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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36b3f><colcolor=#ffffff> 출생 | 1900년 3월 17일 |
대한제국 함경남도 단천 | |
사망 | 1972년 1월 1일 (향년 71세) |
직업 | 의사, 교육자, 독립운동가 |
학력 | 경신학교 (수석졸업 / 17회)[1] 경성의학전문학교 (졸업) 경성제국대학 (의학박사) |
약력 | 민중병원 설립자 조선보건협회장 건국대학교 설립자 겸 초대 총장 국민훈장 모란장 수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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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민중병원과 건국대학교를 설립한 의사이자 교육자. 호는 상허(常虛).2. 생애
1900년 3월 17일 함경남도 단천군 이중면 돌산리에서 유승균과 홍숙경의 차남으로 태어났다.중농으로 비교적 윤택한 집안이었고 아버지 유승균은 한의사, 개화 지식인, 기독교 신자였으며 독립을 위해 헌신한 우국지사였다.[2]1912년 유승균이 독립운동을 위해 만주 장백현으로 이주하자 유석창은 그곳에서 아버지가 교장으로 있던 관화학교(官話學校)를 졸업하고 아버지를 도와 독립운동 전선에서 활동하였다. 오랜 망명생활 끝에 직접적 항일무장투쟁보다 지속적인 실력양성운동으로의 전환을 도모, 1921년 고향에 돌아온다. 모국에서 학업을 계속 이어나가고자 중앙고등보통학교에 편입하려 하지만, 당시 중앙고보는 기숙사가 없었기에 기숙사가 잘 갖춰져 숙식을 해결할 수 있는 경신학교에 편입하였다.
경신학교 졸업을 앞두고 경성의학전문학교[3]에 진학하기로 결정하자 에드윈 쿤스(한국명 군예빈) 교장은 경성의전은 총독부 관립학교이고 입학생의 4/5가 일본인이니 조선인이 입학하기 쉬운 세브란스의전에 응시하라고 권유하지만[4], 결국 1924년 경성의전에 합격하여 입학하였고 이에 쿤스 교장은 유석창에게 졸업할 때까지 학비를 지원해주었다.
경성의전 재학중 '기독교 동우회'에서 활동하였는데, 민중병원 설립 시절부터 유석창의 후견인이자 동지 역할을 하는 이대위와 오화영, 그리고 첫 번째 부인인 한동죽을 그곳에서 만나게 되었다.
1928년 경성의전 졸업 후 함경남도 장진에 공의(公醫)로 부임하였으나 부인 한동죽이 폐결핵에 걸리는 바람에, 아내의 병 치료를 위해 1929년 함경북도 성진의 제동병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동죽은 1929년 11월 2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1930년 상경, 구료사업을 일으키겠다는 결심으로 실비병원 건립을 위해 노력한 끝에 1931년 사회영(社會營)[5] 중앙실비진료원이 개원하게 되었다. 개원 1년 후 화재로 진료원이 몽땅 타버리는 사고를 겪었으나, 새 병원건물을 마련하였고 1933년 '사회영 중앙진료원', 1934년 '사회영 민중의원'으로 개칭, 1949년에는 '사단법인 민중병원'으로 거듭났으며 훗날 건국대학교병원으로 이어진다. 실비병원이 궤도에 오르자 의료계의 새 지식과 동정을 알리는 간행물인 '보건시보'를 1932년 창간하여 발간하였으나 재정난으로 1937년 폐간하였다.
1937년 경성의전 시절의 은사였던 쓰자키 다카미치(津崎孝道, 1894–1975) 교수가 재직 중인 경성제국대학에 연구생으로 입학하여 박사 과정을 밟게 되었다. 연구 주제는 췌장의 랑게르한스섬에 관한 것이었는데 민중의원 경영[6]과 전쟁이라는 사회적 상황 때문에 연구의 진척은 순조롭지 못했다.
1945년 8월 말에서야 의학박사 학위[7]를 받았다. 사실 일제 패망으로 본국으로 귀향하는 일본인 교수들이 떠나는 마당에 고생한 제자들에게 박사학위를 남발한 소위 '해방 박사'에 해당되는데 유석창 본인도 뒷날 '자신의 논문은 미완성품이며, 쓰자키 교수가 베풀어준 선물에 지나지 않는다'면서 명예스러운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고 회고했다.
해방 후 1945년 10월 낙원동에 건국의숙을 설립하였고, 건국의숙이 조선정치학관, 정치대학을 거쳐 1959년 종합대학인 건국대학교로 승격함에 따라 건국대학교 초대 총장에 취임하였다.
1972년 1월 1일에 사망하였다.
3. 인간관계
3.1. 가족관계
- 장남 : 유일윤 前 건국대 이사장[8] - 며느리 : 김경희 前 건국대 이사장
- 딸 : 유자은 現 건국대 이사장[9]
- 차남 : 유승윤 前 건국대 이사장[10]
- 아들 : 유상현 現 건국대 대학원장
- 조카 : 유만윤
3.2. 주영하와의 관계
건국대·세종대 설립자 간 관계 | ||
<colbgcolor=#f5f5f5>이름 | 유석창 건국대 설립자 | 주영하 세종대 설립자 |
호 | 상허(常虛) | 대양(大洋) |
출생 연도 | 1900년 (대한제국) | 1912년 (일제강점기) |
출신 지역 | 함경남도 단천시 | |
출신 중등교육기관 | 서울 경신학교 | |
출신 고등교육기관 | 경성의학전문학교 | 연희전문학교 문과 |
세종대학교 설립자 주영하는 함경남도 단천시 출신으로 유석창과 고향이 같으며, 심지어 같은 서울 경신학교 출신이다. 주영하는 선배 독립운동가인 유석창을 진심으로 존경하였으며, 이는 유석창 사후 주영하가 남긴 추도문에서 드러난다. 추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주영하의 유석창 추도문[11]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상허 선생님! 비바람 치는 세대(일제시대)에 나서 갖은 어둠을 뚫고서 빛을 보내신 선생님! "나라 없는 백성이 집칸을 꾸며서 무슨 소용이 있나."하면서 집 한 채 반반히 장만을 안 하셨던 선친(한의사)의 가훈을 따라 항상 애국애족만이 삶의 길임을 알고 자라신 선생은 이미 고뇌에 찬 이 겨레와 운명을 같이 하셨던 것입니다. 의학 공부하던 시절, 동지들과 같이 그리고 선배요, 정신적 지도자였던 이대위(李大偉) 목사 주재 하에 YMCA의 지하실에서 겨레에게 봉사하기 위해서는 의학을 해야 한다는 가치관을 세우고, 졸업 후 뜻한 바대로 '겨레를 위한 의료, 강건한 국민체질은 나라의 기초'라는 이념으로 민중병원을 설립하였습니다. 라디오를 통해서, 인쇄물을 통해서, 강연을 통해서 불 뿜는 정열의 의학도로, "한국의 장래는 강건한 정신과 육체의 보존에 있고, 이것만이 장래에 희망이 있다."고 외치고 다녔습니다. 이 병원은 이름 그대로 민중을 위해서 민중의 힘으로 경영되었습니다. 많은 애국자를 이 병원 협조자의 명단에서 볼 수 있었습니다. 참으로 그의 선친이 인술로써 겨레에게 봉사하였고, 자제인 상허 선생은 더욱 횃불을 드높여서 내 백성의 건강은 내가 맡고 아울러 애국의 정신도 키운다는 뜻에서 이 민중병원의 사명은 컸습니다. 누가 단지 병원의 봉사만을 평가하겠습니까! 종로에 세워진 당시 이 병원은 또한 구국항일의 쎈타였습니다. 나라 없는 울분과 절망에 허덕이며 종로거리를 거닐다가도 상허 선생이 계신 민중병원에 들르기만 하면 먼 미래를 보는 듯 용기와 기운찬 음성으로 "주 선생, 기운을 내시오."하면서 손을 내밀던 선생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유명을 달리하였군요. 너무 일찍 가셨습니다. 할 일이 너무나 많은데 … 언젠가는 해방을 예견하시고, 푼푼이 모은 돈으로 낙원동 교사를 마련하시고서, 독립되는 날부터 애국애족의 기초는 올바른 교육에 있다하시고 정치대학관을 창립하시어, 교육구국의 올바른 교육에 있다 하시고 정치대학관을 창립하시어, 교육구국의 기치를 높이셨습니다. 또한 먼 장래를 예견하시고서 산수 좋고 교통이 편리한 서울의 동부 옛 유릉(裕陵)(오늘의 어린이대공원)아래 장안 벌판에 광대한 교지를 정하고 이름도 거룩한 건국대학교로 확대 격상하였습니다. 아, 이 교문을 드나드는 젊은 학도들이 교정에 우뚝 솟은 상허 선생의 그 높은 건국이상과 교육이념을 항시 마음에 새기고 있을 때, 그들은 훌륭한 창립자의 아들딸이요, 건국대학의 참(眞)자녀가 될 것입니다. 오직 이 나라의 발전을 위하는 일이라면 잠시도 쉬지 않으셨습니다. 오늘 저 이준(李儁) 열사의 유해도 선생님의 피나는 노력이 아니었더라면 아마 모셔온다 해도 훨씬 후가 되었을 것입니다. 나라가 어지럽고 공산당이 들끓을 때에도 사재를 털어서 『이준 열사 전기』를 출판하여 온 겨레가 죽도록 조국에 바친 위대한 선배를 기리어서 만백성에게 실지로 그 얼을 보여 주셨습니다. 교육 가운데에도 이 나라의 실학 증진을 위해서 농축학에 만년에 심혈을 경주하시었고, 농학에 대한 새 이론을 책으로 엮었고, 지도자 양성으로 선진국에 유학도 보내고 특별장학금을 지불하는 등 특별한 열의를 보였습니다. "나는 농민과 일하다 그 어느 논두렁 밭두렁에서 마지막 숨을 거둠이 내 소원이라." 말씀하시던 그 애족의 모습이 선합니다. 선생님의 그 뜨거우신 높은 얼은 장안동과 낙원동 안의 '건국인'들만이 아니라 온 백성이 만대에 걸쳐 칭송하오리이다. 인간의 육신의 한정된 시간 위에 살거니와, 선생님의 높으신 뜻은 영원하게 빛나며 이 나라를 지키오리다. |
「내가 본 常虛 先生(상허 선생)」, 『상허 유석창 전기』, 1981 |
추도문의 내용 중 유석창이 일제강점기의 현실로 인해 좌절하고 있던 주영하를 위로·격려해주었다는 내용을 고려할 때, 두 사람의 관계가 광복(1945년 8월 15일) 이전부터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유석창 고희기념식[12] |
또한 1970년 3월 24일 (수도여자사범대학[13] 학교법인 소유의) 세종호텔 해금강홀에서 유석창의 일흔 번째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고희기념식이 마련되었는데, 이때 수도여사대 학장 주영하가 보낸 축하 케이크가 사용되었다. 이는 광복 이전에 시작된 두 사람의 관계가 지속적으로 이어져 왔음을 시사한다. 고희기념식으로부터 약 2년 후인 1972년 1월 7일 건국대학교 대운동장에서 유석창의 사회장(社會葬)이 거행되었을 때 주영하는 장의위원 자격으로 사회장에 참석하였다.[14]
유석창과 주영하 간의 관계는 세종대 캠퍼스의 부지 선정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박택규(건국대학교 이과대학 교수) 및 「상허 선생, 위대한 휴머니스트」, 『내가 본 상허 유석창』(100p~101p)에 따르면, 오늘날 세종대의 캠퍼스 부지는 유석창이 주영하에게 추천하여 정해졌다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15]
4. 여담
- 1922년 경신학교 편입시험 때 일본어가 미숙하여 입학을 허가받지 못했지만 쿤스 교장의 배려 덕에 청강생 자격으로 수업을 들었다. 이후 일본어 시험에서 100점을 받아 편입시험에 정식으로 통과하여 2학기부터는 정규학생으로 수업을 들을 수 있었다.
- 사후 건국대학교 서울캠퍼스 내 현재의 학생회관과 기숙사 사이의 언덕에 안장되었다. 가묘라는 이야기가 있지만 이는 헛소문이다.#
[1] 현 경신중·고등학교[2] 아호는 일우(一憂)[3] 아버지가 한의사였던 것과 만주 망명시절 제대로 치료받지 못하고 고통받던 동포들을 목도한 경험이 경성의학전문학교에 진학하는 동기가 되었다.[4] 당시 유석창은 경신학교 수석졸업생이었기에 경성의전에 낙제하면 학교 평판이 떨어질 수 있었던 것도 한 몫했다.[5] 영리업체가 아니라 사회에 봉사하기 위한 비영리 공영기관임을 강조한 명칭.[6] 즉 병원장 신분으로 학위 과정을 진행한 것.[7] 논문 제목은 '췌장 랑게르한스씨 섬에 관한 발생학적 지견보유'[8] 1978년 사망[9] 1994년 홍익대학교 금속재료공학과를 졸업하고, 연세대학교 경영전문대학원(MBA)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2014년 9월부터 학교법인 건국대학교 이사로 선임돼 상임이사로 재직해 왔으며, 2017년 4월 26일 이사회에서 새로운 이사장(제26대)으로 선출됐다. 모친 김경희 당시 이사장은 2017년 4월 대법원에서 징역형을 최종 확정함에 따라 이사장직을 상실했다.[10] 1950년생, 2005년 사망[11] 건국대학교 70년사 - [1권] 상허 유석창 박사의 생애와 사상 제4편(내가 기억하는 상허 선생) 510p~511p[12] 건국대학교 70년사 - [1권] 상허 유석창 박사의 생애와 사상 제1편(상허 유석창 박사의 생애와 활동) 210p~211p[13] 세종대학교의 전신[14] 건국대학교 70년사 - [1권] 상허 유석창 박사의 생애와 사상 제1편(상허 유석창 박사의 생애와 활동) 226p[15] 건국대학교 70년사 - [1권] 상허 유석창 박사의 생애와 사상 제1편(상허 유석창 박사의 생애와 활동) 49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