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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사(祭祀)란 신이나 신령, 죽은 사람의 넋 등에게 제물을 봉헌하는 의식을 말한다. 따라서 고대 종교의 신전 제의, 가톨릭의 미사 등도 일컫는 폭넓은 개념이지만, 오늘날 한국어에서는 주로 조상제사의 의미로 쓰인다. 이 문서에서는 조상제사를 설명한다.전세계 어디에나 제사에 해당하는 조상 추모 의식은 존재하지만, 대한민국에서는 제사라 함은 유교적 제례 행위를 가리키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유교식으로는 기본적으로 사대봉사(四代奉祀)라고 하여 '제주'의 4대조(부, 조부, 증조부, 고조부)까지의 제사를 지내는 것이 기본이었고,[1] 이게 넘어가면[2] 매안(埋安)이라고 하여 신위를 사당에서 옮겨 땅에 묻고 원칙적으로 더 이상 제사를 지내지 않았다. 이후 5대조 이상의 조상은 개개인의 기일이 아닌 음력 10월에 동시에 기리는 묘사(墓祀)[3]를 지내거나, 큰 공을 세운 조상의 신위는 시대가 지나도 옮겨 그만두지 않고 계속 제사를 지내는 불천위(不遷位) 같은 예외가 추가되었다.[4]
보통 서양권에서 이 문화를 소개할 때 제사를 보통 Korean Ancestral Rites(한국의 조상에 대한 의례)라고 하거나 아예 Jesa로 음역한다.
2. 유래
신이나 신령, 조상 등에게 봉헌하는 의식은 유교뿐 아니라 수많은 종교에서 관찰되며 중요시된다. 지중해 문화권의 고대 종교들에서는 훌륭한 제사는 '경건함'의 주요한 예시였고, 동아시아에서는 갑골문에서 수많은 제의를 확인할 수 있다. 오늘날에는 종교가 개인의 사적 영역으로 인식되지만, 종교가 공적 영역으로 인식되던 고대에는 개인과 공동체의 신심을 외적으로 표현하는 제사가 자연스럽게 중시되었다.한국의 전통적인 제사는 중국을 중심으로 한 한자 문화권 바탕에 한반도의 지역적 특성이 섞여서 형성된 것이다. 고대 중국 상나라(은나라)의 왕 조갑이 주변 토착신을 배제하고 조갑의 직계 조상만 섬기는 조상신 풍습을 만들게 되는데, 기록을 보면 상족의 조상은 직계인 근조선공과 직계가 아닌 원조선공으로 나뉘는데, 상나라에서 제사는 직계 선조인 근조선공에게만 지냈다. 이러한 조상을 섬기는 문화에서부터 제사가 시작된 것. 이때 제사의 제물 중에는 상나라 사람이 아닌 다른 족속의 사람도 있다. 즉 인신공양을 한 것인데, 자세한 것은 상나라 문서로.
결국 상나라는 주나라에 의해 멸망당했지만 주나라는 위에서 조갑이 퍼뜨린 풍습을 따라 상나라의 제사방식을 이어받았다. 그뿐만 아니라, 상나라의 전 지도층을 제후로 임명해 상나라 조상에 대한 제사를 계속 이어가도록 했다. 이것도 다른 가문의 제사를 끊기게 하면 그 사람에게 제사가 끊어진 조상 귀신들이 재앙을 내린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후 떠돌이 생활을 하며 왕들을 가르치던 공자가 주나라 제사 문화를 재정비했다.
일반명사로서 제사의 뜻은 이렇지만, 흔히 한국에서 '제사'라고 하면 '조상 제사'를 가리키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런 수단으로서 행해진 제사는 중, 근세에 이르러 유교와 결합하여 조상숭배의 제도로 고착되었다. 또한 종교적 의미를 가지면서 정치적 수단으로 활용되기도 한다. 정교가 분리된 이후에도 황제는 하늘에 대한 제사를 주관하며, 자신의 조상을 신격화하여 제사를 지내는 것으로 권위를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사용하였다.
다만 제후국을 자처한 조선의 왕은 하늘에 대해 제사를 지낼 수 없었고, 왕조의 조상신(종묘)과 땅의 신(사직)에는 제사를 지냈다. 대한제국 선포 이후에는 환구단을 지어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 또한 가정에서는 효의 의미를 가져 가문의 통치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하였다. 종교적 면은 사후세계의 인정을 통한 유교 특유의 간접적 영생법의 의미를 가졌다.
고려, 조선 전기까지는 아들딸 상관없이 재산을 공평하게 분배받고 제사의 주체에서도 남녀차별이 없었다. 조선 전기까지만 해도 출가외인이라는 개념이 없었기에, 남녀 구별 없이 돌아가면서 제사를 모셨으며, 기혼 남성이 돌아가신 아버지 제사를 지내기 위해 시집간 누나의 집을 방문하는 경우도 많았다. 하지만 조선 중기 이후, 유교에서 제사를 지내는 장남이 아버지의 재산 2/3을 받고, 나머지를 다른 아들들이 나누고, 딸은 받지 못하는 인습(因習)이 집성촌일 경우 현재까지 유지되고 있다. 집성촌 할아버지는 장남의 장손(장남)이 태어나자마자 재산을 미리 물려주는 편이다. 이후 고모가 아버지 재산을 못 받았다고 조카를 법원으로 데려갈 수는 없지 않는가? 현재에도 예전관습이 일부 변형되어 계승되고 있는데 제사를 주재하는 당사자는 분묘에 속한 1정보 이내의 금양임야와 600평 이내의 묘토인 농지, 족보와 제구의 소유권을 단독으로 상속받을 수 있다. 다만 관계상속인 전원의 일치된 합의가 있어야 하고, 그러지 못한 경우 법원에 소송을 제기하여 그 청구이유의 상당성을 인정받아야 한다.
3. 제사의 종류
3.1. 제사의 진행
제사의 진행순서와 예법은 가문과 지역에 따라 차이가 있으나 일반적인 전통제례의 진행 절차는 다음과 같다.1. 영신(迎神)
먼저 고인의 영혼이 들어오게끔 대문을 열어 놓는다. 제상의 뒤쪽(북쪽)에 병풍을 치고 제상 위에 제수를 진설한다. 지방을 써 붙이고 제사의 준비를 마친다. 예전에는, 출주(出主)라 하여 사당에서 신주(神主)를 모셔 내오는 의식이 있었다.
2. 분향강신(焚香降神)
영혼의 강림을 청하는 의식이다. 제주(祭主)가 신위 앞으로 나아가 꿇어앉아 향로에 향을 피운다. 집사(執事)가 제상에서 잔을 들어 제주에게 건네주고 잔에 술을 조금 따른다. 제주는 두 손으로 잔을 들고 향불 위에서 3번 돌린 다음, 모사 그릇에 조금씩 세 번 붓는다. 빈 잔을 집사에게 다시 건너 주고 일어나서 두 번 절한다. 집사는 빈 잔을 제자리에 놓는다. 향을 피우는 것은 하늘에 계신 신에게 알리기 위함이고, 모사에 술을 따르는 것은 토지신에게 알리기 위함이다.
3. 참신(參神)
고인의 영혼에 인사하는 절차로서 제주를 포함한 참사자(參祀者) 모두 신위를 향하여 두 번 절한다. 신주를 모시고 올리는 제사일 때는 참신을 먼저 하고 지방을 모셨을 경우에는 강신을 먼저 한다. 미리 제찬을 진설하지 않고 참신 뒤에 진찬(進饌)이라 하여 제찬을 올리기도 한다. 진찬때는 주인이 육(肉,고기) 어(魚,생선) 갱(羹,국)을 올리고 주부가 면(麵,국수) 편(餠,떡) 메(飯,밥)를 올린다.
4. 초헌(初獻)
제주가 첫번째 술잔을 올리는 의식이다. 제주가 신위 앞으로 나아가 꿇어 앉아 분향한다. 집사가 술잔을 내려 제주에게 주고 술을 가득 붓는다. 제주는 오른손으로 잔을 들어 향불 위에 세 번 돌리고 모사 그릇에 조금씩 세 번 부은 다음 두 손으로 받들어 집사에게 준다. 집사는 잔을 받아서 메 그릇과 갱 그릇 사이의 앞쪽에 놓고 제물 위에 젓가락을 놓는다. 제주는 두 번 절한다. 잔은 합설(合設,고인의 내외분을 함께 모시는 것)인 경우 고위(考位,남자) 앞에 먼저 올리고 비위(여자) 앞에 올린다. 집안에 따라서는 술을 올린 뒤 메 그릇의 뚜껑을 연다.
5. 독축(讀祝)
축문 읽는 것을 독축이라 한다. 초헌이 끝나고 참사자가 모두 꿇어 앉으면 축관은 제주 좌측에 앉아 천천히 정중하게 염불하듯이 엄숙한 목소리로 읽는다. 축문은 보통 제주가 읽지만, 집사가 읽어도 무방하다. 독축이 끝나면 참사자 모두 일어나서 재배하는데 초헌의 끝이다. 과거에는 독축 뒤에 곡을 했다. 현재는 독축을 생략하는 집들이 많으며, 주로 묘제 지낼 때 쓴다.
6. 아헌(亞獻)
두번째 잔을 올리는 의식이다. 주부(제주의 아내)가 올리는 것이 관례이나 주부가 올리기 어려운 경우에는 제주의 다음가는 근친자인 남자가 초헌 때와 같은 순서에 따라 올리기도 한다. 이때 모사에는 술을 따르지 않는다. 주부를 포함한 여자는 4번 절한다.
7. 종헌(終獻)
세번째 술잔을 올리는 의식이다. 아헌자 다음 가는 근친자가 올리는 게 원칙이나 참가자 중 고인과의 정분을 고려하여 잔을 올리게 하기도 한다. 아헌 때와 같은 방법으로 한다. 잔은 7부쯤 부어서 올린다.
8. 첨작(添酌)
종헌이 끝나고 조금 있다가 제주가 신위 앞으로 나아가 꿇어 앉으면 집사는 술 주전자를 들어 신위 앞의 술잔에 세 번 첨작하여 술잔을 가득 채운다. 집안에 따라서는 집사로부터 새로운 술잔에 술을 조금 따르게 한 다음 집사는 다시 이것을 받아, 신위 앞의 술잔에 세 번으로 나누어 첨작 하는 경우도 있다.
9. 삽시정저(揷匙正箸)
메 그릇의 뚜껑을 열고 숟가락을 밥 위의 중앙에 꽂는 의식이다. 이때 수저 바닥(안쪽)이 동쪽으로 가게 한다. 젓가락은 시접 위에 손잡이가 왼쪽을 보게 놓는다. 제주는 2번, 주부는 4번 절한다.
10. 합문(闔門)
영위(靈位)께서 식사하는 시간을 갖게 하는 의식이다. 참사자가 모두 잠시 밖으로 나가고 문을 닫고 몇 분 동안 조용히 기다린다. 대청마루에 제상을 차렸으면 뜰 아래로 내려가 읍(揖,상견례때 하는 절)한 자세로 잠시 기다린다. 혹은 제자리에 모두 엎드려서 있다가 일어선다.
11. 계문(啓門)
계문이란 문을 여는 것을 말한다. 축관(祝官)이 세 번 헛기침을 한 후 방문을 열며 들어 가면 참사자가 모두 뒤따라 들어간다.
12. 헌다(獻茶)
헌다란 차를 올린다는 뜻이다. 갱(국그릇)을 내리고 숭늉을 올려 숟가락으로 메를 세 번 떠서 숭늉에 말고 수저를 숭늉 그릇에 놓는다. 이때 참사자 모두 읍한 자세로 잠시 동안 꿇어 앉아 있다가 제주의 기침소리를 따라 고개를 든다.
13. 철시복반(撤匙復飯)
숭늉그릇에 놓인 수저를 거두고 메 그릇의 뚜껑을 덮는 것을 말한다.
14. 사신(辭神)
고인의 영혼을 전송하는 절차로서 참사자가 신위 앞에 두 번 절한뒤 지방과 축문을 향로 위에서 불사른다. 지방은 축관이 모셔 내온다. 신주는 사당으로 모신다. 이로써 제사를 올리는 의식 절차는 모두 끝난다.
15. 철상(撤床)
제상위의 모든 제수를 집사가 물리는데 뒤에서부터 차례대로 한다. 철상하면서 제수 음식을 조금씩 잘라서 밖에 묻어 두는 풍습도 있는 집안도 있는데, 고인과 집안 조상들, 배우자의 조상들께 바치는 것이다.
16. 음복(飮福)
참사자가 한자리에 앉아 제수를 나누어 먹는데 이를 음복이라 한다. 음복을 끝내기 전에는 제복을 벗거나 담배를 피워서는 안 된다.
3.2. 사시제 四時祭
봄 제사를 사祠라 하고, 여름 제사를 약礿이라 하고, 가을 제사를 상嘗이라 하고, 겨울 제사를 증烝이라 한다. 자주하면 더러워지고 더러워지면 공경하지 않는다. 성글면 게으르고 게으르면 잊는다.
공양전
공양전
철을 따라 1년에 4번 드리는 제사로서, 매 중월(2월,5월,8월,11월) 상순(上旬)의 정일(丁日)이나 해일(亥日)을 가리어 지낸다. 보통 날짜는 전달 하순에 정한다. 제사 전 3일 동안 재계(齋戒)한다.
재계는 제사와 같이 성스러운 대상을 가까이할 때 부정한 기운으로 인해 탈이 생길 것을 두려워하여 불결한 것을 멀리하고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는 정화의식이다. 재계에는 불결하다고 여겨지는 것을 멀리하는 소극적인 행위와 일상적인 것을 멈추고 제사에만 전념하는 적극적인 행동이 함께 있다.
제사 하루 전날에는 정침을 깨끗이 청소하고 신주 모실 자리를 마련한다. 방 한가운데에 향탁(香卓)을 놓고 그 위에 향로 향합 촛대를 놓는다. 주부는 제기를 갖추어 손질하고 제찬을 정결하게 마련한다.
밤새도록 촛불을 밝혀 두고 다음날(제삿날) 날이 밝으면 아침 일찍 일어나 제주 이하 모든 참사자는 제복을 입고 사당으로 나아가 분향한 뒤 신주를 정침으로 내 모신다. 제사를 지내는 순서는 참신, 강신이 끝나면 초헌, 아헌, 종헌에 이어 유식, 합문, 계문을 한 뒤 수주를 한다. 사신 하고 나서 납주(納主)하면 상을 물리고 음식을 나누어 먹는다.
3.3. 기타 제사
3.3.1. 차례 茶禮
설날, 한식, 단오, 추석 네 명절에 지내는 제사를 말한다. 중국에는 없는 조선 고유의 제사. 정제가 아니므로 시제보다 가볍게 지내는 것이 예가 되었다.3.3.2. 시조제 始祖祭, 선조제 先祖祭, 녜제 禰祭
- 시조제
나머지는 시제의 의식과 같다.
- 선조제
나머지는 시제의 의식과 같다.
- 녜제
나머지는 시제의 의식과 같다.
주자는 시조제와 선조제를 분수에 넘친다면서 폐하였으나 예외적으로 녜제만을 남겨두었는데, 조선 유학자들은 주자의 생일이 계추이므로 생일상을 겸하려는 의도가 아니었을까
3.3.3. 기제 忌祭
기일에 고인께 제사를 지낸다. 일반적인 제사의 의미가 이것이다.3.3.4. 묘제 墓祭
위의 제사들은 모두 집의 사당에서 지내는 것이고, 묘제는 말 그대로 직접 조상들의 선산에 가서 지내는 제사를 말한다. 경상도에서는 '묘사'라고도 부른다. 집에서 지내는 제사랑 방식이 거의 비슷하지만, 야외에서 축문을 읽고 지낸다는 게 차이점이다.1. 3월 상순에 날을 가린다.[7][8]
2. 하루 전에 재계한다.
3. 제찬을 갖춘다.
4. 낡이 밝으면 물 뿌리고 쓴다.
5. 자리를 펴고 제찬을 진설한다.
6. 참신, 강신, 초헌
7. 아헌, 종헌
8. 사신, 철상
9. 그대로 후토에 제사 지내는데 자리를 깔고 제찬을 진설한다.
10. 강신, 참신, 삼헌
11. 사신하고 철상하고 물러난다.
3.3.5. 절충안
보다시피 저걸 다 하면 1년 내내 제사가 있게 된다. 특히 사시제 넷과 차례 넷, 그리고 묘제 둘이 계절별로 겹쳐버리는바, 조선의 유학자들도 이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하였다. 율곡은 한식과 추석에는 사당에서 FM대로 하고, 설날과 단오에는 묘에 가서 간소하게 제사지내는 절충안을 건의하고 꽤 많은 이들이 이를 따랐다.4. 형식과 절차
飯(밥) | 盞(술) | 醋醬(초장) | 羹(국) | ||
麪食(만두/국수/빵) | 肉(고기) | 炙(꼬치) | 魚(생선) | 米食(떡) | |
脯(육포/어포) | 熟菜(나물) | 醢(염장고기) | 醋菜(생채) | 鮓(식해) | 沉菜(김치) |
果(과일) | 果(과일) | 果(과일) | 果(과일) | 果(과일) | 果(과일) |
위의 사진은 현대에 정립된 일반적인 제사상으로, 1960년대에 허례허식화된 가정 의례를 쉽게 알고 실행하기 위한다는 취지로 간략화시킨 건전가정의례준칙에 의거한다.
아래는 1792년에 간행된 가례증해에 따른 제사상으로 1위당 1상을 원칙으로 한다. 따라서 1인분만 올라가므로 비교적 양이 적은 편. 가례증해는 저 도해는 예시로 생전에 고인이 좋아하던 음식이나 집에 좋은 음식이 들어왔을 경우에는 그것을 올려도 상관없으며, 다만 과일은 짝수, 어육은 홀수로 형편에 맞게 정성껏 찬을 차리면 족하다고 하였다.
현대의 제사상은 지나치게 화려하고 전통에 맞지 않다는 의견이 퍼져 있으나, 실제로 제사상은 과거 더 화려하였다. 성균관 의례부장 '홍동백서 등 차례상 규칙 근거 없다'와 같은 기사가 나오긴 하였으나 이는 차례상으로, 원래 유교에서는 차례상과 제사상을 엄격히 구분하였으며 차례상은 간단히 차와 술, 다과만을 올리고 제사상은 화려하게 각종 전통음식을 예절에 맞춰 올렸다.
그렇지만 현대에 일반적으로 문제삼는 제사라는 게 일반적으로 기제사 등을 말하는 게 아니고[9] 명절의 차례인 것을 생각하면 지나치게 화려하고 전통에 맞지 않다는 의견이 그리 틀린 말은 아니다. 현대에는 명절 차례상을 구분하지 않고 대부분 기제사처럼 인식해서 차리는 경우가 많다보니 생기는 문제.
4.1. 차례와 기제사의 차이
두산백과에 따르면 음력 매달 초하룻날과 보름날, 명절날, 조상 생일 등에 간단히 지내는 제사를 차례라고 한다고 한다. 간단히 말해 특별한 명절(설날, 추석 등)에 한해서 제사가 아니라 차례라고 부른다는 것. 즉, 차례는 제사에 포함되는 개념이며, 제사의 특별한 케이스가 차례이다. 그러니 설날이나 추석에 지나는 제사도 '제사'라고 불러도 무방하며 딱히 틀리거나 한 것은 아니다. 반대로 모든 제사를 차례라 부르진 않으며, 그렇게 부르는 것은 틀린 표현이다. 일반적으로 제사라고 하면 기제사를 가리키는데, 기제사란 죽은 사람의 기일에 그 사람만을 위해 지내는 제사를 의미한다. 기제사든 차례든 보통 제주 위로 돌아가신 4대 조상[10][11]까지 지내는 건 마찬가지지만, 명절 등에 지내는 차례는 4대 조상까지 연달아 대접하는 제사를 의미하므로, 기제사와 엄연히 다르기 때문이다.역사적으로 보면 차례는 삼국사기 제사지의 내용이나 중국의 차가 전해지고 재배한 역사를 감안하면 명절 제례로 신라시대부터 지낸 것으로 추정되고, 이름 그대로 원래는 차를 올리는 다례였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불교가 국교이던 신라, 고려시대와 차라는 부분을 고려하면, 세시풍습 + 계절제와 불교식 성향이 더해져서 탄생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숭유억불 정책을 시행한 조선시대가 되면서 불교식 세시풍습을 그대로 둘 수가 없었기 때문에 세시 풍습도 유교식으로 변화해간다. 실제로 조선시대 예법의 기본 취급 받는 주자가례 중 참례와 천신례는 세시의 제사를 다루고 있는데, 이때 초일에는 술과 차를, 그리고 보름에는 차만을 올렸다. 그러나 술 대신 차를 올리는 것이 아무리 봐도 불교 냄새가 강하다는 생각도 있었고, 중국과 달리 조선에서 차는 엄청난 고급 사치품이었기 때문에[12] 조선시대 성리학자들은 "아무래도 중국에서는 차를 올리지만, 조선은 술이죠"라면서 차례상에서 차를 빼고 술로 일원화했다.[13]
이후 명절에 지내는 제사의 다른 이름이 된 것은 조선 후기 성리학적 성향이 강해진 영향으로 보인다.
4.2. 음복
제사를 지낸 뒤에 제사에 쓰인 제주(祭酒)와 제물을 나눠서 먹는 것. 집안에 따라 제상에 올린 나물과 밥을 함께 비벼서 비빔밥을 만들어 먹기도 한다.[14]제물이 평소 먹던 음식보다 맛없다고 느끼는 경우가 많은데, 음식이 식고 난 뒤에 먹기 때문이다. 특히 고기나 생선류는 한번 조리되고 나서 식으면 수조육류 특유의 냄새가 나고, 다시 데우면 오히려 냄새가 심해진다. 양념이 안 되다 보니, 양념이 들어갔을 때보다 냄새가 심하다. 음식에 간은 하지만 양념을 하지 않는 이유는, 양념의 매운 맛이나 향이 영혼을 쫓아낸다는 믿음 때문이다. 무당들도 귀신을 쫓아내는 의식을 행할 때 마늘이나 고춧가루를 사용한다. 물론 무당 이야기 나온 것에서 짐작할 수 있겠지만, 근거 따위는 전혀 없다. 실제로 강한 양념을 하지 않는 것은, 양념을 강하게 하는 것이 상스러운 것으로 취급받았기 때문이거나, 혹은 강한 양념 자체가 제사 풍습이 확립된 다음에 들어왔기 때문.[15] 그 향신료로 귀신을 쫓을 수 있느냐 마느냐는 모든 종교의 바탕인 신과 귀신의 실존을 증명할 수 없는 이상 믿음의 문제니 넘어갈 일이다.
거기다가 남아서 냉장고에 넣어 두면 냉장고의 냄새까지 밴다(...). 밀폐용기나 지퍼백에 넣어두는 것이 낫다. 과거 이런 용기나 생활방식이 없던 시절에는 대부분의 집이 비닐봉지에 대충 담아놓았고, 이렇게 보관하다 보니 누군가 먹다 버린 것 같은 느낌이나 음식에 상한 냄새가 난다고 느끼는 사람도 있다.
팁을 적자면, 수제 냉동식품처럼 취급하면 된다. 이삼일 안에 먹을 것은 냉장실에 보관하고, 그 후에 먹을 것은 전을 한입거리로 잘라 비닐백에 골고루 소분해 넣어 꽁꽁 얼리면 된다. 집에서 만들었는데 양을 줄여도 전이 남아 골치라면, 손님이 돌아간 다음, 한 번에 소분 냉동해도 된다.
1) 바닥에 신문지를 넓게 깔고, 전바구니와 도마를 놓고, 도마 주변에 롤백 비닐봉지 10~30개를 주머니처럼 입을 벌여 놓는다.
2) 전바구니에서 전을 종류별로 적당한 갯수씩 주머니에 나눠 담는다. 큰 전이면 한입거리로 잘라 나눈다.
3) 롤백 한 봉지에 들어갈 분량은 한 번에 먹을 양. 되도록 프라이팬 하나로 데울 양을 넘지 않는다. 한 봉지에 전 여러 종류가 골고루 들어가도록 한다.
4) 김치냉장고에 꽁꽁 얼린다.
먹기 전날 냉장고 냉장실에서 해동한다. 이게 가장 좋다. 급하면 꺼내 전자레인지에 1차 해동하거나, 여유가 좀 있다면 프라이팬에 기름을 조금 두르고 데워 식사나 도시락 반찬으로 사용한다. 즉석냉동식품과 다를 게 없다. 나물류와 탕국은 가능한 재료를 섞어 육개장을 만드는 것도 방법.
그리고, 음복 때에는 제사에 쓰인 술인 제주를 제사에 참여한 모든 구성원들이 한 잔씩 하는 경우가 많다. 제사용 주류는 곡물로 담근 맑은 양조주인 한국식 청주[16]를 사용하는 것이 원칙으로, 축문의 맨 마지막 구절인 謹以淸酌庶羞恭伸奠獻尙饗[17]을 보면 알 수 있다. 이 때문에 제사를 지내는 집안, 특히 봉제사접빈객을 의무로 삼는 양반가에서는 모두 청주를 담갔고, 이런 각 가문의 가양주들은 조선 후기에 들어서면서 다양한 전통주가 되었다. 2023년 1월 현재 마트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술 중에서는 예담, 화랑이 전통적, 혹은 전통에 가까운 방식으로 양조한 한국식 청주에 해당한다. 증류주인 소주는 잘 사용되지 않는데, 한국 전통 소주는 1~3회 단식증류로 도수가 40~60도 정도인 증류식 소주라서 술을 즐기는 사람이 아니면 마시기 힘들기 때문.
한국의 "민짜"들이 공개적으로(…) 술맛을 볼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기회인데, 이런 데 엄격한 집안에서는 이럴 때도 아이들에게 술을 못 마시게 하지만, 어른들이 보는 앞에서 음주함으로써 주도를 배우는 기회로 활용하는 집안도 많다. 처음 술버릇이 평생의 술버릇에 미치는 영향이 정말 지대하다는 걸 고려하면, '순한 술'로 가문의 어르신들 앞에서 미성년 자녀가 적당히 긴장타면서 "주도"를 훈육하는 게 상당히 효과가 좋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대부분 당연히 민짜들끼리 모여서 그냥 마시거나 대학에 입학해서 몇살 차이나지 않는 선배들과 값싸고 에탄올만 많은 싸구려 술을 들이붓거나 하면서 술을 잘못 접하게 된다.
한 가지 주의할 점은 명절에 차례나 성묘를 하고 제주로 음복을 하고는 음주운전을 하는 사례도 심심찮게 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명절날 큰 묘지 주변에선 낮시간에도 음주단속을 하기도 한다. 아무리 소량이라도 술은 술인 만큼 운전할 사람은 제주를 마시지 말자. 단속 이전에 안전 문제다. 조상님들 제사 지내러 왔다가 오히려 다음 제사부터 조상님들과 다같이 제삿밥 먹을 수도 있다.
현대 이전에 먹을 것이 귀했던 시절에는 명절, 잔치와 함께 음식을 풍족하게 먹을 수 있는 얼마 안 되는 기회가 음복이기도 하였다. 아래 내용의 '헛제삿밥'의 기원으로 이를 꼽기도 한다.
영혼에게 음식을 대접하는 의식이다 보니 어른들이 "남의 집 젯밥은 함부로 얻어먹으면 안 된다"고 충고하는 경우가 있다. 직설적으로 말하면, 남의 집 젯밥을 먹음은 곧 남의 집 귀신과 한솥밥을 먹은 셈이기 때문이다. 자기 조상님도 아니고, 남의 조상님 귀신과 한솥밥을 먹는다니 껄끄러울 수밖에 없다. 비슷한 이유로 무당들도 제사를 지낸 음식에는 귀신이 붙어 먹으면 부정을 탄다고 하여 일절 손을 대지 않는다고 한다. 다만 본토와 문화가 다른 제주도 토박이 가문들은 예외로 지인의 집 제사에 참석하거나 하는 경우도 허용된다.[19] 또한 음식이 몹시 귀하던 시절의 전후 세대, 기성세대들은 여간 가난한 게 아니다보니 귀신이 먹던 거라도 안 먹으면 당장 자기부터가 귀신이 될 판국이라 어린 시절 음복을 얻어먹기위해 보자기를 들고 줄서 있었다.
4.3. 가문별, 지역별 특색
- 제주도에서는 제사를 식게라고 부른다. 균분상속의 전통이 남아있어 시집간 딸과 사위도 제사에 참석한다.[20] 자녀가 생기면 자녀도 동행하므로 외손자가 제사에 참석하는 게 유별난 일이 아니다.[21] 뿐만 아니라 친구를 제사에 초대하는 경우도 있다. 만약 제주도 사람이 제사에 초대한다면 혈족만큼 친밀하게 여기고 있다는 의미로 받아들여도 된다.[22]
- 제주도에서만 상에 올리는 음식들이 있다. 빵[23], 빙떡 등. 갱도 생선국[24]으로 올린다(주로 생선미역국). 지역특성상 어적도 빠지지 않고 올린다. 적갈 재료는 주로 상어, 오징어, 옥돔. 명절 때 차례상에 만두를 올리지 않는 것도 특징이라면 특징. 술 대신 음료를 쓰기도 하는데, 주로 과일주스가 사용되고 청량음료는 일반적으로 사용되지 않으나, 사용된다 하더라도 환타 등 과일이 들어간 청량음료가 사용된다.# 다만 이건 저 집안의 다소 특이한 사례로 보이고, 일반적으로는 청량음료 특성상 살아 있는 사람들의 건강에도 좋지 않은 걸 감히 조상에게 올리기에는 껄끄럽다는 인식 때문에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것은 아니다.
- 경상도도 제주도와 마찬가지로 다른 지방에서 보기 힘든 돔배기 같은 음식이 제사에 올라온다. 제사 음식들 중에서도 비중을 상당히 높게 치는 편. 집안에 따라서는 문어나 오징어를 데친 숙회를 올린다. 어떤 곳은 고등어도 올리기도 한다.
- 경기도 지방은 녹두전을 올린다.
- 경상북도 안동시에는 헛제삿밥이라는 음식이 있다. 안동의 제삿밥이 맛있기로 유명하자 그곳에 부임한 미식가 관리가 이를 원하였는데, 아랫 사람이 실제 제사에 쓰인 음식은 아니고 같은 재료로 똑같이 만들어 대접하자 관리가 이를 먹고서는 "향이 나지 않으니 진짜 젯밥이 아니구나(헛제삿밥)[25]"라고 하였다고 한다.
- 신숙주의 본관인 고령 신씨의 일부 집안에서는 제사상에 숙주나물을 올리지 않는다.
- 일반적인 제수와 달리 종묘제례나 사직제례에 쓰이는 제수에는 익히지 않은 날것과 양념하지 않은 것이 포함되어 있다. 종종 산신제나 일부 종중에서도 볼 수 있는데, 산신제에서 이렇게 올리는 것은 유교의 영향이다. 산신제에는 고기를 잘 쓰지 않으나, 이는 현재 대부분의 산신각이 절 안에 있는 것도 있고, 남자 산신에게만 고기를 올리는 곳도 있다. 강원도 영월군의 태백산 산신제에서는 쇠고기를 쓰는데, 이는 영월 청령포에서 세조에게 사사당한 단종을 태백산 신으로 존대한다는 의미가 있다고 한다.
- 조선 후기 이후 제사의 주체는 일반적으로 남성, 특히 장남이 지내는 것으로 인식되나, 현대에는 평등 의식으로 인해 형제들이 순번을 정해 돌아가면서 지내거나 함께 제사를 지내는 경우도 있다.
- 조선 중기의 문신인 이발의 가문인 광산 이씨 문중에서는 칼로 고기나 무를 썰 때 '정철정철정철…'이라고 외운다고 한다. 이발의 가문은 정여립의 난 때 정철의 주도로 철저하게 숙청당한 것으로 보았기 때문에 정철에 대한 원한이 엄청났기 때문이다.
- 율곡 이이의 제사상엔 소고기가 올라가지 않는다. 이이가 생전에 "소를 사람들이 부려먹으니 소고기를 먹을 수 없다"는 견해를 지녔기 때문이다.
- 명재 윤증의 직계인 파평 윤씨 노종파 종가의 제사상은 엄청나게 검소한데[26], 이는 "제사상에 손이 많이 가는 전과류나 기름이 들어가는 전을 올리지 말라"는 유훈을 지키는 것이라고 한다.
- 남부 해안 지방에는 명절 차례를 당일날 아침에 지내지 않고, 이전인 전날 저녁이나 밤(자정 직후)에 지내는 곳이 있다.
- 경상남도 서부 내륙 지방에서는 소고기 산적 대신 돼지 수육을 쓰며, 닭고기 산적 대신 삶은 달걀이 쓰이기도 한다.
4.4. 금기 음식
유교의 가르침에는 괴력난신을 논하지 않는데 귀신 운운하는 내용이니 근거가 없는 이야기로, 민간이나 도교에서 내려오는 풍습이 와전돼서 터부화 된 것이다. 최근에는 그냥 조상이 생전에 좋아했던 음식 위주로 제사상을 꾸리는 게 대세이다.- 복숭아 - 귀신을 쫓아낼 때 사용하는 과일이기 때문에 올리지 않는다고 한다. 복숭아 나무로 만든 목검이나 제기로 귀신을 쫓는 중국 무속으로부터 유례된 풍습일 것 같지만, 사실 그런 건 아니고 중국에서 복숭아는 장수의 상징이기도 한데, 이미 죽은 사람에게 장수의 과일을 올리는 건 고인을 욕보이는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 다만 현대 중국에서는 완전 금기 수준까지는 아닌지 생전에 복숭아를 좋아했던 고인의 제사에는 가끔 올리는 경우도 있는 것으로 보인다.
- 고춧가루, 마늘 등의 양념/향신료 - 고춧가루, 마늘의 냄새가 귀신을 쫓는다고 하여 제사 음식에는 간만 해두지 양념을 하지 않으며, 소금조차 넣지 않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밥상에 자주 보이는 배추김치가 제사상에 올라가지 않는 이유 중 하나이다. 다만 오늘날에는 치면 눈에 확 띠는 고춧가루는 사용하지 않지만 실고추는 사용하는 집도 있고, 후추, 생강, 마늘처럼 색이 없는 것은 얼마든지 쓰는 집이 많다. 요즘은 또 케바케라서 고춧가루 잔뜩 풀어넣은 찌개를 올리는 집안도 있다.
- 팥이 들어간 음식들 - 귀신을 쫓아내는 데 사용하기 때문에 올리지 않는다고 한다.
- '치' 자가 들어간 음식들 - '痴(어리석을 치)', '恥(부끄러울 치)' 와 같은 음이어서 부정적인 이미지가 강하기 때문에 올리지 않는다고 한다. 치 자가 들어간 생선을 올리지 않는 경우도 많은데, 이 생선들은 격이 떨어지고 고인과 휘하 선조들을 욕되게 하는 인식 때문에 제사상에 올리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27]
4.5. 용어
제사 음식을 쉽게 차리기 위한 다양한 단어들이 존재하지만 주자가례, 국조오례의 등과 같은 유교 서적에는 나오지 않는 근거 없는 단어들이고, 1980~1990년대 언론들이 몇몇 가문들의 상차림을 인용하여 상은 이런 식으로 차려야 한다며 만들어 전파된 단어들이며, 그냥 차리고 싶은대로 차려도 유교 예법에 전혀 어긋나지 않는다. 다만 제사 지내는 집안의 어른들은 이 단어들에 익숙해져서 이 형식을 지키지 않으면 혼을 내는 경우가 종종 나타난다. 그래도 전형적인 상차림에 없는 메뉴가 점점 늘어나면서, 눈에 확 띄는 몇 가지만 괜찮으면 아무래도 좋다 정도가 되어가고 있다.동쪽이니 서쪽이니 하는 말이 있지만 신위를 북쪽으로 치고 하기에 동쪽은 신위를 마주보고 오른쪽을, 서쪽은 왼쪽을 말한다.
- 어동육서(魚東肉西): 물고기는 동쪽에 고기는 서쪽에 놓는다.
- 두동미서(頭東尾西): 물고기의 머리는 동쪽으로 꼬리는 서쪽으로 가게 놓는다. 즉 생선의 배가 신위를 바라보게 놓는다. 망자 쪽에서 생각해 보면 이쪽이 먹기 편하기 때문.
- 홍동백서(紅東白西): 붉은 과일은 동쪽에 흰 과일은 서쪽에 놓는다. 그런데 과일이 꼭 붉고 흰 것만 있는 것도 아니고, 과일줄에 약과나 산자 등 다른 디저트류도 올라가기 때문에 애매한 경우가 많다. 이럴 때는 보통 진한 색은 동쪽, 옅은 색은 서쪽에 둔다.
- 조율이시(棗栗梨枾): 왼쪽부터 대추, 밤, 배, 감 순서로 놓는다. 다만 대추, 밤, 감, 배 순으로 놓는 조율시이(棗栗枾梨)도 혼용되고 있으며 이는 집안마다 다르다. 고로 남의 제사상에 감놔라 대추놔라 하지 말자. 홍동백서를 쓰는 집안에서는 조율이시를 쓰지 않는 경우가 많을 것으로 예상된다. 위에 말했듯 제사 예법이라는 게 집집마다 다 달라서 함부로 단정하기는 어렵다. 조율이시를 쓰고 나머지를 홍동백서로 쓸 수도 있고. 제일 동쪽에 대추와 밤을 놓고 홍동백서를 따른 후 마지막에 배와 감을 놓을 수도 있다.
- 좌포우혜(左脯右醯): 포는 왼쪽에 식혜는 오른쪽에 놓는다.
- 반서갱동(飯西羹東): 반(밥)은 서쪽에, 갱(국)은 동쪽에 차린다.
- 생동숙서(生東熟西): 날것은 동쪽에, 익힌 것은 서쪽에 차린다.
- 건좌습우(乾左濕右): 건한 음식은 왼쪽에 습한 음식은 오른쪽에 놓는다.
- 적전중앙(炙奠中央): 적과 전은 중앙에 위치한다.
- 접동잔서(接東盞西): 접시는 동쪽에 잔은 서쪽에 놓는다.
- 남좌여우(男左女右): 남자는 제사상의 왼쪽에서 여자는 오른쪽에서 절을 한다.[28] 손을 가지런히 할 때 어느 손이 올라와 하느냐는 말이나, 잔을 돌릴때 어느 방향으로 회전시켜야 하느냐는 말만큼이나, 남녀의 절하는 자세와 자리 구별은 의미없어지고 있다.
제사상을 놓는 법을 쉽게 기억하려면, 신주를 중심으로 첫 열에 밥, 2번째에 메인요리 (적), 3번째 열에 탕, 4번째 열에 반찬, 마지막 열에 디저트라고 생각하면 쉽다. 우리가 평소 밥 먹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제사 지내는 쪽에서는 이걸 거꾸로 보니 (첫열에 디저트) 외우기가 어렵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제사상 놓는 법이 아니다. 고인이 좋아하던 것으로 차릴 수도 있고 후손들, 특히 어린이의 참여를 높이기 위해 어린이가 좋아하는 음식으로 차려도 무관하다.
5. 각국의 제사
5.1. 한국
- 고인의 장남의 집에서 제사를 지내는 경우가 일반적이지만, 장남이 사망하면 차남의 집에서 지낸다.
- 삼국시대 이전: 토테미즘이나 애니미즘, 하늘 숭배 사상이 유행하는 원시적인 종교 형태를 띠고 있다.
- 삼국시대 초기: 고조선, 부여, 고구려, 삼한(마한, 진한, 변한)에선 동맹, 수신, 영고 등 산과 강, 신과 하늘에게 지내는 의식 비슷한 제사가 진행됨. 이후 왕조의 형태가 잡히면서 주로 황실에서 시조에 대한 제사가 진행됨. 이때 고구려에서 시조의 조각상을 세우고 그를 숭배하는 제사는 고려에도 이어진다.[29]
- 삼국시대 중후반 ~ 남북국시대: 불교와 도교의 수입이 이루어지면서 절이 세워지고 불교식 제사가 자주 진행됨. 팔관회나 연등회 같은 행사가 황실 위주로 이루어짐. 신라에선 도교식 제사인 초제[30]가 행해져 조선 중기까지 이어진다. 이후 유교의 수입도 이어져 신라에선 종묘와 사직단이 설치되어 황실에서 유교식 제사가 이루어진다.
- 고려 시대: 삼국시대의 제사들이 이어져 내려오고 성종 때 종묘와 환구단, 사직단 등을 설치해 황실에서 제사를 시행, 민중들은 팔관회, 연등회 등에 참가했다.
- 고려 말기: 성리학의 수입과 더불어 주자가례에 따라 가문의 무덤(가묘)를 설치하려는 운동이 사대부 사이에서 활발해졌으나 별로 보급되진 않음. 절에 제사를 대행하는 경우가 많았다.
- 조선 시대 초기: 고려 때 있었던 불교식 의례의 전통이 남아 주자가례와 같은 유교 의례는 사회 전반에 보급되지 않았다. 경국대전에서는 문무관 6품 이상 관료는 3대, 7품 이하 관료는 2대, 서민은 부모만 제사 지내도록 했다.[31]
- 16세기 중반: 성리학이 심화되어 양반사회에서 주자가례가 정착되고 주자가례에 명시된 4대조까지 제사를 지내는 전통이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면서 조상에 대한 존경과 추모의 표시로 행하여 지고 있다. 20세기 이후 개신교와 이슬람의 유입으로 인해 개신교, 이슬람 신자들은 제사가 자신들의 교리와 충돌한다는 이유로 제사를 거부하곤 한다.
- 문묘 : 공자 제사
- 창덕궁 대보단, 만동묘 : 명나라 황제 제사
- 선농단 : 조선 시대 임금들은 중국 전설에 나오는 농사의 신 염제 신농과 후직을 모시고 풍년을 기원하는 제(祭)를 올렸다.
- 하회탈 전설 : 고려 시대 중반 마을 사람들이 자살한 김 씨 처녀의 제사를 지내주었다고 한다.
- 삼척 해신당(海神堂) : 마을 제사를 지내는 제주(祭主)가 자신의 실물크기 남근을 깎아 모셨는데, 이것은 모태솔로로 사망한 처녀의 영혼인 해신을 위로하고 풍어와 다산을 염원하는 행사이다.
북한의 경우 유물론적 공산주의 체제를 명분으로[32] 1960년대부터 조상숭배와 민간풍속을 봉건 잔재, 구 폐습으로 규정하고 혁파해버렸다. 성묘, 제사까지 금지당하다가 어떤 이유에서인지 조금 허용되었다. 탈북민의 증언에 따르면 함경도 특유의 문어나 임연수어, 수수전을 차례상에 올리는 풍습은 단절되지 않은 것으로 보이나 지도부의 권위를 가장 손상시킬 수 있는 신위를 올리는 것이나 제사와 무관하게 스승이나 부처에게 세 번 절을 하는 풍습은 거의 단절되어 북한에서는 절은 세 번 하게 되었다.
남북을 막론하고 고인이 사형수나 흉악범인 경우에는 제사를 당연히 지내지 않는다. 조선시대에 고위층의 제사용 얼음은 주로 동빙고에서 가져왔다고 한다.
5.2. 미국
일부 한국계 미국인들이 제사를 지내는 경우가 있으나, 한국 본국에 비해 제사를 지내는 비율은 훨씬 적다.일단 1세대 한국계 이민자 커뮤니티가 한인교회[33]를 중심으로 형성되었기에 개신교로 개종한 이민자들은 당연히 제사를 지내지 않게 되었다. 한인교회를 다니지 않거나 다니더라도 인맥을 위해 형식적으로 다니는 한인들의 경우도, 타지에서 먹고 살기 바쁜 와중에 친척들이 모일 수도 없는데 자신들끼리 제사를 지내는 것이 무의미하다고 생각해서 제사를 관두는 경우가 많았다.
현재는 교민 사회에서 한인교회의 영향력이 예전보다 훨씬 못하다지만 애초에 한국에서도 제사 문화가 쇠퇴하는 중이니 21세기 들어서 이민한 사람들은 개신교와 무관하게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
중국계 미국인, 베트남계 미국인, 일본계 미국인 중에서도 드물게 제사를 지내는 집안들이 있다.
5.3. 중국
현대 중국은 제사가 간단한 수준이고, 한국에 비하면 복잡하게 지내지도 않는 편이다. 이미 제사는 중화민국 시대부터 간소화되어 가고 있었다. 1970년에 타이완 외성인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바에 따르면 2대 봉사가 보편적이었고 제사상도 한국보다 훨씬 자유로운 편이었다.#하물며 문화대혁명을 겪은 대륙에서는 하나의 제사상으로 6대 조상의 제사를 전부 지내며, 제사음식은 생선튀김, 닭튀김, 안 깎은 과일 몇 개가 끝이다. 중국 산둥성에 공자묘가 있는데, 제사 그딴 거 없다. 문화대혁명 때 홍위병들이 공자묘를 훼손시킬 정도였다.
반대로 한국은 공산화가 되지 않아 유교 문화가 비교적 잘 보전되었기 때문에 무형문화재 85호로 석관대제(공자 제사)가 지정되기도 했다. 이 때문에 중국에서는 석전대제가 실전되어 한중 수교 후 한국에서 배워가야 했고, 공자의 후손인 쿵더청은 곡부에 와주십사 하는 중국 쪽 친척들의 요청에 '조상님 묘를 파헤친 공산당이 있는데 어떻게 가냐? 미국과 중국의 전쟁에서 미국이 승리하고 미국의 도움을 받아서 국민당이 중국 대륙을 통일하게 되면 그 때 가겠다!'고 딱 잘라 거절하고 쿵더청의 대성지성선사봉사관[34] 작위를 이은 손자 쿵추이창도 한국에서 유교 행사를 함께할 정도로 유교 문화 소실이 심했다.
5.4. 일본
애초에 섬나라였던 특성상 일본은 중국의 문물들을 받아들이되 자신들에게 알맞은 수준으로 변화시켰고 당연히 유교식으로 거창하게 제사를 지내지는 않는다. 일반 국민은 화장한 후 묘비를 세우는 것이 일반적이며 조상의 혼을 위해 성묘(墓参り)를 하고 집안에 설치된 불단에 공양(お供え)을 올린다. 성묘와 공양은 불교적 종교행사일인 피안(彼岸, 봄 피안은 3월 중순~말이며 가을 피안은 9월 중순~말)과 오봉(お盆)에 이루어진다.에도 시대에 조선 및 명의 유신들을 통해 성리학을 받아들인 일부 유학자들이 불교식 화장을 거절하고 유교식 매장 및 삼년상을 치르기도 했는데, 이 경우 불교식으로 장례를 치르지 않는 이들을 기리시탄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고.
5.5. 베트남
호치민 초대 주석이 추석(Tết Trung Thu, 節中秋)을 어린이날로 바꾸자는 제안을 해서, tet thieu nhi라고 부르기도 한다. 낮에 제사를 지내며, 가족이나 친구끼리 월병을 먹는다. 여담으로 하노이에는 공자 제사를 지내는 문묘가 있다.베트남의 제사상에는 꽃이 올라간다는 특징이 있다. 그래서 명절이나 음력 보름날 등 제사를 많이 지내는 시기는 꽃장사의 대목이라고.
6. 의의
6.1. 사회적 관점
조선시대나 현대 핵가족화 이전에는 제사는 출세나 생계, 상속문제에 있어 매우 중요했다. 장자나 특정 자손이 선대의 땅과 노비를 물려받을 수 있는 합법적 명분이 '제사를 잇는 것, 또는 제사에 참여할 수 있는가' 였기 때문이다.[35]하지만 현대사회는 개인의 사회참여권이나 생계를 각자가 꾸려나가는 시대로 바뀌었지 문중이나 집안 어른이 결정하는 경우가 없기에 그런 제사의 위상은 없어진거나 마찬가지다.
6.2. 사상, 종교적 관점
학계에서는 "현재에도 제사를 올리는 집은 조상에 대한 숭배의 목적이 아닌 친척 형제와의 관계유지와 전통적인 관례와 풍습으로 하는 것이고, 조상신을 모신다는 종교적인 이유는 매우 약해졌다"고 본다.제사에 참여하는 사람들 면면을 보면 그 중에서 몇명이 여전히 '조상신을 모신다'는 관습적 혹은 종교적 이유로 고집하고, 나머지는 이 사람을 반대하지 않아서 유지되는 면이 가장 크다. 종교적으로 유교는 사멸되고 있으며, 반전의 여지가 없고, 한중일을 막론하고 유교에 우호적인 사람들마저 중국공산당뿐만 아니라 중국국민당, 일본, 한국의 유교 합리주의자들 전부 무신론자들이라는 점에서 다른 종교와 명백히 다르다. 조상신을 고집스레 섬기는 사람들이 있기는 하지만 이사람들 대부분이 유교가 아니라 무속의 관점에서 제사를 바라보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유교는 원시유교건 양명학이건 성리학이건 어느 쪽이건 간에 종교인과 상극이라 유학자들은 주기적으로 무속인, 승려, 기독교인 등등 모든 종교인들을 괴력난신 혹세무민한다고 처벌ㆍ학살하던 사람들인 걸 생각하면, 원래부터 종교라고 정의하는 게 가능하지 않다는 오래된 논란이 중국공산당의 유교부흥정책을 기점으로 중국발 논문의 물량공세 덕에 = 종교가 아니다. 정리되고 있는 추세다. 물론 조지타운 대학교, 서강대학교 등 유교가 종교라고 주장하는 논문을 쏟아내는 대학도 있는데,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은 정작 유교를 스스로의 종교로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이다. 다시 말해 과거나 현재나 유교를 우호적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이나 유학자들은 스스로 종교가 아니라고 주장하는데 유교 외부에선 천명이나 천, 개념을 중심으로 너도 종교라고 칭하고 있다.
핵가족화가 진행되다 못해 일반적인 현대에는 제사를 지내는 게 정서적, 물리적으로 어려워지고 있고 성리학의 우주론과 내세론마저 종교적으로 설득력을 잃어, 의의가 매우 퇴색되었다. 일단 보통 미디어 등에서는 제사가 후손들에게 공경심과 효심을 나타내는 의식으로 사회적 소속감, 연대감을 증진하며 가족 간의 우애와 화목을 다지는 의미를 보는데, 사실 이게 송대 주자가 주장하던 성리학적 제사론에서 춘추시대 공자가 주장한 원시유교의 제사론으로 돌아가는 것에 가깝다.
자세한 설명을 하자면 유교의 창시자인 공자는 분명하게 "괴력난신을 논하지 않았다."라고 했다. 공자는 제사를 매우 중요한 의례라고 생각한 이유는, 그가 이상향으로 돌아가길 바랬던 주나라에서 봉건제의 근간을 이루는 종실중심주의의 핵심이었기 때문이다. 고대 중국에서 ‘儒’는 장례사를 일컫는 말이었다.
즉 주나라 천자는 종실의 장으로서 조상들에게 후손들을 대표하는 제사주가 된다. 그리고 제후들은 주나라 종실의 친척으로서[36] 제사에 참여함으로서 종실과 유대감을 가지고 지도에 따르며 보호를 받는다.
제후들은 자기 봉지에 가서 자기 부모제사를 지내는데 여기에는 대부들이 참여한다. 대부들도 당연히 인척이다. 대부들도 자기네 봉지로 돌아가서 또 제사를 지내는데 이때 경ㆍ사들이 참석한다. 이런 식으로 족벌 중심의 통제가 이루어지는 걸 종법질서라고 부른다. 즉 공자는 제사를 지냄으로서 얻어내던 권위와 그 권위에서 오는 질서와 평화를 원했기 때문에, "뭔진 몰라도 하던 대로 그대로 콜"을 외쳤던 것이다. 혼은 2대까지 남고 백은 4대까지 남는다는 주장은 불교에서 영향받은 영혼론이고, 이기론 역시 불교의 화엄경, 음양오행설과 태극도설은 도교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다. 이렇게 주돈이, 주희등의 설정덕후들이 우주나 내세등에 대한 설정을 확립시키면서, 검증할 수 없고, 잘 모르는 허황된 것에 대해서는 일체 이야기하지 않는 유교, 아니 그러다 못해 괴력난신하는 사람들을 증오하는 것이 전통이던 유교를 종교로 변화시켜 나갔다. 지식인들 이외의 민초나 아녀자들에게 있어 설득력을 제공할 수 없었고, 도교나 불교에 대응할 수 없으니 성리학으로 우주론과 내세론을 짬뽕하면서 이 시점부터 유교는 제도나 사상이라기보다는 종교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이건 공자가 창시한 원시유교와는 거리가 먼 아이디어다. 물론 성리학자들은 자신들이 적통이라고 하지만, 성리학에 대해 비판적인 유학자는 당대에도 있었다. 성리학이 송나라 시기에 성립된 이후 크게 융성했지만, 유학을 탄압한 원나라 때 크게 쇠하고, 명나라 때 융성한 양명학 등은 성리학의 바로 이 경향을 집어 큰 비판을 했다. 청나라대에는 문자의 옥으로 확대해석이 쉽게 가능한 형이상학은 자살행위나 마찬가지라 고증학으로 실용주의적 성향이 강해졌고, 특히 고전복원이 치밀하게 이루어져서 성리학과 공자, 맹자의 저서간의 차이가 크다라는 사실이 널리 알려졌다. 다시 말해 중국에서 성리학을 유교의 적통으로 보지 않는 경향이 공산주의 중국 정부에서만 시작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를 좀 더 현대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일단 성리학이 형이상학적, 그리고 신비주의적(종교적) 관점을 포용한 것 자체는 어찌보면 유교(유학)이 사회의 주류 사상이자 지배 이념으로 자리잡는 과정에서 당연히 일어날법한 일이었다고 말할 수도 있다. 사회의 이념과 사상에 대한 대중의 욕망중에는 괴력난신이나 주술, 점술이라거나 (죽음에 대한 공포로부터 벗어나게 해 주고, 정의에 대한 욕망을 충족시켜주는 기능도 담당하는) 내세관에 대한 욕구도 분명히 있기 때문이다. 만약 유학이 저러한 요소들을 받아들여 종교화되는 과정을 전혀 거치지 않았다면 사회의 주도 이념으로써의 기능 역시 제한적이었을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특히 조선과 같이 유교를 사실상 유일한 공식 이념으로 삼는 사회에서는 유학의 종교화에 대한 욕구가 더 강력했을 것이라 예상할 수 있으며, 이것이 조선에서 특히 성리학이 크게 융성한 이유 중 하나라 예상하는 것에도 큰 무리는 없는 것. 그래서 이러한 성리학에 대한 비판으로 양명학, 고증학등이 등장했다고는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이들은 반대로 사회의 주류 사상으로는 한계가 있었던 것. 예를 들어 양명학은 성리학의 추상적, 공론적 측면을 비판하며 보다 현실적인 측면에 주목했고, 그를 통해 사회 비판의 영역까지 나아갔지만 그렇기 때문에 관학, 즉 정부에 의해 공인된 국가/사회의 주도 이념의 입지를 차지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고증학은 애초에 도피적 목적, 즉 형이상학이나 정치, 역사철학적 주제를 건드렸다가는 어디서 꼬투리가 잡혀 목이 날아갈지 모르니 안전한 고전 연구에 집중하는 과정에서 발전한 것이기에 오히려 현실적 기능을 회피하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고증학 연구를 통한 고전복원에서 성리학이 공자, 맹자 시대의 고전 유학과 차이가 크다는 것이 명백히 밝혀지기는 하였으나, 이는 일종의 부수적 효과이지 그것이 본래 고증학의 목적이었던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더이상 유교(유학)이 '사회의 유일한 주도적 이념'을 담당하지 않고, 담당해서도 안 되는 시대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면 성리학이 본래 가지고 있던 '필연성'은 더이상 필연적이거나 필수적인 요소가 아니게 된다. 현대의 유학자 중 상당수는 아예 성리학을 유교 전통에서 많이 벗어난 일종의 "이단"으로 취급하며 성리학적 해석을 비정통적인 해석으로 취급하는데, 왜냐하면 국가 무신론을 장려하는 중국에서 많은 유학자를 배출하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 유교 전통에서 성리학이 차지하는 비중이 거의 대부분이나 다름없는 한국의 전통 유학자들은 "이게 무슨 곡학아세냐?"라고 말하겠지만, 이는 또 적지 않은 사람들에게 유교적 전통이 적폐나 인습 비슷한 취급을 받고 있는 한국의 사정과는 달리 중국에서는 공자학원등을 설치하여 국가 차원에서 유교 연구를 지원하고 있는 상황이니 어느 쪽이 더 주류로 자리잡기 쉬운 입장인지는 뻔한 것이다. 제 3자의 입장, 예를 들어 동아시아 철학사상사을 연구하는 외국 대학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자. 영어로는 Confucianism(공자주의)라 불리는 유교의 원산지는 애초에 중국이다. 그리고 접근할 수 있는 자료의 양도 중국에 훨씬 많고[37], 인구수도 압도적인만큼 학자의 수도 그만큼 더 많은 중국의 주류 의견을 주류의 관점으로 받아들일 가능성이 훨씬 높은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되면 성리학을 중시하는 한국의 관점은 그냥 '한국 학계의 특수한 경향'이 되는 것이다.
게다가 이런 '현대의 무신론적, 또는 탈 종교적 합리주의에 기반한 해석'은 오히려 창시장인 공자의 생각과 가장 가까운 것이기도 하다. 제사는 친척들이 모여 조상을 기리면서 동시에 친목을 도모하는 행위인데, 이것을 백성들이 하면 그냥 가족의 우애를 다지는 행위가 되지만 전근대의 친족권력집단이 하면 이것이 곧 제국의 통치체제가 되는 것이다.
현대 한국 사회에서 제사의 위상 변화 역시 이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잇다. 집성촌을 중심으로 한 농업의 비중이 높던 전근대 사회와는 달리, 일제강점기와 6.25 전쟁, 그리고 급격한 산업화 및 도시화를 거친 한국에서는 대가족(및 친족집단)이 곧 생산과 사회활동의 기반이라는 위상 역시 급속히 상실하게 된 것. 게다가 친족끼리는 서로 돕는 것이 당연하던 전근대에 비해 현대 사회에서는 친족에 대한 당연한 도리라고 여겨지는 범위 자체가 훨씬 작아졌고, 사회적 공정성에 대한 기준이 새로워지면서 어떠한 '도움'은 부정행위로 여겨지게 되는 변화도 생긴 것이다. 물론 아직까지도 집성촌과 종중을 유지하고 선산을 비롯한 재산권이 얽혀있는 집안에서야 그런 현실적인 문제 때문에라도 제사가 여전히 중요한 문제로 여겨지겠지만, 그렇지 않은 많은 집안에서 제사는 이전 시대에 비해 중요한 문제가 아니게 된 것. 위에서는 제사란 친족권력집단(왕실)에서는 '정치행위'이지만 일반 백성들에게는 '친족간의 우애를 다지는 행위'라고 했는데, 이 '친족간의 우애를 다지는 행위' 역시 전근대 사회에서는 친족집단 자체가 중요한 사회적 단위였기에 실질적으로 중요한 영향력을 끼쳤지만 현대 사회에서는 정말 단순하게 감정적, 정서적인 기념행위라는 측면에 계속 무게가 더해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제사를 아직 유지하고 있는 사례의 많은 경우가 관습적, 종교적 전통의 유지에 대한 고집 때문인 것 역시 이 관점에서 보면 이상하지 않은 일이다. '전통적으로 지켜오던 관습이니 계속 지키고 싶다'는 것은 분명 감정적이고 정서적인 동기이기 때문이다.
7. 논란
자세한 내용은 제사/논란 문서 참고하십시오.8. 폐해
자세한 내용은 제사/폐해 문서 참고하십시오.9. 제사에 대한 견해
〈UPINEWS〉가 여론조사 전문기관 '리서치뷰'에 의뢰해 전국 만 19세 이상 성인남녀 5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전체의 35.7%가 차례를 지내지 않는다고 응답했다. 국민 3명 중 1명은 이번 추석에 차례를 지내지 않는다는 조사결과다.지역별로는 보수적인 대경권에서는 80.7%가 차례를 지낸다고 응답한 반면, 서울과 호남은 차례를 지낸다는 응답이 각각 53.2%, 53.9%로 절반 수준에 불과했다.#[38]
또헌 기사에 따르면, 한국노동조합총연맹이 최근 조합원을 대상으로 설문조사 결과, 남성의 16.7%, 여성의 2.4%만 "사후에 자손들이 나를 기리는 제사를 지냈으면 좋겠다"고 응답했다. 조합원 남성의 84%, 조합원 여성의 대부분은 자신의 사후 제사나 차례를 지내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는 얘기다.
최근에는 제사상을 차리길 거부하는 소위 '며느리 파업' 같은 사례도 생기고 아예 제사상을 대신 차려주는 업체에게 전부 맡기고 집안의 여성들에게 제사상 차리는 일을 시키지 않는 걸로 타협을 하는 집들도 늘어나고 있고, 집안의 제사를 중단하는 사례도 계속 생기고 있다.
2019년 기사
시대의 변화때문인지성균관도 전향적인 견해를 보이고 있다.
2023년 기사
9.1. 종교별 견해
자세한 내용은 제사/종교별 입장 문서 참고하십시오.10. 제사를 지내지 못하는 경우
단순히 집안 행사에 참여하지 못하는 경우[39]가 아닌, 말 그대로 특정 이유 때문에 제사만 할 수 없는 경우들이다.- 개신교 교파 및 이슬람 등: 이 쪽은 제사 자체를 교리에 어긋나는 우상숭배라며 금지시킨다. 개신교에서는 제사 대신 추도예배를 드린다.
- 가톨릭 신자의 경우는 상술했다시피 여러가지 원칙을 지킨다면 조건부로 제사를 지낼 수 있지만,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유교식 제사'는 지낼 수 없다고 보면 된다. 제사를 드리려면 천주교식 제사법을 따르거나 '신(神)'자가 적힌 신주 또는 지방, 축문, 합문[40] 등의 미신적인 요소를 없애야 하며, 이를 무시할 경우 고해성사를 봐야 하는 대죄가 된다.[41] 성공회 역시 제사에 대해 가톨릭과 비슷한 태도를 보였다.
- 항목에 나오듯이 예외도 많은데, 가령 무슬림이 전 국민의 대다수를 차지하지만 유목민적 전통도 적잖게 남아 있는 튀르키예 같은 경우 제사와는 다소 다르지만 고인의 무덤을 방문해 성묘를 하고 의식을 치르는 풍습이 있다.
- 성매매 여성: 전근대에는 부정하기 때문에 제사에 참석하면 무례하다 하여 자발적으로 또는 집안에서 강제로 제사에 참여하지 못하게 하였다.
- 임산부: 절하는 것이 몸에 무리가 간다는 이유로 대개 금지된다. 만삭인 경우라면 더더욱.
- 하반신 장애인 등 일부 지체장애인: 다리를 움직이지 못하기 때문에 절을 할 수 없어 제사에 참여할 수 없다. 과거 주리틀기를 당한 죄수들이 적장자라도 폐적된 이유. 부상을 이유로 다리나 발에 깁스를 한 경우에도 동일하다.
- 고인이 사형수인 경우: 북한에서 사형수는 반역자로 취급되어 '반역자는 제사를 지낼 자격이 없다.'는 이유로 금지하고 있다. 이게 걸리면 노동단련대로 끌려간다. 물론 남한에서는 당연히 사형수의 제사를 지냈다고 처벌하는 법은 존재하지도 않지만 애초에 교정주의를 지향하는 사법체계인 대한민국에서 사형을 선고받았을 정도면 누명을 쓴 것이 아닌 이상 가족마저도 손절할 법한 흉악범죄자[42]라는 뜻이기 때문에 제사까지 지내주는 자체가 사실상 없다고 보면 된다. 애초에 사형까지 안 가더라도 고인이 무기 또는 일정 이상의 유기징역/금고형을 선고받은 경우에도 제사를 건너뛰는 경우도 많다.[43]
원래 제사를 지낼 때에는 심신이 청정해야 한다 하여 목욕제계를 한다거나, 음식도 비린 것을 먹지 않거나 하는 등 준비과정이 있었다. 제삿날에 남의 집에 문상을 갔거나 집안에 병자가 있거나 하는 경우에는 제사에 참여하지 않았다. 조선시대의 유교적 예법에서는 심지어 관리가 형벌에 관련된 문서를 처리하지 않았을 정도였다. 제사를 앞두고 남에게 벌을 주는 과정에 참여하는 것은 '심신의 청정'을 깨트리는 일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11. 제삿밥
안동의 헛제삿밥 |
위 문단의 설명처럼 제사상에 올리는 음식은 금기나 규칙이 많기 때문에 평소 먹는 밥상과 다르다. 전과류나 기름이 들어가는 전을 많이 쓰고 고추가루, 마늘 같은 향신료를 쓰지 않아, 마치 사찰 요리처럼 일반적인 한식과 별개의 영역이 되었다. 지역이나 집안마다 다르긴 하지만 탕국, 돔배기, 삼색나물처럼 제사상에서만 볼 수 있는 요리가 많다. 이런 제사음식의 맛에 대해서는 호불호가 갈리는데, 고추 같은 자극적 향신료를 덜 쓰는 점이나 제사를 준비하고 지내면서 식어버리는 점, 그리고 한 끼에 먹어버리기엔 많이 만들기 때문에 냉장고에 보관되면서 맛이 더 떨어지는 점 때문에 젊은층으로 갈수록 불호가 점점 많아지는 추세다.
경상북도 안동시에는 헛제삿밥이라는 향토음식이 있는데, 제사가 없는 평소에도 제사음식이라는 메뉴를 먹으려고 생겨난 것이다. 제대로 하는 식당은 약식이지만 제사를 지내는 곳도 있으며 나이 지긋한 사람들은 그렇게 해야 진짜 맛이 난다고 한다.
12. 기타
- 현대 한국은 교육열이 강해지면서 자녀가 외국어고등학교나 과학고등학교 등 특수목적고등학교 입시를 준비하는 중3이라거나 대학 입시를 준비하는 고3이라면 그 해 제사를 포기하기도 한다. 고시생이나 공무원 준비생들 역시 시험에 합격할 때까지 제사 참석을 포기하는 경우가 많다.
대학수학능력시험 출제위원과 관리요원, 검토위원처럼 업무를 위해 외부와 격리되는 경우, 당연히 참여하지 못한다. 수능뿐 아니라 공무원 시험이나 각종 자격면허 시험에서도 출제위원, 관리요원, 검토위원들은 제사가 걸려도 못 간다.[44] 이들은 직계가족의 장례 때만 짧은 외출이 허용될 뿐, 이 때도 보안요원이 동행한다. 탁구선수 유승민은 제삿날에도 경기가 있어서 참석하지 못했다고 한다. 올림픽 선수들은 올림픽 기간에 제사가 껴 있으면 메달을 노리기 위해 대부분 불참한다.
- KBO 리그에서도 제사와 관련된 사건이 있었다. SK 와이번스 (현 SSG 랜더스)의 2군 코치가 이만수 당시 2군 감독에게 부친의 제사에 참석하는 것을 허락받으려 했는데 이만수가 1군 감독 김성근의 허락도 없이 OK를 했고, 이를 알아차린 김성근 당시 1군 감독은 제사 참석도 장수가 전쟁 중에 전쟁터를 비우는 행위로 간주해 “어딜 감히 장수가 전쟁 중에 전쟁터를 비우냐”면서 화를 냈다고 한다.
- 현대에 와서는 차례나 기제사를 지내게 되면 전국, 적어도 두 광역시권에 흩어진 친척이 모이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 보니 구제역이나 MERS나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같은 전염병이 생기면 제주 일가만 간소하게 지내기도 한다. 집안에 임산부와 환자가 있는 경우도, 집에 따라 아이가 아직 돌이 되지 않은 경우도 마찬가지로 참석하지 않거나 부르지 않는다. 제사가 학기 중의 평일이나 시험기간에 걸려 있으면 대부분 불참한다.
- 실향민들은 대부분 임진각 망배단[45] 등 북녘이 보이는 곳으로 가서 제사를 지낸다. 댐 건설로 고향이 수몰되거나[46] 이런저런 시설을 짓는 과정에서 고향이 철거된 지역 출신[47], 문화재 복원으로 인해 고향이 철거된 지역[48] 출신 등 극소수의 경우를 제외한 대부분의 실향민들은 고향을 북한 지역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 제사상의 동서남북은 실제 방위와 다를 수 있다. 같으면 좋겠지만 건물 구조상 불가능한 경우, 제사상의 방/신위가 있는 곳을 북쪽, 지내는 사람이 있는 곳을 남쪽, 동쪽은 지내는 사람의 오른쪽, 서쪽은 지내는 사람의 왼쪽으로 설정한다. 전통가옥이면 대청마루가 남향이니까 맞지면 현대는 그냥 신위가 북쪽이다.
- 놀부는 제물 대신에 종이에 음식 이름을 써서 올렸다. 조선 후기 주자가례가 널리 보급되면서 사당을 지을 능력이 되지 않는 집에서는 사당을 그린 그림을 대신 걸고 제사를 지내긴 했지만, 놀부는 재력도 있으면서 구두쇠라 아끼려고. 그 다음 해에는 제기 위에 그냥 동전을 올리고, 그 다음 해에는 무려 신위를 들고 시장바닥을 돌아다니며 음식 앞에다가 신주를 들이 밀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이야기도 등장인물마다 다르게 묘사된다. 어떤 이야기에서는 가난한 선비가 제사는 지내야 하는데 돈이 없어 어쩔 수 없이 조상님의 신주를 들고 시장을 돌아다녔는데, 그날 밤 꿈에 조상님이 나타나 배불리 먹어 만족스럽다며 은덕을 베풀었다는 이야기다.
- 제사 날짜는 대부분 음력으로 계산하는 경우가 많지만, 일부에서는 양력으로 계산하기도 한다. 성균관 문묘에서 행하는 석전대제와 종묘 제례는 양력으로 계산해서 치르고 있다. 석전대제는 9월 28일(공자의 탄신일)과 5월 11일(공자의 기일), 종묘제례는 매년 5월의 첫째 주 일요일에 행한다. 양력을 중심으로 한 생활 습관에 익숙한 세대가 늘면서 음력으로 치르는 집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
- 2월 29일이 제삿날이면 4년에 한 번[49]씩 제사를 지내게 된다. 이렇게 되면 평년에는 2월 28일이나 3월 1일로 땜빵하거나 음력으로 환산한 날짜에 제사를 지내야 한다. 음력으로 윤달이 제삿날이면 날짜를 영원히 못 찾을 수 있으므로[50] 무조건 양력으로 지내야 한다.
- 한복을 입고 제사를 지낼 때 여자는 두루마기를 벗고, 남자는 두루마기를 입어야 한다. 여자는 치마저고리 차림으로 제사를 지내도 되지만 남자의 경우 바지저고리 차림(생활한복은 제외)이나 마고자 차림으로 제사를 지내서는 안 된다는 뜻. 현대 시중에서 파는 아동한복의 90% 이상이 두루마기가 없기 때문에 아이들의 경우에는 그냥 저고리나 마고자 차림으로 제사를 지낼 수밖에 없다.
양복을 입고 제사를 지내면 남자는 와이셔츠 단추를 끝까지 잠그고 넥타이를 맨 뒤 블레이저를 입으며, 여자는 블라우스 단추를 끝까지 잠그고 블레이저를 입는 것이 원칙이다. 즉, 와이셔츠나 블라우스 차림으로 제사를 지내서는 안 된다는 뜻. 다만 장례식장에서 철저히 지켜지는 것과는 달리 제사나 차례에서는 지키지 않는 집안도 많다. 교복이 한복이 아닌 이상 교복을 입고 제사를 지낼 때도 양복과 동일하게 적용된다. FM(?)을 중시하는 집안이 아닌 한, 단정한 차림이면 모두 허용하는 집도 많다.
- 고려 시대에는 불교가 국교이고 유교적인 제사문화가 완전히 정착하기 이전이라, 절이나 무당에게 땅이나 노비 등의 재산을 제사비용으로 주고 제사를 대리하는 경우도 흔했다. 이런 풍조는 우리나라에서는 조선 중기부터 유교적 제사문화가 강화되어 없어졌으나, 유교의 영향력이 약화된 현대에는 부활하여[51] 점점 성행하고 있는 중. 때문에 불교 집안이라도 자주 다니는 절에 제사를 맡기고 제사를 지내지 않는 집도 있다. 혹은 명절법회라 하여, 명절마다 절의 신도들이 한데 모여 합동 차례를 지내기도 한다.
- 고려 말기에는 유밀과가 크게 유행했는데, 불교 국가인 고려의 특성상 살생을 터부시하다 보니 대충 동물 모양으로 유밀과를 올리던 게, 점점 과일대신 과일 모양 유밀과도 올리고, 모양도 점점 호화로워지니 보다못한 조정에서 유밀과 금지령을 내렸다고 한다. 그럴 만도 한 게, 전통 한과는 제조하는 데 엄청난 비용과 노력이 들었기 때문이다. 한과 문서로.
- 천도교에서는 향아설위(向我設位)라 하여 위패가 아니라 제사를 지내는 사람을 기준으로 제물을 진설하고 제사를 지낸다. 다만 일반 가정에서는 그다지 엄격하게 지키지는 않는 듯.
- 홀수가 상당히 중요하다. 수를 셀 수 있는 제물들(ex-과일, 송편, 포 등)은 절대 짝을 맞춰 놓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제물 준비를 할 때 밤을 10개를 샀다 해서 10개를 다 놓느냐 하면 10개는 짝수기 때문에 1개는 남겨놓고 9개만 올리는 방법이다. 사실 이는 음양의 철학문제로, 땅에서 난 것은 음의 속성을 가졌으므로 홀수로 놓아 고인과 더불어 음양의 조화를 꾀했다고 봐야한다. 마찬가지로 하늘에서 난 것, 이를테면 새 종류는 원래 짝수를 놓았지만, 지금은 그런 것이 의미가 없어지고 '홀수로 놓아야 한다'는 규칙만 살아남은 것.
- 현대에는 인간이 아닌 생물에게 제사를 지내는 경우도 있다. 이는 유교적인 의식보다는 추모 행사에 가까운 것. 개인이 생전에 아끼던 애완동물을 추모하기 위한 것이나 혹은 의학 및 생물학 연구를 위한 실험 과정에서 희생된 생물들을 추모하기 위한 것 등이 있다. 또한 대구 치맥 페스티벌은 닭들을 위한 위령제를 개막행사 때 진지하게 지낸다. 사실 이것은 윤회와 축생의 영혼을 믿는 불교 수륙재의 영향이기도 하다.
- 북한에서도 봉건적인 잔재라고 해서 없애려고 노력을 했고, 많은 가족들이 제사를 지내지 않게 되었다. 그렇지만 완전히 없어지지는 않았고, 80년대 이후 당국의 허용으로 제사를 다시 지내는 가족이 늘어나긴 했다. 하지만 많은 북한 사람들은 여전히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 조상에 대한 예라고 해봐야 무덤에 가서 꽃을 바치고 묵념하는 정도이다. 제사를 할 경우 남한에서는 제사 때 2번 절하지만 북한에서는 3번 절한다. 다른 점은 사형수에 대한 취급인데, 남한에서는 고인이 사형수라고 하더라도 유족이 원하면 제사를 지낼 수 있지만, 북한에서는 사형수는 반역자로 취급되어 '반역자는 제사를 지낼 자격이 없다'는 이유로 제사를 못 지내게 하고 사형수의 제사를 지내려다가 걸리면 노동단련대로 끌려간다. 이는 이제 만나러 갑니다에서 유현주가 증언했다고 한다. 유현주가 증언한 해당 사례는 그녀의 고향인 함경북도 청진시에서 공개처형을 당한 사형수의 제사를 지내려다 발각된 가족이 두들겨 맞고 6개월짜리 노동단련대로 끌려간 사례였다.
- 남의 집 제사를 방해하면 제사방해죄로 형사처벌을 받을 수 있다. 제사방해에는 제사장소에서 떠들거나 제사상을 뒤엎거나 제사를 진행할 수 없게 하는 행위등이 있다. 정말로 남의 집 제사에 감놔라, 배놔라 하면 제사방해로 졸지에 벌금형을 받을 수도 있으며#, 최악에는 3년 이하의 징역도 가능하다.#
- 무슬림은 샤하다[52] 때문에 제사를 지낼 수 없다. 개신교와 마찬가지로 제사상에 절하는 것을 이슬람교 교리에 어긋나는 우상숭배라며 죄악시하기 때문.[53] 개신교의 경우는 워낙 신학적 스펙트럼이 넓기 때문에 제사에 대한 의견이 갈린다. 교회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다. 한국의 경우 대부분의 개신교 교단은 제사를 금지한다.[54]
- 사제(司祭)라는 직명을 직역하면 "제사를 맡는 사람"이라는 의미인데, 사실 이 말은 기독교 신학적으로 보더라도 절대 틀린 말은 아니다. 다만 '동아시아식 제사'와는 목적도 형식도 모두 다르다. 자세한 것은 미사, 성찬예배, 감사성찬례 문서로.
- 설날이나 추석 때 합동 차례를 지내는 군 부대도 있다. 대상은 설날이나 추석 때 휴가를 안 나가는 부대원 전체(...). 대부분 병사식당 한켠에 차례상을 차려놓고 개신교와 같이 제사를 금지하는 종교를 믿는 사람은 뒤에 서서 목례, 그 외에는 절 한두번만 하고 끝낸다. 대부분의 합동 차례상은 한사람 분량만 차리는데 조상들 수대로 하면 아무리 먹성 좋은 20대 군인이 있더라도 다 먹지 못하고 버려지는 음식물이 많아지기 때문이다.[55] 부대 분위기에 따라서는 간부들(특히 지휘관, 참모, 주임원사)도 상당수가 명절 땐 휴가를 못가고 당직이 아님에도 부대에 출근해서 이 행사를 같이 치러야 한다. 특히, 차례상 차리는 거 감독해야 하므로 조리 부사관들은 태생적으로 명절 당일 반일 정도는 의무적으로 출근해야 한다. 축구대회 등 단결행사로 이어지는 경우도 흔하다(...). 높으신 분들은 명절 연휴 중 병들 무료하게 놔두면 고향 생각에 우울해지거나 심심함을 못 이겨 사고 친다고 여겨서 일부러 고생시킨다는 카더라가 많이 퍼져있다. 다만 실제로는 사서 고생을 시킨다기보다는, 명절 때 이런저런 이벤트(?)를 많이 하는 것이 명분이 서기 때문이다. 이런 이벤트들은 휴가나 외박이 걸려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무작정 고생만 하는 것은 아니니까 힘을 내보자. 배에서 생활하는 해군의 경우에는 함정에서, 공군은 병사식당 등의 회관에서 차례를 지낸다고 한다. 지휘관이 대인배인 경우는 종교별로 병들을 분류하여 각자의 종교에 따른 방식으로 제사를 지내게 하는 경우도 있다. 물론 종교적으로 제사가 허용되지 않는 병들은 안 해도 된다.[56] 그리고 개신교를 믿는 지휘관과 병사들은 따로 영내 교회에서 추도.명절예배를 드리는 경우가 많다. 이 경우 지휘관이 참석하면 계급이 높은 지휘관이 추도.명절예배 설교를 하는 경우가 있다.
- 교도소에서도 설날, 추석에는 차례를 지낸다. 이를 "재소자 합동차례"라고 부른다. 물론 모범수에게만 허용되어 있다.
- BC 3000년 경 갑골문 연구로 은나라의 왕이 자신이 왕이 되고 자신의 입지를 다지기 위해 주변에 있는 토착종교를 싸그리 배척하고 왕의 조상만 섬기게 하는 문화를 만들었고, 이에 대해 일어날 불만을 미리 방지하기 위해 자기 조상을 섬기면 날씨도 좋아지고 전쟁도 이기고 하는 일마다 잘된다고 하였다. 그러다 은나라는 주나라에 멸망 당하는데 주나라가 자기 나라도 졔례의식을 잘 받아들이고 은나라의 제사담당자를 불러들인다. 그러면서 주나라에도 조상숭배 문화가 퍼진 것이다. 그러다 춘추전국시대 공자의 등장으로 유교의 영향아래 지금까지 오게 된 것이다라는 주장이 있으나 해당 주장은 유학에 매우 비판적인 김경은 교수의 주장에서 나온 것이므로 그 부분은 고려해서 판단하자.
- 춘추시대 제(齊)나라의 정치가였던 안영은 "유자(儒者)들은 복상(服喪)의 예를 중시하고 가산을 기울여서라도 장례를 성대하게 치르는데, 만약 그것을 백성들이 본받게 된다면 이 또한 걷잡을 수 없는 일이 될 것입니다. 주문왕(周文王)은 이미 가셨고 왕실까지 쇠퇴한 지 오래 되었는데도 지금 유자들은 의례(儀禮)를 성대히 꾸미고 번잡하게 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지금 세상에 옛날의 예를 부활하려고 하더라도 헛수고에 끝날 것은 명백합니다."라고 하며 제사의 폐단을 지적했다.
- 제사 음식에 특별한 제한이 있는 것이 아니라고 알려지기 시작하자 제사상에 피자, 스테이크, 치킨 등의 신세대 음식이나 양식을 올려서 조상님들이 다양한 음식을 맛보게 해드리자는 주장이 나오고 있는 집안도 있다. 또한 제사를 지내고자 하는 조상이 얼마 전에 돌아가신 경우이고 직계 가족이 살아있는 경우라면, 해당 인물이 조상에 대해 잘 알고 있을 터이니 조상님께서 생전에 좋아하던 음식 위주로 차려 놓고 제사를 지내는 경우도 있다. [MZ세대]]가 제사를 지내게 되는 2040~2050년 이후로는 직접 제사음식을 만들기 보다는 피자, 치킨, 햄버거 등의 패스트푸드는 물론 짜장면이나 짬뽕 등의 배달음식을 시켜 제사상에 올리는 경우도 많아질 것으로 보인다.
- 윤달에 사망한 사람의 제사를 언제 지낼지는 말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현대에는 갖가지 방법이 나왔다. 윤달이 있는 해에만 지내기도 하고[57]도 있고, 윤달이 없는 해에는 평달에 지내고 윤달이 돌아오면 그 윤달에 지내기도 하고[58] 평달에 지내는 것은 맞지 않으니 다음 달 초하루에 지내기도 한다.[59] 사실 조선시대에도 이 문제가 아리송하기 때문에 저명한 유학자들에게 물어보는 이들도 있었는데, 퇴계 이황 등 조선의 유학자들은 제사는 무조건 평달에 지낸다는 견해였다. 이유는 윤달은 '정상적인 달'이 아니라는 것. 음력 윤8월 14일에 죽은 사람이 있다면, 그 제사는 무조건 평달 8월 14일에 한다는 것이다. 제사상에 비정상적인 것을 제물로 올리지 않듯이, 제사를 지내는 시기 또한 비정상적인 때는 피한다는 논리이다. 삼년상을 치를 때에도 중간에 윤달이 걸리면 상을 지내는 기간을 한 달 더 늘렸다.
- 음력 11월 중순~12월 중순이 기일이라면 윤달 배치에 따라 한 해에 두 번 제사를 지내는 해와 아예 제사를 지내지 않는 해가 나타나기도 한다. 2016년 12월 25일이 음력 11월 27일이었으므로 이 날 제사를 지냈다면 2017년에는 윤5월[60] 때문에 건너뛰고 2018년 1월 13일에나 다음 제사가 오는 셈이다.
- 모종의 이유로 환갑을 맞지 못하고 죽은 사람의 환갑에 지내는 제사는 ‘사갑제’라고 부른다.
- 일부에서는 장애인들이 제사에 참석하지 못하도록 하는 경우가 있다.
- 기독교에서의 제사는 다른 의미를 갖는다. 기독교에서 제사의 대상은 하느님 뿐이며, 이 제사를 집전하는 이를 사제라고 칭한다. 가톨릭과 정교회, 오리엔트 정교회 등에서는 사제가 미사와 성찬예배를 하느님께 드리는 제사로서 바친다. 개신교에서는 예수가 사제인 동시에 십자가 위에서 제물이 되어 한 번의 완전한 제사를 이뤘으므로 더이상의 제사는 무의미하다는 신앙을 갖고 있으며, 사제의 직위 또한 부정한다. 다만 성공회의 경우는 좀 복잡한데, 사제 계급이 존재하며 감사성찬례라는 제사를 드리지만, 평신도 또한 일상 생활 속에서 하느님 나라를 실천하는 과정 속에서 스스로 거룩한 사제와 제물로서 살아갈 수 있다는 신앙을 갖고 있다.
- 2020년에는 코로나19 사태로 온라인 제사가 등장하기도 했다.
- 일부 집안에서는 고인이 일정 이상의 형을 선고 받은 경우 그 사람의 제사를 지내지 않기도 한다. 예를 들면 고인이 징역 10년 이상 또는 금고 10년 이상의 형의 선고를 받은 적이 있는 사람은 제사를 지낼 수 없도록 하였을 때 아버지가 무기징역을 선고 받았다면 그 제사는 건너뛰게 된다. 이런 경우는 보통 금고 이상의 형을 선고 받았을 때로 정하며,[61] 벌금형을 추가하는 경우도 드물게 있다.
- 2023년 5월, '자녀 중 연장자'를 제사주재자로 가장 우선해야 한다는 대법원 판결이 나와 판례 변경 되었다. 원래는 '장남'이 제사 주재자가 되어야 했다. #
13. 관련 문서
[1] 결혼을 일찍 하는 전근대 기준으로, 현실적으로 인간의 수명상 아무리 장수한다 해도 사람이 생전에 만날 수 있는 사실상 최고 한도는 보통 고조부와 고조모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매우 드물게 현조부, 현조모를 만날 수 있긴 하다. 참고로 아빠의 고조부가 현조부이다.[2] 아버지가 사망해서 아들이 제사를 물려받으면, 아버지의 고조부는 5대조가 되므로 사대봉사에서 벗어난다.[3] 시향(時享)이라고도 한다.[4] '문중 종가집에서는 1년에 제사를 수십 번 지낸다'는 속설이 있는데 근거가 바로 이 불천위다. 집안 내력이 오래된 명문가에서는 당연히 불천위 제사를 지낼 만한 역사적 인물이 많기 때문.[5] 초조 이하 고조 이상의 조상[6] 음력 9월[7] 보통 한식에 묘에 오른다.[8] 이후 10월 1일이 추가되었다.[9] 기제사는 일반적으로 모인다고 해도 직계가족들만 모이고 명절처럼 일가친척들이 죄다 모이는 경우가 잘 없으므로 규모나 비용는 둘째치고 그만큼 인간적인 스트레스 받을일은 없다.[10] 부모, 조부모, 증조부모, 고조부모.[11] 다만 고려시대때는 3품 이상 관료는 되어야 3대까지 제사를 지냈으며 조선 경국대전의 경우 3품 이상 4대, 6품 이상 3대, 7품 이하 2대까지 제사가 가능했고 일반 양인은 부모선까지로 제사지내는 대수가 제한되었다. 건전가정의례준칙에서는 제주 위로 2대 조상(부모, 조부모)까지만 모시도록 되어 있다.[12] 차는 아열대 지역 식물이라 온대기후인 조선에서는 극히 일부 지역에서 나는 고급품이었고, 석회수 때문에 맥주를 물 마시듯 마셔야 했던 중세 유럽처럼 차가 필수적이었던 중국과 달리 조선은 석회수가 거의 없어 그냥 자연상태의 물을 바로 마실 수 있는 환경이었으므로 차를 마실 필요가 없었다. 따라서 그 당시 조선은 차의 공급도 수요도 적을 수밖에 없었던 것.[13] 술 진상은 본래 주자가례의 참례에도 있었으며 이 부분은 동일하다(주자가례 사당편). 율곡 이이가 지은 격몽요결에서는 "차는 중국 풍습이고, 술이 조선 풍습이다"라고 하면서 차를 빼버린다. 그러나 이건 상술됐듯 차가 조선에서는 대단히 고급 사치품이었기 때문이라는 다소 현실적인 이유도 있었다.[14] 제사도 안 지냈으면서 제사와 똑같은 재료로 비빔밥을 만들어 먹으면 이걸 헛제삿밥이라고 하는데, 특히 경북 안동시의 헛제삿밥이 유명하다.[15] 단적으로 고춧가루가 전해진 시기를 보면 왜 오신채에도 이름이 없고, 고춧가루 이야기는 언급도 없는지 알 수 있다.[16] 주세법상으로는 약주로 분류.[17] 삼가 맑은 술과 음식으로 공손히 잔을 올리니 흠향하소서.[18] 레드 와인은 거의 사용되지 않는데, 첫번째로는 색이 붉기 때문이고 두번째로는 대부분의 경우 한식과의 조합이 극악이기 때문. 화이트 와인도 탕국에 씨간장을 풀어버리는 순간 그 어떤 화이트 와인을 갖고와도 답이 없게 되긴 하지만 레드 와인보다는 상황이 좀 낫다.[19] 오래 전부터 내려오던 관습이긴 하지만, 사실 여기에는 근현대의 아픈 역사도 숨어 있다. 제주도는 이웃집이나 친구 집에서도 제삿날이 같은 사람들이 아주 많아 생전에 고인이 친했던 집들끼리 지금까지도 매년 4월 3일마다 모이는 경우가 많다.[20] 그러나 제사는 아들들만 번갈아가며 지내는 게 보편적이다.[21] 사실 한반도에서도 고려 ~조선 초까지는 유교적인 가례문화가 약해서 지금과 많이 달랐다. 딸과 외손자가 제주가 되거나 상속을 받는 게 당시는 특별한 게 아니었다.[22] 이러한 제주도 특유의 제사방식이 원래(유교 도입 이전) 한반도의 전통적인 제사가 아닌가하는 의견도 있다. 고인보다는 교통이 발달하지 못해 자주 만나지 못했던 자손들이 만날 수 있는 잔치적인 의미를 지닌다. 유교 이전 고인을 기리며 살아있는 사람들을 위한 식사가 유교 이후 홍동백서 등을 비롯한 오직 고인만을 위한 상차림으로 의미가 변질되었다는 것이다.[23] 본래 제주도는 토질의 특성상 벼농사를 짓는 것이 매우 어려워 쌀밥이 대단히 귀했다. 그래서 밀이나 보리를 쪄서 반죽해 쌀밥 대신 올렸는데, 현대에는 이것이 빵으로 정착되었다.[24] 제주도에서 생선이라 함은 옥돔을 지칭한다. 물고기를 총칭하는 의미로도 쓰인다.[25] 제사를 지내면 향을 피우고 그 향의 냄새가 음식에도 배야 하는데 그게 없으므로 진짜 제사를 지낸 음식이 아니라는 것.[26] 탕이랑 밥을 합쳐도 올라간 제수가 10개가 안 된다.[27] 통상적으로 이름에 '치'가 들어가는 생선은(꽁치, 삼치 등) 등푸른 생선이 대다수이며, 지방 성분이 많아 비린내가 제법 나는 생선이기도 하다.[28] 여자가 제사에 아예 참석하지 못하게 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여자도 남자와 같은 방식(여성의 절하는 자세는 더 힘들다)으로 절해도 무방한 집도 많다. 여자는 의무인 집도 있고 의무가 아닌 집도 있고, 소수가 지금도 여자는 배제하는 듯.[29] 왕건 문서의 청동상 문단으로.[30] 도교 속 신들과 별의 신, 옥황상제에게 지내는 제사[31] 요즘으로 치면 행정고시를 통과한 5급 사무관 정도는 되어야 증조부모 제사를 지낼 수 있었고 6급 이하 공무원은 조부모까지만 제사를 지낼 수 있고 공무원이 아닌 사람은 부모 제사만 지내라는 뜻.[32] 하지만 유교적인 이념이라도 남한보다도 논어에서 유래한 '이신작칙' 같은 말을 자주 쓰는 등 지도부의 권위를 드높일 수 있는 요소는 막지 않았다.[33] 한국의 개신교와 마찬가지로 미국의 한인교회도 기독교 근본주의 성향이 매우 심하다.[34] 공자의 후손들이 세습하는 관직명. 장관급에 상응하지만 무보수 명예직이다. 원래 이 관직은 연성공이라 하여 군주국의 귀족 작위에 해당했으나 신해혁명으로 신분제가 폐지되고 공화국이 된 후에는 공화국에 귀족 작위가 있다는 게 모순이라는 지적이 제기되어 쿵더청 대에 '~관'이라는 근대적 관직명으로 바꿔서 장관급 공직자의 격으로 해주었다.[35] 남성만이 제사를 이을 수 있었으며, 아무리 가까운 남성이라도 성(姓)이 다르거나(외손, 사위 등 부계 후손이 아닌 자) 출신에 문제가 있다면 문중의 제사에 참여할 수가 없다.[36] 원래 주나라의 봉건제는 주나라 종실의 친족들에게 영토를 분봉해주는 제도였기 때문에, 당연히 제후들은 종실의 멀고 가까운 친척이 된다. 간단히 말해 호경(현재의 시안) 일대를 지배하는 성읍국가였던 주나라가 정복과 개척을 통해 영토를 점차 확장하면서 왕실의 친족(예컨데 천자의 형제들 -주로 동생들-이나 장자를 제외한 아들들)에게 영토를 나눠준 것이 주나라 봉건제의 시작이라는 것. 따라서 천자는 장자의 장자로 이어져온 종가가 된다. 물론 영토 확장 과정에서 복속된 이성제후도 있었지만 개념상으로는 그렇다는 뜻이다.[37] 문화대혁명으로 물론 많은 전통과 자료가 소실되었지만 그 넓은 땅덩이 여기저기에 문화대혁명의 불길을 피해 남아있는 자료의 양은 무시할 수 없다. 부동산 개발하다 오래된 묘지에서 천몇백년 전의 유교경전이 튀어나오면 한국에서는 그대로 국보로 지정되어 국립중앙박물관에 보내지겠지만 중국에서는 지방정부가 회수에서 그냥 장서고에 집어넣는다고 할 정도. 애초에 문화대혁명 이전에도 분서갱유니 원대의 핍박이니 문자의 옥 등등의 사태는 끊이지 않았고, 여러 시대마다 이를 피하기 위해 목숨걸고 파묻었던 서적의 숫자도 어마어마하다.[38] 해당 기사를 보면 알겠지만,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고 하는 집은 종교적인 이유가 40.6%로 가장 많다. 여기서 말하는 종교는 거의 확실하게 개신교일 것이다. 왜냐하면 개신교에서는 제사를 우상숭배로 보고 원칙적으로 금하기 때문. 호남 지역의 낮은 제사율 또한 개신교 신자 비율이 높은 것과 연관이 있을 걸로 추정된다. 그리고 서울은 젊은 인구 비율이 높아서 제사 지내는 비율이 낮다.[39] 고3, 고시생, 유학생, 운동선수, 해외 파병 및 복무 중인 군인, 대학수학능력시험 출제위원 및 관리요원 등.[40] 조상이 음식을 드시도록 제사에 참석한 이들이 문을 닫고 나오는 행위.[41] 참고로 처음 천주교가 들어왔을 때에는 천주교도 제사를 엄격히 금했다.[42] 최소 2명 이상 살해한 연쇄살인마, 성범죄자, 대량살인마, 피해자가 아동인 살인사건의 범인, 테러리스트와 같이 변호사마저 변호를 포기할 법한 악질 범죄자가 해당된다.[43] 대표적으로 대구 지하철 참사의 김대한의 가족들은 집안에서 없는 사람 취급당했다고 한다.[44] 심지어 시험지를 인쇄하는 인쇄공까지도 마찬가지다.[45] 주로 황해도와 평안도 계통 실향민들이 여기로 간다. 함경도와 미수복 강원도 계통 실향민들은 통일전망대로 많이 간다.[46] 임하룡 등. 임하룡의 고향은 충청북도 단양군 단성면 북하리인데 그의 고향은 충주댐 건설 관계로 수몰되었다.[47] 정태춘 등. 정태춘은 고향이 경기도 평택시 팽성읍 도두리인데 그의 고향은 주한미군 기지 건설 관계로 철거되었다. 그 밖에 리조트, 대학교, 군부대, 산업단지, 관공서, 교도소, 고속철도 및 여타 교통 관련 시설(공항, 고속도로 등) 등을 짓는 과정에서 고향이 철거돼 버린 경우도 실향민이라 할 수 있다.[48] 서울에는 풍납토성과 몽촌토성 등 일부 문화재 복원으로 인한 실향민이 있고 경주에는 문화재 실향민이 더 많을 것이다.[49] 100으로 나누어 떨어지는 해를 끼고 있는 경우에는 8년까지도 벌어진다. 이는 4로 나누어 떨어지는 경우에는 윤년으로 하되 100으로 나누어 떨어지면 평년, 400으로 나누어 떨어지면 윤년으로 한다는 규칙 때문이다. 이 때문에 xx96년 2월 29일에 제사를 지내고 나면 4년이 지난 xy00년이 400으로 나누어 떨어지는 해가 아닌 이상 xy04년까지 제사를 제 날짜에 못 지낸다![50] 특히 10, 11, 12, 1월에 윤달이 끼면(...)[51] 지금은 당연히 노비나 부동산이 아니라 돈으로 낸다.[52] "알라 이외에 신은 없으며 무함마드는 그의 사도이다"라는 구절이다.[53] 다만 '민속적 관습'이라는 시점에서는 지내도 된다는 일부의 의견이 존재하기도 한다.[54] 개신교 신자는 제사 대신 추도예배를 드린다. 안내문은 교회에서 나누어 준다고.[55] 거기에 부대에서는 설날과 추석같은 명절, 국군의 날에 부식이 다른 날에 비해 잘나온다.[56] 아예 시작하기 전에 절 안 하는 병사 손 들라고 해서 인원를 파악한 다음 진행하는 경우가 많다.[57] 윤5월 17일에 죽은 사람의 제사를 윤5월이 있는 해에만 지낸다든가 하는 식.[58] 윤8월 14일에 죽은 사람의 제사를 보통 해에는 평달 8월 14일에 지내다가 윤8월이 돌아오면 제대로 된 날에 제사를 지낸다든가 하는 식.[59] 윤7월 13일에 죽은 사람의 제사를 음력 8월 초하루에 지낸다든가 하는 식.[60] 2017년 윤5월은 6월 24일~7월 22일.[61] 집행유예는 보통 추가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