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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몽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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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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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몽구의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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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훈장 무궁화장 수훈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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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
교육가·독립운동가
1969
이인
법조인·독립운동가
1969
닐 암스트롱 · 마이클 콜린스 · 버즈 올드린
우주비행사
1969
제헌국회의원
154명
1969
조동식
교육인
1970
김수환
추기경
1970
백낙준
교육인
1970
이상백
-
1971
유일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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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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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인
1980
권승렬
독립운동가, 법조인
1982
권영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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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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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인
1985
이숙종
교육인
1987
이병철
기업인
1988
권이혁
교육인, 의사
1989
이방자
교육인, 영친왕비
1991
강영훈
국무총리
1991
김병관
언론인
1994
김호길
교육인
1995
곽윤직
법학자
1996
장기려
의사
1996
윤덕선
의사, 교육인
1996
정범모
교육인
1998
고흥문
국회의원
1998
주영하
교육인
2000
이건희
기업인
2002
김재준
종교인
2002
문창모
의학자
2002
백낙환
의학자, 교육인
2006
김희수
의학자, 교육인
2006
이종욱
의사, WHO 사무총장
2006
정재헌
법조인
2007
권영우
교육인
2007
장훈
체육인
2008
박관용
국회의장
2008
진창현
바이올린 제작자
2009
김정수
정치인
2010
이영덕
국무총리
2010
조용기
종교인
2010
황장엽
북한정치인, 탈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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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인, 의사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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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헬렌 펄 매킨지(매혜란)
선교사
2012
김평우
법조인
2012
정몽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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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남덕우
국무총리
2015
권광중
법조인
2016
이근
의사
2017
박한철
법조인, 헌법재판소장
2017
반기문
외교관, UN사무총장
2017
양승태
법조인, 대법원장
2018
김종필
국무총리
2018
노회찬
정치인
2018
박재갑
의사
2018
이석태
법조인
2018
조규광
법조인, 헌법재판소장
2018
한승헌
법조인, 감사원장
2018
정세균
국회의장
2019
윤한덕
의사
2019
이국종
의사
2020
이이화
사학자
2020
전태일
노동운동가
2020
문희상
국회의장
2021
최종태
기업인
2022
박병석
국회의장
2023
송창근
기업인
2023
김박
기업인
2023
자승
종교인
2024
이임성
법조인
2024
윤대원
의사, 교육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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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3c83><colcolor=#ffffff> 현대자동차그룹 명예 회장
정몽구
鄭夢九|Chung Mong-koo
파일:정몽구(Chung Mong Koo).jpg
출생 1938년 4월 19일[1] ([age(1938-04-19)]세)
강원도 통천군 송전면
거주지 서울특별시 용산구 한남동
국적
[[대한민국|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대한민국
]][[틀:국기|
파일: 특별행정구기.svg
행정구
]][[틀:국기|
파일: 기.svg
속령
]]
본관 하동 정씨 (河東 鄭氏)[2]
직업 기업인
현직 현대자동차그룹 명예 회장
학력 경복중학교 (졸업)
경복고등학교 (졸업 / 34회)
한양대학교 공과대학 (공업경영학 / 학사)
재산 70억 달러 (한화 약 7조 원)[3]
서명
파일:정몽구 서명.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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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3c83><colcolor=#ffffff> 부모 아버지 정주영, 어머니 변중석
형제자매 정몽필
남동생 정몽근, 정몽우, 정몽헌, 정몽준, 정몽윤, 정몽일
여동생 정경희, 정정인, 정정임
배우자 이정화(1939년~2009년)[4]
자녀 장녀 정성이(1962년생)[5]
차녀 정명이(1964년생)[6]
삼녀 정윤이(1968년생)[7]
장남 정의선(1970년생)
신체 177cm, 75kg[8]
병역 대한민국 육군 병장 만기전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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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2.1. 기업인 활동
3. 사회적 공헌4. 학력5. 경력6. 상훈7. 자동차 산업에서의 공로8. 가족 관계9. 두 차례의 구속
9.1. 1978년9.2. 2006년
10. 여담11. 참고 문헌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기업인. 현대자동차그룹 초대 총수 겸 명예 회장.

정주영정몽헌 사후 명실상부한 범현대가의 수장이자 이건희 삼성 제2대 총수와 함께 대표적인 국내 재벌 총수 2세로 꼽히는 인물이다.[9] 또한 두 사람 모두 창업주인 아버지로부터 시작하여 자신들이 이끈 기업이 국내 1위를 넘어 세계 정상권으로 성장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해냈다는 공통점이 있다.[10]

2. 생애

1938년 4월 19일 강원도 통천군에서 정주영의 차남으로 태어났다.[11]

어린 시절 아버지를 따라 상경해 서울에서 학교를 다녔다. 6.25 전쟁으로 인한 유급과 학사 부진 등 시국의 파도를 맞으며 학창 시절을 보내다 1959년에 한양대학교에 입학했다. 무지막지한 덩치와 인상에서 보이듯 다혈질에 성미가 급하고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고[12] 현장에서 몸을 부딪히며 하는 일을 중시하던 마초 타입이었다.

이 때문에 초졸이라는 짧은 학력을 평생의 컴플렉스로 여겼던 정주영은 정몽구를 별로 마땅치않게 생각하였다.[13][14] 이후 육군에 입대해서 병장으로 전역한 후 미국 유학을 거쳐서 32세인 1970년에 현대자동차 과장으로 입사한다. 정몽구가 미국 유학을 다녀오고 자식을 넷이나 두고도 정직원으로 발령받지 못하고 공사장에서 고생하는 걸 안타까워한 변중석 여사가 정주영의 해외 출국을 틈타서 현대자동차 서울사무소장에게 부탁하여 입사가 성사된 것이었다.[15]

정주영의 각종 일화들을 볼때 정몽구의 이런 성향은 정주영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많다. 정주영은 정몽구를 탐탁치 않아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정주영 본인을 가장 많이 닮은 아들이 정몽구였던 것이다.

2.1. 기업인 활동

아들 정의선이 태어난 1970년 처음 현대에 입사한 이후 현대자동차, 현대건설을 거치며 주로 현장에서 역량을 발휘했다. 회사 생활을 하면서 후술하는 특혜 분양 사건으로 인해 아버지를 대신해 징역을 살기도 했다. 그 이후로 조금씩 정주영에게 인정 받는다. 그리고 1982년 형 정몽필이 불의의 교통사고로 사망한 이후로는 명실상부한 현대가의 장자가 된다.[16] 아버지에게 사랑받던 동생 정몽헌, 정몽준이 쉽게 높은 직위를 얻어낸 것과 달리[17] 정몽구는 현장에서 직접 실적을 보인 뒤에야 어렵사리 인정 받았고 아버지의 정계 진출 이후 그 공백을 메우던 삼촌 정세영을 보좌하다가 1996년, 마침내 현대가의 장자로서(자격) 현대그룹 회장직에 오른다.

1997년 외환 위기 후 셋째 동생 정몽헌이 공동 회장으로 승격되자 정몽헌과 그룹의 패권을 두고 경쟁하면서 그와 틀어졌고 각각의 가신들과 황색언론의 이간질까지 겹쳐지며 이는 결국 2000년 대한민국 기업 역사상 최악의 경영권 다툼인 왕자의 난이 일어나는 계기가 된다. 결국 정몽구는 2000년 8월, 현대그룹 회장직에서 경질 당해 그룹의 자동차와 제철 및 철도 등의 부분을 갖고 현대기아자동차그룹으로 독립한다. 이때만 해도 왕자의 난은 동생 정몽헌의 승리로 쉽사리 귀결되는 듯했다.

하지만 현대그룹 적통을 정몽헌에게 내준 것은 결과적으로 전화위복이 됐는데 이후 정몽준이 자신의 지분을 정리하여 이듬해 현대중공업과 조선 분야를 가지고 이탈했고 그룹의 상징이자 토대였으나 부실이 감춰진 건설과 전자가 경영난에 빠져 버린 것이다.[18] 결국 정몽헌은 두 회사를 채권단에게 내줄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 분쟁을 거쳐 주가가 폭락한 종합상사와 금융 부분 및 상선, 게다가 당시 새 정권 출범 이후 대북송금 사건까지 터지며 정치적으로 엮여 고초를 겪던 대북 사업 부분마저 부진했다. 이 상황에서 정몽헌 회장은 결국 아버지 정주영의 타계 2년 후 특검 수사까지 받다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그러나 정몽구는 부채도 낮고 미래 가치가 풍부하며 탄탄한 현대자동차, 기아를 받아 키우며 동생 정몽헌이 뱉어낸 그룹의 모태 현대건설까지 2011년에 다시 받아내며 재계 2위까지 그룹을 크게 일궈냈다.

위에서 서술했듯이 2000년 3월, 현대그룹의 경영권을 놓고 ‘왕자의 난’이라고 불리는 경영권 승계를 둘러싼 다툼을 벌였다. 이를 계기로 정몽구는 같은 해 9월, 공정거래위원회의 승인을 받아 현대자동차 등 10개사를 이끌고 현대그룹으로부터 독립했으며 이후 한보철강 당진제철소 인수, 현대제철 출범, 일관제철소 준공, 현대건설 인수 등을 통해 자동차, 철강, 건설이라는 세 축을 뚜렷이 만들어 현대자동차그룹의 틀을 구축했다.

2012년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는 정몽구 회장을 ‘세계 100대 최고 경영자’에 선정하기도 했다. 2016년에는 최순실 게이트로 인해 청문회에 불려나가는 수모를 겪기도 했고 이게 마지막 공식 일정이 됐다. 이후 2018년에 현대자동차 시찰 및 회의를 끝으로 건강 문제, 고령 등으로 공식 석상에서 자취를 감췄다. 사실 2016년 청문회 때 이미 만 78세의 고령에 건강이 좋지 않은 모습을 자주 보였고 말도 논리적으로 하기 힘들어 하는 모습이 여러 번 포착됐다.

2020년 10월 14일부로 현대자동차그룹의 회장직을 아들 정의선에게 물려주고 은퇴하며 명예 회장으로 남게 된다. 어느덧 팔순을 넘어 아버지 정주영의 별세 당시 나이인 85세까지 넘어선 고령이다 보니 대외적으로 일절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19] 이 때문에 한남동 자택에서 칩거하며 투병하고 있다는 소식이 지속적으로 흘러나오고 있다.

3. 사회적 공헌

4. 학력

5. 경력

6. 상훈

7. 자동차 산업에서의 공로

단순히 국내 시장 1위로 만족해야 했던 현대자동차그룹을 토요타, 폭스바겐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세계 3대 자동차 기업으로 도약시킨 주역이다. 재벌 2세였지만 창업 경영자라 해도 모자람이 없을 정도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현대차그룹은 계열 분리 당시만 해도 계열사 10개, 자산 34조 원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2020년에는 계열사 54개, 자산 248조 원을 보유한 그룹으로 성장했다.

생산 혁신, R&D 혁신, 공급망(Supply Chain) 혁신 등 공학과 경영을 결합한 과감한 시도와 성취는 전 세계 자동차 업계의 새로운 모델이 되고 있다. 또한 자동차 산업과 소재, 전기, 전자, IT 분야의 창조적 융복합을 선도하고 있으며 R&D를 중심으로 미래 인재 육성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품질경영’ ‘현장 경영’으로 대표되는 경영 철학이 대변하듯, 품질을 중시하고 현장에서 답을 찾고 있다. 이는 산업공학 전공자들에게 교과서적인 모델이 되고 있다.[23]

자동차 생산 공정 과정에서 최적화된 부품 공급 모듈화 체계를 도입, 효율성을 최대화했으며 전 세계 균일한 고품질의 생산 공장을 적기에 건설할 수 있는 표준 공장 건설 체계를 확립했다. ‘쇳물에서 자동차까지’의 수직 계열화를 완비, 그룹 내 시너지 효과를 극대화하는 동시에 세계 최초로 친환경 자원 순환형 사업 구조를 갖춰 경제적 성과뿐 아니라 환경에 대한 책임과 지속 가능 경영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했다.

연구 역량 집적화와 고도화도 전 세계 산업계가 주시한 혁신이었다. 남양에 세계 최대 규모의 R&D 센터를 설립, 연구 개발 역량을 집중해 미래 성장 기반을 확보했고 이는 독자 엔진 개발과 수소연료전지 파워트레인 체계, 5.0 타우엔진, 1.6 감마엔진이 세계 10대 엔진에 선정되는 쾌거로 이어졌다. 현대기아만의 독자적인 하이브리드 체계를 개발, 글로벌 시장에서 선전하고 있으며 궁극의 친환경차로 평가 받는 수소연료전지차를 세계 최초로 양산하는 결실을 낳았다.

해외 공장 건설 시 국내 부품 업체들의 대규모 동반 진출은 사실상 현대기아차에서 최초로 시도한 독창적 협력 체계로 산업사적 의미가 지대할 뿐 아니라 동반성장 의지의 일환이었다. 정몽구 회장은 시대의 흐름을 앞서가는 통찰력과 전략적 결단으로 위기를 기회로 전환하는 역발상 경영인으로도 평가 받고 있다. 특히 미국 시장에서의 ‘10년 10만 마일’ 보증 실시 승부수는 현대·기아차가 세계 자동차 시장의 강자로 성장하는 토대가 됐다.

세계 자동차 산업에서 전례가 없는 최단 기간 내에 국제 생산 판매 네트워크를 구축, 현대·기아차를 내수 기업에서 세계 유수의 경쟁 업체들과 겨루는 기업으로 변모시켰다. 세계 언론이 관용어로 사용하는 ‘현대 스피드’는 이 같은 정몽구 회장의 추진력에 대한 평가다. 그 결과, 현대자동차는 글로벌 브랜드 40위, 기아는 74위를 기록하는 세계적 브랜드로 자리 잡았다. 미국 품질 조사 기관의 신차 품질 조사에서도 현대자동차는 일반 브랜드 부문 1위를 획득했다.

‘국민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사회공헌 철학도 실현하고 있다. 사재를 출연해 ‘현대차 정몽구 재단’을 설립하고 저소득층 미래 인재 육성에 전력을 다하고 있다. 이 업적을 인정받아 1996년 한국의 경영자상, 1998년 금탑산업훈장, 2012년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수훈했으며 해외에서도 2001년 자동차업계의 노벨상인 미국 자동차 명예의 전당 선정 ‘자동차산업공헌상’ 수상, 2004년 미국 비즈니스 위크 ‘2004 최고경영자’, 2005년 미국 오토모티브 뉴스 ‘2005 자동차부문 아시아 최고 CEO’, 2009년 미국 벤플리트상 수상, 2012년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 ‘세계 100대 최고 경영자’, 미국 모터트렌드 ‘자동차산업 영향력 있는 인물’ 2위에 선정됐다.

8. 가족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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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두 차례의 구속

9.1. 1978년

1978년 서울 압구정동 현대아파트 특혜분양 사건(건축법 위반 등)으로 서울지검 특수부에 의해 구속수감되었다. 당시 정주영 회장 대신 책임을 지고 옥살이[24]를 하기도 했다. 현재의 기준으로 봤을 때에는 당연히 사법 부정이지만 그 당시에는 이런 일이 공공연하게 벌어지기도 했다.

9.2. 2006년

2006년 4월, 횡령 및 배임 혐의로 구속되었다. 이후 61일만에 보석보증금 10억 원을 내고 보석으로 풀려났다. 1심에서 징역 3년, 이후 파기환송심에서 사회봉사명령 300시간과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했다. 기소 이유는 정 회장이 회삿돈 900억여 원을 횡령하고 회사에 2100억 원이 넘는 손해를 끼쳤다는 것이다. (특경법상 횡령 및 배임)

구속 직후 '대국민 사과 및 사회공헌 방안'을 발표 했는데 정몽구 정의선 부자의 글로비스 주식 2250만 주(당시 주당 4만 4550원으로 시가 1조 23억 원)를 사회에 기부하겠다는 내용을 넣었다. 하지만 사회환원이 차일피일 미뤄지면서 현대차 측은 "주식을 내겠다고 했지 1조 원을 못박아 헌납하겠다고 한 적은 없다"고 주장했다. 이후 시간이 흐르면서 현대차 측은 재판을 거치면서 최종 8400억 규모가 확정되었고 2013년 완납했다고 밝혔다.

10. 여담

11. 참고 문헌



[1] 음력 1938년 3월 19일[2] 지예부사공파(知禮部事公派) 25세손 상(相)○, ○채(采), ○문(文), ○림(林) 항렬이나 이를 따르지 않고 범현대가만의 돌림자를 사용하였다.[3] 2021년 10월 포브스 기준. 대한민국 부자 순위 7위.[4] 2009년 담낭암으로 별세했다.[5] 이노션 고문[6] 현대카드, 현대캐피탈, 현대커머셜 사장[7] 해비치호텔앤드리조트 사장. 2023년 기준으로 사장 지분율은 16.26%라고 한다. 얼굴 사진 기사[8] 젊은 시절에는 90kg가 넘는 거구였다고 한다[9] 현재는 현대차그룹보다 재계서열이 높은 SK가 있긴 하지만 SK를 성장시킨 최종현은 2세가 아닌 창업자의 동생이고 현재 회장인 최태원은 저 둘과 동일선상에 놓기에는 나이와 경력 면에서 다소 차이가 있다.[10] 단 정몽구는 차남이었지만 부친 정주영의 장남 정몽필이 젊은 시절 사고로 사망한 후 가문의 실질적 장남이었지만 이건희는 이병철 회장의 막내아들이었다는 차이점도 있다.[11] 어머니 변중석에게는 장남이지만, 이복 형 정몽필이 있고 어머니 변중석의 호적 밑으로 넣었기 때문에 호적상으로도 차남이다.[12] 정몽준의 자서전이나 인터뷰를 보면 정몽구는 싸움도 굉장히 잘했다. 중학교 3학년 무렵에 불량한 고등학생 무리를 압도하여 동네에 난리가 난 적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한다.[13] 한양대를 간 것으로 못마땅한게 의아할 수 있지만, 현대가는 유독 서울대학교와 인연이 없었다. 정몽필정몽헌, 정몽일연세대, 정몽구, 정몽근한양대, 정몽우중앙대, 정몽윤은 아예 해외로 유학을 갔다.[14] 정몽구와 대조적으로 6남인 정몽준은 서울대학교 경제학과에 입학하여 정주영의 자랑이었다. 정주영은 만나는 동료 총수마다 "우리 몽준이가 서울대에 갔소이다."라며 자랑하였다.[15]정몽필과 동생 정몽근은 훨씬 먼저 입사하여 정직원으로 일을 하고 있었고 7살 아랫 동생인 정몽우와 같은 해에 입사했다. 승진도 1987년 이전까지는 동생 정몽근보다 늦었었다. 이런 이유로 모친인 변중석 여사가 안타까워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16] 정몽필이 일찍 죽었고 살아생전에도 아들을 두지 못하고 아내 이양자 사이에서 만 둘을 얻었기에 그의 사후 현대가의 장자 적통은 정몽구-정의선으로 이어지게 되었다.[17] 정몽준은 서울대 경제학과에 입학해 본인의 초졸 학력에 콤플렉스가 있던 아버지의 평생의 한을 풀어 줬고 정몽헌은 아버지를 가장 닮은 자식이란 평을 들었다.[18] 당시 현대건설은 90년대 초 걸프전쟁으로 인해 이라크 정부로부터 공사대금을 지급받지 못해 재무상태가 매우 좋지 못했고 현대전자는 IMF 사태 당시 구조조정을 위해 LG반도체와 합병하여 하이닉스라는 이름으로 계열분리되었다. 특히 90년대 후반에 후계구도를 정리하면서 현대산업개발정세영-정몽규 부자에게 떨어져 나간 것이 결정적이였는데 같은 건설사여도 부채에 허덕이던 현대건설과는 다르게 현산 쪽은 1기 신도시 개발 당시에 수도권에 매입했던 막대한 규모의 부동산과 아파트 분양으로 얻은 현금성 자산이 많아 알짜로 통하던 회사였기 때문이다. 만약 현대산업개발이 분리되지 않았거나 시기가 조금만 늦어졌어도 현산 쪽의 현금과 부동산을 매각하는 방법으로 현대건설의 재정난을 해결할 수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니 현대그룹 입장에서는 상당히 아쉬운 대목이다.[19] 범현대가 1세대 경영자들은 대부분 장수했다. 정주영은 85세에 세상을 떠났는데 그가 별세했던 2001년 기준 기대 수명이 75세였던 것을 고려하면 크게 장수한 것이다. 아울러 숙부인 정인영 HL그룹 명예 회장도 86세에 별세했고 막내 숙부이자 정몽구보다 두 살 많은 정상영 KCC그룹 명예 회장도 84세에 별세해 장수 기업인 대열에 들었다.[20] 2020년 3월부터는 등기이사직 사임, 같은 해 10월에 회장직도 사임.[21] 기아 회장직은 2009년에 이미 그만 둔 상태였다.[22]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다. Automotive Hall of Fame(AHF) - Mong-Koo Ch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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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실제로 정몽구 회장은 한양대학교 산업공학(당시 공업경영학) 전공자다.[24] 매우 큰 뇌물 스캔들이였으나 시대가 시대였던 만큼 봐주기 수사의 전형이라서, 1심 판결전 75일 구속된 게 전부다. 책임자 정몽구를 포함, 대부분 선고유예 등 솜방망이 처벌을 받았고 관련자 수백 명 중에 중형은 한 명도 없다.[25] 실제로 정몽구는 사석에서 정몽헌을 "우리 막내"라고 칭했다고 하며, 왕자의 난 이후에도 서로의 집을 찾아가 교류를 가졌다고 한다.[26] 다만 적대적 인수를 시도했던 정상영 KCC 명예회장이나 정몽준 HD현대 총수와는 다르게 직접적으로 악감정을 드러낸 적은 없다. 유일하게 부딪혔던게 2009년 현대건설 인수전인데 이때 당시에도 현대차그룹 쪽에서는 어떠한 메세지도 내보내지 않았고 현대그룹 쪽에서 비방성 광고를 내보낸게 다였다.[27] 현대제철 남자 양궁단, 현대모비스 여자 양궁단[28] 아버지의 불같은 성격을 물려받은 걸로 보인다. 현대에서 몸 담았던 이명박 대통령은 정몽구 회장도 성격이 불같지만 형인 정몽필은 더 불같고 다혈질이라고 한다. 이명박 대통령이 신입 사원 시절에 정몽필한테 많이 혼났다는 찌라시가 있다.[29] 정주영 모티브인 천태산의 차남.[30] 실제 이 당시 정몽구 회장의 현대자동차그룹에서 유니콘스 구단을 인수하려고 했으나 당시 구단 대주주였던 하이닉스반도체가 인수 대금으로 무려 900억 원을 부르는 바람에 협상이 결렬, 대신 싸게 매물로 나온 해태를 인수하게 됐다.[31] 근데 사실 전북 현대 모터스도 동시기에 만만찮은 지원을 받은 것을 김안하면 야구 뿐만 아니라 그냥 스포츠와 운동 자체를 좋아하는 모양이다. 사실 젊은 시절에는 럭비 선수를 했을 정도였으니 이상한 것도 아니다.[32] 그나마도 현재는 고령으로 인해 체중이 감소한 것이고 현대자동차 회장을 처음 맡아 현장을 누비던 시절에는 체중이 90kg를 가볍게 넘었었다고 한다.[33] 특히 정몽준의 차남인 정예선은 키가 2m에 육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