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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대 WHO 사무총장
이종욱
李鍾郁 | Lee Jong-wook
파일:이종욱 사무총장.jpg
출생 1945년 4월 12일
경기도 경성부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망 2006년 5월 22일 (향년 61세)
스위스 제네바 칸토날병원
본관 전의 이씨[1]
재임기간 제6대 WHO 사무총장
2003년 7월 21일 ~ 2006년 5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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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4b92db><colcolor=#fff> 형제자매 누나 이종원
동생 이종오, 이종구
배우자 카부라키 레이코
학력 서울덕수국민학교 (졸업)
경복중학교 (졸업)
경복고등학교 (졸업)
한양대학교 공과대학 (공학 / 학사)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의학 / 학사)
서울대학교 대학원 (산업공학 / 석사)
하와이 주립대학교 대학원 (열대의학 / 석사)
서울대학교 (의학 / 명예박사)
종교 천주교[2]
약력 WHO 사무총장 (2003 ~ 2006) }}}}}}}}}

1. 개요2. 생애3. 기타

[clearfix]

1. 개요

"그 일이 옳은 일인지만 생각하라. 그리고 그 일을 실천하라. 하기도 전에 안된다고 생각하지 마라. 누구는 말한다. 일을 하기도 전에, 일하는 사람이 부족해서, 돈이 없어서, 시간이 부족해서, 도와주는 데가 없어서 일을 할 수 없다고 한다. 만약 그 일이 진정 옳은 일이라면 사람도, 돈도 다 따라오게 된다. 거듭 말하지만 과연 이 일이 세계인들의 건강을 위해서 옳은지만 고민하라. 그리고 옳다면 행동하라." #
WHO 제6대 사무총장. 국제기구의 선출직 수장을 역임한 최초의 한국인이다. 특히 행운이나 강대국의 뒷받침, 이전 경력의 후광이 아닌, 자기 분야에서의 공적과 노력만으로 이루었다는 점에서 더욱 큰 가치를 갖는다.[3]

2. 생애

1945년 4월 12일 경기도 경성부(오늘날의 서울특별시 종로구)에서 태어나 서울 경복고등학교, 한양대학교 공과대학을 졸업하고 26살의 나이로 다시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에 입학했다. 이후 동 대학원의 산업공학 및 미 하와이 주립대학교 대학원(전염병학)에서 석사 학위를 각각 취득했다.

의대 재학 시절부터 경기 안양시 나자로 마을에서 한센병 환자를 돌보는 봉사를 하였으며, 이 시절 부인인 일본인 카부라키 레이코(鏑木 玲子) 여사[4]와 만나 결혼했다. 1976년 대학 졸업 후 부부가 함께 태평양 피지로 가 빈곤환자에 대한 봉사활동을 시작, 1983년에 WHO 남태평양지역 사무처 나병퇴치팀장으로 근무하면서부터 WHO와의 인연을 맺게 된다. 이때의 봉사로 '아시아의 슈바이처'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이후 WHO 남태평양지역 사무처 질병예방관리국장, 예방백신사업국장, 정보화담당팀장 등을 거쳐 결핵관리국장으로 있으면서 2003년 1월 말 7차까지 가는 치열한 접전 끝에 마침내 2003년 1월 28일 벨기에 출신의 피터 피오트 유엔 에이즈퇴치계획 사무국장을 2표 차로 물리치며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제6대 WHO 사무총장 자리에 취임하게 된다. # 이는 한국인이 유엔 산하 국제기구의 수장을 맡은 최초 사례다.[5]

취임 당시 연설은 아래와 같다.
"We must do the right things
We must do them in the right places
And we must do them right ways"
"우리는 옳은 일을 해야 합니다.
올바른 장소에서 해야 하며
올바른 방법으로 해야 합니다."
이미 예방백신 사업국장 시절 소아마비 유병률을 세계인구 1만 명당 1명 이하로 떨어뜨리는 성과를 올려 ‘백신의 황제’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이는 결국 2020년 8월 25일, 마지막까지 소아마비가 퇴치되지 않았던 아프리카에서 소아마비 종식선언을 하는 주요한 계기가 되었다. 사무총장에 취임할 당시 "300만 명의 에이즈 환자에게 치료제를 보급"하겠다는 공약을 제시했다. 주변은 실현되지 못할 거라고 우려했는데, 이에 대한 그는 아래와 같이 답했다.
"안 된다고 생각하면 수많은 이유가 있고 그럴 듯한 핑계가 생기지. 시작하기도 전에 고민만 하다간 아무것도 못 해. 옳은 일만 하면 다들 도와주고 지원하기 마련이란 걸 명심하라고."
결국은 우려대로 100만 명에게만 보급하고 나머지 200만 명에게는 보급하지 못했다. 당초 계획의 절반에도 미달한 것이었고, 외견상 '실패'라고 평가해도 할말이 없었다. 하지만 그렇게 '실패'한 후 다음과 같이 밝혔다.
"행동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고, 아무도 도와주지 않으며, 재정지원도 늘어나지 않아. 시작하기도 전에 포기하고 좌절하는 경우가 많지. 시작하지 않는 것보다 실패는 훨씬 큰 결과를 남기는 법이야. 바로 그 점이 중요한 거야."[6]

연 30만km를 비행하며 150일을 출장다녔지만 비행기는 항상 2등석 이용에 수행원은 2명만 데리고 다녔다.[7] 자기 집도 없었으며, 전용차는 토요타 프리우스 2세대였다.[8] 차에 대한 말은 이랬다.
"세계인의 건강을 책임지는 WHO사무총장이 환경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잖아. 그리고 스위스나 유럽에서는 내가 하이브리드 자동차를 타도 아무도 신경쓰지 않아. 사무총장이나 직원 누구라도 차로 승부하는 것이 아니라 업무능력으로 승부하기 때문이야."
그리고 이렇게 소박한 생활을 한 것에 대한 대답은 이러했다고 한다.
"우리가 쓰는 돈은 가난한 나라 분담금도 섞여 있다. 그 돈으로 호강할 수 없다."
2004년 조류독감 확산 방지, 소아마비와 결핵예방, 흡연규제 등 탁월한 업적을 인정받아 타임지 선정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에 이름을 올렸다. 꿈이 있고 열정이 있는 젊은이를 좋아했던 그는 국제기구에서 일하고 싶어하는 젊은이들에게 이런 말을 남겼다.
"화려한 외교관을 상상하지 마라. 그리고 편협한 인종주의와 속좁은 애국심 같은 것으로는 국제기구에서 견디기 힘들다. 더군다나 열정없이 이런 일을 하는 것은 죄악이다."
이러한 성과와 행보들을 통해 그는 전 세계로부터 "행동하는 사람"(man of action)이라는 찬사를 얻었다.

이후에도 에이즈 퇴치사업, 조류인플루엔자 확산방지사업 등 주로 소외되고 가난한 저개발국 질병을 예방하는 데 헌신하던 중, 2006년 사무총장 재직 3년째에 과로에 의한 뇌출혈로 쓰러져 스위스 제네바에서 수술을 받았으나 61세를 일기로 영면하였다. 이에 대한민국 정부는 국민훈장 중 최고 등급인 무궁화장을 추서했다. 유해 귀국 전 현지에서 화장 절차를 거쳐 현재 그의 유해는 대전현충원 국가유공자묘역에 안장되어 있다.

3. 기타

생전에는 종교가 없었지만, 아내 레이코 여사는 천주교 신자다. 본인도 사망을 앞두고 병석에서 세례를 받아 천주교도로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장례도 천주교 성당에서, 장례미사 형식으로 거행되었다.

좀 더 오래 살았더라면 세계인의 건강에 더욱 많은 공헌을 했을 것이라는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특히 WHO에서 선출된 후임 사무총장 마가렛 찬, 테워드로스 아드하놈 거브러여수스가 국제의료기구의 수장으로서 적절치 못한 언행과 태만함으로 비판받고 있는 점에서, 그의 위대함과 빈 자리를 더욱 부각시키고 있다.[9] 특히 코로나 19 팬데믹 현상이 두드러지면서 더더욱 이종욱의 빈자리를 실감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그의 생애는 지식채널ⓔ와 KBS의 특집 다큐에서 다뤄지기도 했다.# #

이종욱기념사업의 일환으로 2009년부터 이종욱 기념 공공보건상을 WHO와 KOFIH(한국국제보건의료재단)가 함께 제정하여 공공보건분야에 기여한 사람/기관에게 매년 10만달러의 상금을 수여하고 있다. # ##

2023년 4월 22일~5월 8일, 세종문화회관 미술실에서 이종욱 총장과 이태석 신부의 삶을 기리는 전시회가 열렸다. 두 사람은 모두 의사 출신이었고, 의료 현장에서 헌신적인 활동을 펼쳤으며, 하필이면 슈바이처로 비교되지만 각기 비교될 만한 천주교 신부가 존재하며, 그 슈바이처와 비교될 한국인 의사는 각기 의대 선배이거나 모교를 세운 창립자의 제자라는 연과국내외에서 모두 귀감이 된 삶을 살았다는 공통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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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전서공파-양간공파-청강공파-부훤공파 30세손 종(鍾)○ 항렬.[2] 장례식 또한 천주교식으로 치러졌다.[3] 한때 코피 아난의 후임 유엔 사무총장에 거론되기도 했지만, 과로로 세상을 떠났다. 대신 코피 아난의 후임자에는 역시 한국인이었던 반기문 전 외교부 장관이 선출되었다.[4] 남편과 사별한 후에도 페루 카라바이유 등에서 활발하게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부부 사이에는 외동아들이 하나 있다. 이름은 이충호(일본 이름은 카부라키 타다히로)이며, 미국에서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다.[5] 그로부터 3년 후인 2006년에는 역시 한국의 반기문 외교부 장관이 UN 사무총장으로 당선되었다.[6] 무엇보다도 그 '실패'의 결과로 100만 명에게 에이즈 치료제를 보급하는데 '성공'하였고 아프리카 에이즈 환자들에 대한 관심도 높였다. 어려운 목표라고 시도조차 안 했다면 단 한 명에게도 혜택이 돌아가지 못했을 것이다.[7] 당시 세계 유력 국제기구의 수장임에도 직접 캐리어를 끌고다닌 모습은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8] 앞서 개인적으로 장만한 차도 있었는데, 이 차량은 유럽에서 중고로 구매했던 것이었다. 나중에는 고장나서 버렸다는 후문.[9] 현재 WHO는 Chinese Health Organization(중국보건기구)라며 국내외의 비판을 받는 동시에 거브러여수스의 친중 행보 탓에 그의 빈자리가 점점 더 커지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