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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8 23:02:35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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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8년 샤를 쿠베르탱[1]이 그린 <선교사들의 출발(Le depart des Missionnaires)>
조선으로 파견되는 프랑스 파리외방전교회 위앵 신부(1836-1866), 도리 신부(1839-1866), 볼리외 신부(1840-1866), 브르트니에르 신부(1838-1866)가 가족 및 친지들과 마지막 작별인사[2]를 나누는 모습이다. 그림 속 신부들은 1866년 병인박해순교했고, 1984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방한 때 시성되었다.(한국 103위 순교성인)

1. 개요2. 설명3. 제국주의와의 연관성
3.1. 선교사와 근세 제국주의3.2. 선교사와 근대 제국주의
4. 한국에서5. 일본에서6. 실존 인물
6.1. 가톨릭 선교사6.2. 정교회 선교사6.3. 성공회 선교사6.4. 개신교 선교사
7. 여담8. 매체에서의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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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 Missionary

포교를 위해 다른 지역으로 파송되는 종교인. 본래는 가톨릭 수도회예수회에서 신대륙 및 아시아 지역으로 파견된 성직자들을 이르는 의미로, 유럽이 아닌 새로운 지역으로 파견되는 성직자들을 통칭한다. 현재는 주로 그리스도교에서 다른 지역으로 선교를 위해 파견되거나 자진해서 떠나 활동하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로 확대되어 사용된다. 주류 기독교 교파들 이외에 예수 그리스도 후기 성도 교회의 선교사도 굉장히 유명하다. 보통 말로만 선교하는 것보다, 의술 등 해당 문화에 필요한 기술을 가지고 오는 경우가 많다.

개신교에서는 목사에 준하는 자격을 갖춘 사람이 선교사가 된다. 그러나 자격없는 사람이 선교사를 자칭해서 민폐를 입히는 경우도 빈번한 편. 개신교가톨릭 예수회가 잘 알려져 있지만 다른 종교에서도 비슷한 역할을 하는 사람은 있다. 특이하게도 한국 가톨릭은 선교사에 의해 전래된 것이 아니라, 자생된 것으로 유명하다.

2. 설명

가톨릭의 경우만 하더라도 유럽에서 갈수록 신자가 줄어들어 수도원이 폐쇄되는 경우가 허다하고, 그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많은 곳이 수도자사제가 부족하다. 때문에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에서 신부, 수사, 수녀를 수입해 오는 경우가 허다하고, 한국 천주교에 SOS를 요청하기도 한다. 이 기사를 보면 가톨릭에서 유럽에 선교를 보내는 이유를, 그리고 개신교에서도 그렇게 하는 이유를 알기 쉬울 것이다.

대한민국에서는 선교에서의 물질적 지원에 대하여 '물질로 종교를 강요한다'는 비판이 거세다. 그러나 물질적인 지원이 종교를 강요하는 것이라는 건 다소 부당한 비판이기도 하다. 이를테면 식량 지원의 경우, 더도말고 덜도말고 딱 한국 개신교 교회에서 흔히 하는 '주말에 식당 무료 개방하기', '주말에 애들한테 떡볶이 돌리기' 수준의 단순한 그것이다. 가톨릭이건 개신교이건 선교에서 물질적 지원의 기본 원칙은, 그냥 퍼주면서 봉사하여 사람들이 신앙에 대한 긍정적 이미지를 쌓게 하는 것이다. 보통 이를 '그리스도의 향기'라고 표현한다.

선교 방법에 대해서도 기독교 교파들 간에 의견이 충돌하는 경우도 많은데, 대표적인 예로 인도네시아나이지리아에서는 공격적인 선교로 교세를 확장하는 오순절파 등 기독교 교회에 대해 현지 친화적인 선교를 중시하는 가톨릭 등 전통 종파들이 백안시하고, 사이가 나빠지는 경우도 상당하다고 한다. 에티오피아 같은 전통적인 기독교 국가에서도 토착 종파인 에티오피아 테와히도 정교회와 외부 기독교간의 알력이 있다고 한다.

이처럼 대대로 현지에서 살아온 토착 기독교인들은 이런 외부 기독교인 선교사들에 대하여 견제하는 점이 많다. 이슬람권 등 강성하고 극단적인 성향이 많은 타 종교인들과 맞대고 살아가는 이들은 무분별한 선교를 자행하는 외부 선교사들이 물의를 일으키게 되면 종교 분쟁이 일어나기 쉽기 때문. 그러나 현지 토착 종파들이 타 종파[3]를 혐오하고 맹렬히 거부하는 이유는 자기들의 종교적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서이기도 하며, 선교는 이 기득권의 파이를 갈라먹으려는 행위이기도 하다. 해외의 선교를 통해 타 종파 그리스도인 인구가 늘어나면 자기들이 보장받고 있는 사회적 위치와 영향력이 흔들리기 때문이다.

상대적으로 종교의 자유가 없거나 제한되어 있는 나라일수록 선교를 강하게 보내는 경향이 있다. 대표적으로 중국 선교와 이슬람 문화권 선교, 북한 선교, 인도 선교, 동남아시아 선교, 이스라엘 선교가 있다. 여섯 지역권 및 국가 모두 타 국가 및 지역권에 비해 종교의 제한[4]과 탄압[5]이 심하기 때문에 선교사나 신자나 목숨을 걸어야 할 정도이다.

예를 들면 북한은 각각 교회라는 것이 겉으로만 존재할 뿐, 실상은 예수의 '예' 자만 꺼내도 즉시 사회적 생물학적 말살이다. 우상화된 국가의 지도자가 아닌 자를 구세주로 믿는 것 자체를 국가에 대한 반역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선교사는 100% 지하교회를 활용하여 선교활동을 하고 있다.

중국도 북한보다야 훨씬 낫지만, 당국에서 관리하는 관제 교회에 등록하지 않는 교회들은 모조리 불법으로 친다.[6] 그래서 가정교회나 지하교회 신자들이 중국에도 아주 많고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있다. 중국에서는 이러한 가정교회가 중국 경찰에 들키면 목사는 억류당한 뒤 입국 불가 처리되어 추방을 당하게 되고,[7] 북한의 경우는 말할 것도 없이 당사자 뿐만 아니라 그 친족들까지 정치범수용소로 끌려가거나 공개처형을 당한다고 보면 된다. 그래서 북한과 중국을 오가는 국경선 근처의 북한인들이 몰래 믿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3. 제국주의와의 연관성

어떤 관점에서 보자면 타국 사람들에게 봉사하며 고생하기도 하고 많이 순교한 자들이지만, 어떤 관점에서 보자면 문화 파괴범[8] 혹은 정치적 목적으로 사용될 수 있는 자들[9]이기도 하다.

물론 선교행위 자체가 제국주의에서 비롯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선교 자체는 제국주의가 아니다.[10] 그러나 선교사들은 그 특성상 미지의 지역에 가장 먼저 달려가는 사람들 중 하나이기 때문에, 이들이 현지에서 보고하는 정보는 제국주의적 목적으로 이용될 수 있고 실제로 그렇게 쓰였다.

학계에서는 제국주의선교의 연관성을 지적하나 선교 자체가 제국주의의 앞잡이라는 시각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원인은 어디까지나 제국주의이고 제국주의의 기원은 종교에 있지 않다. 물론 제국주의 피해국 입장에선 선교 행위가 제국주의에 이용되었으니 완전히 무관하다고 할 수는 없겠으나, 선교와 제국주의의 관계는 무역상과 제국주의의 관계 수준에서 해석하여야 할 것이다. 무역상들이 제국주의에 이용된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은 제국주의의 앞잡이가 아니라 단순한 장사치였을 뿐인 것과 마찬가지다.[11] 물론 선교를 하든 장사를 하든 간접적인 제국주의 기여가 없지는 않겠으나, 이 논리를 그대로 밀고 나간다면 유럽인이 유럽 바깥으로 발만 디뎌도 문제라는 식의 극단적 결론들만이 나올 것이다.

특히 간과하기 쉬운 것은, 선교사 입장에서 선교하고 싶은 곳과 정치적 침략자 입장에서의 침략하고 싶은 곳이 일치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한국인이라면 병인양요 때문에 알 수 있을만한, 파리외방전교회조선 진출도 프랑스 정부 입장과는 별개였다.

3.1. 선교사와 근세 제국주의

선교사들이 토착민과 함께 식민지배나 학살 등에 저항했던 기록도 있고,[12] 타 문화에 대한 기록도 상당히 많이 남겼다. 선교사가 원주민 보호에 활약할 수 있었던 건 선교사가 결국은 그 식민제국주의 열강의 문화 안에서 존경을 받는 사람이라서다.[13] 타문화에 대한 조사나 기록도 원주민 문화의 요소가 자기들이 선교한 기독교 문화 안에 스며드는 것을 가려내서 박멸하려고 쓴 것인 경우도 있다.[14] 물론 덕분에 우리는 좋은 기록 보는 셈이지만. <Dioses y Hombres de Huarochiri> 같은 책이 이런 경우다.

원주민의 인권보호에 힘쓰거나 제국주의에 맞서 독립운동에 헌신한 선교사들은 본국으로부터는 숱하게 정치적 배신자로 비난받았지만, 그나마 이들은 도덕성이라는 무기가 있어서 당대에 선교사가 제국주의를 비판할 경우, 일단 무슨 말인지 주의 깊게 경청할 확률이 높았다. 이를테면 1511년 도미니코회 선교사인 안토니오 데 몬테시노스 수사가 "당신들은 무어인들이나 투르크인들보다 더 구원받을 수 없다"라고 히스파니올라의 에스파냐인들에게 경고하자, 에스파냐인들은 이 팩트폭력을 그대로 경청해야 했다. 안토니오 수사 등의 이러한 정신은 본국의 신학자들에게 영향을 주었고, 도미니코회 회원 프란치스코 데 비토리아 신부는 저서 인디아 문제(De Indis)에서 자연법과 스콜라 사상을 동원하여 원주민의 권리를 옹호하게 된다. 그리고 <인디아 문제>는 국제법의 기원이 된다.

16-17세기 이베리아 가톨릭 국가들의 제국주의는 여전히 근대 민족 국가란 개념이 떠오르기 한창 이전이고[15] 세속의 국가와 권력자들이 종교를 이용하려는 노력은 당연히 깊었지만, 종교계가 거기 응해서 마음대로 세속의 논리에 휘둘리기 이전 시대의 일이다. 이 분야에서 대표 주자인 스페인만 하더라도 살라망카 대학에 본적을 둔 도미니코회 소속 법학자, 신학자, 선교사 세력이 상술한 안토니오 몬테시노스 수사를 필두로 이후 국제법의 아버지라 불리는 프란시스코 데 비토리아, 이 분야에선 너무도 유명한 바르톨로메 데 라스 카사스 같은 유수의 지식인들을 배출하며 끊임 없이 제국의 정치적 팽창 없이 순수한 선교로만 이루어지는 복음의 제국을 주장했고, 왕과 고위 귀족의 고해 신부나 스승 역할을 하며 중앙에서도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했을 뿐만 아니라 당시 가톨릭 보편 제국을 추구했던 스페인 제국의 이데올로기에도 부합하는 면이 많아 탐욕스럽지만 카스티야 본토에서 뒷배경은 한미했던 콩키스타도르들이 함부로 싸울 수 없는 세력이었다. 창설 당시 부터 애초에 선교 방침을 세계선교로 잡으며 현지 문화 존중, 현지 언어 학습, 종교만 뺀 나머지 모태 문화의 보존을 추구한 예수회도 비슷했다.

미션에 나오는 주인공 선교사가 본국에서 배신자 취급 받아 토벌당하는 모습은 이러한 풍조가 약화되었을때의 모습이라 할 수 있고, 영화 배경이 한 100년만 빨랐어도 본국에서 배신자로 낙인찍히긴커녕 여전히 중세적 교권주의가 강했던 스페인에서 오히려 자기편 권력자들을 동원해 콩키스타도르들을 찍어 눌렀을 가능성도 충분했다. 실제 역사상 예수회는 1755년에 파라과이에서 추방되었으나, 불과 100여년전에는 예수회에게 훈련 받은 과라니족 4,000명이 왕실에게 무력사용 승인 받아서 포르투갈인(+투피족)의 침략을 격퇴했었다. 막상 원주민 강제노역 문제 자체는 집행능력 문제와 이권 관련된 이중성 때문에 크게 실효는 못봤지만 어쨋든 16세기 중반 수많은 폐혜를 초래한 엔코미엔다 실질적 원주민 노예제를 법적으로나마 해체한게 딱 이렇게 선교사, 지식인 세력이 자기편 권력자들을 동원해서 콩키스타도르들의 탐욕을 조진 사례에 해당한다. 근대 이전이라도 유럽 식민제국들이 딱히 착한건 아니지만 후대 노골적인 민족국가적 인종주의적 이데올로기 자체가 등장하지 않았고,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종교와 사회 계급으로 사람을 나누면 나누었지 (유사)생물학적 근대적 인종 관념은 희박했으며, 스페인 자체도 다른 유럽 국가들의 가열찬 비난과 안티질에 맞서 자국의 도덕성을 어필할 정치적 필요도 있었기 때문이다.

모든 선교사들이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수많은 선교사들, 특히 특정 교파에서 특정 장소로 파견하는 선교사의 경우 최소 평균, 사실상 그 이상의 교육을 받고, 적어도 기독교계 내에서는 인정받는 사람이 많아서, 정말 큰 사건 혹은 상황이 아니고서야 선교사를 함부로 취급하는 경우는 적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찾아보면 꽤 나오겠지만, 유럽의 몇백년에 걸친 유구한 역사 전체와[16] 비교하면 상당히 적었다.

물론 이렇게 좋은 선교사만 있던 것은 아니다. 16세기 말-17세기 초에 걸쳐 구 잉카 제국안데스산맥 창카인들이 살았던 아푸리막 일대에서 오지 특유의 고립성과 선교사로서 위치를 악용해 엄청난 강간, 약탈, 고문을 일삼았던 후안 바티스타 데 알바단 같은 동시대에서도 지탄받았던 인면수심의 선교사들도 분명히 있었지만, 일반적인 경우라고 할 수는 없다. 다른 한편으로 원주민 보호 행위를 하는 것이 선교에 도움이 된다는 이유로 원주민들이 박해받고 비참하게 가난해지기를 바란 선교사도 있다. 19세기에 마푸체 땅에서 활동하던 선교사 Fray Palavicino같은 자가 바로 그런 위선자였다.

3.2. 선교사와 근대 제국주의

18세기에 들어가면서 이런 중세 말-르네상스 유럽의 보편제국 이데올로기가 확실하게 한물 간 발상 취급 받으며, 국민 국가란 관념이 본격적으로 부상한 다음에야 예수회 탄압을 필두로 저런 세속적 팽창 없는 순수한 신앙의 제국주의란 사조가 사라질 수 있었고, 세속정부와 선교사의 커넥션이 이전보다 후자의 노골적인 어용화 방향으로 변질된다.

스페인은 18세기까지만 하더라도 분명 강력했지만 나폴레옹 전쟁으로 그로기 상태에 빠진다. 그리고 스페인, 포르투갈 자체에도 계몽주의의 바람과 여기의 어두운 면인 근대적 인종주의 이데올로기에 슬슬 영향을 받기 시작했으며, 완고하게 중세적 가톨릭 보편제국을 국시로 삼았던 압스부르고 왕조가 프랑스식 '근대화'를 표방한 보르본 왕조로 교체되면서 이런 '근대화'의 이름으로 저지른 더 악랄하고 차별적인 형태의 제국주의가 성장할 토양이 조성됐다. 결국 19세기로 넘아가면서 제국주의의 투톱이라면 영국과 프랑스라 할 수 있는데, 영국의 경우는 어디어디를 정복할지 중앙정부가 목표잡고 활동하는 계획적인 식민제국이 아니었고 애초에 본국에서도 성공회 특유의 참으로 애매모호하고 가톨릭, 칼뱅주의 급진 개신교 양측에선 회색분자 같은 성격 때문에 국가권력과의 유착도 더 약했다. 프랑스의 경우는 프랑스 혁명 때문에 가톨릭 교회와의 관계가 상당히 애매해진 상태였다. 프랑스의 경우는 그래도 국민 다수는 가톨릭 신자였고 교회는 사회적 존경을 받기는 하였으나, 혁명 뿐만이 아니라 교황청의 정책 때문에라도 '제국주의와 커넥션이 있는 선교'를 계획할 수 없는 상태였다.

가령 조선 선교로 유명한 파리외방전교회의 경우 그 태생부터가 세속정부와의 커넥션을 줄이려는 교황청의 의도에 있었기에 프랑스 정부에 지배당하는 입장이 아니었다. 가톨릭의 기존의 선교 방식은 스페인, 포르투갈이 '왕의 보호권(patronato real)'을 통해 선교사와 강한 커넥션을 유지하는 것이었는데, 세속이 선교에 깊숙이 개입하며 교황청의 계획대로 선교하는 데 걸림돌이 되자 선교권을 교황청이 되찾으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게 된다. 그리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 프랑스에 설립된 것이 파리외방전교회였고, 따라서 공식적으로든 실질적으로든 파리외방전교회는 프랑스 세속 정부와는 따로 놀게 된다. 이를 보여주는 면이 바로 자금인데, 초기에는 파리외방전교회도 왕에게 상당한 원조를 받아 운영했지만, 1822년 리옹에 전교회(Pontifical Society of the Propagation of the Faith)가 설립되면서 이 회를 통해 선교 자금을 전액 신자들의 헌금으로 충당하게 되었다.

구체적인 조선 선교 계획 역시도 프랑스 정부가 구상하여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사정이 이러할 때 외방전교회는 로마로부터 조선 포교지를 전담해 달라는 제의를 받았다. 외방전교회는 오랫동안 망설였으나 결국 한국진출을 수락하였다.
그러므로 외방전교회의 한국진출은 프랑스 국가의 지원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도 아니고, 외방전교회 자신이 원해서 된 것도 아니다.
-〈파리 外邦傳敎會의 韓國進出의 意義 - 한국진출을 전후한 시기의 국가와 교회의 관계를 중심으로 -〉, 천주교 서울대교구 최석우 안드레아 신부(몬시뇰)

물론 병인양요가 프랑스 선교사의 피해를 구실로 이루어지기는 했으며, 19세기 프랑스인들이 선교사를 사람A 정도로 대수롭지 않게 취급했을리야 없지만, 타지에서 피해를 입은 사람이 설령 선교사가 아니라 무역상이였더라도 구실을 잡고자 한다면 얼마든지 우겨댄게 이 시기 제국주의였으며(예: 아편전쟁), 최소한 프랑스 정부가 계획적으로 선교사를 보냈다거나 하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이 시에 서구 문명이 비서구 문명을 큰 격차로 앞서나가면서 비서구인이 인식하는 선교사 인상에 '오만하다'는 이미지가 끼게 된다. 16-17세기에 첫 기반을 닦고 비교적 꾸준하게 선교 활동이 이루어졌던 아메리카인도, 아프리카의 무역 조차지 근처 해안 지방 같은 곳들과 달리 아편 전쟁 이전까지만 해도 거대한 통일 중화제국의 공식 이념인 성리학이 지배했던 동아시아는 16-17세기에는 거의 대중 선교 없이 소수의 식자층, 상류층 상대로만 선교 작업이 진행되다 17세기 후반 대규모 선교사 추방으로 한번 명맥이 끊긴 후 다시 열강의 중국 침탈기에 다시 들어왔다. 처음엔 포르투갈, 스페인 왕의 보호권과 연관된 외부인으로 시작했다 하더라도 수백년간 선교 활동과 지방 공동체 형성 과정에 참여하면서 선교사와 개종자 커뮤니티가 비교적 유기적으로 지역 공동체의 일부로 녹아들 기회가 있었던 다른 지역들과 달리, 이미 고도의 발전되었고, 독점적인 정치 종교가 있었던 동아시아에서 선교사들은 서구 열강의 제국주의와 함께 갑자기 툭 튀어나와 자신들의 고유 종교, 문화, 신앙 체계를 미신이라 갈아 엎으려고 들고, 이걸 막으려고 관과 법에 호소하면 오히려 열강 공사관의 권력을 빌려 폭거를 일삼는 존재로 보였던 것이다.

특히 관의 통제력은 서양 '오랑캐'들에게 숱한 연패를 겪으며 바닥에 떨어졌고, 잇따라 비적, 도적 같은 집단들이 창궐했던 청나라 말기 중국의 경우 도적이나 강간범, 사기꾼 같은 인간들이 사고치고 치외법권을 누렸던 기독교 교회에 들어가 형식적으로 '개종'했다면 선교사들이 오히려 연줄과 정치 권력을 이용해 이들을 비호해주는 등 비리가 많았다. 당장 의화단의 본진 같은 지방인 산둥성 서부 지방만 하더라도 당시 오만하고 고압적인 선교 방식과 교단 내부 지나친 독일 민족주의의 영향으로 가톨릭 교회 내에서도 비판이 많았던 독일계 슈타일러 선교회가 횡포부린게 직접적으로 의화단의 반기독교적 성향에 큰 영향을 주었을 정도.[17]

한편 19세기 북아메리카나 호주, 뉴질랜드에 파견된 선교사들은 백인 정부의 지원을 받아 학교를 세우고 원주민들을 교육했는데, 이 교육이라는 것이 질도 낮을 뿐더러 원주민 문화를 탄압하고 백인들의 문화를 강제주입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진 데다가 선교사란 이름에 어울리지 않게 어린 원주민 학생들에게 강간을 저지르는 등 횡포가 심했다. 그래서 이 지역 원주민들은 백인 선교사들을 혐오한다. 대부분이 기독교인임에도 말이다.

4. 한국에서

한국 천주교는 1784년 이승훈 베드로베이징에서 세례성사를 받고 돌아와 이벽, 정약전 등과 더불어 신앙공동체를 형성해 이른바 가성직제도(假聖職制度)라 불리는 성사 집전을 했는데, 이는 서적을 통한 신앙의 수용과 실천과정에서 잘못 이해한 결과였다. 곧 이들은 자신들이 행하는 성사 집행에 문제가 있음을 파악하게 되었고, 청나라 베이징에 있는 선교사들에게 문의하였다. 그 결과 선교사들은 즉시 성사 집행의 행위를 금지하는 한편, 선교사의 파견을 약속하게 되였다. 베이징의 구베아 주교(de Giuvea, 揚士選)는 약속대로 선교사를 파견하였으며, 1794년 말 중국인 주문모 야고보 신부의 입국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1801년의 조선 조정의 천주교 박해(신유박해)로 주문모 신부의 순교를 위시하여, 교회의 지도급 인물들이 거의 모두 죽음을 당하였다. 박해를 피해 살아남은 신자들은 무너진 교회를 재건하기 위해 베이징 주교에게 선교사의 파견에 대한 지속적인 보장을 요청하였으며, 교황에게도 1811년[18]과 1825년경[19] 2차례의 서한을 보냈다. 조선 천주교 신자들의 이러한 노력에 교황청에서는 1831년 9월 9일 조선을 베이징교구에서 분리하여 독립된 교구로 설정하고, 조선교구파리외방전교회에 위임하여 지속적인 선교사의 파견을 보장하였다.

이에 따라 조선교구의 초대 교구장으로 임명된 브뤼기에르 주교는 조선 입국을 서둘렀으나, 그의 임지를 눈앞에 두고 중국 땅에서 병사하였다. 1837년에는 조선교구 제2대 교구장 앵베르 주교가 입국하였다. 이로써 베이징교구로부터 조선교구의 독립이 실현되었고, 동시에 조선교구는 파리 외방전교회와 대외적인 관계를 맺고, 지지를 얻게 됨으로써 그 장래가 완전히 보장되기에 이르렀다.

1886년 프랑스와의 조불수호통상조약 체결로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의 거주와 활동이 보장되어, 개항지를 중심으로 본당이 설정되고 한국천주교회가 본격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1888년에는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20]가, 1909년에는 베네딕토회[21]가 한국에 진출하여 선교를 했고, 현재까지 다양한 활동들을 해오고 있다.

개신교의 경우 조선 후기에 들어왔으며, 특히 한국의 계몽과 서양 문화 도입에 크게 기여하였는데, 대표적인 인물이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 선교사와 헨리 아펜젤러 선교사.

언더우드 선교사는 의사[22]이자 교육자이자 통역가이며 현 연세대학교의 전신인 연희전문학교와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병원인 광혜원을 세웠다.[23] 아펜젤러 선교사 역시 배재학당을 세운 인물로, 해당 항목을 참고하면 알겠지만 민족 정체성을 세우고 독립에 큰 기여를 한 위인들을 양성한 곳이다.[24] 메리 스크랜튼 선교사는 한국 최초의 여학교인 이화학당과 한국 최초의 여성병원인 보구녀관[25]을 설립했다. 헨리 아펜젤러의 딸 앨리스 아펜젤러[26]는 이화학당의 제6대 교장을 맡아, 이화학당 대학과를 이화여자전문학교로 개편하여 정동에서 신촌으로 이전하는 등 한국 여성교육을 위해 많은 일을 했다. 하지만 이들의 공헌이 컸음에도 불구하고 외국인이라는 점과 종교인이란 점 때문에 업적에 비해 크게 인정받지 못한다는 의견도 있다.

2010년대에 와서 개신교에서 미국브라질 다음으로 선교를 많이 보내는 나라가 다름아닌 대한민국이다. 2007년 샘물교회 사태 이후로는 웬만하면 강성 이슬람권 국가로는 선교사를 보내지 않는 경향이 있다. 대신 아프리카, 남미로 보내는 경우가 늘었다고 한다.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라면 몰라도 북아프리카는 전부 이슬람권이다. 미국, 호주나 뉴질랜드 같이 기독교 역사가 길고 잘사는 나라에도 수많은 한국 출신 개신교 선교사들이 있다.

최근 개신교 선교사들에 대한 부정적인 면모가 커져가고 있는데, 내외부의 사건이 시너지를 일으킨 결과다. 특히 샘물교회 선교단 아프가니스탄 피랍 사건 이후에는 개신교 선교에 대한 부정적 여론이 확산되었다.

종교의 자유는 반드시 지켜져야 하지만, 타종교에 대한 배타주의 성향이 극심하고 치안이 불안정한 국가까지 들어가 신분을 속이고 선교하는 통에 선교사 살해나 납치 등 여러 문제가 일어나는 것도 간과할 수 없다. 튀르키예[27]이란이나 여러 이슬람 지역에서 한국인 개신교 선교사가 적발되어 추방되고,[28] 덩달아 종교와 상관 없는 한국인까지도 추방되는 일이 연이어 벌어지고, 한국에 대한 혐오까지 커지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이는 해당 국가의 인권탄압과 만연한 크리스티아노포비아의 탓(주로 이슬람 극단주의)이지만, 위험지역이나 우범지대에 들어가는 개신교 선교사들의 책임도 없지 않기에 이를 비판적으로 보는 사람들도 상당하다. 문제는 이걸 비판이나 수정으로 막기 어렵다는 점. 종교의 자유 원칙 때문에 선교를 강제로 막을 수는 없다.

한국인 승려아프리카에서 을 차리고 지낸다든지 그 아프가니스탄에 승려들이 가서 자원봉사를 한 경우도 있다. 이들은 현지인과 갈등을 빚을 일을 최대한 피하면서 일하기에 언론으로 알려지지 못하지만 대신 말썽거리도 없다. 아프가니스탄에 간 비구니 2명이 탈레반 지역으로 목숨 걸고 의료봉사하러 가려다가, 한국 평화유지군 측이나 불교 승단에서도 "현지인들과 갈등이 더 커진다"고 만류해서 스스로 그만둔 일처럼[29] 이들은 적어도 현지인과 갈등을 알아서 피하기 때문이다.

5. 일본에서

일본에서는 아래 선교사들이 들어와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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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실존 인물

6.1. 가톨릭 선교사

6.2. 정교회 선교사

6.3. 성공회 선교사

6.4. 개신교 선교사

7. 여담

선교를 할 때 교리의 핵심이 되는 경전을 현지인들이 읽도록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기에 많은 선교사들은 현지의 언어를 배워 경전을 번역하곤 했는데, 만약 파견된 지역의 언어에 문자가 없다면 모국에서 사용하던 문자를 현지인들에게 가르치기도 했다.

그런데 간혹 기존 문자를 현지어에 알맞게 변형하거나, 완전히 새로운 문자를 창제하는 근성을 보인 이들도 있다. 이렇게 만들어진 문자들 중에는 시간이 지나면서 다른 문자 체계에 밀려 사장된 경우도 많지만 반대로 오늘날까지 전수되어 국가, 지역 및 민족 정체성의 일부로 자리잡은 경우도 있다. 대표적인 예시가 바로 키릴 문자.

또 다른 유머가 있다. 어느 선진국 출신 젊은 백인 선교사가 아프리카에서 선교를 하였다. 그는 원주민들의 생활 방식이 여간 맘에 들지 않아, 조그만 일상 하나하나까지 간섭하며 기독교를 강요하고 열성적으로 선교했다. 그럼에도 원주민들이 말을 듣지 않자, 지옥에서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을 그린 그림을 어디서 구해와 원주민들에게 보여 주며 기독교를 믿지 않으면 이렇게 지옥에 떨어져서 영원히 고통받는다!! 라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전보다 더 원주민들이 말을 듣지 않았다. 화가 난 선교사는 "당신들은 이 그림을 보고도 뭔가 느끼는 게 없소?" 라고 물었는데, 원주민들은 웃으면서 그 그림을 잘 보세요. 거기서 나온 사람들은 모두 당신과 똑같은 백인들이잖아요? 흑인은 한 명도 없지요. 그래서 우리는 안심하고 지금껏 해왔던 대로 사는 겁니다. 당신도 여기서 쓸데없는 시간 낭비하지 말고 당신 백인들이나 잘 선교하시는 게 좋을거 같은데요?라고 맞받아쳤고, 이에 당황한 선교사는 아무런 말도 못했다고 한다. 물론 이것은 어디까지나 유머로, 당대의 화가들이 흑인을 그림에 그려놓지 않은 것에 불과하다. 또한 다른 바리에이션 버전으로는, 선교사 말대로라면 우리 조상들이 모두 지옥에 있는거냐고 원주민이 묻자, 선교사가 종교를 알지 못했던 사람까지는 지옥에 가지 않는다고 대답한다. 그러자 우리를 지옥에 빠뜨리려고 종교를 알려주는거냐며 선교사에게 원주민이 내쫓는 걸로 끝. 여담으로 이 모순을[31] 나름대로 종교적으로 풀려고 시도했던 결과가 고성소나 림보다.

선교 등을 할 때에는 선교를 하려는 대상이 동질감을 느낄 수 있을만한 위치에 처하는 것이 중요하다. 당장 예수님부터 당대의 평범하게 가난한 서민의 가정에서 태어나셨다. 일반적인 사람들은 자신보다 나아 보이는 사람의 포교 활동을 보면 먹고 살만하니까 저런다고 생각하게 되는 경우가 많고, 자신보다 못해 보이는 사람의 포교 활동을 보면 현실 도피를 하다가 종교에 미쳤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즉, 가난한 나라 사람들에게 선교를 하기 위해선 그만큼 낮아져야 할 필요가 있고, 사회적으로 어느정도 지위가 있는 사람들에게 전도를 하기 위해서는 사회적으로 비슷한 위치에 있거나 높은 위치를 스스로 버리고 낮아진 사람[32]의 전도가 그 사람들에게 효과적일 수 있기 때문에 그런 사람들이 나설 필요가 있다.

8. 매체에서의 선교사




[1] 근대 올림픽의 창시자 피에르 드 쿠베르탱의 아버지로, 그림 속 뒤돌아보고 있는 아이가 피에르 드 쿠베르탱이다.[2] 파리외방전교회의 모토는 "떠나라, 그리고 돌아오지 마라"는 것이었다.#[3] 해외 가톨릭이나 개신교 선교.[4] 인도, 이슬람 문화권, 동남아시아, 이스라엘.[5] 중국, 북한.[6] 참고로 한인교회중국 국적인은 오지 못하며, 한인끼리만 예배를 드리는 이상 불법이 아니다. 당연히 목사들도 순도 100% 한인들로만 구성된다.[7] 그나마 최근엔 개방화+지하교회 크리스천들이 대단히 늘어나면서, 알음알음 쉬쉬하는 경우도 가끔 있다지만.[8] 종교 다양성을 감소시키고 전통 신앙을 파괴한다고 비판하는 사람도 존재한다. 신이교주의자들이 이런 주장을 하는 경우가 많다.[9] 케냐의 국부 조모 케냐타 曰, "선교사들이 처음 왔을 때 그들은 성경을 가지고 있었고 우리에게는 땅이 있었다. 그들은 우리에게 눈을 감고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우리가 눈을 떴을 때 땅은 그들의 것이 되어 있었고 성경은 우리 손에 들려 있었다.[10] 성경에는 모든 민족이 아담의 후손으로써 평등하며, 선교하여 기독교인이 되면 형제처럼 대해야 한다고 적혀있다. 문제는 이렇게 적혀 있는 만큼 그것을 행동으로 실천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11] 여기서 말하는 무역상은 아메리카 대륙 발견 초기에 원주민들에게 자국의 총기나 식량 등 현지에서는 구할 수 없는 물품들을 판매하는 중소규모의 상인들을 이르는 것이다. 동인도 회사처럼 식민지를 건설하려는 속셈으로 진출한 세력은 실제로 제국주의의 앞잡이가 맞다.[12] 이를 모티브로 차용한 영화가 미션이다.[13] 지역 토속신앙 믿는 성직자가 나서 봤자 이교도에 불과했다.[14] 스페인 선교사인 디에고 데 란다유카탄 견문록에선 마야 문자와 알파벳을 대조한 사례와 함께, 마야인의 이교 문서들을 모조리 없앴다는 내용이 실렸다.[15] 스페인의 예를 들자면 스페인 제국이 잘나가던 16세기-17세기 중반까진 스페인이란 나라 자체가 없었다. 통상적으로 스페인, 스페인이라 부르긴 했지만 법적으로는 여전히 카스티야 군주국과 아라곤 군주국의 연합이었고, 이 내부적으로도 카스티야 내엔 카스티야 왕국, 톨레도 왕국, 세비야 왕국, 그라나다 왕국, 아라곤의 경우 카탈루냐 공국, 발렌시아 왕국 등 중세적 자치권을 여전히 유지하던 많은 봉건 정치체의 연합이었다. 우리가 아는 의미에서 행정, 사법적으로 통합된 통일 스페인 왕국은 1716년에 탄생했다.[16] 더군나나 유럽은 그 시작부터 기독교와 함께했다.[17] Joseph W. Esherick, '의화단의 난의 기원', 3장 출처[18] 비오 7세[19] 레오 12세[20] 한국 천주교 최초의 수도회[21] 한국 천주교 최초의 남자 수도회[22] 그의 아내는 왕실의 어의였다.[23] 제중원-광혜원은 알렌이 주도한 것임.[24] 아펜젤러와 이승만 및 다른 독립운동가들 사이의 관계를 보면, 직접적인 독립운동 기여보다는 그들의 활동을 후원했다고 할 수 있다.[25]이화여자대학교 의료원의 전신[26] 한국에서 태어나 한국어가 유창했다.[27] 튀르키예에서는 종교의 자유가 헌법에 명시되어 있지만, 거리에서 알라천국 불신지옥하면 잡혀간다. 터키에서는 종교는 종교사무국(diyanet)의 허가를 받아야 하며 수니파 이슬람은 아예 국가가 관리한다. 한인 선교사들은 종교사무국의 승인을 받지 않고 대개 관광비자로 입국해 선교해서 추방되는 경우가 많다. 대놓고 기독교를 선교하러 왔다 하면 승인이 떨어질 리가 없기 때문이다.[28] 추방으로 끝나면 다행이고, 테러단체나 극단주의 집단에게 납치되면 목숨을 보장할 수 없다.[29] 유엔군 평화유지군 소속이던 채수문 중령이 증언했다.[30] 야구감독 배성서의 아들이다.[31] 로마에서도 베르길리우스나 고대의 영웅들이 예수가 태어나지 전에 태어나서 지옥에 떨어지는 것에 대한 고민을 했었다. 그래서 해결책으로 단테가 신곡에서 내놓은 것이, 천국에는 못들어가되 지옥에서는 제일 대접받는 천국이나 다름 없는 곳에 선인들과 영웅들이 간다는 것. 이건 단테의 견해로, 현대 주류 기독교와 가톨릭의 견해는 또 약간씩 차이가 있다.[32] 이런 사람은 사람들이 그 사람을 보고 현실 도피 내지 취미 생활로 포교를 한다고 생각하기 힘들기 때문에, 가장 폭넓은 범위의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다.[33] 일단 선교사 자격으로 사국에 발을 들이기는 했지만 그냥 사국으로 들어올 핑계가 필요할 뿐이었다. 오히려 나중에는 마녀라는 죄목으로 사형을 선고받았다가 신분을 세탁해야 했던 적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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