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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8-13 13:17:23

주영하(1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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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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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훈장 동백장 수훈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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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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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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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학교 설립자
주영하
朱永夏 | CHOO YOUNGHA
파일:세종대주영하1.jpg
<colbgcolor=#b93234><colcolor=#ffffff>출생1912년 4월 10일
함경남도 단천군
사망2011년 4월 8일 (향년 98세)
대양(大洋)
직업교육자, 독립운동가, 문학인
학력단천농업학교 (졸업)
경신학교[1] (졸업)
연희전문학교[2] (문과 / 졸업)
연세대학교 (명예박사)
아주사 퍼시픽 대학교 (명예박사)
중국문화대학 (명예박사)
약력경성인문중등학원 설립
서울여자전문학관 초대학장
서울가정보육사범학교 초대학장
수도여자사범대학 제1·3·5대 학장
국민훈장 무궁화장 및 동백장 수훈
독일문화훈장 수훈
배우자최옥자
자녀장남 주명건(朱明建)[3], 차남 주장건[4],
장녀 주경란[5], 차녀 주경은[6]

1. 개요2. 생애
2.1. 유년·학창 시절2.2. 세종대 전신 학교 학장 시절2.3. 대양학원 이사장 시절
3. 인간관계
3.1. 유석창과의 관계3.2. 김연준과의 관계3.3. 최옥자와의 관계3.4. 박정희 일가와의 관계
4. 상훈5. 평가
5.1. 긍정적 평가5.2. 부정적 평가
6. 이야깃거리
6.1. 호(號)6.2. 문학인으로서의 행적

[clearfix]

1. 개요

세종대학교를 설립한 대한민국의 교육자.

2. 생애

2.1. 유년·학창 시절

1912년 4월 10일 함경남도 단천에서 출생하였다. 7세 때 부친을 여의고, 이웃에 사는 김병수 장로를 통해 개신교 신앙의 길에 들어서게 되었다. 7세 때 3.1 운동의 현장을 목격하면서 '독립'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되었고, 조국애를 느꼈다. 이후 9년 뒤인 1928년 3.1 운동의 소회를 담아 시 실제(失題)버들피리를 썼으며, 이는 동년 4월 조선일보에 소개되었다. 함흥 영생고등학교에 입학하였으나, 17명의 학우들과 독립운동을 하다가 퇴학되어 서울 경신학교에 편입학했다. 경신학교 시절 동아일보가 주최한 브나로드 운동에 참여하여 민족계몽운동에 앞장섰다. 이때 주영하는 '한글'과 '교육' 두 가지를 위해 보국(輔國)할 것을 결심하였다.[7]

1935년 4월 연희전문학교 문과(文科)에 합격하였다.[8] 연희전문학교 시절 원한경 교장과 최현배, 정인보, 백낙준 등 여러 스승의 영향을 받았으며, 평생 그들을 존경하고 흠모했다. 졸업을 앞두고 진로 문제로 고민하던 주영하는 간절한 기도의 응답으로 '조용하고 낮게 살면서 높은 이상을 바라보는 인생의 길을 걸어라'는 주의 음성을 듣고, 교육계에 진출하는 꿈을 더욱 확고히 하게 되었다.[9] 1939년 3월 후일 한양대학교 초대 총장이 되는 과 동기 김연준과 함께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였다.[10][11]

2.2. 세종대 전신 학교 학장 시절


||<-4><tablewidth=550><tablealign=center><tablebgcolor=#fff,#1c1d1f><tablebordercolor=#b93234><bgcolor=#b93234><:>
||<width=45%><tablewidth=325><tablealign=center><tablebgcolor=#b93234><tablebordercolor=#b93234><)>파일:세종대학교 교표 흰색.svg||<width=55%><(>세종대학교
역사
||
||
파일:세종대학교 엠블럼.svg<colbgcolor=#c8bda7>태동기1940경성인문중등학원
1947서울여자전문학관
2년제1948서울가정보육사범학교
1954수도여자사범대학
4년제1961
1978세종대학
1987세종대학교

{{{#!wiki style="margin: -10px -10px"<tablealign=center><tablewidth=325><tablebordercolor=#b93234><tablebgcolor=#b93234> 파일:세종대학교 교표 흰색.svg세종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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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세종대학교이념.jpg
교훈
덕성 德性
창의 創意

봉사 奉仕
실천 實踐
이념 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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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lding ⠀[ 건학이념 ]⠀
{{{#!wiki style="margin:-5px -1px -20px"
{{{#!wiki style="font-size: 1.1em"
나는 이 집에 온 젊은이들에게
이 나라를 키우신 위대한 선인들의 거룩한 뜻
자기의 이익보다 나라의 이익을 먼저 하였고
자기의 명예보다 겨레의 명예를 먼저 높인
그 뜻과 종적을 가리키고
아울러 인류문화를 높인 세계만방의 지혜와 영혼을 높여
그들이 찬란한 새 문화를 창조할 역군이 되도록 하며
또한 덕성을 이 집에 옮겨와
이 젊은이들의 이 배움 집의 무궁한 발전을 위하여
내 몸을 바치기를 하나님께 맹세합니다.
설립자 대양 주영하(大洋 朱永夏)
설명
선인들의 거룩한 뜻
세종대 설립자이자 독립운동가였던 주영하는 학생들에게 "나라의 이익을 먼저 하였고 겨레의 명예를 먼저 높인" 독립운동가 등 선인(先人)들의 뜻을 이어나갈 것을 강조하였다.
새 문화를 창조할 역군
연희전문학교 문과 출신의 문학인이기도 했던 주영하는 "인류문화를 높인 세계만방(世界萬邦, 전 세계)의 지혜"를 받들어 학생들을 "찬란한 새 문화를 창조할 역군"으로 키워내고자 하였다.
덕성
독실한 개신교 신자였던 주영하는 하나님에게 덕성(德性, 너그러운 마음가짐)을 바탕으로 배움터(학교)의 끝없는 발전을 위해 헌신할 것을 맹세하였다.
}}}}}}}}}
⠀[ 교육이념 ]⠀
||<-2><tablewidth=100%><tablebgcolor=#fff,#1c1d1f><:>
{{{#!wiki style="font-size: 1.1em"
||
<colbgcolor=#f5f5f5>
애지정신
<colbgcolor=#fff,#1c1d1f>지혜()사랑()하는 마음가짐
세종대 건물명(애지헌)에는 애지정신이 담겨있다.
기독교정신
기독교를 바탕으로 사랑을 베푸는 이타적 마음가짐
세종대 교표아가페에는 기독교정신이 담겨있다.
훈민정신
백성()을 사랑하여 백성을 가르쳤던() 세종대왕의 마음가짐
세종대 교명에는 훈민정신이 담겨있다.
⠀[ 핵심역량 ]⠀
||<-2><tablewidth=100%><tablebgcolor=#fff,#1c1d1f><:>
{{{#!wiki style="font-size: 1.1em"
||
파일:세종대핵심역량.jpg
}}} ||


1940년 5월 20일 애지정신, 기독교정신, 훈민정신을 바탕으로 한 교육기관인 경성인문중등학원을 설립하였다. 1944년 4월 8일 최옥자와 결혼하였으며, 1947년 5월 3일 나라의 장래를 위해서는 국민의 절반이 되는 여성교육이 절실하다고 여겨 부부가 공동으로 출자해 학교법인 서울여자학원[12]을 공동 창립하였다. 1948년 8월 26일, 경성인문중등학원은 서울여자전문학관을 거쳐 서울가정보육사범학교로 승격되었다.

서울가정보육사범학교 시기인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였다. 1951년 1.4 후퇴 도중 서울가정보육사범학교의 충무로 교사(校舍)가 폭격으로 소실되었기에, 주영하는 교사 재건을 위해 힘썼다. 주영하는 피난길에 하마타면 납북될 뻔하기도 했으며, 부산에서는 불의의 교통사고로 생사의 위기를 넘나들기도 했다. 그는 학생들을 기도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가르치게 했으며, '쉽고 넓은 길보다 멀고 좁은 길(마 7:13)'로 들어서는 것이 교육의 핵심임을 강조했다. 교양 과정에서 인문학에 비중을 두었으며, 학문과 전문 기술도 중요하지만 인격을 높이는 데 힘써 사회인으로서 훌륭한 봉사자로서 빛과 소금처럼 세상을 위하는 인물이 되기를 갈망했다.[13]

1954년 2월 9일, 서울가정보육사범학교는 수도여자사범대학으로 승격되었다. 주영하는 양성평등주의자였기에, 여성이 고등교육을 받고 직업을 통해 사회에 참여함으로써 남녀평등의 길로 다가설 수 있다고 믿었으며 우리 사회가 그렇게 변하기를 열망했다. 그 열망이 대한민국 최초의 독립된 사범대학인 수도여자사범대학으로 결실을 맺었고, 이후 수도여자사범대학은 중등교원 양성의 산실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14]

1955년, 주영하는 미국 국무부 초청으로 인해 최옥자에게 학사 운영을 맡기고 오클라호마 주립대학교에서 객원교수로서 1년 간 교육학을 연구했다.[15] 1961년, 5.16 군사정변이 일어나 정부가 기존의 교육계의 학장, 총장들을 자리에서 내몰자 주영하는 콜로라도 주립대학교에서 객원교수로서 1년 간 교육학을 연구했다.[16] 1961년 11월 18일, 수도여자사범대학은 문교부로부터 4년제 사범대학으로 승격 개편 인가를 받았다.

1973년, 주영하는 대학 설립자로서 하버드 대학교 교육대학원에서 1년 간 연구하려는 취지를 교육대학원장 일버새커(Ylvisaker) 박사에게 알렸고, 그는 선뜻 주영하를 객원교수로 초대했다. 주영하는 1973년부터 1974년까지 하버드 대학교의 객원교수로 지내며 교육학과 역사학을 연구했다.[17]

1978년 10월 7일, 수도여자사범대학은 '세종대학'으로 개명하고 4년제 여자 사범대학에서 4년제 남녀공학 일반대학으로 전환하였다. 조선 제4대 국왕묘호에서 유래한 '세종대학'이란 교명은 훈민정신을 계승하자는 뜻이 담겨 있다. 그는 평생 세종대왕을 흠모했으며, 교육 사업과 더불어 한글, 국어를 위해서도 헌신했다. 한글문화협회와 세종대왕기념사업회, 국어순화추진회 등에서 그는 설립 멤버나 임원으로서 헌신했다.[18]

주영하는 교육, 한글·국어 외 호텔, 문화재, 개신교 등 여러 분야에서도 활약하였다. 학교법인을 위한 재단 수익 사업으로 강원여객자동차주식회사, 춘천세종호텔과 서울세종호텔을 설립하였다. 관광 사업의 기반이 열악했음은 물론 그 개념과 인식조차 흐릿했던 1960년대, 주영하·최옥자 부부는 우리나라 관광 사업에 대한 비전을 가지고 춘천과 서울에 세종호텔을 지었으며, "우리는 세계인을 형제애로 대접하겠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호텔을 경영하였다.[19] 1968년 2월, 수도여자사범대학에 대한민국 최초의 호텔경영학과를 신설하였다.[20]

주영하는 한국 문화재에도 각별한 애정과 관심이 있었다. 오랜 세월에 걸쳐 민속품과 서화, 도자기, 목공예, 의상, 장신구 등을 수집하였으며, 1973년 수도여자사범대학 교내에 박물관을 세웠다.[21] 또한 한국대학생선교회(C.C.C.) 이사장, 도덕재무장운동(MRA) 이사장을 지냈다.[22]

2.3. 대양학원 이사장 시절

1987년 8월 8일, 세종대학은 종합대학교로 승격되었으며 이에 따라 세종대학교로 개명되었다. 주영하는 학교법인 대양학원 이사장으로 취임했다. 주영하가 후임자로 생각했던 장남 주명건(현 대양학원 명예이사장)이 세종대학교 교수로 부임하고 주요 보직을 거치면서, 1987년부터 1990년까지 세종대학교 학원자주화투쟁이 이어졌다.

파일:세종대학교 교표 흰색.svg 주영하의 교직 이력[23]
연도이력
<colbgcolor=#f5f5f5>1955오클라호마 주립대학교 객원교수
1961콜로라도 주립대학교 객원교수
1973~1974하버드 대학교 객원교수
1989~1990스탠퍼드 대학교 객원교수
1995~1996하버드 대학교 객원교수
1997옥스퍼드 대학교 객원교수

주영하는 1989년부터 1990년까지 스탠퍼드 대학교에서 객원교수로 지내며 한국 근대사에 대해 심도 있게 연구했다.[24] 또한 1997년 봄 학기에 외교사학으로 유명한 옥스퍼드 대학교의 세인트 앤토니스 칼리지(St. Anthony's College)에서 객원교수로서 19세기 말 한국사에 관해 연구하였다.[25]

2000년대 초, 주영하·최옥자 부부는 대양학원의 경영권을 두고 아들이자 재단 이사장이었던 주명건과 상호비방을 하였으며, 결국 주영하는 주명건을 동부지검에 비리 혐의로 직접 고발하였다. 이로 인해 세종대학교 총학생회에 의해 '교육자로서 모범을 보여야 할 이들이 오히려 천륜을 저버렸다'고 비판받았다.[26]

2011년 4월 8일 향년 98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분향소는 세종대학교 애지헌 교회였으며, 빈소는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되었다.

3. 인간관계

{{{#!wiki style="margin: -10px -10px"<tablewidth=325><tablealign=center><tablebgcolor=#b93234><tablebordercolor=#b93234>파일:세종대학교 교표 흰색.svg주영하
인간관계
}}}
건국대·세종대·한양대 설립자 간 관계
<colbgcolor=#f5f5f5>이름파일:건국대학교 앰블럼.svg 유석창
건국대 설립자
파일:세종대학교 교표 흰색.svg 주영하
세종대 설립자
파일:한양대학교 로고(화이트).svg 김연준
한양대 설립자
상허(常虛)대양(大洋)백남(白南)
출생 연도1900년
(대한제국)
1912년
(일제강점기)
1914년
(일제강점기)
출신 지역함경도
함경남도 단천시함경북도 명천군
출신 중등교육기관서울 경신학교함북 경성고보[27]
출신 고등교육기관경성의학전문학교연희전문학교 문과
(1935년 4월 입학)[28]
(1939년 3월 졸업)[29]

3.1. 유석창과의 관계

건국대학교 설립자 유석창함경남도 단천시 출신으로 주영하와 고향이 같으며, 심지어 같은 서울 경신학교 출신이다. 주영하는 선배 독립운동가인 유석창을 진심으로 존경하였으며, 이는 유석창 사후 주영하가 남긴 추도문에서 드러난다. 추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파일:세종대학교 교표 흰색.svg 주영하의 유석창 추도문[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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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lding [ 펼치기 · 접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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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허 선생님! 비바람 치는 세대(일제시대)에 나서 갖은 어둠을 뚫고서 빛을 보내신 선생님! "나라 없는 백성이 집칸을 꾸며서 무슨 소용이 있나."하면서 집 한 채 반반히 장만을 안 하셨던 선친(한의사)의 가훈을 따라 항상 애국애족만이 삶의 길임을 알고 자라신 선생은 이미 고뇌에 찬 이 겨레와 운명을 같이 하셨던 것입니다.

의학 공부하던 시절, 동지들과 같이 그리고 선배요, 정신적 지도자였던 이대위(李大偉) 목사 주재 하에 YMCA의 지하실에서 겨레에게 봉사하기 위해서는 의학을 해야 한다는 가치관을 세우고, 졸업 후 뜻한 바대로 '겨레를 위한 의료, 강건한 국민체질은 나라의 기초'라는 이념으로 민중병원을 설립하였습니다. 라디오를 통해서, 인쇄물을 통해서, 강연을 통해서 불 뿜는 정열의 의학도로, "한국의 장래는 강건한 정신과 육체의 보존에 있고, 이것만이 장래에 희망이 있다."고 외치고 다녔습니다. 이 병원은 이름 그대로 민중을 위해서 민중의 힘으로 경영되었습니다.

많은 애국자를 이 병원 협조자의 명단에서 볼 수 있었습니다. 참으로 그의 선친이 인술로써 겨레에게 봉사하였고, 자제인 상허 선생은 더욱 횃불을 드높여서 내 백성의 건강은 내가 맡고 아울러 애국의 정신도 키운다는 뜻에서 이 민중병원의 사명은 컸습니다.

누가 단지 병원의 봉사만을 평가하겠습니까! 종로에 세워진 당시 이 병원은 또한 구국항일의 쎈타였습니다. 나라 없는 울분과 절망에 허덕이며 종로거리를 거닐다가도 상허 선생이 계신 민중병원에 들르기만 하면 먼 미래를 보는 듯 용기와 기운찬 음성으로 "주 선생, 기운을 내시오."하면서 손을 내밀던 선생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유명을 달리하였군요. 너무 일찍 가셨습니다. 할 일이 너무나 많은데 …

언젠가는 해방을 예견하시고, 푼푼이 모은 돈으로 낙원동 교사를 마련하시고서, 독립되는 날부터 애국애족의 기초는 올바른 교육에 있다하시고 정치대학관을 창립하시어, 교육구국의 올바른 교육에 있다 하시고 정치대학관을 창립하시어, 교육구국의 기치를 높이셨습니다. 또한 먼 장래를 예견하시고서 산수 좋고 교통이 편리한 서울의 동부 옛 유릉(裕陵)(오늘의 어린이대공원)아래 장안 벌판에 광대한 교지를 정하고 이름도 거룩한 건국대학교로 확대 격상하였습니다.

아, 이 교문을 드나드는 젊은 학도들이 교정에 우뚝 솟은 상허 선생의 그 높은 건국이상과 교육이념을 항시 마음에 새기고 있을 때, 그들은 훌륭한 창립자의 아들딸이요, 건국대학의 참(眞)자녀가 될 것입니다. 오직 이 나라의 발전을 위하는 일이라면 잠시도 쉬지 않으셨습니다.

오늘 저 이준(李儁) 열사의 유해도 선생님의 피나는 노력이 아니었더라면 아마 모셔온다 해도 훨씬 후가 되었을 것입니다. 나라가 어지럽고 공산당이 들끓을 때에도 사재를 털어서 『이준 열사 전기』를 출판하여 온 겨레가 죽도록 조국에 바친 위대한 선배를 기리어서 만백성에게 실지로 그 얼을 보여 주셨습니다.

교육 가운데에도 이 나라의 실학 증진을 위해서 농축학에 만년에 심혈을 경주하시었고, 농학에 대한 새 이론을 책으로 엮었고, 지도자 양성으로 선진국에 유학도 보내고 특별장학금을 지불하는 등 특별한 열의를 보였습니다.

"나는 농민과 일하다 그 어느 논두렁 밭두렁에서 마지막 숨을 거둠이 내 소원이라." 말씀하시던 그 애족의 모습이 선합니다. 선생님의 그 뜨거우신 높은 얼은 장안동과 낙원동 안의 '건국인'들만이 아니라 온 백성이 만대에 걸쳐 칭송하오리이다. 인간의 육신의 한정된 시간 위에 살거니와, 선생님의 높으신 뜻은 영원하게 빛나며 이 나라를 지키오리다.
「내가 본 常虛 先生(상허 선생)」, 『상허 유석창 전기』, 1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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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도문의 내용 중 유석창이 일제강점기의 현실로 인해 좌절하고 있던 주영하를 위로·격려해주었다는 내용을 고려할 때, 두 사람의 관계가 광복(1945년 8월 15일) 이전부터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유석창 고희기념식[31]
파일:건국대 유석창 고희기념식.png

또한 1970년 3월 24일 (수도여자사범대학 학교법인 소유의) 세종호텔 해금강홀에서 유석창의 일흔 번째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고희기념식이 마련되었는데, 이때 수도여사대 학장 주영하가 보낸 축하 케이크가 사용되었다. 이는 광복 이전에 시작된 두 사람의 관계가 지속적으로 이어져 왔음을 시사한다.

고희기념식으로부터 약 2년 후인 1972년 1월 1일, 유석창은 향년 71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이를 추모하기 위해 1972년 1월 7일 건국대학교 대운동장에서 유석창의 사회장(社會葬)이 거행되었을 때 주영하는 장의위원 자격으로 사회장에 참석하였다.[32]

주영하와 유석창 간의 관계는 세종대 캠퍼스의 부지 선정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박택규(건국대학교 이과대학 교수) 및 「상허 선생, 위대한 휴머니스트」, 『내가 본 상허 유석창』(100p~101p)에 따르면, 오늘날 세종대의 캠퍼스 부지는 유석창이 주영하에게 추천하여 정해졌다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33]

3.2. 김연준과의 관계

한양대학교 설립자 김연준은 주영하와 동향(함경도)이자 연희전문학교 문과(文科) 동기였으며, 서로 뜻이 맞는 친한 사이였다. 주영하가 학교를 세운다고 하자, 김연준은 자신도 학교를 세워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김연준은 1939년 연희전문학교 문과를 졸업하자마자 아버지로부터 거금을 받아 1939년 7월 한양대학교의 전신인 동아공과학원을 설립하였다. 주영하도 뒤이어 1940년 5월 세종대학교의 전신인 경성인문중등학원을 설립하였다.[34]

3.3. 최옥자와의 관계

주영하와 서울여자학원을 공동으로 설립한 최옥자는 주영하의 배우자이며, 주영하와 같은 함경도 출신 실향민이다. 부부 모두 향년 98세, 99세로 장수하였다.

3.4. 박정희 일가와의 관계

파일:세종대학교 교표 흰색.svg 박정희 일가의 행사 참석
수도 박물관 개관식[35]
파일:sjusoodo2.png
새날집 준공식[36]
파일:수도여자사범대학박근혜1.jpg

위의 사진은 1973년 5월 5일 박정희 전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의 수도 박물관[37] 개관식 참석 사진이며, 아래의 사진은 1975년 6월 육영수 저격 사건으로 인해 퍼스트 레이디 역할을 대행하였던 박근혜의 새날집[38] 준공식 참석 사진이다. 이러한 박정희 일가의 수도여자사범대학 행사 참석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진 종신 대통령 일가가 한 사립대학의 행사에 두 차례나 참석했다는 점에서 세간의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

박정희 일가와 주영하 간의 관계를 놓고 '주영하·최옥자 부부가 박정희 대통령 집권 당시 그의 측근과 사돈관계를 맺고부터 권력의 비호를 받고 있다', '주영하가 수도여자사범대학 소유의 서울어린이대공원 쪽 부지를 박정희 대통령에게 헌납하였다' 등 온갖 소문이 무성하지만, 이에 대해 명확히 밝혀진 것은 없다. 박정희 일가와 주영하 간의 관계에 대해 공식적으로 확인 가능한 것은 위의 두 사진과 주영하·최옥자 부부가 박정희 정부 기간에 속하는 1965년과 1972년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대통령표창을 받았다는 사실이다.[39]

4. 상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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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훈기록[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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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격수여일소속
<colbgcolor=#f5f5f5>국민훈장 무궁화장1998.08.15.학교법인 대양학원
국민훈장 동백장1970.12.05.교육부 수도여자사범대학
대통령표창1965.08.02.수도여자사범대학

5. 평가

5.1. 긍정적 평가

5.2. 부정적 평가

6. 이야깃거리

6.1. 호(號)

파일:세종대학교 교표 흰색.svg 주영하의 호(號)
청양
靑洋
대양
大洋

장엄한 생을 살고 싶어 산더미 같은 파도를 보고 푸른 바다를 의미하는 청양(靑洋)이라는 호(號)를 스스로 지었다.[57] 이후 호(號)는 청양에서 아주 넓고 큰 바다를 의미하는 대양(大洋)으로 개칭되었다. 호 대양은 학교법인명(대양학원) 및 세종대학교의 교양대학명(대양휴머니티칼리지), 건물명(대양홀, 대양AI센터), 장학금 이름(대양인재 장학금) 등 세종대학교와 관련된 여러 곳에서 활용되고 있다.

6.2. 문학인으로서의 행적

1928년 4월 조선일보에 소개된 단천농업학교 재학생 16살 주영하의 (실제(失題), 버들피리)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7살 때 3.1 운동을 목격했던 소회가 담긴 시 실제(失題)에서는 한반도를 '이 江山(강산)', 일제강점기를 '그 눈', 광복을 '꼿(꽃)'으로 비유하여 일제를 간접적으로 비판하였다.
{{{#!wiki style="margin:10px"
근대어 원문)
먼 산에 싸힌 눈은
봄 오니 살아자나
이 江山(강산)에 그 눈이야
봄 왓다 꺼질소냐

들뫼의 草木(초목)은
봄 오니 꼿이 피나
이곳에
봄 온들 꼿필소냐

현대어 해석)
먼 산에 쌓인 눈은
봄 오니 사라지나
이 강산그 눈이야
봄 왔다고 사라지겠는가

들과 산의 풀과 나무는
봄 오니 꽃이 피나
이곳
봄 온들 이 피겠는가

端川農校(단천농교) 朱永夏(주영하)
(조선일보 1928.04.1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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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어 원문)
느러진 버들 밋해서
빌-빌- 부는 버들피리 소리
고요한 이 마을에
煙氣(연기)와 가티 퍼진다
아아 지나간 녯날이여!
홀러간 녯날이여!
홀리어 보낸 저 피리를
내 입에 가저다우
홀러간 그 曲調(곡조)를
가저다다우
홀러간 녯날이여!
그리웁다 저 曲調(곡조)
마듸마다 녯날의 追憶(추억)일세

현대어 해석)
늘어진 버들 밑에서
느릿느릿하게 부는 버들피리 소리
고요한 이 마을에
연기와 같이 퍼진다
아아 지나간 옛날이여!
흘러간 옛날이여!
흘리어 보낸 저 피리를
내 입에 가져다 다오
흘러간 그 노래를
가져다 다오
흘러간 옛날이여!
그립구나 저 노래
마디마다 옛날의 추억이구나

端川(단천) 朱永夏(주영하)
(조선일보 1928.04.26.)[59]


[1]경신중·고등학교.[2]연세대학교.[3] 1947.5.3. 출생, 세종대학교 명예이사장 역임[4] 전 세종호텔 대표이사[5] 세종대학교 명예교수[6] 전 세종초등학교 교장[7] 뉴스앤조이 - '낮아짐'의 신앙으로 교육에 헌신한 자(대양 주영하 박사의 삶과 신앙 <강하고 담대하라>)[8] 조선일보 - 各學校合格者(각학교합격자)/延禧專門學校(연희전문학교), 동아일보 - 今年度各校(금년도각교) 合格者(합격자) 延禧專門學校(연희전문학교)[9] 뉴스앤조이 - '낮아짐'의 신앙으로 교육에 헌신한 자(대양 주영하 박사의 삶과 신앙 <강하고 담대하라>)[10] 이후 연세대, 아주사 퍼시픽 대학교, 중국문화대학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다.[11] 조선일보 - 새봄·새卒業生(졸업생) 알범特輯(특집)/延禧專門學校(연희전문학교) 文科(문과), 한양대학교 역사관[12] 지금의 세종대학교 학교법인인 대양학원의 전신[13] 뉴스앤조이 - '낮아짐'의 신앙으로 교육에 헌신한 자(대양 주영하 박사의 삶과 신앙 <강하고 담대하라>)[14] 뉴스앤조이 - '낮아짐'의 신앙으로 교육에 헌신한 자(대양 주영하 박사의 삶과 신앙 <강하고 담대하라>)[15] 대양주영하기념사업회, 『강하고 담대하라 (세종의 일꾼을 키운 대양 주영하)』 (홍성사, 2012), p.144.[16] 대양주영하기념사업회, 『강하고 담대하라 (세종의 일꾼을 키운 대양 주영하)』 (홍성사, 2012), p.145-146.[17] 대양주영하기념사업회, 『강하고 담대하라 (세종의 일꾼을 키운 대양 주영하)』 (홍성사, 2012), p.146.[18] 뉴스앤조이 - '낮아짐'의 신앙으로 교육에 헌신한 자(대양 주영하 박사의 삶과 신앙 <강하고 담대하라>)[19] 세종호텔은 당시 수도여자사범대학 관광경영학과와 호텔경영학과 학생들의 실습 현장으로서의 역할을 하기도 했다.[20] 조선일보 - 수도여자사범대학 1968학년도 학생모집[21] 뉴스앤조이 - '낮아짐'의 신앙으로 교육에 헌신한 자(대양 주영하 박사의 삶과 신앙 <강하고 담대하라>)[22] 조선일보 - 해방 후 여성교육에 앞장· 세종대 세워…주영하 박사 별세[23] 대양주영하기념사업회, 『강하고 담대하라 (세종의 일꾼을 키운 대양 주영하)』 (홍성사, 2012), p.143.[24] 대양주영하기념사업회, 『강하고 담대하라 (세종의 일꾼을 키운 대양 주영하)』 (홍성사, 2012), p.149.[25] 대양주영하기념사업회, 『강하고 담대하라 (세종의 일꾼을 키운 대양 주영하)』 (홍성사, 2012), p.151.[26] 오마이뉴스 - 세종대 총학생회 총장실 점거 농성[27] 경성고등보통학교(鏡城高等普通學校, 약칭 경성고보)는 함경북도 경성군 소재 학교였다.[28] 1935년 4월 3일자 연희전문학교 문과 합격자 명단(조선일보, 동아일보)에서 주영하(朱永夏)와 김연준(金連俊)을 확인할 수 있다. 조선일보 기사에는 주영하의 출신교가 新(경신)으로 정확히 표기되어 있으나, 동아일보 기사에는 출신교가 新(경신)으로 한자가 잘못 표기되어 있다.[29] 1939년 2월 20일자 조선일보 기사에서 연희전문학교 문과 졸업생 중 주영하(朱永夏)와 김연준(金連俊)을 확인할 수 있다. 한양대학교 역사관에서도 김연준이 1939년 3월 연희전문학교 문과를 졸업하였음을 알 수 있다.[30] 건국대학교 70년사 - [1권] 상허 유석창 박사의 생애와 사상 제4편(내가 기억하는 상허 선생) 510p~511p[31] 건국대학교 70년사 - [1권] 상허 유석창 박사의 생애와 사상 제1편(상허 유석창 박사의 생애와 활동) 210p~211p[32] 건국대학교 70년사 - [1권] 상허 유석창 박사의 생애와 사상 제1편(상허 유석창 박사의 생애와 활동) 226p[33] 건국대학교 70년사 - [1권] 상허 유석창 박사의 생애와 사상 제1편(상허 유석창 박사의 생애와 활동) 49p[34] 2007년 12월호 신동아 - 한양대 설립자 김연준 리더십 연구에서 "연전 시절 뜻이 맞는 친구 가운데 주영하(朱永夏·95)가 있었다. 주영하는 함남 단천 출신으로, 그와는 동향(同鄕)이었다. 육영사업에 관심이 많았던 주영하는 졸업 이듬해인 1940년 경성인문학원을 세웠다. 이 학원이 수도여사대를 거쳐 지금의 세종대학교가 되었다."라는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35] 사진의 왼쪽부터 주영하, 박정희 전 대통령, 육영수 여사, 주영하의 아내이자 수도여자사범대학 학장이었던 최옥자[36] 사진의 왼쪽부터 주영하, 박근혜 퍼스트 레이디 대행, 최옥자[37] 현 세종대학교 박물관[38] 현재의 대양AI센터 자리에 있던 (구)새날관[39] 대한민국 정부가 운영하는 웹사이트(대한민국 상훈기록)에서 수훈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40] 대한민국 상훈기록[41] 뉴스앤조이 - '낮아짐'의 신앙으로 교육에 헌신한 자(대양 주영하 박사의 삶과 신앙 <강하고 담대하라>)[42] 뉴스앤조이 - '낮아짐'의 신앙으로 교육에 헌신한 자(대양 주영하 박사의 삶과 신앙 <강하고 담대하라>)[43] 2022년도 세종요람 8p - 2022학년도 학사일정 (창립일: 1940.05.20.)[44] 조선일보 - 家政保育師範學校(가정보육사범학교) 首都女師大(수도여사대)로昇格(승격), 경향신문 - 서울家政保育學校(가정보육학교) 「女子師大(여자사대)」로昇格(승격)[45] 조선일보 - 수도여자사범대학 교사 복구공사 기공식, 조선일보 - 首都女子師大校舍(수도여자사대교사)[46] 지금의 세종대학교 학교법인인 대양학원의 전신[47] 2022년도 세종요람 - 연혁[48] 뉴스앤조이 - '낮아짐'의 신앙으로 교육에 헌신한 자(대양 주영하 박사의 삶과 신앙 <강하고 담대하라>)[49] 뉴스앤조이 - '낮아짐'의 신앙으로 교육에 헌신한 자(대양 주영하 박사의 삶과 신앙 <강하고 담대하라>)[50] 뉴스앤조이 - '낮아짐'의 신앙으로 교육에 헌신한 자(대양 주영하 박사의 삶과 신앙 <강하고 담대하라>)[51] 뉴스앤조이 - '낮아짐'의 신앙으로 교육에 헌신한 자(대양 주영하 박사의 삶과 신앙 <강하고 담대하라>)[52] 조선일보 - 수도여자사범대학 1968학년도 학생모집[53] 뉴스앤조이 - '낮아짐'의 신앙으로 교육에 헌신한 자(대양 주영하 박사의 삶과 신앙 <강하고 담대하라>)[54] 뉴스앤조이 - '낮아짐'의 신앙으로 교육에 헌신한 자(대양 주영하 박사의 삶과 신앙 <강하고 담대하라>)[55] 오마이뉴스 - 세종대 총학생회 총장실 점거 농성[56] 오마이뉴스 - 세종대 총학생회 총장실 점거 농성[57] 매일경제 - 나의書齋(서재) (35) 靑洋朱永夏(청양주영하)[58] 조선일보 - 실제(失題)[59] 조선일보 - 버들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