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치히 포위전
1. 개요
(1733년 ~ 1735년)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왕위 계승을 계기로 일어났지만, 결국 프랑스의 독일 침공과 합스부르크 제국의 반격 등으로 대부분의 전투는 폴란드 밖에서 벌어진 전쟁. 대홍수 이후 쇠퇴하던 연방에 결정타를 가한 전쟁이다.스타니스와프 1세 레슈친스키와 부르봉 왕조 (스페인 - 파르마 공국, 프랑스), 스웨덴, 사르데냐 왕국 VS 작센 선제후국의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2세와 합스부르크 제국, 러시아 제국, 프로이센 왕국의 구도로 진행되었다.
전쟁은 2년도 안되어 중단되었으며, 프랑스의 영토 확장과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2세의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 아우구스트 3세 즉위로 귀결되었다. 공식적으로는 1738년의 빈 조약으로 마무리 되었는데, 라틴어로 쓰여진 마지막 조약이다. 이후로는 프랑스어가 유럽의 외교 공용어가 된다.
무엇보다도 사국 동맹 전쟁으로 형성되었던 기존의 동맹체제와는 달랐던 체제[1]가 다시금 기존의 동맹 체제로 회귀하게 되는 상황을 맞이한 전쟁이기도 하였다.
2. 배경
1572년 폴란드 왕국과 리투아니아 대공국을 통합한 지그문트 2세 아우구스트가 사망한 후,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은 귀족들의 자유 선거를 통해 선출되었다. 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1세는 1697년 합스부르크 제국과 루스 차르국의 후원으로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에 선출되었다. 그러다가 대북방전쟁이 발발했을 때 루스 차르국, 덴마크와 연합하여 발트해의 패자 스웨덴에게 전쟁을 선포했으나, 스웨덴 국왕 칼 12세가 탁월한 전투력과 전략전술을 발휘해 연방군을 여러차례 격파하고 바르샤바까지 공략하자 본토인 작센 선제후국으로 도피했다.칼 12세는 아우구스트 2세를 폴란드에서 몰아낸뒤 친 스웨덴 성향의 폴란드 귀족이었던 스타니스와프 레슈친스키를 폴란드 국왕으로 세웠다. 하지만 1709년 칼 12세가 폴타바 전투에서 루스 차르국의 표트르 대제에게 패한 후 스웨덴이 수세에 몰리자, 아우구스트 2세는 도로 폴란드로 쳐들어와 스타니스와프 1세를 몰아내고 왕위를 되찾았고, 스타니스와프 1세는 프랑스로 도망쳤다.
스타니스와프 1세는 프랑스로 달아난 뒤 1725년 둘째 딸 마리아 레슈친스카를 프랑스 국왕 루이 15세와 결혼시키고 프랑스 왕실의 후원에 힘입어 폴란드 왕위를 노렸다. 당시 아우구스트 2세는 자신의 가문이 폴란드-리투아니아 왕위를 세습하기를 원했지만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의 유력 귀족들이 폴란드인이나 리투아니아인도 아닌 독일인 작센 선제후가 폴란드-리투아니아 왕위를 세습하려 드는 걸 받아들일 리 만무한 데다, 아우구스트 2세 본인도 대북방전쟁 당시 세임(sejm: 폴란드의 의회)의 반대를 무릅쓰고 스웨덴에게 전쟁을 선포했다가 깨끗하게 털려버리고 작센으로 도망친 과거가 있었으니 자신의 뜻을 강하게 밀어붙일 명분도, 힘도 없었다.
결국 세습 제도를 도입하는 데 실패한 아우구스트 2세는 1733년 2월에 사망했다. 이에 스타니스와프 1세는 루이 15세에게 지원을 약속받은 후 변장을 한채 바르샤바로 잠입한 뒤 유력 귀족들을 설득했고, 귀족들은 프랑스의 후원을 받는 그를 세우기로 결정했다. 이리하여 스타니스와프 1세는 왕위에서 밀려난 지 14년 만에 복귀했다.
그러나 이에 대해 주변 국가들이 거세게 반발했다. 러시아 제국은 친 스웨덴 성향인 스타니스와프 1세가 폴란드 국왕이 된 것을 가만히 지켜볼 수 없었고, 오스트리아 역시 루이 15세에게 자기 딸을 바치는 등 명백한 친 프랑스 인사인 그가 폴란드 국왕이 된다면 프랑스의 세력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질 것을 우려했다.
이에 아버지 사망 후 작센 선제후가 된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2세는 발트해 연안의 영토인 리보니아를 완전히 장악하길 희망하는 러시아의 안나 이바노브나에게 리보니아의 쿠를란트 공국을 넘겨주겠다고 약속했고, 합스부르크 제국의 수장이자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6세에겐 당시 그가 각국에게 승인을 요청하던 '국사조칙'이 승인되는 것을 돕겠다고 약속했다. 이에 러시아와 합스부르크 제국은 아우구스트 3세를 지원하기로 결정하였고 러시아군의 호위를 받은 아우구스트 3세는 1733년 10월 5일에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에 입성했다. 그러자 스타니스와프 1세는 그단스크로(당시에는 폴란드 영토였으므로 단치히가 아니라 그단스크이다) 피한 뒤 루이 15세에게 구원을 호소했다.
루이 15세는 정치에 별 관심이 없었고, 왕비 마리아 레슈친스카, 즉 스타니스와프 1세의 딸을 사랑하지도 않았다.[2] 사실 루이 15세가 마리아 레슈친스카와 결혼한 배경은 당시 어린 루이 15세의 후견자들이 그녀의 아버지는 땅도 없는 망명자라 다루기 쉬울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루이 15세가 성장하자, 그는 자신의 처가가 왕국도 없다는 사실에 불만을 느끼게 되었고, 결국 전쟁에 찬동했다.
한편 당시 재상으로서 프랑스의 국정을 도맡고 있던 앙드레 에르퀼 드 플뢰리(André Hercule de Fleury, 1653 ~ 1743) 추기경은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으로 누가 되는 것 따위엔 전혀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그는 이것이 합스부르크 제국을 공격할 명분으로 딱이라고 판단했다. 당시 합스부르크 제국은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에서 큰 성과를 거둬 파사로비츠 조약으로 발칸 반도에서 광활한 영토를 확보했고 이탈리아 반도에서도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을 통해 나폴리-시칠리아 왕국과 밀라노 공국을 확보하는 등 막강한 영향력을 누렸으며, 라인강 일대의 로렌 공국도 합스부르크 가문 영향력 하에 두었다.
플뢰리 추기경은 이번 기회에 로렌 공국을 빼앗고자 했고, 나폴리를 되찾고 싶었던 스페인 국왕 펠리페 5세, 밀라노 공국과 만토바 공국을 공략하고 싶어하던 사르데냐 왕국의 카를로 에마누엘레 3세를 끌여들었다.
반면 합스부르크 제국은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때처럼 영국과 네덜란드가 도와주길 희망했지만, 두 국가 모두 프랑스가 자신들을 굳이 건드리지 않는데 쓸데없이 인력과 자원을 낭비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하고 중립을 선포했다. 또한 러시아는 폴란드 왕위에 아우구스트 3세를 앉히는 것에 깊게 개입했지만, 군대를 자국으로부터 멀찍이 떨어진 라인강이나 이탈리아 전선으로 파견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결국 오스트리아는 1733년 10월 프랑스의 선전포고를 받고 사실상 홀로 프랑스, 스페인, 사르데냐 왕국의 협공에 직면했다.
3. 전개
명칭이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이지만, 정작 대부분의 전투는 폴란드가 아닌 다른 곳에서 벌어졌다. 앞서 설명했듯이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이 누가 되든지 아무 관심이 없었던 플뢰리 추기경은 스타니스와프 1세의 간절한 호소에도 불구하고 형식적으로 소규모 병력을 보내줬을 뿐 스타니스와프 1세를 적극적으로 도와주지 않았다.결국 스타니스와프 1세는 그단스크가 1734년 러시아-작센 연합군에게 공략당하자 동프로이센의 쾨니히스베르크로 달아났고 종국에는 프랑스로 달아났다. 그를 지지하는 폴란드 귀족들이 수차례 봉기를 일으키긴 했지만 별다른 저항도 못하고 진압되었고, 이후 폴란드는 전쟁 기간 내내 조용했다.
정작 치열한 전쟁이 벌어진 전선은 라인강과 이탈리아 반도였다. 프랑스는 1733년 10월 합스부르크 제국에게 선전포고하자마자 로렌 공국을 점령하고 라인강을 건너 슈트라스부르크를 침공했다. 하지만 오스트리아 본토를 치기엔 준비가 아직 덜 되어 있어서 겨울에 라인강을 도로 건너 후퇴했다. 이에 오스트리아는 군대를 대대적으로 증강해 라인강 방면 방어에 투입했고 지휘관으로는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과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에서 맹활약한 명장 사부아 공자 외젠을 선임했다.
그러나 외젠은 당시 80세가 넘은 노장이어서 과거와는 달리 군대를 적극적으로 지휘하지 못했고, 전력도 프랑스군에 비해 열세했기 때문에 방어로 일관해야 했다. 프랑스군은 그런 외젠을 상대로 밀어붙였지만 1734년 필립스부르크 공방전[3] 중 지휘관인 영국의 베릭 공작 제임스 피츠제임스[4]가 전사해버리면서 기세가 꺾였다. 결국 라인강 전역은 필립스부르크 공방전 이후 교착 상태에 빠졌다.
한편 이탈리아에서는 프랑스군과 사르데냐 왕국, 그리고 스페인 연합군이 대대적인 공세에 착수했다. 프랑스-사르데냐 동맹군은 총 5만에 달하는 대군을 동원해 밀라노에 주둔한 오스트리아군 12,000명을 손쉽게 격파하고 밀라노를 공략했다. 또한 스페인군 4만 명은 파르마-피아첸차 공작 카를로 1세의 지휘하에 토스카나와 교황령을 거쳐 이탈리아 남부의 옛 스페인 영토를 회복해나갔다.
현지 오스트리아군 사령관 줄리오 보로메오 비스콘티는 본국에 지원을 호소했지만, 라인강 전역과 북이탈리아 전선에서 수세에 몰려있던 오스트리아는 이에 응하지 못했고, 결국 스페인은 나폴리 왕국과 시칠리아 왕국을 탈환하는 데 성공했다. 이후 프랑스군은 여세를 몰아 만토바 공국까지 공세에 나섰지만, 프랑스가 북이탈리아 일대를 석권하는 걸 원치 않은 사르데냐 왕국의 비협조와 오스트리아군의 대반격으로 고전했고, 결국 북이탈리아 전역 역시 라인강 전역처럼 교착 상태에 빠졌다.
4. 영향
1735년, 영국과 네덜란드는 양측에게 평화 협상의 중재에 나서겠다고 제의했다. 프랑스는 두 국가가 개입할 것을 우려해 이에 응했고 합스부르크 제국 역시 전세가 불리하자 어쩔 수 없이 승낙했다. 이리하여 양측은 1735년 10월 3일 잠정적으로 휴전을 맺고 전투 행위를 중단했고, 1738년 빈 조약이 체결되면서 마무리되었다.우선 불리한 상황에 몰렸던 스타니스와프 레슈친스키는 '빈 조약'에서 폴란드 왕위 주장을 포기하고 아우구스트 3세의 폴란드-리투아니아 왕위 즉위를 인정했고, 아우구스트 3세는 계속해서 폴란드 왕으로 있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대홍수를 겪고 '얀 3세 소비에스키'의 중흥기 때 잠시 세력을 회복한 이후 대북방전쟁+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이라는 연속 재앙 크리를 겪으면서 완전히 황폐화된 폴란드는 아우구스트 3세의 후원자인 러시아에게 좌지우지되었다.
설상가상으로, 전쟁을 통해 왕위에 오른 아우구스트 3세는 정작 폴란드-리투아니아엔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고 드레스덴에서만 머무르며 예술품과 사냥에만 열중했고, 폴란드-리투아니아는 국왕의 직무유기로 인해 쇠락하다가 (1772년에서 1795년)까지 3번에 걸친 폴란드 분할로 인해 지도에서 완전히 사라져 멸망하게 된다.
폴란드 왕위를 잃은 스타니스와프는 대신 로렌을 영지로 받아 로렌 공국의 공작이 되었다. 전쟁이 끝날 당시 로렌 공작 프랑수아 에티엔과 합스부르크 제국의 차기 계승자인 마리아 테레지아 간에 혼담이 오가고 있었는데, 프랑스는 자기 영토 코앞에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에 이은 또다른 합스부르크 영지가 생기는 것을 결사반대하고 나섰고, 프랑수아와 마리아 테레지아의 혼인 승인 조건으로 로렌을 요구했다.
졸지에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땅을 빼앗기게 된 프랑수아는 처음에는 반대하였으나[5] 유럽 대륙 내 두 열강의 암묵적 합의에다가 약혼자의 공손한 태도[6]로 인해 울며 겨자먹기로 로렌을 내놓아야 했다. 프랑수아에겐 대신 메디치 가문의 마지막 후계자가 사망하면서 공위 상태가 된 토스카나 대공국이 영지로 주어졌으며 프랑수아 대신 로렌 공작으로 부임한 스타니스와프에게는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1766년 그가 사망한 후 로렌은 프랑스의 일부로 합병되었다.
스페인의 경우 펠리페 5세의 아들인 카를로스 왕자의 영지인 파르마 피아첸차 공국을 오스트리아에게 양도하고 카를로스의 토스카나 대공위 주장을 포기했다. 대신 나폴리와 시칠리아가 카를로스 왕자에게 주어지면서 이복형 페르난도 6세가 사망할 때까지 카를로스는 나폴리 국왕 카를로 5세 및 시칠리아 국왕 카를루 7세로 재위했다. 이후 1759년, 페르난도 6세가 사망하자 카를로스는 스페인의 카를로스 3세로 즉위하면서 3남인 페르디난도에게 나폴리와 시칠리아의 왕위를 물려주었고[7] 파르마 공국은 1748년, 엑스라샤펠 조약으로 카를로스 3세의 동생 펠리페에게 돌아가게 된다.
또한 이 조약으로 유럽에서 가장 마지막까지 국사조칙을 승인하지 않고 있던 프랑스마저 국사조칙을 승인하였고 이로서 카를 6세가 세상을 떠나더라도 마리아 테레지아가 아버지의 영지를 모두 물려받는 것이 확정된 듯 보였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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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영국과 프랑스가 손을 잡고, 프랑스와 합스부르크 제국이 손을 잡는 구도[2] 결혼 당시에는 그리 사이가 나쁘지 않았지만, 마리아 레슈친스카는 루이 15세보다 7세나 연상이었고 1733년에는 이미 30대에 접어들었다. 젊은 여성이 취향이었던 루이 15세는 이때 즈음에는 이미 불륜을 저지르는 중이었다.[3] Belagerung von Philippsburg, 필립스부르크는 독일 바덴 뷔르템베르크주에 있는 소도시으로 독일에 큰 원전이 있다.[4] James FitzJames, 1st Duke of Berwick, 제임스 2세의 사생아이다. 생몰은 1670 ~ 1734[5] 훗날 처제랑 결혼하게 될 프랑수아의 동생 샤를은 출세할 기회에 영지를 팔아먹자고(?) 적극적으로 나섰다.[6] 죄책감에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서명하기 직전 깃털펜을 세 번이나 내던졌으나 그 때마다 마리아 테레지아가 공손하게 주워줬다고 한다.[7] 3남 페르디난도에게 나폴리-시칠리아를 물려준 이유는 전쟁을 끝낸 빈 조약으로 카를로스 3세가 스페인 국왕과 나폴리-시칠리아 국왕을 동군연합으로 통치하는 것이 금지되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