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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03 21:41:34

문묘

1. 개요2. 나라별 문묘
2.1. 한국2.2. 중국
2.2.1. 공묘2.2.2. 남종 공묘
2.3. 대만2.4. 베트남2.5. 일본

1. 개요

문묘(文廟)는 공자를 모신 사당으로, 중국에서 유래되었다. 문묘라는 명칭은 문선왕묘(文宣王廟)[1]의 약자이며, 공자묘라고도 한다. 보기에 따라서는 일본신사와 비슷한 개념이다. 동아시아 문화권의 상징이다.

2. 나라별 문묘

2.1. 한국


<colbgcolor=#c00d45> 조선 문묘 종사 동국 18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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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c81e> 서무 종향 <colbgcolor=#fff078> 문창후(文昌侯)
최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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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총
<colbgcolor=#1ec8ff> 동무 종향
문충공(文忠公)
정몽주
문성공(文成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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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여창
문경공(文敬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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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원공(文元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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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정공(文正公)
김인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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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세채
문정공(文正公)
송준길
<colcolor=#373a3c,#ddd> ■ 진한 색: (동무종향) 조선 5현
■ 진한 색: (서무종향) 조선 5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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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색}}}: 조선 종묘 배향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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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는 조선시대에 성행하였으며, 과거제서원과 더불어 유교 사회의 단면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요소였다. 조선조 말기에는 그 규모가 커져 공자 이하 133명을 모시게 되었다. 조선의 문묘는 사적 제143호 '서울 문묘와 성균관'으로 지정되었다. 중국의 공자를 비롯한 성현들에 더해, 우리나라에서는 신라의 설총, 최치원, 고려의 안향, 정몽주, 조선의 14인의 현인 등 동국 18현이 배향되었다. 동순위일 경우 동배향이 서배향보다 선배이다.

문묘에 배향되면 선정(先正)으로 인정받아 인신(人身)으로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명예를 부여받았다. 따라서 그 배향 논의는 매우 신중하고 격론을 거쳐 오랜시간을 두고 진행되었는데, 광해군 때 조선오현(朝鮮五賢)[2]이 우여곡절 끝에 배향된 이후, 특정 붕당이 장기 집권하면서 그 이후 배향된 인물들은 배향과 출향을 반복[3]하며 논란이 지속되었다.[4] 비유해서 말하자면, 한국의 문묘는 조선판 명예의 전당이라 볼 수 있다.
파일:문묘_대성전.jpg
서울 문묘 대성전
서울의 성균관 및 지방의 향교에 두었는데, 서울 문묘 및 성균관<대성전ㆍ동무ㆍ서무ㆍ삼문ㆍ명륜당>(서울 文廟 및 成均館<大成殿ㆍ東廡ㆍ西廡ㆍ三門ㆍ明倫堂>)은 보물 제141호, 서울 문묘와 성균관은 사적 제143호로 지정되었고, 향교의 대성전 중에도 보물 또는 유형문화재나 문화재자료로 지정된 것들이 다수 있다.

2.2. 중국

文廟(wén miào, 원먀오). 중국 전역에 수많은 문묘들이 존재한다.

2.2.1. 공묘

산둥성 취푸시에 위치한 문묘로, 중국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한다. 중국어로는 쿵먀오(孔庙)라고 부른다. 처음 지어진 이후 몇 차례의 크고 작은 훼손을 거쳤지만 잘 남아있다. 이후 문화대혁명으로 상당한 양의 유물들이 파괴와 방화로 소실되어 현재는 복원중이다. 참고로, 베이징에도 공묘가 있다. 이 곳은 원나라부터 청나라까지 중국 최고 유학교육기관으로 쓰였고 현재는 유학박물관으로 쓰이고 있다.

공자의 무덤인 공림과는 다르다. 그 전에 무덤을 뜻하는 묘(墓)와 공묘는 한자가 다르다.

대중매체에서는 게임 문명 4에서 유교의 종교 불가사의로 등장했다.

2.2.2. 남종 공묘

저장성 취저우시에 있다. 일반 문묘와 다른 점이라면, 공자의 다른 직계 후손인 남종 가문이 직접 제례를 지내는 곳이라는 사실이다.

이는 송나라가 강남으로 쫒겨나게 된 1126년 정강의 변과 연관이 있다. 정강의 변으로 당시 공자 가문의 종손인 연성공 공단우(48대손)는 남송 조정을 따라 구주로 피난을 가서 새로 공묘를 세웠다. 곡부에는 공단우의 동생인 공단조가 남았는데, 곡부를 점령한 금나라에서 공단조를 새 연성공으로 임명해서 공자의 제사를 지내는 적통 가문이 2갈래로 나뉘었다. 곡부에 남은 공단조의 가문을 북종(北宗), 구주로 피난간 공단우의 가문을 남종(南宗)으로 부른다.

1282년 원나라 쿠빌라이 칸이 당시 남종의 종손인 공수(孔洙)에게 곡부에 돌아가서 가문을 이으라고 명하자, 공수가 북종의 종손인 공치에게 연성공 자리를 양보하며 정통성을 정리했다. 이를 공수가 연성공 작위를 양보했다고 해서 '공수양작(孔洙讓爵)'이라고 부른다. 이후 남종은 연성공 자리를 잃고 일반 민간가문이 되긴 했지만, 그래도 한때 공자의 종가였다는 점을 인정받아서 명청 때까지 나름대로 대우를 받았고, 사가에서 공자에게 제사를 드림을 허락받아서 제례를 쭉 이어간다.

2.3. 대만

대만 타이베이 다퉁구(大同區) 다룽제(大龍街) 275호에 있는데, 보통 타이베이 공묘(臺北市孔廟)로 불린다. 본래 타이베이 공묘는 1879년 광서제 때 건설을 시작해서 1882년 완성되었다. 이후 청일전쟁으로 일본이 대만을 점령하자 공묘를 해체하고 그 자리에 병원과 여학교를 세웠다. 1929년 대성전을 복원하고 석전대제를 재개했으나, 2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일본 총독부가 다시 제사를 금지해서 명맥이 끊겼다. 종전 후인 1946년 다시 석전대제를 시작하였고 이후 개보수를 거쳐서 1971년부터는 타이베이 시정부가 관리한다.

중국의 다른 공묘와 달리 이곳을 특별히 언급하는 이유는, 바로 현대에도 공자의 종손인 대성지성선사봉사관이 직접 제례를 올리는 곳이기 때문이다. 본래 공자의 종손들은 위에 언급한 취푸의 문묘에서 거주하며 제례를 지냈으나, 국부천대로 당시 종손인 초대 대성지성선사봉사관 쿵더청은 대만으로 이주하여 이후 타이베이 공묘에서 석전대제를 올렸다. 중화인민공화국은 더 이상 취푸의 공묘에서 석전대제를 지내지 않다가 1990년대 이후에야 겨우 형식적으로 하기 때문에, 정식으로 공자의 종손이 석전대제를 치르는 곳은 대만의 타이베이 공묘가 되었다.

2.4. 베트남

수도 하노이에 1070년에 세운 문묘가 있다. 1076년에 베트남 최초의 대학으로서 유학자를 양성한 곳이다. 베트남 한자음으로는 반미에우(Văn Miếu).

하노이의 랜드마크이기도 하며, 베트남의 상징으로 꼽힐만큼 유명한 유적이다.

1484년 진사(회시 합격자)들의 명단을 새긴 비를 세운 이래 1787년까지 진사 합격자 1306명(1442-1787년 간의 진사)의 명단을 새긴 진사제명비 82기가 있다.

위에서 언급한 중국 취푸의 문묘를 본떠 세운 곳이다.

2.5. 일본


[1] 당현종이 공자를 문선왕으로 추증하였다.[2] 동방오현(東方五賢)이라고도 한다. 문경공(文敬公) 김굉필, 문헌공(文獻公) 정여창, 문정공(文正公) 조광조, 문원공(文元公) 이언적, 문순공(文純公) 이황[3] 율곡 이이는 처음 거론된 지 71년 만에야 최종 확정되었다.[4] 고려시대에는 해동 공자로 불린 최충, 이제현, 조선시대에는 비록 제자들이 북인을 이룬 후 몰락했다고는 하나 조식, 기대승 등이 빠져 있고, 문묘에 배향된 조헌 같은 경우 충신으로 높일 수는 있어도 학문적으로 이룬 것이 많다고 할 수 없어, 그 선정에 있어 다소 의아한 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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