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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05 17:54:58

인경왕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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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숙종의 정비
인경왕후 | 仁敬王后
파일:익릉전경.jpg
익릉 전경
출생 1661년 10월 15일(음력 9월 3일)
조선 한성부 회현방 사저
(現 서울특별시 중구 회현동 일대)
사망 1680년 11월 26일(음력 10월 26일)
(향년 19세)
조선 한성부 경덕궁 회상전[1]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새문안로 45)
능묘 익릉(翼陵)
재위기간 조선 왕세자빈
1671년 4월 20일 ~ 1674년 9월 12일
조선 왕비
1674년 9월 12일 ~ 1680년 12월 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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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f1400><colcolor=#ffd400> 본관 광산 김씨[2]
□혜(□惠)[3]
부모 부친 광성부원군 김만기[4]
(光城府院君 金萬基, 1633 ~ 1687)
모친 서원부부인 청주 한씨
(西原府夫人 淸州 韓氏, ? ~ 1720)[5]
형제자매
4남 3녀 중 장녀 [ 펼치기 · 접기 ]
큰오빠 - 김진구(金鎭龜, 1651 ~ 1704)
작은오빠 - 김진규(金鎭圭, 1658 ~ 1716)
남동생 - 김진서(金鎭瑞, 1663 ~ 1712)
여동생 - 김한혜(金漢惠, 1668 ~ 1703)
여동생 - 김복혜(金福惠, 1673 ~ 1737)
남동생 - 김진부(金鎭符, 1676 ~ 1693)
배우자 숙종
자녀
2녀+성별 미상 [ 펼치기 · 접기 ]
장녀 - 공주(1677 ~ 1678)
차녀 - 공주(1679 ~ 1679)
셋째 - 성별 미상(1680. 8. 6. 유산)
봉작 왕세자빈(王世子嬪) → 왕비(王妃)
전호 영소전(永昭殿)
휘호 광렬선목혜성순의
(光烈宣穆惠聖純懿)
휘호 효장명현(孝莊明顯)
시호 인경왕후(仁敬王后) }}}}}}}}}
1. 개요2. 생애
2.1. 출생과 친정 가문2.2. 세자빈 간택2.3. 궁궐 생활2.4. 사후
3. 능묘4. 가계5. 기타6. 대중매체7.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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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숙종의 첫번째 정비.

2. 생애

2.1. 출생과 친정 가문

인경왕후는 1661년 10월 25일한성부에서 광성부원군[6] 김만기와 서원부부인 청주 한씨 사이에서 4남 3녀 중 장녀이자 셋째로 태어났다.

서인의 거두였던 대학자 사계 김장생의 현손녀이기도 하다. 할머니 해평 윤씨윤두수의 현손녀이자 정혜옹주(貞惠翁主)[7]의 손녀이다. 그래서 인경왕후와 남편 숙종은 선조를 공통 조상으로 하는 10촌 관계이다.

숙부는 구운몽을 쓴 서포 김만중. 그리고 훗날 인현왕후 복위에 적극 가담한 김춘택[8]은 친정 조카이다.

이러한 가문의 배경이 인경왕후가 왕세자빈에 책봉되는 이유 중 하나가 되었는데, 당시 2차 예송논쟁으로 남인의 기세를 제압한 서인 세력은 '무실국혼(無失國婚)'[9]이라는 구호를 앞세워 왕비는 무조건 서인 가문에서 배출되어야 한다는 점을 당론 중의 하나[10]로 삼았고, 이로 인해 인경왕후 사후 역시 서인의 정신적 지주였던 송준길의 외손녀인 인현왕후 민씨숙종의 첫 번째 계비로 책봉되었던 것이다.

2.2. 세자빈 간택

1670년(현종 11년) 10세 때 왕세자빈에 간택되어 의동별궁에 들어갔으며. 다음해 음력 3월, 책봉되었다. 1674년(현종 15년) 시아버지인 현종승하하고, 남편 숙종이 즉위하자 왕비가 되고, 1676년(숙종 2년) 16세의 나이로 정식으로 왕비에 책봉되었다.

2.3. 궁궐 생활

후임자인 인현왕후인원왕후와 달리 숙종과의 금슬은 매우 좋았다. 실록에 따르면 인경왕후는 세자빈 시절부터 순종적이고 유약한 소위 지고지순한 성격으로 묘사되는데, 인경왕후의 후임 왕비들이나 후궁숙빈 최씨조차 실록에서 만만치 않은 성격들로 간접적으로나마 묘사된 것을 생각하면, 의외로 숙종 본인은 인경왕후 같은 성격을 진심으로 좋아하고 바라보는 성격일 가능성이 높다. 숙종은 인경왕후 생전부터 어머니 명성왕후와 적증조모 장렬왕후수렴청정이나 간섭을 거부하고 꺼렸을 정도로 분명 성격 자체는 타고나게 성깔이 있고 강단있고 주관적인데, 그런 숙종이 후궁을 1명도 들이지 않고 정비 인경왕후에게만 충실했다. 이러한 점은 꽤 의외이다.

그러나 자식 복은 없었다. 인경왕후는 1677년부터 1680년까지 총 3번의 회임을 하였고 1677년(숙종 3년)과 1679년(숙종 5년)에 2명의 공주를 낳았으나 모두 조졸했고, 3번째 용종은 유산하였다. 일각에서는 인경왕후의 사망 원인을 '임신을 연이어 반복한데다 유산까지 하여 몸이 쇠약해진 가운데 천연두가 결정타가 되었기 때문'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실제로 어느 병이든 몸이 쇠약해진 상태에서 걸리면 치명률이 상대적으로 낮은 병조차 치명률이 높아지는데, 천연두는 당시에 왕족들도 걸리면 생사가 위태로워지는 병이었고, 숙종도 3년 후 천연두에 걸릴 때 사경을 헤매다가 겨우 나았다.
"대내(大內)에 요즈음 재이(災異)가 있으니, 밖에서는 무슨 재앙이 있는지를 알지 못하였는데,
혹자는 귀신의 변고가 있었다고 하며, 그때 내전에 여러 달 동안 포태(抱胎)의 징후가 있었는데,
갑자기 침전에서 도깨비를 보고 그로 인하여 놀란 나머지 하혈하고 낙태한 사고라고 전한다."
- 숙종실록》 9권, 숙종 6년(1680년, 청 강희(康熙) 19년) 7월 24일 (신해) 3번째기사

1680년(숙종 6년) 음력 10월 26일, 2경(二更 : 오후9시 ~ 11시)에 경덕궁에서 발병 8일 만에 천연두로 젊은 나이인 19세에 승하했다. 재위한 조선의 왕비 중에서 4번째 단명으로, 조선 역대 왕비 중 가장 단명한 왕비는 효현왕후, 장순왕후, 공혜왕후 순으로 승하했다.

일각에서는 이런 인경왕후가 일찍 사망한 것이 후에 여러 환국을 불러일으키고, 인현왕후장희빈의 비극을 초래했다고도 한다. 실제로 경신환국을 제외한 대부분 환국들이 인현왕후희빈을 이용하여 일으키고 이후에도 영향이 있었으니 남편 숙종과 사이가 좋았고, 강경파 서인남인의 영향에서 모두 자유로웠던 인경왕후의 죽음은 모든 비극의 시발점인 것은 확실하다.

인경왕후도 서인 집안 출신이지만 균형을 중시한 현종이 살아생전 내정한 왕세자빈이고, 어차피 왕비를 들일 명문가들은 대부분 서인 출신이었기 때문에 서인인 것 자체는 그렇게 문제가 아니었다. 그런 인경왕후가 죽고, 그로 인한 간택 과정에서 여러 결함이 있었던 인현왕후숙종에게 총애를 받지 못하고, 남인들이 이를 틈타 명성왕후 사후 자의대비의 동의 하에 장희빈을 다시 궁궐에 들이고, 이후 숙종의 극단성을 그나마 잡아주던 왕실 최고어른이었던 대왕대비 장렬왕후까지 사망하자 끝내는 기사환국으로 이어지게 된 것이다.

참고로 인경왕후가 승하했을 때에는 숙종도 병에 걸려 숙종은 창덕궁에, 인경왕후는 경덕궁에 각각 따로 있었다. 이에 대신들이 인경왕후의 승하숙종에게 알리고자 하였으나, 명성왕후(숙종의 어머니)가 "주상이 밤에 구토하고 가슴과 배에 통증이 있다가 이제 겨우 잠들었으니, 중궁의 승하는 내일 아침에 알리라."라고 하여 숙종은 인경왕후의 부음을 다음 날 아침에야 듣게 된다.

2.4. 사후

사망한 지 1년 후, '중전의 자리를 오래 비워둘 수 없다'는 명성왕후서인 대신들의 뜻에 따라 인현왕후가 새 왕비로 책봉되었다.

3. 능묘

무덤은 서오릉 중 하나인 익릉(翼陵)이다. 경기도 고양시 용두동에 있으며, 1970년 5월 26일 '대한민국 사적 제198호'로 지정되었다. 숙종 연간에는 왕릉의 능제를 단순화하고 석물을 간소하게 제작하도록 명하였으나, 그 이전에 만들어진 능묘이므로, 《국조오례의》의 제도를 따르고 임진왜란 이후의 조선 후기 양식을 나타내고 있다. 전호(殿號)는 '영소(永昭)'이다.

4. 가계


인경왕후의 후임이었던 인현왕후와는 아주 묘하게 연결되는데 인경왕후의 5대조 김계휘(金繼輝)의 친동생[20]인 김은휘(金殷輝)의 딸[21]이 송이창에게 시집가서 낳은 딸[22]민유중과 결혼한다. 여기서 태어난 딸이 바로 인현왕후이다.

촌수로 따지면 인현왕후가 인경왕후의 손녀뻘에 해당된다.[23]

5. 기타

인경왕후의 시호를 정할 때 삼망 후보로 인경(仁敬), 효인(孝仁), 장헌(章獻)이 있었으며, 숙종이 '인경'에 낙점하여 '인경왕후(仁敬王后)'가 되었다. 인경왕후 시호 망단자 문서는 지금도 남아있다.

6. 대중매체

젊은 나이에 일찍 사망해서 인현왕후나 장희빈처럼 유명하진 않고, 등장도 많지 않다.

장옥정, 사랑에 살다에서 순수한 성품으로 숙종에게 총애받지 못하지만 인경왕후는 숙종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걸로 묘사된다. 숙종 본인도 이러한 인경왕후의 순수한 성품과 행동에 감명받아 왕비로써의 예우를 제대로 해 주고 존중하며 합방을 꺼리지 않게 되는 등 마음을 연다. 이런 서로의 모습이 고증과 별개로 꽤 아름답게 그려져서 드라마 외적으로도 호평을 받는다. 안타깝게도 딸까지 낳을 정도로 실제 역사에서의 금슬 좋은 모습은 해당 드라마의 고증 파괴력으로 통째로 생략이 되고 천연두로 금방 요절하고 만다. 장옥정과는 좋은 친구 사이로 나온다.

7. 관련 문서


[1] 훗날 경희궁으로 바뀐다.[2] 양간공후-판군기감사공파 30세손.[3] 선원록에서 인경왕후의 두 여동생의 이름이 한혜(漢惠)와 복혜(福惠)라고 되어있지만 인경왕후의 본명은 적혀있지 않다. 하지만 동생들의 이름이 '혜(惠)'로 끝나는 것으로 보아 인경왕후의 이름도 "□혜"일 가능성이 높다. 출처[4] 선조의 차녀 정혜옹주의 외증손자.
계보도는 정혜옹주윤지 → 윤씨부인 → 김만기
[5] 1716년에 나이 80이 넘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1636년 이전 생으로 추측[6] '광성(光城)'은 본관은 '광산'의 별호[7] 선조인빈 김씨의 딸.[8] 인경왕후의 오빠 김진구의 아들.[9] 사람에 따라서는 물실국혼(勿失國婚), 국혼물실(國婚勿失)이라고도 한다.[10] 다만, 해당 당론과 관련해서 그 시작이 '2차 예송논쟁'이 아니라 '인조반정'때로 보는 시각도 있다. 조선 말기(고종 대)의 관료이자 양명학자인 이건창은 자신의 저서 《당의통략(黨議通略)》에서 '무실국혼'이 인조반정 때부터 나왔다고 적었다.[11] 인경왕후의 아버지이자 폐위된 인현왕후를 옹호하고 다시 복위시키기 위해 그녀와 관련된 소설인 구운몽을 집필한 김만중의 친형이기도 하다.[12] 선조의 서자 순화군의 외증손녀이다. 선조→순화군→이경증 처→이진→김진규의 처 등의 순서이다.[13] 효종 비 인선왕후의 오빠 장선징(張善澂)의 딸이다.[14] 영조 대에 이르러 사도세자의 왕세자 제왕수업 교육을 담당하는 서연관 스승 중 하나로 임명되었다. 추후 임오화변이 일어나기 전에 세자인 사도세자가 아버지 영조 몰래 할머니 인원왕후 상중인데도 불구하고 평양으로 기생들과 함께 놀러가서, 주야로 술먹고 놀며 방탕한 생활을 한 '평양 원유사건'이 일어나자 세자의 스승으로서 책임을 지고 좌의정 이후와 우의정 민백상과 함께 음독 자결을 한 인물이다.[15] 《승정원일기》 260책 (탈초본 13책) 숙종 3년 6월 7일 임자 9/16 기사[16] 《승정원일기》 264책 (탈초본 14책) 숙종 4년(1678년 청 강희(康熙) 17년 윤3월 13일 (계축)[17] 중궁전이 해산을 하여 공주를 낳았으나, 이튿날 공주가 죽었다. - 숙종 5년(1679년, 청 강희(康熙) 18년) 10월 23~24일[18] 내전(內殿)에 유산(流産)할 징후가 있으니, 약방(藥房)에서 문안하고 약을 의논하였다.- 숙종 6년 7월 22일 기유 1번째기사[19] 왕대비(王大妃)가 언서(諺書)로 약방(藥房)에 하교하기를, "대내(大內)에 요즈음 재이(災異)가 있으니, 【밖에서는 무슨 재앙이 있는지를 알지 못하였는데, 혹자는 귀신의 변고가 있었다고 하며, 그때 내전에 여러 달 동안 포태(抱胎)의 징후가 있었는데, 갑자기 침전에서 도깨비를 보고 그로 인하여 놀란 나머지 하혈하고 낙태한 사고라고 전한다.】 - 숙종 6년(1680년, 경신 / 7월 24일 신해 3번째기사[20] 큰아버지의 양자로 들어갔다.[21] 김은휘의 또 다른 딸은 금천 강씨 강찬이라는 인물과 결혼하여 아들 강석기를 낳는데, 그가 다름 아닌 소현세자빈(민회빈 강씨)의 아버지다.[22] 송준길의 누이기도 하다.[23] 촌수가 이렇게 많이 벌어진 이유는 김계휘와 김은휘가 형제이긴 하지만 나이가 15살이나 차이나기 때문이다. 김계휘의 아들인 김장생과 김은휘가 숙질 사이지만 고작 7살 차이밖에 안 난다. 이미 여기서 한 세대가 차이나고, 또 삐끗하다 보면 이렇게 벌어지는 것은 순식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