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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경남도의 시 {{{#!wiki style="margin: -10px -10px" | <table align=center><table width=320><table bordercolor=#ffffff,#1c1d1f> 단천시 端川市 Tanchŏn City | }}} | |||
시소재지 | 미상 | ||||
지역 | 관북 | ||||
면적 | 2,170㎢[1] | ||||
광역행정구역 | 39동 39리 | ||||
시간대 | UTC+9 | ||||
인구 | 345,875명 | ||||
인구밀도 | 명/km² | ||||
시당 책임비서 | 미상 | ||||
인민위원장 | 미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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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함경남도 동북부에 위치한 도시이다.2. 역사
대한민국 역사에서 고대 시대에는 동옥저의 영토였고, 삼국시대에는 고구려의 영토 아래에 있었다. 6세기 신라 전성기에는 일시적으로 신라의 영토에 속하기도 했으며, 이는 마운령 진흥왕 순수비에 기록되어 있다.남북국 시대에는 발해의 5부인 남경남해부의 일부였다. 발해 멸망 이후 여진족 치하에 있어 오림금촌(吳林金村)이라 불리다가 고려시대 여진정벌 때 윤관이 이곳에다 복주성(福州城)을 축성함으로써 한때 고려의 영토가 되었다. 이후 원나라의 영역으로 독로올(禿魯兀)이라 불리다가 공민왕대에 다시 수복하였다.
원래 이름이 '단주(端州)'였던 것을 조선 시대(태종)에 들어와서 고려 시대에 지명으로 많이 사용했던 '주(州)'의 상당수를 '천(川)'이나 '산(山)'으로 바꾸는 과정에서 '단천'이 되었다. 1930년에는 이 지역에서 농민운동이 일어났고, 1년 후에 해체되는 신간회가 이 농민운동을 지원하기도 하였다. 일제강점기 때까지 북한 행정구역상 허천군의 남동쪽 절반까지 총 1읍 9면을 관할했었으며, 면적 2,386㎢였다.
광복 후 소련군정을 거쳐 북한의 통치하에 들었다. 1952년 군면리 대폐합 당시 수하면을 잘라서 새로 신설되는 허천군에 내어 주고, 광천면, 남두일면, 북두일면을 새로 신설되는 광천군에 넘겨주었다가 1974년 광천군을 다시 흡수하였다. 북쪽으로 길쭉하게 뻗은 지역이 구 광천군 지역이다.
2020년 검덕지구를 건설할 무렵 행정구역이 추가로 개편된 것으로 보인다. 전진2동, 새복동과 같은 알려지지 않은 동이 북한 매체에서 공개되었다.
3. 지리
함흥 이북 함남 해안지역이 다 그렇지만 북고남저형 지형이다. 최고점은 군 최북단으로 혜산군과 접하는 두류산(2,309m)이다. 군내를 흐르는 주요 하천은 북대천(北大川), 남대천, 복대천(福大川)이 있다.4. 산업
대흥청년영웅광산(마그네사이트)과 룡양광산이 있는 전형적인 광산 도시다. 조선 시대 최대 은광이 있었던 곳으로, 연은분리법이 이곳에서 개발되었다. 마그네사이트(매장량 37억 톤)나 코발트, 아연(검덕광산), 인회석(동암광산)이 풍부하고 철광석도 채굴되는 등 지하자원이 많다. 특히 비철금속광물로는 세계적인 수준이다. 이 때문에 광물, 기계, 화학공업도 어느정도 발달해있다고 한다. 연대리에는 허천강수력발전소·제4발전소가 있는데, 최대출력 6만 5400㎾에 이른다. 2017년에는 예상 발전용량 약 200만㎾에 달하는 거대 수력발전소인 단천발전소가 착공식을 가졌다. 마그네사이트 공장 내부 근로자 모습2009년 북한의 화폐개혁으로 가장 큰 타격을 받은 도시기도 하다. 2010년 초 하루에 각 인민반[2]마다 1~2명씩 사망하는 등 사망자가 가장 많았다고 한다. 2위는 북한의 "도매시장" 역할을 하던 청진시. #
5. 교통
교통은 평라선과 금골선, 단풍선이 지난다. 금골선은 80km가 넘어가는데도 단천시 내부로만 다니며, 금골선 주변에는 광업이 크게 발달하였다.탈북한 새터민들 중 철도업에 종사한 사람들의 증언으로는 평라선의 견인기(기관차)는 대부분 단천역에서 교대한다고 한다. 과거 경부선 선구에서 동대구역 기관사 교대와 비슷한 개념인데, 평라선은 그 총연장만 경부선의 2배 가까운 거리이기 때문에 일본의 도카이도 본선이나 도호쿠 본선처럼 견인기 교체가 필요한 노선 중 하나이다. 거리상 평양과 청진-나선지구의 중간쯤에 위치한 공업/광업도시이기 때문에 교체 및 정비보수에 이롭다는 장점이 있다.[3]
2023년 금골선 구배에서 탈선사고가 일어나 500명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한 적이 있다는 주장이 있었으나 현재는 신빙성이 높지 않은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6. 특징
1970년대의 삼척군과 비슷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단천시는 현 태백시 일대와 동해안으로 시가지가 분리되어 있었던 옛 삼척군과 마찬가지로, 시가지가 한 군데에 몰려 있는것이 아니라 동해안, 검덕지구, 무학 등의 여러 군데에 분산되어있다. 그래서 인구는 34만명이나 됨에도 각각의 시가지의 크기는 읍의 크기와 비슷하다. 또한 둘다 광업도시라는 점도 있고 동해안이라는 점이 있다.2020년에 태풍 '마이삭'이 덮쳐서 대규모 수해가 나자 김정은의 지시로 산악에 급하게 신도시를 세웠다. 하지만 상수도 공급도 제대로 안 되는 등의 문제를 겪고 있다는 보도도 나왔다.
2024년에 룡청동에 문화 주택 살림집 단지가 개발됐다. 실제 집 모습
7. 이북 5도 기준 행정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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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경남도의 미수복 행정구역 {{{#!wiki style="margin: -5px -10px; display: inline-table" | <tablebordercolor=#ffffff,#1c1d1f><tablebgcolor=#ffffff,#1c1d1f> | 단천군 端川郡 Dancheon County | }}} | |||
<colbgcolor=#141937><colcolor=#ffffff> 군청 소재지 | 단천읍 서상리 | |||||
상위 행정구역 | 함경남도 | |||||
하위 행정구역 | 1읍 8면 | |||||
면적 | 2,385km² | |||||
인구 | 160,130명[4] | |||||
인구밀도 | 67.14/㎢ |
端川郡 / Dancheon County
광복 당시 1읍 8면이 있었고, 군청은 단천읍 서상리에 있었다.
- 단천읍(端川邑)
- 관할 리 : 서상(西上), 고령(古靈), 기평(碁坪), 내문(內門), 대성(大成), 대흥(大興), 덕천(德川), 독평(獨坪), 동상(東上), 동하(東下), 동현(東峴), 동호(東湖), 두언대(豆彦臺), 문호(文湖), 복천(福川), 봉양(鳳陽), 사동(社洞), 상서(上西), 상직절(上直節), 송동(松洞), 송평(松坪), 신창(新昌), 영산(靈山), 오몽(吾夢), 외문(外門), 용성(龍城), 용암(龍巖), 용현(龍峴), 은호(銀湖), 주남(州南), 증산(曾山), 하서(下西), 하직절(下直節)
- 면적 50㎢. 부군면 통폐합 당시 파도면(波道面)이었으나 1937년 단천읍으로 승격되었다. 1943년 복귀면 두언대리와 오몽리, 1944년 복귀면 용암리를 편입했다. 1943년 일제가 단천읍 두언대리와 오몽리 일원에 신도시를 건설하려 했으나 기초 공사가 진행되던 도중 광복이 되었다. 1945년 당시 인구 4만을 돌파한 상태였으며 만일 남북분단이 안 되었으면 최소 1949년에 단천부→단천시로 분리되었을 가능성이 높았던 읍 중 하나였다. 평라선을 중심으로 오몽리역에서 우회철도인 두언선이 분기하며 두언역(구 두언대역)이 있다. 단천역에서 단풍선이 분기하며 동대역이 있다.
- 광천면(廣泉面)
- 남두일면(南斗日面)
- 복귀면(福貴面)
- 북두일면(北斗日面)
- 수하면(水下面)
- 신만면(新滿面)
- 관할 리 : 정동(貞洞), 개평(開坪), 석우(石隅), 신동(新洞), 안시동(安時洞), 용천(龍川)
- 단천군의 서부 산악지역(2)으로 북한 행정구역상 허천군의 남서부에 해당한다.
- 이중면(利中面)
- 하다면(何多面)
8. 출신인물
[1] 경상북도 안동시는 물론, 1,820.58㎢로 남한에서 가장 넓은 기초자치단체인 강원도 홍천군보다도 넓다![2] 20~40가구 규모이다.[3] 조차장 자체는 함흥과 흥남 사이에도 함흥조차장역이 있다.[4] 1944년 인구총조사[5] 이 지역들이 1949년에 시로 승격된 지역들이라는 점을 보면, 정말 인구가 많은 것이다. 즉, 남북분단이 안 되고 대한민국령으로 남아있었으면 비슷한 시기에 단천읍을 단천시로 승격시켜 단천군과 분리시켰을 가능성이 높다.[6] 의외의 이야기를 하자면, 당시 함경남도에서 제일 인구가 많았던 도시는 다름아닌 흥남시(14만!)였다(...) 그 다음이 원산시와 함흥시(각각 11만명). 함경도 전체 중에서는 청진시가 제일 컸는데, 당시 23만 명으로 무려 당시 인천시, 대구시와 맞먹던 인구였다. 이 두 지역이 각각 인천광역시 대구광역시가 되었다는 점을 본다면(...)[7] 일제강점기에는 이 역이 시종착역이었으며 남한에서 발행된 지도에는 백금산역까지만 표기되어 있다. 나중에 북한 당국이 노선을 연장한 것으로 추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