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티오피아 제국 የኢትዮጵያ ንጉሠ ነገሥት መንግሥተ | |||||
국기[1] | 국장[2] | ||||
ኢትዮጵያ ፡ ታበጽ ፡ እደዊሃ ፡ ሃበ ፡ እግዚአብሔር[3] 에티오피아는 하느님을 향하여 손을 들 것입니다[4] | |||||
{{{-1 요하네스 4세 시절 에티오피아 제국의 강역 (주황) | |||||
1270 ~ 1936 1941 ~ 1974 | |||||
성립 이전 | 멸망 이후 | ||||
자그웨 왕조 | 사회주의 에티오피아 임시 군사정부 | ||||
위치 | 동아프리카 | ||||
수도 | 곤다르(1635-1885) 데브레 타보르(1885-1881) 메켈레(1881-1889) 아디스아바바 | ||||
정치 체제 | 전제군주제 → 입헌군주제[5] | ||||
국가 원수 | 느구서 너거스트[6] | ||||
존속기간 | 666+33년 | ||||
공용어 | 그으즈어, 암하라어 | ||||
종교 | 에티오피아 테와히도 정교회[7] | ||||
통화 | 에티오피아 달러(E$)[8] | ||||
주요 사건 | [ 펼치기 · 접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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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 에티오피아여 행복하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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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동아프리카 에티오피아에 있었던 제국.1270년 예쿠노 암라크 황제가 창건한 이래로 에티오피아 일대를 다스리며 인근의 이슬람 술탄국들과 대립했다. 부족 중심국가에 머물렀던 에티오피아 제국을 중앙집권적 국가로 탈바꿈시킨 인물은 1889년 즉위한 메넬리크 2세였다. 메넬리크 2세는 사방으로 영토를 확장하면서 아프리카 유일의 근대적 제국을 이룩했고, 덕분에 당대 아프리카에서도 손꼽히는 세력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10]
제2차 세계 대전 시절 이탈리아 왕국에게 패하여 5년 동안 강점당했으나 얼마 가지 않아 자유를 되찾았으며 이후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 아래 현대화 개혁에 박차를 가했다. 그러나 연이은 기근과 경제 실패, 사회 불안정으로 인하여 결국 멩기스투 하일레 마리암 중령이 주도한 쿠데타로 인해 막을 내렸고, 그 뒤를 이어 더르그(군부 정권)가 들어섰다.
한국과는 6.25 전쟁으로 인연이 있었고, 마지막 황제인 하일레 셀라시에는 1968년에 한국을 국빈방문하기도 했다.
2. 상징
에티오피아 제국의 상징 | |
제국 국기 | 국장 |
3. 역사
3.1. 건국 이전
에티오피아는 스스로를 인류 문명의 기원이라고 생각했을 정도로 그 역사가 굉장히 오래된 나라이다. 에티오피아는 인류 최초로 수수를 재배한 지역이었으며, 고대에는 나일 강 상류 쪽에서 나름대로의 문명을 세우면서 고대 이집트 등과도 교류했다. 당시 이집트와 에티오피아는 주로 황금, 흑요석, 상아 등 귀중품들을 교역하였으며 대부분의 주민들은 푼트 지역에 모여 살았다.역사에 기록된 첫 에티오피아계 국가는 다못이라는 나라였다. 기원전 1000년 경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며 약 기원후 5세기 경까지 존속했다. 다만 기록과 자료 부족으로 인하여 이 국가에 대해서는 그다지 알려진 바가 많지 않으며, 그나마 고대 이집트인들의 기록 외에는 추가적인 자료도 없어서 다못과 관련된 자세한 연구는 딱히 이루어지지 않은 실정이다. 어쨌든 다못을 이어 에티오피아를 다스린 국가는 악숨 왕국이었다. 악숨 왕국은 성경으로도 유명한 시바 왕국의 영향을 받은 국가로,[12] 원래 다못에 속해있는 여러 소국들 중 하나였으나 힘을 길러 에티오피아 전체를 집어삼킨 것으로 추정된다.
2세기 경 건국된 악숨 왕국은 에티오피아 역사상 가장 찬란한 전성기를 이끌었을 정도로 영화를 누렸다. 다못의 한 소국으로 출발하여 결국 에티오피아 북부 고지대 전체를 통일한 악숨 왕국은 홍해의 교역로를 휘어잡고 로마 제국, 이집트, 페르시아, 예멘, 아라비아 등과 엄청난 양의 중계무역을 맡으면서 막대한 부를 쌓을 수 있었고, 유향이나 몰약 등을 대거 수출하면서 세계적으로도 명성을 날렸다. 당시 악숨 왕국과 관련된 엄청난 소문들이 워낙 많았기에 마니교의 창시자인 마니가 악숨 왕국을 페르시아, 로마 제국, 중국[13]과 함께 '세계 4대 강국'이라고 일컬을 정도였다고 한다.[14] 350년 경에는 쇠퇴해가는 쿠시 왕국[15]을 병합하였으며, 로마 제국이 기독교를 받아들인지 20년이 지난 333년에는 본격적으로 기독교가 전래, 339년에는 아예 기독교가 국교가 되어버렸다. 5세기에서 6세기 경에는 동로마 제국과 사산조 페르시아의 끝없는 다툼 때문에 홍해 쪽의 교역로가 흥성해지면서 제2의 전성기를 누렸고, 당시에는 홍해 건너 예멘의 토후들에게까지 영향력을 행사할 정도로 강력한 대국들 중 하나였다.
그러나 악숨 왕국도 번영에 가득 찬 수세기가 지나간 후 쇠퇴하기 시작했다. 예멘의 토후들이 대거 충성 대상을 악숨 왕국에서 사산 페르시아로 교체하고, 아라비아 반도에서 이슬람교가 빠르게 성장하면서 기독교 국가인 악숨 왕국의 영향력이 빠르게 감소한 것이다. 결국 악숨 왕국은 점차 세력이 시들시들해지더니 7세기 이후 크게 쇠퇴하였으며 10세기 경에 끝내 무너지게 된다. 전설에 따르면 반란으로 유대인 출신의 구디트 여왕이 정권을 잡은 후 왕국이 몰락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왕실의 일원이었던 구디트는 왕위를 차지하기 위해 모든 가족들을 학살하고 왕좌를 거머쥐었고, 약 40여 년 동안 에티오피아 일대를 다스렸다. 악숨은 오랫동안 기독교를 지지하는 지역이었는데 유대교도인 구디트 여왕이 정권을 잡기 위해 농촌을 파괴하고 다른 왕족들을 살해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온다. 구디트 여왕의 일생과 통치는 아직도 알려지지 않은 부분이 많아 논란의 대상이나 10세기에 그녀가 등장한 것과 악숨이 몰락하기 시작한 시기가 일치한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어쨌든 구디트 여왕은 왕위를 그녀의 후계자들에게 물려주는 데에는 성공하였으나, 이미 영토는 전성기 시절에 비하여 크게 줄어든 상태였고 왕국은 얼마 못가 신생국인 자그웨 왕조에게 멸망했다.
한때 에티오피아 전역을 다스리던 악숨 왕국이 무너지자 에티오피아에는 수많은 소국들이 다투는 난립기가 찾아왔다. 이들 중에는 이슬람교를 믿었던 쇼아 술탄국과 기독교 신앙을 유지하고 있던 자그웨 왕조 등이 가장 대표적이었다.[16] 이 시기를 에티오피아의 중세 시대로 분류하는데, 자그웨 왕조가 워낙 타 기독교계 국가들과 고립적인 외교 정책을 취했기에 딱히 알려진 것은 많지 않다. 다만 로하 지역에 수도를 두고 상당히 풍요로운 문화를 영위하였으며, 세계적인 암굴교회인 랄리벨라 암굴교회를 짓는 등 문화적인 업적들도 많이 남겼다. 또한 성지 예루살렘을 되찾는다는 명목으로 교황이 일으킨 십자군 전쟁에 소규모이지만 지원군을 보내고 유럽 국가들과 제한적인 교류를 하기도 했다.[17]
3.2. 건국
예쿠노 암라크 황제 | 교회[18] |
3.3. 이슬람과의 대립
예쿠노 암라크 황제가 인근의 쇼아 술탄국에게 도움을 받으면서 잠시 동안 이루어졌던 기독교와 이슬람의 불안한 동맹은 얼마 가지 못했다. 에티오피아 제국의 동맹국이었던 쇼아 술탄국은 1286년 경 새롭게 쳐들어온 아랍계 무슬림들의 침입으로 멸망했고, 그 자리에는 새롭게 이파트 술탄국이 세워졌다. 쇼아 술탄국과는 달리 에티오피아 제국과 아무런 접점이 없었던 이파트 술탄국은 당연히 종교도 다른데다 국경마저 마주보고 있는 에티오피아 제국과 적대하기 시작했다. 결국 카이로에 순례를 다녀오던 에티오피아 사절이 이파트 술탄국에 사로잡히는 일이 터진 것을 계기로 1320년에 양국 간의 전쟁이 일어났고, 1328년에는 당시 이파트 술탄국의 술탄이었던 하쿳딘 나흐위가 전사했다. 하쿳딘 나흐위가 전사한 후 동생 사비랏딘 무하메드가 새로운 술탄에 즉위하였으나 결국 대패하고 포로가 되어버렸다. 10년 만에 이파트 술탄국을 속국으로 삼아버린 에티오피아의 암다 세욘 황제는 사비랏딘 무하메드의 동생 자바랏딘을 총독으로 삼고 이파트 지역을 다스리도록 만들었다고 한다.이파트 술탄국은 속국으로 전락한 이후에도 끊임없이 에티오피아 제국을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고, 결국 하쿳딘 2세 재위기에 에티오피아를 상대로 독립을 회복했다. 그러나 이미 에티오피아와 근접한 북부 지방은 모두 상실하고 쪼그라든 상태였고, 이파트 술탄국의 영토는 소말리아 일부와 에리트리아 일대에만 국한되어 있었다. 하쿳딘 2세 사후 즉위한 사아닷딘 2세는 계속 에티오피아 제국을 찝적대면서 옛 영토를 찾으려 했으나 연이어 패배의 쓴맛을 보아야만 했고, 결국 에티오피아 황제였던 다위트 1세가 대군을 이끌고 이파트 술탄국의 수도 제일라를 함락하면서 사아닷딘 2세는 전사했고 이파트 술탄국은 멸망했다. 그러나 사아닷딘 2세의 10명의 아들들은 살아남았고, 이들은 홍해 너머 아라비아 반도로 건너가 세력 회복을 꾀했다. 이들 중 사비랏딘 2세가 돌아와 소말리아와 에티오피아 일대에 새로운 술탄국을 세우니, 이 것이 바로 아달 술탄국이다.
아달 술탄국의 전신인 이파트 술탄국을 에티오피아가 멸망시켜 버렸던만큼 아달 술탄국과 에티오피아 사이의 관계는 시작부터 최악이었다. 아달 술탄국은 소말리아 지방에 정착한 직후부터 끊임없이 북진을 노리면서 에티오피아 공략을 시도했고, 수도를 해안가의 제일라에서 1433년 내륙의 다카르[22]로 천도하고 호시탐탐 기회만을 노렸다. 그러나 천도에 반발한 기존 도시들이 술탄에 반기를 들었고, 한술 더떠 1445년에는 에티오피아 제국의 대표적인 명군 중 한명인 자라 야콥이 고미트에서 아달 술탄국을 격파해 술탄인 아달라이 앗 딘을 전사시켜 승리하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아달 술탄국은 이런 혼란기 속에 기존 수도였던 제일라의 아미르 우스만이 1471년 다카르를 정복하고 실권을 장악하였다. 이후 제일라 총독 마푸즈가 정권을 장악, 1508년 에티오피아의 황제 나오드를 전사시키는 쾌거를 거두었으나 1517년 그 아들인 다위트 2세의 반격에 당해 전사하였다. 이때 함께 원정에 나섰던 술탄 무함마드 역시 전사할만큼 큰 패배였다. 술탄국은 분열되었고 아미르들이 각축을 벌였는데 그틈에 술탄 아부 바크르 이븐 무함마드가 실권자인 앗두스를 죽이고 실권을 회복하였다. 그는 1520년 하라르로 천도하고 군사 요새로 삼았다.
하지만 아미르들은 이대로 물러서지 않았고 마푸즈의 사위인 이맘 아흐마드 이븐 이브라힘 알 가지의 주도 하에 뭉쳐 1527년 술탄을 재차 허수아비로 만들어버렸다. 그럼에도 술탄 아부 바크르가 다시 정권 수복을 노리자 아흐마드는 결국 그를 처형하고 왕세자 우마르 딘을 대신 옹립하였다. 그러던 1540년 에티오피아 제국의 다위트 2세가 사망하자 아흐마드는 에티오피아 정복을 염원하던 오스만 제국의 지원 하에 에티오피아 침공(فتوح الحبش)을 감행, 에티오피아의 본거지인 암하라까지 진출하고 에티오피아의 동맹인 포르투갈군을 패배시키는 위엄을 보였으나 결국 에티오피아 황제 겔라데오스의 반격에 패해 전사하였다. 그러나 에티오피아의 승승장구도 잠시, 겔라데오스 황제는 1559년 아흐마드의 조카인 누르 이븐 무하지드에 의해 전사했고, 이후 끊임없는 소모전이 벌어졌으며 에티오피아와 아달 술탄국은 서로 서로의 영토 안에 들어가 분탕질을 치면서 장기전에 들어갔다. 결과적으로 에티오피아-아달 술탄국 전쟁은 양국의 국력을 심각하게 깎아놓았고, 이로 인해 인근의 오로모인들이 이주해 오는 것을 막지 못하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23]
1769년부터 1855년까지 에티오피아 제국은 '대공 시대'를 겪는다. 이 시기 에티오피아에서는 황제와 수많은 지방의 대공들이 서로 권력을 다투는 혼란기가 전개되었다. 당시 황제는 오직 수도인 곤다르 인근의 좁은 지역만에 겨우 영향력을 미쳤고 나머지 지방들은 모두 지역 토후들이 따로 나누어 다스렸다. 수많은 전쟁과 분쟁들이 연이어 일어났고, 나라는 안팎으로 굉장히 혼란스러운 시기였다고 한다. 거의 에티오피아판 삼국지와 비슷한 셈. 심지어 에티오피아의 국교인 에티오피아 정교와 인근의 이슬람교 간의 갈등도 극단적으로 치달으면서 제국은 이중 갈등이 일어났고, 에티오피아 사람들은 꽤나 고달픈 삶을 살던 시기였다. 이 대공 시대는 1855년 즉위한 테워드로스 2세 시기에 끝났다. 테오드로스 2세는 뛰어난 군사적 능력으로 각 지방의 대공들을 억눌렀으며, 특히 거의 독립국처럼 행세하던 쇼아 지방을 다시 황제의 영향권 내에 편입시켰다. 또한 강력한 중앙집권화 정책을 통해서 반쯤 분열국이었던 에티오피아를 제대로 된 국가로 만든 업적을 남겼다고 한다.
3.4. 근현대
에티오피아의 근대적 개혁은 테워드로스 2세에 의해 본격화된다. 그는 지방관들에게 월급을 주는 등 아직 아프리카 특유의 부족국가 정도를 벗어나지 못한 에티오피아를 본격적인 중앙집권국가로 탈바꿈하려 노력했고, 정규군을 창설하였으며 세수 제도를 정하고 체계적인 행정 기구를 창설하는 등 근대화 작업에 열을 올렸다. 그러나 테워드로스 2세의 근대화 작업은 그가 원했던만큼의 결실을 내지 못했다. 테워드로스 2세는 군사 공장을 설치하고 지방 군벌들을 억눌렀는데, 이 과정에서 지나치게 막대한 교회의 토지를 몰수하려 하자 교회의 반발을 겪으며 통제력이 심각하게 약화되었다. 또한 점차 에티오피아 지방에 마수를 뻗쳐오는 영국 역시 테워드로스 2세의 골치를 썩였다.이미 테워드로스 2세는 당시 빅토리아 여왕과 편지를 주고받는 등 서구 열강 세력들과 교류를 하고 있었다. 그는 여왕에게 근대화를 위한 기술 인력 파견을 요청했는데, 영국이 기술 인력은 보내지 않고 쓸데없는 선교사 등만을 보내자 분노해 영국 사절단을 가두었다. 에티오피아를 집어삼키거나 영토를 빼앗을 기회를 노리고 있었던 영국은 이 기회를 틈타 로버트 네이피어 경이 이끄는 3만 명이 넘는 대군을 파견해 에티오피아를 침공했다. 평소 테워드로스 2세의 중앙집권적인 정책에 불만이 많던 지방 토후들과 교회들은 영국군에 협력했고, 테워드로스 2세는 고립무원의 상태에 처했다. 테워드로스 2세는 친히 군대를 이끌고 영국군을 내쫓으려 나갔으나 마그달라 지방에서 대패하고야 말았다. 테워드로스 2세는 수중에 4천도 안되는 병력 밖에 남지 않자 실의에 빠져 1868년 권총으로 자살하면서 생을 마감했다. 황제가 죽은 이후 영국군은 에티오피아의 수도 곤다르를 함락, 약탈했고 이 재물들을 운송하기 위해 15마리의 코끼리와 300마리가 넘는 당나귀들이 필요했을 정도라고 한다. 영국은 수단 남부를 차지하였고 이탈리아, 프랑스와 함께 소말릴란드를 분할하였다. 그나마 영국이 에티오피아를 완전히 식민화하지 않았다는 점이 다행이었다.
이후 에티오피아 황위는 테클레 기요르기스 2세를 거쳐 요하네스 4세에게 넘어갔다. 요하네스 4세는 서구 열강들의 잠식에 맞서 에티오피아를 단결시키는 데에 총력을 다했으며, 오스만 제국 치하의 이집트와 전쟁을 치러 승리를 거두고 에리트레아 지역을 병합하는 등 여러 업적들을 남겼다. 그러나 이렇게 팽창적인 외교 정책을 펼치던 요하네스 4세는 수단의 무슬림 군대와 싸우던 중 갈라바트 전투에서 전사했고, 그의 뒤를 이어 1889년 즉위한 사람이 바로 메넬리크 2세였다.
3.4.1. 메넬리크 2세
메넬리크 2세 | 아드와 전투 | 메넬리크 2세의 사진[24] |
당시 메넬리크 2세와 쇼아 출신의 왕족들은 최소한 쇼아를 다스리는 사람은 쇼아 왕족 출신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비왕족 출신인 아토 베자베가 쇼아를 통치하는 것은 옳지못하다 여긴 것이다. 결국 메넬리크 2세는 테오드로스 2세의 감시를 뚫고 쇼아 지방으로 탈출했고, 그 곳에서 사람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고 아토 베자베를 내쫒은 다음 쇼아 왕위에 오르는 데에 성공했다. 포로가 도망치자 당연히 격노한 테오드로스 2세는 남아있는 쇼아 출신 왕족들과 귀족들의 목을 쳤으나 메넬리크 2세를 다시 사로잡지는 못했다. 메넬리크 2세는 쇼아 왕위에 오른 뒤 자신이 에티오피아 황가의 직계 후손들 중 하나임을 주장하며 에티오피아 황위에 대한 야망을 드러냈으나, 자신을 잘 대해준 테오드로스 2세를 치지는 못했을 뿐더러 아직 국력도 에티오피아에 비할 바가 아니었기에 내정을 다지는 데에만 주력했다.
기회는 1868년에 찾아왔다. 테오드로스 2세와 영국 간의 외교 분쟁으로 인하여 몇만에 달하는 영국군이 에티오피아를 침공했고, 이 전쟁에서 테오드로스 2세가 대패하고 자살을 해버린 것이다. 영국군 침공 당시 직접적으로 나서지는 않았으나 물자를 제공하는 대신 근대식 무기들을 제공받으며 힘을 키우고 있던 메넬리크 2세는 이때가 에티오피아 황위 계승의 적기라고 판단했다. 그러나 동시다발적으로 반란과 부인들의 왕위 찬탈 음모, 군사 원정 실패 등이 연이어 겹치자 일단 보류하기로 하고 이집트에 망명가있던 요한네스 4세를 대신 옹립한 다음 에티오피아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메넬리크 2세는 3일 동안 대축제를 열어 민심을 사려 노력했고, 프랑스, 이탈리아 등과 동맹을 맺었으며 무슬림들과도 친분을 쌓으며 에티오피아 내 자신의 기반을 다지며 황위 찬탈의 기회만을 노렸다.
1889년 3월에 요한네스 4세가 수단의 마흐디 국과 전투 도중 총상으로 사망하자 메넬리크 2세는 즉시 자신이 황제임을 선언하고 에티오피아 황제에 즉위했다. 그는 요한네스 4세의 아들을 포함한 모든 경쟁자들을 물리치는 데에 성공했으며, 결국 1889년 11월 3일 엔토토산 마리아 성당에서 에티오피아 정교회 대주교의 성축을 받으며 대관식을 치렀다.
메넬리크 황궁의 모습.[25] | 메넬리크 2세의 영토 확장.[26] |
그러나 외세의 위험은 커지고 있었다. 당시는 한창 유럽의 열강들이 세계를 휘젓고 다니는 제국주의의 시대였고,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의 맹주들 중 하나였던 에티오피아 역시 서구 세력의 개입을 피할 수는 없었다. 프랑스는 홍해로 들어가는 길목인 지부티를 장악했고 영국은 수단 남부와 소말릴란드를 강탈했다. 그러나 메넬리크 2세 시기 에티오피아가 대대적인 전쟁을 벌인 상대는 이탈리아 왕국이었다. 메넬리크 2세가 즉위할 시절, 경쟁자들을 제치기 위하여 이탈리아와 우찰레 조약을 맺었다. 우찰레 조약의 내용은 기본적으로 에티오피아가 이탈리아에게 에리트레아 지방을 양도하는 대신 이탈리아가 에티오피아에게 군수물자와 기술을 전달해주는 데에 있었다. 그러나 조약 17조, '외교권 관련 조항'에 대한 논쟁이 불거졌는데, 이탈리아는 에티오피아가 외교권을 행사할 때에 무조건 이탈리아의 자문을 받아야 한다고 해석했으나 메넬리크 2세는 '받을 수도 있다'라고 해석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이탈리아는 에티오피아에게 더 많은 것을 뜯어내기 위해 에티오피아를 침공했으나 에티오피아인들과 에리트레아인들의 협공, 그리고 메넬리크 2세의 지휘 덕분에 1896년 아드와 전투에서 이탈리아 왕국군을 격파하고 아프리카에서 유일무이한 독립국으로 남는 데에 성공하기도 했다.
메넬리크 2세는 이탈리아와의 전쟁 이후부터 꾸준한 근대식 개혁 정책을 펼쳤다. 애초에 자신이 황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이 전임 황제 테오드로스 2세가 서구 세력인 영국과 전쟁을 벌이다가 자살한 것이었던만큼 메넬리크 2세 역시 서구 열강에 대한 경계심이 대단히 많았다. 메넬리크 2세는 에티오피아에 근대식인 우편, 은행, 철도, 전신 제도들을 도입하는 한편, 서구 세력들을 견제하기 위하여 북방의 러시아 제국과 외교관계를 맺어 유럽 세력들을 막아내고자 했다. 1902년에는 4년에 걸친 대규모 철도 확장 공사를 펼치면서 에티오피아 철도 산업을 진흥하려 노력하였으며, 여러 강대국 틈바구니에서 뛰어난 외교술을 펼치면서 에티오피아의 주권 확립을 도모했다. 메넬리크 2세의 눈물나는 노력은 어느 정도 효과가 있었고, 결과적으로 1906년에는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3국에게서 완전한 독립을 인정받는 성과를 남겼다. 또한 에티오피아의 현재 수도인 아디스아바바를 세운 것도 바로 이 메넬리크 2세였다. 이전까지만 해도 황제가 있는 곳이 곧 수도였던 에티오피아 전통과는 달리, 아예 고정적인 수도를 세워 중앙집권적 정부 구조의 상징을 세운 것이다.[29]
3.4.2. 하일레 셀라시에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 | 하일레 셀라시에의 대관식 |
1916년 새로운 여제로 즉위한 자우디투는 1930년까지 재위했다. 그녀는 메넬리크 2세부터 이어져 내려온 개혁 정책을 유지했으나, 천성이 보수적이었던 탓에 온건한 개혁을 추구했다. 이와 같은 정책은 급진개혁파의 수장이자 황실 일원이었던 터퍼리 머콘는(ራስ ተፈሪ መኮንን/Ras Täfäri Mäkonnǝn)[32]의 반감을 샀고, 여제와 터퍼리 머콘는 사이의 거리는 점차 벌어졌다. 점차 여제를 지지하는 파벌과 터퍼리를 지지하는 파벌로 궁정이 쪼개졌으나 여제는 국정을 서서히 방치하면서 거의 관심을 두지 않기 시작했다. 결국 자우디투 여제의 재위 말년에 이르자 에티오피아의 실권은 터퍼리 머콘는이 장악하는 지경에 이르렀으며, 자우디투는 꿔다놓은 보릿자루 신세로 국정에 관심을 끊은 채로 살았다. 1930년 4월 2일 자우디투가 사망하자 황위는 자연스레 터퍼리에게 넘어갔고, 터퍼리가 하일레 셀라시에라는 이름으로 즉위하니 이 하일레 셀라시에가 바로 에티오피아 최후의 황제이다.
하일레 셀라시에는 메넬리크 2세의 현대화 정신을 계승하여 1931년 메이지 헌법을 모델로 한 에티오피아 최초의 성문헌법을 채택했다.[33] 일본을 모델로 한 입헌군주국을 추구했기에 헌법을 통해 황제의 절대적인 권력을 성문화했으며, 여러 근대 문물을 들여온다. 또 일본 제국과의 관계에 관심이 깊어 1931년에 일본 제국에 사절단을 보내고, 일본에게 에티오피아 내 토지를 대여해 상공업 시설을 설치해줄 것을 요청하기도 했다. 또한 이전부터 끊임없이 이어져오던 악습인 노예제를 완전히 법적으로 철폐하였으며 각지에 학교를 세우고 치안을 강화하는 등 대대적인 근대화 개혁을 실시하면서 나름대로 치세 초반의 업적을 쌓았다. 이탈리아에 대한 항전에서도 크게 활약하였고, 아프리카 통일기구의 창설을 제창하였으며 자메이카에선 살아있는 신으로 모셔진 적도 있었다.
그렇게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가 순탄하게 개혁 정치를 펴나가던 중인 1935년, 이탈리아의 독재자 베니토 무솔리니는 기어코 에티오피아를 식민화하기 위한 전쟁을 일으켰다. 국제연맹에서 제명당하면서까지 침략전쟁을 일으킨 무솔리니는 40여 년 전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이탈리아의 전력을 에티오피아에 쏟아부었다. 에티오피아는 끝까지 이탈리아군에 맞서 항전을 지속하였으나, 엄연히 열강 타이틀은 가진 이탈리아의 진심을 담은 공격을 버텨내기는 어려웠고 결국 1936년에 수도 아디스아바바가 이탈리아의 손에 떨어졌다. 하일레 셀라시에는 영국의 런던으로 망명을 떠나 이탈리아의 불법 행위를 규탄하며 망명정부를 차렸고, 에티오피아 내부에서는 게릴라 군대가 결성되어 이탈리아 주둔군을 끝없이 괴롭혔다. 무솔리니는 전쟁을 대승리로 포장하고 에티오피아 합병을 선언하였으나, 미국과 소련을 포함한 국제사회의 국가들 대부분은 이를 인정해주지 않았다.
1935년 당시 에티오피아 기병대의 모습. | 런던으로 도피해 망명정부를 꾸린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34] |
2차 세계대전이 종결된 직후 에티오피아는 국제연합의 창립회원국이 되었으며 1948년에는 오가덴 지역을 얻어냈다. 에티오피아의 영토였다가 1880년대에 이탈리아에게 빼앗겼던 홍해 연안의 에리트레아 지역은 1952년 다시 차지했다.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는 개전 전부터 꾸준하게 진행해왔던 개혁 정책을 계속 실시했는데, 가장 대표적으로 세제 정책을 개편하였으며 사회적으로도 근대적인 구조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다만 황제의 노력은 지나치게 부족중심체제를 유지하고 있던 에티오피아의 당시 상황에는 제대로 들어맞지 않았으며 워낙 귀족들과 기득권 세력들의 반대가 심했기에 제대로 개혁이 이루어지지는 못했다고 한다. 특히 1941년부터 약 20여 년 동안 황제가 가장 심혈을 기울인 것이 바로 에티오피아 정교회의 독립이었다. 당시 에티오피아 정교회는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 산하 교회로 정교회의 모든 주교들은 총대주교의 임명을 받는 하위 주교들이었다.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는 에티오피아 교회에 대한 영향력 강화를 위해 끝없는 로비를 통해 에티오피아 교회 독립을 요청했고, 결국 1959년에 에티오피아 테와히도 정교회는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로부터 독립하는데에 성공했다.
1955년 11월에는 그의 실버 주빌리에 맞추어 수정헌법을 발표했다. 하일레 셀라시에는 이 헌법에서 하원을 선출직으로 만들고 이 곳에 입법권을 부여하면서 나름 민주주의적인 내용을 많이 담아내는 동시에 여전히 황제의 강력한 권한은 유지했다. 또한 전국민들을 대상으로 기초적인 교육을 실시하면서 에티오피아의 학력은 빠른 속도로 올라갔고, 중앙정부에게 지나치게 반항적인 지방에는 반쯤 자율권을 부여하면서 최대한 부족, 지방 간의 갈등을 최소화하려 시도했다. 하지만 이 개혁 정책 역시 에티오피아의 지나치게 경직된 원시적인 부족 중심 사회, 그리고 귀족들을 중심으로 한 보수 세력들의 극렬한 반대로 큰 성과는 내지 못했으며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의 개혁 속도는 거북이 기어가는 속도로 이루어졌다.
1950년대에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는 6.25 전쟁에 대한민국 편을 들어 원군을 파병했다. 사람들이 잘 모르는 사실이지만 형제의 나라[37]라고 하는 튀르키예는 공산주의의 위협 때문에 참전했지만 에티오피아는 오직 정의를 위해 참전을 하였다.[38] 1950년 6.25 전쟁 당시 16개 유엔 참전국 가운데 아프리카 대륙에서 지상군 부대를 파견한 유일한 국가였다.[39] 한국 파병부대 출국 신고식에서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는 한국 파병 부대 이름을 ‘칸녀우(ቃኘው)[40] 대대’라고 이름을 지어 주었고, 부대원들에게 "한국의 자유를 지켜라" 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칸녀우 대대는 1953년까지 5차에 걸쳐 총인원 6,037명이 참전하여 253번의 전투를 치르는 동안 단 한 번의 패배도 없이 전승의 신화를 만들었다. 121명의 전사자와 536명의 부상자를 냈으나 포로는 한 사람도 없없고 전장에 전우의 시신 한 구도 두고 오지 않았다. 이는 전우를 두고 가지 않겠다는 전우애와 이기든지 죽든지 둘 중에서 하나만을 선택했던 그들의 용맹성 때문이었다. 대대는 전투 수행뿐만 아니라 1953년에 동두천에 보화교육원을 건립하고 1956년까지 한국인 고아들을 돌보기도 했다.[41]
1968년에는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가 한국을 방문했을 정도로 한국과 가까운 사이였다. 국가기록원 영상자료에 보면 당시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의 방한 영상이 있다.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 재위기의 에티오피아 국내는 조용할 날이 없었다. 1960년 12월에 황제가 브라질을 국빈방문했을 당시, 친위대가 쿠데타를 일으켜 황태자 암하 셀라시에를 황위에 앉혔다. 비록 이 쿠데타는 정교회의 지지도 받지 못했으며 경찰력에 의해 간단히 분쇄되었으나, 강제든 자발적이든 황태자가 가담한[42] 이 쿠데타로 인해서 국민들 사이에서 전제군주제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감이 퍼지게 된다. 제정에 대한 사람들의 시선은 갈수록 험악해졌고,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의 개혁 정책 덕분에 학력 수준이 크게 높아진 중산층들은 오히려 황제의 독재와 오랜 철권통치에 불만을 품기 시작했다. 한편 에티오피아 치하의 에리트레아 지방은 갈수록 독립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져만 갔다. 서구권은 에티오피아에게 에리트레아의 자치 의회 구성을 허가하고 상당한 자율권을 양도할 것을 요구했는데, 황제는 이 제안에 별 관심이 없었고 오히려 자치 의회를 폐쇄해버리면서 에리트레아 독립전쟁이 일어나게 된다.
하일레 셀라시에는 기본적으로 친서방 외교정책을 폈다. 이전의 서구 열강들과의 관계를 청산했으며, 망명 시절 자신들을 도와준 영국과 프랑스에 대해 호감을 가지고 있기도 했다. 그러나 냉전 시기 에티오피아가 소련의 심기를 거슬러 좋을 것도 없었기에 일단 중립적인 태도를 유지하였고, 1961년 9월에는 베오그라드의 회동에서 미국의 제1세계, 소련의 제2세계에 둘다 속하지 않는 제3세계의 모임인 비동맹운동에 참여하면서 중립적인 성향을 유지할 것을 천명했다. 또한 아프리카 대륙 내부에 대한 영향력 확대에도 신경을 써서 현 아프리카 연합의 전신인 아프리카 통일기구의 창립국이 되었으며, 통일기구의 본부를 수도 아디스아바바에 두는 데에 성공했다. 황제는 아프리카 통일기구의 초대 의장으로 취임하면서 모로코와 알제리 사이의 국경 갈등을 성공적으로 중재하는 업적을 남기기도 했다.
당시 에티오피아 제국은 겉보기에는 전혀 무너질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는 국제적으로도 존중받는 리더들 중 하나였으며, 에티오피아 내부가 어떻든 간에 국제적으로는 2차 세계대전 시기 망명까지 하면서 이탈리아 등과 맞서 싸운 용감한 국왕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다. 외교적으로도 적절한 줄타기 외교를 선보이면서 미국과 소련의 반감을 최소화했으며, 한편으로는 경제적 투자를 이끌어내면서 나름의 성과를 냈다. 베트남 전쟁을 무의미한 소모적 전쟁이라고 비판하는 한편 미국과의 인권, 경제 협력에 나서면서 친미적인 모습을 보였고 캐나다의 몬트리올을 국빈방문하면서 캐나다와의 관계를 격상했다. 황제는 샤를 드골 프랑스 대통령의 장례식, 존 F. 케네디 미국 대통령의 장례식에도 참석했고 1970년에는 원수지간이라고도 할 수 있었던 이탈리아를 국빈방문하며 주세페 사라가트 대통령을 만나 양국 간 관계 개선을 선언했으며, 1973년에는 자국을 침공, 점령한 이탈리아와 당시 동맹관계에 있었던 독일을 방문하여 빌리 브란트 총리와 정상회담을 하기도 했고, 1950년에 일어난 한국 전쟁에서 북한과 중공 등 공산 세력 측과 전쟁 중인 남한에 유엔군의 일원으로 군대를 파병하며 반공산주의 국가인 남한과 서방 국가 세력들을 지지했던 1950년대 초와는 달리 1950년대 말과 1960년대, 70년대 초에 가서는 체코슬로바키아, 불가리아, 소련 등 구 공산권의 2세계 국가들도 방문하며 이들과의 관계개선을 추구했다.
3.4.3. 쿠데타
폐위당해 끌려나가는 황제의 모습 | 군부 쿠데타의 주역들 |
황제가 연이어 기근 해결 실패, 경제 회복 실패를 거듭하자 견고했던 정교회의 황제에 대한 지지도 수그러들었다. 극심한 기근과 실업으로 인해 흉흉해진 사회 분위기 속에서 수도 아디스아바바에 대폭동이 일어나자 황제는 기본 생활물품 가격 고정, 치안병력 확대, 군대 봉급 33% 인상을 약속하면서 국민들을 달래려 들었다. 황제의 조치는 국민들을 진정시키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이미 극심한 생활고에 지친 군인들을 진정시키기에는 무리였다. 황제는 군인들의 봉급을 더 높은 폭으로 인상해주겠다고 하면서 군부에 타협안을 제시했으나 군대 사이에서 일어난 반란은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결국 1974년 9월 12일, 공산주의자인 멩기스투 하일레 마리암 중령을 중심으로 한 소장파 장교들이 쿠데타를 일으켜 82세가 된 고령의 황제를 폐위하고 정권을 장악했다. 아만 미카엘 만돔 장군이 해외로 치료를 받으러 간 암하 셀라시에 황태자[43]를 기다린다는 명목으로 임시 정부수반으로 취임했고, 황제는 궁궐에 유폐되어 모든 실권을 잃어버렸다. 늙은 황제는 이 쿠데타에 충격을 받아 유폐된 이후에도 스스로를 여전히 실권자라 착각하며 헛발질을 계속했고, 그와중에 군부는 황실 일원들을 하라르의 감옥에 가두어버렸다. 11월 23일에는 60여 명에 달하는 황실 궁정의 고위 관료들[44]이 재판 없이 총살당해 사형당했다. 암하 셀라시에 황태자는 외국에서 군부의 이같은 만행을 규탄했으나 군부는 그의 황위계승권을 박탈하는 것으로 대응했고, 이로 인하여 몇 백여년 간 내려온 솔로몬 왕조와 에티오피아 제국은 마침내 역사속으로 사라졌다.[45]
제국 멸망 이후 에티오피아는 멩기스투 중령에 의해 공화국이 되며, 사회주의 공산주의 정책을 채택하였다. 멩기스투 정권은 소련과의 긴밀한 관계를 추구하며 오가덴 전쟁에서 소련의 지지를 얻는데 성공하였고 미국은 에티오피아에 대한 견제로 전쟁 이후 친미로 돌아선[46] 소말리아에게 전폭적인 지원을 하게 된다.
4. 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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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백과 목록
- 암다 세욘 1세 - 1314~1344년
- 뉴야야 크레스토스 - 1344년~1372년
- 메넬리크 2세 - 1889~1913년
- 이야수 5세 - 1913년~1916년. 메넬리크 2세의 외손자로 즉위했으나, 이슬람으로의 개종을 자칭한데다 1차 대전에서 동맹국 편에 가담하려 하자 폐위되었다.
- 자우디투 - 1916년~1930년. 메넬리크 2세의 딸.
- 하일레 셀라시에 1세 - 1930년~1974년.
암하 셀라시에 - 1974~1975년[47]
5. 작위와 관직
5.1. 황제 및 황실 칭호
- 느구서 너거스트: 에티오피아에서 황제를 이르는 칭호로, 번역하자면 '왕중왕' 정도 된다. 솔로몬 왕조부터 쓰기 시작했으며, 정식 호칭은 '느구서 너거스트, 신에게 선택받은 자이며 유대 지파의 정복하는 사자이며 시온의 왕'이다. 솔로몬의 후손이라는 왕조의 정통성을 부각하기 위해 그리스도적인 칭호를 쓴다. 경칭은 거러머위(그으즈어: ግርማዊ, Girimawi)이며 한국어로는 '폐하' 정도 된다. 이거 이외에 자니호이(그으즈어: ጃንሆይ, Janhoy)도 쓰였으며 이 역시 뜻은 같다.
- 느구스타 너거스타: 여제를 부르는 칭호로, 자우디투 여제 시절 쓰였다. 뜻은 느구서 너거스트처럼 '여왕 중의 여왕'이란 뜻이다. 칭호는 '신에게 선택받은 자'(그으즈어: ሥይምተ እግዚአብሔር, Siyimta Igzi'abher)였으며 경칭은 여성형으로 Girmawit로 폐하라는 뜻이다.
- 이테게(암하라어: እቴጌ, Itege): 황후를 부르는 호칭으로, 경칭은 여제와 같다.
- 느구서: 자그웨 왕조 시절 통치차의 칭호로 쓰였으며, 솔로몬 왕조 시절에는 황제 하위의 제후에게 쓰였다. 뜻은 왕으로, 원칙적으로는 솔로몬 왕조 출신의 특정 지역[48]을 지배하는 제후만이 쓸 수 있는 칭호였지만 판관의 시대 당시에는 상당히 난립했다. 메넬리크 2세가 황제가 되기 전에 '셰와의 느구서(왕)'이었으며, 즉위 이후 이 작위를 모조리 회수해 극소수 비 솔로몬 왕조 신하나 직계 황족에게만 수여했다.
- 르울(그으즈어: ልዑል, Leul or Leoul): 영어로 Prince라는 뜻으로, 상당히 번역하기 곤란한 단어이지만 용례를 보면 '대공'이나 '왕자'로 번역하는 것이 합당하며 대공이라는 번역이 좀더 적당하다. 경칭은 '전하'였으며 이 작위는 통치자의 직계 자손에게만 부여되었으며, 예외로 자우디투 여제 시절 실권자였던 라스 터퍼리 머콘는(하일레 셀라시에)에게 르울이 수여되었다.
- 러얼트(그으즈어: ልዕልት, Le'elt): 공주에게 부여된 칭호로 자우디투 여제 시절 신설되었다. 이외에는 르울의 부인에게 수여되기도 했다. 경칭은 르울과 같다.
- 아베토(암하라어: አቤቶ Abeto): 마찬가지로 영어로는 Prince로 번역되며 용례상 '공'이라는 번역이 적절하다. 황실 혈통의 남성에게 수여되던 칭호이며 오스트리아의 대공(Archduke)와 유사하다. 이보다 더 높은 칭호로 아베토 호이(Amharic: አቤቶ ሆይ, Abeto-hoy)가 있었으며 '대공'으로 번역하는 것이 적절하다. 이야수 5세의 공식적인 작위가 이것이었으며[49] 후손들이 아직도 이 작위를 칭하고 있다.
- 르울 라스(암하라어:ልዑል ራስ, Leoul Ras): 솔로몬 왕가의 분가 가주에게 수여된 칭호로, 티그라이 분가[50], 셰와 분가와 셰와 분가의 분가인 셀랄레 분가의 가주가 사용했다.
5.2. 궁정 관직
- 언더라세(Ge'ez: እንደራሴ, Enderase): 황제의 섭정의 관직으로, 대표적으로 자우디투 여제 시절 섭정으로서 실권을 틀어쥔 하일레 셀라시에가 대표적이다. 중요한 지역이나 고도의 자치권을 가진 지역의 봉신이나 지방관에게 수여되기도 했는데,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 시절에는 에리트레아 지방의 지방관에게 수여되었다.
- 러어서 머콰닌트(ርእሰ መኳንንት, Reise Mekwanint): 판관의 시대 시절, 모든 다른 귀족들보다 더 강한 권력을 가졌던 귀족, 즉 쉽게 말해 당대 에티오피아의 패자에게 수여된 칭호이다. 언더라세로서 황권의 대부분을 틀어쥔 실권자에게도 수여되었다. 테클레 기요르기스 2세 황제 시절 요한네스 4세에게 수여한 것이 마지막으로 폐지되었다.
- 터하페 터어자즈(그으즈어: ጸሓፌ ትእዛዝ, Tsehafe Taezaz): 궁정 내 최고 실권을 가진 권력으로, 황제의 두 걸음 뒤에 설 수 있었으며, 황제의 명을 듣고 전달하고 집행했다. 동시에 황제의 인장을 관리했으며 법률과 각종 외교 조약들의 서명 및 집행을 담당했다. 황제 대신 공문서에 사인도 했다.
- 아퍼 느구스(암하라어: አፈ ንጉሥ, Afe Negus): 대법관, 즉 최고위 판사의 관직이다. 원래는 황제의 말을 전달하고 황제 대신 연설하는 이에게 주던 관직이어서 '왕의 입'이라는 별명이 있었다. 근대화 이후 제국 대법원 대법관에게 수여되었다.
- 리커 머콰스(መኳስ, Liqe Mekwas): 전투시 황제와 똑같이 분장하던 사람으로, 일종의 카게무샤이다. 황제가 가장 신뢰하는 이에게 맡겼으며, 암살자들의 주의를 분산시키기 위해 일부러 화려하게 장식했다.
- 아카페 서아트(ዐቃቤ ሰዓት, Aqabe Se'at): 황제와 황궁의 일정 및 시간을 관리하던 관직으로, 대부분 고위 성직자들이 맡았다. 중세 시대에는 황궁의 실권 관직 중 하나였지만 판관의 시대 이후 권위가 폭락했다.
- 블라텐게타(ብላቴን ጌታ, Blattengeta): 황궁을 통틀어 관리하는 최고 관직. 근세 이후 명예직이 되었다.
- 블라타(ብላታ, Blata): 황궁의 회의와 각종 외교적, 절차적 의례를 관리하던 관직.
5.3. 지방 작위 및 관직
- 라스(암하라어: ራስ, Ras): '공작'이라는 의미이며 지방의 비황족 계열 최고 영주에게 쓰였던 작위이다. 판관의 시대에 가장 자칭과 난립이 많았던 작위이다.
5.4. 군사 관직 및 작위
- 데자즈마크(ደጃዝማች, Dejazmach): 에티오피아 중앙군의 사령관으로, 판관의 시대를 거쳐 사실상의 '백작'정도의 의미로 변화했다가 메넬리크 2세 시대 이후 원래 의미로 돌아왔다. 르울 라스의 후계자는 르울 데자즈마크라고 불렸으며, 요하네스 4세의 후계자 라스 멩게사 요한네스가 르울 데자즈마크였다.
- 피타우라리(ፊታውራሪ, Fitawrari): 선봉부대 사령관이며, 판관의 시대 이후 사실상 '남작' 정도의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 퀘나즈마크(ቀኛዝማች,Qeñazmach): 군대 우익 사령관을 뜻한다.
- 그라즈마크(ግራዝማች, Grazmach): 군대 좌익 사령관을 의미한다.
- 아즈마크(አዝማች, Azmach): 군대 후위 사령관으로, 사령관이 신뢰하는 부관에게 주로 맡겼다.
- 발람바라스(ባላምባራስ, Balambaras): 원래 뜻은 요새 사령관인데, 의미가 확장되어 수비대나 포병대, 기병대와 같은 군대 사령관의 의미로도 쓰였다. 주로 중요한 역할을 맡은 지휘관에게 맡겼다.
6. 국가
암하라어 | 로마자 전사 | 한국어 번역 |
ኢትዮጵያ ሆይ ደስ ይበልሽ በአምላክሽ ኃይል በንጉሥሽ | Ityoṗya hoy des ybelish beamlakish ħayl benguśish | 에티오피아여 행복하라 하느님과 황제 폐하의 권능을 찬양하여라 |
ተባብረዋል አርበኞችሽ አይነካም ከቶ ነጻነትሽ ብርቱ ናቸውና ተራሮችሽ አትፈሪም ከጠላቶችሽ | tibaberawal arbanyochish aynekam keto netsanetesh bertu nachewna terarochish ateferim kețelatochish | 그대의 용맹한 국민들은 단결했고 그대의 자유는 결코 훼손되지 않으리라 그대의 산들은 굳세고 그대의 민족은 누구도 두려워 않으리니 |
ድል አድራጊው ንጉሳችን ይኑርልን ለክብራችን | del adragiw ngusachin ynurelen lekebrachin | 우리의 군주시여 만수무강하소서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
ብርቱ ናቸውና ተራሮችሽ አትፈሪም ከጠላቶችሽ | bertu nachewna terarochish ateferim kețelatochish | 그대의 산들은 굳세고 그대의 민족은 누구도 두려워 않으리니 |
ድል አድራጊው ንጉሳችን ይኑርልን ለክብራችን | del adragiw ngusachin ynurelen lekebrachin | 우리의 군주시여 만수무강하소서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
7. 대중 매체에서 등장
- 문명 4: 비욘드 더 소드 확장팩에서 신규 문명으로 등장한다. 지도자는 자라 야콥.
- 문명 5: 멋진 신세계 확장팩에서 추가 문명으로 등장한다. 지도자는 하일레 셀라시에.
- 문명 6: 뉴 프론티어 패스에서 추가 문명으로 등장. 지도자는 메넬리크 2세.
-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3: 결정판: 아프리카 로얄 DLC 팩션으로 등장한다. 지도자는 테오드로스 2세.
- Hearts of Iron IV: By Blood Alone DLC를 보유해야 고유 중점이 해금되는 국가다. 시작 시 지도자는 하일레 셀라시에이며 아파르 주에 위치한 아우사 술탄국은 에티오피아 제국과 별개의 국가로 등장한다.
- Victoria 3: 에티오피아 문화권에서 형성 가능한 국가로 등장한다.
[1] 1870년대부터 사용하였다. 이전 중세시대의 깃발 [2] 19세기 이전 중세시대의 문장 [3] ityop̣p̣ya tabäṣ ǝdäwiha habä ǝgziʾabḥer[4] 공동번역 성서 시편 68편 31절. 본래는 '구스인은 하나님을 향하여 그 손을 신속히 들리로다' 이에 대한 화답인 듯 하다.[5] 1931년 헌법 제정, 1955년 개정. 하지만 황제의 권한이 강했다.[6] 에티오피아의 솔로몬 왕조에서 황제를 칭하던 암하라어 명칭. 한국어로 해석하면 왕들의 왕에 가까운 개념이다.[7] 일반적으로 에티오피아 테와히도 정교회가 국교라고 보지만 수센요스 1세 재위기인 1622년부터 1632년까지 짧은 기간 동안은 로마 가톨릭이 국교였다. 다만 1270-1622, 1632-1974까지 몇 백년에 달하는 존속 기간 대부분은 에티오피아 정교회가 국교였기에 에티오피아 정교회를 국교로 보는 것이다.[8] 실제 현지 표기는 비르로, 달러는 대외용 표기였다. 1974년 왕정이 폐지된 이후부터 대외용 표기 역시 비르로 통일한 것.[9] 국제연맹을 포함하여 미국, 멕시코, 소련, 중국 등의 국가들이 끝까지 이탈리아의 강점을 인정하지 않았고, 이탈리아 왕의 에티오피아 황제 겸임은 대부분의 국가들이 인정하지 않았다. 전후 1947년 평화협정(Treaty of Peace)에서도 이탈리아 강점의 합법성은 부정됐다.[10] 아프리카의 대부분이 식민지로 전락한 뒤 남은 단 두 곳의 독립국으로 그 중 하나인 라이베리아도 미국이 먹고 버린 흑인 반환소라는 비아냥을 들으니 에티오피아 제국은 빅토리아 시대의 사실상 유일한 아프리카 독립국가였다. 하지만 에티오피아 제국도 식민 지배 경험이 아예 없지는 않다.[11] አ는 '아버지(성부)'를 뜻하는 አብ(ab), ወ는 '아들(성자)'을 뜻하는 ወልድ(wäld)에 해당한다.[12] 시바 왕국은 시바의 여왕과 현왕 솔로몬의 설화로 유명하다. 다만 시바 왕국은 현재 예멘 지방에 있다는 것이 정설이지만, 당시 예멘과 에티오피아 해안가 일대는 거의 하나의 문화권이었기에 악숨 왕국이 시바 왕국에서 갈라져나왔다고 할 수도 있는 것이다.[13] 이 당시 중국은 분열기였다.[14] 물론 말이 저렇지 실제로 당시 악숨 왕국을 나머지 셋과 비교해보면 인구, 경제, 영토 등 대부분의 분야에서 감히 비비지 못할 수준이었다.[15] 한때 이집트를 정복하여 이집트 제25왕조가 되기도 한 그 쿠시 왕국이다. 이집트 역사상 전무후무하게 흑인 파라오들을 배출한 왕조이기도 하다.[16] 에티오피아의 대표적인 랄리벨라 암굴교회를 지은 국가다.[17] 이 사건으로 만들어진 것이 바로 프레스터 존의 전설이다. 십자군들은 저 먼 아프리카 어딘가에 기독교 왕국에 대한 이야기를 유럽에 돌아가서 널리 퍼뜨렸다.[18] 예쿠노 암라크 황제의 명령으로 건축되었다.[19] 이 시기 잠시 기독교를 믿는 예쿠노 암라크와 이슬람교를 믿는 쇼아 술탄국이 동맹을 이루었다.[20] 전설에 따르면 기원전 10세기에 마케다 여왕(시바의 여왕)은 자신이 다스리는 시바 왕국(현대 에티오피아에 편입되었다고 여겨지는)을 떠나 이스라엘로 가서 존경받는 솔로몬 왕의 지혜를 배웠다고 한다. 솔로몬과 그녀의 관계에 대해선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그녀는 솔로몬의 아들 메넬리크 1세를 낳게 된다. 메넬리크 1세는 솔로몬 밑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에티오피아로 돌아가기 전 솔로몬에게서 전설의 언약궤를 선물로 받았다고 한다. 기원전 950년경에 즉위한 메넬리크 1세는 성경에 언급되는 혈통의 시조로써 이후의 에티오피아 황제들에게 추앙받는다.[21] 옛 시절 구디트 여왕이 악숨 왕실 일가를 모두 숙청할 때, 단 한 명의 왕자가 겨우 살아남아 도망쳤고, 이 핏줄이 자신에게 들어가있다고 주장한 것이다.[22] 세네갈의 수도 다카르와는 별개의 도시다.[23] 이 오로모인들은 에티오피아 남부 지방에서 북쪽으로 밀고올라왔고, 엄청난 약탈과 알박기를 통해서 아달 술탄국과 에티오피아 양국의 국력을 동시에 약화시켰다.[24] 메넬리크 2세는 아프리카 흑인들 중 처음으로 자가용을 소유한 인물이기도 하다. 해당 사진은 자가용을 타고 있는 메넬리크 2세의 모습.[25] 해당 건물은 왕좌가 있는 알현실이다. 궁전이라 하기에는 초라해 보이지만 원래 이 황궁을 짓기 전에는 거의 초막이나 다름없는 오두막을 왕궁으로 썼을 정도였다.[26] 주황색 영토가 전통적인 에티오피아의 영향권이었고, 노란색 영토가 메넬리크 2세 때 확장된 권역이다.[27] 당시 메넬리크 2세의 러시아 보좌관 출신인 알렉산드르 블라토비치는 황제가 오로모인들의 인구 절반을 학살하면서 아예 반란에 대한 꿈조차 꾸지 못하게 만들려 했다는 증언을 할 정도였다.[28] 아프리카 국가들 가운데 19세기 후반을 넘어서까지 건재한 것은 물론 식민지 확장까지 꾀한 국가는 에티오피아가 거의 유일하다.[29] 메넬리크 2세는 1887년 엔토토 산 인근의 온천에서 야영하다가 그 자리에 수도를 세우기로 결정했더고 한다.[30] 당시 에티오피아에서는 식민 열강인 영국과 프랑스, 이탈리아 등에 대한 적대감이 팽배한 상황이었다. 당연히 이들을 타도하자는 동맹국들에게 끌릴 수 밖에 없었으며, 게다가 대전 초반에는 동맹국들이 승승장구하면서 황제의 마음이 동한 것이다.[31] 이야수 5세는 제위에서 쫒겨난 이후에도 꽤나 오래 생을 연명했다. 후임 황제로 즉위한 자우디투는 나름 이야수 5세에게 동정심을 가지고 있었고, 때문에 이야수 5세를 유폐한 대신 좋은 대우를 해주었다. 하지만 자우디투 이후 즉위한 하일레 셀라시에는 그딴 건 가지고 있지 않았다. 게다가 이탈리아 등이 이야수 5세를 에티오피아의 황제로 복위시킬 움직임을 보이자 결국 이야수 5세를 1935년 11월 처형하고야 만다.[32] 참고로 터퍼리 머콘는, 즉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는 에티오피아 황족 최초로 전세계를 순회한 인물이기도 하다.[33] Bahru Zewde, A History of Modern Ethiopia : 1855–1991 , second edition (Oxford : James Currey, 2001), p. 110[34] 해당 모습은 런던의 빅토리아 역에 막 도착했을 당시의 모습이다.[35] 그나마 3대 아오스타 공작 아메데오가 총독으로 부임한 뒤부터 이탈리아의 통치는 좀 더 유화적으로 변했다.[36] 영국군 외에도 자유 벨기에군과 그때까지 에티오피아 일부 지역을 장악하고 있었던 에티오피아 저항세력 등이 이 '아프리카 작전'에 참가했다.[37] 애초에 튀르키예인이 형제의 나라라고 하는 건 돌궐에서 이어지는 튀르크족 민족 의식 때문이지 한국 전쟁 참전 때문이 아니다.[38] 정확히는 유엔이 창설되었을 때,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 자신이 주장한 집단 안보라는 대의 명분을 지키기 위해 파병한 것이다.[39] 남아공도 참전했지만 이쪽은 지상군이 아닌 공군을 파견했다.[40] 암하라어로 '격파하다' 라는 뜻이다.[41] 칸녀우 대대의 생존자들은 이후 제정이 몰락하고 공산정권이 들어서자 '감히 적국인 대한민국을 위해 싸웠다'는 이유로 박해받았다. 다행히 공산 정권이 붕괴하고나선 명예를 어느 정도 회복했으며 완전히 극복 못한 생활고의 경우 한국 민간 차원에서 이들을 지원해주고 있다.[42] 암하 셀라시에 황태자는 자신은 결코 이 쿠데타에 찬동하지 않았고 반란군이 자신을 강제로 즉위시켰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황궁의 애완사자에게 먹이를 주는 황제의 사진을 보고 분노한 사람들 중 황태자가 있었음을 감안하면 어느 정도는 자발적인 참여였을 가능성이 높다.[43] 정확하게는 1960년의 쿠데타 건으로 망명한 것이었다.[44] 이들 중에는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의 손자와 2명의 전직 총리들이 포함되어 있었다.[45]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는 쿠데타 1년 후인 1975년 8월 24일 사망했다. 국영방송은 전립선 수술의 후유증으로 사망했다고 보도했으나, 황제가 불과 1달전 굉장히 건강했다는 점, 그리고 황제의 시신에 대한 공식 부검도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 등 때문에 황제가 살해당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리고 군부 정권이 무너진 이후, 군부의 황제 암살 명령문이 공개되면서 이는 사실로 드러났다.[46] 다만 소말리아도 이 때 당시 공산주의자들이 독재를 펼치던 시절이었다.[47] 황태자. 스위스에서 요양 중 더르그 쿠데타 세력에 의해 옹립되었으나 본인이 거부했고 더르그는 이듬해 제정을 폐지시켜버린다.[48] 고잠, 셰와, 베겜데르, 왈로[49] 이야수 5세는 '공식적으로는' 황제가 아니라 섭정위원회에 속한 최고 권력자였다.[50] 창피하게도 이탈리아의 두번째 침공 당시 매국노를 배출한 분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