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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22 19:20:36

숙빈 최씨

조선의 후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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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89236A><colcolor=#ffd400>
조선 숙종의 후궁
화경숙빈 최씨 | 和敬淑嬪 崔氏
파일:소령원.jpg
소령원 전경
출생 1670년 12월 17일
한성부 서북부 여경방
(現 서울특별시 은평구)
사망 1718년 4월 9일 (향년 47세)
한성부 북부 순화방 창의궁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효자로 19)
능묘 소령묘(昭寧墓)
→ 소령원(昭寧園)[1]
재위기간 조선 숙원
1693년 5월 30일 ~ 1694년 7월 23일
조선 숙의
1694년 7월 23일 ~ 1695년 7월 18일
조선 귀인
1695년 7월 18일 ~ 1699년 12월 13일
조선 숙빈
1699년 12월 13일 ~ 1718년 4월 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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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89236A><colcolor=#ffd400> 본관 해주 최씨
부모 부친 - 대광보국숭록대부 최효원
(大匡輔國崇祿大夫 崔孝元)
모친 - 정경부인 남양 홍씨
(貞敬夫人 南陽 洪氏)
형제자매 1남 2녀 중 차녀
배우자 숙종
자녀
슬하 3남 [ 펼치기 · 접기 ]
장남 - 이영수(李永壽, 1693 ~ 1694)
차남 - 영조(英祖, 1694 ~ 1776)
3남 - 왕자(王子, 1698 ~ 1698)
봉작 숙원(淑媛) → 숙의(淑儀)
→ 귀인(貴人) → 숙빈(淑嬪)
당호 보경당(寶慶堂)
사당 숙빈묘(淑嬪廟)
→ 육상묘(毓祥廟)
육상궁(毓祥宮)
존호 휘덕안순수복(徽德安純綏福)
시호 화경숙빈(和敬淑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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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2.1. 출신2.2. 후궁이 되다2.3. 말년2.4. 묘소
3. 가계
3.1. 친가(해주 최씨)3.2. 외가(남양 홍씨)3.3. 친가(조선/왕실)3.4. 배우자 / 자녀 (가계)
4. 여담5. 대중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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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숙종후궁이자 영조의 어머니이다. 한미한 집안에서 태어나 왕의 후궁이 되고, 훗날 왕의 어머니가 되는 일명 조선판 신데렐라. 사후 아들 영조로부터 '화경'이라는 시호를 받고 추증되어 화경숙빈으로 불리거나 궁호인 '육상궁(毓祥宮)'으로 불렸다.

영조 이후 철종까지 이어지던 숙빈의 후손은 철종이 후사를 보지 못함으로써 끊어졌다.[2] 고종은 인조인열왕후의 3남(인평대군)의 직계 후손이다.

2. 생애

2.1. 출신

아버지는 영의정으로 추증된 최효원(崔孝元)이며 어머니는 홍계남(洪繼南)의 딸이다. 출신이 불분명하여 여러가지 설이 많은데 가장 유명한 이야기는 궁중에서 허드렛일을 하는 무수리였다가 숙종의 눈에 띄어 승은을 입고 후궁이 되었다는 이야기다.

고종영조가 말하기를 숙빈 최씨는 침방의 궁녀였다며 무수리 설을 부정했는데 영조가 어머니의 신분에 대한 컴플렉스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지어낸 이야기일 가능성이 있다. 침방 궁녀는 내명부에서 높은 편에 속하는데 지밀 궁녀 바로 다음이 침방 궁녀. 다만 실제로는 궁녀의 대부분이 천민 신분인 공노비 출신이었으므로 개연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궁녀보다 낮은 무수리이거나 천민 출생에 심지어 결혼을 했다가 남편과 사별한 기혼녀였다는 주장도 있지만 역사적 기록이 없어서 근거는 없다. 무수리는 궁녀와 달리 궁에만 머물지 않고 출퇴근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러한 어머니의 불확실한 출신 신분 때문에 영조 즉위 후 영조에게는 아버지가 다른 형이 있다는 소문, 심지어 영조가 숙종의 아들이 아니라 전 남편의 아들이라는 소문까지 돌았기에 영조가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 물론 영조는 숙종과 숙빈 최씨의 장남이 아니라 차남이므로 후궁 첩지를 받은 후에 낳은 영조가 숙종의 아들이 아니라는 주장은 말이 안 된다. 영조의 친형은 요절했는데 그래서 영조가 숙빈 최씨의 차남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3]

그러던 어느 날 최씨는 숙종의 눈에 띄어 승은을 입었다. 이문정의 수문록에 따르면 인현왕후가 폐서인이 되어 사가에 나가서 살던 시절 인현왕후의 생일에 인현왕후를 모셨던 적이 있는 최씨가 인현왕후를 위한 기원을 올리던 모습을 마침 근처를 지나가던 숙종이 목격하는 바람에 눈에 띄어 후궁이 되었다고 한다.

다른 기록에서는 인현왕후가 쫓겨나간 사가에서 어느 날 밤 홀로 바느질을 하고 있다가 후원을 지나가던 숙종이 숙빈 최씨의 뒤태가 아름다워 들어가서 만났다고 한다. 숙빈 최씨는 첫째 이후로도 숙종의 아이를 2명 더 낳았는데 숙종의 후궁 중 가장 회임을 많이 한 후궁이다.[4] 자손이 많지 않은 숙종에게서 아이를 많이 본 편이라 그만큼 총애를 받았다고 여김이 옳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아들은 경종, 영조만 살아남은 손이 귀한 숙종에게서 낳았다 하면 아들인데 총애를 안 할 리가 없다.

또다른 설로는 전염병으로 고아가 된 최씨가 산신령의 계시를 받고 나주 목사에게 거둬졌는데, 목사의 부인이 인현왕후의 친척이었기에 인현왕후가 입궁할 때 같이 입궁하였다는 것이다.

또다른 설로는 인현왕후의 부친인 민유중영광군수로 부임하는 길에 다리 옆에서 최씨를 거뒀으며 인현왕후의 입궁시에 나인으로 입궁했다고 한다. 특별히 기록에 남을 집안이 아니니 기록이 없어 여러 가지 설이 존재한다.

후궁이 되기 전에 어떤 삶을 살았는지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다. 그러나 숙모의 사위 김해성이 최씨를 독살하려고 했다는 혐의로 문초를 받을 때 원래 구걸을 하면서 살았다가 최씨가 숙원에 봉해지면서 도움을 받았다고 진술하였으므로, 야사에서처럼 천민이 아니더라도 가난한 집안 출신이었음은 확실해 보인다.

보통 사극에서는 무수리 설을 가장 많이 채용한다. 이렇게 설정하는 편이 후대의 영조-세손(정조)-홍국영 간의 그 유명한 야사(사기 <노중련전>의 이모비야(爾母婢也)[5] 소동)와 엮기 좋아서일 것이다. 홍국영 문서 참조.

2.2. 후궁이 되다

변변치 못한 신분인 숙빈 최씨는 숙종의 눈에 띄어 승은을 입고 임신까지 하여 후궁으로 신분이 수직상승했다. 1693년(숙종 19년) 처음 내명부 종4품 숙원(淑媛)으로 책봉되었고 그해 10월 6일 아들 영수(永壽)를 낳았다. 이 아들은 두 달 만에 조졸했는데, 바로 영조의 친형이다.

희빈 장씨보다 11살이 어린 숙빈 최씨가 회임하고 후궁이 되자 당시 왕비였던 희빈 장씨의 강력한 경쟁 상대로 떠올랐다. 그 탓에 인현왕후가 복귀되기 전까지는 고초도 많이 겪은 모양이다. 노론 세력이 희빈 장씨를 천하의 악녀로 기록한 <수문록>에 나오는 이야기라 100% 신뢰할 수는 없지만, 처음 태기가 있었을 무렵 당시 중전이었던 장옥정이 최씨를 죽이려 했다는 이야기까지 있다.
숙종이 졸다가 꿈을 꾸었는데 용이 땅에서 나오지 못 하고 울면서 살려달라고 청했다. 이에 중전 장씨의 처소에 가니 빈 독이 뒤집혀져 있었는데 그 독 안에 두들겨 맞은 임산부 숙빈 최씨가 있었으며 급히 응급 조치를 하여 태아와 숙빈 최씨를 살릴 수 있었다.
이 일화는 지어낸 이야기일 가능성이 높겠다. 아무리 숙빈 최씨의 신분이 낮다고는 해도 야사대로라면 장옥정은 감히 왕의 씨를 밴 여자를 죽이려 한 왕비가 된다. 물론 세자와 그냥 왕자가 같지 않고 장옥정이 중전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감히 왕의 자식을 해치려 했다면 절대 그냥 넘어갈 수 없는 대죄가 된다.[6] 그리고 "용이 땅에서 나오지 못하고"라는 대목을 보면 알겠지만 용은 임금을 뜻하는데 그냥 지어낸 얘기일 확률이 100%다. 어떻게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가 왕이 될지 안 될지 안단 말인가. 하다못해 성 감별도 없던 시절에 말이다. 심지어 고증(?)도 엉망이다. 숙빈 최씨 소생으로 가장 유명한 영조는 차남이며 영조가 태어났을 때 장희빈은 희빈으로 다시 강등된 뒤였다.

숙빈은 임금의 총애를 받고 왕자를 낳았기에 수많은 견제와 공격을 받았음은 사실이고, 이에 맞서기 위해 서인 세력과 친밀해졌다. 비천한 출신에 뒤를 봐줄 배경도 없는 데다가 장옥정의 견제가 극심했기 때문에 별다른 방도가 없었을 것이다.[7] 연잉군은 훗날 서인 분파인 노론 세력과 손을 잡았다. 세간에는 숙빈 최씨가 연잉군을 낳고 숙의(종2품)에서 바로 빈(정1품)으로 승봉했다고 아는 사람들이 많지만, 실제로는 그보다 낮은 귀인(종1품)으로 진봉되었다. 그마서도 영조를 낳고 직후가 아니라 1년이나 지나 결정되었다. 이후에 귀인으로 5년을 지내다가 빈에 진봉되었는데 숙빈이 왕자를 낳고 바로 숙의에서 빈으로 봉해졌다는 이야기는 사실이 아니다.

인현왕후를 폐위하고 희빈 장씨를 중전으로 앉혔다가 다시 인현왕후를 복위시키고 희빈 장씨를 도로 희빈으로 강등시킨 것은 숙종의 왕권 강화책이었다는 것이 정설이지만, 그 구실을 만들어준 사람이 다름아닌 숙빈 최씨다.[8] 또 숙빈이 숙종에게 '희빈 장씨가 인현왕후를 저주했다.'고 고자질한 사실은 흔히들 야사로 알지만 무려 <조선왕조실록>에도 기록된 바이다. 누군가를 죽음으로 몰아넣을 수도 있는 일을 고한 것으로 보아 대중매체에 그려지는 현숙하고 천연덕스러운 모습과는 달리 궐 내에서 정치적인 행보를 보이지 않았다고 볼 수 없다. 물론 뒷배경도 없는 숙빈 최씨가 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서인과 손을 잡음은 선택이라기보다는 필수였다고 볼 수밖에 없겠지만 말이다.[9]

대중매체에 잘 그려지지는 않으나 영빈 김씨와는 친하게 지낸 듯하다. 1살 차이 또래인데다[10] 같은 서인 측 배후인 것도 있고 영조와 인원왕후경종 독살설 배후로 지목돼 죽을 뻔한 영빈 김씨를 구사일생시켜서 말년을 후하게 살게 해준 점으로 볼 때 숙빈 최씨와 영빈 김씨가 붙어다녔을 것이라는 추측은 신빙성이 있다. 물론 영빈 김씨가 숙빈 최씨와 가깝게 지내기 시작한 시점은 언제인지 모르나 대다수는 숙빈 최씨가 영조를 낳은 때로 보고 있다. 숙빈 최씨의 영조 출산 후 1년 정도는 영빈 김씨(당시 귀인)가 숙빈 최씨(당시 숙의)보다 2단계 정도 품계가 높았는데 집안도 그렇고 나이도 1살 많다는 점을 고려했을 때 영빈 김씨가 먼저 숙빈 최씨에게 다가갔을 것이라는 쪽이 유력하다. 숙빈 최씨가 이듬해 자신과 품계가 같아질 것을 어느 정도 예견한 듯. 단순히 품계가 같아짐을 넘어 숙빈 최씨는 왕자를 낳았기 때문에 확실히 숙빈 라인에 서는 편이 나으리라고 영빈 김씨가 계산했을 수도 있다.[11]

숙빈 최씨의 입장에서도 영빈 김씨와 연합함은 꼭 필요했을 터이다. 아무리 자신이 아들을 낳았다고는 하나 당시 중전은 엄연히 장옥정이었고, 세자 또한 장옥정의소생이었기 때문에 당장 아무 뒷배 없는 천한 신분 출신 후궁의 아들은 목숨이 위태로움을 모를 리가 없었다. 장옥정을 미는 남인쪽과는 결탁할 수 없으니 당연히 영빈 김씨의 서인 측과 손을 잡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었을 것이다. 이 두 사람의 품계가 같았던 시기는 숙빈 최씨가 영조를 출산한 이듬해부터 약 5년 정도였으며 이후에는 4년간 숙빈 최씨가 영빈 김씨(당시 귀인)보다 높았다. 물론 훨씬 이전인 1694년(숙종 20년)에는 영빈 김씨(당시 귀인)보다 숙빈 최씨(당시 숙의)의 품계가 더 낮았다.[12]

2.3. 말년

많은 사극들이 희빈 장씨의 일생에 초점을 맞추고 있어 일반 시청자들은 숙빈 최씨의 후일담에 대해 아는 바가 거의 없다. 숙빈 최씨는 향년 47세로 9살이나 많은 남편 숙종보다 2년 일찍 죽었다.

인원왕후의 왕비 책봉 후 계비 인원왕후에 양아들로 입적된 연잉군과의 관계를 바탕으로 숙빈 최씨는 인원왕후와 친밀했다. 숙빈 최씨 말년에 숙빈 최씨가 궐을 나갔을거라 추측하는 근거는 이현궁을 환수할 때 등장하는 숙빈방이라는 표현 때문인데 <조선왕조실록> 숙종 편을 보면 장숙원방, 장귀인방, 숙의방이란 표현이 등장하며 <비변사등록>에도 영빈방이라는 표현이 등장한 것으로 보아 숙빈방이라는 표현은 숙빈 최씨가 기거하는 곳이 아닌 숙빈 최씨의 창고 또는 재물일 가능성이 높다.[13]

연잉군이 가례를 올린 후 궁을 나가야 할 절차를 의논할 때의 실록 기사[14]를 자세히 보면 숙종은 '연잉군이 결혼했으니 궁을 나가야 하는데 집이 없네. 다른 큰 공사 중이라 또 집 짓기가 어려운 줄은 아는데 내 아들 집 일이니 어쩔 수 없어. 해당 부서에 말해서 예산을 책정하라(연잉군의 사저를 지어라).' 하는 요지로 전교를 내렸다. 이에 대해 사관이 '숙빈께서 이현에 큰 저택(이현궁)이 있는데 왕자를 위하여 또 집을 짓고자 하니 주상께서 신하들이 말 나올까 봐 부득이 한 거라고 먼저 전교를 내리고 선수를 치니 사람들에서 남몰래 탄식한다.'라 평이나, <승정원일기>와 <비변사등록>의 1702년(숙종 28년), 이현궁의 대규모 토목 공사의 규모가 워낙 커 말 30필이 토석을 운반하는 데 석 달 이상이 걸린다며 숙종에게 만류하는 상소를 올린 것과 숙종이 결국 끝까지 밀어붙여 공사를 마친 기록을 보면 병중이나 숙종 사후에 거주할 용도의 사제로 봄이 맞는다.

영조는 숙빈 최씨가 1702년(숙종 28년) 궁 밖으로 출궁당했다는 설을 확실하게 부정하였고, 임방이 지었다는 숙빈 최씨의 제문 역시 숙빈 최씨의 1702년(숙종 28년) '궁 밖 출궁설'을 전적으로 부정한다. 두 기록 모두 공통적으로 숙빈 최씨가 40대 말년에 궐에서 숙종을 간병했다고 하며 숙종 42년에 병환이 들어 사가로 나아가 치료하라는 숙종의 명으로 3년 동안 사가에 머물렀다고 기술하고 있으며 47세에 세상을 떠났다.

2.4. 묘소

파일:파주_소령원_전경 문화재청.jpg
최씨의 무덤은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에 있는데 명칭은 소령원(昭寧園)이다. 영조는 생모 최씨를 생각하는 효성이 지극해 여러 차례 생모를 기리는 제문을 지었다. 또한 왕권 강화 차원에서 어머니의 무덤을 능(陵)으로 승격시키고 싶었던 듯하지만 끝내 뜻을 이루지 못했다. 드라마 동이 마지막 장면에서 성장한 영조가 차천수(배수빈 분)와 함께 어머니의 묘를 찾은 장면에서 나온 무덤이 실제 소령원이다. 웬 쌩뚱맞은 사람이 와서 깜놀했을듯.

계압만록에 따르면, 한 나무꾼이 모화관 부근에서 향나무를 팔고 있는데, 암행을 하고 있던 영조가 어디에서 나무를 캐왔냐고 묻자, 나무꾼이 "나랏님의 모후를 모신 소령이 있는 양주 고령산에서 캐웠다."고 했다. 영조는 기뻤지만 넌지시 "다른 사람들은 소령이라고 부르는데 왜 소령이라고 하시오?"라고 물으니 "아니, 임금님의 어머니가 묻혀 계신 곳인데 왜 원이요? 능이지?"라며 오히려 영조를 무식쟁이 취급(...)했다고 한다.[15] 나무꾼이 무식하여 원[16]과 능[17]을 구분하지 못한 것이었는데[18], 영조는 기뻐하여 향나무를 다 사겠다며 나무꾼을 경희궁으로 데려오고, 그제서야 방금 전까지 호통을 친 양반이 임금이란 걸 깨달은 나무꾼은 바닥에 넙적 엎드려 살려달라고 빌었으나, 영조는 기분이 좋아져 백성들도 능이라 부르는데 왜 원이라고 하느냐고 신하들을 꾸짖고는 나무꾼에게는 통훈대부 능참봉의 지위를 주었다고 한다.[19]

숙종인경왕후, 인현왕후, 인원왕후를 비롯 희빈 장씨까지 모두 그 무덤이 서오릉 경내에 있는데, 왕의 생모임에도 불구하고 숙빈 최씨만 홀로 파주에 떨어져 있다. 신주는 칠궁의 하나인 육상궁(毓祥宮)에 모셔졌다.

소령원은 비공개 구역이라서 여기를 방문하려면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의 사전 허가를 받아야 한다. 이 묘의 관리는 파주삼릉 관리소에서 하고 있기에 여기에다가 방문 신청을 하면 된다.

3. 가계

3.1. 친가(해주 최씨)

3.2. 외가(남양 홍씨)

3.3. 친가(조선/왕실)

3.4. 배우자 / 자녀 (가계)

4. 여담

5. 대중매체에서

장희빈을 다룬 많은 사극에서는 드라마 중반부터 출연해 어느 정도 비중을 차지했다. 하지만 이 시대를 다룰 때는 대개 인현왕후와 장희빈의 대결 비중이 커서 숙빈 최씨는 인현왕후에게는 인지도가 밀리기에 동이가 방영되기 전까지 주인공으로 등장한 적은 없고 2002년 판 장희빈을 제외한다면 단지 인현왕후 편에 설 뿐 정치색은 없는 인물이었다. 보통 숙종 연간 장희빈을 둘러싼 내명부의 갈등을 다루는 작품의 경우 일반적으로 숙빈 최씨에게는 별다른 포커스가 주어지지 않거나 영조의 어머니로서만 부각된다거나 아예 극에서 배제되는 경우가 많았으며 나온다고 해도 인현왕후를 돕는 어진 여성상으로 등장할 뿐. 그러나 후기 작품 들어서 숙빈 최씨 역시 갈등의 중심축으로 들어가 주역이 되는 경우가 많아졌다. 반면 한미한 집안이었던 숙빈 최씨랑 의외로 사이 좋게 붙어다녔다고 여겨지는 영빈 김씨는 출연조차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

[1] 일반적으로 후궁의 무덤의 호칭은 묘(墓)이지만, 숙빈 최씨의 아들 연잉군이 왕으로 즉위한 이후 추숭됨에 따라 원(園)으로 격상되었다.[2] 남계 한정. 손녀들, 증손녀들을 통하여 여계 후손은 존재한다.[3] 여러 사극에서 숙빈 최씨가 무수리였다가 승은을 입고 영조를 낳아 빈으로 승급됐다고 묘사되나 사실 장남을 낳고 차남인 영조를 낳은 뒤 3남까지 낳았다. 그러나 영조의 동복형제들이 모두 요절했다. 그나마 MBC 드라마 동이에서는 장남 영수를 낳았다가 영수가 어린 나이에 요절하고 이에 비통해하는 장면이 나오기는 한다. 오죽하면 야사에서 국문을 받는 소론 세력들이 "영조는 선왕의 자식이 아니다!"라며 바락바락 대드는 얘기가 있다. 숙종조 공작 정치의 대가인 김춘택과도 염문이 있었다는 설도 있다. MBC 드라마 <대왕의 길>에서 혈통을 부정하는 소론 이인좌에게 영조가 자신의 얼굴을 보여주자 숙종의 혈육이 맞다고 데꿀멍하는 장면이 있다.[4] 인경왕후가 3번 임신했고(2녀+유산) 희빈 장씨는 2남을, 명빈 박씨는 1남을 낳은 것을 보면 숙빈이 임신을 많이 하긴 했다.[5] "네 어미는 종놈이다(매우 천하다)"라는 뜻.[6] 당장 원경왕후집안효빈 김씨의 아들을 박대했다고 태종에게 어떤 꼴을 당했는가가 역사에 기록되어 있다. 태종은 민무휼과 민무회를 때려잡을때 경녕군을 죽이려고 한 사실을 빌미로 삼았다.[7] 위의 설화는 거짓이라 하더라도 적어도 저런 설화를 창작해낼 정도로 두 사람 간의 사이가 좋지 않았음은 추정할 수 있다. 희빈 장씨왕비가 될 수 없는 중인 신분에서 총애 얻고 아들 낳고 왕비가 된 것이니 비슷한 루트를 밟는 숙빈 최씨가 거슬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8] 희빈 장씨가 폐위됨은 인현왕후가 복위되면서 자동적으로 이뤄졌다.[9] 어차피 숙빈 최씨가 달리 손잡을 대상은 서인 아니면 남인인데, 남인은 희빈 장씨의 편인지라 자연스레 대상은 서인뿐이다. 물론 희빈 장씨가 잘 대해줬다면야 남인과 손잡았을 수 있겠지만...[10] 영빈 김씨가 숙빈 최씨보다 1살 위였다.[11] 물론 두 사람의 집안이 운니지차였기 때문에 영빈 김씨가 후궁 품계가 높았던 시기에는 숙빈 최씨를 거들떠 보지도 않았을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숙빈 최씨는 한미한 집안이었지만 영빈 김씨는 아버지 측과 어머니 측 둘 다 엄청난 파워를 자랑하던 명문 세도가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에는 아들을 낳은 후궁이 권력을 쥐는 법이 당연하니 서인 측 사람들도 영빈 김씨가 아닌 아들을 낳았던 숙빈 최씨를 밀어줬다. 무엇보다 영빈 김씨는 아들이 없을 뿐 아니라 이상하리 만큼 숙종에게 미움을 샀다. 즉, 출신은 달라도 숙빈 최씨는 아들도 있고 총애까지도 받으니 그걸로도 출신의 약점을 상쇄할 만하고 때문에, 두 사람 입장상 서로 무시하거나 질투하기보다는 잘 지내는 게 답이었을 것이다.[12] 처음에는 갓 입궐한 희빈 장씨(당시 숙원)보다 높았던 숙의였으나 이후에는 중전 후보에서도 밀려버리지를 않나, 숙빈 최씨에게도 4년간 아랫사람 신세가 되어버렸다. 사실 이는 영빈 김씨가 기사환국으로 숙종에게 미움을 산 것도 영향이 있다. 이는 아무리 후궁이 날고 기어도 후궁에게 품계를 내려주는 사람도, 후궁에게 총애를 주는 사람도 결국 임금이기 때문이다.[13] 장숙원방, 장귀인방, 영빈방이 쓰인 시기에 희빈 장씨와 영빈 김씨는 모두 궐에서 생활하고 있었다.[14] <숙종실록> 39권, 숙종 30년(1704년, 청 강희(康熙) 43년) 4월 17일 [병술] 3번째기사. #.[15] 여담으로 사실 진짜 능이면 두 글자가 아니라 한 글자다. 가끔 홍유릉같은 두 글자 릉이 보이는데 이는 사실 두 무덤을 합쳐서 부르는 말로 즉 홍유릉은 홍릉과 유릉을 합쳐 부르는 말이다.[16] 세자, 세자빈, 왕의 생모의 무덤으로 숙빈 최씨는 세번째 부류에 해당된다. 사실 그래서 정상적으로는 나무꾼의 논리는 틀렸다. 같은 왕의 어머니라도 생모+중전은 능이고 생모+후궁은 원이기 때문[17] 왕, 왕비의 무덤, 참고로 본디 능은 제후국인 조선은 사용할 수 없었다.[18] 다만 이런 왕실 예법을 평민들이 잘 알리 없었을 것이고 단지 왕의 무덤을 능이라고 하니까 왕의 가족도 능으로 불렀던 것으로 보인다.[19] 이건 사실 비슷한 이야기가 덕흥대원군 묘소에도 있어서 표절일 가능성도 있다.[20] 조선 왕조에서 후궁에서 정실 왕비/세자빈으로 올라간 경우는 희빈 장씨를 제외하면 모두 양반가 출신의 간택 후궁이다. 현덕왕후, 안순왕후, 폐비 윤씨, 정현왕후, 장경왕후. 승은후궁 출신으로 왕비까지 된 희빈 장씨는 조선사에서는 전례가 없던 매우 특별한 경우거니와, 장희빈 역시도 양반이 아닐 뿐 중인 중에서는 가장 잘 사는 대부 가문이였다.[21] 이때 숙종의 후궁들 중 빈의 지위에 있던 사람은 장희빈을 제외하면 숙빈 최씨가 유일했다.[22] 그 예시로 중종장경왕후가 죽자 중종은 경빈 박씨를 왕비로 삼고 싶어했는데 정광필이 '왕비는 좋은 집안에서 들여야 한다.'고 주장해 무산시켰다.# 그렇고 보면 당파와 그 시대의 극명한 신분제 사회를 감안할 때 숙종이라 할지라도 숙빈 최씨를 왕비로 삼기란 무리일뿐더러 숙종 본인이 그럴 의지를 표명한 적도 없다.[23] 효종의 차녀 숙안공주의 아들로 숙종의 고종 사촌이다.[24] 이 일이 있고 10일 후에 인현왕후도 폐출된다. 숙종이 이 일의 배후로 인현왕후를 지목했다 한다.[25] 영빈 김씨에게는 이종사촌 동생이 된다.[26] 원래 내명부의 새로운 수장이 들어서면 후궁들의 품계를 올려주는 것이 관례였다. 인조인렬왕후가 죽어 계비인 장렬왕후를 간택하였는데 이 때도 숙원 조씨를 비롯한 대부분의 후궁이 승봉되었다.[27] 물론 인원왕후가 후사가 없었기 때문에 어느 왕자와도 척을 지어 굳이 껄끄러운 관계를 만들 이유도 없었을 것이다.[28] 경종은 인현왕후 민씨의 아들로 입적하였고 영조는 인원왕후 김씨의 아들로 입적하였다. 인원왕후의 입장에서도 자신의 아들인 영조가 더 이뻐 보일 수밖에 없는 상황.[29] 훗날 드라마 장희빈(SBS)에선 숙종의 어머니인 명성왕후 김씨, 이산에서 숙종의 손주며느리인 혜경궁 홍씨 역을 맡게 된다.[30] 영조가 혼인 첫날밤 아내 정성왕후의 손이 고운 것을 칭찬하자 정성왕후가 "부잣집에서 태어난 덕분에 손에 물 한방울 묻히지 않고 자라서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했고 어머니가 허드렛일 하던 무수리라는 사실에 열등감이 있던 영조가 정성왕후를 싫어하게 되었다는 야사를 그대로 인용했다.[31] 승은을 받는 묘사나 독극물이 있는 음식을 일부러 먹어 다른 사람을 모함하고 상전(장옥정은 명성왕후에게)에게 핍박받은 것을 숙종이 알게 되어 장옥정이 첩지를 받는 묘사는 장옥정의 행보 그대로다.[32] 1화에서 "나는 아씨처럼 될래요. 장옥정처럼"이라는 말을 한다. 작 중에서 인현왕후와의 관계도 왠지 불편하게 묘사된다. "자기가 아들을 낳으면 왕세자는 아니더라도 왕세제로는 세울 수 있느냐"고 떠보자 인현왕후가 난색을 표하고 인현왕후가 아들이 없고 몸이 불편한 것을 알아채자 인현왕후의 사후에 자기가 중전이 되고자 하는 야망을 내비치기도 한다. 인현왕후와 가까운 관계였던 실제 역사와 다르고 숙빈 최씨는 신분상 중전의 후보에 들 가능성이 매우 적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