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수훈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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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그 특사 3인 | ||
<rowcolor=#fff> 정사 이상설 | 부사 이준 | 통역관 이위종 |
헤이그 특사 이준 李儁 | Yi Tjoune[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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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22222><colcolor=#ffffff> 출생 | 1859년 1월 21일[2] | ||
함경도 북청도호부 중산사 용전리 발열동[3] (現 함경남도 북청군 용전리 발열동) | |||
사망 | 1907년 7월 14일 (향년 48세) | ||
네덜란드 헤이그 | |||
본관 | 전주 이씨[4] | ||
자 | 순칠(舜七) | ||
호 | 일성(一醒)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b22222><colcolor=#fff> 부모 | 아버지 이병관,어머니 청주이씨 | |
배우자 | 신안 주씨[5] | ||
이일정 | |||
자녀 | 이종승(이용, 장남), 이송선(장녀), 이종숙(차녀) | ||
친인척 | 손자 이열, 이활 | ||
학력 | 와세다대학 법학부 (법학 / 학사) 법관양성소 (졸업) | ||
종교 | 유교 → 기독교(개신교, 감리회)[6] | ||
소속 | 독립협회, 국민교육회, 대한보안회, 공진회, 헌정연구회 | ||
별칭 | 초명(初名)은 이성재(李性在) 이명은 이선재(李璿在) 칭호(稱號)는 열사(烈士)[7] | ||
업적 | 제2회 만국평화회의 특사 보광학교 설립) 오성학교 설립 | ||
서훈 |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추서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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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과 대한제국의 검사이자 외교관. 초명은 선재(璿在)[8], 본명은 순칠, 호는 일성.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개최된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헤이그 특사로 파견되어 외교 활동 중 순국하였으며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2. 생애
1859년 음력 1월 21일 함경도 북청도호부 중산사 용전리 발열동(現 함경남도 북청군 용전리 발열동)에서 아버지 이병관(李秉瓘, 1839. 4. 11 ~ 1863. 7. 8)과 어머니 청주 이씨(1837. 3. 4 ~ 1863. 7. 13)[9] 사이에서 무녀독남으로 태어났다.이준은 전주 이씨로 태조 이성계의 이복 형이었던 완풍대군(完豊大君) 이원계(李元桂)[10]의 후손이다.
5살 되던 1863년 부모님을 모두 잃고 친할아버지[11] 이명섭(李命燮, 1816. 12. 14 ~ 1881. 8. 20)과 작은아버지 이병하(李秉夏, 1848. 1. 12 ~ ?) 밑에서 자라며 수학했다. 17세에 한성부로 상경하여 형조판서 김병시, 흥선대원군과 교제하여 친분을 쌓고 북청으로 돌아왔다. 29세에 함경도 국가고시에서 장원급제한 후 당시 함경감사였던 조병식과의 협의하에 약 2천 평 가량의 토지를 매입해 경학원을 설립하여 인재 양성에 힘썼다. 1889년 다시 한양으로 올라갔다가 1893년 김병시의 주선으로 당시 이화학당 학생이었던 이일정[12]과 결혼했다.[13] 1894년 청일전쟁이 발발하자 안전을 위해 선릉참봉 벼슬을 받아 함흥으로 향한다. 1895년 6개월만에 한국 최초의 근대 법학 교육 기관인 법관양성소를 1회로 졸업했는데 동기가 대한민국 제3대 부통령이었던 함태영이며 입학은 박영효, 서광범 등이 권유했다. 법관양성소를 졸업한 이후 한성재판소 검사보[14]로 임명되었으나 고관의 비행을 탄핵한 일로 높으신 분들의 심기에 거슬려 1개월만에 면직되었다.
1896년 독립협회에 가입하여 평의장 직을 맡아 활동 중 친일파인 김홍집,정병하 등이 살해당하는 사건이 일어나자 일본으로 망명했다.[15] 1898년 와세다대학 법학과를 1년만에 졸업했고 체포령이 해제되자 귀국하여 독립협회 활동을 했다. 독립협회는 만민공동회를 조직하여 열강들의 침략 계획과 부패한 정부를 비판하고 이를 백성들에게 호소했다. 이에 위기를 느낀 찬정 조병식과 이기동은 독립협회의 이름을 사칭해 '고종을 끌어내리고 국체를 바꾸겠다'는 고시문을 배포하였고 1898년 11월 4일 이준, 이상재, 남궁억 등을 비롯한 11명의 간부들이 반역 혐의로 투옥되었으나 독립협회에게 누명을 씌운 자작극이라는 것을 알아챈 백성들이 시위를 일으키자 1주일만에 석방되었다. 그러나 12월 21일 홍종우, 원세성 등의 주도로 황국협회의 보부상계 회원들이 독립협회에 몰려가 구타, 기물 파손 등을 일으키는 사건이 발생했는데 이 일로 인해 고종의 명령으로 군대까지 동원되어 결국 12월 25일 독립협회가 강제 해산되고 만다.
이후 이준은 1902년~1904년까지 개혁당, 대한보안회, 대한적십자, 공진회 등을 설립해 여러 애국 단체에서 활동하였다. 항일 운동을 벌이다 체포되어 황주에 6개월간 유배되었으며 1905년 1월 집으로 돌아간 후에는 보광학교, 오성학교 등을 창립해 교육에 힘쓰는가 하면 법안연구회, 헌정연구회 등을 조직해 독립 운동을 계속했다. 1905년 5월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상동감리교회의 전덕기 목사가 '전국 감리교 엡윗 청년 연합회'를 소집하였고 조성환, 최재학[16], 이동녕, 김구 등이 모여 조약 무효 상소 운동을 벌였으며 이준은 조약 폐기 상소와 오적 격토문을 직접 작성해 올렸다. 이 과정에서 5인 1조로 팀을 편성해 팀 별로 돌아가면서 고종이 있는 궁궐을 향해 반복적으로 상소문을 낭독하는 활동을 했는데 1조로 뽑힌 이준, 김구 등이 대한문 앞에서 상소문을 낭독했다. 현장의 반응은 뜨거웠지만 병력까지 동원된 일본군의 제압으로 인해 투옥되고 만다. 1907년 국채보상운동이 발발하자 이준은 서울에 국채보상연합회의소를 설립하여 소장직을 맡아 모금 운동을 시작했으며 4월 안창호, 양기탁, 전덕기, 이동휘 등의 주도로 신민회가 결성되자 이준도 가입하여 인재 양성에 힘쓴다.
그에게도 오점이 존재하는데 1905년 러일전쟁 당시 일본군을 지지하고 일본군 부상자를 돕기 위해 적십자회를 조직하여 모금 운동을 벌인 적이 있었다는 것이다. 결국 선동죄로 경찰에 구속되어 태형 80대를 선고받았는데 "일본이 러일전쟁을 일으킨 것은 한국과 중국 두 나라의 독립을 지켜주기 위해서이니 한국의 인민들은 가만히 있을 수 없다."라는 지금 생각해보면 너무나도 어이없는 동기로 이런 활동을 한 것이었다.[17] 원래 이준은 과거 갑신정변 주역들과 마찬가지로 일본을 개혁의 모범으로 삼아 왔고 일본과의 협력이 나라의 독립을 위한 것으로 여겼기 때문에 의도는 좋았다. 결국 일본이 을사늑약 체결을 시도하고 있던 것을 안 뒤에야 러일전쟁과 일제의 본질을 파악하게 되었다. 당시 민족 선각자라는 사람들 중에도 끝까지 일제의 의도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사회진화론 등에 주화입마해 버린 사람이 적지 않았던걸 생각해보면[대표적으로] 늦게라도 알아차린 이준은 양호한 쪽에 속한다. 그 뒤로 헤이그로 가기까지 항일 활동에 참여했다.
"처음에는 아프리카 샤먼과 같은, 검은 갓에 흰 두루마기 차림의 조선 선비가 느닷없이 출현해 상당히 당황스러웠는데, 사람들이 점차 그(이준)의 원숙하고 품위있는 사회적 인격체 풍모에 매료되었다. 많은 이들이 이준의 주장을 경청하게 되었으며, 결국 상당수의 사람들이 조선의 처지를 이해하고 공감하게 되어, 필요한 지지 활동을 베풀기로 의견이 모아졌다."
- 이준 일행의 중간 경유지이자 막후 교섭지였던 페테르부르크[19] 현지 신문이 상류층 파티 동정란에 실은 기사.[20]
1907년 6월 15일 개최되는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참가해 을사늑약의 부당함과 일제의 압력을 호소하기 위해 이위종, 이상설과 함께 헤이그 특사로 파견된다. 이준은 전덕기 목사를 통해 고종의 위임장을 전달받고,[21] 1907년 4월 22일 아내 이일정, 장녀 이송선과 이별한 후 서울역에서 부산항을 거쳐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이상설과 합류하고, 시베리아에서 철도편으로 6월 4일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했다. 이준과 이상설은 이위종의 도움을 받아 공고사를 러시아어로 번역하여 제2회 만국평화회의 의장국인 러시아에 제출하고 지지를 요청했으나 응답은 없었다. 결국 일행은 6월 19일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떠나 베를린으로 향했으며 베를린에서 문서 인쇄작업을 거친 특사단은 6월 25일 개최지인 네덜란드 헤이그에 도착했다. 6월 28일 베를린에서 인쇄한 공고서와 문서들을 일본을 제외한 회의 참가국 40여국 의원들에게 배포했다. 의장인 넬리도프 백작은 문서를 받고 특사단과 네덜란드 정부의 접견을 주선해 주었으나 네덜란드 정부는 을사늑약은 이미 각국 정부에서 승인된 것이므로 무효화할 수 없으며 따라서 대한제국에는 외교권이 없으므로 회의 참여가 불가능하다는 대답을 내놓았다. 특사단은 네덜란드 외무대신 M. Van Tets에게 편지를 보냈으나 답장은 '어찌어찌 회의에 참석을 한다 쳐도 발언은 어려울 것이다'라는 내용이었으며 심지어 일제의 방해로 회의장에도 들어서지 못하고 언론사와 기자회견을 하는 것에 그치고 말았다.- 이준 일행의 중간 경유지이자 막후 교섭지였던 페테르부르크[19] 현지 신문이 상류층 파티 동정란에 실은 기사.[20]
결국 이준은 임무를 완수하지 못하고 헤이그에서 지병이었던 뺨 종기가 도져 생을 마감하였다. 이 때 그의 나이는 48세였고 그의 죽음에는 이견[22]이 많은데 일설에는 일제에 의해 독살당했다고 한다. 옛날 위인전에는 1907년 7월 18일자 <대한매일신보>에서 "의사가 자결"이라는 제목으로 이준의 자결을 호외보도한 것을 근거로 할복 자살이라 써진 경우가 많았으며[23] 심지어 회의장 앞에서 배를 갈라서 내장을 던졌다는 흉흉한 내용도 있었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당시 <대한매일신보>는 자살설을 보도했고 <황성신문>은 '자살이란 설도 있다.' 식으로 보도해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네덜란드의 유명 잡지인 《헤트 화데란트》 7월 15일자에서는 종기를 제거하다가 독사했다고 보도하였다. 당시 일본 대사관에서 종기 제거 중 사망했다고 보고하면서 자살이라는 풍문도 있다고는 말하기는 했지만 어디까지나 풍문이지 사실은 아니다. 종기가 스트레스성 난치성 질환이라는걸 고려하면 '울분으로 인한 스트레스로 지병이 악화되어 사망했다' 정도의 추정은 할 수 있겠지만 할복은 아니다. 순국 사흘 후 헤이그 공동 묘지에 안장되었다가 동생인 이운과 윤병구 목사가 이상설의 이름으로 102달러 57센트를 지불하고 9월 5일 니우에이컨 다위넌(Nieuw Eiken Duinen) 묘지 운영 측과 영구 계약을 체결하여 9월 6일 장례를 치렀다. 하지만 일본 통감부에서는 이미 세상을 떠난 이준에게 궐석재판을 통해 종신형을 선고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됐다. 1963년 9월 30일 헤이그에 안치되어 있던 유해가 55년만에 한국으로 돌아와 10월 4일 국민장을 치른 후 서울 수유리 순국선열 묘역으로 이장되었다. 1964년 장충단공원에 동상이 건립, 1972년 주 네덜란드 대리대사이자 안중근의 조카인 안진생의 주도로 헤이그 묘소에 흉상과 기념비가 건립되었다.
3. 여담
"검사는 국가의 대표가 되어 형법상 독립의 권한을 가지며 공소제기의 권한을 가지니, 본인은 검사의 직에 있으면서 직을 다하지 못하여 항상 두렵고 부끄러울 뿐입니다. (중략) 본인이 검사된 몸으로 국가의 막중한 형법을 사사로이 유린함을 보고 공분을 참을 수 없어 본부에 한 차례 기소하고 한 차례 청원하였으나 모두 수리하지 아니하고, (중략) 법부대신 및 평리원 재판장 이하 제법을 모두 상주하여 면관하고 체포 징치하게 하여 나라의 헌장을 바로잡고 국민의 분원을 풀어주시기를 청원합니다."
광무 11년(1907) 3월 16일 이준의 청원서 중
광무 11년(1907) 3월 16일 이준의 청원서 중
- 이준 열사는 1895년 11월 10일 갑오개혁의 일환으로 신설된 법관양성소를 제1기로 졸업한 뒤, 1896년 2월 3일 동기생 46명 중에서 가장 먼저 한성재판소 검사시보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1주일 뒤 일어난 아관파천으로 일본 망명길에 오르게 되었고 그 결과 짧은 검사시보 생활을 마쳐야 했다. 일본 와세다 대학에서 2년여 동안 공부한 뒤, 1898년 9월 귀국한 이준 열사는 공진회, 국민교육회, 헌정연구회 등을 이끌며 구국은동을 펼쳐 나가다, 1906년 6월 18일 대한제국 사법기관인 평리원 감사로 임명되어 10여년 만에 다시 검사직에 복직되었다. 평리원 검사 시절, 고종황제의 대사령에 따라 은사안(사면령)을 작성하게 된 검사 이준은 당시 을사5적을 처단하려다 체포돼 복역 중이던 기산도 등을 사면자 명단에 포함시켰다.그런데 이를 반대하는 상관들과 마찰을 빚게 되었고, 결국 기소되어 파면되고 말았다.
- 이준이 헤이그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미국을 거쳐 유럽으로 갈 때, 뉴욕에서 이승만을 만나고 싶다고 그에게 전보를 보내었다. 유학 중이던 이승만은 급히 뉴욕으로 출타하여 그를 만나 조국의 앞날과 국제 정세에 관해 의논하며 며칠동안 세계 평화 재판소에 탄원할 호소문을 함께 작성하였다.
- 서울대학교 로스쿨과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이 자랑하는 선배 중 1명. 법관양성소의 후신인 경성법학전문학교가 경성제국대학 법학부와 합쳐져서 서울법대가 되었고 서울법대가 서울대학교 로스쿨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현재도 서울대학교 로스쿨 건물 정면에 이준 열사 전신상이 서 있다.
- 남과 북 양쪽에서 존경받는 항일 열사이기도 한데 장남인 이용(본명 이종승)이 중국공산당의 도움을 받아 항일운동을 했고 해방 이후에는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다가 월북해 북한 내각에서 도시건설상(남한의 국토교통부 장관), 사법상(남한의 법무부장관) 등의 요직을 지냈기 때문인 듯. 평양의 애국렬사릉에 이준의 가묘가 있으며 이용 역시 여기에 안장되었다. 2000년 당시 장증손 이일(당시 44세)이 북청에 거주하고 있었다.[24] 차녀 이종숙은 1959년 당시 서울 종로구 사직동에 살고 있었다.
- 이준 열사가 순국한 헤이그에는 당시 특사단의 숙소였던 드융 호텔이 있는데 1995년 이기항 씨가 약 20만 달러를 지불하고 호텔을 매입하여 기념관으로 개장해 '이준 평화 박물관(YI JUN PEACE MUSEUM)'으로 이름 붙였으며 1995년 8월 5일 개관되어 현재까지 운영되고 있다. 본 박물관에는 이기항 씨 부부가 일본, 러시아, 네덜란드 등에서 수집한 관련 유물과 광복절 60주년 제1호 태극기가 소장되어 있다. 박덕영 연세대학교 로스쿨 교수가 이준 열사 기념 우표를 기증하였다.
- 헤이그 특사 일원 중 유일하게 묘소가 제대로 남아 있다. 이상설은 러시아에서 사망 후 동지들이 화장하여 산골했고, 이위종은 생사 자체가 불명이다.
4. 어록
人死稱何死
사람이 죽는다는 것이 무엇이며
人生稱何生
사람이 산다는 것 무엇이냐
死而有不死
죽어도 죽잖은 것이 있고
生而有不生
살아도 살지 아니함이 있나니
誤生不如死
그릇 살면 차라리 죽음만도 못하고
善死還永生
제대로 죽으면 되려 영생하느니
生死皆在我
살고 죽는 게 모두 제게 달렸다면
須勉知死生
모름지기 죽고 삶을 바르게 힘쓰라
사람이 죽는다는 것이 무엇이며
人生稱何生
사람이 산다는 것 무엇이냐
死而有不死
죽어도 죽잖은 것이 있고
生而有不生
살아도 살지 아니함이 있나니
誤生不如死
그릇 살면 차라리 죽음만도 못하고
善死還永生
제대로 죽으면 되려 영생하느니
生死皆在我
살고 죽는 게 모두 제게 달렸다면
須勉知死生
모름지기 죽고 삶을 바르게 힘쓰라
5. 대중매체에서
- 1984년 북한에서는 신상옥 감독이 이준을 주인공으로 <돌아오지 않는 밀사>[25]라는 제목의 영화를 제작하였다. <혈분만국회>라는 연극을 원작으로 하였다고 하는데 북한에서는 김일성이 창작한 혁명 연극이라고 주장하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자주 공연되는 레퍼토리라고 한다. 작중 이준의 최후는 야사에서 알려진 자결설로 나온다.
- 1984년 MBC 드라마 <조선총독부>에서는 배우 김웅철이 연기했다.
- 2011년 한영희 작가가 남편 임무영 검사와 함께 <황제의 특사 이준>이라는 소설을 출간했다.
[1] 프랑스어식 표기로, 현행 표기법에 따르면 'Yi Jun'이다.[2] 1902년 편찬된 선원속보(璿源續譜)에는 11월 18일생으로 등재돼 있다.[3] 전주 이씨 집성촌이다. 독립유공자 이원수도 이 마을 출신이다.[4] 완풍대군파 17대손 '재(在)'자 항렬을 써서 초명이 이선재(李璿在)다. 완풍대군의 맏아들인 완원부원군(完原府院君) 이양우(李良祐)의 16대손이며, 애국지사 이용익하고 무려 33촌 관계에 있다.[5] 1854년 12월 17일생. 주만복(朱萬福)의 딸이다.[6] 아내 이일정의 권유와 당시 권사였던 전덕기 목사와의 교제가 주효했다.[7] 1956년 학계와 언론계에서 이전까지 알고 있었던 할복자살 이야기가 사실이 아니라는 주장이 제기되면서, '열사'라는 용어 사용이 타당한지에 대한 논란이 일기도 했다. 당시 이준의 병사설을 실은 동아일보 기사의 제목은 '반세기 동안의 열사는 어디로'였다. 1962년, '할복자살설은 근거 없는 것이지만 나라를 위해 일을 하다가 타국에서 별세한 만큼 분사(憤死)라는 용어 대신 순국(殉國)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자'는 결론이 내려졌다.[8] 1902년 편찬된 선원속보(璿源續譜)에 근거[9] 이석오(李錫五)의 딸이다.[10] 이원계는 위화도 회군 이후 자살한 고려의 충신이다. 그의 이런 면모는 <용의 눈물> 1화 첫 장면에서 "아우님, 다시 한 번 생각해보시게"라고 눈물로 호소하는 노장의 모습으로 영상화된 적이 있다. 최영과 이성계의 대면이라는 명장면 때문에 묻혀서 그렇지 역사에서는 위화도 회군 이후 자택에서 독을 마시고 자살했다. 자식들에게는 이성계를 도우라는 유언을 남겼는데 그 중 유명한 사람이 이천우. 이준은 이천우의 맏형 이양우의 후손이다.[11] 이준의 아버지 이병관은 본래 이명섭의 장남인데, 출생 이후 큰아버지 이명집(李命集, 1799. 1. 3 ~ 1832. 10. 19)에 입양되었다.[12] 결혼한 후 가세가 기울자 조선 최초의 여성 용품점을 차려 장사를 했다. 당시 외부 출입도 당당히 못하던 여성들의 입장에서 따지자면 굉장한 움직임. 후에 국채보상운동 때는 직접 나서 '탈환회', '감선회' 등의 여성 조직을 꾸려 모금 운동을 펼쳤다. 일제를 규탄하는 시위에도 참가해 소리를 높이기도 했다.[13] 당시 이준 33세, 이일정 16세.[14] 현대 대한민국에서는 사법부와 검찰청이 별개의 조직으로 분리되어 있지만 당시 검사는 각 지역 재판소 소속으로 되어 있었다.[15] 당시 이준도 일부 친일파 인사들과 어느 정도 교제가 있었기 때문에 피신한 것. 아내 이일정을 만난 것도 당시 친일로 의심받던 김병시의 소개였다.[16] 최병헌의 장남이자 반민족행위자 최활란의 남편.[17] 실제로 구한말 많은 이들이 러일전쟁이 "동양과 서양의 대결", "백인종의 침략에 맞선 황인종의 성전(聖戰)"이라는 잘못된 인식을 가지는 바람에 일본을 전폭적으로 지지했었는데 안중근 의사, 몽양 여운형, 의암 손병희 선생도 여기 포함되며 이완용은 이 일을 계기로 골수 친일 매국노로 흑화하였다.[대표적으로] 이용구가 있다.[19] 제정 러시아의 수도[20] 출처: <자기 가치를 높이는 럭셔리 매너>, 신성대, 174쪽 재인용[21] 고종이 날짜 기재와 서명만 하고 내용이 써있지 않은 말 그대로 백지 위임장이었다. 여기서 안 그래도 분위기 삼엄한 덕수궁에서 어떻게 위임장을 가지고 나왔는지 현재까지도 주장이 갈리는데, 첫째는 고종의 조력자였던 선교사 헐버트에게서 전달받았다는 설, 두번째는 내관 강석호와 전 목사의 친척인 박상궁의 전달을 통해 받았다는 설이다. 일단 확실한 건 이준 열사는 위임장을 수령했다는 것.[22] 이양재 리준만국평화재단 이사장은 병사설은 사실이 아니라며 자결설을 지지하는데 회의장에서 할복 자살했다는 설을 지지하는 것은 아니며 회의 참석 실패 이후 단식하다가 자결했을 가능성을 높게 보고 있다.[23] 그래서인지 일부 위인전에서는 피를 토하고 사망하는 장면도 나오는데 1990년대 어린이용 역사 만화 등에서는 아예 '분에 못 이기고 분사(憤死)했다'고 하는 경우도 있으며 울분을 참지 못하고 홧병으로 죽었다는 이야기.[24] 출처 : 북녘땅 고향은 지금 북청편, KBS 2000년 9월 11일 방영[25] 신상옥 감독이 북한에서 처음으로 만든 영화인데 첫 작품으로 택한 이유가 김일성과 김정일의 의심을 피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크레딧에 감독의 이름이 빠졌는데 신상옥 감독의 탈북 후 저작권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는 북한에서 감독의 이름을 없애버린 것으로 추정된다. 아울러 북한에서는 원래 다른 감독이 연출하려 준비하고 있었는데 신상옥 감독이 빼앗았다고 주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