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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04 17:21:12

송준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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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준길
파일:Song_Jungill's_dream_Poetry.jpg
<colbgcolor=#c00d45,#222><colcolor=#F0AD73> 송준길의 친필[1]
성명 <colbgcolor=#fff>송준길(宋俊吉)
자 / 호 명보(明甫)[2] / 동춘당(同春堂)
본관 은진 송씨 (恩津 宋氏)[3]
출생 1606년(선조 39) 12월 28일
한성부 동부 숭신방(성외) 정릉계
(현 서울특별시 성북구 정릉동)
사망 1672년(현종 13) 12월 2일 (향년 65세)
충청도 회덕현[4] 내남면 송촌리
(현 대전광역시 대덕구 송촌동)
국적 조선
시호 문정(文正)[5]
부모 부친 - 송이창(宋爾昌, 1561 ~ 1627)
모친 - 광산 김씨(光山 金氏, 1565[6] ~ 1621)
부인 진주 정씨(晉州 鄭氏, 1604 ~ 1655)
자녀 4남 2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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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 - 송광식(宋光栻, 1625 ~ 1664)
장녀 - 나명좌(羅明佐)의 처
차녀 - 은성부부인(恩城府夫人, 1637 ~ 1672)[7]
서자 - 송광림(宋光林)
서자 - 송광천(宋光梴)
서자 - 송광영(宋光榮)
1. 개요2. 생애
2.1. 인조 때의 정치 활동2.2. 효종 때의 정치 활동2.3. 현종 때의 정치 활동
3. 사후4. 평가5. 후손6. 기타7. 관련 항목

[clearfix]

1. 개요

조선 중기의 유학자, 문신. 기호학파의 거두인 사계 김장생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친척인 우암 송시열과 함께 '양송(兩宋)'[8]이라 불리는 거유(巨儒). 조선 문묘에 종사된 18인 가운데 1명이다.

2. 생애

2.1. 인조 때의 정치 활동

1606년(선조 39) 한성부 동부 숭신방(성외) 정릉계(현 서울특별시 성북구 정릉동)의 외가에서 영천군수(榮川郡守)를 지낸 아버지 송이창(宋爾昌, 1561 ~ 1627)[9]과 어머니 광산 김씨[10]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11] 유성룡의 수제자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 1563 ~ 1633)의 사위이다.

같은 은진 송씨인 송시열보다 1살 위로 부계, 모계 모두 친척이다. 친가 쪽으로는 13촌 숙부가 되고, 진외가 쪽으로는 6촌 형이다.[12] 13촌이면 본관과 성씨만 일치한다 뿐이지, 이 정도면 그냥 남에 가깝다. 오히려 외가 쪽과 훨씬 가까워 사실상 외가 쪽 친척으로 여기고 있다. 그 증거로 송시열은 송준길을 13촌 숙부로 안 부르고 재종형으로 늘 춘형이라 불렀다. 어린 시절 송시열은 집안이 어려워 송준길의 집에서 함께 생활하고 공부하였다.

1623년 김장생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9세 되던 1624년(인조 2) 증광시 생원시와 진사시 양시에 각각 3등 53위, 2등 8위로 동시에 입격하였으나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 1636년에 최명길이 상소하여 송시열과 송준길을 동시에 추천하였던 점을 볼 때 은진 송씨역사적 인물로 송시열만을 손에 꼽는 것은 단견이다. 사실 송준길과는 달리 송시열은 트러블 메이커라서 잘 기억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소현세자가 죽은 직후 소현세자의 장남을 세손으로 삼을 것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인조의 분노를 사기도 했다. 또한 소현세자의 장례를 위한 상복으로 3년복을 주장하기도 했다.

2.2. 효종 때의 정치 활동

이후 봉림대군이 효종으로 등극한 후 효종의 스승이었던 송시열을 다시 조정으로 불러들이면서 송준길 또한 불러들였다. 역시 송시열과 마찬가지로 둘 다 세자교육을 담당하는 세자시강원진선을 거쳐 집의가 되었다. 이후 송시열은 효종에게 입대를 청했으나 인견을 허락받지 못하자 그자리에서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였고 송준길은 몇 차례 낙향할 것을 청했으나 허락받지 못하고 사헌부 장령과 집의를 거치며 1649년 9월 13일에 김자점과 원두표 등 훈신에 빌붙어 사풍을 어지럽히는 이들을 추고할 것을 청했다. 이 때 사헌부 내에서 지평 이수인이 등이 송준길의 논계가 적절하지 못하다고 지적하며 논의가 양분되자 같은 문인이었던 대사간 김경여는 송준길을 옹호했다. 이 사건은 같은 해 10월 24일 효종이 송준길의 논계에 반대한 이들을 파직하는 것으로서 일단락 되었다.

1649년 10월 4일에 사계 김장생의 아들인 신독재 김집(당시 공조참판)과 함께 사직을 청하였으나 효종이 거부하고 같은 날 또다시 송시열과 함께 사직을 청하자 효종이 진노하며 허락하지 않았다.[13] 한편 김자점 탄핵 과정에 산림들의 성토가 거세자 이에 대한 반발이 만만치 않았는데 이에 따라 당시 장령이던 송시열이 대사간 김경여와 송준길에 대한 변론을 1649년 10월 18일에 올렸고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 1649년 10월 23일에 효종은 대신들에게 논박받는 것을 달게 여기라 당부하며 1649년 10월 25일에는 송준길에게 당상(堂上)에 초승하는 명을 내리기까지 한다.

1655년(효종 6년) 10월 27일에 효종이 승지로 임명하였는데 1655년 11월 16일에 동부승지 직을 사직할 것을 청하였다. 그랬더니 효종이 답을 내리기를 "너의 굳은 사양이 이 지경에 이르다니 이것은 나의 정성이 미진한 바가 있어서 그런 것이므로 진실로 낯이 부끄럽다." 1656년(효종 7년)에는 이조 참의 직을 사직할 것을 청하고 역시 효종은 허락하지 않았다. 이후 이런 식으로 사직과 벼슬 제수가 반복되는데 이쯤되면 산림의 풍조인지 유학자로서의 기개인지 궁금할 정도이다. 김자점과 그 일파에 대한 탄핵 시기와는 달리 1658년(효종 9년)에 이르면 조정이 산림들과 '양송'[14]에 대해 우호적인 세력들로 채워졌음을 알 수 있다.

효종 즉위 초에는 산림들에 대한 반발이 있었으나 이 시기에는 효종이 직접 고기을 내려주기도 하며 호조참판직을 맡겼다. (이때 이완을 형조판서로 임명함.) 그러나 이 시기부터 슬슬 산림이라 해도 학파에 따른 정치적 긴장감이 드러난다. 김장생과 송준길을 두루 공박하는 윤선도의 상소를 도승지 김좌명이 괴상하다 하여 물리쳤다는 기록도 있다.[15]

한편 1658년 9월 18일에는 대사헌[16]에 송준길을 임명하였고 송시열을 이조판서로 임명하였다. 이후 1658년 10월 9일에는 송준길을 이조참판으로 임명하여 양송이 이조의 요직을 전부 차지하였다. 1658년 12월 10일에는 다시 송준길을 대사헌으로 임명하였다. 1659년(효종 10년) 3월 8일에는 대사헌이었던 송준길에게 병조판서를 제수하는데 <조선왕조실록>에는 이를 '특별히'라고 적었다. 송준길은 단 이틀 만에 사직을 청하는데 효종이 또 거부했다. 1659년 3월 21일에 송준길이 칭병하여 사직을 청하자 효종이 윤허하였는데, 그해 4월 4일에는 또다시 대사헌을 제수했다.

2.3. 현종 때의 정치 활동

1659년(현종 즉위년) 6월 2일에도 송준길은 대사헌 직을 또 제수받고 1659년 6월 29일에는 이조판서 직을 제수받는데(이 때 송시열은 좌참찬 직을 제수받았는데 본디 이조판서는 송시열이었던 듯하다. 1659년 7월 2일에 또 사직 상소를 올리고 가납되지 않자 1659년 7월 6일에 또 사직 상소를 올렸는데 역시 현종이 사직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후 1660년(현종 1년) 1월 19일까지는 이조판서직에 잠잠히 있다가 또 사직 상소병이 도졌는지 4차에 걸쳐 상소하여 체직했다.

드디어 대망의 예송논쟁.

한편 송시열과 함께 1660년에 상소를 올려 구황과 빈민 구휼 및 조세 제도의 개혁을 건의하기도 하였는데 관둔전과 내수사의 면세지를 혁파하라는 주장은 상당한 강수. 이러한 면세지 혁파의 상소는 당색을 가리지 않아 1661년(현종 2년) 4월 7일에 송준길은 남인의 영수 허적과 함께 현종에게 직접 아뢰기도 하였다.[17] 또 송시열과 같은 당파이며 은진 송씨의 두 거두였던 만큼 서로를 챙기기도 하는데 "신은 조정에 있어도 털끝만큼의 보탬이 되는 일이 없지만 송준길과 같은 사람은 늘 대궐을 못 잊어하며 그리워하는 충성심이 있습니다."라고 송시열이 상소하기도 했다. 그러자 송준길은 송시열만 낙향하고 저만 조정에 남아있을 수는 없다고 맞장구를 쳤다. 1661년(현종 2년) 5월의 일이다.

1662년(현종 3년) 6월 21일에 대사헌 직을 제수받고 그해 11월 11일에 또 대사헌 직을, 1663년(현종 4년) 2월 18일에 다시 대사헌 직을 제수받았다. 같은 해 7월 4일에 대사헌 직에서 물러남을 청하자 9월 13일, 11월 19일에 계속 대사헌 직을 내렸다. 1664년(현종 5년) 2월 26일에 송준길이 칭병하여 대사헌에서 물러나자 동년 10월 15일에 대사헌 직에 임명하고, 1665년(현종 6년) 4월 2일에 다시 대사헌으로 임명하며 5월 2일에 친히 음식을 내으나, 5월 13일과 20일에 또 사직했다. 7월 8일에 세자의 스승이 되고 10월 5일에 현종이 어의를 보내고 나서 10월 30일에 다시 대사헌 직을 제수받으나 11월 17일에 또 사직하였다. 이후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1666년(현종 7년) 4월 경부터 송시열과 함께 수 차례 칭병하였다. 1667년(현종 8년) 4월 21일에는 남인의 거두인 허적과 셋이서 칭병하기도 한다. 1668년(현종 9년) 8월 26일에도 우의정 송시열과 이조판서 송준길이 동시에 관직을 사양하였음이 기록되어 있다.

1672년(현종 13년) 11월 27일에 현종이 어의와 약물을 보내어 송준길의 병을 살피도록 하나 결국 1672년 말에 동춘당 송준길은 세상을 떠난다. 그런데 그는 죽기 직전에 부패한 지방관 김징(金澄, 1623 ~ 1676)[18] 이 모친의 생일 잔치를 하면서 알지도 못하는 이들까지 죄다 불려들어 거액의 선물을 요구했다가 처벌당하게 생기자 "모친을 위해 한 일에 큰 를 줄 수 없다"고 같은 산당이라는 이유로 강력히 변호했다. 조정에서는 "그런 식으로 봐주면 부모 있는 사람들은 앞으로 부모를 핑계되어 못할 짓이 없을 것이다."라고 반박했으나 송준길은 막무가내였고 거물이었던 그의 주장을 무시할 수가 없어 김징은 가벼운 처벌을 받았다. 그런 그의 모습에 현종은 실망했으며 어의는 보냈으되 위로의 말을 전하라는 주위의 권유를 무시해버렸다.

3. 사후

사후 1673년(현종 14) 1월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1675년(숙종 1) 2차 예송논쟁이 촉발되고 회니시비가 발생한다. 살아있던 송시열과 함께 이미 세상을 뜬 송준길도 남인의 공박에 시달리게 되고 관작을 삭탈당한다. 다만 2차 예송논쟁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은 송준길은 붕당을 형성하였다는 이유로 주로 공박당하는데 그렇게만 평가하기는 힘든 면이 많다. 물론 송시열이 송준길보다 17년이나 오래 살았고 그래서 절대량의 측면에서 송준길이 휘말린 논쟁이 적은 것이기도 하지만 양송(兩宋)이 동시에 살아있던 시대의 <조선왕조실록>을 보더라도 송시열에 비해서 크게 정치적으로 원만한 모습을 보였다. 1680년(숙종 6) 경신환국으로 서인이 집권하면서 관작이 회복되었다. 이후 문정(文正)이란 시호가 내려졌다. 1756년(영조 32) 송시열과 함께 문묘에 배향되었다.

묘는 충청남도 연기군에 있었으나, 후에 충청남도 공주 등으로 여러 번 이장했다가, 현재는 대전광역시 서구 원정동에 있다.

4. 평가

율곡에서 김장생, 김집으로 이어지는 기호 학통을 계승한 것 이외에도 장인 정경세를 통해 퇴계 학맥에도 이어진다. 퇴계도 존숭하며 스승으로 생각했다.[19]

성리학의 이론적 심화에 집중한 송시열에 비해 양란 이후 변화한 시대에서 윤리 사회 재건을 위해 도학적 실천과 내면 공부에 집중하며 예학 계발, 예치(禮治)의 실현을 위해 노력하였다. 물론 김육 등 문신들과 비교하였을 때 현실을 외면했다는 비판은 피할 수 없다. 송시열과 비교되다보니 원만한 인품으로도 널리 알려졌는데, 김창협은 동춘당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을해년 간에 내가 농암 김 대감(=김창협)과 더불어 동호(東湖)에 같이 배를 탔다. 농암 대감이 선생의 덕을 매우 칭송해서 말하기를, "일에 임하여 흔들리지 않으시고,끊기를 칼같이 하시고, 악한 것 보기를 더럽힐 것 같이 하시며, 미워하기를 원수같이 하시고, 강하시며 굳센 집념은 남들이 미칠 바가 아니다"하고, "세상 사람들은 한갓 양기(陽氣)가 온화함의 하나만 알았지 참으로 선생의 덕은 알지 못한다" 라고 하였다.
- 남궁원이 작성한 송준길 행장의 일부

5. 후손

아들 송광식(宋光栻, 1625 ~ 1664)은 진사였다. 장녀는 나만갑의 장손 나명좌와 혼인하였으나, 나명좌가 요절한 수년 후 자결하였다. 차녀는 민유중과 혼인하였으며, 민진후, 민진원, 인현왕후를 낳았다. 곧 송준길은 인현왕후의 외조부이다.

송광식의 아들인 송병문(宋炳文), 송병하(宋炳夏), 송병원(宋炳遠, 1651 ~ ?), 송병익(宋炳翼)이 있다. 송병익의 아들[20]인 묵옹(黙翁) 송요좌(宋堯佐, 1678 ~ 1723)의 아들은 높은 학문으로 이름 높았던 역천(櫟泉) 송명흠(宋明欽, 1705 ~ 1768)과 한정당 (閒靜堂) 송문흠(宋文欽, 1710 ~ 1752) 형제이다. 이들은 낙론의 계승자 도암(陶庵) 이재(李縡)의 문인이다. 호론계의 정통이라고 할 수 있는 송준길 가문이 낙론계가 된 것이다.

1756년 '우암-동춘 시비'(尤-春/春-尤 是非)'가 발생한다. 송준길과 송시열이 함께 문묘에 종사되었는데 위패를 두는 순위 문제로 송명흠과 송시열의 현손 송능상(宋能相)[21]이 대립한 것이다.

6. 기타

7. 관련 항목



[1] 1672년 꿈에서 퇴계 이황 선생을 뵌 감회를 기록한 '기몽(記夢)'이다. 대전광역시 유형문화재 제50호.[2] 놀랍게도 축구선수 홍명보 이름의 한자와 일치한다![3] 동춘당문정공파 시조.[4] 고려와 조선 시대 현재의 대전광역시 중구, 동구, 대덕구 일대를 관할했던 현으로 관아는 현재의 대덕구 읍내동에 설치되었다. 회덕군은 읍내동을 에워싼 원촌동, 와동, 연축동, 법동, 송촌동 등을 포함하였다.[5] 송시열과 시호가 한자까지 같다. 그래서 송준길의 후손들은 '동춘당문정공파'라고 하고, 송시열의 후손들은 '우암문정공파'로 송준길의 후손들과 구분짓는다.[6] 이전 리비전에서는 생년이 미상이라고 써져 있었으나 족보에 "嘉靖乙丑十二月十一日生(가정을축십이월십일일생)"이라고 써져 있으므로 1565년생이 맞다. 다음은 출처 사진이다. 파일:송이창 송준길 부자 족보.png[7] 인현왕후의 어머니.[8] 현종시절에 이들을 묶어 양송이라 표현하는 기록이 나온다. 다만 그렇게까지 많이 등장하지는 않는다. 가장 많이 등장한 현종실록에도 고작 11건만 기록되었을 뿐이다. 그래도 영조시절까지도 나오는걸 보면 당대에만 유행(?)하고 쓰이지 않은 표현은 아닌듯.[9] 송이창은 계축옥사의 발단이 된 인물 중 한 명인 서양갑의 처남이다. 서양갑의 배우자는 서출이고, 송준길에게는 서양갑이 서고모부가 된다.[10] 김장생의 사촌, 김장생의 아버지 김계휘의 동생 김은휘의 딸[11] 편집 이전에 대전광역시 대덕구 송촌동 출신이라 적혀 있었으나 명백한 서울특별시 출신이다.[12] 둘의 할머니가 정헌공 이윤경(1498~1562)[34]의 딸들이다.[13] 툭하면 사직하는 <조선왕조실록>의 기록들을 보면 당시 산림들의 풍조를 알 수 있다.[14] 兩宋, 송시열과 송준길을 아울러 이르는 <조선왕조실록>의 표현.[15]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2번의 상소를 도승지가 모두 물리친 것으로 되어 있다.[16] 오늘날의 검찰총장이나 감사원장과 비슷한 직위.[17] 물론 이 때까지만 해도 서인과 남인 관계는 좌우 대립 정도로 극단적이지만은 않았다.[18] 송준길의 문인. 이런 인물임에도 문인록에는 좋은 말로 쓰여 있다. '김징(金澄)의 자는 원회(元會), 호는 감지당(坎止堂)이고, 청풍인(淸風人)이다. 사천(沙川) 극효(克孝)의 아들로 조정에서 거리낌 없이 바른말을 하니, 선생께서 국가의 보배라고 칭찬하였다.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감사에 이르렀다.' - 문인록 내용에 오류가 있는데 김징은 김극형의 아들이다.[19] 이런 시도 남겼다. '평생토록 퇴계선생님 공경해 우러르니/세상 떠나셨어도 그 정신 오히려 감통시키네/오늘밤 꿈속에서 가르침 받았는데/깨어보니 달빛만 창가에 가득하네'[20] 숙부 송병원에게 출계됨[21] 호론인 한원진의 문인이다.[22] 송준길의 조부 송응서의 집이다. 이후 송준길의 집이 된다.[23] <대전의 옛 이야기 상권> 490쪽과 491쪽 참조.[24] 이단상의 아들[25] 송시열의 손자들, 송순석은 회니시비 당시 윤증의 신유의서를 베껴 송시열에게 전달한 장본인이다.[26] 나만갑의 아들, 손자들, 나명좌는 송준길의 사위이기도 하다.[27] 현종 시기 발생한 공의, 사의 논쟁에서 서필원을 지지해 주었다.[28] 공의, 사의 논쟁의 시발이 된 인물[29] 김시진과 함께 훗날 서필원을 지지한 사람 중 한 명이다.[30] 삼수갑산의 삼수인데 당시 윤선도가 70대에 이르렀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러한 추운 산골짜기로 유배를 보내는 것은 상당한 중형이다.[31] 사실 송시열은 다른건 몰라도 인간성에 대해서는 문제가 많았다. 친구인 윤휴에게는 사문난적이라고 하였고 또다른 친구인 윤선거는 생전에는 불편하기는 했지만 관계를 끊지는 않았는데 그가 죽은 뒤 묘지문에 술이부작이라고 쓰는 치졸한 모습을 보여줬다. 심지어 윤선거의 아들인 윤증은 본인의 수제자나 다름없었는데도 이런 짓을 했으며 이 문제 때문에 회니시비를 벌여 절교한건 덤. 자신을 천거했던 이경석과도 수이강 사건을 벌이는 치졸한 모습을 보였다.[32] 영남에서 남인세가 강한걸 잊지 말자. 남인의 시초격인 이황이 경상도 출신이다.[33] 강씨의 아버지 강석기가 송준길과 이종사촌이였다.


[34] 영의정 이준경의 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