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강의 변 靖康之 變 정강지변 | ||
<colbgcolor=#2e8b57,#251327><colcolor=#ece5b6> 시기 | CE 1126년 (흠종 원년) ~ 1127년 (고종 원년) | |
장소 | 송 (중원 일대) | |
원인 | 송의 금에 대한 의무 불이행[1] | |
교전국 | <rowcolor=black> 금 (공세) 승 | 송 (수세) 패 |
주요 인물 | 지휘관 [[금나라| 大金 ]] 태종 (금 황제) | 지휘관 [[북송| 大宋 ]] 휘종 (송 태상황)[[북송| 大宋 ]] 흠종 (송 황제) |
참전자 [[금나라| 大金 ]] 완안종망[[금나라| 大金 ]] 완안종한[[금나라| 大金 ]] 완안종필 | 참전자 [[북송| 大宋 ]] 이강 | |
병력 | 병력 규모 불명 | 병력 규모 불명 |
피해 | 피해 규모 불명 | 피해 규모 불명 |
결과 | 금의 승리 - 송의 영토 상실과 수도 천도 - 송의 외교적 굴욕[2] | |
영향 | 송금전쟁의 지속 - 개희북벌의 명분[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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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126년 북송이 여진족의 금나라에게 패하여 수도 변경(지금의 카이펑/개봉)이 함락되고, 송의 황제였던 휘종과 흠종을 포함한 황족들이 몽땅 금나라에 포로로 잡혀간 사건. 당시 북송의 연호가 정강이었기 때문에 정강의 변이라 부른다. 역사팬덤들에게 영가의 난, 토목의 변과 함께 중국 한족 왕조의 3대 굴욕 사건으로 거론되기도 한다.[4]2. 전개
2.1. 발단
1115년, 완안아골타가 요나라의 지배를 받던 여진족들을 통합해 통일국가 금을 건국하고, 내외부로 곪아가던 요나라와 전쟁을 벌여 연전연승을 거듭한다. 이 소식을 들은 북송의 황제 휘종은 요에게 바치고 있던 공물을 금에게 대신 바치면서 협공을 제의했고 금 입장에서도 지원군이 생기면 나쁠게 없기에 이를 수락하여 동맹이 맺어진다.[5]당연히 송나라 조정이 생각없이 오랑캐라 여기던 금나라와 손잡은 건 아니었고, 어차피 금나라쪽으로 판도가 거의 넘어간 거나 다름없으니 여진을 이용해 거란을 제압하고 자신들은 그 사이에 숟가락만 얹어서 숙원인 연운 16주를 회복하여 북송의 입지를 강화시키려는 생각이었다.
문제는 송의 군사력이 무너진 요나라도 이기지 못할 정도로 처참했다는 것이다. 문치위주 통치 방식의 영향으로 병사 수만 보면 많아 보였으나 실제로는 훈련도 되지 않고 평화가 길었고[6] 의도적으로 막은 것도 있어서 전략에 능통한 장수도 적었다. 심지어 전시 상황에서도 군대가 지나치게 중앙 정부의 영향을 받아야 했다.
실제로 금나라와 협공하기로 계약을 맺은 뒤로 요나라의 패잔병 무리 '수천'[7]에게 10만에 달하는 송군이 패하고 쫓겨나는 등 졸전을 저질렀고 자신들과 달리 졸전만 거듭하는 송의 추태에 금조차 상식적으로 이게 말이 되지 않으니, 일부러 피해 안보고 양쪽 사이에서 간보려고 졸전하는 척 아니냐며 사신을 보내 강하게 따져들었을 정도였다. 이에 송이 기존의 연운 16주가 아닌 연주 6주(송의 연산부)의 토지만 받기로 하고 연주 내의 모든 재물과 추가적인 공물, 금이 단독으로 공략한 운주(현 다퉁) 10주를 고스란히 넘긴다는 조건을 제시하며 숙이고 들어간다.
송의 태도에 금조차 잠시 마음을 돌려 화를 풀며 갈등은 해소되었고 이후 동맹관계는 유지된 채 1125년 요나라는 금나라와 송나라의 협공 속에 마지막 황제였던 천조제가 금나라 군대에 포로가 되어 금나라의 수도로 압송되고, 남은 잔당 세력은 서쪽으로 튀면서 카라 키타이/서요가 되며 약속대로 요나라가 멸망, 이제는 송이 금과 맺은 대가를 치르기만 하면 되었다. 그런데...
2.2. 전개
요가 멸망하자 북송은 입을 싹 닦아버렸다. 심지어 공물을 바치지 않은 걸로도 모자라 포로로 잡힌 요의 천조제와 접촉해 금나라에서 내분을 조장하려던 정치공작까지 들켰다.이는 고려가 송에게 말했듯 송이 기본적으로 금을 믿지 못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고려와 북송은 이민족에 대한 적대감과 불신감이 대대로 매우 높은 편이었고[8], 그나마 수나라와 당나라 시절부터 중화의 문물에 감화된 요나라[9]와 달리 군사력만 강했던 금나라는 송나라 입장에선 그저 강한 군사력으로 벼락출세한 야만족 집합체일 뿐 동격의 나라로 봐주진 않았던 것이다.[10] 비교적 오래동안 교류한 고려인들 또한 단 한 번도 여진족을 자신들과 동등한 인간이라 여겨준 적이 없는 수준이었으니 하물며 동시대 세계 최고 수준의 문명국가임을 자부하는 송나라인들의 눈에 여진족들이 어떻게 비춰졌겠는가.
그러나 사정이 어찌되었든, 계약을 불이행한 건 전적으로 송의 잘못이었고 이에 제대로 분노한 금은 북방 통일이 끝난지 얼마 되지도 않아 바로 군대를 파견해 순식간에 수도인 변경(개봉)을 포위했다. 이때 그 와중에도 정신 못차리고 사치와 도교에 심취하던 휘종이 곽경[11]이라는 도사인 척하는 사기꾼에게 낚여 육갑신병이라는 진법을 세우면 막을 수 있을 거라며 자만심을 드러내다가 가볍게 금에게 박살났다.
칼이 목 아래 내밀어질 때가 돼서야 정신을 차린 당대 황제 겸 원인제공자 휘종은 잽싸게 장남 흠종에게 황위를 양위한 뒤 본인은 남쪽으로 피난가 책임을 흠종에게 떠넘겼다. 흠종은 갑작스레 제위를 받은 상황에서도 이강이 개봉에서 금군을 막고 구원군들이 몰려온다는 점을 이용해 판세 아래에서 태원부(산시성 타이위안시), 하간부(허베이성 창저우시 허젠시), 중산부(허베이성 바오딩시 딩저우시)의 하북 및 하동 영토 할양과 금 1천만 냥, 은 2천만 냥, 비단 1천만 필의 배상금 지불 조건을 제시해 간신히 금과 평화 조약을 타결하고 금의 1차 침공을 간신히 막아낸다.
이후 혹떼려다 혹 더 붙인 꼴이 되어 버린 흠종은 이러한 사태의 주범들인 간신들(동관, 양사성, 채경, 채유, 주면 등)을 유배하거나 처형한다. 여기까지만 그쳤다면 치욕스럽게 영토와 재산은 좀(?) 잃었어도 화북 대부분을 보전할 수는 있었을 것이었지만...
2.3. 절정
본디 흠종은 계약을 그대로 이행하려 했음으로 추정되나, 금과 계약을 맺고 얼마지나지 않아 결국 흠종마저 주전파 대신들의 의견에 찬동하게 되며 금과 한 약속을 또 파기해버렸다. 이 소식을 들은 금은 크게 분노해 바로 군대를 보내 포위만 하던 이전과 달리 변경을 공략하였고, 1126년 11월 결국 변경이 장장 8개월 지속된 공방전 끝에 함락되어버린다.[12]함락된 수도 변경에서 금나라군은 송조의 재상 장방창을 협박해 괴뢰정권 초(위초)의 황제로 즉위시켰다. 그리고 휘종과 흠종을 비롯한 북송의 황족 및 관료 3천 명을 포로로 삼고 대량의 서적, 보화, 재물, 보물, 그림 등과 함께 북방으로 끌고 갔고 그 와중 압송중인 관료와 황족들에게 장방창의 즉위를 지지하는 서명을 강요하여 받아냈다.[13]
이로 인해 송은 한 차례 멸망하고 수도 변경을 비롯한 화북 지역은 금나라의 점령하에 들어간다.
사실 북송이 아무리 약하다해봤자 단기간에 수도가 2번이나 털릴 정도로 국력이 처참하진 않았으며, 오히려 발달된 내정을 기반으로 쌓아올린 경제력으로 북방민족을 회유하며 버텨왔으나[14] 송휘종의 지속된 실정으로 국가재정은 파탄이 나고 곳곳에 일어난 반란으로 군사력은 분열된 끝에, 북방민족을 회유하지 못하고 적을 방어할 군사도 부족한 상태에서 대책없이 금나라와 전쟁을 선택한 댓가로 수도가 함락되고 두 명의 황제가 포로가 되는 전대미문의 사태가 벌어진 것. 훗날 애산 전투에서 몽골이 고전할 정도로 남송군민이 저항한 것을 생각하면 씁쓸한 결말이다. 그만큼 송나라에서 송휘종을 위해서 싸워준 사람들이 없었다는 것.
실제로 금에 끌려가는 와중에도 서화만 챙기거나 기생 이사사만 찾는 등 도무지 황제로 볼 수 없는 추태를 보이는 사람을 위해서 누가 목숨걸고 싸우고 싶을까? 차라리 송휘종이 포로로 잡히기 전에 자결하거나 싸우다가 전사했다면 황제의 죽음에 분노한 민심으로 의병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었으나 문제는 송휘종은 포로가 되고도 수십년을 더 살다가 죽었다.
2.4. 결말
금나라는 장방창의 위초를 앞세워 기존의 송나라 세력을 흡수하고자 꾀했으나, 위초는 송의 백성들에게 영 인심을 사지 못했다. 이때문에 금나라로 끌려가지 않았던 철종의 폐후 소자성헌황후 맹씨를 황태후로 복권시켜 이를 통해 정통성과 적법성을 노렸으나... 당연하게도 맹씨는 장방창을 돕기는커녕 휘종의 9남이자 흠종의 이복동생으로 당시 제주 지방에 있어 유일하게 포로가 되지 않은 강왕 조구에게 '장방창은 적법성, 정통성, 명분이 없으니 어서 빨리 천자 자리에 오르라'는 친필서한을 써서 보냈고, 이 서한을 받은 강왕은 제위를 선양받아[15] 남송의 초대 황제인 고종으로 즉위하면서 장방창과 금나라에게 아주 제대로 엿을 먹였다.스스로 고종이 된 조구가 금나라에 합류하지 않은 기존 송 세력들을 규합하면서 금과 위초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남부 지역에서 송을 이어나갈 것을 천명한다. 이것이 바로 남송이다.[16]
고종의 주도하에 송이 다시 세워졌다는 이야기를 들은 금나라는 다시 군사를 일으켜 송을 침공했고 이 과정에서 송의 고관인 유예를 또다른 괴뢰국가인 제(위제)의 황제로 세우며 지속적으로 남하한다. 고종도 이를 가만히 지켜보지 않고 맞서서 군대를 일으켰으나, 압도적인 차이로 짓밟히고 금나라는 승승장구하며 양주, 남경, 임안(현 절강성 항주), 월주(현 절강성 소흥), 명주(현 절강성 영파)를 잇달아 점령하고 일군은 강서성까지 진격하였으며, 도망친 고종을 온주에서 급기야 해상으로 내몰아 전 중국을 정복할 정도로 용맹함을 자랑했다.
그렇게 송을 화중, 화남 인근까지 몰아붙이며 승승장구했으나, 아이러니하게도 금의 성공가도는 이즈음에서 막이 내린다. 화북과 달리 강과 하천이 많은 화중/화남의 기후와 지리는 금에게 낯선 환경이었고, 여기에 악비, 한세충 등을 주장(主將)으로 한 송군의 반격에 예상치 못하게 전선이 팽팽하게 형성되는 동안 금의 지나치게 강압적인 정복및 약탈에 버티지 못한 송나라 사람들이 점령지 각지에서 다발적으로 반란을 일으키며 고초를 겪게 된다.
결국 금이 관중-사천성을 점령한 이후 더이상 점령을 속행하지 못하고 장강을 두고 서로 일진일퇴를 반복하는 와중 이 이상의 전쟁은 손해밖에 없다고 판단한 금이 개봉 및 황하 이남을 포기하고 아예 화북으로 후퇴해 방어선을 형성하고자 했으나, 악비 등의 주전파가 지나친 발언력을 얻을 걸 경계한 진회 등의 화평파가 악비를 누명씌워 배제시키게 되면서 강화를 체결하게 된다. 이로써 회하에서부터 대산관까지를 경계로 삼아 유예의 위제를 폐하고 금나라가 정식으로 화북을 통치하게 되어 중원 대륙은 본격적으로 2차 남북조시대의 형세를 이루었다.
이후 약 80년뒤 남송의 권신 한탁주가 정강의 변의 굴욕을 갚겠다는 명목으로 북벌론을 주창해 개희북벌을 시도했으나 처참하게 패전하고 실패로 돌아간다.
또다시 개희북벌 사건 이후 10년 뒤(강화 이후 90여년 뒤) 금애종 시기에 북방의 신흥강자 몽골이 세를 키우며 자연스레 금과 대립하게 되며 역사상 최대의 기병 전쟁이 벌어진다.
금 애종 천흥(天興) 2년인 1234년 몽골과의 대립으로 약해진 금나라를 본 남송은 당대 최고의 명장인 맹공에게 군대를 보내 애종을 칠 것을 명했고 맹공은 황제의 뜻대로 직접 애종을 참수하는데 성공, 결국 100년만에 설욕을 갚는데 성공한다. 그러나 이를 계기로 단평의 입락이 일어났고 또한 얼마 못가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금을 정리한 몽골이 송까지 노리면서 일어난 전쟁에 의해 국력이 바닥난 송은 결국 남송마저 멸망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3. 휘종과 흠종의 여생과 최후
금태종은 끌려온 휘종에게 혼덕공(昏德公, 정신이 혼미한 공작), 흠종에게 중혼후(重昏侯, 정신이 더욱 혼미한 후작)란 작위를 내려 조롱했다.[17] 공과 후는 작위로 보자면 왕보다도 아래이니, 제왕의 지위도 부정 또는 강등한 것이다. 그래도 명색이 황제였는데 판단 하나 그르쳐서 받는 엄청난 치욕.또한 휘종과 흠종을 포함하여 붙잡힌 북송의 포로들은 금의 영토에서도 동북쪽으로 멀리 떨어진 오국성, 즉 현재의 헤이룽장성 하얼빈 이란현 근처에 단체로 모여서 귀양살이를 했다. 이곳이 함경북도 회령이라는 설이 있으나 한국측 사서에서만 주장하는 이야기고 중국 학계에서는 오국성이 하얼빈에 있었다고 보고 있다.[19]
금나라의 초창기 수도가 오늘날 하얼빈시 아청구에 위치했던 상경회령부(上京會寧府)였기 때문에 금나라 입장에서도 황족급의 중요한 죄수들을 수도와 멀리 떨어진 외딴 곳에 안치시키기보다는 수도 가까운 곳에 수감시켜 엄격하게 감시하는 것이 더 설득력 있는 추측이다. 휘종은 원래 금나라 영토에 묻혔다가 고종에게 유해가 돌아와 남송의 영우릉에 묻혔다. 그러나 채 200년도 안 지나 원나라 때 영우릉이 라마승이자 강남(중국) 석교총통 양련진가에게 도굴되었으니 안식을 누리지 못했다.[20] 흠종의 무덤은 사서에서는 흠종은 오늘날의 허난 성에 매장됐다고 한다.
거리가 거리다보니 구사일생으로 일부 탈출에 성공한 사람들을 빼면 대부분 금나라 땅에서 생을 마쳤다. 탈출한 사람 가운데선 남송의 재상에 오른 진회가 유명하다. 그동안은 송나라 황족들이 비인격적인 학대를 받았다고 알았지만, 현재는 그래도 최소한의 대우는 해줬다는 쪽으로 설이 바뀌는 추세. 자세한 내용은 후술된 문장 참조.
한편, 뒷날 고종의 노력으로 고종의 어머니 위씨가 돌아오고 아버지 휘종의 유해 등을 비롯하여 포로로 잡혔던 사람들 대부분은 유해의 일부라도 송환했다.
나라를 망친 휘종은 물론 흠종은 송나라 예법에서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던 적장자계승원칙으로 정통성 문제가 불거질 염려가 있다는 까닭에 고종이 거부하여 아예 송환조차 못했다. 한 마디로 말해서 흠종 같이 불행한 사례가 대다수였고, 선택받은 소수만 유해의 일부가 귀향에 성공했다.
송태종의 자손들은 원래 귀해서 수가 적었는데 개봉에 머물던 대부분의 황족들이 금나라로 끌려갔고 훗날 남송을 세운 송고종마저 자손 없이 사망하면서 남송은 송 태조의 자손들이 이후 대대로 황제가 되었다.
물론 태종의 후손들 중에서도 살아남은 이들이 있다. 대표적인 인물이 남송의 재상을 지냈던 조여우로 태종의 8대손이었다.[21] 하지만 조여우도 이 때문에 고종의 적지 않은 견제를 받다가 결국 실각했으며, 조여우 이후 태종의 자손들 중에서 유명한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휘종과 흠종이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았다는 내용이 적힌 남신기문록(南燼紀聞錄)이라는 책이 있다. 그런데 이 책이 위작이자 야사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이 책의 내용대로 금나라에게 학대를 받았다는 기존 주장은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아졌다. 대송선화유사에 수록된 이야기 역시 그렇게 신빙성이 높은 편은 아니다. 오히려 두 황제를 따라 금나라로 간 채경의 아들 채조가 기록한 북수행록(北狩行錄)과 신음어(呻吟語) 등 다른 서적에 기록된 내용을 보면 기존에 알려진 내용과 달리 휘종과 흠종은 심각하게 비인간적인 대접을 받진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복수의 기록에 따르면 그동안 첫 번째 학대 가해자로 지목되었던 완안아골타의 차남 완안종망(여진명 '알리불')은 오히려 휘종에게 연회를 베풀며 대접을 했다.[22]
휘종이 금나라에 도착할 때 금나라로부터 비단과 생견을 하사받았으며 금태종의 명령으로 휘종 부자가 견양례등 굴욕적인 의식에 참가하고 폐서인되어 평민 계급으로 떨어진 것은 사실이나 오늘날의 베이징 근처인 연산부에서 머무를 때 상당히 편하게 머물렀다고 한다.
후에 남송에서 북진 움직임을 보이자 휘종 일가를 후방으로 이동시켰으며 이때부터 휘종 자신이 직접 초가집 지붕을 잇고 농사를 지어야 하는 등 이전보다 힘들고 궁핍하게 산 건 사실이나 역시 학대를 받았다는 기록은 없다. 오히려 지붕 위에 올라가 자신에게 편지를 전해주러 온 하인에게 "요순도 초가집에 살며 검소한 생활을 했다."고 덤덤하게 말하기도 했다.
특히 황제시절보다는 빈궁한 생활이었지만 송나라 사람들이 받았다는 논밭이 45경이라고 하는데 1경이 3000평 정도 되는것을 보면 빈궁하고 고되기는 했어도 야사에서 말한 것처럼 억지로 썩은 음식을 먹고 지냈을 리가 없다.
게다가 휘종의 딸과 며느리들이 금나라 종실의 처첩이 되면서 금태종이 휘종에게 말년에 필요한 모든 것들을 제공해 안락한 생활을 하도록 해 주겠다는 칙조를 내리며 끝나게 된다.
예전에 너의 여자 여섯 명을 종실의 부인으로 취했으니 너의 말년에 필요한 모든 것을 제공해 주고, 인척에게는 장사를 시켜 돈을 벌어 말년에 의식이 풍족하고 안락한 생활을 하도록 해 주겠다. 그대의 딸과 며느리가 궁궐 침소에서 시봉을 든 지 이미 2년이 지났는데 조심하고 경계하여 잘못됨이 없어 은혜를 베풀어 돌보아 주고 있다. 이렇게 정숙한 자세는 본래 그대가 키워 준 것이므로 비단 10단을 내려 천자의 은총을 보여 주겠다.[23]
신음어(呻吟語)
신음어(呻吟語)
거기에다 휘종은 금나라에 가서도 아들과 딸을 또 낳는다. 청나라 때 '만주 8성'으로 불렸던 이르건기오로(伊爾根覺羅)씨는 자신들을 휘종과 흠종의 자손이라고 주장했다.
다만 저 칙조를 받은 그해에 휘종의 아들 중 한 명인 조악(趙㮙)이 아버지가 역모를 꾀하고 있다고 금태종에게 무고했다가 휘종의 부마와 함께 맞아 죽었다. 역시 금나라에 의해 해빈왕(海濱王)으로 봉해진 천조제의 노비들이 천조제를 무고했다가 똑같은 꼴을 당했다.
정강의 변 이후 흠종 역시 금태종의 뒤를 이은 금희종이 태종 때 흠종에게 내린 중혼후라는 모멸적 칭호 대신 천수군공(天水郡公)으로 봉해 주었으며 희종은 흠종에게 녹봉도 줬다. 일부에서는 아예 희종이 흠종을 귀양지인 오국성에서 금나라의 수도인 상경회녕부로 불러와 살게 해줬으며 흠종을 너그럽게 대해 줬다는 이야기도 있다. 정황상 흠종에 대한 대우가 종혼후 시절보다 좋아진 건 맞는 듯하나 중국에서는 천수군공이라는 의미도 좋게 보지 않는다. 대놓고 모멸적인 의미의 종혼후에서 모멸적인 부분을 없앴지만 폐서인 된 포로에서 망국의 황족 취급으로 바뀐 정도.
이런 기록들뿐만 아니라 금사(金史)에는 휘종과 흠종이 죽자 장례를 치렀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물론 금사의 기록임은 감안하더라도 화살 과녁으로 삼아 화살을 쏜 후 말발굽으로 밟아 죽였다는 따위 후일담은 과장된 괴담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 황제로서 부귀영화를 누리고 살던 사람이 평민으로 강등된 점은 휘종이나 흠종 자신에게 있어 매우 비참한 치욕이었겠지만 금나라 측에서 의도적으로 학대한 일은 별로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로 당시 떠돌던 황제 일가의 비참한 말로는 애국심을 고취하기 위한 한족 지식인들의 과장이라는 주장이 힘을 얻는 추세다.[24]
4. 나머지 황족과 궁녀들의 운명
송 휘종에게는 딸, 공주들이 21명 있었는데 대개 금나라 황족, 귀족들의 첩이 되었다.아래 명단에서 '제희(帝姬)'는 휘종이 '공주'를 대신하여 만든 작위이다.
- 장녀 가덕제희(嘉德帝姬) 조옥반(趙玉盤, 1100~1140): 정강의 변 당시 나이 28세, 좌위장군 증인(曾夤)에게 출가하여 1녀를 두고 있었다. 1127년 금나라의 포로가 되어 금나라 송왕 완안종반의 첩이 되었으며 완안종반이 반역죄로 주살된 후에는 금나라 희종의 첩이 되었다. 딸은 훗날 완안올실의 3남의 첩이 되었다.
- 차녀 영덕제희(榮德帝姬) 조금노(趙金奴, 1103~?): 정강의 변 당시 나이 25세. 좌위장군 조성(曹晟)에게 출가하였으며 1127년 금나라의 포로가 되어 완안창의 첩이 되었다. 완안창이 주살된 후에는 금나라 희종의 첩이 되었다 .
- 3녀 안덕제희(安德帝姬) 조금라(趙金羅, 1106~1127): 정강의 변 당시 나이 22세. 좌위장군 송방광(宋邦光)에게 출가하여 1녀를 두고 있었다. 1127년 금나라의 포로가 된후 금나라 도통 완안도모의 첩이 되었으나 얼마후 살해되었다. 딸은 포로가 되지 않았고 훗날 남송의 수왕 조백규에게 출가했다.
- 4녀 무덕제희(茂德帝姬) 조복금(趙福金, 1106~1128): 정강의 변 당시 나이 22세. 선화전시제 채조(蔡絛)에게 출가하였으며 금나라의 포로가 된 후 금나라 2황자 완안종망의 첩이 되었다. 완안종망이 죽은 후에는 완안희윤의 첩이 되었다.
- 5녀 성덕제희(成德帝姬) 조호아(趙瑚兒, 1110~?): 정강의 변 당시 나이 18세. 향자방(向子房)에게 출가하였었다. 금나라의 포로가 된 후 세의원에 들어갔다.
- 6녀 순덕제희(洵德帝姬) 조부금(趙富金, 1110~?): 정강의 변 당시 나이 18세. 전비(田丕)에게 출가하였었다. 금나라의 포로가 된후 진주대왕 완안설야마의 첩이 되었다.
- 7녀 현덕제희(顯德帝姬) 조교운(趙巧雲, 1111~?): 정강의 변 당시 나이 17세. 유문언(劉文彦)에게 출가하였었다. 금나라의 포로가 된 후 세의원에 들어갔다. 전 남편 유문언 역시 포로가 되어 끌려갔는데 1132년 송나라 황자 조구와 함께 휘종이 반역을 꾀한다고 고변했다가 무고임이 드러나 도리어 처형당했다.
- 8녀 순덕제희(順德帝姬) 조영락(趙纓絡, 1111~?): 정강의 변 당시 나이 17세. 향자의(向子扆)에게 출가하였었다. 금나라의 포로가 된 후 완안종한의 첩이 되었다. 훗날 완안종한에게서 풀려났으나 다시 금동로도통 습고국왕의 첩이 되었다.
- 9녀 의복제희(儀福帝姬) 조원주(趙圓珠, 1111~?): 정강의 변 당시 나이 17세. 세의원에 들어갔다. 훗날 완안종필(금울출)의 첩이 되었다.
- 10녀 유복제희(柔福帝姬) 조현현(趙嬛嬛, 1112~1141): 정강의 변 당시 나이 16세. 완안종망(完顔宗望)의 첩이 되었다가 그가 주살된 후 세의원에 들어갔고 이후 서환(徐還)에게 내려져 그의 부인이 되었다. 사망 후 유해는 남송으로 돌아와 화국장공주(和國長公主)란 시호를 받고 장사지내졌다.
- 11녀 보복제희(保福帝姬) 조선랑(趙仙郞, 1112~1127): 정강의 변 당시 나이 16세. 금나라로 끌려가던 중 사망.
- 12녀 인복제희(仁福帝姬) 조향운(趙香雲, 1112~1127): 정강의 변 당시 나이 16세. 금나라로 끌려가던 중 사망.
- 13녀 혜복제희(惠福帝姬) 조주주(趙珠珠, 1112~?): 정강의 변 당시 나이 16세. 금나라의 포로가 된 후보산대왕 완안사보의 첩이 되었다.
- 14녀 영복제희(永福帝姬) 조불보(趙佛保, 1112~?): 정강의 변 당시 나이 16세. 세의원에 들어갔다.
- 15녀 현복제희(賢福帝姬) 조금아(趙金兒, 1112~1127): 정강의 변 당시 나이 16세. 금나라로 끌려가던 중 사망.
- 16녀 영복제희(寧福帝姬) 조관주(趙串珠, 1114~?): 정강의 변 당시 나이 14세. 금나라의 포로가 된 후 연왕 완안종준의 첩이 되었다. 완안종준이 주살된 후 입궁하여 금나라 희종(熙宗)의 첩이 되었다.
- 17녀 화복제희(和福帝姬) 조금주(趙金珠, 1116~?): 정강의 변 당시 나이 12세. 금나라의 포로가 된 후 세의원에 들어갔다.
- 18녀 영복제희(令福帝姬) 조금인(趙金印, 1118~?): 정강의 변 당시 나이 10세. 포로가 된 후 세의원에 들어갔다. 훗날 입궁하여 금나라 희종(熙宗)의 첩이 되었다.
- 19녀 화복제희(華福帝姬) 조새월(趙賽月, 1119~?): 정강의 변 당시 나이 9세. 금나라의 포로가 된 후 세의원에 들어갔다. 훗날 입궁하여 금나라 희종의 첩이 되었으며 훗날 비(妃)에 봉해졌다.
- 20녀 경복제희(慶福帝姬) 조금고(趙金姑, 1121~?): 정강의 변 당시 나이 7세. 금나라의 포로가 된 후 세의원에 들어갔다. 훗날 입궁하여 금나라 희종의 첩이 되었다.
- 21녀 순복제희(純福帝姬) 조금령(趙金鈴, 1124~?): 정강의 변 당시 나이 5세. 금나라의 포로가 된 후 세의원에 들어갔다. 훗날 완안설야마의 첩이 되었으며. 이후 통역관이던 왕성체(王成棣)에게 하사되어 그의 부인이 되었다.
흠종의 부인인 인회황후는 27세였고 금나라 황궁으로 끌려와 호복을 입게 되자 더 이상의 치욕을 받고 싶지 않다며 자결을 택했다. 금태종은 이를 듣고 정실부인이라는 시호를 추증했다.
5. 기타
한편 정강의 변으로 공자의 종가도 분열되었다. 곡부의 공묘를 지키던 연성공(공자의 적통에게 내려진 작위) 공단우는 남송 조정을 따라 남하해서 절강성 구주(衢州, 현 취저우)에 새로운 공묘를 세웠다. 곡부에는 공단우의 동생 공단조가 남았는데, 이후 금나라는 공단조를 새 연성공으로 임명하였다. 그래서 공단우의 가문을 남종, 공단조의 가문을 북종으로 부르게 되었다.이후 원나라 때 쿠빌라이 칸이 남종의 종손인 공수(孔洙)에게 곡부로 돌아가서 가문을 이으라고 명하면서 어느 쪽을 정통으로 인정해야 하는지 논란이 불거질 뻔하였는데, 공수가 북종의 종손인 공치에게 연성공 자리를 양도하는 용단을 내려 집안의 분열은 일어나지 않게 되었다. 이를 공수가 연성공 작위를 양보했다고 해서 '공수양작(孔洙讓爵)'[25]이라고 부른다.
정강의 변 당시 공자묘가 파괴될 뻔 했으나 금나라군에 종군하던 발해 유민이 이를 막았다
휘종, 흠종과 비슷한 굴욕을 겪은 황제가 있는데 서진의 회제, 민제, 명나라의 정통제, 서양사에서는 로마 제국의 발레리아누스가 있다.[26]
6. 매체에서의 등장
정충악비에서 나온 이 장면이 굉장히 유명하다. 금태종의 팩트 공격이 묵직하다. 위해서도 설명했지만 송휘종의 예술활동으로 백성들을 착취한 탓에 곳곳에 반란이 일어나서 재정은 바닥이 나고 병력은 반란진압으로 전국에 흩어졌으며 그 탓에 나라를 지킬 국력이 없었다.
사조영웅전에서 구처기는 곽정과 양강의 이름을 이 치욕을 잊지 말자는 의미로 지었다고 한다.
수호전에서는 복선으로 전호편에서 전호의 부하인 범권이 병주 옆에 있는 금나라에 군사를 요청하자고 말하자. 농민 출신의 변상이 "우리가 반란군이긴 하지만 금나라에 붙었다간 큰일날 것 같은데."라고 말했다. 농민도 알고 있고 반란군도 이런 짓을 안 하는데 이걸 한 북송 조정은 답이 없는 막장임을 알 수 있게 묘사하였다. 수호후전에서 본격적으로 나온다.
7. 관련 문서
[1] 1120년에 맺은 '해상의 맹'[2] 휘종과 흠종, 송의 황족들이 패전으로 인해 인질로 끌려갔다.[3] 사실 한탁주가 조정 내 자신의 입지를 높이기 위한 정치적 수단으로 사용했을 뿐이다.[4] 이 사건이 100년 이상 동안 송나라와 금나라가 전쟁을 치르게 될 송금전쟁의 시작이었다.[5] 이 소식을 들은 고려는 여진족과 거란족은 뿌리가 별반 다르지 않아 그 신뢰성을 믿을 수 없다며 동맹을 결사반대했으나 송은 이를 무시했다. 아이러니한 건 정작 이후 전개를 보면 약속을 어기고 신뢰를 더럽힌 건 송이었다.[6] 이 시점에선 그나마 위기던 방랍의 난도 겨우 막아내서 그 피해도 완전히 회복하지 못한 시점이었다.[7] 정확히는 수군(瘦軍 빼빼마르고 볼품이 없는 군대라는 뜻)이라는 임시 군대라고 표기되어 있으나 실제로 금나라의 연전연승에 쫓겨난 요나라 군대가 패주하는 길에 부랴부랴 흩어졌다 뭉쳤다해서 모인 무리라 패잔병 또는 피난민이나 다를 바 없었다.[8] 당장 태조 왕건부터 "여진족은 겉은 사람처럼 생겼지만 속은 짐승 같아서 배 고프면 와서 붙고 배 부르면 등 돌려 가 버리니 도무지 믿을 수가 없는 족속들이다"라며 그들을 성안에 들이지 말고 성 밖에 관사를 지어서 대접하도록 명했다.[9] 실제 요는 중화와 발해의 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며 군사력과 별개로 상당한 문화적 성취도 이뤄냈었다. 자세한 건 거란, 요나라 문서 참조[10] 실제 같은 북방민족이라 하더라도, 오랫동안 중국과 교류하며 거대한 행정국가를 운영해온 거란과, 이제 막 부족연맹체 단위에서 초기 국가로 거듭난 금나라는 상당한 간격이 있었다.[11] 해당 인물은 수호전의 후속작인 후수호전에서 동명의 인물의 모티브가 되었다.[12] 먼 훗날 남송이 애산 전투때까지 곳곳에서 남송을 돕기위해서 의병이 일어나거나 수많은 신하들과 백성들이 남송을 지키기 위하여 목숨을 버린 것과 비교해 보면, 정강의 변 당시 송휘종의 실정으로 국가가 막장이 되었기에 별다른 저항세력이 발호하지도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13] 이 때 유일하게 한명이 '송나라의 황성이 될 수 있는 건 조씨뿐이다.'라며 반대했는데 이 인물이 바로 훗날 악비에게 누명을 씌워 처형되게 만든 진회이다.[14] 당장 휘종의 폭정으로 무너진 현 시점조차 금나라가 흥미를 보일 정도로 거액을 제시할 수 있었다.[15] 즉위때 맹씨의 친필서한을 직접 읽으며 하늘에 고했다고 한다.[16] 여담으로 위초의 황제에 오른 장방창은 얼마 안가 스스로 탈출하여 남송에 귀순했는데, 남송입장에선 당시 그가 주도적으로 황제가 되고자 하지 않았음을 감안해 벼슬을 강등하고 멀리 귀양 보내는 정도로 참칭한 것 치고는 많이 봐준 처분을 내리려 했으나, 잠시나마 황제로 살던 것에 버릇이 들렸는지 스스로 귀순한 주제에 휘종의 후궁인 화국정공부인(華國靖恭夫人) 이씨와 간통으로 의심되는 짓을 하고 궁중에서 멋대로 술을 마시거나 황제만이 할 수 있는 사면령을 내리는 등의 참람된 행위를 여러번 저지르자 결국 고종이 직접 나서 자살을 명했다. 사실 후궁과의 간통 시도까지 있었음에도 자살로 끝냈으니 고종이 얼마나 참았는지 알 수 있는 대목. 후궁 이씨 역시 당연하게도 장방창과 마찬가지로 간통죄를 물어 품계를 강등하고 장형을 받게 한 뒤 병영 잡일담당으로 보내졌으나 얼마 못가 사망했다.[17] 이 작위는 일회용은 아니어서 이후에도 암군에게 종종 내려졌고, 즈엉녓레가 예종(쩐 9대)에게 이 작위를 받았다는 기록이 있다.[18] 다만 흠종도 휘종처럼 계약을 지키지 않아 금의 화를 사서 자초한 격이기 때문에 결백한 입장은 아니다.[19] 현재 북한 회령 고령진역 인근 주요 지역에 황제총이 두 곳이나 있는 등 상당수의 무덤이 남아있는데, 모두 오국성에서 생을 마감한 황족들의 무덤들이라는 설이 있다. 특히 이 가운데 황제총 두 곳은 오국성에서 죽은 휘종과 흠종의 무덤이라고 하는데, 오국성의 위치가 만주 하얼빈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에 단순히 지역 설화일 가능성이 크다. 증거라는 것이 중국 동전 등이 나왔다는 것인데 이런 유물은 만주에서도 출토되고 있다.[20] 물론 이건 원에서도 문제가 되어 양련진가는 사형된다.[21] 다만 송태종의 폐태자 조원좌의 후손이라 정통성은 떨어졌다.[22] 정충악비에서도 다른 여진인들이 포로가 된 송나라 사람들을 학대하고 능욕할 때 알리불만이 동참하지 않고 심란한 표정으로 그 광경을 지켜본다. 그리고 아무리 포로라도 황족들인데 예우는 갖춰야 하는 거 아니냐고 말한다.[23] 금사에 따르면 비단옷을 하사하는 정도였던 것 같다.[24] 한참 이전 시대이지만 비슷하게 후한의 헌제 유협이 황제 자리에서 물러나고 조위 정권에 의해 살해당했다는 소문이 촉한에 잘못 퍼졌었다. 이 역시 익주민들의 애국심을 고취시키고 유비의 황제 즉위를 합리화하기 위해서인지 몇 년이 지나도 소문이 정정되지 않았다. 아무리 당시에 정보가 느려도 헌제가 죽임을 당하지 않고 산양공으로 격하돼 살고 있음은 늦게라도 알았을 텐데도 촉에서는 계속 모른 척했다.[25] 원사엔 공수양작에 관한 기록이 없고 당시 북방 사인들과 쿠빌라이 칸의 관계에 비추어볼 때 애초에 남인인 공수에게 연성공의 작위를 잇게 했을 리가 없다는 의견도 존재한다[26] 다만 모두 휘종, 흠종보다는 억울한 면이 있다. 화제, 민제의 경우 이미 앞선 시기에 팔왕의 난이 벌어져 자기가 뭘 해보기도 전에 나라꼴은 엉망이었고 정통제는 환관 왕진을 총애하는 병크를 터뜨렸지만 그렇다고 휘종처럼 나라꼴을 거덜낸 것도 아니고 흠종처럼 판단력이 심각하게 나쁜 것도 아니었다. 발레리아누스도 샤푸르 1세의 계략에 속은 것일 뿐으로 포로로 잡힌 것 외엔 특별히 실책이라 할만한 것도 없다. 나라 말아먹은 책임은 휘종, 흠종이 더 크면 컸지 결코 작지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