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서자(庶子)는 좁은 의미로는 양인 신분의 첩 소생의 아들을 말한다. 첩 소생의 딸은 '서녀(庶女)'라고 한다. 반댓말은 정실부인 소생의 아들인 '적자(嫡子)'[1] 정실부인 소생의 딸은 '적녀(嫡女)'라고 한다. 천민 신분의 첩 소생의 아들은 '얼자'라고 부른다.2. 설명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는 첩이라는 제도가 법적으로 무효화된 관계로 이후에는 법적으로 혼외 출생자로 취급한다. 사생아와는 다른데 사생아는 정식 부부가 아닌 남녀 사이의 성관계로 출생한 아이를 뜻하며 성관계가 강압에 의한 것인지 합의에 의한 것인지는 따지지 않는다. 준혼인관계에 있는 첩에게서 낳은 서자녀와는 미묘하게 구분된다.
서자녀 입장에서 아버지의 정실부인은 적모(嫡母)라고 한다. 적모와 서자녀의 관계를 계모와 자녀 관계와 혼동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엄연히 다르다. 적모-서자녀 관계는 계모자 관계와 달리 서자녀의 생모(아버지의 첩)가 생존한 상태에서도 성립할 뿐 아니라, 계자는 생모가 아버지의 정실인 이상 엄연한 적자녀로 대우받는다는 데에서 서자녀와는 취급이 다르다.
과거에는 적모에게 서자녀에 대하여 생모에 준하는 일정한 권리가 주어졌으나, 적모서자녀 관계든 계모자녀 관계든 현대 가족법 체계하에서는 친자관계가 없는 단순한 인척(姻戚)일 뿐이다. 강제로 법적 친자관계를 성립시키려면 입양을 하거나 처음부터 적모의 자녀로 출생신고를 하면 된다.[2]
서구권에서는 'illegitimate child'나 'love child', 'natural child'(특히 스코틀랜드 쪽에서 이렇게 부른다) 등의 개념이 서자와 비슷하다. 다만 일대일대응은 아닌데, 동아시아의 서자는 상속권 등에서 여러 불이익을 받을지언정, 법적으로는 엄연히 친자녀 취급을 받는(legitimate)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일부 중국계 소설가들은 'concubine's child'라는 번역어로 서자를 표현하기도 한다. 'legitimate'에는 '적출로 인정하다' 또는 '자식으로 인지하다'라는 의미도 있는데, 부모나 특별히 군주 및 교황에 의해서 특별히 적출로 인정받는 경우가 서자와 가장 가깝다. 이런 경우 계승권을 가질 수 있긴 하지만 아무래도 계승에 반발이 심한 것은 어쩔 수 없다. 정복왕 윌리엄은 부친에 의해 적출로 인정받은 경우[3]이며, 마지막 부르고뉴 공작인 용담공 샤를의 배다른 형 앙투안 드 부르고뉴는 상위 군주인 프랑스 국왕 샤를 8세에 의해 말년에 적출로 인정받고 성 미셸 기사단원으로 서임받기도 하는 등의 경우가 있었으나 아무래도 이런 사례가 그리 흔하지는 않은 편.
2.1. 적자 vs 서자
2.1.1. 동아시아의 경우
적자와 서자 중 누가 더 높은지 궁금해 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적자가 더 높다. 사대부 가문의 적자와 적녀는 엄연한 양반이었지만 서자와 서녀는 중인 신분이었다. 애초에 소생에 따라서 서열과 신분 자체가 다르다.족보에도 적자, 적녀(사위명)>서자, 서녀(사위명) 순으로 기재했다. 때문에 적자가 서자를 마음대로 부려먹는 일이 흔했다. 왕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적자인 대군과 적녀인 공주의 품계는 무품 상이고 서자인 군과 서녀인 옹주의 품계는 무품 하였다. 엄연히 왕실에서도 적녀의 서열이 서자보다 높았던 것이다.
다만 적자가 가문을 계승할 능력이 없거나 혹은 태어나지 않을 경우 서자가 가문을 계승할 수 있다. 왕실에서도 왕위를 계승할 적자가 없다면 서자가 세자가 될 수도 있었다.[4] 만약 서자인 군이 왕의 명으로 세자가 된다면 아무리 적자라도 세자보다는 서열이 훨씬 낮았다. 이러한 경우는 사대부 가문도 마찬가지로, 적자가 없어서 서자가 가문의 가장이 된다면 적녀도 그 서자보다 아래로 취급된다.[5]
다만 왕가든 사대부 가문이든 일단 가문을 계승하려면 중전 또는 정실부인의 양자로 입적시켜 신분을 적자로 세탁하긴 해야 했다.[6] 가문을 이었어도 뒤에서든 앞에서든 서자라고 폄하를 당하는 것은 매한가지. 물론 서자 출신이라도 왕이라면 얘기가 다르다. 권력을 가진 왕을 대상으로 그런 얘기를 했다간 모가지가 날아갈 수도 있으니까. 그래서 영조는 어머니 숙빈 최씨의 출신 성분에 대해 평생 콤플렉스를 갖고 살았고 신하들도 이를 잘 알았기 때문에, 왕 앞에서 그 누구도 "천한 어미", "종년", "첩의 자식" 등등의 소리를 함부로 꺼내지 못했다.
이와는 반대로 동아시아 왕위계승에서도 아들보다 딸이 우선한 사례가 있는데, 신라 하대의 경우 헌강왕은 적자가 없고 서자 효공왕만 있었는데, 효공왕은 숙부 정강왕은 물론 고모인 진성여왕보다도 계승권이 밀렸다. 결국 먼저 즉위한 진성여왕까지 아들이 없자 어쩔 수 없이 돌고 돌아서 효공왕에게 왕위가 돌아오긴 했지만 이조차도 상당히 문제가 많았던 정황이 많이 드러나고,[7] 효공왕 다음은 아예 왕가가 김씨에서 박씨로 넘어가버린다. 다만 이는 신라에서는 이전에도 선덕여왕과 진덕여왕의 사례와 같이 여성도 왕위를 계승할 수 있다는 특수성도 고려해야한다. 또한 일본에서는 쇼무 덴노의 적장녀인 아베노 내친왕이 서자 출신인 이복 형제 아사카 친왕을 제치고 고켄 덴노로 즉위한 사례가 있다. 참고로 고켄 덴노는 일본 최초의 황태녀이기도 하다.
2.1.2. 유럽의 경우
여기까지는 동아시아의 기준이고, 유럽에서는 적자와 서자를 비교할 수조차 없다. 기독교의 영향으로 서양에서는 일부일처제가 보편화되어서 첩 제도가 애초에 없었고, 서자녀 개념도 당연히 없었다. 아예 없는 건 아니고 로얄 미스트리스라는 개념이 있긴 하지만, 이걸 동북아시아의 후궁에 대응시키기에는 차이가 너무 컸다. 동아시아에서 후궁들은 엄연히 공식적으로 군주의 첩으로 인정된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상황에 따라 그 자식이 보위에 오를 수도 있었고, 그래서 처음부터 높은 품계로 들어오는 후궁이면 아예 중전의 친정 가문에 맞먹는 영향력을 가진 명문가의 여식이 간택되기도 했고,[8] 경우에 따라서는 기존의 중전이 사망하면 후궁에서 중전으로 승급되는 사례도 종종 있었다.# 그러나 서양의 로얄 미스트리스는 어디까지나 비공식적으로 왕의 '말동무'나 하라고 들어온 사람들이므로, 궁중 내에서의 영향력은 컸을지 몰라도 공식적으로는 이들만을 위한 법적인 예우같은 건 없었다. 그래서 이들은 순전히 정부로만 취급되었고, 공식적으로는 떳떳한 신분도 아니므로 대체로는 귀족 집안의 유부녀를 로얄 미스트리스로 들이고는 본인이나 그 남편에게 적당한 귀족 작위 하나 주는 식으로 무마하는 식이었다[9]. 그래서 정부든 애인이든 원나잇이든 혼외자녀들은 무조건 사생아로 취급했고, 동서양을 막론하고 사생아들은 자녀로 인정조차 못 받았기에, 서양 왕실의 사생아들은 어머니가 왕비가 되지 않는 이상 결코 왕족이 될 수 없고 왕위계승권도 주어지지 않았다. 극히 드물게 윌리엄 1세 같은 예외적인 사례도 있었지만 이 경우에도 사생아 출신 꼬리표가 오랫동안 따라다녔다.첩과 서자는 정실부인과 적자보다 대우가 낮을 뿐 법적으로 유효하고 정당한 혼인 행위이지만, 정부와 사생아는 법적으로 유효한 관계가 결코 아니다. 왕위 계승권도 살리카법을 칼같이 지키지 않는다면 적장자>적자>적녀>(사생아는 왕위 계승권 그런 거 없다)>방계 왕족 순이었다.[10]
대표적인 예가 영국 빅토리아 여왕이다. 백부 윌리엄 4세가 자식은 많았지만 전부 사생아였기 때문에 왕위 계승권이 빅토리아에게 갔다. 유럽 역사에서 여왕의 이복 오빠/남동생이 언급된다면 거의 대다수가 사생아라고 봐도 좋다. 영국 무정부시대 때도 왕의 적장녀와 왕의 남자 조카 중에 누가 왕이 되어야 하는지를 두고 싸웠지 사생아가 왕위 계승권을 주장하지 않았다.[11] 예외는 몇 없다. 포르투갈 왕정 복고 전쟁을 통해 왕위를 획득한 브라간사 가문은 초대 브라간사 공작이 왕의 사생아였기 때문에 왕위를 획득한 것이었지만, 전쟁을 선포한 대상이 모계로 왕위를 상속받았던 스페인 왕 펠리페 2세의 손자, 펠리페 4세였고, 포르투갈 귀족 중 대표였기에 선출된 것이었다. 즉, 왕의 사생아를 시조로 하는 귀족 가문이 추대를 통해 왕가가 된 사례가 있긴 하지만 이는 지극히 예외적인 경우에 속한다. 윌리엄 1세처럼 사생아로서 작위(노르망디 공작)를 계승한 예외는 줄곧 견제와 반란을 겪는 게 보통이었다.
물론 동아시아의 서자도 그랬지만 서양의 사생아라도 아버지 입장에서 본인 자식이므로 부성애 차원에서라도 이들을 많이 챙겨줬고 서양권에서도 왕위계승까진 힘들어도 꽤 대우받은 정도까진 흔했다. 예를 들어 프랑스의 태양왕 루이 14세는 자신의 사생아인 멘 공작 루이 오귀스트나 툴루즈 백작 루이 알렉상드르를 총애했고, 이들을 왕실 적통과 혼인시켜서 가문의 일원으로 편입시켜 주려고 했다. 왕위는 적증손인 루이 15세에게 물려줬지만, 이들에게 나이 어린 루이 15세의 섭정을 맡기라는 유언도 남긴다.
20세기 이후부터는 일부 유럽 왕실에서 사생아의 상속권을 인정하기 시작했고, 21세기 이후에는 왕위계승권은 주지 않더라도 최소한 사생아를 왕실의 일원으로 인정하고 있다.
2.1.3. 이슬람 문화권의 경우
이슬람 문화권에서는 부인들이 모두 동등하므로 기본적으로는 출생 순서(아들 중에서)였지만, 나중에는 으뜸 부인이라는 개념이 생겨서 적자-서자와 비슷한 현상이 나타나기는 했다.3. 장남 이외의 모든 아들
정실(본처) 소생의 첫째 아들을 제외한 나머지 아들들을 모두 일컫는 말. 이 용법으로 쓸 때 '적자(嫡子)=장자'가 되고, 적자라는 표현 자체가 이미 장자를 가리키고 있으므로 적장자(嫡長子)처럼 굳이 장자라는 표현을 덧붙이지 않는다. 유교의 종법(宗法)을 엄격하게 적용하면 적자와 서자의 구분은 이 구분에 따르는 것이었다. 보통 서자라 하면 첩 소생의 아들이라고만 알지 장남 외의 아들들을 뜻하는지 모른다. 때문에 정실 소생의 다른 아들들을 1의 서자와 구분하기 위해 중자(衆子)라고 한다.이러한 혼란스러운 표현들이 예송논쟁을 격화시키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예송논쟁 당시 중자칭서(衆子稱庶)라 하여 중자는 서자라고 칭한다는 표현이 나오는데, 조선시대에 이미 서자라는 표현은 첩의 아들을 일컫는 표현으로 대중화되어 있었기 때문에 효종을 서자라고 가리킨 것은 국왕 정통성 비하라는 명목으로 또 하나의 정치적 논란거리가 되었다. 따지고 보면 중국으로부터 수입된 유교 사상이 조선 중기에도 온전히 정착하여 뿌리내리지 못했음을 보여주는 일종의 해프닝인 셈. 다르게 보면 수입된 사상이 현실과 얼마나 충돌하는지를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단군신화에서 환웅이 환인의 서자라는 말은 항목 1의 뜻이 아닌 이 뜻이다. 실제로 한자도 똑같기 때문에 특정인물이 서자로 기록되어 있을 경우 문맥이나 가계도를 제대로 보지 않으면 위의 뜻으로 혼동할 수 있다. 환웅을 환인의 서자라고 하는 걸 보아 환웅은 환인의 장자가 아니며 환웅에게 형이 최소 1명 이상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는 신화의 전개상으로도 당연한 설정인데, 환인은 하늘을 다스리는 신이며 당연히 환인의 장자는 환인을 이어서 하늘을 다스려야 하므로, 하늘을 떠나서 지상을 다스릴 환웅은 차남 이하여야 하기 때문이다.[12]
[1] 이중 '적1남'이라고 기록이 되어있는 것은 적장자를 뜻한다.[2] 단, 이 경우에는 출생신고로서 효력이 발생하지 않고 입양의 요건이 갖춰진 경우에 한해 입양신고로서 효력이 있다. 즉, 친자녀로 출생신고를 하고 가족관계등록부에 그렇게 기재되더라도 실제로 친자녀가 되는 것은 아니고 추후 언제든지 양자녀관계로 바로잡아야 하는 것이다.[3] 유일한 아들이었기에 성지순례를 떠나기 전에 돌아오지 못할 것을 대비해 적출로 인정하고 후계자로 지명했다.[4] 대표적으로 광해군. 임진왜란 시기, 백성들이 잡아다 왜군에게 바칠 정도로 개차반 망나니였던 동복형 임해군을 제치고 공석이었던 세자 자리에 책봉되었고, 이후 인목왕후에게서 영창대군이 태어났음에도 광해군과 나이차가 무려 30살이 넘게 차이가 났으며(광해군 즉위 당시 영창대군은 고작 세 살이었다.) 지지기반도 광해군 쪽이 압도적이었기에 세자 자리를 유지해 왕위를 계승했다.[5] 다만 왕실과 달리 사대부 가문은 계승이 힘들었다. 원칙적으로는 적자가 없으면 가능했지만 서얼금고법으로 인해 과거를 보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외부에서 들인 양자에게 밀리는 경우가 많았다. 물론 퇴계 이황이나 율곡 이이와 그의 서녀와 결혼한 김집과 같이 자신의 서자가 가문을 물려 받는 것을 꺼리지 않는 사대부도 있었지만 그런 경우는 위의 사례 때문에 극소수였다. 퇴계 이황은 적서를 호적에 구분하지 않게 했고, 김집은 제자인 송시열 등의 서인 신하들이 김집의 서자들이 적자 취급을 받게 해달라는 상소를 올려서 과거에 응시가 가능했지만 율곡 이이의 후손들은 서자로서 가문을 물려받았지만 명문가들이 혼인을 기피해 명문가에서 탈락됐다.[6] 광해군도 의인왕후가 직접 양자로 들이는 과정을 거쳐 세자로 책봉되었다. 애초에 후궁의 자녀들이 공식적으로는 중전의 자녀로 간주된 것도 이 문제를 회피하려는 목적 때문이었다.[7] 이미 진성여왕 후기가 되면 박예겸, 신덕왕 등 박씨가 왕위 계승의 명분을 쌓기 시작한다. 즉 효공왕은 단지 거쳐가는 징검다리였을 뿐인 것이다.[8] 대표적으로 정조의 후궁인 원빈 홍씨가 있다. 그녀의 집안 자체도 조선 시대의 대표적인 유력 가문인 남양 홍씨였지만, 더욱이 그 오빠인 홍국영이 당대 최고의 권세가이자 정조의 총신이어서 처음부터 정1품인 빈에 책봉되고 사실상 중전에 준하는 대접을 받았다.[9] 대표적으로 루이 14세의 로얄 미스트리스들 중 한 명인 몽테스팡 후작부인이 있다.[10] 다만 귀천상혼 가문과 같이 방계 왕족과의 동등결혼이 인정되는 경우에는 본인은 사생아였어도 후손이 직계가 단절되어서 왕이 될 수는 있지만 어디까지나 본인이 아닌 본인의 배우자를 거쳐서 왕위를 물려받은 것이다.[11] 참고로 마틸다의 이복 오라비인 로버트는 왕위쟁탈전에서 누이 마틸다의 편을 들었다.[12] 단, 예수보다 먼저 태어난 미카엘을 비롯한 대천사들과 천사들을 야훼의 자식들이자 예수의 형이라고 보면 예수는 위에 형이 수두룩한 막내라고 볼 수도 있겠다. 다만 교리적으로는 모든 인간은 야훼의 자식인 셈이라 또 미묘해진다. 거기다 삼위일체론까지 겸해서 보면 예수와 야훼의 관계는 부자관계 겸 동일인물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