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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lbgcolor=#1428A0,#1428A0><colcolor=#fff> 삼성 초대 총수 이병철 李秉喆|Lee Byung-chul[1] | |||
| | |||
| 출생 | <colbgcolor=#ffffff>1910년 2월 12일[음력] | ||
| 경상남도 의령군 화곡면 중교동 현 경상남도 의령군 정곡면 중교리 장내마을[3] | |||
| 사망 | 1987년 11월 19일 (향년 77세) | ||
| 서울특별시 용산구 이태원동 | |||
| 본관 | 경주 이씨 (慶州 李氏)[4][5] | ||
| 호 | 호암(湖巖)[6] | ||
| 경력 | 삼성 총수 (1938~1987) 삼성 회장 (1938~1966, 1968~1987) |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1428A0,#1428A0><colcolor=#ffffff> 부모 | 아버지 이찬우, 어머니 권재림 | |
| 형제자매 | 2남 2녀 중 차남 | ||
| 배우자 | 박두을 | ||
| 사실혼 | 박소저[7] | ||
| 자녀 | 장녀 이인희 장남 이맹희 차남 이창희 차녀 이숙희 삼녀 이순희(1939년생) 사녀 이덕희(1940년생) 삼남 이건희 오녀 이명희 사남 이태휘(1947년생) 육녀 이혜자(1952년생) | ||
| 친손 | 친손자 이재용 친손녀 이부진, 이서현, 이윤형 | ||
| 신체 | 167cm|60kg|혈액형 | ||
| 학력 | 지수공립보통학교 (전학) 경성수송공립보통학교 (졸업) 중동학교 (26회 / 졸업) 와세다대학 전문부 (정경과 / 중퇴) 와세다대학 (정치학 / 명예박사) | ||
| 병역 | 해당사항 없음 | ||
| 종교 | 유교, 불교 → 불명[8] | }}}}}}}}} | |
1. 개요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과연 무엇을 위해 살아가고 있는지를 잘 알고 있을 때 가장 행복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다행히 나는 기업을 인생의 전부로 알고 살아왔고, 나의 갈 길이 사업보국에 있다는 신념에 흔들림이 없다. |
부농의 아들로 태어나 젊은 시절엔 한량처럼 보내기도 했고 사업도 몇 번 말아먹었지만, 힘든 순간 속에서도 재기에 성공한 이후 무역업, 제분업, 제면업, 모직업, 설탕, 비료 사업 등에 뛰어들며 삼성을 국내 최상위 대기업으로 성장시켰고, 말년엔 반도체 산업을 위시한 제조업에도 진출해 이후 삼성이 글로벌 대기업으로 성장하고 대한민국이 반도체 강국이 되는 밑거름을 쌓았다.
오늘날 재계 최상위권 대기업 그룹인 삼성그룹, CJ그룹, 신세계그룹을 모두 이병철이 창업했다. 재계 서열 최상위권 그룹 3군데가 모두 이병철을 1세대 초대 회장으로 하여 비롯되었다. 그 외 현재는 기업 규모가 작아졌지만 제지업계 최대 규모 기업인 한솔그룹과 국내 2위의 미디어 기업인 중앙그룹[9]과 유통특화 준대기업인 BGF그룹까지 포함된다. 이병철을 시초로 하는 범삼성가는 현재도 대한민국 재계에서 거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이외에도 차남 이창희의 고명딸 이혜진이 이끄는 래딕스글로비즈[10] 및 래딕스플렉스와 그녀의 남편 조명희가 이끄는 디엠퓨어텍, 3녀 이순희의 아들인 김상용이 이끄는 알머스[11] 등도 범삼성가에 속하며 이들도 삼성 등 범삼성가 기업들과 상부상조한다.
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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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이병철/생애#|]] 부분을}}} 참고하십시오.3. 사업 철학
사업을 통해 사회에 이바지한다는 '사업보국(事業報國)'의 신념을 가졌다. 사회일반의 이해를 제대로 얻지 못하고 때로는 돈벌이주의자라는 비난까지 사면서 고난의 길을 가는 출발점이기도 했다"고 말했다. 《호암자전》에 따르면 '무한탐구'와 '무한정진'의 태도를 기업하는 사람이 갖춰야 할 자세라고 언급했다. 자신이 세운 원리, 원칙은 무조건 지키는 워커홀릭이었다고 한다. 정해진 스케줄을 무조건 지켜 이병철이 출근해 결재를 하다가 펜을 딱 놓는 시간은 오후 12시 30분 점심식사 시간이었다고. 딱히 정해진 출근 시간에 출근하지 않고 심지어 귀빈들 맞는 영빈관 격인 승지원이나 자택에서 일을 보기도 한 아들 이건희와는 다른 부분이다.《호암자전》에서
"올바른 정치를 권장하고 나쁜 정치를 못하도록 하며, 정치보다 더 강한 힘으로 사회의 조화와 안정에 기여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를 생각한 끝에 종합 매스컴의 창설을 결심했다."
라며 동양방송과 중앙일보의 설립 배경을 밝히기도 했다.3.1. 어록
사업 보국이 인생의 신념“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과연 무엇을 위해 살아가고 있는지를 잘 알고 있을 때 가장 행복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다행히 나는 기업을 인생의 전부로 알고 살아왔고 나의 갈 길이 사업보국(事業報國)에 있다는 신념에도 흔들림이 없다.”
- 1976.11. '나의 경영론' (전경련회보)에서
나라가 만사의 기본이다- 1976.11. '나의 경영론' (전경련회보)에서
“모든 것은 나라가 기본이다. 나라가 잘되어야 기업도 잘되고 국민이 행복해질 수 있는 것이다.”
- 1981. 1. 1. 신년사에서
기업인의 본분- 1981. 1. 1. 신년사에서
“선도적인 기술혁신으로 좋은 상품을 남보다 먼저 만들어내고 수출과 고용과 소득을 늘리며 경영합리화로 잉여를 많이 올려 기업확장의 재원을 마련함으로써 궁극적으로 국가에 봉사하는 것이 기업인의 본분이며 사회적 의무가 아니겠는가.”
- 1976. 6. '재계회고' (서울경제신문)에서
신용은 얻기는 어렵지만 잃기는 쉽다- 1976. 6. '재계회고' (서울경제신문)에서
“장기적인 사업에 있어서는 신용이 제일이다. 신용을 얻기는 매우 어렵다. 시간도 오래 걸린다. 그리고 한번 얻은 신용을 계속 유지한다는 것을 더욱 어렵고 또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신용처럼 잃기 쉬운 것도 없다. 신용이란 기업에 대한 국민의 신뢰나 다름없다. 그런 신뢰에 어긋나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나의 신념이다.”
- 1976. 6. '재계회고' (서울경제신문)에서
자연은 속일 수가 없다- 1976. 6. '재계회고' (서울경제신문)에서
“동물이나 식물은 사람과 달라서 속일 수가 없다. 이론과 실제를 알고 항상 연구하고 개선해야지 자만해서는 안 된다. 필요하다면 일본 뿐만 아니라 유럽에도 가서 배우도록 하자. 우리는 실패율을 낮추고 더 빨리 성장해야 한다.열심히 하면 이곳은 정년퇴직도 없고 평생 일할 수 있으며, 또 기술을 배워 자영을 할 수도 있다. 책임지고 끝까지 잘될 수 있도록 모든 담당자들이 최선을 다하도록 하라.”
- 1986. 9. 10 용인 자연농원에서
10년 뒤를 대비하라- 1986. 9. 10 용인 자연농원에서
“모든 설비투자계획에 있어서 5년 정도를 내다본 단기 안목 위에서 세우지 말고 10년 이상 50년 정도의 장기 안목 위에서 세워야 한다. 앞으로 영구히 잘못되지 않도록 설계 '레이아웃'등을 조정하되 그 중에는 당장 손해가 나는 부분이 포함되더라도 앞을 보고 계획을 꾸며야 하고 당장의 손해는 감수해야 했다. ”
- 1977. 6. 17. 삼성조선 건설현장에서
실패하리라는 생각이 가장 위험하다- 1977. 6. 17. 삼성조선 건설현장에서
“어느 사업이나 실패의 위험은 다 있는 법이지만 가장 위험한 것은 처음부터 실패할 여지가 있다는 생각을 안고 일에 착수하는 것입니다.”
- 1980. 7. 3. 전경련 강연 (최고경영자연수회)에서
결심한 이후에는 과감히 실행하라- 1980. 7. 3. 전경련 강연 (최고경영자연수회)에서
“결심하기 전에는 충분한 검토가 필요하지만 계획이 확정되면 만난(萬難)을 무릅쓰고 과단성 있게 실행해야 하는 것이 사업가의 기본적인 태도이다.”
- 1980. 7. 3. 전경련 강연 (최고경영자연수회)에서
계획은 좀 더 의욕적으로- 1980. 7. 3. 전경련 강연 (최고경영자연수회)에서
“경영계획의 결정은 의욕적으로 해야 한다. 90퍼센트만 목표로 세워놓고 초과 달성하는 것보다 120퍼센트를 목표로 세우고 110퍼센트 이상 달성하는 것이 바람직한 방법이다.”
- 1973. 2. 사장단 회의에서
목표는 조금 무리하게 세워라- 1973. 2. 사장단 회의에서
“계획이란 실천 가능성 있는 것을 세워야 하며 다소 무리한 목표를 세웠다 하더라도 실천해야 하는 것이며 실천을 안 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 최선을 다해 안 되는 것이야 어쩔 수 없겠지만 현재는 이익이 나고 장래에는 손해가 되는 계획을 세워서는 안될 것이다. 현재 조금쯤 손해가 나더라도 장래에 계속적으로 이익이 날 수 있는 경영을 해야 할 것이다. 무모한 계획은 문제가 되겠지만 합리적인 계획은 실천할 수 있도록 해야 하며 해놓고 추진을 한다거나 해서는 안될 계획을 세우면 안 된다. 목표는 조금 무리하게 세워놓고 목표대로 가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 1983. 10. 1. 반도체 회의에서
- 1983. 10. 1. 반도체 회의에서
3.2. 인재 관리
"조직이 사람을 움직이는 기업은 망하지만, 사람이 조직을 움직이는 기업은 발전한다."
"말하는 걸 배우는 데는 2년이 걸렸지만, 말하지 않는 법을 익히는 데는 60년이 걸렸습니다."
"내가 관심을 갖는 것은 경영의 기술보다는 그 저류에 흐르는 기본적인 생각, 인간의 마음가짐에 관한 것이다."
"나는 경상적인 사업의 사소한 일은 알려고도 하지 않고, 알지도 못한다. 다만 유위한 인재를 찾아서 그에게 모든 것을 맡겨왔을 따름이다."
"내 일생의 80%는 인재를 모으고 교육시키는 데 시간을 보냈습니다. 내가 키운 인재들이 성장하면서 두각을 나타내고 좋은 업적을 쌓은 것을 볼 때 고맙고, 반갑고, 아름다워 보입니다."
"의심이 가거든 사람을 고용하지 마라. 의심하면서 사람을 부리면 그 사람의 장점을 살릴 수 없다. 그리고 고용된 사람도 결코 제 역량을 발휘할 수 없다. 사람을 채용할 때는 신중을 기하라. 그리고 일단 채용했으면 대담하게 일을 맡겨라."
"내 경험으로 보면 입사 1, 2년이 지나면 신입사원의 5%는 탈락하고 30%는 우수한 인재가 된다. 문제는 나머지 65%의 사람이다. 반 수 이상을 점하는 이들은 환경과 지도 여하에 의해 좌우된다. 조직력이란 바로 이들을 인재로 만들어나가는 힘이다."
Q : 이 회장은 경영철학에서 인재 육성이 중요과제라고 말씀하셨는데, 그 방법은 무엇입니까?
A : 지금 삼성그룹은 10만 명 정도의 종업원이 있습니다. 이들에게 무엇보다도 먼저 정신교육을 중요시하도록 하기 위해 의무라든가 사람 됨됨이를 입사 때부터 훈련시키고 있습니다. 그룹 내에는 4개의 사원연수소를 갖추고 그중에는 외국어를 전문으로 가르치는 연수원도 마련돼 있습니다. 한국에서 배운 것은 기초일 뿐이고, 입사 후 교육을 통해 성장케 한다는 생각입니다.
출처: 1984년 5월 22일자 일본 경제전문지 <<재계>>의 창간 30주년 특집호에서, 이병철과 반도체 투자를 결심한 당시 상황을 대담한 내용을 엮은 것이다.
A : 지금 삼성그룹은 10만 명 정도의 종업원이 있습니다. 이들에게 무엇보다도 먼저 정신교육을 중요시하도록 하기 위해 의무라든가 사람 됨됨이를 입사 때부터 훈련시키고 있습니다. 그룹 내에는 4개의 사원연수소를 갖추고 그중에는 외국어를 전문으로 가르치는 연수원도 마련돼 있습니다. 한국에서 배운 것은 기초일 뿐이고, 입사 후 교육을 통해 성장케 한다는 생각입니다.
출처: 1984년 5월 22일자 일본 경제전문지 <<재계>>의 창간 30주년 특집호에서, 이병철과 반도체 투자를 결심한 당시 상황을 대담한 내용을 엮은 것이다.
사람 욕심이 많아 '삼성의 최고 자산은 인재'라고 말할 정도로 인재 양성에 아낌없이 투자했다. 진대제, 이윤우를 비롯해 이임성(샤프전자 고문), 이상준(미국 자일록 기술개발 책임자), 이일복(전 인텔 근무), 이종길(미국 인터실, 사이너텍 CMOS 제조수율 개선 기술자), 박용의(미 웨스턴디지털, 인텔 메모리 설계 기술자)로 대표되는 박사급 인재들을 데려왔고, 초창기 미국에서 생활하듯 청바지 차림으로 첫 출근을 한 황창규를 용인하며, 그를 나무라려 하는 임원을 말리기도 했다. 생전의 이병철은 "내 생애의 80%는 사람을 뽑고 관리하는 데 보냈다. 1년의 계(計)는 곡물을 심는 데 있고, 10년의 계는 나무를 심는데 있으며, 100년의 계는 사람을 심는 데 있다."고 말할 정도로 인재 선발과 관리를 매우 중시했으며, 평소 이렇게 눈여겨 봐뒀다가 일을 맡긴 사람들 덕분에 위기에서 벗어나기도 하였다. 상기한 서울 탈출 당시 운전사 위대식 건도 그렇고, 대구 과수원과 양조장, 삼성상회를 건실하게 경영한 이창업이[12] 건넨 3억 원으로 재기할 종잣돈을 마련할 수 있었다. 1954년 제일모직 공장을 대구에 세울 때 공장보다도 기숙사를 먼저 세웠는데 생산직 근로자를 위한 국내 최초의 기숙사였으며, 방에는 스팀 난방이 들어오고 목욕탕, 세탁실, 다리미실, 미용실이 있는 등 당대로서는 매우 파격적인 시설이었다. 급여 또한 좋아서 당시 제일모직 근로자의 증언에 따르면 월급으로 동생들의 학비와 다섯 식구 생활비까지 충당 가능했다고 한다.
1956년 삼성물산이 대졸 신입사원을 공개채용한 이래 1987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사원 선발 최종면접에 반드시 참여하는 것으로 유명했는데, 회장이 O를 친 사람은 반드시 채용, < > 표시를 하면 면접 위원들이 알아서 처리할 사람(이게 대부분이었다고 한다), X표는 뽑지 말아야 할 사람이었다는 후문이다. 지원자의 신발이 더러운 것을 보고 면접장에서 쫓아냈다는 말도 있다. 그 사람이 범죄를 저지를 만한 인물인지 여부를 판별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고 하며 선우용여가 먼훗날 밝힌 바에 따르면, 1960년대 이병철이 소유한 TBC 방송국 전속 무용수 시험[13]에서도 이병철이 관상가를 데리고 와 직접 면접을 봤다고 한다.[14] 방송국 직원 면접에서도 회장이 직접 와서 그랬을 정도면, 다른 회사 면접 역시 관상가와 이병철이 면접을 다 봤을 거라고 추측이 가능하다.[15]
1965년에는 5.16 군사정변 직후 처형당할 뻔한 홍진기를 포섭해 중앙일보를 창간, 일찌감치 자사에 우호적인 언론을 만드는[16] 안목을 발휘하기도 했다. 그리고, 비록 고용된 사장이지만, 전직 국무위원이자 수재로 유명했던 홍진기를 대하는 데 소홀함이 없었으며[17], 나중에는 맘에 들었는지 사돈 관계까지 맺게 된다. 홍진기의 딸이 이건희의 아내 홍라희다. 때문에 이후 이건희 후계 체제 과정에서 홍진기가 이병철에 영향력을 행사한 거 아니냐는 루머도 있지만, 피해 당사자인 이맹희부터가 음모론일 뿐이라며 부정했다. 애초에 후계 구도 관련해선 비록 <호암자전>에는 자식들에게 흠이 될 부분이나 칭찬하는 대목이 거의 없지만(호암이 후계자 이건희를 직접 언급하는 대목도 "의욕이 있었다." 정도로 간략하게 묘사됐다.) 상기되어 있듯 차남은 군부에 이병철의 비위를 밀고하는 행위를 저지르고, 장남은 이를 암묵적으로 묵인했다는 의심을 받은 점도 고려될 필요가 있다. 굳이 영향력 행사와 관련해 직접적으로 밝혀진 사례가 있다면 장인이 경영 수업을 해준 것 정도인데, 이건희의 증언에 따르면 법률, 사회문화, 역사, 문학을 현재 사례와 비교하면서 가르치는 케이스 스터디 방식의 교육을 해줬다고 한다.
신현확 관련 일화도 나름 유명하다. 신현확은 이승만 정부에서 부흥부장관을 맡아 4.19 혁명이 일어난 이후 체포되었다. 당시 분위기상 신현확의 미래는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었는데, 이때 신현확이 체포되기 전 이병철에게 전화하여 돈을 요청했는데 이병철은 신현확이 끈 떨어진 연 신세임에도 이를 들어줬다고 한다. 그리고 수십 년간 이병철은 그 일을 입에 올리지도 않았다고 한다. 그러다 전두환 정부가 집권하고 장남인 이맹희의 경북고 동창들이 요직에 앉아 이제 친구 맹희에게 삼성을 되찾아 주겠다는 움직임이 생긴다. 그러자 후계 구도에 차질이 생길까 우려한 이병철은 1986년 신현확에 전화하여 삼성물산 회장직을 권유한다. 처음 신현확이 거절을 하자 이병철은 "빚을 이제 갚아 주셔야겠습니다"라고 처음으로 그 일을 말하며 설득을 하였고 신현확은 그제서야 삼성물산 회장직을 수락했다. 당시 TK 인맥의 대부격이던 신현확이 버티자 이후 신군부 세력들은 삼성의 후계 구도 개입을 포기하게 되었다고 한다.# 어느 기업이든 최고경영자를 잘 두어야 기업이 잘 굴러간다고 확신했기 때문에, 신입사원을 뽑은 후에는 가급적 본인이 생각하는 최고경영자의 요건을 충족시킬만한 능력을 갖추도록 교육에 무척 신경 썼다고 한다. 그 요건이란 '1. 덕망을 갖춘 훌륭한 인격자여야 한다. 2. 탁월한 지도력을 갖고 있어야 한다. 3. 신망(信望)을 받는 인물이어야 한다. 4. 창조성이 풍부한 인물이어야 한다. 5. 분명한 판단력이 있어야 한다. 6. 추진력이 있어야 한다. 7. 책임을 질 줄 알아야 한다.'
4. 비판
노동조합을 부정적인 시각에서는 삼성의 '무노조 원칙'을 만든 장본인이기도 하다. 이병철은 인재 양성과 관리, 후한 대우, 위대식과의 인연을 선전하고 노동자들에 대한 처우 개선 사례를 보여주며 무노조 원칙에 대한 비판에 맞서는 한편, 삼성 노동자들의 노조 설립 시도를 철권으로 탄압하여 노조에 대한 적대 의식을 드러내었다. 이병철은 이미 1960년에 제일모직 노동자들의 노동조합 설립 시도를 무너뜨린 바 있고, 77년 제일제당, 87년 SDI와 삼성중공업, 88년 거제조선소의 노동조합 설립 시도들을 구사대를 동원하고 유령 노조를 세워 무력화했다. 또한 노사협의회를 세워주겠다는 명목으로 노조 설립을 막기도 했으며, 77년 제일제당 노조 설립 시도 사태 때는 사측에서 노조원 11명을 감금하고 노조 탈퇴 만세를 외치라고 협박하는 등 범죄 행위까지 자행했다. 그렇기에 이병철의 '무노조 원칙'은 일개 기업이 헌법에 명시된 국민의 기본권을 탄압한 폭거로서 비판받아 마땅한 일이다. 이후 삼성의 무노조 원칙은 2대 이건희 회장까지 내려오다가 3대 이재용 회장대에 무노조 경영 원칙을 포기하고, 노조 설립을 허용하면서 사라졌다.또한 현대그룹 정주영 회장이 박정희 정부 시기 정권과 유착하며 성장한 것처럼 이병철 회장의 삼성은 1950년대에 이승만 정부와 유착하며 급속하게 성장했고 제2공화국 시점에는 이미 한국 제일의 재벌로 등극해 있었다. 단적으로 50년대 후반 정부로부터 불하받은 한일은행과 조흥은행 모두 부당한 특혜분양이었다는 것이 이미 2공화국 시기에 드러났고, 5.16 쿠데타 이후 군사정권에 의해 국유화되었다. 2공 시기 검찰 수사로 밝혀진 바에 따르면 이병철은 주요 재벌 회장들 중에서도 재일의 부정축재자로서, 삼성은 당시 정부에서 부정축재 자진신고를 받을 때 자수한 기업 중 하나였는데 조사 결과 자진신고한 탈세 금액이 실제 탈세 액수보다 적다는 것이 드러나더니#, 이후 검찰이 최종 발표한 탈세액은 무려 50억환에 달했다. 참고로 처음에 삼성이 탈세 액수라고 신고한 것은 겨우 8억이었다.
다만 언론 기사 등 세간에서는 단순히 '이병철에게 벌금 50억환이 부과되었다'고만 알고 있는 경우가 많지만 이는 사실이 아닌데, 50억환은 추징금이 아니라 탈세액이었고, 그 중 14억환은 1960년 당시 탈세 처벌기한이었던 5년보다 이전에 탈세한 액수였고 나머지 추징대상인 36억환이 5년 이내에 탈세한 액수였는데, 개중에서도 18억환은 2년 이내에 탈세한 것이어서 5배 가산되었다. 즉 최종 추징금은 50억환이 아니라 108억환에 달한다. 참고로 이병철이 탈세한 50억환이라는 액수가 얼마나 큰지 체감을 위해 설명하자면, 1962년 화폐개혁에서 10환 = 1원으로 교환되었고 이때 1원이 2026년 기준 45원 정도이므로, 즉 현재 가치로 무려 226억에 달한다.#
또한 당시 검찰 수사에 따르면 이병철을 비롯한 주요 재벌들은 이렇게 부정축재한 재산을 해외로 빼돌리기까지 했다. 이병철의 경우 자유당 정권기에 정권의 특혜로 부당융자받은 액수가 총 1백억환에 이르는데, 검찰 조사로 드러난 총 국내 재산 액수도 거의 1백억환 정도 되어 대부분의 재산을 해외로 은닉한 것으로 추정되었다.#
심지어 사세청(현 국세청) 조사에 따르면 이병철을 비롯한 당시 주요 재벌들은 자유당 정권이 3.15 부정선거를 저지르는데 불법 정치자금을 제공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때 이병철은 1억 3천만환을 제공해 가장 액수가 많았던 삼호그룹의 정재호와 1억 7백만환을 제공한 락희화학의 구인회에 이어 세 번째로 많은 7700만환을 제공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중 5천만환은 1959년 11월 재무부장관 송인상이 부통령 이기붕과 공모해 부정선거 자금을 모으기 위한 위장회사인 대한여행사의 손실을 메꾼다는 명목으로 차용한 것이고#, 1천만환은 1960년 3월 곽영주에게 선거자금이라는 명목으로 헌납한 것이라고 한다.#
주로 이승만 정부, 박정희 정부와 정경유착을 통해 성장하였지만 장면 내각과도 심지어 정경유착을 했는데, 시중은행을 통해 수십억환을 부당융자 받아 국회 대정부질의에서 관련해 문제가 되기도 했다.#
5.16 정변 이후 군사정권은 민주당 정부가 부정축재자 처리를 미진하게 했다면서 부정축재자 처벌에 나섰는데, 이때 이병철에게는 130억환의 추징금이 부과되어 여타 재벌들과 비교해서도 압도적이었다. 정변 당시 이병철은 해외에 있었는데 정권은 그를 국내로 소환했으며, 탈세 이유를 묻자 '세법이 전쟁 시절의 옛날 세법을 사용해 1000원을 벌면 1200원을 뺏어가기도 했다. 정식적인 세율로 세금을 납부하면 기업들은 모두 도산하게 될 것이다. 그런 사람들이 처벌되면 어느 누구도 기업을 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며 이것은 자유경제원칙에도 위배된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후 이병철은 '자신의 재산을 모두 국고로 환원할 것'이라는 성명을 발표했고 군부 인사들에게는 경제 자유화와 국가 재건에서 기업들의 역할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이 역설이 먹혔던 것인지, 정권 내 관료 출신 인사들의 현실론 노선과 이병철과 연이 있었던 일부 군부 인사들의 두둔으로 그의 추징금은 130억에서 80억으로 대폭 감액되었으며 이마저도 '공장을 짓는데 투자하여 주식을 헌납'하는 방식으로 추징금을 내도록 했다. 이후 이병철과 박정희 간의 사이는 매우 가까워졌고 사카린 밀수 사건이라는 삼성 최악의 흑역사를 낳았다. 그리고 이로 인해 삼성의 후계구도가 뒤바뀌는 나비효과까지 만들어냈다. 삼분폭리사건 같이 모두가 어려운 시절에 밀가루라는 국민의 필수품을 가지고 폭리를 취하거나, 사업 확장 과정에서 중소기업이나 몰락한 대기업을 인수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 과정에서 상대 회사에 폭압적인 태도를 취하며 강제로 빼앗아 오는 행태도 많았다. 특히 삼성중공업을 세우는 과정에서 이런 비판이 많이 제기되었다.
즉, 삼성 창업주라 후대에 미화되어서 그렇지, 이후 이건희 회장 시절에 비판받은 삼성의 문제점 대부분은 사실 이병철이 만들어놓은 문제에 가깝다.
5. 경쟁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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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이병철/경쟁자들#s-|]]번 문단을#!if 문단 == null & 앵커 != null
{{{#!if 문서명 = 문서명 != null ? 문서명 : calleeTitle
의 [[이병철/경쟁자들#|]] 부분을}}} 참고하십시오.6.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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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이병철/여담#s-|]]번 문단을#!if 문단 == null & 앵커 != null
{{{#!if 문서명 = 문서명 != null ? 문서명 : calleeTitle
의 [[이병철/여담#|]] 부분을}}} 참고하십시오.7. 가족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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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범삼성가#s-|]]번 문단을#!if 문단 == null & 앵커 != null
{{{#!if 문서명 = 문서명 != null ? 문서명 : calleeTitle
의 [[범삼성가#|]] 부분을}}} 참고하십시오.8. 주요 경력
- 1936년 협동정미소 설립
- 1938년 삼성상회 설립
- 1942년 조선양조 인수
- 1948년 삼성물산공사 설립
- 1950년 일본공업시찰단원
- 1951년 삼성물산 설립
- 1953년 제일제당 설립
- 1954년 제일모직 설립
- 1958년 안국화재 인수
- 1961년 전경련(~1962)·삼성물산(~1987) 초대 회장
- 1963년 동방생명·동화백화점 인수
- 1964년 동양방송·한국비료공업 설립
- 1965년 삼성문화재단·중앙일보 설립, 새한제지 인수, 성균관대학교 이사장
- 1966년 중앙개발·고려병원 설립
- 1969년 삼성전자 설립
- 1972년 제일합섬 설립
- 1973년 제일기획·호텔신라·삼성코닝 설립
- 1974년 삼성석유화학·삼성중공업 설립
- 1976년 용인자연농원 개장
- 1977년 삼성조선·종합건설·삼성정밀공업 설립, 한국반도체 50% 인수[18]
- 1978년 삼성반도체 설립
- 1981년 한일경제협회 고문 위촉
- 1982년 호암미술관 개관, 삼성종합연수원 개원, 삼성반도체통신 출범
- 1983년 삼성시계 설립
- 1984년 삼성휴렛팩커드·삼성의료기기 설립
- 1985년 삼성데이타시스템(SDS) 설립
- 1987년 삼성종합기술원 개원
9. 수상 경력
- 금탑산업훈장 (1969)
- 대통령표창 (1971)
- 제2회 세계최고 경영인상[19] (1979)
- 국민훈장 무궁화장 / 훈일등서보장(일본) (1987)
10. 저서
- 호암자전 - 중앙일보사. 1986.(초판) / 나남. 2014.(재판) #여기에서 열람할 수 있다.
11. 대중매체에서
- 1983년 MBC 드라마 야망의 25시[20], 1993년 MBC 드라마 제3공화국, 2004년 MBC 드라마 영웅시대에서 정욱이 연기했다. 제3공화국에서는 이병철이란 실명으로 나왔고 야망의 25시에서는 모티브를 딴 인물인 최일제, 영웅시대에서는 마찬가지로 국대호란 인물이 연출되었다. 영웅시대의 경우 1부 청년 역은 전광렬이, 2부 중장년 역은 정욱이 연기했다. 그런데 문제는 정욱이 이병철 전문 배우로 대중에게 각인이 되다보니, 이를 이용한 정욱이 아들의 다단계 사기 행위에 이병철과의 관계를 과장하는 등 협조하는 바람에 구속 당한 흑역사를 기록하고 말았다.
- 2005년 드라마 제5공화국의 국제그룹 해체 에피소드에도 잠깐씩 등장하나 배우는 미상으로, 위키백과에 이건희와 소병해 역할을 맡은 배우 이름은 나와 있음에도 볼 수가 없다. 드라마 전체에서 정주영에 비해 비중은 아주 작은 편이다.
- 이병철에 해당하는 배역이 직접 나온 장면은 아니지만, SBS 드라마 야인시대 1화, 최종화, 제3공화국 23화, 영웅시대 56화에서 국회의사당에서 김두한 국회의원이 사카린 밀수 사건에 대해 이를 두둔하는 듯한 정부 인사(정일권 총리, 장기영 경제부총리, 김정렴 재무부장관, 민복기 법무부장관)에게 오물을 투척하는 장면을 내보였다.
- 2022년작 재벌집 막내아들의 진양철(이성민 분)이 이병철을 주요 모티브로 한 인물이다.[21] # 분장 스타일과 대구식 동남 방언 말씨 등이 생전 이병철과 흡사해 환생했다는 농담도 나올 정도였다. 다만 생전 이병철을 본 사람들에 따르면 표정이나 말투는 매우 흡사하지만, 평소 스타일은 점잖아서 드라마처럼 과격하진 않고 좀 더 조근조근하게 독백식으로 말하는 스타일이었다고 한다.
12. 관련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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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9 제헌국회의원 154명 | 1969 조동식 교육인 | 1969 곽상훈 독립운동가, 국회의장 | 1970 김수환 추기경 | 1970 백낙준 교육인, 국회의장 | ||
| 1970 이상백 독립운동가, 사회학자 | 1970 이은상 시인, 역사학자 | 1971 유일한 기업인 | 1973 박두병 기업인 | 1974 박태준 기업인 | ||
| 1976 박일경 교육인 | 1979 김연수 기업인 | 1979 주요한 문학가, 언론인, 정치인 | 1980 권승렬 독립운동가, 법조인 | 1980 김홍일 군인, 독립운동가 | ||
| 1982 권영대 교육인 | 1982 김상만 언론인 | 1985 이숙종 교육인 | 1985 이항녕 법학자 | 1987 이병철 기업인 | ||
| 1988 권이혁 교육인, 의사 | 1988 정주영 기업인 | 1989 이방자 교육인, 영친왕비 | 1990 이태영 법조인 | 1991 강영훈 국무총리 | ||
| 1991 김병관 언론인 | 1994 김호길 교육인 | 1994 고형곤 철학자, 교육인, 정치인 | 1994 문병집 교육인 | 1995 곽윤직 법학자 | ||
| 1996 장기려 의사 | 1996 윤덕선 의사, 교육인 | 1996 정범모 교육인 | 1997 박성용 기업인 | 1998 고흥문 국회부의장 | ||
| 1998 주영하 교육인 | 2000 이건희 기업인 | 2001 송건호 언론인 | 2002 김재준 종교인 | 2002 문창모 의학자 | ||
| 2002 백낙환 의학자, 교육인 | 2004 고병익 역사학자 | 2004 이기백 역사학자 | 2004 유봉식 기업인 | 2006 김희수 의학자, 교육인 | ||
| 2006 이종욱 의사, WHO 사무총장 | 2006 정재헌 법조인 | 2007 권영우 교육인 | 2007 장훈 체육인 | 2008 박관용 국회의장 | ||
| 2008 진창현 바이올린 제작자 | 2009 김정수 정치인 | 2010 이영덕 국무총리 | 2010 조용기 종교인 | 2010 황장엽 북한정치인, 탈북자 | ||
| 2011 류택형 법조인 | 2011 이태석 종교인, 의사 | 2011 김준엽 독립운동가, 교육인 | 2011 조규훈 교육인, 기업인 | 2012 헬렌 펄 매킨지(매혜란) 선교사 | ||
| 2012 김평우 법조인 | 2012 정몽구 기업인 | 2013 남덕우 국무총리 | 2013 손경식 기업인 | 2013 맹광호 의학자 | ||
| 2013 한덕수 국무총리 | 2014 김승호 기업인 | 2015 권광중 법조인 | 2016 이근 의사 | 2017 박한철 헌법재판소장 | ||
| 2017 반기문 UN 사무총장 | 2017 양승태 대법원장 | 2017 서용달 경영학자 | 2018 김종필 국무총리 | 2018 노회찬 정치인 | ||
| 2018 박재갑 의사 | 2018 이석태 법조인 | 2018 조규광 헌법재판소장 | 2018 한승헌 법조인, 감사원장 | 2018 정세균 국회의장 | ||
| 2019 윤한덕 의사 | 2019 이국종 의사 | 2020 이이화 사학자 | 2020 전태일 노동운동가 | 2020 문희상 국회의장 | ||
| 2021 최종태 기업인 | 2022 박병석 국회의장 | 2022 리차드 위트컴 군인 | 2023 송창근 기업인 | 2023 김박 기업인 | ||
| 2023 배효준 기업인 | 2023 자승 종교인 | 2024 이임성 법조인 | 2024 이상만 지질학자 | 2024 임희섭 사회학자 | ||
| 2024 장석진 언어학자 | 2024 김상주 공학자 | 2024 윤대원 의사, 교육인 | 2025 김진표 국회의장 | 2026 이해찬 국무총리 | ||
| 2026 오윤덕 법조인, 사회사업가 | 2026 이홍구 국무총리 | 2026 우원식 국회의장 | }}}}}}}}} | |||
[1] 원래 이름은 이병길(李秉吉)인데 '吉'자를 더 붙여서 30대 시절에 이병철(李秉喆)로 개명했다는 이야기가 있다.[음력] 1월 3일[3] 경주 이씨 판전공파-사정공파 집성촌이다.[4] 판전공파(判典公派)-사정공파(司正公派) 중시조 39세손 상○(相○) 항렬이지만, 항렬자를 쓰지 않았다.(족보)[5] 파조(派祖) 이강(李
)이 전객시(典客寺)의 판사(判事), 즉 판전객시사(判典客寺事)를 역임하였기에 줄여서 판전공(判典公)이라고 했다. 다만 의미상 판사공(判事公)으로 해야 옳다는 의견도 있다. 전객시는 예빈성(禮賓省)이라고도 하며 고려시대 외국의 빈객을 맞이하고 접대하는 일을 하던 관청이다. 전객시의 장(長)은 정3품 판사로 하였다. 사정(司正)은 조선시대 5위(五衛)의 정7품 관직이다.[6] '호암아트홀'과 '호암미술관'에 붙는 그 호암이다. 성균관대학교에도 이사장이었던 이병철의 호를 따서 명명한 '호암관'이 있다. 고향인 경상남도 의령군 정곡면 생가 앞에도 '호암길'이 있으며, 대구광역시 북구에 호암로가 있다.[7] 8살 연하로 20년간 사실혼 관계를 유지했다.[8] 원불교라는 말이 있지만 며느리와 사돈의 영향으로 사후 법명을 받은 것일 뿐 신도는 아니었다.[9] 다만 여긴 사돈댁인 홍씨 일가 소유긴 하다. 물론 삼성에서 분리된거긴 하다만. 중앙그룹의 모체인 동양방송과 중앙일보가 이병철에 의해 설립되었다.[10] 나쵸와 치즈소스로 유명한 아미고도 이 회사 산하 브랜드다.[11] 前 영보엔지니어링.[12] 처음엔 이병철의 와세다대학 선배 이순근이 전문경영인을 맡아 삼성상회를 확장하는 데 공헌했지만 월북을 했던 터라, 이 시점에서는 이창업이 맡아 운영하고 있었다. 이병철이 서울 사업으로 신경 쓰지 못한 몇 년 동안 대구 사업장에서는 청주(淸酒) 월계관과 사이다 판매로 큰 돈을 벌었다고 한다.[13] 서라벌대학(지금의 중앙대학교 예술대학) 연극영화과였는데 담당교수였던 최영남의 강한 요구로 시험을 봤다고 한다. 선우용여는 고등학교때까지 서양무용(발레)을 하다가 그만두고 배우가 되겠다고 연극과에 갔던 거라서 더 이상 무용은 하기 싫다고 말했지만 최영남이 너는 지금 방송국 무용수가 되어도 곧 거기서 연기를 할 운명이라고 말하여 혼을 내며 무조건 시험을 보라고 강요했다고 한다. 지금 생각해 보니 교수가 은인이라고 느낀다고 한다. 실제로 합격하자마자 바로 "상궁나인"이라는 드라마에 주연으로 뽑혔다고 한다. 왕 역할의 이순재의 눈에 들어 후궁이 되는 "나인"(궁궐의 시녀) 역할이었다.[14] 당시 선우용여를 얼굴 앞뒤옆만 카메라로 찍어보더니 무용도 안 시키고 나가라고 한 뒤에 합격시켰다고 한다. 선우용여는 그전에 다른 후보자들은 그 면접에서 다 무용 시범을 했기 때문에 본인은 떨어진 줄 알았다고 한다. 알고 보니 관상만으로 합격시킨 것이었다.[15] 이맹희의 회고록에 따르면 이병철이 관상을 중요시했다는 건 허구라고 한다. "내가 신입 사원을 뽑는 기준은 관상을 보는 것이 아니라 과연 이 사람이 비즈니스 맨으로 상대에게 호감을 줄 수 있는가를 보았다."라고 말했다는 것.[16] 다만 이는 양날의 검이었는데, 다른 언론사에선 집중 견제를 받았기 때문. 사실 사카린 밀수 사건이 커진 것도 이때 앙심이 생긴 다른 언론사들이 집중 저격한 탓도 있었다.[17] 이맹희 회고록에서 따르면 친했다기보단 '아버지(이병철)과 일민(홍진기)은 서로를 어려워하며 존경하는 사이였다'고 한다. 그러면서 일민이 후계 구도에 간섭했다는 주장에 대해 일민은 그런 짓을 할 사람도 아니었고, 애초에 아버지는 이런 문제에 대해 남의 조언을 듣고 판단할 사람이 아니라고 음모론을 일축했다[18] 다른 50%는 1974년에 이건희가 인수[19] 미국 뱁슨 칼리지 주최.[20] 이때 정욱은 직접 이병철을 만나 본인이 쓰던 안경과 ‘운둔근(運鈍根; 우둔하면서도 끈기 있게 기다리는 사람에게 운이 온다)’이라고 쓴 친필 휘호를 선물받았다고 한다.[21] 다만 원작의 진양철은 삼성이 모티브인 순양그룹의 창업주라는 걸 제외하면 이병철과 비슷한 색채가 옅은 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