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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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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후궁 제도의 특징3. 사례4. 나무위키문서가 개설된 후궁들
4.1. 한국의 후궁4.2. 중국의 후궁4.3. 일본의 후궁4.4. 오스만 제국의 후궁
5. 대중매체에서의 후궁6.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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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후궁()은 동아시아에서 군주 이외의 여자들 중 내명부작위를 받은 자들을 칭하는 말이다. 사실상 제왕의 . 비빈(妃嬪)[1], 빈어(嬪御), 잉첩(媵妾), 빈잉(嬪媵), 궁빈(宮嬪), 궁인(宮人)[2], 내관(內官)[3], 육궁(六宮)[4] 등으로도 불린다.

후궁의 본래 의미는 궁궐의 뒤꼍, 안쪽을 뜻하며, 후정(後庭)·내정(內庭)·내전(內殿)·내궁(內宮)·내조(內朝) 등을 쓰기도 한다. 제왕이 신하들과 함께 정사를 돌보고 의식을 행하는 영역의 다른 호칭인 외조(外朝)·외정(外庭) 등의 반대격으로, 제왕의 사적인 공간이다. 이곳에 제왕의 여인(처첩)이 거처했기에 제왕의 처와 첩 및 시녀(侍女)를 지칭하는 단어로도 쓰이게 됐다.

이후 같은 의미인 내전과 후궁을 분리하여 내전(中殿·中宮·中宮殿)을 제왕의 처(皇后·王妃)로, 후궁을 제왕의 첩을 지칭하는 단어로 사용한 사례가 빈번해 현재 한국의 사전에선 내전(中殿·中宮·中宮殿)을 제왕의 정궁으로, 후궁을 제왕의 측실로 정의하고 있다.

2. 후궁 제도의 특징

일부다처제관습이 존재했던 고대부터 있었던 제도였고, 더욱이 한 나라의 주인인 군주가 많은 여자들을 거느리는 것은 왕실이 가지는 위엄의 상징임과 동시에 군주의 유력 가문들과 동맹을 맺어 손쉽게 세력을 확장할 수 있는 도구이기도 했다. 여기에 더해 많은 후궁을 둬서 정비와 후궁의 가문들끼리 서로 견제하도록 유도함으로써 어느 한 귀족가문에만 권력이 집중되는 것을 방지하는 왕권강화 기능도 했다. 일부다처제를 시행하면 어떨까[5] 얘기를 꺼냈다가는 미친 놈(...) 취급당할 정도로[6] 일부일처제가 자리잡았던 고려에서도 왕은 예외라며 후궁을 잔뜩 들였다.[7]

또한 위엄과 동맹 외에 계승의 안정성을 위한 요소도 있었는데, 남과 여가 1대 1의 상황에서 자식 그중에서도 남자아들만을 얻는다는 것이 생각만큼 쉽게 보장되는 일이 아닌데다가,[8] 전근대의 높은 영아 사망률까지 결합되면, 일부일처제적장자 상속제의 결합은 왕위 계승의 법칙에서 굉장히 불안정한 면이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일부일처제를 엄격하게 지키고 사생아의 계승권을 인정하지 않은 유럽에서, 왕실귀족 가문들은 급작스러운 사고나 전쟁 같은 대단한 일이 아니라 후계자를 낳지 못했다는 이유로 허망하게 왕조의 대가 끊겨 버리는 일이 많았다.[9] 전쟁이나 합병 같은 것도 없었는데 독일 왕이 스페인의 왕을 겸한다는 식으로 어느 나라의 왕이 다른 나라의 왕 자리를 겸해서 순간적으로 그 시대에만 나라의 영토가 엄청 커지는 일이 종종 있었는데, 대부분 대가 끊기는 바람에 외국의 친척한테 계승권이 넘어가면서 일어났던 일이다. 안그래도 유럽 왕실은 국제결혼, 그리고 왕위 계승 전쟁이 잦았다.

이 후궁과 황후(왕비)를 아우르는 궁중 여관 제도를 통틀어서 내명부라 하는데, 이는 단지 황후와 후궁만이 속하는 것이 아니라 궁중업무를 보는 궁녀들을 포괄하는 체제다. 때문에 관념적으로는 모든 궁녀들은 군주의 여자들이므로 다 후궁이지만. 현실적으로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므로, 궁중업무가 아닌 군주의 첩으로서의 역할을 하는 여인들만 후궁이라고 하는 경우가 많다.[10] 보통 후궁제도라고 하면, 내명부 제도 중에서도 왕의 아내/에 관한 것만을 가리킨다(황후나 왕비도 포함).

후궁은 원칙적으로 남편인 군주가 죽은 다음에는 궁에 거주할 자격을 잃는다. 소생이 없을 경우 비구니가 되고, 소생이 있을 경우 그 집으로 나가 사는 게 일반적이다.[11] 당연하지만 후궁 자신의 아들이 군주로 즉위한 경우엔 예외다. 중국에선 이런 경우엔 황후에 준하는 지위를 받을 수 있었고 때로는 수렴청정도 할 수 있지만, 한국, 특히 적서 구분이 엄격한 조선에서는 그럴 수 없었다. 그리고 무덤보다 한 단계 낮은 으로, 사당보다 낮은 으로 불렀다. 후궁의 무덤은 묘(墓)라고 호칭하는 것이 원칙이고 일부 추숭을 받은 후궁의 경우에만 원(園)를 사용하였다. 무조건 원(園)으로 정하지 않았다. 일례로 왕비의 지위에 올랐었던 희빈 장씨의 무덤을 대빈원이 아니라 대빈묘라고 정한 것을 봐도 알 수가 있다. 또한 중궁인 왕비의 신주가 모셔진 장소를 전(殿)이라고 하는 것은 남편인 왕보다 먼저 사망했을 경우 왕비의 신주가 종묘에 먼저 들어갈 수가 없기 때문에 남편이 사망할 때까지 임시로 신주를 안치하는 혼전(魂殿)으로 사용하는 건물의 품계 중 가장 높은 전(殿)이라는 건물 위계를 부여한 것이지 사당의 이름으로 사용한 것이 아니다. 왕과 왕비의 사당은 종묘다. 따라서 후궁은 사당으로서 묘(廟, 종묘를 의미함)보다 낮은 궁(宮)이라는 택호를 받았다. 그것이 바로 청와대 옆의 육상궁을 비롯한 칠궁이다.

국왕의 생모로서 이렇게 어정쩡하게 살아있는 경우에 대한 칭호는 의외로 조선 후기에나 정립되었는데, 이조차도 원래는 사도세자를 잃고 아들 정조효장세자의 양자로서 대통을 잇게 되자 혜경궁 홍씨영조 사후 후궁도 아니고 대비도 아닌 어정쩡한 위치에 놓이는 바람에 정조가 궁여지책으로 '자궁(慈宮)'이라는 칭호를 급조 만들어서 왕비에 준하는 지위를 만들어준 것이 순조 즉위 후 생모인 수빈 박씨에게도 준용된 것이었다. 다만, 19세기 이후 조선이 망할 때까지 후궁이 낳은 왕위계승자가 등극을 하는 예는 없었고[12] 넓게 봐도 의민황태자 영왕의 생모 순헌황귀비 엄씨가 고작이었던데다 그 역시 조선의 제후국 예법과는 다른 황제국의 예법을 따랐기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임금의 후궁이 원자를 낳고 원자가 훗날 보위에 오르자 '자궁'으로 불린 예는 수빈 박씨 뿐이었다.

후궁은 사실 궁궐에 남아 있어도 남편이 죽으면 역할이 소멸되어 의미가 없어진거나 마찬가지이므로, 궁궐에 있어도 딱히 할 일이 없었다. 왕실의 재정 압박 문제도 있고, 후궁 개인으로서도 살 떨리는 궁중생활 때려치고 출가한 자식의 사가에서 편히 지내는 것이 훨씬 편한 인생이다.

황후나 왕비가 사망하거나 폐위될 경우, 명문가 출신이던가 세력이 있거나 주군의 총애를 받는 후궁이면 드물게나마 정식으로 황후나 왕비로 책봉되는 경우가 있었다. 중화제국의 경우는 아들이 황제가 되면 후궁이었어도 황태후가 된다.[13] 조선의 경우 성종의 후궁 숙의 윤씨가 당시 임신중임에 가점을 받아 정식 왕후로 승격되었고[14], 숙종의 후궁 희빈 장씨가 역시 원자를 낳아 정식 왕후가 되었지만 그녀의 사사 이후 숙종은 내명부 여인의 왕후 책봉을 금지시켜버렸다.

3. 사례

3.1. 한국사의 후궁 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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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중국사의 후궁 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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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일본사의 후궁 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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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베트남사의 후궁 제도

베트남의 가장 최근의 왕조인 응우옌 왕조(阮朝)에서는 황제의 정처가 살아 있을 때는 단순히 황귀비에 봉하였다가, 사망한 뒤에 황후로 추봉하였다. (마지막 황제 바오다이의 아내인 남프엉 황후는 제외)

3.5. 오스만 제국의 후궁 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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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유럽사로얄 미스트리스 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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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나무위키문서가 개설된 후궁들

4.1. 한국의 후궁

4.2. 중국의 후궁

4.3. 일본의 후궁

4.4. 오스만 제국의 후궁

5. 대중매체에서의 후궁

매체에서는 주로 역사물, 판타지물(동양 판타지), 로맨스 판타지, 로맨스 무협, 할리퀸 등에서 자주 등장하는 여캐 유형이다. 특히 궁중 로맨스, 궁중암투물 및 왕실 궁중물의 필수요소.

이런 장르에서는 왕의 총애 혹은 집안의 권세를 믿고 왕비에게 무례하게 굴거나 왕과 왕비를 이간질하려하는 후궁이 꼭 한명 이상 등장하지만, 사실 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왕비는 왕의 정실이자 국모로서 그 국가 내에서 가장 신분이 높은 여성이며 궁궐과 궁궐내의 여인들을 총관리할 수 있는 직책과 권세를 누릴 수 있었고, 왕비와 직접 맞대면이 가능한 신분은 오로지 왕, 선왕, 선왕의 왕비들, 왕들의 적손들뿐이었다.

왕도 왕비에게는 함부러 할 수 없는 판국에 위계질서에 따른 상하관계가 확실한 신분제 사회에서 왕비보다 서열이 훨씬 낮은 후궁이 왕비의 면전앞에서 왕비를 망신주고 왕에게 왕비를 험담하는 일은 일어날 수가 없다.

설령 왕이 후궁을 굉장히 총애한다고 할지라도, 왕비보다 후궁을 더 우선시하면 국가안팤로부터 여색에 미쳐 왕실의 기강을 무너뜨린 암군이라는 비판을 받고 신하들로 제지를 받았기 때문에 왕이 후궁에게 왕비보다도 더한 권세를 주는 일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일례로 효종의 후궁인 안빈 이씨는 본인의 친딸인 숙녕옹주에게 실수로 '너' 한번 했다가 사형당할 뻔한 반면, 숙종의 왕비였던 인현왕후는 모두가 보는 앞에서 후궁인 희빈 장씨를 매질해도 비난받지 않았고 오히려 사관에게 왕실의 기강을 잡았다는 칭찬을 받았다. 후궁은 왕비보다 화려하게 입을 수도 없었고 왕비가 시키는 일은 무르거나 거절하는 일 없이 즉각 해야했다고 한다. 경종과 숙종은 후궁인 경빈 박씨와 희빈 장씨를 굉장히 총애해 신하들로부터 미색을 경계하라는 상소를 받은 적도 있었다.

하물며 왕비보다 품계는 낮아도 엄연히 왕의 부인으로 인정받기라도 했던 후궁도 이정도인데, 왕의 부인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그냥 사통관계 취급이었던 료얄 미스트리스는 이보다 훨씬 취급이 나빴다.

물론 중국에 경우는 이와 다르다. 중국 또한 유교 사상을 수용 하였지만 조선보다는 덜 하였고, 사실상 중국에 존재했던 통일 왕조중 한족 왕조보다 이민족의 왕조가 더 많았기에[15], 적장자를 우선시 하였지만 서자라도 능력이 있으면 적자를 제치고 황위에 오를 수 있었으며, 후궁 또한 본인 소생의 황자가 황위에 오르면 정실인 황후와 함께 황태후로 봉해지고 사후 황후로 추존되어 황제와 합장하는 영광을 누릴 수 있었다[16]. 이 때문에 실제로도 자신 소생의 황자를 황위에 올려 태후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중국 황실에선 조선보다 더한 후궁들의 암투가 잦았으며, 실제로 황태후의 지위에 오른 사람들중 후궁 출신이 황후 출신보다 더 많았다.

5.1. 가상 인물

※ 남자 후궁 캐릭터는 남총 문서에, 정부 캐릭터는 로얄 미스트리스 문서에 기재한다.

6. 관련 문서



[1] 고려 후기 소위 원 간섭기에 제후국 체제로 격하된 게 조선까지 계속되어 비(妃)를 왕의 정실부인의 작위로 쓴 한국 왕조에선 비빈의 정의가 조금 바뀌어 왕비와 빈 이하 모든 후궁을 아우르는 단어로 쓰이거나, 왕의 정궁인 왕비와 세자의 정궁인 세자빈을 통합한 단어로도 쓰였다. 중국황실과 옛 국가, 고전의 내용을 인용할 때는 후궁의 의미를 띤다.[2] 조선에서 궁인은 후궁과 왕실 시녀를 모두 아우른다. 그러나 궁중의 여인을 총칭하는 궁녀가 왕실 시녀의 호칭으로 정의되면서 궁녀의 같은 말인 궁인과 내인(內人: 나인)도 왕실 시녀의 호칭으로 이해되고 있다.[3] 후궁을 내관, 시녀를 궁관으로 구별해 부르기도 했다. 현대 국어 사전에는 내관은 내시를 지칭하는 단어로, 궁관은 궁내직 혹은 동궁 소속 관원으로 정의되고 있다.[4] 《예기(禮記)》에 “옛날 천자(天子)의 후(后)는 6궁(六宮)·3부인(三夫人)·9빈(九嬪)·27세부(二十七世婦)·81어처(八十一御妻)를 세웠다.”고 한 것에서 비롯된다. 육궁에 정궁이 포함되어 있어 내명부 후비(后妃: 정궁+후궁)의 다른 말로도 쓰인다.[5] 당시 고려몽골 제국과의 오랜 여몽전쟁으로 인한 후유증으로 남성이 너무 부족해서 결혼을 못하는 여성이 많았다. 여자가 결혼을 못한다는 건 전근대 사회에선 생존의 위협이 된다.[6] 대신 박유가 "일부다처제를 시행하면 어떻겠냐"고 왕에게 건의했다가 저잣거리에서 부녀자들에게 손가락질을 당했다고 한다. 한국사 공부를 할 때 고려는 여성권이 강했다는 사례의 단골로 나오는 일화.[7] 따지고 보면 고려 시대 부마몇 사례를 빼면 다 왕족이었기 때문에, 부마가 첩을 들이거나 개가하는 것을 금지했던 조선과도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다.[8] 당장 현대에도 각종 고부갈등과 고민을 낳는 이유가 된다는 걸 상기하자.[9] 특히 서양 군주는 그 자신의 옥체 보존이 무엇보다 최우선인 동양 군주와 다르게 전쟁 같은 일이 생기면 친정해서 싸워야 할 의무가 있었기 때문에 전쟁에 나갔다가 전사하고 대가 끊기는 일이 비일비재했다.[10] 조선을 기준으로 후궁들도 궁에 살면서 맡은 임무가 있는데, 대표적인 것이 군주 부부의 잠자리 준비를 하는 것이었다. 그 외에도 왕실 제사나 손님 접객 같은 임무를 가지고 있어서 엄연한 관료사회의 모습을 보여주었다.[11] 다만 명나라, 청나라의 경우처럼 선황의 후궁이라도 자녕궁, 수강궁같은 태후, 태비궁으로 옮겨서 살게 하는 등의 경우도 있다.[12] 워낙 남자 후손이 귀해진 탓이었다. 헌종은 요절한 세자의 아들, 철종고종은 선왕이 아들이 하나도 없어 방계에서 데려온 친척, 칭제 후 마지막 황제인 순종은 그나마 정비 소생의 유일하게 살아남은 적자였다.[13] 정확히는 선대 황제의 황후였던 황태후 1과, 새로 즉위한 황제의 생모인 후궁 출신 황태후 2, 이렇게 두 명의 황태후를 동시에 세울 수 있었다. 명나라에서는 선대 황제의 황후를 '성후황태후'(聖后皇太后), 새로 즉위한 황제의 친모를 '국모황태후'(國母皇太后)라고 칭했으며, 청나라에서는 전자를 '모후황태후'(母后皇太后), 후자를 '성모황태후'(聖母皇太后)라고 칭했다. 청나라 말기의 서태후가 이렇게 성모황태후로서 태후가 된 사람.(이때 정비로서 모후황태후가 된 사람은 효정현황후였다. 서태후는 거처가 자금성 서쪽에 있어서 서태후로 불렸고, 효정현황후는 동쪽에 있어서 동태후로 불렸다.)[14] 그리고 실제로 아들을 낳아 윤씨의 아들은 문제없이 원자가 되었다. 문제는 왕후가 된 윤씨가 성종과의 불화 끝에 폐위되어 사사당하고, 이후 그 원자가 어머니의 복수라는 명목으로 여러 사람의 목숨을 초개같이 날린 한국사 희대의 암군 겸 폭군이 될 줄 이때는 아무도 몰랐다는 것이었다.[15] 수,당,남북조시대의 북위, 북제같은 경우 선비족 왕조였으며, 원나라때는 몽골족이, 청나라때는 만주족이 세운 왕조였다.[16] 다만 황후 출신 태후와 후궁 출신 태후가 동시에 존재하였을땐 황후 출신 태후가 더 높은 대우를 받았다. 이에 대한 예가 동태후서태후.[17] 당나라를 모티브로 한 가상의 나라가 배경인 원작 소설에서는 대략 60여명(...)의 후궁이, 청나라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에서는 25명의 후궁이 등장한다.[18] 인수황태후 오아씨[19] 원작에서는 후궁 출신 황후로 나오지만, 가장 유명한 미디어믹스인 드라마에서는 후궁이였던 적이 없으며 작품 시작 시점 혹은 그 직전에 황후로 책봉된다.[20] 윤례의 생모.[21] 원작에서만 등장하는 캐릭터.[22] 현비 묘씨와 함께 총애를 독차지하는 순원황후를 질투했다.[23] 순원황후에게 2시진(4시간) 동안 꿇어앉는 벌을 받고 유산한 후궁.[24] 드라마에 나오는 흔상재의 원형 중 하나. 원작에서의 행보가 드라마 초반부의 흔상재의 행적과 유사하다. 원작 후반부에 아무런 잘못도 저지르지 않았음에도 견환에 의해 벌을 받아 냉궁에 갇힌다.[25] 드라마에 나오는 단비 제월빈의 원형 중 하나. 작품에 등장하는 모든 후궁들 중 가장 선량한 인물이자 모든 미디어믹스를 통틀어서 4~6명 밖에 없는 황제를 진심으로 사랑한 여자 중 한명이다.[26] 원작에서만 등장하는 캐릭터. 황제에게 견환의 대역으로서 사랑받았던 후궁들 중 한명이다. 견환의 대역들 중에서는 가장 큰 총애를 받았다.[27] 원작에서만 등장하는 캐릭터. 모용 세란여동생.[28] 원작에서만 등장하는 캐릭터. 견환의 대역인 위균과 견환의 나이를 비교하면서 견환이 늙었다며 조롱했다.[29] 원작에서만 등장하는 캐릭터. 견환의 입궁 동기이자 온화한 성품의 소유자.[30] 드라마에 나오는 흔상재의 원형 중 하나. 같은 궁을 쓰던 기귀인의 괴롭힘을 견디다 못해 자청해서 견환의 편이 되어 도움을 주었다.[31] 드라마에 나오는 부찰 의흔의 원형 중 하나.[32] 중국 드라마 옹정황제의 여인의 후속작.[33] 숭경황태후 뉴호록씨[34] 길태빈.[35] 숭경황태후 뉴호록씨[36] 설정상 인도의 한왕의 후궁이었지만 본처에게 쫒겨나 외롭게 죽고 유령이 되었다.[37] 이들 모두 형식상으로는 티글블무드 보른의 연인, 즉 후궁으로 분류한다. 정실은 레긴이다.[38] 등장 당시에는 성빈이었으며, 홍상학 부녀가 몰락한 후에 중전이 되었다.[39] 작품 마지막에는 그 동안의 죄가 전부 밝혀져 폐위되었다.[40] 처음에는 무수리였지만 어쩌다 승은을 입은 후에는 임신하지 않았는데도(나중에 사고로 유산하고 나서야 임신 사실을 알게 되었다. 워낙 초기라 복자 본인도 몰랐던 듯.) 숙원 첩지를 받았다. 혜원옹주를 구한 공과 함께 삼간택이 다가오면서 소의로 봉해졌고, 성빈이 중전이 된 후에는 유일한 후궁인 혜빈이 되었다.[41] 회귀 전에는 지은 아이린느 샤나 카스티나에게 밀려 황비가 되었지만 회귀 후에는 황후가 된다.[42] 왕자를 낳은 후 우이가 군후가 되면서 차비로 격하되었지만 나중에 우이가 사라지면서 다시 군후가 되었다.[43] 외전에서 그동안 저지른 간통이 밝혀져 내명부에서 제명당한다.[44] 외전에서 유진과 이혼해 내명부에서 제명된 후, 문관이 되어서 다른 남자와 혼인한다.[45] 우온이 아들을 낳은 뒤에 정식 군후가 됐지만, 2년이 되지 않아 사라진다.[46] 호겸(신대욱)과 신유영의 어머니.[47] 광해군이 즉위하면서 제주도 유배에서 풀려난 후에 노수눌(盧守訥)의 양녀로 들어가 가례를 올렸다. 노수눌은 실존인물로, 인목왕후의 외가인 광주 노씨 집안의 사람이다.[48] 원래는 윤임과 정혼했으나 그와 파혼하고 아버지에 의해 연산군의 후궁 숙원이 되었다.[49] 서리꽃에서 롱희를 측비라고 소개한 것, 불환곡에서는 1황자 운의 결혼기념으로 송하를 점령국에서 품과 동시에 롱희를 귀비로 책봉하였다.[50] 작중 시점에서는 이미 고인.[51] 회상에서 이름만 언급되었고 봉오제 사건 이후 황제의 후궁들 중 비와 빈 품계를 받은 이가 롱희 밖에 없어 새 비빈을 들였다는것을 보면 사망했을 가능성이 크다.[52] 현 황제와 오륜공주의 모친으로 작중 시점에서 이미 고인이다.[53] 작품 최후반엔 황후로 즉위하고 작약만가 본편에선 태후가 된다.[54] 출신이 비천하여 성이 없고, 품계 또한 없다. 작중 황제의 후궁들 중 품계가 있는 이는 리빈 하나뿐인데 이 경우는 황제가 불순한 목적으로 품계를 준 것이다. 다른 후궁들은 황제가 관심을 두지 않아 품계가 없으며, 황제가 유일하게 총애하는 삼미랑은 출신이 천한데다 내명부를 관장하는 태후와 사이가 나빠 품계를 받지 못했다.[55] 작중에서는 고인이지만 아들이 서자로 밝혀졌다.[56] 선황제의 후궁 중 하나이자 틀라의 친모.[57] 명나라 공주 출신이다.[58] 다만 해당 작품은 BL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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