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밝은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12-13 14:26:51

경국대전

파일:kgLaNDDr.jpg
<colbgcolor=#c00d45,#94153e> 《경국대전》
1. 개요2. 역사3. 의의4. 특징5. 내용6. 판본7. 보는 곳8. 입시 문제 풀이 시 유의 사항9. 관련 문서10. 외부 링크

[clearfix]

1. 개요

우리 조종(祖宗)의 깊고 두터운 인택과 크고 아름다운 규범이 실려 있는 법령으로는 《원육전(元六典)》, 《속육전(續六典)》, 《육전등록(六典謄錄)》이 있고, 또 누차 내린 교지(敎旨)도 있으니, (중략) 이제 조정하여 증감하고 산정(刪定)하고 회통(會通)하여 만세토록 사용할 수 있는 법을 만들고자 한다.
서거정, 《사가문집》 권4, 〈《경국대전》 서문〉


기존에 있던 《조선경국전》, 《경제육전(經濟六典)》과 《경제속육전(經濟續六典)》, 이후의 시행 법령을 묶어 만든 통일 법전이다.

2. 역사

경국대전은 조선 세조 때 편찬되기 시작하여 성종 때 완성되었다.

삼국시대에는 중국으로부터 율령제를 도입하여 나라를 통치했지만 율령제는 통일신라가 몰락하며 무너졌다. 이후 등장한 고려시대에는 통일된 법전 없이 당, 송, 원나라의 법률과 관습법, 왕명 등이 법으로 기능했다. 현대 기준으로 말하면 영미법마냥 불문법 체계.

따라서 고려의 법은 당나라의 당률이나 송나라의 칙법(勅法), 원나라의 법률이 뒤섞여 있고 지역 관습법을 중시하는 등 기본적으로 나라의 법원(法源)이 전혀 통일되지 않았다. 때문에 고려의 법은 사흘만 지나면 흐지부지된다는 뜻의 "고려공사삼일"이라는 말이 유행했고 같은 사안에서도 재판관의 기호에 따라 다른 판단이 내려지거나 법령의 개폐가 빈번했고 법의 적용에도 일정한 기준이 없었다.

그러다 조선이 건국된 후 신진사대부들은 이전까지 존재했던 우리나라의 법 제도는 명확한 준칙조차 없는 관습법이라 권문세족과 관료들의 농단에 백성들의 재산과 생명을 보호하지 못했고 단지 유력자의 이익만 옹호했던 것이라고 생각했다. 때문에 《조선경국전》, 《경제육전》 같은 한국사 최초의 법전들이 만들어지게 되지만 조선경국전은 개인의 견해에 그친 것이었고 태조 때 만들어진 경제육전과 태종 때 만들어진 《경제속육전》은 그 내용이 미비하거나 현실과 모순된 내용들이 매우 많았다.

때문에 세종 4년(1422년) 육전수찬색(六典修撰色)을 설치하고 기존의 법전들이 조례가 번잡하여 시행하기 어렵다는 의견을 좇아서 다시 교정하기로 하고 1428년에 육전(六典) 5권과 등록(謄錄) 1권을 완성한 후 1년 동안 검토하여 1429년에 반포했으나 역시 누락된 조문이 많고 논란이 커져 사실상 사문화되었다.

세종 초에 법전 반포에 실패한 후 사실상 세조 즉위 이전까지는 나라의 법원이 완전히 괴리되고 법 집행자의 손에 따라 그 판결이 뒤바뀌는 조선 건국 이전의 중세 관습법적인 모습으로 법체계가 후퇴했다. 또한 섣부른 개정에 따른 여러 폐단과 잦은 입법에 의해 각종 민생의 피폐가 발생했다. 그러다 세조는 즉위하자마자 육전상정소(六典詳定所)를 설치하고 통일 법전 편찬에 착수했다.

세조 6년(1460년) 7월 재정과 경제의 기본이 되는 〈호전(戶典)〉과 〈호전등록(戶典謄錄)〉을 완성했다. 이듬해 7월 〈형전(刑典)〉을 완성해 공포하고 시행했으며 세조 12년(1466년) 〈이전(吏典)〉, 〈예전(禮典)〉, 〈병전(兵典)〉, 〈공전(工典)〉을 완성하고 기존에 완성해놓았던 호전과 형전을 다시 한번 개정했다. 이후 2년 동안의 검토 기간을 거쳐 세조 13년(1467년) 경국대전 초안이 완성되었는데 이를 《병술대전(丙戌大典)》이라 한다.[1]

예종이 즉위하고 이듬해 1469년 한명회는 병술대전의 재검토를 건의하여 새해가 되기 전에 완성하고 이듬해부터 시행했는데 이를 《기축대전(己丑大典)》이라 한다.[2]

성종 즉위 후 1470년 다시 한번 교정을 마치고 이듬해 1471년부터 시행하기로 했으며 이를 《신묘대전(辛卯大典)》이라 했다.[3] 조문을 좀 더 개수하여 1474년 2월 1일부터 쓸 수 있도록 《갑오대전(甲午大典)》을 완성했다.[4] 이후 1485년 1월 1일까지 최종 검토를 거쳐 《을사대전(乙巳大典)》이라 했고 이것이 영세 불변의 조종성헌(祖宗成憲)이라 불리는 경국대전의 최종본이다.[5]

3. 의의

조선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을 다룬 당시 조선 사회의 근간이 되었던 법전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실정에 맞지 않는 법은 후대에 법전을 개정해서 추가하거나 수정했지만 경국대전의 내용도 같이 실어주면서(이를 원(原)으로 표시)유지되어 갔다.

다만 《대전회통》-〈사천(私賤)〉 조에서 경국대전처럼 자녀균분상속 하라고 했는데도 18세기에 장자상속이 대세였음을 본다면 성리학적 질서의 변동을 어느 정도 인정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경국대전의 편찬 목적 자체가 예치(禮治)를 명문화해서 피지배층을 성리학적 이념으로 다스리고자 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주자가례》에 입각한 질서가 바뀌는 것을 용인했기 때문이다. 사실상 주자가례는 조선 건국을 하자마자 쓰려고 했는데 워낙 고려 시대의 전통이 강해서 18세기에 들어서야 가까스로 정착되었다.

이후 편찬되는 《속대전》(영조 22년, 1746년), 《대전통편》(정조 9년, 1785년), 《대전회통》(고종 2년, 1865년, 흥선대원군의 섭정 기간) 모두 경국대전에 기초를 두었다. 경국대전의 항목을 큰 글씨로 적고 그 이후에 추가되는 항목들은 더 작은 글씨로 적히는 구조로 되어 있다. 또한 이후의 법전으로 발간되기 전에 시행 법령은 《대전후속록》, 《각사수교》, 《수교집록》, 《신보수교집록》 등의 형태로 발간되었다.

법전에서 내용이 수정되었거나 추가된 것에 따라 경국대전은 원(原), 속대전은 속(續), 대전통편은 증(增), 대전회통은 보(補)로 표시했다. 명종 때 일어난 을묘왜변 이후 비변사가 상설화 되었고, 임진왜란 이후 비변사가 최고 정치기구가 되었는데, 경국대전은 성종 때 반포되었기에 비변사에 대한 규정을 담고 있지는 않다. 대신 비변사에 대해서는 속대전에 기록되어 있다.

또한 경국대전의 반포는 조선 전기의 특징 중 하나인 '대전 체제'를 구축했음을 뜻한다. 고려의 중세 귀족적 사회와 다른 조선의 양반 관료 체제가 조선 전기에 정비되었음을 보여준다. 이런 양반 관료 체제의 정비는 국왕을 정점으로 하는 중앙집권적 관료제를 밑받침하는 통치 규범의 확립을 의미한다.

그리고 새로운 법의 일방적인 창조라기보다 당시 현존한 고유법을 성문화하여 중국법의 무제한적인 침투를 막고 조선 사회 나름의 질서를 후대로 이어주었다는 의미도 지녔다. 예를 들어 〈형전〉의 자녀균분상속법[6], 〈호전〉의 매매 및 사유권의 절대적 보호에 대한 규정, 형전의 민사적 소송절차에 대한 규정 등은 중국법의 영향을 받지 않은 조선만의 고유법이었다.

4. 특징

경국대전에는 크게 4가지 특징이 나타난다.

5. 내용

육전(六典) 체제에 따라 법률을 분류하고 있다. 이 속에 사회, 문화같은 다양한 내용이 들어있는 것이다. 6전은 천지춘하추동(天地春夏秋冬)의 주례 6관의 속성과 관련 있다. 예를 들어 예조의 실무 조례라 할 수 있는 《춘관통고》, 형조의 실무 조례인 《추관지》 등은 이러한 관련을 드러내는 근거이기도 하다.

6. 판본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오늘날 온전히 전해오는 경국대전은 을사대전이며, 그 전의 것은 하나도 전해지지 않는다"고 하고 있으나 해당 항목은 1995년 집필된 것이다. 2007년 《신묘대전》이 보물 제1521호로 지정되었으므로 이것은 옳지 않다.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의 양혜원은 2017년 〈『經國大典』 개정판본의 시행 단계 재검토 - 보물 제 1521호 『經國大典』 간행년 판정을 중심으로 -〉에서 보물 제1521호가 신묘대전임을 다음과 같이 논증하였다.
  1. 성종실록 1484년 1월 21일 "전교서를 고쳐서 다시 교서관으로 일컬었다"고 했는데 보물 제1521호는 〈예전〉 속아문에 전교서를 포함하고 있으므로 이후 시행된 《을사대전》일 수 없다. (다른 판본들은 교서관으로 되어 있다)
  2. 성종실록 1470년 5월 8일 승문원 관원의 상벌에 대해 "불통인 자는 파출하도록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르고, 교정청에 명하여 대전에 첨가하여 기록하게 하였다"고 했는데 보물 제1521호는 〈예전〉 장권 승문원 관원에 "불통인 자는 파직한다"고 하고 있으므로 기사 이전인 《병술대전》이나 《기축대전》일 수 없다.
  3. 성종실록 1473년 12월 15일 "이제 새로 제정한 대전에는 전년 가울에 초시를 보고, 다음해 봄에 복시를 보게 되었으니"라고 했는데 보물 제1521호는 〈예전〉 제과에 "전 해 가을에 초시를, 초봄에 복시와 전시를 치른다"는 내용이 없으므로 (다른 판본에는 있다) 기사 이후인 《갑오대전》일 수 없다. 그러므로 보물 제1521호는 《신묘대전》이다.

양혜원은 이어 2018년 〈『經國大典』 판본 연구〉에서 《을사대전》 6종(타카와 코조 소장본, 국중본, 만력본, 사고본, 평양본, 운각본)의 불교 관련 조문을 비교하여 결정적 해석의 차이를 유발하는 글자 차이가 있음을 보이고, 교감의 필요성을 주장하였다.

7. 보는 곳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운영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 내 조선시대법령자료에서 원문과 이미지를 볼 수 있다. 원문은 2018년, 2019년 정긍식이 교감한 것이며 이미지는 운각본이다.

경국대전의 책 원본들은 국립중앙박물관, 서울대학교 규장각, 전남대학교 도서관 등에서 소장하고 있으며 최근 보물로 등재되었다.

8. 입시 문제 풀이 시 유의 사항

조선 세조 때 처음 편찬이 시작되어 성종 때 완성되었다는 점을 이용하여 지엽적으로 문제가 출제될 때는 "《경국대전》은 조선 성종 때 편찬을 시작했다"라는 선지가 오답으로 출제될 수 있다. 출제자들은 이 책의 가치를 높이 사서 중요한 부분으로 취급하는 걸로 보인다. 이 외에 7차교육과정 국사 과목에서 세조 시절 일부가 완성되었다는 내용을 함정으로 제시하여 수험생들을 혼란스럽게 했다.

9. 관련 문서

10. 외부 링크


[1] 세조 13년 12월 24일[2] 예종 1년 윤2월 23일, 예종 1년 9월 27일, 예종 1년 11월 16일. 2000년대 초반 학습 만화책에서 이것을 잘못 해석해 '예종이 경국대전을 완성했다.'고 나온 적이 있는데 당연히 잘못된 정보이다.[3] 성종 1년 4월 6일, 성종 1년 10월 27일, 성종 1년 11월 5일, 성종 1년 11월 8일[4] 성종 4년 11월 14일, 성종 5년 1월 2일[5] 성종 15년 4월 8일, 성종 15년 6월 29일, 성종 15년 12월 4일, 성종 15년 12월 21일[6] 상속에서는 재주(財主)에 따라 상속인의 몫을 자세하게 규정하고 있는데, "분배하지 않은 노비는 아들과 딸의 생사를 막론하고 나누어 준다. 중자녀(衆子女)에게는 균등하게 나누어 준다"라고 하여 남녀균분상속을 선언했다. 이러한 남녀평등상속법은 성리학이 강화되는 조선 후기, 그 중에서도 숙종 대 이후부터 붕괴되어 간다.[7] 조선왕조실록사전 - 능지처사(凌遲處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