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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03 00:21:05

병인양요

파일:조선 어기 문장.svg 조선의 대외 전쟁·정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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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미양요 1871파일:미국 국기(1867-1877).svg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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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프랑스 국장.svg 프랑스의 대외 전쟁·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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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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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인양요
丙寅洋擾
Expédition française en Corée
French expedition to Korea
<colbgcolor=#C00D45,#01454F><colcolor=#f0ad73,white>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FranceGanghwa.jpg

병인양요를 묘사한 기록화
프랑스군 장교 및 종군 화가인 주베르가 기록했다.
파일:병인양요의 전개도.png

병인양요의 전개도
기간 1866년 (고종 3년) 10월 26일 ~ 12월 17일 (그레고리력)
장소 영종도, 강화해협 및 강화도, 문수산성[1]
원인 병인박해에 대한 프랑스의 항의
교전국 <rowcolor=black> 조선
(수세)
프랑스 제2제국
(공세)
주요 인물
지휘관

[[틀:깃발|
기 명칭
]][[틀:깃발|
깃발 명칭
]][[틀:깃발|]] 이용희[2]
[[틀:깃발|
기 명칭
]][[틀:깃발|
깃발 명칭
]][[양헌수|]]
[[틀:깃발|
기 명칭
]][[틀:깃발|
깃발 명칭
]][[이경하|]]
[[틀:깃발|
기 명칭
]][[틀:깃발|
깃발 명칭
]][[한성근|]]
지휘관

'''[[피에르귀스타브 로즈|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
]] 피에르귀스타브 로즈 (제독)
[[프랑스 제2제국|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
]] 올리비에 (대령)
[[프랑스 제2제국|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
]] 보쉐 (중령)'''
전력 조선군: 수백 명
대기병력: 10,000여 명[3]
프랑스군: 1,500여 명
프랑스 함선: 7척
- 전함: 1척
- 순양함: 2척
- 포함: 2척
- 통보함: 2척
피해 전사자: 4명
실종자: 7명[4]
부상자: 2명
문화재 다수 피탈, 방화 및 약탈[5]
전사자: 3명
부상자: 35명
결과 조선의 승리
영향 * 강화행궁, 장녕전 소실
* 외규장각 도서 및 왕실 물품 피탈
* 조선의 쇄국 정책 강화
1. 개요2. 배경3. 전개
3.1. 한강 탐색3.2. 영종진 공격3.3. 강화도 공격3.4. 결말
4. 의의
4.1. 한계4.2. 결론
5. 프랑스 측 관점
5.1. 조선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던 까닭
6. 영향7. 미디어8. 기타9. 관련 항목10. 관련 문서11.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흥선대원군이 실권자였던 시기인 고종 3년(1866년), 조선이 천주교 신자 8천여 명과 프랑스인 신부 9명을 처형한 병인박해에 대해 항의함을 명분으로 프랑스가 조선을 침략하면서 발발한 전쟁이다. 병인양요라는 명칭은 병인년에 양이(洋夷: 서양 오랑캐)가 일으킨 소요(騷擾)라는 뜻이다.

한국과 프랑스 사이에 일어난 최초이자 마지막 군사 접전이다. 6.25 전쟁 당시 제1세계 진영인 대한민국을 도와 북한에 맞서기 위해 한국에 군을 파병한 역사가 있지만 그것은 UN군의 일원으로서다. 대한민국 헌법 상 북한은 적성국이 아닌 반국가 단체일 뿐이므로 대한민국 내 보편화된 인식에 따르면 한국과 프랑스의 전투는 병인양요가 유일하다.[6]

2. 배경

프랑스 해군 극동 함대 사령관 로즈 제독병인박해의 생존자 리델 신부[7]가 알린 병인박해 소식에 화를 냈고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 정부 인사 일부와 로즈 제독은 조선에 항의하러 가기로 결정했다. 한편 청나라 공친왕은 조선과 프랑스가 전쟁할 것 같은 분위기로 흘러가자 일단은 중재에 나서 조선을 변호하기로 하고, 프랑스에게 일의 자초지종을 묻는 한편 조선에도 자문을 보내 이에 대해 경고했다.
방금 북경(北京) 예부(禮部)에서 보내온 자문(咨文)을 보니, '전에 프랑스 공사(公使)가 여러 차례 전교사(傳敎士)들이 조선에 나갈 수 있도록 호조(護照)[8] 발급을 청했는데, 총리아문(總理衙門)에서 습교(習敎)는 조선에서 원하는 바가 아니므로 호조를 발급하기가 곤란하다고 했다.

그런데 다시 프랑스 공사가 보내온 조회(照會)에 의하면, 고려 국왕[9]이 프랑스의 주교(主敎) 두 사람 및 전교사 아홉 사람과 본지(本地)의 습교인 남녀노소를 모두 살해했기 때문에(병인박해) 장수에게 군사를 일으키도록 명하여 며칠 안으로 일제히 소집할 것이라고 했다. 중국이 이미 이 일을 알았으므로 곤란해하며 중간에서 해결해 주지 않을 수 없는데, 과연 전교사(傳敎士)들을 살해한 사실이 있다고 하면 먼저 이치에 의거하여 조사할 것이요, 갑자기 병란의 단서를 만들 필요가 없을 듯하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실을 귀국에 알려 심사숙고하여 처리하게 하고자 한다.'고 했습니다.
물론 조선은 여기에 대해서 무시했다.

재미있는 건 이 당시 조선에서 활동했던 최양업[10] 토마스 신부가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르그레주아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 당시의 조선과 프랑스가 서로를 어떻게 인식했는지 자세하게 언급되어 있다는 것이다. 편지 전문은 다음과 같다.[11]
조선 조정이 세실 함장의 편지에 대한 회답을 라피에르 함장에게 보낸 것을 신부님들에게 소개합니다. 이것이 원문과 똑같은 것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으나 조선 조정이 다음과 같이 발표한 것은 사실입니다.

지난해에 조선 왕국의 영토인 외연도에서 어떤 주민이 외국 함선에서 건네준 편지라고 말하면서 우리 조정에 전해왔습니다. 우리 조정에서는 이 소식에 크게 놀라 편지를 펼쳐보니까 당신들 왕국의 세실 함장이 우리 대신들에게 보낸 편지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편지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담겨 있었습니다.

"우리 왕국의 고귀한 인물인 앵베르[12] 주교, 샤스탕 신부, 모방 신부 등 어른 세 분이 불행하게도 당신들에 의해 사형을 당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당신들이 무슨 이유로 그분들을 죽였는지를 묻고자 하여 온 것입니다.

당신들은 아마 당신 나라의 법률이 외국인의 무단 입국을 금하는데, 그 세 분이 이 법률을 어겼기 때문에 사형을 당한 것이라고 말씀하시겠지요. 그러나 중국인이나 만주인이나 일본인이 조선에 입국하는 일이 있으면 당신들은 감히 그들을 죽이지 못하고 각기 그들을 자기 본국으로 돌려보냅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우리 나라 사람 그 세 분에 대해서는 중국인이나 만주인이나 일본인처럼 대우하지 않았습니까?

만일 그분들이 살인이나 방화나 그와 비슷한 다른 죄악을 범했다면 그분들을 체포하여 처벌하는 것이 마땅한 일이었을 것이고, 이에 대하여 우리는 아무 말 하지 않고 묵인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들은 죄가 없었는데 당신들이 부당하게 사형에 처했으니 프랑스 국가에 대하여 중대한 모욕을 준 것입니다."

이런 내용의 편지를 세실 함장이 보내왔는데, 이 편지에 대하여 우리 조선 조정은 다음과 같이 분명한 대답을 했습니다.

"기해년(1839년)에, 어떤 외국인들이 체포되었습니다. 우리는 그들이 어느 때에 조선에 몰래 잠입했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들은 조선 사람과 같은 옷을 입고 조선말을 하며, 밤에만 나다니고 낮에는 집 안에서 꼼짝 않고 지내며, 얼굴을 변장하고 흔적을 감추면서 국가 반역자들과 불충한 자들과 흉악무도한 불량배들과 사귀고 어울려 다니므로 우리가 체포하여 문초했습니다. 그들이 관가에 끌려와서 심문을 받을 때 자기들의 이름이 한 사람은 나 베드로(모방 신부)이고 또 한 사람은 정 야고보(샤스탕 신부)라고 진술했습니다.

당신들의 함장의 편지에서 언급된 사람들이 혹시 이 사람들입니까?

심문을 받을 때에 그들은 자기들이 프랑스인들이라고 밝히지 않았습니다. 비록 그들이 당신들 왕국에서 온 사람들이라고 자백했더라도 우리는 지금에서야 당신들 나라에 대해서 듣게 되었으니 우리가 당신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알 수 있겠습니까? 그런즉 우리가 어찌 비밀 입국을 금하는 우리 법을 적용하지 아니할 수 있겠습니까?

그뿐 아니라 그들이 옷도 갈아입고 이름도 바꾸는 등 변장하면서 흉악한 무리와 어울려 다닌 행동은 그들이 우리 나라에 들어온 것이 악의에 의한 것이었음을 넉넉히 보여주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연히 파선을 당하여 우리 왕국에 상륙하게 된 자들과는 도무지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 왕국은 바다로 둘러싸여 있기 때문에 가끔 외국인들이 풍랑에 파선하여 우리 해안에 표류하는 일이 자주 있습니다. 그들이 낯선 사람이라도 죄가 없고 긴급한 사정이 있으면 우리는 그들을 구조해주고 입히고 먹이고 보호하며, 또 할 수 있으면 각각 자기 나라로 돌려보냅니다. 이것이 우리 왕국의 법률입니다. 그러므로 당신들이 말하는 저 세 사람들도 파선을 당해서 우리 왕국에 상륙했다면 왜 우리가 중국인이나 만주인이나 일본인과 달리 대우했겠습니까?

또 당신들 편지에 보면 왜 우리가 그들을 정당한 이유 없이 죽였는지 문책하고 또 당신들 나라에 중대한 모욕을 끼쳤다고 항의하는데, 그러한 말씀은 우리에게 매우 의외이고 듣기에 놀랍습니다.

서양과 조선이 수만 리 떨어져 있어서 서로 모르고, 편지로나 차편으로나 내왕과 상종이 없습니다. 그런즉 무슨 이유로 서로 원수가 될 짓을 할 것이며 또 무슨 까닭으로 당신들에게 모욕을 끼치겠습니까!

헤아려 보십시오. 만일 우리 나라 사람이 당신들의 나라에 몰래 들어가서 변장을 하고 악행을 하면 당신들은 그 사람을 가만히 내버려 두겠습니까? 만일 중국인이나 만주인이나 일본인이 당신들 나라 사람들처럼 우리 법을 거슬러 범행했다면 그들도 우리 법에 따라 처벌하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전에 어떤 중국인(주문모 야고보 신부)[13]이 변복하고 몰래 우리 왕국에 들어왔기 때문에 우리 법대로 잡아서 사형에 처한 일이 있습니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이에 대하여 아무런 항의도 없었습니다. 중국인들은 우리 국법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사형에 처한 사람들이 프랑스인이라는 것을 알았다 하더라도 그들의 행동은 살인자나 방화자들의 행동보다도 더 큰 죄가 되는 것이므로 그들을 용서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더구나 그들의 국적을 모르므로 우리 나라의 형법에 따라서 극형에 처해야만 했던 것입니다. 사정은 극히 분명하여 더 이상 다른 말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작년에 보낸 당신들의 편지에 대한 답장을 받으러 당신들이 오리라는 것을 우리는 짐작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당신들의 편지는 필요한 격식을 갖추지 않고 요식 절차 없이 전달된 것이므로 우리는 거기에 대한 답장을 할 의무는 없었습니다. 이 사건은 일개 도의 관찰사가 관여한 문제가 아닙니다. 그뿐 아니라 우리 왕국은 중국 황제에게 종속하여 있으므로 외국인들에 관한 문제는 중국 천자께 품의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중국 정부의 동의 없이 당신들이 어찌 회답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이런 일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대신들이 당신들에게 대답하더라도 그 내용은 이상에 말한 것과 다르지 아니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을 당신 나라 상관에게 보고하십시오. 그리고 사태의 진상을 설명하기 위하여 이와 같이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는 것을 의외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이상이 조선 조정에서 세실 함장에게 보낸 회답의 요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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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프랑스청나라의 중재 시도에 사실 병인박해는 조선만의 책임이 아니라 조선과 청나라의 공동 책임이라고 청나라까지 비난했다. 프랑스는 조선과 청나라의 사신 왕래가 활발한 점, 조선이 이미 선교사 처형 계획을 청나라에 통보한 상태였다는 점, 청나라가 조선의 입장을 비호하고 있다는 점, 청나라가 조선을 돕기 위한 원병을 만리장성에 대기시켰다는 점을 들며 청나라를 비난했다.

이렇듯 조선과 프랑스가 한치의 양보도 없는 긴장관계가 계속되자 청나라는 영국을 비롯한 여러 열강들과 회의를 하는 한편 중재를 거듭 시도해봤지만 프랑스는 이 모든 행위가 사기 행위이자 뻔뻔한 술책이라고 비난하며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벨로네 공사는 로즈 제독에게 극동 함대를 출발시켜 달라고 요청했다. 천주교 만주교구장인 베롤 주교도 조선에 가서 항의해야 한다고 부추겼다. 어쨌거나 로즈 제독은 벨로네 공사가 본국의 상의도 없이 일방적으로 선전포고를 했음을 두고 기밀누설이자 이적행위라고 비난하고, 조선은 프랑스와 외교 관계를 수립하지 않았으니 이번 일은 전적으로 병사인 자신의 소관이라고 주도권을 분명히 했다.

프랑스 외무성은 벨로네가 본국의 인가를 받지도 않고 일방적으로 조치했음을 크게 질책했고, 그의 모든 조치를 무효화했으며, 그에게 '앞으로 조선 문제에 개입하지 말라.'고 명령하여 그를 조선 출정에서 완전히 배제시켰다. 그리고 9월 7일 프랑스 해군성이 나폴레옹 3세의 공식 명령서를 전달함으로써 병인양요가 시작되었다. 프랑스 해군성은 로즈 제독에게 이번 원정이 국가적인 모험이니 매우 신중하게 행동하라고 주문했다. 프랑스 해군성은 "절대로 내륙을 치는 것은 위험하니 치지 말고, 안전한 정박지를 확보해서 그 주변을 시위함으로 조선에게 프랑스의 입장을 단호하게 보여주는 것"을 목표로 설정했고, "만약 상륙 이후 극동함대만으로 조선 토벌이 가능하다고 판단되면 그때 내륙으로 진공해도 좋다." 했다. 9월 18일 프랑스 극동함대가 측량을 위해 산둥 반도의 즈푸 항을 출발하여 조선으로 향했다.

한편 제너럴 셔먼호 사건의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9월 21일 부평으로 이양선이 들어섰다는 보고가 들어왔고, 이에 온 정부는 전쟁 분위기에 휩싸였다. 부호군 기정진이 이런 분위기에 부응하여 매우 단호한 척사를 주장하는 소를 올린다.

3. 전개

3.1. 한강 탐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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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해군 지휘관 로즈 제독
로즈 제독은 1839년 기해박해프랑스인 사제 3명이 조선에서 순교한 것을 항의하기 위해 출병했던 함대가 좌초당했던 전력을 참고하여, 조선으로 진입하는 안전한 해로를 확보하기 위한 작업에 착수했다. 기함 코르벳 프리모게 함, 포함 타르디프 함, 통보함 데루레드 함 등 3척이 양력 9월 18일에 즈푸 항구를 출발하여 한강 수로를 탐색하기 시작했다. 데루레드 함이 21일에 한강으로 진입하는 수로를 발견했고 프랑스 해군 함대는 영종 첨사의 항의를 모두 무시한 채 한강을 거슬러 한성으로 진공했다. 이에 조선 조정이 그 첩보를 듣고 황급히 작전 회의를 했다. 김포 군수 정기화가 서둘러 이들 함대의 목적에 대해 질의하자 펠릭스 클레르 리델 신부가 "조선을 구경하러 왔다." 하고 대답하며 식량 구입 의사를 전했고 이에 정기화는 돼지, 을 전달했다. 이 와중에 프리모게 함이 또 좌초되면서 청나라로 회항했고 남은 두 배 타르디프 함과 데루레드 함은 여유롭게 북상했다. 이들은 행주를 지나 양천에 이르렀고 양천 현령 윤수연도 이들 함대의 목적을 질의했다. 프랑스 함대는 김포에서처럼 똑같이 대답한 뒤 소, 닭, 달걀, 청태, 백채를 구입했으며 부평에서도 조선이 전달한 생필품들을 전달받았다.

펠릭스 클레르 리델 신부가 프랑스 함대가 도착하기만 하면 전국의 천주교도들이 몰려올 것이라 허풍을 떤 탓에 프랑스 함대는 많은 천주교도들이 몰려올 것이라 예상했지만, 한강 양안에는 수많은 구경꾼만 나타나서 함대를 구경했을 뿐 아무런 일도 없어 프랑스인들은 당황했다. 한편 회항한 프리모게 함은 영종 첨사 심영규가 파견한 병방 이우식에게 프랑스 무기들을 구경시켜 주었지만, 이우식이 질의한 프랑스 함대의 목적과 남은 함정들의 행선지에 대해선 밝히지 않았다. 프랑스 해군 장병들은 한양을 향해 계속 전진했고, 조선 측이 제공한 신선한 식료품과 질 좋은 생사, 호의적인 구경꾼들로 인해서 조선에 대한 호감을 품게 되었다. 로즈 제독은 조선이 자신들을 공격할 것이 틀림없었다고 장담했지만, 조선의 호의적인 태도에 놀랐다. 이는 신미양요 개전 직전에 흥선대원군이 미군 측에 보낸 편지에서도 알 수 있듯이 조선의 쇄국 정책이 “서양 세력과 통상하지는 않지만, 온 이들이 있다면 집주인의 정으로 구호품과 식량을 주어 돌려보낸다”라는 인도주의적인 경향을 띄었기에 가능했다.

도성까지 10여 리를 앞둔 지점이었다. 하지만 타르디프함이 좌초되면서 프랑스 함대의 전진은 중지되었다. 프랑스 함대는 9월 27일 한강 하류로 퇴각했다. 조선은 이용희 지휘 하의 병력 1천 명을 급파한 상태였으나 프랑스 함대의 철수로 더 이상의 교전은 없었다. 프랑스 함대는 퇴각하면서 대동강에서 제너럴 셔먼 호가 행패를 부리다 불타버렸다는 소식과 조선의 천주교 박해가 강화되었단 소식을 들었다. 펠릭스 클레르 리델 신부는 군함 1척을 남겨 조선의 박해를 저지하자고 제안했지만 로즈 제독은 이를 거부했다. 9월 30일 프랑스 함대는 정박지인 작약도를 떠났고 10월 3일에 즈푸항에 돌아왔다.

한편 조선 정부는 프랑스 함대의 진입을 수수방관한 지방관들을 처벌해야 한다고 분노하다가 프랑스 함대가 한양의 코앞까지 왔단 소식에 다시금 서두를수밖에 없었다. 백성들은 물론 관리들까지 혼비백산하여 식솔들을 데리고 피난길에 올랐다. 즉시 포도청에서 치안 유지를 위해 순찰을 강화했고 의병 궐기를 촉구했다. 프랑스 함대가 철수한 것이 확인된 이후 고종은 내탕금 3만 냥을 하사하며 전국의 수군 전력을 강화하라고 명령했고, 이 자금으로 노후화된 전선들을 수리했다.

3.2. 영종진 공격

파일:영종진성 태평루.jpg
영종진 태평루
로즈 제독은 강화도를 가는길에 영종도월미도, 제물포조선군의 주둔지임을 확인하고 강화도를 향한 출입로를 확보하기 위하여 당시 강화도 방어진 중 영종진을 무력화하기로 결정했다.

이후 2차례 탐색 및 영종진 성곽과 관아를 포격한 뒤 무력화 시켰다. 또한 영종도와 성곽을 점령하기 위해 무장한 선원을 영종도에 상륙시켰다. 전투로 인하여 영종도 일대가 무력화되었고 이 전투로 프랑스군을 막아내지 못함으로서 강화도로 가는길이 뚫리게 되었다.[14]

3.3. 강화도 공격

로즈 제독은 강화해협 봉쇄령(The Blockade of the Salée River[15])을 중국 정부 및 각국 공사관에 발송했다. 모든 준비를 마친 프랑스군은 먼저 조선으로 떠나기 전인 양력 10월 10일에는 주청 영국 해군 사령관 킹 제독이 직접 참관하여 그들의 훈련을 지켜보는 가운데 쿵둥다오(崆峒岛) 일대에서 해상 기동 훈련을 실시했다. 그 다음날인 10월 11일 프랑스 해군은 차푸항에서 군함 7척(전함 게리에르(Guerriere), 순양함 프리모게(primauguet)와 라플라스(Laplace), 포함 타르디프(Tardif), 르 브레통(Le brethon), 통보함 캉샹(Ken-Chan), 데룰레드(Deroulede)), 해군 육전대 800여 명, 장교 약간과 부사관수병 725명을 포 함하여 총 1,525명[16]을 이끌고 조선을 침공했다. 이 밖에 중국에서 영업하던 민간 증기선들을 보급선으로 고용했다.

10월 14일 프랑스 군함들이 팔미도에 나타났단 보고가 느닷없이 떨어졌고 이후 9월 7일 영종진이 프랑스군의 1시간에 걸친 포격으로 4시간 만에 맥없이 무너져내렸다. 이후 9월 8일 강화산성이 프랑스 해군의 함포 사격에 유린당했다. 강화 유수 이인기와 선봉중군 이용희는 맥없이 강화도를 내주고 달아났고 이에 조정은 그 둘을 처벌해야 한다고 길길이 날뛰었다. 흥선대원군이 의정부에 글을 보내 독려하고 조정은 훈련대장 이경하를 순무사로 삼고 이용희를 선봉장으로 보내 응전하게 했으나 성과가 없었다. 9월 11일에 이경하와 로즈 제독은 매우 살벌한 내용으로 편지를 교환했다.
프랑스 황제의 명을 받드는 전권대신(全權大臣)이 각초(各哨)의 용맹한 군사들을 거느리고 준절히 효유(曉諭)한다. 당신들 순무사(巡撫使)는 다 잘 알라.

나는 본 조정 황제의 명을 받고 우리나라 군사들과 백성들을 보호하려고 이곳에 있는 것이다. 올해에 이 나라에서 무고(無辜)하게 죽임을 당한 사람은 우리나라의 전교사(傳敎士)로 추중(推重)되던 사람이다. 너희는 어질지 못하게 불의(不義)로 그를 죽였으니 공벌(攻罰)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리고 전교사는 매우 어질고 의로운 사람이라 털끝만치도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을 텐데[17] 그를 죽였으니 천리를 어긴 것이다. 그러니 죄악은 세상 법에서 온전히 용서할 수 없는 것이다.

이번 프랑스 전권 대신은 불인불의(不仁不義)한 나라인 조선을 징벌하기로 정했으니 만약 귀를 기울여 명을 따르지 않으면 전혀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1. 세 사람이 관청을 부추겨 우리 나라 전교사를 살해한 것에 대해 엄정히 분별할 것이다.
1. 너희 관청에서는 조속히 전권(全權)을 지닌 관원이 조속히 이곳에 와서 직접 면대하여 영구적인 장정(章程)을 확정하라.

재해(災害)와 흉환(凶患)이 지금 가까이 닥쳤으니 너희가 재난을 피하려고 한다면 조속히 회답하고 명령을 받드는 것이 마땅하다. 만약 명령을 받들지 않으면 본 대신이 기일을 앞당겨 너희들에게 환난(患難)을 줄 것이니, 너희 백성들이 재난을 당하는 근원이 될 것이다. 그 때 가서 미리 말하지 않았다고 말하지는 말라.
기원 1866년 양력 10월 18일

이에 이경하는 다음과 같은 서신으로 답했다.
하늘의 이치를 거스르면 반드시 망하고, 국법(國法)을 어기면 반드시 죽임을 당한다. 하늘이 백성들을 세상에 내려 보냄에 이치로써 순(順)하게 하고, 나라의 봉강(封疆)을 나눔에 다스리어 지키게 하는 것이다. 순(順)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어질면서 해롭게 하지 않는 것이다. 수(守)라는 것은 무엇인가? 침범하는 자는 용서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거스르면 반드시 망하고 어기면 반드시 죽임을 당하는 까닭이다.

그러나 이웃나라와 사이좋게 지내며 멀리 떨어져 있는 나라에 너그럽게 대해주는 것은 예로부터 있었던 도(道)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더욱 너그럽게 대하여 이름도 알 수 없고, 도리(道里)도 알 수 없는 나라 사람들이 매번 우리나라 경내에 표류해오면, 수토지신(守土之臣)에게 명하여 영접하고 사정을 물어보면서 마치 오랜 우호관계를 수행하듯이 했다. 굶주렸다고 하면 먹을 것을 주고, 춥다고 하면 옷을 주었고, 병들었다고 말하면 약을 지어서 치료해 주기도 했으며, 돌아가겠다고 하면 식량까지 싸서 보내주었다. 이것은 우리나라가 대대로 지켜오는 법으로 지금까지 행해지고 있기 때문에, 온 천하가 우리를 일컬어 '예의지국(禮儀之國)'이라고 부르고 있다.

만약 우리 사람들을 인연(夤緣)하여 몰래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우리의 옷으로 바꿔입고 우리 말을 배워가지고 우리 백성과 나라를 속인다든지 우리의 예의와 풍속을 어지럽힌다면, 나라에 상법(常法)이 있는 만큼 발각되는 대로 반드시 죽인다. 이는 세상 모든 나라들의 한결같은 법인데 우리가 상법(常法)을 실행하는 것에 대해서 너희들이 무엇 때문에 성내는가? 처지를 바꾸어 생각하면 우리가 묻지도 않았는데도 지금 너희들이 이것을 트집 잡아 말하는 것은 이미 도리에 몹시 어긋나는 것이다.

일전에 너희 배가 우리 경강(京江)에 들어왔을 때는 배는 불과 2척이었고 사람도 1,000명이 못되었으니 만약 도륙(屠戮)하고자 했다면 어찌 방법이 없었겠는가?[18] 하지만 몰래 침입한 자들과는 구별되었으므로 멀리 떨어져 있는 나라 사람들을 대해주는 의리에서 차마 병력을 가하여 피해를 줄 수는 없었다. 그러므로 경내를 지나며 같은 것을 요구하면 그때마다 주었다. 작은 배가 왕래할 때에 말로써 물으면 먹을 것은 받으면서 돌아가라는 말은 따르지 않았으니 너희들이 우리를 배반한 것이지 우리가 어찌 너희를 배반한 것인가? 아직도 만족하지 못하고 갈수록 행패를 부려서 지금 우리 성부(城府)를 침범하고, 우리 백성들을 살해하고 재물과 가축을 약탈하는 행위가 한이 없으니 실로 하늘의 이치를 거스르고 나라 법을 어기는 자들로서 이보다 더 심한 자들은 없었다. 그러니 하늘이 이미 그들을 미워하고 사람들도 그들을 죽이려 했다.

너희들이 우리 나라에 전교(傳敎)를 행하려고 한다는데 이는 더욱 안 될 일이다. 수레와 서책이 같지 않으며 각기 숭상하는 것이 있으니 정사곡직(正邪曲直)에 대해서는 아예 거론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우리의 학문을 숭상하고 너희는 너희의 학문을 행하는 것은 사람마다 각기 자기 조상을 조상으로 섬기는 것과 같다. 그런데 어떻게 감히 남에게 자기 조상을 버리고 남의 조상을 조상으로 섬기라고 가르칠 수 있겠는가? 이것은 만약 죽음을 면할 수 있다면 하늘도 없다고 말할 수 있는 것과 같다.

우리는 너희를 은(殷) 탕(湯) 임금이 갈백(葛伯)에게 하듯이 대해 주었는데, 너희는 우리를 험윤(玁狁)이 주(周) 나라 선왕(宣王)를 배반하듯이 포악하게 대하고 있다. 그러니 우리가 지인지덕(至仁至德)하더라도 제멋대로 난동을 부리게 내버려둘 수는 없다. 그러므로 천만(千萬)의 대병(大兵)을 거느리고 지금 바닷가에 나와 하늘의 이치를 받들어 토벌의 뜻을 펴려고 한다. 우선 내일 이른 아침에 서로 대면하자는 약속을 급히 보내니 군사의 곡직(曲直)과 승패(勝敗)가 결정되리라. 너희들은 퇴각하여 달아나지 말고 머리를 숙이고 우리의 명령을 들어라.
병인년(1866) 10월 19일【술시(戌時)】 조선국 순무영(巡撫營)

한편 흥선대원군은 의정부에 군사들을 독려하는 격문을 내렸다.
사람이 죽고 나라가 망하는 것은 고금(古今)의 천지(天地)의 상경(常經)이다. 양이(洋夷)들이 여러 나라들을 침략한 것은 본래 있었지만 지금까지 몇백 년간 이적들은 감히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다가 몇 해 전 중국이 화친을 허락한 다음부터 제멋대로 날뛰는 것이 곱절이나 더해져서 도처에서 포악한 행동을 감행하여 모두 그들의 해를 입게 되었다.

오직 우리나라에 대해서만 감행하지 못한 것은 실로 옛 성인이 하늘에서 음덕으로 도와주기 때문이다. 그들이 이곳에 와서 알게 된 것은 우리의 예의(禮義)이고 우리가 의지할 바는 여러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로 굳게 뭉치는 것이다.

지금 상하(上下)의 사람들이 만약 의심하거나 겁을 먹는다면 모든 일은 와해(瓦解)되고 국사(國事)는 그르치게 된다. 나에게 마음 속으로 굳게 정한 세 가지 일이 있으니, 이 굳은 맹세를 알고 나의 뒤를 따르라.

첫째, 고통을 참지 못하고서 화친하는 것은 나라를 팔아먹는 행위이다.

둘째, 그들의 해악을 참지 못하고 교역을 허락한다면 이는 나라를 망하게 하는 행위이다.

셋째, 적들이 도성에 쳐들어왔다고 해서 만약 도성을 버리고 간다면 이는 나라를 위태롭게 하는 행위이다.

3.4. 결말

9월 18일엔 프랑스 측이 함정 2척과 해군 육전대원들로 한성근과 지홍관이 병사 150명과 함께 지키던 문수산성을 공격했다. 프랑스 해군이 빠르게 사격하여 전사자 3명[19]부상자 2명을 내었다. 조선 군대는 후퇴하고 프랑스 해군은 문수산성을 불살라버렸다. 조선군은 프랑스 해군에게 사격을 퍼부어 50~ 60명에게 피해를 주었다고 주장했으나[20], 조선군 스스로도 자신들이 총을 쏘자 프랑스 군인들이 그냥 엄폐했는지, 부상당했는지 아니면 사망했는지도 가늠하지 못했다. 이 패배로 사실상 강화도는 프랑스 해군의 손아귀에 들어갔고, 이시원과 이지원 형제가 분노하여 음독 자살하기도 했다.

이어 9월 22일에 광성진과 갑곶진을 점령해 불태웠고 조선 를 보이는 대로 포격해 격침시켰다. 조정은 급히 4천명의 지원군을 급파했지만 조선군은 한양으로 이어지는 길목만 사수하며 강화도에 들어갈 엄두도 내지 못했고 조정은 강화도를 무력하게 내준 장수들을 처벌하며 분풀이를 했다. 기고만장해진 프랑스 해군 육전대는 강화도 곳곳의 민가를 비롯한 주요 방어진지를 무너트리고 방화로 무력화 시켰다. 또한 용진진, 갑곳진, 초지진, 덕진진, 광성보, 철곳보, 월곳진을 비롯한 성곽과 요새, 돈대, 관청, 창고, 장대. 심지어 국왕이 머무는 강화행궁에도 불사르고 왕실 도서관인 외규장각의 약탈을 자행했다.

그런데 10월 3일 프랑스 해군은 장병 60명을 보내 정족산성을 정찰한 다음 점거하라고 병력을 보냈는데, 양헌수가 매복했다가 기습을 가해 수병을 동문에서 2명, 남문에서 4명 사살했다고 기록했다.[21] 조선군 전사자는 1명이었고 촌민들이 프랑스군 전사자를 40명 남짓 목격했다고 주장했다. 양헌수가 쓴 병인일기에 따르면 진시(8시)에서 미시(14시)까지 계속된 전투에 조선군의 탄약이 바닥났을 무렵 때마침 프랑스 해군이 물러났다고 한다. 계속된 승리에 방심한 프랑스 해군은 당나귀음식을 잔뜩 싣고 거의 나들이를 가듯이[22] 정족산성에 진입했는데, 이것이 패착이 되어 패하고 말았다. 결국 로즈 제독의 군대는 전투에서 패배한 뒤 조선이 협상할 의사가 없음만 확인하곤 10월 9일부터 축차적으로 퇴각했다. 10월 13일에 완전히 조선에서 철수하면서 조선과 프랑스의 전쟁은 예상을 벗어나 조선의 승리로 끝이 났다.

이때 프랑스 해군의 사기가 부족하진 않았다. 자신들 입장에선 대국 프랑스의 군대가 아시아 변방 깡촌의 소국에게 패배했다는 점에 참가했던 프랑스 해군 병졸들은 격분해 로즈 제독에게 설욕전을 하자고 청했으며, 프랑스 해군 육전대는 속국에서 여러 차례 쌓은 실전 경험으로 정예 부대로 꼽히는 편이었기에 프랑스 해군의 위신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복수에 적극적이었지만, 제독은 퇴각을 고집했다. 이후 로즈 제독은 "프랑스의 위신을 실추시켰다"며 가루가 되도록 욕을 먹었지만, 로즈 제독은 전쟁 이후 잘만 승진했다.

4. 의의

프랑스 원정함대의 목표를 좌절시켰다는 점에서 조선의 전략적 승리다.[23][24] 그렇기에 교과서에서도 조선이 프랑스를 물리쳤다는 점을 명백히 서술하고 있다.

조선은 이 승리로 당분간은 주변 이웃처럼 덩치만 큰 호구로 전락하는 신세는 면하고 국가적 자존심을 세울 수 있었다. 또한 조선 입장에선 부당한 서구의 요구나 불리한 조건의 통상을 차단함으로써 국익을 지킬 수 있었고, 한동안 외세의 큰 간섭없이 독립과 자주를 누릴 수 있었다. 멀리서 드리우던 그림자와 별개로 서구에 대한 공포와 압박에 흔들리던 당시 조선 입장에선 여러모로 대내외적인 안정에 도움을 준 승리였다.

4.1. 한계

저들의 화포는 사거리가 20리[25]나 되었고 포의 앙각에 따라 장단을 조절했다. (중략) 적의 총은 사거리가 500보에 화승 없이 쏘는데, 쏘는 속도도 귀신처럼 빨랐다.
양헌수, 병인일기
그러나 이 승리를 너무 과대 평가하는 것도 유의할 필요가 있다.

우선 프랑스군이 동원한 군대는 600여 명에 불과한[26] 원정함대였다. 프랑스가 소규모의 분견대만을 보낸 것은 넓게 퍼진 식민지 대비 부족한 원정함대로 공세종말점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로즈 제독이 극동함대만으론 조선정벌이 어렵다고 판단하고 국위 실추를 감수하고도 뱃머리를 과감히 돌린 것은 추가 증원을 기대하기 어려운 줄 알았기 때문이다.

전술적으로 봤을 때도 양헌수의 기습전으로 반격에 성공하기 전까진 패전을 거듭했다는 점에서 결코 완전한 승리라고 하긴 어렵다. 쇄국으로 일관하던 조선에게 처음으로 근대화된 서양 국가의 무력을 실감하게 해 준 사건이었다.

당시 프랑스군의 소총은 전장식 강선총인 미니에 라이플이었는데, 연사력은 조선의 화승총보다 조금 나은 정도였지만 조선군의 납탄보다 발전한 미니에 탄을 사용해 사거리는 4배에 달했고 명중률 및 살상력도 훨씬 높았으며, 장전 방식도 매치락보다 발전된 퍼커션 캡 방식이었기에 훨씬 안정적이었다. 또한 조준사격이 가능하고 위력도 강한 서양식 대포는 조선군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이러한 프랑스군의 화력에 강화 수비군은 물론 중앙에서 파견한 순무영 병력까지 일거에 무너지자 조정은 청나라를 패배시킨 서양 열강의 힘을 간접적으로나마 실감하게 되었다. 때문에 병인양요 이후 흥선대원군은 서양 군대에 맞서기 위해 군사력 증강에 더욱 열을 올렸다.

간혹 사극에서는 프랑스군이 큰 피해를 입고 무너진 것처럼 묘사되기도 하는데, 실제론 그런 일방적인 승리는 아니었다. 오히려 불과 수백명의 프랑스군에게 문수산성이 함락되고 성 내 누각과 관아의 건물들 그리고 강화행궁이 모조리 불타버리는 등 재산피해가 심했다. 다만 병력 수백 명이 섬멸되고 지휘관 어재연까지 전사한 신미양요와는 달리 병인양요에서는 조선군도 그다지 큰 인명피해는 없었고 전사자도 5명 정도를 넘지 않았다고 보고됐다.[27]

즉, 양측 다 인명피해는 그렇게 크지 않았다. 조선군의 정확한 피해 집계는 전해지지 않으나 확실한 사상자는 14명 정도에 부상자도 상당했을 듯하다. 프랑스 해군의 피해도 정확하진 않은데 양헌수는 최소 수병 6명을 죽였고 퇴각하는 프랑스 해군을 구경한 촌민들이 죽은 프랑스 병졸들을 40명은 족히 보았다고 증언한다며 보고했다. 하지만 로즈 제독은 문수산성에선 전사자 3명, 정족산성에선 전사자는 없고 부상자는 30여 명이라고 보고했다.[28]

4.2. 결론

결론적으로 동남아는 물론 인구와 국력도 압도적이던 중국조차 아편전쟁 등에서 추풍낙엽으로 털려나가던 당시 극동정세에서, 서구 열강에서 잘 나가기로 손에 꼽던 프랑스를 전근대적 무기와 체제로 저지하여 전략적 승리를 거두었음은 의미가 결코 작지 않다.[29] 그러나 조선은 명확한 기술격차에도 불구하고 지정학적 위치현장 지휘관의 전술에 힘입어 신승한 것임을 자각하지 못하며 서양세력을 기존의 병기와 현재의 체제로도 막아낼 수 있다고 오판했다.[30] 이로 인해 조선은 개혁개방의 적시를 놓치고 결국 망국의 길로 들어섰다는 점에서 그 한계가 있다.

5. 프랑스 측 관점

병인양요를 조선의 승리라고 서술하는 것에 대해 거부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이 있는데, 정작 전투를 치른 프랑스군 또한 이를 자신들의 패배로 여겼음을 유념해 볼 필요가 있다.

유명한 쥐베르의 글에서는 별로 드러나지 않지만 당시 베이징 주재 프랑스 공사관 의사였던 마르탱이 1883년에 잡지에 기고한 글을 보면 병인양요를 명백히 패배로 규정했다. 펠릭스 클레르 리델신부는 프랑스 함대의 철수를 야반 도주라고 불렀고, 원정함대의 장병들이 원통함을 감추지 못했다고 기록했다. 조선의 승전이 가졌던 의의나 가치의 정도에 대해서는 논할 수 있겠으나, 조선이 승전했다는 것 자체는 양국이 인정한 사실이므로 부정할 수 없다. 영국 잡지인 이코노미스트에서도 1870년 9월 24일 기사에서 "프랑스가 조선에서 겪은 패배는 서구 열강들의 약화의 증거이다."라고 서술했다.

로즈 제독이 철수를 계획한 이유도 정족산성을 점령하려면 최소한 보병 500명과 포대 1개가 필요한데, 원정함대에서 이들을 더 조달할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즉 공세종말점에 도달해서 더 이상 작전이 불가능하다고 본 것이다. 거기에 프랑스가 조선의 개항을 관철시키지 못했고 약탈품 외엔 얻은 것이 없으니 결국은 전략적인 패배. 실제 접전에서는 조선을 정복할 수 있지만, 그런다고 해서 본인들이 이루려는 목적을 이룰 수는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로 인해 동아시아에서 전반적인 서양에 대한 반감이 커졌으며 1870년에 일어난 중국의 텐진 교안도 이 사건으로 인해 촉발된 것이라고 분석하고 있다. 이 이야기는 H.쥐베르라는 프랑스 군인의 종군일기에 나오는데, 당시 프랑스군의 실패가 프랑스인들이 고려인들에게 패배하여 도망갔다, 프랑스인들은 이제 무적이 아니다!라는 소문으로 청나라 전국에 급속도로 퍼져나갔으며, 청국의 고관들은 물론이고 일반 백성들까지 이를 통쾌해하며 조선에게 당한 프랑스의 패배를 과장해서 소문을 퍼뜨렸고, 이런 분위기에 큰 자극을 받아 일어난 것이 1870년 폭동의 시발점이라 해석한다.

5.1. 조선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던 까닭

프랑스가 병력의 운용 한계로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다는 주장도 있으나, 군사적 능력보단 이를 동원할 정치적 의지 부족이 더 큰 원인이었다.

당시만 해도 프랑스군대영제국, 러시아 제국과 함께 제국주의 열강 중 가장 강한 무력을 가진 3개국 중 하나였다. 프랑스는 이 당시 바다와 접한 땅을 영국과 다 갈라 먹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의 전성기였다.[31] 무장이나 훈련도 면에서도 마찬가지였으며, 특히 프랑스 해군 육전대는 여러 속국에서 벌어진 제국주의 전쟁 때문에 실전 경험도 무척 많았다.

프랑스가 조선을 빨리 포기한 이유는 군사적 좌절과 더불어 정세적인 것으로, 당시 속국화에 힘을 쓰던 인도차이나 방면을 더 중시했기 때문이다. 프랑스 원정대의 주력은 베트남 뿐만 아니라 캄보디아 방면 등의 인도차이나에서 원정 중이었고, 당시 베트남을 지배하던 응우옌 왕조의 산발적인 저항에 부딪혔기 때문에 조선에 다시 전장을 벌이기가 힘들었다. 거기다 당시 나폴레옹 3세는 이탈리아 통일전쟁에도 개입하고 멕시코 제2제국을 세우는 등 전 세계적으로 여러 사업을 벌였는데 결과가 신통치 않아 조선에 개입하기가 더 어려운 상황이었다. 또한 이 시기 프랑스의 주적이었던 프로이센이 불과 4달전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에서 승리하여 북독일을 통일한 시점으로 국경도 안정되지 않은 상태였다. 결국 이러한 사정은 나아지지 않고 4년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나폴레옹 3세가 빌헬름1세의 포로가 되고 에투알 개선문을 프로이센군이 통과하는 굴욕을 당하게 된다.

프랑스는 1880년대가 돼서야 인도차이나를 속국화하여 마무리 지었고, 베트남과 캄보디아의 저항세력뿐만 아니라 베트남을 자기 영역으로 삼은 청나라와도 전쟁(청불전쟁)을 치러야 했을 정도였다.[32] 마찬가지로 남북 전쟁이 끝난 직후의 미국도 전후 복구와 서부 개발에 정신이 팔려 있었기 때문에 신미양요 이후로 딱히 조선에 진출하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아편전쟁으로 중국으로부터 홍콩을 할양받은 영국조차도 1870년대에 아프가니스탄 및 인도의 토착세력의 반란으로 서남아시아에 신경 쓰는 형편이라 조선에 개입하기가 힘들었다.

즉, 당시 서구열강들이 조선에 아예 무관심하지야 않았으나 그렇다고 크게 관심을 갖지도 않았다. 적당히 툭 쳐서 넘어가면 좋고 안 되면 말고 정도였고, 천주교 박해라는 빌미가 잡히자 원정함대를 보내 간을 본 것이다. 그리고 생각보다 저항이 완강하고 쉽지 않음을 느끼자 곧바로 포기했는데, 조선을 먹자고 대대적인 군사력을 투사하기엔 이득이 불명확하고 다른 손 볼 곳도 많았기 때문이였다. 이런 열강의 공백 상황을 노려 조선을 포함외교로 강제 개항한 세력은 근대화를 막 시작하던 일본이었다.

6. 영향

프랑스 측 지휘관 피에르 - 귀스타브 로즈 제독은, 이 전투의 패배에도 불구하고 해군소장(contre-admiral : 영미의 rear-admiral에 해당)에서 중장으로 승진하여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도 참가했으며, 1875년에는 지중해 분함대(Escadre de la Méditerranée) 사령관을 맡았다. 로즈가 중장으로 승진한 것이나 지중해 분함대의 위상을 따져본다면, 일각에서 주장하는 좌천설은 사실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대서양 함대에 비하면 좀 한직이지만, 그래도 프랑스 해군의 규모를 생각하면 나쁜 자리까진 아니다.

흥선 대원군은 이 사건을 계기로 쇄국 정책에 더더욱 박차를 가했다. 그리고 조선의 개국은 더욱 더 멀어졌다. 그리고 약탈해 간 각종 문화재 및 서적들은 서양의 동양 역사 연구에 귀중한 사료가 되었다.

1993년 방한했던 프랑수아 미테랑 프랑스 대통령이 도서관 사서들의 반대[33]를 누르고[34] 반환을 약속하기도 했다.

딱 한 권 정상 회담 자리에서 김영삼 대통령에게 직접 반환했다. 또한 이 자리에서 외규장각 도서의 영구 대여 방식[35]으로 돌려주기로 결정했다. 한국으로의 반환이 양국 정상 간에 합의되었고, 이를 시작으로 외규장각 도서 전체의 반환에 대한 세부 협상이 시작되었으나 프랑스 측이 외규장각과 한국의 다른 문화재를 맞교환하자는 요구를 했고, 당연히 한국 측에선 들어줄 수 없는 요구인지라 김대중 정부 당시 비준 거부 및 협상 중단 선언으로 외규장각 도서는 돌아오지 못했다.

노무현 대통령 때 프랑스 측에 협상 재개를 요청해 협상이 다시 시작되었고, 후임인 이명박 대통령은 프랑스와 교섭에 성공해 G20 회의 기간 중 외규장각 서적들을 프랑스로부터 돌려받았다. 프랑스 국내법상 '반환'이라는 표현은 사용하지 못했으며, '영구 임대' 표현은 프랑스 국립도서관의 반대로 사용하지 못했다. 대신 '5년마다 자동 갱신 임대' 형식으로 사실상 영구히 돌려받았다. 이에 '실리를 택한 것이다.', '소유권을 명확하게 우리 쪽으로 돌리지 못했다.' 하는 논쟁이 일었다. 어찌되었든 외규장각 서적들은 100여 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왔다.

한편 병인양요로 인해 조선에서는 서양의 침략에 대한 공포심이 크게 확산되었다. 강화도가 프랑스 군대에게 함락당하자, 이 소식을 듣고 아편전쟁 때처럼 프랑스 군대가 도성에까지 쳐들어올까봐 겁에 질린 한양의 백성들이 앞다투어 산속으로 피난을 떠나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공포와 불안이 크게 번진 사회 분위기를 교묘하게 이용하여 세상을 뒤엎으려는 엉뚱한 야심가도 나타났으니, 바로 이필제(李弼濟 1825-71)였다.[36] 이필제는 병인양요가 터지고 조선 사회에 서양에 대한 공포심이 퍼지자, 이를 악용하여 "앞으로 조선이 서양에 망하지 않으려면, 먼저 나를 따라 이 나라 조선을 뒤엎고 새로운 조정을 만든 다음, 청나라와 일본을 정복하여 힘을 키우고, 그 다음 서양 나라들과 맞서 싸워야 한다."라는 주장을 퍼뜨리며 사람들을 선동하여 '이필제의 난(1869~71)'을 일으켰다. 이필제의 난은 1869년부터 1871년까지 2년 동안 5번이나 계속 발생할 만큼, 조선 조정의 골칫거리가 되었다.[37]

조선군의 경우 신미양요와 달리 전멸은 피하고 의의로 프랑스군에게 나름의 사상자를 안겨주었는데 전문가들은 조선군의 근접사격전술이 프랑스군에게 나름의 사상자를 안겨주었다고 보고있으며 조선군은 주력인 화승총의 사거리가 프랑스가 보유한 라이플에 비하면 짧다는 것을 알았기에 성벽에 매복해있다가 프랑스군 병력이 화승총의 사정거리안에 들어오면 일제사격을 가하는 근접사격술을 선보였다.

그결과 문수산성 전투에서 한성근이 지휘하는 조선군은 프랑스군에게 27명의 사상자를 안겼고 양헌수가 지휘하는 조선군 사수 120명은 동문과 남문에서 프랑스군 6명을 사살하고 35명에게 부상을 입히는 전과를 세웠는데 정작 신미양요에서는 이러한 조선군의 근접사격전술이 퇴화하면서 미군에게 타격을 입히지 못했는데 실제로 대모산에서 조선군 사수 200명이 광성보로 향하는 미군에게 집중사격을 가했지만 미군이 사거리 범위밖에 있었기 때문에 미군은 이를 무시하고 그냥 광성보와 손돌목돈대를 공격하면서 조선군 350명이 전멸하는 사태가 벌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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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현 김포시 월곶면 성동리[2] 충무공 이순신의 9대손이다.[3] 실제 전투에 투입된 건 수백 명. 나머지는 프랑스군이 한강을 거슬러 올라오는 걸 막으려고 대기하고 있었다.[4] 기록에선 실종이 아니고 도주로 '추정'된다고 기록돼 있다.[5] 문수산성, 정족산성 전투 외 전투는 집계되지 않음[6] 1847년(헌종 13년) 기해박해를 이유로 프랑스가 군사 700명을 조선에 보낸 역사가 있으나 프랑스 군함이 암초에 걸려 좌초되어 전투로 이어지진 않았다.[7] 천주교 서울대교구 제6대 교구장[8] 오늘날의 여권에 해당.[9] 이때까지 서양은 조선을 고려, 즉 코리아라고 불렀다. 지금도 마찬가지고.[10] 2번째 한국인 가톨릭 사제. 최초의 한국인 사제인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가 사제서품 1년 만에 순교해 '피의 순교자'라 불리는 반면, 사제가 된 후 약 12년간 박해의 칼날 아래 활동하다 병사한 최양업 토마스 신부는 '땀의 순교자'라 불린다.[11] 병인양요 직전은 아니고, 1851년에 보낸 편지이다. 이 편지에서 언급하는 박해는 병인박해가 아닌 기해박해 등 그 이전의 박해를 말한다.[12] 천주교 서울대교구 제2대 교구장[13] 한국 천주교에서 활동한 최초의 성직자. 1801년 신유박해 때 순교했으며,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 방한 때 시복되었다. 한국 124위 순교복자 중 하나.[14] 이후 신미양요운요호 사건 당시에도 영종진은 강화도 - 월미도 방어선의 중심이었다.[15] 'salée'는 '염분을 함유한, 짭짤한'이라는 뜻을 지닌 불어 형용사 'salé'의 여성형으로 영어의 'salty'에 해당한다. 프랑스인들이 측량 당시 이곳을 소금기가 많은 강으로 여겼는지 이런 이름을 붙였고, 이것이 일본을 거쳐 '염하(鹽河)'라는 그럴 듯한 한자어로 옮겨진 적도 있다. #, #[16] 이에 대해서는 자료가 확실치 않으나 보통 1,500여 명이라고 하므로 여기에 기재한다.[17] 가톨릭을 금지하는 조선에서 가톨릭을 전도한 자체가 조선의 실정법을 어긴 것이긴 한데 기본적으로 조선의 실정법을 인정했으면 애초에 침공도 안 했다.[18] 경강(京江)은 한강 일대를 지칭하는 말로, 앞서 한강 수로 탐색을 위해 파견된 프랑스 극동 함대 별동대가 한강 상류로 항진하다 타르디프함이 좌초되어 철수한 사건을 말한다.[19] 최장근(崔長根)ㆍ김달성(金達城)ㆍ오준성(吳俊成)[20] 프랑스 측 기록엔 이 전투에서 사망자가 3명 발생했다고 쓰였다. 여기서 조선군은 뒤에 있는 정족산성 전투와 마찬가지로 성벽 뒤에 매복했다가 적이 아무도 없는 줄 알고 착각하고 들어왔을 때 일제히 사격을 퍼붓는 단순한 전략을 사용했다. 이토록 단순하고 똑같은 전술에 2번이나 당할 정도로 당시 프랑스 해군은 어리석었고 조선군을 매우 만만히 봤다.[21] 프랑스 외 여러 서양열강들의 기록엔 프랑스 측 부상자는 35명이라고 쓰였다. 조선과 프랑스 양측 다 서로 자존심 싸움 때문에 자군의 피해기록을 약간 축소하거나 전과를 약간 과장했던 듯하다.[22] 그 때문에 야포를 챙겨 가지 않았다. 이 링크로 가서 정족산성 전투도를 보면 알겠지만, 공격 측이 성문을 공격하기 몹시 불리한 구조이다. 야사에 따르면 프랑스 해군이 버리고 간 와인과 음식은 조선군이 챙겨서 먹었다고 한다.[23] 후술하듯 프랑스 내부에서도 패배라고 이야기한다. 전쟁의 승패는 단순히 피해 규모나 전세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참가 주체의 목표 달성 여부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극단적인 예시로는 만약 병인양요에서 프랑스의 목적이 개항이 아니라 문화재 약탈이었다면 같은 결과라도 프랑스의 승전이라고 말할 수 있다.[24] 예를 들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은 바르바로사 작전에서 소련군에게 괴멸적인 타격을 주었으나 정작 점령 목표 도시인 레닌그라드와 모스크바 함락이라는 전략적 목표 달성에는 실패했다.[25] 약 7.85 km. 조선군이 사용하기도 했던 홍이포의 사거리가 약 4 km밖에 되지 않았으니 상대가 되지 못했던 것은 당연하다. 또한 홍이포는 조선군의 주력 화포가 아니었고, 보다 소형인 4호와 5호 불랑기포를 주력으로 사용했다.[26] 물론 프랑스와 맞선 조선군도 실제론 거의 대략 천여 명밖에 안 됐으니 교전비는 얼추 비슷하다.[27] 이는 프랑스군이 조선군을 만만히 보고 야포도 없이 진입했고 조선군도 정면 화력대결은 피했기 때문이다. 이들과 달리 제대로 화력을 퍼붓는 미군에 결사항전한 광성보는 글자 그대로 초토화되었다.[28] 촌민들이 총에 맞고 쓰러진 사람을 모두 죽었다고 간주했다면 얼추 증언이 맞아 떨어진다. 당시 화승총의 원형 탄알은 생각보다 살상력이 떨어졌고 외과적 조치만 잘 이뤄진다면 후유증이 남고 불구가 될지언정 생환율은 생각보다 높았다. 미니에 탄이 등장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총에 맞으면 웬만하면 죽는 시대가 도래했다.[29] 당시는 물론 현재에도 존재하는 서구를 우월하게, 아시아를 저열하게 보는 차별적 시선에 일침을 가했다는 역사적 의의와, 당시 조선이 생각보다 만만하지 않다는 인식을 갖게 했다는 국제정치적 의미가 있다. 다만 후자는 조선이 이런 외교적 이득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해 의미가 퇴색됐다.[30] 물론 당시 조선 조정도 서양과 조선의 기술격차를 인식했다. 당장 앞서 인용된 양헌수도 병인일기에서 직접 교전하며 체감한 무기의 성능차를 구체적으로 열거했다. 그래서 나름 군사무기 개발을 추진해 방탄복포차, 수뢰포, 심지어는 초기 철갑선 수준의 목탄증기갑함까지 개발했다. 그러나 하루가 멀다 하고 신무기가 쏟아져 나오는 서양과 기술격차를 좁힐 수는 없었다. 이는 격차의 원인이 과학지식과 산업기반, 그리고 국가체제 효율의 차이라는 점을 애써 무시하고, 당장의 땜질식 무기개발에만 치중했기 때문이다. 조선은 한참 후에야 근본적 문제를 인식하고 유학단을 파견하며 개혁에 나섰으나 내부 혼란과 외세 개입에 좌절되고 말았다.[31] 물론 이때쯤이면 미국이 경제적으로는 영국을 제외한 유럽 나라들을 죄다 추월했고 프랑스는 남북전쟁을 틈타 멕시코에 기웃거리다 내전 끝낸 미국이 아메리카에서 나가라 하니 부들거리며 나갔으며 5년 뒤에는 북독일 연방에게 제대로 털려 열강으로서 상대적인 위상은 차츰 내려갔지만, 그럼에도 세계 5대 부국에 들어가는 대국에다 제국주의 열강으로서 속국 점령에서는 영국과 함께 단연 압도적이었다. 사실상 두 국가가 입맛대로 선을 그어놓고 속국을 죄다 챙기고 독일이나 이탈리아, 벨기에와 네덜란드 등이 남은 부스러기들을 가져갔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였다. 아프리카는 21세기에도 프랑스어 사용자가 많고, 프랑스는 자원채굴 등 강한 영향력을 행사한다.[32] 프랑스군은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직후라서 사정이 말이 아니어서 청나라에 유리하게 끝났다.[33] 골때리는 건 이 당시 사서들 중에는 고문서를 복제해서 원본을 밀반출한 사례도 있었다는 것. 나중에 프랑스 경찰에 체포되면서 알려졌는데, 복제하는 과정에서 훼손된 고문서도 많았다고 한다. 그 때문에 이들이 반대한 이유가 단순히 문화재 보호 때문이 아니라 자신들의 범죄행각을 감추려는 목적이 아닌가 의심받기도 했다.[34] 우리는 일반적으로, '외규장각 도서 반환 약속 이후에 사서들의 반대가 불거졌고 프랑스 정부가 그것을 빌미로 약속을 엎었다'고 알고 있으나 이것은 사실과 다름이 한국 측 협상 단장 등의 증언을 통해 밝혀졌다. 사서들의 반대는 미테랑 대통령의 반환 약속 전에 있었던 일이다.[35] 대여라는 명칭에 피약탈국으로서 아니꼬움이 폭발하지만, 현실적인 시각을 가질 필요가 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미국 / 일본 등의 다른 국가들과 성사되었던 약탈 문화재 환수 사례들과 비교해 보면 프랑스 정부가 제시한 '영구 대여'는 압도적으로 좋은 조건이다. 또한, 국제적으로도 전쟁을 통해 빼앗은 문화재 등은 별도의 조약으로 국가간 약속을 하지 않으면 반환 의무가 없다.[36] 본래는 선달(무과급제생)이었는데, 무과에 급제를 했어도 벼슬 자리가 오지 않고 무기한 대기발령상태라 사실상 실업자였다. 요즘 말로 표현하면, 고학력 백수였던 셈. 그래서 이필제는 평소부터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 세상에 불만이 많았고, 이런 세상을 뒤엎어야 한다는 말을 1850년 무렵부터 계속 하고 다녔다. 그런 이필제한테 병인양요와 그로 인한 공포와 혼란은 적절한 기회였다.[37] 출처: 실업이 바꾼 세계사/ 도현신 지음/ 서해문집/ 2017년 11월 25일 발행/ 167~173쪽[38] 그나마 프랑스 본토가 아닌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주둔 육군 복제를 참고해 만들었으니, 방향은 잘못 잡았을지언정 스태프들이 꽤 고증을 지켜 보려고 노력은 했다고 볼 수 있다. 제작진이 상륙 병력을 해군 육전대가 아니라 육군으로 잘못 알고 고증한 것일 가능성도 있다.[39] 물론 타이밍 맞게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이 터지며 본국의 정규군 대신 인도차이나 식민지군을 파병하는 선에 그친다.[40] 위에서도 나와있듯이 대포 대신 가져 왔으며, 조선 병사들이 그걸로 승리 만찬을 즐겼다는 야사가 있다[41] 김귀남이 천주교 박해를 두고 사람 목을 쌓아올려야만 유지될 수 있는 나라라면 차라리 망하는 것이 낫다라는 과격하다시피한 주장을 펼쳐 천주교 박해를 금지하고 천주교 등의 유교가 아닌 타 종교를 조정에서 허용한 것과 서구에 문호를 개방해 관세만 납부하면 외국 상인도 조선의 시장에서 자유롭게 사고팔 수 있게 허용했기 때문. 그랬기에 열강이 약소국을 침략할 때 흔히 하던 통상과 선교라는 핑계가 씨알도 먹히지 않았고, 로즈 제독도 무력 시위를 하면서도 명분도 없는데 이걸 해야 하냐며 지속적으로 벨로네에 불만을 표출했으며 실제로 일이 꼬이자 빨리 평협 맺고 끝내자고 압박을 불어넣어 프랑스에게는 굴욕적인 조선과 프랑스가 동등한 입장의 첫 근대 협정 체결에 기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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