪範)에 보이는데, 한(漢)·당(唐) 이후에는 그것이 없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신기(神氣)가 더욱 피곤하니 비록 한 가지의 공사(公事)를 펼치더라도 진실로 수응(酬應)하기 어렵다. 이와 같은데도 어찌 만기(萬幾)를 수행하겠느냐? 국사(國事)를 생각하느라고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한 지가 오래 되었다. 어린 세손이 노론(老論)을 알겠는가? 소론(少論)을 알겠는가? 남인(南人)을 알겠는가? 소북(少北)을 알겠는가? 국사(國事)를 알겠는가? 조사(朝事)를 알겠는가? 병조 판서를 누가 할 만한가를 알겠으며, 이조 판서를 누가 할 만한가를 알겠는가? 이와 같은 형편이니 종사(宗社)를 어디에 두겠는가? 나는 어린 세손으로 하여금 그것들을 알게 하고 싶으며, 나는 그것을 보고 싶다. 옛날 나의 황형(皇兄)은 ‘세제(世弟)가 가(可)한가? 좌우(左右)가 가한가?’라는 하교를 내리셨는데, 지금의 시기는 황형이 계실 때에 비하여 백 배가 더할 뿐이 아니다. 〈전선(傳禪)한다는〉 두 자(字)를 하교하고자 하나, 어린 세손의 마음을 상하게 할까 두려우므로 말하지 않겠다. 그러나 청정(聽政)하는 일에 이르러서는 본래부터 국조(國朝)의 고사(故事)가 있는데, 경 등의 생각은 어떠한가?"

하니, 홍인한이 말하기를,

"동궁은 노론이나 소론을 알 필요가 없고, 이조 판서이나 병조 판서를 알 필요도 없습니다. 더욱이 조사(朝事)까지도 알 필요 없습니다."

하였다. 여러 대신(大臣)들이 말하기를,

"성상의 안후가 더욱 좋아지셨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내 뜻은 이러한데 경 등이 몰라 주니 참으로 개탄스럽도다. 심법(心法)을 어린 세손에게 전하여 주려고 하는데, 《자성편》, 《경세문답》은 곧 나의 사업(事業)이다."

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일후(日後)에 소대(召對)할 때에는 《경세문답》과 《자성편》을 가지고 들어오게 하라."

하였다. 이때 임금의 연세가 이미 대질(大耋)에 올라 몸에 병이 해마다 더 많아지니 조용히 조섭을 하는 중에 늘 군국(軍國)의 여러 가지 일들로 근심하였다. 이해 10월 7일에 연화문(延和門)에서 상참(常參)을 행하였는데, 담후(痰候)가 매우 심하여 여러 신하들이 감히 일을 아뢰지 못하고, 임금은 곧 대궐로 돌아와서 왕세손에게 하교하기를,

"지난 여름 너에게 명례궁(明禮宮)의 일을 살펴보도록 명하였는데, 이는 비록 작은 일이지마는 궁부(宮府)와 다를 것이 없다. 근래의 대소 사전(祀典)에 꼭 너를 시켜 대신 섭행하게 한 것은 내가 깊이 생각한 것이다. 오늘 나의 근력을 시험하여 보려고 하나, 스스로 버틸 방도가 전연 없다. 어린 세손이 숙성하여 나를 지성으로 섬기니, 결단코 나의 소망을 저버리지 않을 것이다. 이때를 당하여 기무(機務)를 대신 듣게 한다면 내 생전에 친히 볼 수 있을 터이니, 어찌 빛나고 아름답지 않겠느냐?"

하니, 왕세손이 감히 대답하지 못하였다. 이 때에 이르러 시임 대신·원임 대신이 집경당에서 입시하였는데, 임금이 이르기를,

"근래 나의 신기(神氣)가 더욱 피로하여 한 가지의 공사를 펼치는 것도 역시 수응하기가 어렵다. 이와 같고서야 만기(萬幾)를 처리할 수 있겠느냐? 국사를 생각하니 밤에 잠을 이룰 수 없은 지가 오래 되었다. 어린 세손이 노론이나 소론을 알겠으며 남인이나 소북(小北)을 알겠는가? 국사를 알겠으며, 조정 일을 알겠는가? 병조 판서를 누가 할 만한가를 알겠으며 이조 판서를 누가 할 만한가를 알겠는가? 이와 같은 형편이니 종사(宗社)를 어디에 두겠는가? 옛날 나의 황형(皇兄)께서는 ‘세제(世弟)가 가한가? 좌우의 신하가 가한가?’라는 하교를 내리셨는데, 오늘의 시기는 더욱 황형의 시기보다 더할 뿐만이 아니다. 두 자를 【대개 전선(傳禪) 2자를 가리킨다.】 하교하려 하나 어린 세손의 마음을 상하게 할까 두렵다. 청정(聽政)에 있어서는 우리 왕조(王朝)의 고사(故事)가 있는데, 경 등의 의향은 어떠한가?"

하니, 적신(賊臣) 홍인한(洪麟漢)이 앞장서서 대답하기를,

"동궁께서는 노론과 소론을 알 필요가 없으며, 이조 판서와 병조 판서를 알 필요가 없습니다. 조정의 일에 이르러서는 더욱이 알 필요가 없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한참 동안 흐느껴 울다가 기둥을 두드리며, 이르기를,

"경 등은 우선 물러가 있거라."

하니, 대신 이하가 문 밖으로 나갔다. 다시 입시를 명하고, 임금이 이르기를,

"나의 사업(事業)을 장차 나의 손자에게 전할 수 없다는 말인가? 나는 이와 같이 쇠약해졌을 뿐 아니라 말이 헛나오고 담이 끓어 오르는 것이 또 특별한 증세이니, 크게는 밤중에도 쪽지[寸紙]를 내보내어 경 등을 불러 들이게 될 것이고 작게는 담의 증세가 악화되어 경 등이 비록 입시하더라도 영의정이 누군지 좌의정이 누군지 알지 못하는 것이다. 만일 중관(中官)들을 쫓아내 버리면 나라의 일이 장차 어떻게 되겠는가? 마음 속에 있는 말을 지금 다시 경 등에게 말할 수가 없다. 차라리 나의 손자로 하여금 나의 심법(心法)을 알게 하겠다. 이 다음부터 동궁이 소대할 때에는 《자성편》과 《경세문답》을 진강(進講)하여 다만 나의 사업을 알려서 후세로 하여금 나의 마음을 모르지 않게 하라."

하였다.

신(臣)이 삼가 살펴보건대, 옛날의 성인은 장차 천하를 다른 사람에게 전하기 위하여 반드시 천하를 다스리는 법까지 전하여 주었으니, 대순(大舜)이 전한 정일 집중(精一執中)의 훈계가 이것이다. 다만 이 두편의 어제(御製)는 곧 우리 성조(聖祖)께서 50년 동안 몸소 실천하고 마음에 체득한 것을 모훈(謨訓)으로 삼는 글을 내놓아 우리 성상(聖上)에게 넘겨 주었으니, 부탁의 친절함과 주고 받음의 광명(光明)은 참으로 훌륭하였다. 아! 성상(聖上)께서 수고로움을 쉬시고 조용히 조섭을 하시는 때를 당하여 종사(宗社)가 의지할 것이나 신민(臣民)이 바라는 바가 오직 우리 왕세손뿐인데, 국사나 조정(朝政)을 우리 세손께서 알지 못하면 누가 알아야 하겠는가? 또 더군다나 실패한 아버지의 대를 이은 적자로서 떳떳한 직분인 대리 청정(代理聽政)하는 것은 열성(列聖)의 고사(故事)에 있는 것이겠는가? 진실로 국사(國事)에 몸담은 대신이 있다면, 본디 명령하지 않아도 뜻을 받들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아! 저 적신은 보필(輔弼)하는 지위에 있으면서 임금의 간곡하신 하교를 듣고도 오만하게 감동하지 않을 뿐 아니라 이내 감히 공공연히 드러내놓고 저희(沮戱)하여 그 말이 비할데 없이 아주 극도로 패악하여 신하의 예(禮)를 회복할 수가 없었다. 우리 성상께서 부탁하고 수수(授受)하신 고심(苦心)과 대계(大計)로 하여금 달포가 지나도록 시간을 끌게 해서 막고 시행하지 못하게 하였다. 그가 안팎으로 체결(締結)하고 앞뒤로 선동(煽動)한 죄를 살펴보면 우선 그 죄는 셀 수 없을 정도인데, 곧 이 하나의 연주(筵奏)를 가지고 보더라도 반역하려는 마음이 드러난 것이요, 역적의 죄안(罪案)이 갖추어진 것이다. 조진(朝診) 때에 홍인한이 ‘세 가지 알 필요가 없다는 말[三不必知說]’로써 임금에게 우러러 대답하였는데 혜경궁(惠慶宮)께서 이 말을 듣고 작은 종이에 써서, 반드시 수고를 덜고자 하는 성상의 뜻이라고 자세하고도 간곡한 하교를 홍인한에게 통지하였으나, 그가 석연(夕筵)에 이르기까지도 주대(奏對)한 것은 조진(朝診) 때와 같았다. 아! 만일 홍인한이 과연 성상의 본뜻을 알지 못하고 조금도 딴마음이 없었다면 ‘세 가지 알 필요가 없다’는 말은 신자(臣子)로서 감히 입에서 나올 것이 아닌 것이다. 그런데 조진(朝診) 때에 대답한 것은 그래도 임금의 마음을 알지 못하고 당황한 마음을 미봉하려고 하였다는 핑계를 댈 수도 있다. 그러나 마침내 혜경궁의 글을 본 뒤에 입시하여 주대(奏對)한 것도 또다시 전과 같았으니, 조진 때엔 비록 임금의 마음을 알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이미 알고 난 뒤에도 그 말이 똑 같았다면 그에게 과연 딴 마음이 없었겠는가? 이런 까닭으로 홍인한 일당이 이 일에 대하여 발명(發明)하려고 하였으나 참으로 수고를 덜고 싶어하는 성상의 뜻임을 몰랐다고 하는 등의 말에 이르러서는 오히려 감히 내어놓고 공공연히 말하지 못한 이것은, 그날의 글로써 알린 뒤에도 오히려 다시 사실과 배치(背馳)되었기 때문이다. 그가 먹은 마음의 자취가 나타난 것이 이와 같았으니 비록 그들이 생사(生死)를 같이하는 당(黨)으로 하여금 변명하게 하더라도 그 사이에 딴 뜻이 없었다고 감히 말하겠는가?

【태백산사고본】 82책 125권 18장 A면【국편영인본】 44책 503면

3. 평가

삼정승을 지칭하여 일인지하 만인지상이라고 하는 옛말처럼, 조선 왕조에서 정승의 지위와 그 기능 및 역할은 매우 중대한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재상의 권한을 3인이 나누어 수행했기에 지나친 권력 집중으로 인한 문제를 완화할 수 있었다.

4. 여담


[1] 대신이라고도 칭한다.[2] 오히려 좌·우의정의 실권이 더 강했던 감이 있었다. 좌의정이 판이조사(判吏曹事), 우의정이 판병조사(判兵曹事)를 겸했기 때문이다. 판사는 담당 부서의 업무를 감독하는 것이 주 업무로 따라서 좌의정은 문관(東班) 인사를 담당하는 이조에, 우의정은 무관(西班) 인사와 군사를 담당하는 병조에 바로 개입할 수 있었다. 때문에 담당 실무가 적은 영의정보다 좌·우의정, 특히 문치주의 국가인 조선에서 문관 인사권의 최종 감독권을 가진 좌의정이 최고 실세직이었다.[3] 다만 영의정은 왕이 유고 시 원상이 되어 새 왕의 즉위를 총괄하였고, 옥새를 새 왕에게 전달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또한 영의정은 조정 관료 서열 1위라는 상징성과 위치상 높은 연배의 노신이 맡는다는 특성상 신하들 사이의 분쟁을 조절하고 권신이 선을 넘으려는 것을 자제시키는 역할을 수행했기에 실권 없는 명예직은 아니었다.[4] 한음(漢陰)[5] 이덕형 항목에서도 볼 수 있지만, 당색을 달리하면 비록 성인군자라도 소인으로 기록된다. 정탁의 경우도 마찬가지다.[6] 인현왕후가 폐출되고 남인이 재집권한 기사환국을 의미함.[7] 남인중 온건파, 여기서는 이봉징[8] 복평,복창을 의미[9] 소현세자의 빈인 며느리 강빈의 사사[10] 인현왕후는 노론계 가문 출신이었다. 붕당이 한창일 때는 위로는 대왕대비, 왕대비, 왕비, 세자빈으로부터 아래는 후궁 심지어 궁녀들까지도 당쟁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11] 장렬대왕대비 조씨[12] 귀주는 숙안공주를 의미한다. 숙안공주는 효종의 차녀로 홍치상의 어머니이고 숙종에게는 고모가 된다[13] 경신년의 경신환국때 쫒겨난 남인을 의마한다[14] 의정부의 권한이 줄어들었다고 하여 삼정승의 권력이 축소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삼정승은 비변사의 수장들이 되었고 정승을 역임한 원로대신들도 비변사의 수장으로 인사권을 움켜쥐었다. 권한이 추락한 건 정승의 보좌직인 찬성참찬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