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동 / 遼東 / Liaodong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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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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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동에 따로 한 천지가 있으니
[ruby(斗,ruby=두)] [ruby(與,ruby=여)] [ruby(中,ruby=중)] [ruby(朝,ruby=조)] [ruby(區,ruby=구)] [ruby(以,ruby=이)] [ruby(分,ruby=분)]
두드러져 중국과 구분되어 나뉘었네
ㅡ 이승휴(1224 ~ 1300),《제왕운기》
요동에 따로 한 천지가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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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드러져 중국과 구분되어 나뉘었네
ㅡ 이승휴(1224 ~ 1300),《제왕운기》
직역하면 요하강의 동쪽지역이라는 뜻이다. 해당 지역은 20세기에 일본 제국에 의해서 세워진 괴뢰국인 만주국이 세워진 다음에는 세계적으로 만주라는 단어가 보편화되어 있지만 만주를 지역명으로 쓴 것은 오래되지 않으며 본래는 요동이 현재 만주라고 부르는 지역을 지칭하는 말이었다.#[1] 16세기에 여진족을 통일한 건주여진의 족장이었던 아이신기오로 누르하치가 야인여진과 해서여진을 정복한 후에 여진이 통일된 기념으로 여진의 정체성을 합치기 위하여 만든 단어이기 때문에 만주라고 부르게 된 건 겨우 500년밖에 되지 않았다.
중화인민공화국에 편입된 현재는 동북 3성이란 이름으로 바뀌었고 요하강 유역을 부르는 지역의 이름은 요령으로 바뀌었다.[2] 현재 요하강 유역은 몽골족의 자치구의 동쪽, 랴오닝성, 그리고 지린성 서쪽에 걸쳐 있다.
2. 범위
한자 그대로 해석하면 요하강줄기 동쪽의 땅을 일컫는 말이다. 요하 서쪽의 요서와 대응된다. 그런데 시간이 오래 지나면서 강줄기가 혼하와 떨어지는 등 과거와는 변동이 생겨서 하류 일대와 같은 곳의 범위가 과거와 좀 다를 수 있다요동의 범위는 다소 추상적이다. 좁은 의미로는 요동 반도와 그 일대만을 가리키며 넓은 의미로는 만주 일대, 경우에 따라서는 한반도 북부 혹은 해동이라는 단어처럼 한반도 전체를 가리킨다. 개요 문단의 이승휴의 시에서 묘사되는 요동은 바로 한민족의 역사문화권으로서 요동이다.
중국 측 기록에 의하면 일반적으로 중화권 국가가 요하 지역을 점유할 때는 좁은 의미의 요동이, 그렇지 않을 때는 넓은 의미의 요동이 많이 쓰였다. 예를 들어 고조선이 멸망하고 한사군을 세운 이후 고구려가 이 지역을 장악하기 전이나 명나라 시대의 중국 측 기록은 좁은 의미의 요동이 많이 쓰였다. 반면 예맥계 국가나 말갈, 거란 등등 비한족(非漢族) 국가가 점유할 때는 넓은 의미의 요동이 많이 쓰였다.
좁은 의미의 요동은 전적으로 진~한 대의 행정구역인 요동군에서 비롯된 것이다. 하지만 중국이 정복한 지역에 행정구역을 설치할 때는 대체로 피정복 국가가 옛부터 사용하던 지명+주/현의 형식을 띄고 있었다. 당나라가 멸망시킨 후 설치한 안동도호부 휘하의 행정구역을 보면 개모주, 남소주, 창암주 등등 과거 고구려가 사용하던 지명을 그대로 이어받은 것을 알 수 있다. 즉, '요동'이라는 지명은 진나라 이전부터 고조선에서 불리던 지명이었을 가능성도 높다.
요동군이 소멸된 뒤에는 한반도 일대까지를 통틀어서 요동이라고 서술하는 경향이 커졌는데 심지어 신라를 요동에 있다거나 요동 = 신라라고 서술할 정도였다. 신라도 어쨌든 요하의 동쪽이긴 하니 요동이라고 부르는 것이 아주 틀렸다고 말하긴 힘들지만, 그래도 한반도 지역까지 요동이라고 부르는 것이 일반적이지는 않았다. 한반도 지역은 삼국이 통일한 이후로는 주로 삼한이라 칭해진다. 삼국시대 때는 고구려가 있었으니 요동을 포함한 만주 일대까지 삼한의 범위에 들어가곤 했다. 발해는 기록이 적어 확언하기 힘들지만 최소한 삼한계(그 중에서도 고구려)의 별종이거나 삼한계+퉁구스 계통이라는 애매한 계통에 넣었다. 그 외에도 해동, 청구 등의 용어가 있다.
요동군이라는 군현 명칭에서 요동이란 지리적인 개념으로 확장된 이유로는 중국 고지에서 벗어나 신설된 군현, 소위 외군(外郡)들이 기능적으로 변경지역의 여러 민족이나 국가들을 통제 관리하는 역할을 맡았던 것과 연관이 있다. 특히 요동군이나 낙랑군은 중원 국가의 대리인격의 위치에 있었으며, 각 군들은 일정한 공간범위 내의 민족과 국가를 담당하였었다. 고대 한반도와 동북지역 각 민족 및 국가들에게 한 군현과의 교류는 비교우위를 점할 수 있는 정치적 수단이었으며, 공세적 관점으로는 차지해야할 대상이기도 하였다.
그러한 공세적 방식을 택한 대표적인 국가가 바로 고구려이며 끝끝내 5세기 이후로 고구려 왕들이 중원 정권으로부터 요동군 고구려왕+관호 명의 작호를 인정받기도 한다. 같은 맥락으로 신라나 백제도 각각 낙랑군왕, 대방군왕 등의 작호를 받는다. 신라야 통일 이전이고, 백제는 대방 일대는 커녕 한강 일대에서 후퇴한 뒤에도 낙랑과 대방이라는 명칭이 이어졌는데, 이건 기존 낙랑과 대방 지역의 상징성이 만주와 한반도 일대의 왕조를 대표하는 이칭 중 하나가 되었다고도 볼 수 있다. 삼국시대가 절정으로 치닫는 5~6세기에는 구 한 군현의 명칭이 지역적인 개념으로 자리잡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3. 요동을 점유했던 나라들
현재는 중국의 땅이지만 역사적으로 여러 세력이 거쳐갔으며 고대에는 이곳이 '중국'의 영역에서 벗어난 적이 많았다. 그래서 이 지역에 있던 세력, 민족의 역사를 중국도 한국도 아닌 독자적인 지역사로 보는 시각도 있다. 김한규 교수의 요동사가 그런 시각에서 쓰인 책이다.- 고조선: 고조선의 요충지. 남한 학계에서는 실질적인 국가의 발상지로 보는 편이 많다.
- 연나라: 연소왕이 진개를 보내 조선 토벌을 하면서 요동을 차지.
- 진나라
- 전한
- 신나라
- 후한
- 동연
- 위
- 서진
- 전연
- 후연
- 고구려: 광개토대왕 대에 완전히 장악.
- 신라: 문무왕이 요동을 공격해 일시적이나마 점령한 것이 나당전쟁의 시작이다.
- 당: 고구려 멸망 직후 잠시 점령, 발해 건국 시기까지 수십년 동안 요동반도의 일부 거점을 영향권에 두었다.
- 발해: 여전히 소고구려 문제 등의 논란이 있기는 하지만 빠르면 8세기 초, 늦어도 9세기 초 선왕 때 완전히 차지했다고 보여진다.
- 요나라: 중간에 흥료국과 대발해국이 이 지역에서 발해부흥운동을 전개했다.
- 금나라
- 원나라
- 고려: 제1차 요동정벌 때 잠시 점령.
- 명나라
- 청나라
- 러시아 제국령 다롄
- 만주국
- 일본 제국령 관동주
- 소련
- 중화민국: 아직까지 요동을 포함한 중화인민공화국 영토의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다. 다만 국민정부는 봉천군벌, 만주국, 중국공산당의 존재로 직접 통치한 적은 거의 없다.[3]
- 중화인민공화국
- 북한: 비단섬, 황금평 문서 참조.
4. 현황
현재는 중국의 랴오닝성에 속해 있으며 랴오닝성은 요동뿐만 아니라 요서까지 포괄한다. 거대한 철광이 위치해 있고 중국의 주요 공업지대 중 하나다. 중국 동북지방의 대표적인 농업지대인 둥베이 평원에서 매우 광범위한 옥수수 농업이 행해지고 있다. 둥베이 평원은 지린성이나 헤이룽장성에 더 넓게 분포한다.5. 한국사와의 관계
한국사에서 좁은 의미의 요동을 점령했던 시기는 고조선, 고구려, 발해로 고조선은 요하 유역에서 건국한 것으로 추정되며 한반도로 세력을 확장했다.이후 고조선을 멸망시킨 한나라가 차지하며 공손정권이 자리잡는데 이때 공손도는 부여와 손을 잡고 선비족과 고구려를 견제하였다. 그러나 고구려는 계속해서 요동으로 진출하였고 이윽고 광개토대왕때 완벽히 점령한 뒤, 멸망 때까지 점유하였다.
고구려 멸망 이후 고구려의 후계를 자처한 발해가 지속적으로 요동 지역으로 진출하였다. 발해의 요동 영유는 전신인 고구려에 비해 느슨한 형태였는지 몇몇 사학자(주로 외국 학계)들은 발해의 요동, 서북한 점유를 인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일단 사학계의 통설은 발해가 요동을 느슨하게나마 수복했다는 것이다. 발해 멸망 이후로는 한민족이 장기적으로 요동지역을 점유한 시기는 없다.
신라도 나당전쟁 때에 일시적으로 진출한 적이 있다. 고구려 멸망 후 신라의 장군 설오유가 고구려 유민 지도자인 고연무와 합세해 요동에 주둔한 당나라를 선제공격해 몇 달간 점령했다. 이 사건이 본격적인 나당전쟁의 시작. 하지만 당나라군의 선봉장 이근행 부대에 패퇴하면서 신라의 요동 수복은 좌절되는데 만약 신라와 고구려부흥군이 당을 요동에서 물리쳤다면 한국사 방향이 많이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또한 고려도 제1차 요동정벌 당시 일시적으로는 요동을 점령했던 적이 있다. 이외에 고려말엔 유익이라는 원의 이 지역의 관리가 명과 고려를 저울질해서 명에게 붙으려다가 요동에 있는 백성들이 이동할 경우 고려 쪽이 더욱 편하고 반발이 적을 것이라 판단해 고려에게 땅을 바치고 귀부를 신청하긴 했는데 당시 고려에서 별로 반응이 없어서 기다리다 지쳐 명에 귀순한 일도 있다. 당시 노국공주가 죽어 공민왕은 신돈에게 반쯤 정치를 일임하고 있던 시기이다.
그래도 이후 나하추가 명에게 완전히 항복하기 전까진 이 지역은 명, 원, 고려 등의 영향력이 끼쳐졌다. 이후 조선 대에는 점령을 시도하려고 했지만 여러가지 이유로 무산되었다.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으로 인해 요동정벌이 무산되고 그 이후로 명나라가 점령하게 되면서 조선은 요동을 점령하지 못하게 된다. 조선 초까지만 하더라도 정도전이 요동 정벌을 주장하는 등의 사태가 있기는 했지만 이후에는 조선이 국시 차원에서 요동에 대한 진출 의지를 표명하지는 않게 된다.
사실 요동을 처음으로 점유한 고조선의 초기 중심지가 요동이라는 점과 함께, 후대의 국가인 고구려와 발해도 요동을 차지했다는 점 등을 감안한다면 요동은 한국계 국가들이 옛 땅으로 여길 요소는 충분히 있다.
6. 유목제국의 단골 중원정복 루트
중국 대륙 지형 |
요동 반도와 그 일대는 전략적으로 중원의 초입이기 때문에 중국은 역사적으로 이 지역에 세워진 나라들을 위협적으로 인식해왔고, 이 지역의 주도권을 놓고 외국과 끊임없이 다퉈왔다.
- 한의 고조선 정벌
- 수나라의 고구려 정벌
- 당나라의 고구려 정벌
- 발해 초기 당나라와의 갈등 - 발해가 다시 요동을 차지하고 거란에게 멸망한 이후부터 명나라 때까지의 기간 동안 갈등이 없었던 건, 거란-여진-몽골로 이어지는 북방 유목민족 또는 수렵채집민족의 전성기라 한족과 한민족 국가가 따로 요동을 가지고 갈등을 벌일 구석이 없었기 때문이다.
- 명나라의 요동 진출, 명나라의 건국 초 조선 견제.
과거 요나라, 금나라, 청나라 모두 이 루트로 중원을 침입했고 금나라와 청나라는 중원까지 정복하기도 했다. 이 가운데 금나라는 화북 일대를, 청나라는 중원 일대를 넘어 몽골, 위구르, 티베트 일대까지 진출했다. 즉, 요동을 점거하고 있는 세력이 산해관을 넘기라도 하면 그 이후에는 방어가 되지 않는다. 게다가 중국사는 뒤로 갈수록 베이징 일대에 수도를 두는 일이 많았다. 요하 일대에서 베이징까지의 거리를 보면 중원 왕조 입장에서는 최전선에 수도를 두는 격이다.
때문에 북방민족이 산해관을 넘어 '중원'으로 들어가기 전에 항시 후방을 안정시키기 위해서 중국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는 한민족계 국가와 한판 겨루고 복속시킨 뒤에 출정한다. 이러한 성격의 전쟁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 여요전쟁 - 고려와 여진을 완전 복속시키지 못하고 중원으로 무리하게 출정한 결과 출하점 전투를 기점으로 결국 여진족이 금을 세우며 요의 후방을 쳐 정복하였다.
- 고려의 여진 정벌 - 이건 반대로 한민족계 국가가 퉁구스계 민족을 공격한 사례이다. 금나라가 건국하기도 전 일인데도, 건국 이후로 고려를 정벌하지 않게 되었다. 대신 조공-책봉 관계는 확실히 맺었다.
- 정묘호란, 병자호란 - 아울러 병자호란의 원인은 단순히 견제 차원이 아니라 내부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필요성도 있었다.
만주지역에서 세력을 키운 유목 부대에게 평야는 압도적으로 농경민족에 비해서 군사적 우위를 점할 수 있는 지형이다. 참고로 금나라와 청나라의 주류 민족이었던 여진족은 농경이 주요 생산원이었다. 만주라는 곳 자체가 하나로 묶지만 다양한 식생이 펼쳐진다. 어디는 농사가 되고, 어디는 목축, 어디는 수렵과 채집으로 먹고 사는 등 하나로 묶기에는 어폐가 있다. 당연히 퉁구스계, 동호계, 예맥계 모두 만주에 살 때는 이러한 다양한 활동을 보였다.
여기에 유목 부대를 병행하는 엄청난 특이성을 지녔다는 점이 여진족의 가장 큰 강점 중 하나이다.[4]
위 이미지처럼 중원 자체가 특히 요서 지역이 함락된 후 화북으로 들어오면 방어를 하기 어려운 지형이여서 자칫 전투에서 패배하면 수천 km를 내주어야한다. 그나마 거란 상대로는 연운 16주만 내주었지만, 더 심각한 상황이 벌어질 경우 정강의 변 같은 상황이 발생한다.
7. 관련 문서
[1] 단 요동과 만주의 범위는 완전히 일치하지 않는다. 현재의 만주 지역은 옛 여진족이 청나라를 건국하기 전의 최대 진출지역을 포함하기에 연해주와 북만주를 포함하지만 요동은 북만주와 연해주를 포함하지 않으며 만주 지역이란 명칭은 요하강을 포함하기에 요하강 서쪽도 일부 포함한다. 이는 '요동'이라는 말이 쓰일 시절에 연해주와 북만주는 딱히 이름을 붙일 필요도 없을 정도로 인구가 희박한 지역이었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당장 연해주에 맞닿은 사할린은 세계에서 손꼽히게 큰 섬이지만 근대 이전까지 딱히 그 누구도 신경 쓰지 않는 땅에 지나지 않았다. 사실 지금도 동북아 정세의 교차점인 만주를 넘어 북아시아 시베리아로 넘어가면 "러시아 동부의 광활한 땅" 정도의 이미지이지 주변국들도 딱히 아무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이런 명칭들이란 제외되는 부분이 없는 엄밀한 체계를 이루려는 목적에서 부여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명명은 소수의 탐험가에 의해서만 이루어질 뿐이다) 정치역사적으로 지칭할 필요성이 생겼을 때 그때그때 명명되는 것이므로, 당시 맥락에서 지칭할 필요가 없는 지역은 이름이 붙지 않는 것이다.[2] 한민족은 요하강 유역이라고 부르고 요하강을 기준으로 요서와 요동으로 나누었다. 만주를 완전히 상실하기 전에 만주평야를 부여라고 부르기도 했다. 고조선이 멸망한 이후에는 요서를 이민족 영역 요동을 한민족 영역으로 보았기 때문에 그곳을 통틀어서 지칭하는 말은 없었다.[3] 실질적 통치는 국공내전 당시 국민당군이 선양시 일대까지 들어오면서 잠깐 통제권을 '거의' 손에 넣게 된 것이 전부다.[4] 후금이 막북을 정복하고 몽골 부족을 통합하여 팔기군으로 흡수한다. 중국의 중앙 관료제와 몽골 여진의 엘리트 유목 부대가 더해지며 막강한 국가로 거듭한다. 중원을 정복하는 여진족의 흡수력과 유연함을 중원을 정복할 수 있던 주요 요인으로 꼽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