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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4 15:27:16

소현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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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전주 이씨 종문.svg 전주 이씨 소현세자파의 역대 종주
소현세자파 역사 시작 1대 소현세자 이왕 2대 경선군 이백 }}}
<colbgcolor=#1b0e64><colcolor=#ffd400>
조선 인조조 왕세자
소현세자 | 昭顯世子
파일:소경원.jpg
소경원 전경
출생 1612년 2월 5일
(음력 광해군 4년 1월 4일)
한성부 회현방 능양군 사저
(現 서울특별시 중구 회현동)
책봉 1625년 3월 5일
(음력 인조 3년 1월 27일)
한성부 경덕궁 융정전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새문안로 45)
사망 1645년 5월 21일 (향년 33세)
(음력 인조 23년 4월 26일)
한성부 창경궁 환경전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창경궁로 185)
능묘 소현묘(昭顯墓) → 소경원(昭慶園)
재위기간 조선 왕세자
1625년 3월 5일 ~ 1645년 5월 21일
(음력 인조 3년 1월 27일 ~ 인조 23년 4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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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1b0e64><colcolor=#ffd400> 본관 전주 이씨
(𪶁)[1][2]
부모 부왕 인조
모친 인열왕후
형제자매 6남 1녀 중 장남
배우자 민회빈 강씨
자녀
4남 5녀 [ 펼치기 · 접기 ]
장녀 - 군주(1629 ~ 1631)
차녀 - 군주(1631 ~ 1640)
장남 - 경선군(慶善君, 1636 ~ 1648)
3녀 - 경숙군주(慶淑郡主, 1637 ~ 1655)
차남 - 경완군(慶完君, 1640 ~ 1648)
4녀 - 경녕군주(慶寧郡主, 1642 ~ 1682)
5녀 - 경순군주(慶順郡主, 1643 ~ 1697)
3남 - 경안군(慶安君, 1644 ~ 1665)
4남 - 왕손(1645 ~ 1645)
종교 유교 (성리학)
시호 소현세자(昭顯世子) }}}}}}}}}

1. 개요2. 생애3. 묘소4. 자녀5. 평가
5.1. 제반 사료5.2. 유교 질서에 대한 태도5.3. 천주교에 대한 관심
5.3.1. 아담 샬과 황비묵의 회고5.3.2. 아담 샬 기록의 신빙성5.3.3. 선교사 및 성물 관련5.3.4. 무당 기록 관련
5.4. 사업 능력5.5. 인조와의 관계5.6. 야사에서의 이미지
6. 대중매체7. 관련 문서8.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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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제16대 임금 인조인열왕후 한씨의 장남. 효종, 인평대군, 용성대군의 친형이며 전주 이씨 소현세자파의 파조이다.

2. 생애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소현세자/생애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3. 묘소

순회묘로 명명된 순회세자 무덤의 전례에 따라 소현묘로 명명되었다가 1870년(고종 7년)에 순회묘, 의소세손의 의소묘와 함께 원(園)으로 개칭되었다. 무조건 '세자 무덤=원(園)'이 아니고 원이 아닌 묘로 명명했으니 격을 낮췄다고 하면 안 된다. 세자의 무덤을 원으로 일괄 명명함은 대한제국이 점차 일본에게 잠식되어 망하기 직전인 고종 때의 일이다.

그전까진 정조가 비명에 죽은 사도세자의 무덤을 수은묘에서 영우원(永祐園), 현륭원(顯隆園)으로 개칭한 사례가 전부로 그 외엔 묘라고 부르다 의경세자, 효장세자, 효명세자처럼 추존되면 릉으로 올리는 식이었다.

사도세자도 그가 조선사에 유일무이한 부왕에게 처분당한 세자라서 큰아버지 진종(효장세자)의 아들로 입적된 정조선왕과의 의리를 내세우는 신하들을 무시하고 추존하는 게 불가능해 궁여지책으로 원으로라도 개칭한 것이지 단순한 병사였다면 바로 왕릉으로 격상되었을 것이다.

소현세자의 소경원은 서삼릉 권역에 있다. 그러나 주변 부지가 농협 젖소개량소, 군부대로 둘러싸여 있어 비공개 구역이다. 특히 그 아들인 경선군과 경완군의 무덤은 군부대 권역 내에 있다.

4. 자녀

소현세자민회빈 강씨는 3남 5녀를 두었으며, 소현세자 사후 유산한 넷째 아들까지 포함하면 4남 5녀이다.
세 아들 중 경안군 이석견(이백)만 후손을 남겼기 때문에[6] 소현세자의 남계 후손은 모두 경안군의 후손이다. 이 된 효종의 직계가 갈수록 손이 귀해지다가 끊어져 버린 것과 달리 소현세자의 4살짜리 막내 아들이 8년에 걸친 섬에서의 귀양살이를 버텨내고, 이후 여러차례 역모에 연루되어 화를 입었음에도 끝까지 대를 이어 살아남아 그 후손들이 오늘날 전주 이씨 소현세자파로 남아있다.

소현세자파가 계속 많은 자식을 두며 악착같이 대를 이을 수 있었던 이유는 역으로 왕이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조선 후기에는 유교적 종법질서가 강화에 영향을 받은 처첩관념의 심화로 인한 간택후궁 수가 줄어들고 유교적 예제, 특히 상례와 제례기간 동안의 재계기간 엄수와 상례와 제례대상자 수의 증가로 인한 재계기간이 크게 증가하는데 이는 곧 금욕 기간의 증가로 이어져 왕과 왕비의 성생활을 제약하고 출산력 감소의 주된 원인으로 작용했다.[7][8] 다시 말해 소현세자가 왕이 되었으면 왕실이 손이 번창했을 거라는 일부의 추정은 아무 근거없는 희망사항이다.

아들들은 왕위 계승권 문제 때문에 죽거나 짧고 불운한 삶을 살았으나, 남겨진 세 딸은 기록이 전혀 없다. 다만 효종청나라에서 공주왕비로 시집보내라고 명령했을 때[9] 청나라로 보내지 않고 서둘러 시집보냈다. 다만 이것만 가지고 효종이 조카딸들만큼은 나름 인간적으로 아꼈다고 단정하긴 어려운 것이, 효종이 소현세자의 딸들을 청나라로 보내지 않은 건 청나라에 대한 적개심과 반항심의 발로로도 해석 가능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과정에서도 효종이 조카딸들을 군주로 추증해 왕족 대접을 해준 것도 아니다. 공주나 군주가 되어야 나라에서 녹봉이 지급되고, 시가에서도 종친녀로서 제대로 된 대접을 받을 수 있다. 효종은 자신의 딸들[10] 같은 경우엔 창경궁 내 사위와 함께 살 처소를 지어줄 만큼 예뻐하고 아꼈다.

반면 어린 나이에 뿔뿔이 흩어져 시집간 소현세자와 강빈의 딸들은 효종이 죽기 두어 달 전에야 비로소 군주 칭호를 받았고, 부모와 형제들이 죽은지 10여 년이 흐른 뒤에야 소현세자의 딸들은 본래 신분을 회복하면서 시댁에서도 나름 대접받고 살게 되었다.[11] 그러니까 효종 9년까지만 해도 소현세자 집안은 죄인 집안이었던 셈인데 그럼 이석견에게도 냉랭하게 대하다가 죽기 직전에야 봐줬냐면 그건 또 아니고, 인조에 비해서는 온건한 처분을 내려서 즉위 후 이듬해에 유배지를 제주에서 강화로 옮겨주었고[12] 효종 5년에는 이석견의 유배를 풀어주었다. 즉 효종은 인조에 비해서 보면 소현세자 집안에 온정적이었다.[13] 다만 한번에 복권시킨 게 아니라 차근차근 과정을 밟다보니[14] 이석견의 복권은 좀 늦게 이루어졌고, 이에 덩달아 소현세자의 딸들 역시도 늦게 복권된 것이다.

여담으로 1676년(숙종 2년)에 처경(處瓊)이라는 승려가 소현세자의 유복자를 사칭해 소동을 일으켰다가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처경은 평해군의 향리 손도(孫燾)의 아들로 승려가 된 후 1671년(현종 12) 무렵부터 신승(神僧)으로 자처하면서 경기도 지방을 떠돌아다녔다. 그는 수려한 용모와 화려한 언변과 작은 옥부처상으로 사람들을 현혹하면서 생불(生佛)로 불렸으며 따르는 추종자가 많았고 그중에는 궁중 나인이나 양반 세도가들도 있었다. 경성부에 사는 사대부 집안의 여종 묘향(妙香)이 자신이 소현세자의 유복자를 닮았다는 말을 듣고 같이 작당하여 가짜 문서를 만들어 자신이 강빈이 낳은 소현세자의 (죽었다고 알려진) 유복자로 사칭하며 남인의 거두이자 영의정인 허적(許積)에게 접근해 사기극을 벌이려 했지만 발각되어 묘향과 함께 처형되었다.

5. 평가

소현세자가 조선인 포로 쇄환이나 각종 외교적 현안에서 조선의 입장을 대변하며, 조선의 세자로서 부끄럽지 않고 현명하게 처신한 것에 대해서는 논쟁의 여지가 없다.

더 나아가 볼모 생활 중 보인 변화를 통해 계몽군주의 씨앗을 가지게 되었을 수도 있다. 성리학적 가치에 회의를 느꼈고, 아담 샬과 교류하며 가톨릭에 호의를 가졌으며 호기심을 보였다. 오늘날에도 이런 평가는 대중들에게 정설로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최근에는 기존의 소현세자 이미지에 대한 반론이 생기고 있으며, 《심양일기》나 《동궁일기》, 《승정원일기》를 파고 드는 사람들은 소현세자의 이런 기존 이미지들이 과장이나 허구라고 여기는 수정주의적인 면모를 보이기도 한다.

이에 따르면 소현세자는 조선과 청나라 간의 입장을 조율하는 본인에게 버거운 임무를 수행한 나머지 스트레스를 못 이겨 지병을 달고 사는 허약 체질의 환자였으며, 세자로서의 할 일은 했지만, 딱히 기존 질서에 대해 반감을 드러낸 적도 없는 존재였다. 인조는 이 아들이 결국 골골거리다 죽자, 건강하고 장성한 봉림대군을 계승자로 확정짓기 위해 소현세자 가족을 숙청했지만, 결코 인조가 맏아들을 사랑하지 않아서는 아니었다.

5.1. 제반 사료

최근 방대한 기록들이 새로이 연구되면서 대중적인 이미지가 좋은 소현세자에 대한 수정주의적 해석도 많이 제출된 바 있다. 실제로 소현세자의 일기는 여러 세자들의 일기 중 가장 먼저 번역된 것이기도 하며, 《심양일기》나 《동궁일기》, 《승정원일기》를 통해 기존의 《조선왕조실록》이나, 아담 샬의 《회고록》만으로는 알 수 없었던 정보들이 대거 밝혀진 것이 사실이다.

심양일기》, 《동궁일기》, 《승정원일기》가 사료로서 낸 성과는 크게 두 가지로, 첫째는 소현세자의 죽음이 기존의 인식대로의 독살이 아닌 병사의 가능성이 강하게 제기되었다는 것이다. 둘째는 병자호란 이전 소현세자와 강빈 사이에 아이가 원손 하나가 아니고 셋이었다는 점이다. 특히 《승정원일기》나 《심양일기》에 나오는 소현세자 진료 기록은 여러 논문들에서 적극 인용되었다.

다만 《조선왕조실록》은 《승정원 일기》를 토대로, 당시 사람들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기록들을 발췌해, 《심양일기》나 《동궁일기》, 《승정원일기》만 읽어서는 알 수 없는, 당대 사람들만이 아는 팩트나 분위기, 맥락을 첨가해 정리한, 어떤 의미에선 더 본질에 가까울 수도 있는 사료이다.[15] 실제로 1차 사료인 《승정원일기》엔 간략히 나온 사건이 《조선왕조실록》에선 맥락을 설명하기 위해 《승정원일기》에 없었던 일까지 덧붙여 훨씬 자세히 소개되는 경우도 있다.

만약 《동궁일기》나 《심양일기》가 정말 소현세자의 개인 저서이고, 《조선왕조실록》에서 다루지 않는 다양하고 시시콜콜한 주제에 관해 솔직히 이야기한다면, 충분히 소현세자의 철학이나 내면, 실체를 파악하는 데 있어 《조선왕조실록》보다 우선해도 좋을 만한 공신력을 가질 것이다. 그러나 이런 사료들 역시 《조선왕조실록》과 마찬가지로 사관이나 시강원 스승들의 눈으로 씌여진 것이며, 분량만 많지 주제는 비슷하다.[16] 게다가 《조선왕조실록》처럼 앞뒤 맥락을 부연설명하고자 하는 시도도 별로 없다. 마치 그날의 의무처럼, 날씨, 왕의 위치, 공식 행사등 정해진 주제에 대해 간략한 메모들만 나열해 놓기 때문에, 수백년 후 현대인이 자의적인 해석으로 맥락을 창조하다 보면 오히려 본질이 산으로 갈 위험도 있다.

예컨대 《동궁일기》나 《심양일기》만 읽다 보면, 소현세자는 평생 강빈과 감정적인 교류가 거의 없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사관들이 그런 건 기록하지 않기 때문이다. 때문에 소현세자와 강빈이 1년에 손 꼽을 정도로만 말을 섞다가, 어쩌다 잠만 한번 자면 바로 아이가 떡 생겨버리는 이미지도 가능하다. 더군다나 《심양일기》는 소현세자의 눈병이나 감기에 대한 기록은 남겨도, 자녀 출생은 일절 기록하지 않는 바람에 《심양일기》만 보면 대체 군주와 왕손들이 어디서 왔나 싶을 정도다. 하지만 두 사람의 좋은 금슬은 《조선왕조실록》에 남겨진 일련의 기록과, 그들이 자식을 만든 숫자와 타이밍에서 유추된다.[17]

이처럼 《심양일기》나 《동궁일기》가 소현세자의 전부라고 여기다 보면, 아담 샬의 회고 같은, 소현세자의 개인 생각이 드러난 희귀한 자료는 어떻게든 허구로 몰아붙이거나 평가절하할 수밖에 없다. 《심양일기》만 보면 소현세자는 가톨릭과 무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작 소현세자가 가톨릭을 처음 접했으리라 추정하는 북경에서의 70여 일 간, 《심양일기》는 쓰이지 않았다. 따라서 《조선왕조실록》에서 나온 소현세자의 인성이나 성향에 대한 총평을 비롯해 당대 사람들이 바라본 소현세자의 총체적인 인상 역시, 당연히 사료들을 해석하는 참고자료가 되어야 할 것이다.

'기존 사료는 틀렸고, 새로운 사료가 진실이다'라는, 뭔가 극적 반전을 갈망하는 흑백논리로 접근하는 것 보단, 양자를 모두 사료로 인정하고 상호 보조하며 보는 것이 소현세자의 실체에 더 정확히 다가서는 길로 보인다.

5.2. 유교 질서에 대한 태도

조선왕조실록》에 나온 졸기를 보면, 소현세자는 머리는 좋지만 낯을 가리는 성격이었다.[18] 특히 조선 사회의 주류층인 성리학자들과 거리를 뒀던 듯, 코드가 맞는 사람하고만 어울린다는 식으로 비판받았다. 그런데 실록에 따르면, 소현세자와 코드가 맞는 이들은 무인들 및 노비들이었다.

소현세자가 사관들에게 말을 아끼고 거리를 두는 성향은 볼모 생활 때만 나타난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동궁일기》를 보면, 어린 소현세자는 성리학 교재를 반복 암기시키며 강압적으로 다그치는 스승들을 버거워했으며, 심한 스트레스를 받아 동공 대지진이 일어나거나 구토를 하는 정서 불안을 보이기도 했다.[19] 물론 소현세자는 스승들의 가르침을 어떻게든 따르며 훌륭한 국본(왕세자)으로 거듭나려고 애쓰는 모습을 보인다. 하지만 이것이 소현세자가 강압적인 스승들 앞에서 자신의 모든 생각을 편하게 털어놓았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20]

심양일기》에서 그나마 엿볼 수 있는, 사관들 앞에서 밝힌 소현세자의 심리는, 여인도 사냥터에 말 타고 참여하는 청나라의 문화를 보고 느낀 쇼크, 그리고 몰락해가는 명나라에 대한 애환, 조선인 포로들의 애환 등이다. 최근에 나온 소현세자에 대한 창작물엔 이런 점들이 적극 반영된다.

5.3. 천주교에 대한 관심

5.3.1. 아담 샬과 황비묵의 회고

소현세자가 가톨릭을 접했다는 기록은 예수회 소속 아담 샬 신부의 회고와, 북경 남당의 신부였던 황비묵의 회고에서 나온다. 두 사람은 아담샬이 소현세자와 친교(親交)를 나누고 그가 천주교에 깊은 관심을 갖게 만들었다고 회고한다.

아담 샬 신부는 1619년 마카오에 상륙해 1623년 북경에 입성하였다. 1627~1630년까지 서안에 파견되었던 것을 제외하면 1666년 사망할 때까지 계속 북경에만 머물렀다.[21] 그는 1622년부터 1658년까지 자신과 중국 가톨릭에 관련한 사건들을 적은 라틴어 회고록 〈Historica Relatio〉를 남겼다.

북경 남당의 신부였던 황비묵의 회고에 따르면, 1644년(인조 22년) 9월, 소현세자아담 샬이 처음 만났다. 소현세자는 만나는 사람과 갈 수 있는 사람을 제약받아, 실권자 도르곤의 허가를 받아야 했을 가능성이 높은 인질의 신분임에도, 아담 샬 신부와 꽤 여러번 교류했으며, 주로 역법을 배운다는 핑계로 학자들을 대동하고 만났던 것으로 보인다. 소현세자가 직접 성당을 찾기도 하고, 때론 아담 샬이 세자가 거처하는 곳(심양관)을 자주 방문해 꽤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세자는 아담 샬을 통해 조선인으로는 처음으로 지동설이나 지구 구형론을 접하게 되고 수하의 사람을 보내 아담 샬로부터 서양 천문학과 역법을 전수받도록 하였다.

또, 황비묵의 목격담에 따르면, 소현세자와 아담 샬, 두 사람 사이에는 깊이 뜻을 같이 하는 바가 있었다고 한다. 아담 샬천주교가 바른 길임을 연달아 이야기하고, 세자도 자못 듣기를 좋아하여 자세히 묻곤 하였다 한다. 그러다 세자가 조선으로 돌아가게 되자, 아담 샬이 선물로서 그가 지은 천문, 산학, 성교정도 등의 여러 서책과 지구본, 그리고 천주상을 보냈다. 세자는 이를 받고 손수 한문으로 편지를 써서 감사의 뜻을 밝혔다. 그 편지 내용에 감동한 아담 샬은 그것을 라틴어로 직접 번역해 회고록에 첨부했다.

아담 샬의 기록속 소현세자 서신을 맨 처음 발견한 것은 일본인 학자 야마구치 마사유키다. 다만 야마구치는 소현세자의 서신 중 일부만 번역했으며, 이후 아담샬의 회고록의 라틴어 원문과, 소현세자의 서신 번역본은 한국 학자들에 의해 심도있게 연구되어 왔다.

아담 샬의 회고로 간접 기록된, 소현세자가 개인적으로 보낸 서신은, 소현세자의 내면이 솔직하게 드러난 매우 희귀한 사료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소현세자에 관한 기록들이 아무리 방대하다 한들, 그것들은, 국본으로서의 모습을, 성리학적 필터를 거쳐 담은 공문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현세자는 아담샬의 서신에서 이런 말을 한다.
조선에도 이런 종류의 책들(덕성을 함양하라 하는 책들)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책들은 거짓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것들이 수백년에 걸쳐 진실과는 아주 크게 동떨어져 있는 서적이라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중략)...조선 사람들이 지켜왔던 잘못된 가르침의 숭배 전통으로 말미암아, 천주의 위대함이 공격 당하지나 않을까 두렵습니다...(후략)[22]
동궁일기심양일기에서 성리학 사관들이 본 소현세자의 모습이 비록 분량면에서는 압도하나 소현세자의 전부가 아니라고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이유가 아담 샬의 서신 때문이다.

소현세자는 원자로 책봉된 이래, 평생 시강원 스승들에게 둘러싸여 성리학적 덕성 교육을 받았고, 그것에 따라 훌륭한 국본의 모습을 보이려 노력해왔다. 하지만 북경에서 아담 샬과 불과 몇 번의 교류 끝에, 소현세자는 자신이 평생 받았던 가르침이 '거짓으로 가득찬 것'이었다고 단언한다. 이는 달리 말하자면, 그간 소현세자가, 동궁일기심양일기의 화자들이 강조하는 성리학에 줄곧 회의를 느끼고, 심리적으로 경계하거나, 최소한 방황했음을 명백히 보여준다. 이는 소현세자가 기회만 닿으면 학문 경연을 중단해 버렸던 모습과도 모순되지 않는다.

또 한 가지, 만약 소현세자가 이런 서신을 양이에게 보냈다는 사실이 조선에 있는 누군가에게 들어가면, 소현세자는 조선의 뿌리이자 근간인 성리학에 도전하고자 하는 마인드를 지닌 국본으로, 숙청 대상이 되고도 남았을 수준이다. 그만큼 아담 샬의 서신에서 읽히는 소현세자의 태도는 급진적이다.

5.3.2. 아담 샬 기록의 신빙성

소현세자의 태도가 너무 급진적인 데다, 기존의 동궁일기, 심양일기에서는 암시조차 안 되던 속내이기 때문에, 오히려 아담 샬의 과장적 기록이 아닌가 의심하는 시각도 있다.

실제로 아담 샬의 회고록엔 트집이 잡힐 만한 부정확한 부분들이 있다. 일단 아담 샬은 선교사였다. 따라서 자신이 했던 포교의 업적을 과장하면 과장했지, 축소하지는 않는다.[23]

무엇보다 아담 샬은 용어적 오류들을 별 생각 없이 회고록에 남겨놓았다. 예컨대 아담 샬은 소현세자를 조선으로 착각했다. 만주인들이 조선 왕국을 점령하고 요동에 포로로 잡아온 '조선 왕'이 역법을 익히려고 조선 역관들을 대동해 찾아왔고 아담 샬 신부 자신은 이를 성심성의껏 도와주며 조선 왕과 우정을 쌓았다는 것이다. 또 분명 라틴어에도 '인질'이라는 용어가 분명 있음에도, 그는 대신 '포로'라는 용어를 쓴다. 또, 소현세자의 서신엔 구원자 하느님(Salvatoris Dei) 상이라는 표현이 나온다.[24] 마테오 리치 신부 이후 중국에 간 선교사들은 'Deus'를 '천주(天主)'라는 용어로 번역해 '신명(神名)'으로 사용했다. 그리스도교를 처음 접하는 세자가 이런 용어를 썼을는지는 의문이다. 또 위에서는 '조선'이라고 첨삭했지만, 아담 샬은 소현세자의 한문 서신에서 단순히 '우리나라'정도로 썼음직한 부분을 '나의 왕국(=즉 나는 왕)'이라고 라틴어로 번역해 놓았다.

무엇보다 아담 샬의 기록이 트집 잡히는 부분은 순치제 관련 내용이 과장된 것이다. 인터넷에 떠도는 말에 따르면, 그리스도교에 대해 일말의 사전 지식도 없던 순치제예수 생애화집을 보고 "우리의 성현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위대한 분이라며 경배를 드리고 황후가 예수상 앞에 무릎을 꿇었다"는 언급이 있다고 한다. 다만 그럼에도 순치제의 반응과 소현세자의 반응은 분명 차이가 있다.

일단 순치제아담 샬을 신하로서 총애했다. 아담 샬의 서양 역법(시헌력)이 기존 달력보다 정확하다는 것이 증명된 후부터이다. 순치제는 아담샬의 성당 건축을 허가했으며, 성당의 이름까지 하사하고, 심지어 성당 건축은 물론 미사에도 많은 비용을 보태주었다.

게다가 순치제가 성화를 보자마자 천주교에 대해 하나도 모르면서도 경배를 드렸다는 위의 주장과 달리, 순치제는 성당이 지어지기 이전부터 도교와 불교와 비교해 가며 천주교 교리를 아담 샬로부터 조금씩 공부해 왔고, 성당이 지어진 후, 성당에 있는 예수의 생애화를 보며 훌륭한 성현이라며 칭찬을 늘어놓았다.[25]

하지만 이런 순치제도, 표현은 과장되었지만, 결국 천주교를 종교로 받아들이진 않음이 아담 샬의 회고에서 드러난다. 순치제에게 있어 천주교는 유교, 도교, 불교와 마찬가지로 일종의 수신과 수양지침이었다. 자신이 후원해 돈들여 지어놓은 성당의 성화를 보고 찬탄하는 순치제의 태도는 웅장한 사찰을 건립해 놓고 칭찬하는 군주의 태도과 크게 다르지 않으며, 또한 순치제에게 있어 아담 샬의 본질은, 전도사이기보단, 서양 철학과 학문을 전해준 기특한 신하였다. 때문에, 중국에서 서양 학문과 서양 종교를 분리하여 받아들이는 일관된 태도의 원조가 순치제였다는 시각도 있다.

반면 아담 샬이 회고한 소현세자는 아담 샬을 신하가 아닌 친구 혹은 형제에 가깝게 느꼈으며, 천주교를 기존 철학을 대체할 종교, 혹은 더 나은 사상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아담 샬 회고 속 순치제의 반응은 귀하고 충성스러운 신하를 황제가 공개적으로 칭찬할 때 쓰는 미사여구에 가까웠던 반면, 소현세자가 아담 샬에게 보낸 서신은 마치 내밀한 친구에게 쓴 것처럼 담백하고 허심탄회하다.

이런 합리적인 온도차 때문에라도 아담샬의 회고는 신빙성이 있다는 것이 긍정론자들의 주장이다. 군주들이 치하하기로 작정한 신하에게 평소 어떤 오글송을 늘어놓는지를 감안해 볼 때[26], 아담 샬은 심지어 순치제 관련 내용조차 그리 과장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 또 조선왕조실록이나 동궁일기 등에서 드러나는 소현세자의 인성 총평을 고려해 볼 때, 소현세자의 서신 역시 과장되었다고 보기 어렵다. 천주를 그리스도로, 조선을 나의 왕국으로, 성상을 구원자 하느님의 상으로 하는 등, 한문을 라틴어로 옮기는 과정에서, 아담 샬 본인에게 익숙한 용어로 되돌리거나, 오해한 부분의 용어적 첨삭을 제외하곤 거의 그대로 인용했단 합리적 추론이 가능하다.

아담샬 회고의 신빙성에 대해 아무리 평가절하한다 한들, 그것을 완전한 허구로 간주해야 할 근거가 없는 한, 소현세자가 조선 최초로 그리스도교를, 그것도 성리학 등 기존 가르침을 추후 대체할 그 무언가로 받아들이려 시도한 '왕위 후계자'였단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27]

아쉬운 것은 조선측 기록에 이 아담 샬 신부의 회고록과 크로스체크가 될 부분이 없다는 점이다. 북경으로 떠나기 2일 전인 8월 18일이 심양일기의 마지막 기록이다. 소현세자는 8월 20일 심양을 출발해 1600리 떨어진 북경으로 향했으며 9월 19일 북경에 도착했다. 소현세자는 11월 11일 귀국 허가를 받아 11월 26일 조선으로 떠났으니 북경에 머무른 기간은 70일 남짓인데, 천주교를 접하고 아담 샬 신부와 교류할 수 있었던 시간이 이 기간이기도 하다. 이는 황비묵의 회고와도 일치한다.

그런데, 세자가 전쟁터에서 막사에 포탄 맞는 장면까지 따라다니며 기록한 기록덕후인 사관들은 심양일기는 남겼으면서 하필이면 <북경일기>는 남기지 않았다. 단순히 기록되지 않았거나, 후대에 우연히, 혹은 의도적으로 훼손되어 소실되었을 가능성을 추정해 볼 뿐이다.

5.3.3. 선교사 및 성물 관련

아담 샬의 회고에 등장한 소현세자의 첫 서신에 따르면, 소현세자는 역법과 기타 서학서는 물론 성상과 천주교 서적들을 선물받았다. 다만 첫 번째 서신을 보면 소현세자는 성상이 아직 천주교를 모르는 대다수 조선 사람들에게 잘못 알려져 멸시의 대상, 혹은 잘못된 숭배의 대상이 될까 두려워 실수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일단은 돌려주는 게 안전하다고 판단했고 처음엔 실제로 돌려보냈다.

다만 소현세자를 연구한 일본인 학자 야마구치 마사유키(山口正之)는 그에 대해 연구를 충분히 하진 않아, 소현세자가 성상을 그냥 돌려보냈다는 첫번째 서신에서 결론을 내려버리고, 아담 샬이 성상을 지참하기가 불가능하다면 세례성사를 받은 환관을 데려가 주십사 청원했다고 설명했다. 그래서, 소현세자가 이를 허락했을 뿐 아니라 오히려 유럽 선교사를 파견해 줄 것을 요청해 명나라 출신 환관 이방조(李邦詔), 장삼외(張三畏), 유중림(劉仲林), 곡풍등(谷豊登), 두문방(竇文芳)과 궁녀들이 인조 23년(1645년)에 2월 18일 세자를 따라서 한양에 들어왔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아담 샬 회고록을 완역해보면 아담 샬 신부는 성상을 돌려보낸 것을 겸양으로 생각하고, 조선 왕의 환관세례성사를 받은 이에게 교육을 시켜 성상을 다시 돌려보내자 결국 소현세자가 받았다고 한다. 또, 아담 샬 신부의 회고를 완역해보면 선교사를 먼저 청한 쪽은 아담 샬이 아닌 소현세자인데 정 안 되면 환관을 선교사로 활용할 생각을 했다. 아담 샬 신부는 "백방으로 손을 썼지만 윗선의 허락을 받지 못해 하지 못했다" 하였다. 일단 소현세자의 내관 중 갓 세례를 받아 천주교 신자가 된 사람이 있는 것은 아담 샬의 회고에서 확인되지만, 입문자가 아닌 선교사를 데려오지는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만약 그런 성과를 내었다면 아담 샬이 자신의 회고록에 적지 않았을 리가 없다.

야마구치 마사유키는 선교사를 대행할 명나라 출신 천주교도 환관과 궁녀들이 소현세자와 함께 귀국했다 주장했는데, 이는 추측의 영역에 머문다. 일단 명나라에 봉직하던 환관들 중에 천주교 신자가 있었던 건 맞다. 소현세자가 귀국할 때 중국인 환관을 데려온 것도 맞는다.

하지만 명나라 조정에 봉사하던 궁인들은 엄연히 청나라의 포로였으며 인질 신분이었던 세자가 임의로 특정인을 요구해 대동하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그렇다고 아담 샬 신부가 임의로 명나라 환관을 조선으로 보내기 역시 어려웠다. 아담 샬 신부는 소현세자가 귀국하기 하루 전에야 청나라 조정에서 관직을 받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만약 명나라 환관을 선교사로서 조선에 투입하는 데 만약 성공했다면, 조선 선교에 관심이 있던[28] 아담 샬이 그것을 회고록에 언급 안 했을 리가 없다. 아담 샬 신부의 회고록뿐 아니라 동료 선교사들의 서한이나 보고서에도 전혀 확인되지 않고, <인조실록> 같은 조선 측 기록에도 이들이 천주교 신자인지를 확인할 만한 내용이 없다.

즉, 소현세자가 데려온 중국인 환관과 궁녀는, 설령 우연히 천주교 신자가 끼어있었다 한들, 어디까지나 청나라 조정이 임의로 뽑아 보낸 이들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들은 1645년(인조 23년) 7월 22일 청나라 사신을 따라 본국으로 송환되었다.

성물의 경우, 아담 샬 신부가 전해주었다는 성상이나 서학서는 현재 실물이 확인되지 않고, 아담 샬 신부의 회고록에서만 구체적으로 언급되며, 조선 측 기록에선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조선왕조실록>에 있는, 소현세자가 북경에서 가져온 물품[29]들을 보고 사람들이 소현세자에게 실망했다는 언급이, 크로스체크로 간주할 가능성이 있는 유일한 기록이다.
아담 샬 신부가 남긴 교류 기록에서 종교 관련 부분들을 빼놓고 보면 소현세자가 가장 관심을 쏟은 문물은 역법인 듯하다. 아담샬을 만날 핑계로 소현세자가 종종 역법을 배울 신하들을 대동했다 회고되기 때문에 이는 앞뒤가 맞는 사실이다.

5.3.4. 무당 기록 관련

소현세자가 죽은 뒤에 어떤 요망스러운 무당이 말하기를 “세자가 북경에서 올 때에 금수(錦繡, 수놓은 비단)를 많이 구입해 왔는데, 이 물건이 빌미가 되어 흉화를 당하게 된 것이니, 이것들을 빨리 물에 띄워버리거나 불에 태워서 신(神)에게 사죄하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흉화가 또 그치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애란이 이 말을 듣고 강빈에게 고하자, 강빈은 그 말을 믿고 그 금수(錦繡)를 모조리 찾아내어 애란에게 주면서 무당의 말과 같이 하도록 하였다. <인조실록>
이 실록 기록을 근거로 소현세자가 천주교인이었다면 강빈이 무당의 말을 따를 이유가 없었다고 해석하는 의견이 있으나 저 실록 기록만 가지고 소현세자가 천주교와 무관했다고 단정하기엔 설득력이 떨어진다. 일단 이것은 소현세자가 죽고 정치적으로 숙청당하던 과정에 있던 강빈이 불안한 상황에서 한 행동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실록 자체가 어떻게든 강빈을 사치하고 무당을 맹신하는 어리석은 여인으로 몰아가기 위한 악의적인 내용일 수 있는데, 실록 전체를 보면 애란이 인조에게 국문받은 이유가 좀 애매하다. 무당의 말을 곧이곧대로 강빈에게 전달해서인지, 아니면 무당과 손잡고 강빈이 내다버린 금수(錦繡)에 저주를 걸어 소용 조씨를 아프게 했다는 이유로 국문받은 건지 알 수가 없다.

그리고 저 일로 피해를 본 건, 본래 소용 조씨의 사람임에도 강빈을 더 좋아하게 된 바람에 소용 조씨의 눈밖에 난 애란 하나였다. 게다가 소현세자와 강빈은 천주교 교리를 제대로 배우거나 영세를 받은 것도 아닌, 이제 막 신앙에 대해 겉핥기로 배운 사람들이었다. 강빈은 당시 왕실 여인들과 마찬가지로 청나라에 볼모로 가기 전부터 습관적으로 민간 신앙에 잘 의존했으며 실제로 강빈의 언행을 보면 평소에도 소소한 미신을 잘 믿었다. 또다른 가능성은 여기서 말하는 금수가 실제로는 비단 따위가 아니라 성화 등의 천주교 성물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천주교 성물을 갖고 있는 것이 또다른 정치적 공격의 빌미가 될 까봐 없애버린 것을 소용 조씨 측에서 어떻게 알아내어 오랑캐 사치품이라고 인조에게 모함했을 가능성도 고려해봐야 한다.

5.4. 사업 능력

소현세자와 강빈의 황무지 개척 사업은, 조선의 전통 농업 경영 방식이 청나라에서 대박을 낸 케이스이다. 청나라1641년(인조 19년) 12월부터, 심양관에 별도의 정착 비용을 지급하는 대신 토지를 주어, 심양관 식구들이 농사로 자급자족하게 했다. 사실 많은 대신들이 여기서 농사를 지으면 두 번 다시 고향에 못 돌아가리라 생각해 반대했지만, 강빈은 황무지 경영에 찬성하고 적극 주도했다.[30]

사실 강빈의 황무지 경영은 사대부 여인들의 경제관리능력 중 하나였다. 당대의 사대부 안주인들은 집안 살림은 물론 인력 고용과 품삯 지불 등 자산 운용과 경영에도 참여했다. 따라서 황무지 경영 능력을 만약 강빈만이 가지고 있었던 탁월한 능력이라고까지 해석한다면 분명 과장이다. 하지만 강빈의 능력을 심하게 과대평가하는 시각도, 애초에 그런 암담한 상황에서 황무지 개척을 시작한 차기 국모의 적절한 결단력을 좋게 보고, 실제로 부가 축적되어간 속도를 보고 놀라는 것이지, 무슨 조선 시대 여자가 농사 스킬이 있느냐고 놀랄 정도로 무지한 게 아니다.[31]

게다가 생산을 관리하는 게 주로 사내들의 영역에 해당하고, 안주인은 곳간 살림 같은 소비의 영역을 관리하는 것으로 나누어지는 게 전형적인 사대부의 패턴이었다면, 강빈은 직접 사내의 영역인 생산 영역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남자의 영역이라 할 수 있는 사관 보고서에 손을 대는 바람에, 나중에 인조에게 꼬투리를 잡히게 된다. 또 하나의 특징은 이렇게 황무지를 경영하는 과정에서 조선인 포로들을 구출해 썼다는 점이다. 순전히 백성들을 구출하겠다는 마음으로 시작된 이 활동 역시, 나중에 인조에게 사병이라도 기르는 거 아니냔 의심과 미움의 구실이 된다.

앞의 두 사료에 더해 《조선왕조실록》 기록까지 합치면, 소현세자는 볼모 시절 후기, 유목민처럼 말을 좋아하고 무인들과 노비들과 어울리며 사관들에게 까이는, 허약체질 환자하곤 거리가 멀어보이는 생활을 영위중이다. 게다가 심양관 생활이 후기로 갈수록, 현대의 대박난 사업가 마냥 생활은 여유로워지며, 소현세자와 강빈 사이에서는 금슬이 좋던지 아이들이 더 자주, 많이 태어나게 되었다.

5.5. 인조와의 관계

사실 조선왕조에서 왕-세자간의 패륜적 갈등, 혹은 숙청에 준하는 현대인들의 흥미를 끌거나 감정 이입을 유발하는 사건들은 비일비재했다. 후계 문제를 둘러싼 선조광해군간의 정치적 대립이 그러했고, 영조가 학대 끝에 정신병자 살인마가 된 사도세자를 숙청한 일이 그와 같다. 하지만 최근 나름의 다채로운 해석이 이루어지거나 사건의 진상이 조금씩 알려지고 있는 광해군이나 사도세자의 케이스와 달리 소현세자의 케이스는 인조의 일방적 잔혹함만으로 알려지는 경향이 있는데, 인조는 역사적인 사례를 돌이켜보아도, 개인적인 정권 유지를 위해서도 소현세자에게 심대한 위협을 느낄 수밖에 없는 것이 전후 상황이었다.

고려원 간섭기때 원나라의 영향으로 왕과 세자가 서로 파벌을 이루어 대립하던 경우나, 반원정책을 펴는 공민왕을 견제하기 위해 원나라에서 덕흥군을 왕으로 앉히려 한 것과 같이 중국이 왕위를 주장할 권리가 있는 왕족을 내세워 정권을 갈아치우려 한 전례가 있었다. 비 한족 계열 중원 제국에게 국권을 침해당한 조선의 군주 입장에서는 중국의 동향에 정국이 요동치거나 최악의 경우 중국의 황제가 군주를 다른 왕족으로 대신하려 들던 공포스러운 과거사를 상고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대는 장자(長子) 및 재일자(再一子)를 인질로 삼고, 제대신(諸大臣)은 아들이 있으면 아들을, 아들이 없으면 동생을 인질로 삼으라. 만일 그대에게 뜻하지 않은 일이 발생하면 짐이 인질로 삼은 아들을 세워 왕위를 계승하게 할 것이다.
《조선왕조실록》 《인조실록》 인조 15년(1637) 1월 28일 기사
이에 앞서 용골대(龍骨大)가 왔을 적에 석철을 데려다가 기르겠다고 말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모두들 그가 반드시 보전될 수 없을 것이라고 여겼는데, 이때 이르러 졸한 것이다.
인조 26년(1648) 9월 18일 기사, 소현세자의 아들 이석철의 졸기
그 과정에서 보여준 인조의 상상하기 힘든 수준의 패륜적 잔인성이 문제였다. 이것은 충분히 유교를 국시로 하는 국가의 군주로서 심각한 결격사유로 지적받을 수 있는 부분이었고, 사관들까지도 곳곳에서 증거도 없이 아들의 일가를 몰살하려 드는 인조를 힐난했다. 예컨대 인조가 며느리를 두고 "개새끼 같은 것들을 임금 자식이라고 하니 이게 모욕이 아니고 무엇인가" 하며 욕을 했다는 기록이 실록에 있다.[32] 또 사관은 손자인 이석철의 졸기에서도 "독기가 많은 제주에 어린이를 유배 보내 놓고 불쌍하다며 아비 곁에 묻어주라고 한들 무슨 소용인가" 하며 논평했다. 소현세자와 강빈 사건을 두고 사관이 자신에게 가능한 최대한의 수위로 제 아들 일가에게 차마 내뱉기 어려운 온갖 욕설을 퍼부으며 죽이려 드는 인조의 잔혹함을 비난했다고 볼 수 있다. 사관은 강빈이 사사된 날에도 "비망기에는 추측이라고 하교하였는데 제문(祭文)과 교서(敎書)에는 다 곧바로 단정하여 죄안으로 삼으니, 보는 이가 해괴하게 여겼다."라면서 역시 별 근거 없이 역당으로 몰려 죽은 강빈의 사건을 비판적으로 서술했다.

조선의 지배층들은 어디까지나 마키아벨리즘적 왕권 확립보다는 절차적 법질서와 도덕적 흠결 여부를 중시하기에 소현세자의 죽음에 얽힌 수상한 전후 정황과 그 과정에서의 지나친 잔혹성, 강빈를 죽음으로 몰아간 것을 부당한 사법살인으로 여겼다. 즉 인조가 청나라의 입김을 받은 소현세자 일가를 처리하려고 한 것은 어쩔 수 없다고 쳐도, 그럼 그 과정에서 최소한의 합리성이라도 갖추어야 했는데 인조는 이를 무시했다. 명분이야 민회빈 강씨가 자신을 독살하고 저주하려 했다는 것이지만, 조선 왕조의 기록을 보면 그 주장이 무색하게 만드는 구절이 가득하다.

가령 독살하려고 했다는 대목도 당시 강빈이 감금 중이었으므로 불가능하다. 그래서 이후 김홍욱이 강빈의 사면을 청하는 글에서도 이 사건이 강빈의 잘못이라 했는데 당시 강빈의 사정상 불가능했다고 말했다. 저주 문제도 이는 강빈 사후 1년 뒤의 일로서 강빈을 모시던 이들 중 배신한 신생이 주도한 일인다. 정말로 강빈이 인조를 저주했다면 형벌을 따질 필요가 없는 대역죄인이므로 사후가 아니라 생전에 드러내서 강빈 사사의 명분으로 써먹으면 그만이다. 강빈이 죽은 후에야, 그것도 1년씩이나 지나서야 입을 열었다니 앞뒤가 맞지 않는다. 사정이 이러니 목숨을 걸고 구명이나 복권, 재조사를 호소한 관료층이 나타나고, 점차 소현세자 일가 동정론이나 구명론이 형성되었다.

또한 양란 이후 급격히 교조화된 조선의 성리학적 사회질서에 답답함을 느끼거나 조선의 멸망에 유교가 책임이 있다고 보는 현대의 대중들의 상상력을 서양 문물과 접촉하고 다양한 경험을 했던 소현세자가 꾸준히 자극하는 바도 동정론에 기여한다.[33] 고귀한 혈통에, 가혹한 상황에서 최선을 다해 성공을 이루어냈고, 어떤 도덕적 결함을 보이거나 실책을 저지르지 않았으며 자신에게 주어진 조건에서 분투했음에도 어디까지나 자신들과 관계 없는 주변의 정황 때문에 참혹한 운명을 맞이한 사람들을 대중이 영웅시하거나 동정함은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숙종 대에 손처경이라는 사이비 교주가 소현세자의 유복자라고 사칭하다가 덜미를 잡혀 참수형을 당했다.# 사실 손처경도 뜬금없는 짓을 벌인 건 아니고 제자인 묘향으로부터 소현세자의 유복자 소문을 듣고 이에 편승한 것이다. 이 점을 보면 민간에서 소현세자에 대한 동정론이 강했다고 볼 수 있다.

5.6. 야사에서의 이미지

흥미롭게도, 민담이나 야사에서는 소현세자에 대해 나쁜 이미지가 많다. 또 효종의 사위 정재륜이 지은 《공사견문록》과 조선 후기 야담을 집대성한 이긍익의 《연려실기술》은 소현세자에 대한 온갖 부정적인 야사들로 가득하다.

세조 때부터 동정론이 돌았던 단종이나 무속에서 뒤주대왕으로 받들어진 사도세자와 달리 소현세자는 민간의 동정을 샀다 볼 만한 흔적이 없으며, 아둔하거나 난폭한 이미지로 묘사되어 거의 실제 역사상의 양녕대군을 방불케 한다. 예를 들어 본다.
1. 인조가 세자빈을 간택하려고 하는데 아름답고 덕이 높은 처자가 일부러 미친 척을 해서 소현세자를 피했다.
2. 심양에선 글공부를 게을리하고 기이한 물건 모으기에만 열심이었다.
3. 심양관을 개수할 때 참여한 기술자 한 명이 세자에게 아첨하자 흡족해하며 관직을 제수하려 해 이시백이 저지했다.
4. 시종하는 위사를 이유 없이 마구 채찍질했다.
이중 1번은 강빈의 가례에 관련된 기술에도 나와 있듯, 야사가 아니고 진실일지도 모른다. 다만 이는 소현세자 본인의 매력이나 인성 문제이기보단, 당시 '인조의 큰아들'이 혼인 상대로서 인기가 없었다는 점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 않아도 오늘날 왕자 공주와 결혼한다는 이미지와 달리, 조선시대 왕실 간택시 단자를 기꺼이 내고자 하는 사대부는 별로 없었다. 왕실 인척은 도리어 출세에 제약을 받는 경우가 많고, 까딱하면 강빈 집안이 그러했듯, 본인 처신과 무관하게 친정 집안이 파멸하는 경우가 흔했기 때문이다. 하물며 소현세자가 가례를 올릴 무렵, 인조는 여러모로 불안정해 보이는 이었다. 본인이 직접 일으킨 반정으로 집권하며 창덕궁 태워먹었지, 이듬해 반정 공신 이괄에게 뒤통수 맞고 창경궁까지 태워먹지, 그 다음다음 해에는 오랑캐가 쳐들어와 본인은 강화도로, 세자는 전주로 피난을 갔다. 이래저래 정통성도 체통도 안정성도 떨어져 보이는 불안한 왕실에 기꺼이 제 딸을 주고자 하는 사대부는 드물었을 것이다.

2번은 흥미롭게도 대중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계몽군주의 씨앗을 가진 소현세자 이미지와도 겹쳐 보인다. 악의적으로 보면 저 모습은 게으르고 물욕이 있는 모습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소현세자가 줄곧 유교 가르침에 회의를 느끼다가 경연을 소홀히 하며 신문물, 혹은 실용적인 부 축적에 관심을 두는 모습이, 못마땅해 하던 이들 눈에 저렇게 보였을 수도 있다.[34]

3번 역시 대중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소현세자 이미지와 겹쳐보인다. 기술자가 아부를 해서 관직을 제수한 걸까? 아니면 기술자를 장인이라고 딱히 천시하지 않아서 관직을 제수하고 싶어한 걸까?[35]

4번은 있을 수도 없을 수도 있는 일인데, 최소한 《심양일기》나 《조선왕조실록》에 있는 소현세자의 모습- 자제력이 뛰어났다거나, 외교 업무를 현명하게 수행한다거나, 온화한 성품으로 가마꾼들의 노고까지 세심하게 신경썼다거나, 남한산성에서 패색이 짙어지자 스스로 인질이 되겠다 자청했다거나, 봉림대군이 효종이 된 후 제 형을 강빈과 세트로 묶어 겁나 까면서도 '형이 성품은 착했지만'이라고 말하는 이미지와는 정면으로 배치된다.

아무튼, 민담이나 야사에서 드러나는 소현세자의 나쁜 이미지는, 청나라 혐오가 고조된 사회에서, 대청 외교를 성공적으로 이룬 소현세자의 행보에 대한 당대인들의 몰이해와 반감에 효종·현종·숙종으로 내려오는 삼종혈맥의 왕실 라인에서 문제가 된 정통성까지 더해졌기 때문에 견제를 샀기 때문으로 해석 가능하다. 실제로 《공사견문록》을 지은 사람은 다름아닌 효종의 사위였다. 그는 소현세자가 죽고 그 아들들이 죄인 자식이 된 덕에, 자신은 공주 아내를 얻어 창경궁에 별장까지 얻어 잘 살 수 있었다. 따라서 그로선 소현세자의 평판을 망칠, 즉 왕이 될 깜이 못되었다고 이미지가 망가지길 원하는 충분한 동기가 있었다.

6. 대중매체

앞서 말한 이유들 때문에 소현세자에 대한 여론이 동정적, 호의적이다 보니 현대의 창작물에서는 꾸준히 좋은 대접을 받는다. 사극에서 등장할 때는 아버지 인조가 악역[36]으로 자주 나오는 데 반해 주로 주인공의 조력자 역을 많이 한다. 비중있게 나오지는 않아도 선역(善役)으로 잘 나오는 편. 특히 현대적 관점에서 볼때 시대의 흐름을 읽었음에도 비극적인 최후를 맞은 탓에 역사를 기반으로 한 소설의 주인공으로 많이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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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례] 실제 혈통 기준 · 세로선(│): 부자 관계 · 가로선(─): 형제 관계 }}}}}}}}}}}}



[1] ⿰氵⿱山王. 정확한 한자는 유니코드에는 한중일 통합 한자 C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U+2AD81로 추가 되었기 때문에 제대로 표시되지 않을 수 있으며 아직 네이버 사전에도 없다. 인터넷에는 주로 동자인 汪이나 통합한자 B에 있는 이체자인 𣵭으로 표기되어 있는 경우가 많으나, 선원속보에 등재되어 있는 한자는 ⿰氵⿱山王가 맞다. 특히 이체자인 𣵭가 추가되기 전에는 백과사전 등에서 비슷하게 생긴 엉뚱한 글자를 소현세자의 이름자로 기재하는 경우도 많았던지라(炡 등) 진짜 소현세자의 이름에 쓰인 한자는 의외로 잘 알려지지 않았다.[2] 파일:선원속보-소현세자.png[3] 사후 양자는 성종의 13남 영산군(寧山君)의 7대손인 이의저로 지명되었다. 덧붙여서 이의저 뿐만 아니라 아들들에게도 군(君) 작위가 추증되었다. 참고로 영산군파보를 보면, 이의저 이후 현손자부터 항렬자 통일령으로 '응'(應)자부터 쓰기 시작한 내용이 나온다.[4] 효종의 딸 숙정공주의 부마 간택에 든 최종 후보 3명 중 한 명이었다.[5] 각각 1628년(인조 6년)과 1631년(인조 8년) 출생했으며, 그때마다 산실청을 세운 기록이 있다. 사실 1628년(인조 6년)의 산실청은 너무 기록이 간단해, 누구를 위해 세워졌는지 명확하지 않았는데, 인열왕후강빈, 둘 중 하나로밖에 볼 수 없는 상황에서, 인열왕후는 아닌 것으로 역사가들이 분석했다. 게다가 1631년(인조 8년)과 1640년(인조 17년), 각각 한 번씩 왕실에서 군주의 사망 기록이 있어, 원손이 태어나기 이전 강빈이 최소한 딸 둘을 낳았음이 밝혀졌다. 그 상황에서 강빈으로 특정된 산실청이 1631년(인조 8년) 것 밖에 없어서 또 한 명의 군주는 1628년(인조 6년)에 탄생했다는 결론이 가능했다. 아무튼 두 번째 딸은 태어난 지 3개월 만에 사망했고, 첫 번째 딸은 1640년 12세에 사망했다. 첫 딸은 소현세자와 강빈이 볼모로 끌려갈 때 따라가지 않고 왕궁에서 컸으며, 인조가 이 어린 손녀를 귀여워했던 거 같다. 군주가 죽은 후 어의들이 상심했던 게 많이 진정되었느냐고 인조에게 묻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으며, 약 20일 후 부고가 심양에 도착했다.[6] 요절했지만 두 아들을 두었다. 소현세자의 혈통은 자식 부자인 경안군의 장남으로부터 이어지게 된다.[7] 김지영, 2011, 조선시대 왕실 여성의 출산력 : 시기별 변화추이와 사회문화적 함의, 한국학 Vol.34[8] 숙종은 현종과 명성왕후가 이 엄격한 종법 질서를 무시한 덕분에 효종 3년상 기간 동안 잉태되어 태어난 귀한 아들이었다. 만약 현종 부부가 충실하게 따랐으면 아예 이때 맥이 끊어졌을 수도 있는 것이다.[9] 아이신기오로 도르곤이 자신의 대복진으로 삼을 여인을 조선 왕실과 종친에서 보내달라고 요구했다.[10] 정비 인선왕후에게서 본 숙안공주, 숙명공주, 숙휘공주, 숙정공주, 숙경공주. 또한 후궁 안빈 이씨에게서 본 유일한 서자녀인 숙녕옹주도 적녀들보다 못했을 뿐 나름대로 신경써줬다.[11] 왜 국왕인 효종의 딸뿐만 아니라 조카딸들까지 혼인 대상에 들어갔나 싶을 수도 있지만, 중국 같은 나라에서는 일반적으로 천자(황제)의 딸뿐만 아니라 후계자인 황태자의 딸도 공주로 취급했다. 일본에서 《황실전범》(皇室典範)이 생기기 전 덴노의 딸에게만 책봉한 내친왕(內親王) 작위를 동궁(東宮)의 딸에게도 책봉시킨 점에서 알 수 있다. 내친왕 작위는 구 《황실전범》이 생기면서 손녀에게까지도 책봉하는걸로 확대되었고, 이는 현 《황실전범》의 황손 부족 문제로 유지 중이다. 오히려 세자의 딸들을 공주나 옹주가 아닌 군주와 현주로 따로 구분한 조선의 경우가 더 특수한 편인지라 중국 입장에서는 세자의 딸들도 대상에 들어갔다.[42][12] 같은 섬이지만 조선시대 제주도의 취급이나 위치를 감안하면 강화가 더 낫다. 예시로 정조 때 그의 이복동생이었던 은언군의 유배지를 원래는 제주로 결정했다가 은근슬쩍 강화로 바꿔버리자 신하들이 반발을 했다. 이게 은언군에 대한 처벌이 지나쳐서 그렇다는게 아니라 원래는 역모에 연루된 은언군을 아예 죽여야 된다는 게 신하들 사이에서 정론이었다. 급기야 은언군을 사사하라는 정순왕후와 몇 안남은 형제이니 봐주자는 정조의 단식매치 끝에 신하들 쪽에서 한 수 접고 제주로의 유배를 주장했다가 왕이 독단적으로 강화로 바꾸니까 반발한 것이다. 즉, 강화가 제주보다 낫다.[13] 유독 형수인 강빈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긴 했지만, 효종의 약한 정통성을 생각하면 사실 이상한 점은 아니긴 하다.[14] 당장 생전에 폐위되어 노산군으로 강등된 단종도 사후에 갑자기 단종이라는 묘호를 받아 복권된 것이 아니라 한참이 지난 숙종 7년에 먼저 노산군에서 노산대군으로 승격된 뒤 숙종 24년에 다시 노산대군에서 단종이라는 정식 묘호와 능묘를 받아 최종적으로 복권된 것이다.[15] 물론 실록이 왜곡이나 편향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실록은 워낙 기록이 많아서 그런 왜곡이나 편향에 대한 단서 정도는 잡을 수 있다.심지어 다른 정파가 주류가 되어 쓴 실록 내용이 마음에 안들어 집필하는 수정실록조차 기존 실록의 내용을 훼손하지 않고 단지 정파적 균형을 위해 내용을 덧붙이는 걸 원칙으로 한다.[16] 세자의 공적 영역 언행들, 사관들 앞에서 한 말들을 발췌해 담고 있다. 사관이나 시강원 스승들이 자신들과 정서적으로 거리를 두고, 필요한 말만 했을 소현세자의 속내나 실체를 온전히 파악했다고 보긴 어려워 보인다.[17] 두 사람의 첫 딸은 결혼한지 1년도 안 되어서 태어났고, 셋째 딸은 1637년(인조 15년)생인데, 이 아이가 만들어질 때 소현세자는 모친 상중이었다. 막내 유복자 아들은 《동궁일기》와 《승정원일기》의 진료기록이 쏟아지던 소현세자가 죽기 직전, 건강이 잠시 회복되었을 때 만들어졌다.[18] 졸기를 보면 세자가 영리하고 총명했으나 도량이 넓지 못하다(器量不弘)는 표현이 있다. 그런데 조선시대에 도량이 넓다는 표현은 일반적으로 사내답게 호탕하고 풍류를 아는, 즉 술과 여자를 즐기는 외향적인 인물에게 사용된다. 23년 나온 MBC 드라마 <연인>이 이'도량이 넓지 못하다'는 표현만을 부각시켜 소현세자를 화 잘내고 고압적이며 거만한, 미성숙한 인물로 묘사해, 가상의 주인공 이장현에게 모든 활약과 인도자 역할을 몰아준 거로 보이는데, 이는 실제 심양일기에 기록된 소현세자 모습과 좀 많이 다르다. 기록 속 소현세자는 처음부터 함께 끌려온 신하들의 건강이나 주량까지 세심하게 챙기는 한편, 무리한 요구를 하는 청인들 앞에서 일관되게 차분한 외교 용어를 구사한다. 예컨데 청나라에선 조선인 도망자들을 잡아바치라 거듭 요구하지만 일부러 하나도 잡지 않으면서 의뭉스런 핑계를 대며 못 잡는 척한다. 때문에 내성적이기는 하지만, 차분하고 현명한 모습이 일관되게 보인다.[19] 그렇다고 사도세자처럼 막 갔다는 이야긴 아니다.[20] 애초에 소현세자는 만 11세가 되어서야 아버지 능양군이 반정에 성공해 왕의 후계자로 대우받았고, 반정 이전까지는 정원군 의 가계가 광해군 정권의 집중 견제대상이라 후계자 수업은 고사하고 평범한 글공부조차도 책이나 안 잡힐까 걱정해야 할 처지였다. 그나마도 중간에 이괄의 난으로 인한 피난 생활까지 겹치면서 만 13세가 되어서야 공식 세자 책봉을 받고 본격적인 후계자 수업을 시작할 수 있었다. 또한 정묘호란으로 분조를 이끄는 등 만 16세가 될 때까지도 학업에 정진할 수 있는 환경이 전혀 아니었다. 원래 정상적으로 궁에서 태어난 왕의 적장자라면 글을 읽을 때가 되면 원자부(인조대 이후 강학청)가 설치되어 그 빡센 수업 일정을 몸에 배이게 했는데, 소현세자는 그 과정을 최소 7년이나 늦게 시작한 것이다. 이 정도면 저 강압적인 스승들 앞에서 엇나가지 않고 커리큘럼을 성실하게 따라온 것만 해도 다행이다. 대충 비슷한 연령대에서 후계자가 된 이방석에 대해 실록에 뭔 이야기들이 실렸는지만 봐도 차이가 크게 난다.[21] 1644년 아담 샬 신부의 행적을 좀더 살펴보자. 1644년 1월 반란군을 규합한 이자성(李自成)은 장안에서 황제로 즉위하고 국호를 순(順), 연호를 영창(永昌)으로 정했다. 3월 18일 이자성의 군대북경(베이징의 자금성)을 점령하고 노략질하였다. 그러나 이자성의 천하는 예친왕 도르곤이 이끄는 청나라군에 의해 40여 일만에 모두 끝이 났다. 오삼계의 협조로 산해관을 돌파한 청나라군은 5월 1일 청나라군이 북경에 입성해 중국 중원 대륙의 실질적인 지배자가 되었다. 청나라군은 자신들의 입주를 위해 북경의 중, 동, 서부 구역의 한족(漢族)들에게 사흘 이내에 북, 남부 지역으로 이주할 것을 명령하였다. 5월 11일 아담 샬 신부는 자신은 명나라 숭정제 2년부터 북경에 거주하는 유럽 선교사로서 성당과 이에 딸린 성구 및 3천 권 이상의 서적을 선교 목적으로 소유하고 있으며 그 밖에 대량의 인쇄용 판본과 천문 기구, 책력에 필요한 140여 권의 서적을 보유하고 있어서 사흘 이내의 이주는 불가능하다고 설명하고 따라서 북경 내에 거주하며 선교와 책력 제작을 계속하기를 청원하였다. 이에 2명의 관리들이 선교원에 와서 사실 여부를 확인한 후 이튿날 아담 샬 신부의 청원을 허락하는 청나라 황제의 증서가 교부되었다. 그 직후 아담 샬 신부는 순치 2년(1644년)을 위한 책력을 만들었고 8월 1일에 있을 일식도 예보하였는데 이 날의 일식은 전통적인 대통력(大統曆)과 이슬람식 회회력(回回曆)은 예상하지 못했기에 아담 샬 신부의 주가는 올라갔다. 7월 2일 도르곤은 유럽식 역법으로 완성된 책력을 시헌력(時憲曆)이라 명명하고 순치 2년(1644년)부터 천하에 시행할 것을 명하였다. 이로써 아담 샬 신부는 명조에 의해 청조에서 봉직할 기회를 얻었고 11월 25일 흠천관(欽天監) 감정(監正)에 임명되었다.[22] 파일:네이버 블로그 아이콘.svg[23] 센코쿠 시대 일본에서 활동한 루이스 프로이스 신부도 선교 활동의 와중에 본인의 기록을 많이 부풀렸다고 한다.[24] 어제 뜻밖에 제게 보내주신 구원자 하느님의 상, 역서들, 기타 서학서들을 선물로 받고 제가 얼마나 감격했는지 상상도 못할 것입니다. 이로 말미암아 저는 신부님께 큰 빚을 졌습니다.[25] 훗날의 청나라의 천주교 탄압을 보면 이상해보이겠지만 초기의 신부들은 유교를 인용해가며 포교하는 식으로 중국 현지에 맞는 포교방식을 택했기 때문에 이보다 앞서 온 선교사 마테로 리치를 중국인들은 '이자(利子)'라는 존칭으로 불렀다. 그러니 중국에서는 천주교가 유교와 다른 것이 아니라 유교와 비슷한 그런 것으로 보였을 테니 저런 말도 가능하다.[26] 소현세자도 자신이 우대해 줘야 한다고 교육받은 원로 신하들이 병에 걸리거나 사직하려 하면 그의 덕성과 학식, 충성심을 치하하는 미사여구를 어릴 때부터 늘어놓곤 했다.[27] 다만 당시 조선이 완전히 천주교 불모지는 아니었다. 유몽인(1559-1623), 정두원(1561-?), 이수광(1563-1628), 이익(1579-1624)[43] 등이 한문으로 번역한 천주교 서적, 천주실의를 들여왔다. 다만 이들의 포지션은 어디까지나 유학자로, 천주교를 종교로 진지하게 받아들이기 위해 들여온 게 아니라 서쪽엔 이런 독특한 학문이 있다 카더라.. 라는 호기심의 대상으로 번역본을 연구하기 시작한 것이었다.[28] 1637년 11월 8일 아담 샬 신부가 마카오의 데 로데스(Alexander de Rhodes)에게 보낸 서신에 의하면 입국 허가 없이 북경에 들어온 프란치스코회의 프란치스코 델 라 마드레 데 디오스(Francisco de la Madre de Dios) 수사와 가스파르 데 알렌다(Gaspar de Alenda) 수사가 자신에게 도움을 요청하자 그들에게 조선 선교를 권했다.[29] 그 물품들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는 전해지지 않는다.[30] 이후 청나라는 심양관에 1번씩 담비가죽, 담요, 낙타, 노루 등 예물을 보냈고 이에 심양관 측에서도 조선산 과일이나 은제품을 답례품으로 보냈다. 청나라 황족이 사적으로 상업 거래를 요구하는 일도 있었고, 청나라 관리들도 많이 만나야 했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돈과 귀중품이 많이 필요했다.[31]심양일기》를 소현세자, 더 나아가 강빈의 개인 일기로 착각하며, 《심양일기》는 마치 자신들만 읽어 봤고, 강빈을 칭찬하는 다수의 이들은 논문 한편 읽어본 적 없을 거라고 폄하하는 독단적인 일부의 주장이 인상적이다.[32] 임금이 내뱉는 욕설은 보통 "입에 담지 못할 하교" 등으로 돌려 기록할 뿐, 직접 사관이 단어를 써서 기록한 경우누 전례가 없었다.[33] "명분만 좇다가 나라까지 망해보았으면 교훈을 얻고 달라져야지 않는가? 오랑캐라 천시하던 이들을 보라. 인구도 우리보다 적은데 거대한 중국을 집어삼켰다."(《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중 《인조실록》 편에서)[34] 그렇다고 소현세자가 정말 재물 모으기에만 집착하는 속물이냐면 앞서 보았듯 소현세자는 재물을 쌓고 그 재물로 청나라에 끌려온 조선인 노예들을 사들였으며 청나라 내에서 인맥을 만들었는데 이 과정에서 과연 돈이 오고가지 않았겠는가? 잘 생각해 보면 소현세자가 글공부를 게을리하고 기이한 물건들을 모은 것이 세자로서 좋은 모습은 아닐지도 모르나 소현세자는 그 이상으로 차기 국가원수로서 할 일을 해냈다. 또 '기이한 물건'이라는 게 부정적인 서술이긴 하지만 실제로는 조선에서는 볼 수 없던 새로운 문물인데 기록하는 관점에서는 그저 청나라 물건이라 안 좋게 보여서 그렇게 서술했을 수도 있다.[35] 비슷하게 성종의 경우 훈구, 사림을 견제하기 위해서 무신들을 문반직에 써준다든가 아니면 남반(중인)들에게도 문반직을 세수하기도 하여 신하들의 반발을 사기도 했다.[36] 카리스마 있는 악역이 아닌 졸렬한 악역으로 나오는 경우가 대다수다. 물론 상술한 바와 같이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남한산성에서의 항전 양상을 보면 이런 묘사가 딱히 틀린 것도 아니다. 다만 인조 본인은 이때의 치욕 때문에 평생을 백성들이 자길 미워하지 않을까 하는 콤플렉스 덩어리로 살다 사망하긴 했다.[37] 광해군 재위기 정치사를 보면 알겠지만 광해군은 고립된게 아니라 의심병, 공안 정치, 영건 사업으로 고립을 자초했다.[38] 1980년 KBS 드라마 <파천무>에서는 문종 역.[39] 2001년 KBS 드라마 <명성황후>에서는 의화군 역.[40] 2015년 MBC 드라마 <화정>에서는 청태종 역.[41] 2011년 JTBC 드라마 <인수대비>에서는 의경세자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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