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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 15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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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부르봉 왕조 제4대 국왕
루이 15세
Louis XV
파일:Louis_XV,_King_of_France_(1710-1774)_edited_2.jpg
출생 1710년 2월 15일
프랑스 왕국 베르사유 궁전
사망 1774년 5월 10일 (향년 64세)
프랑스 왕국 베르사유 궁전
재위기간 프랑스 국왕
1715년 9월 1일 ~ 1774년 5월 10일
서명 파일:루이 15세 서명.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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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f><colcolor=#002395> 가문 부르봉 가문
이름 루이 드 프랑스
(Louis de France)
배우자 마리아 레슈친스카 (1725년 결혼 / 1768년 사망)
자녀
엘리자베트, 앙리에트, 마리 루이즈, 루이, 필리프, 아델라이드, 빅투아르, 소피, 테레즈, 루이즈마리
아버지 부르고뉴 공작 루이
어머니 사보이아의 마리아 아델라이데 공녀
형제 루이, 루이
종교 가톨릭 }}}}}}}}}

1. 개요2. 생애
2.1. 어린 왕2.2. 섭정(1715~1726)과 미시시피 거품2.3. 친정과 사망
3. 평가
3.1. 리더십의 부재3.2. 심각한 부채3.3. 사생활
4. 여담5. 가족
5.1. 조상5.2. 자녀5.3. 가정사
6. 대중매체에서7. 참고 문헌

[clearfix]

1. 개요

프랑스 왕국의 국왕. 부르봉 왕조의 제4대 왕이다. 루이 14세의 증손자로,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스페인 왕위 계승자였던 펠리페 5세의 조카였다.

2. 생애

2.1. 어린 왕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428px-Koning_Lodewijk_XV-_Child.jpg대관식 복장을 입은 루이 15세,[1] 이아생트 리고, 1715년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412px-Lodewijk_XV-Kroningsgewaad.jpg프랑스의 왕 루이 15세,[2] 알렉시 시몽 벨, 1723년

루이 15세가 즉위하던 시점은 부르봉 왕가에 비극이 넘쳐날 때였다. 왕세자인 할아버지 그랑 도팽 루이, 왕세손인 아버지 프티 도팽 루이와 세손빈인 어머니 사보이아의 마리아 아델라이데 공녀가 모두 천연두로 연달아 사망했으며, 1712년에는 그 형인 브르타뉴 공작 루이와 루이 15세마저도 천연두에 감염되어 사경을 헤맸다. 이때 형 브르타뉴 공작이 과도한 사혈치료[3]로 죽자 이들 형제의 가정교사였던 방타두르 공작부인은 루이 15세가 있었던 방문을 걸어 잠그고 사혈치료를 강력하게 반대해 그의 목숨을 구했다.

증조부 루이 14세가 1715년 9월 1일에 사망하자, 당시 앙주(Anjou) 공작이었던 루이 15세는 5세의 나이로 즉위했다. 이런 상황을 예견했던 루이 14세는 촌수가 가까운 남성 왕족이자[4] 루이 15세의 재종조부(할아버지의 사촌)이며, 대고모부인 오를레앙 공작 필리프 2세[5]섭정을 맡을 것을 비밀리에 유언으로 남겼다. 또한 필리프 2세가 권력을 독점하고 자신의 증손자를 폐위할 것을 우려해서였는지, 적통으로 인정한 두 서자였던, 멘 공작 루이 오귀스트와 툴루즈 백작 루이 알렉상드르가 함께 어린 국왕을 보필하라고도 유언했는데 이는 어머니나 삼촌을 포함해 가까운 친척들이 천연두로 인해 대부분 요절했기 때문이었다.

오를레앙 공이 유언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을 선언해 고등법원은 이를 1차적으로 무효화시키고, 친국 후 오를레앙에게 섭정[6]을 전임한다는 안을 통과시켰다. 고등법원은 이런 협조의 대가로 '건의권'[7]을 인정받았다. 게으르지만 영리하고, 교양 있으며, 야망도 크지만 방탕한 오를레앙 공은 권력을 독점하다시피 했고, 근처 왕궁에 자리잡아 루이 15세를 감시했다.

2.2. 섭정(1715~1726)과 미시시피 거품

오를레앙 공작의 섭정기는 루이 15세 치세의 절정기로 평가되며, 18세기때 프랑스가 가장 강대했던 시기였다. 오를레앙 공에게 주어진 가장 큰 당면과제는 선왕 루이 14세가 안겨준 엄청난 부채였다. 파산을 피하기 위해, 금융과 세율을 조정해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 우선 화폐의 재주조, 관직의 축소, 기준금리의 인하를 통한 통화량의 늘림 등 일시적인 방편들을 사용했다. 은행과 금융기관에 의존하지 않는 장기적인 해결책이 필요했던 오를레앙 공은 스코틀랜드 출신의 금융전문가였던 존 로(John Law)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1716년 5월, 로는 '종합은행'이라는 사립은행을 설립했다. 이는 여타 은행과는 다른 특별한 기관이었는데, 바로 예금된 돈을 담보로 일정량의 금화/은화와 동일한 가치를 갖는 어음을 발행하는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프랑스 역사에서 최초로 등장한 지폐였다. 동전보다 뛰어난 실용성 덕분에 이 어음은 점차 동전과 동일한 화폐로 함께 혼용되었고, 정부도 이를 화폐로 인정했다. 이런 새로운 화폐는 한편으로는 돈의 순환을 촉진시켰고, 금과 은의 생산량에 얽매이지 않은 채 재정 관리를 유동적으로 할 수 있도록 했다.[8] 또, 과거에는 금화/은화의 보유량에 세금을 매겨 소득세의 계산이 복잡했지만, 수명이 제한되어 있는 지폐를 사용함에 따라 소득세를 토지에만 한해 통일할 수 있게 되었다.

그 다음해(1717), 존 로는 '미시시피 회사'라는 무역회사를 설립해, 북아메리카의 루이지애나 지방을 개간하고 자원을 이용했다.[9] 이렇게, 화폐로 경제를 활성화하는 한편, 식민지 회사로 생산성을 극대화시켜, 오를레앙 공 치하의 프랑스는 어느 정도 부채를 해소하고 재정을 회복하는데 성공했다. 훗날, 종합은행은 점차 왕립은행이 되었고, 미시시피 회사는 다른 식민지 회사들을 인수해 동인도 회사로 변모했다.

또한 존 로는 처음으로 증권을 발행하고, 첫번째 금융 거래소를 설립했다. 하지만 아직 초창기라 금융 거래에 미숙한 탓이었는지, 동인도 회사의 주가는 500리브르에서 18,000리브르까지 치솟게 되었고, 결국 1720년 2월 버블이 터져 유례없는 혼란을 야기하게 되었다. 미시시피회사 거품 사태 문서 참조. 채무자들을 피해 존 로는 1720년 12월 브뤼셀로 도피했다. 이 사건은 단기적으로는 정부에 큰 손해가 아니었다고는 하나 프랑스 경제 시스템에 큰 악영향을 주었다. 투기에 실패한 개인 및 기업들이 많은 피해를 입었고,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서민들은 더욱 가난해졌으며, 국민들의 은행과 지폐에 대한 불신이 초래되었다. 이러한 존 로의 경제적 정책을 통틀어 '로 시스템'(Law system)이라고 칭한다.

하지만 오를레앙 공의 인기는 가시적인 경제적 업적에도 불구하고 서서히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오를레앙 공은 1718년부터 집권 초기에 약속했던 고등법원의 건의권을 축소시켰다. 또 루이 15세에게 건의해, 1723년 수상직을 받는데 성공했는데, 대신들을 등한시하고 권력을 독점하여, 불화를 야기했다. 이후 오를레앙 공은 지속적으로 나빠지는 건강 때문에 1723년 49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2.3. 친정과 사망

1726년 성년(16세[10])이 된 왕은 부르봉-콩데 공작 루이 앙리를 수상에서 면직시키고, 가정교사였던 주교 에르퀼 드 플뢰리를 추기경이자 수상으로 임명했다. 이 17년 동안의 치세는 루이 15세의 재위 기간 중 가장 번성했던 기간으로 기록된다. 야심가였고 왕권을 강화시키는데 전력을 다했던 전대의 리슐리외 추기경과 마자랭 추기경과는 달리 플뢰리는 비교적 온화한 성품으로 프랑스를 안정적으로 통치하는데 힘썼다. 콜베르 경제장관의 정책을 다시 적용하고, 얀센주의와의 긴장 상태를 완화하는 한편,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이 발발했을 때(1733) 신속하게 문제를 정리하고 전쟁을 끝맺는데 노력했다.[11]

1743년 플뢰리의 죽음 이후 루이 15세는 선왕 루이 14세처럼 앞으로는 수상없이 통치하겠노라고 선언했다. 왕은 1744년 ‘친애왕’이란 이명을 얻을 정도로 인기가 굉장히 좋아 이 선언은 별 문제 없이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1749년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으로 인해 경제 문제가 다시 떠오르게 되었다.

재무장관이었던 마코 다르누빌은 이를 위해 새로운 세금을 도입했다. <방티엠>(Vingtième)[12]이라 일컬어지는 이 세금은 지금까지 세금이 면제되었던 성직자와 귀족에게도 과세되는 세금이었는데, 자연스럽게 이 두 계층의 반발을 사게 되었다. 고등법원은 이에 '건의권'을 이용해 베토(거부권)를 던졌고, 성직자들의 회의도 소리를 높였다. 왕에 적대적인 얀센주의자들을 상대로 주교령의 지지없이 홀로서야 할 것을 두려워한 루이 15세는 황급히 성직자에 대한 <방티엠>을 면제했다.

1757년 로베르프랑수아 다미앵이라는 남자에게 죽을 뻔한 적이 있었다. 이 남자는 결국 앙리 4세의 암살범인 라바이약과 마찬가지로 능지형거열형에 처해졌다. 이로 인해, 정책을 성공적으로 이끌어내지 못한 루이 15세는 애첩 퐁파두르 부인의 조언에 따라, 인기가 떨어질대로 떨어진 마코 다르누빌을 해임하기로 결정했다.

루이 15세는 1774년 5월 10일에 천연두에 걸려 6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사후에 생 드니 대성당에 안장되었다. 왕위는 손자인 루이 16세가 물려받았다.

3. 평가

인성도 나쁘지 않고 지식과 문화적 감각, 심지어 잘생긴 외모까지 가졌지만 국왕으로서 가져야 할 리더십의 결핍으로 우유부단한 모습만 보이다가 강대국 프랑스 왕국을 파국으로 이끈 암군이었다.

인생사에서도 보았듯이 보는 각도에 따라 참 비극적이라고도 볼 수 있는 삶이었다. 여러 이익단체(고등법원, 성직자와 귀족) 사이에서, 한쪽 편을 들어주면 다른 쪽을 잃는, 권력을 가진 자라면 누구나 사로잡힐 딜레마에 평생 시달리며 살았다. 인기와 시선을 너무 의식해 결국 인기를 완전히 빼앗기게 된, 영리하고 온화했지만 일국의 국왕이 될 재목은 아니었던 사람이라 할 수 있다.

3.1. 리더십의 부재

루이 15세의 국정에는 몇 가지 결함이 있었다. 일단 그는 증조부인 루이 14세와는 달리 리더십을 보여주지 못했다. 소싯적부터 원체 성품이 소심하고 우유부단했던 루이 15세는 가정교사들로부터 지속적으로 결정력을 키우라는 간언을 받았다. 7세부터 국왕의 교육을 전담한 발로이 장교는
"대신들의 조언을 듣되, 결정을 하세요."
라는 말을 되풀이했다. 루이 15세가 주고받은 편지들은 그가 정사에 관심이 있었고, 정치판을 읽는 능력도 있었던 것을 시사하는데, 극심한 우유부단함과 약간의 불안증세 때문에 대다수의 정책을 끝까지 추진하지 못했다. 즉 국민과 주위의 시선을 너무 의식해 필요한 개혁을 앞장서서 추진하지 못했다.

루이 15세는 자신만의 정책을 추진하기보다는, 그의 환심을 산 자들에게 장관직을 쥐어주고 알아서 하게 했는데, 문제는 이들을 세워놓고는 지지를 제대로 해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정부의 정책이나 개혁들은 리더십의 부재로 인해 제대로 된 성과를 보여주지 못했을 뿐더러, 그들이 추진한 정책 및 개혁들이 실패하거나, 루이 15세의 눈 밖으로 나게 되면 그들은 모든 책임을 뒤집어 쓰고 물러나야 했다. 이로 인해 프랑스의 정치판은 파벌로 나뉘어지게 되었고, 루이 15세의 환심을 사기 위해 국정에 제대로 집중하지 못하게 되었을 뿐더러, 정적들은 권력을 빼앗기 위해 서로의 정책들을 일부러 실패하게 하려고 노력하기까지 했다.

섭정 오를레앙 공이 지지를 대가로 고등법원에게 약속한 건의권[13] 때문에 루이 15세는 제대로 힘을 쓰지 못했다.[14] 루이 14세는 이들을 힘으로 짓눌러 감히 대항하지 못하게 했지만, 루이 15세는 이마저도 강한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 이 고등법원들은 대부분 귀족들로 이루어졌으며, 정부에서 내놓는 자신들의 특권에 반하는 정책들을 모두 반대했을 뿐만 아니라, 각 지역의 여론을 이용하여 정부에 비난의 화살을 퍼붓도록 함으로서 안 그래도 침체된 정부의 운영을 더욱 심각하게 만들었다.

부차적인 문제지만 루이 15세의 부르주아 출신 상간녀 마담 드 퐁파두르의 정치적인 간섭[15]도 문제를 일으켰다. 물론 마담 드 퐁파두르에게는 이 시대에 로코코 문화 및 계몽주의가 꽃피우도록 지원한 것 등의 업적이 있기도 했다. 그러나 이와 상관없이 심지어 장관들까지도 끌어올리고 내릴 수 있는 그녀의 영향력은 안 그래도 문제가 많은 프랑스의 정치판에 더욱 더 많은 혼란을 야기시켰다. 하지만 이런 정치적 간섭은 1746년부터 시작되어 관계가 끝나게 된 1750년에 종결되었기 때문에, 어디까지나 부차적인 문제로써 과장된 면이 있다. 다만 역대 애첩들 가운데에서도 특히 두드러지게 기억된 그녀의 영향력은 루이 15세의 전반적인 우유부단함과 회피적인 태도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결국 루이 15세 시대의 신하들은 리더십의 부재 및 쓰이지 않는 절대 권력 + 파벌과 암투에 둘러싸인 정치판 + 특권들을 지키기 위해 정치판에 개입하는 귀족들의 사법부 + 정치에 간섭하는 애첩이라는 4중고에 시달려야 했고, 이는 나라 전체가 침체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3.2. 심각한 부채

허나 이보다 어쩌면 더 큰 문제가 있었으니 바로 잦은 전쟁과 이로 인한 부채였다. 프랑스는 안 그래도 선왕 루이 14세때의 대전쟁들로 인한 으로 시달리고 있었는데 이는 루이 15세 때 더욱 더 불어나게 되었다.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7년 전쟁으로 인해 더욱 더 심각한 빚을 떠안게 되었을 뿐더러 7년 전쟁 때는 대부분의 국외 식민지까지 상실하게 되었다. 7년 전쟁 직전이었던 1753년경의 프랑스 왕국의 국가 부채는 무려 13억 6천만 루블로 현재 가치 3,240억 달러에 달했으며, 7년 전쟁이 끝난 이후인 1764년에는 23억 5천만 루블에 도달했는데 현재 가치로는 6,000억 달러였다. 게다가 어느 정도의 개혁 및 중앙은행의 제도화를 통해서 빚을 감당할 만한 수준으로 유지한 영국과는 달리 프랑스는 그런 개혁을 이룰 수 있을 만한 능력이 없었고, 다른 나라보다도 훨씬 높은 수준의 이자를 감당해야 했다. 그리고 이 문제는 더욱 더 심해져서 결국 루이 16세의 치세에 이르러서는 정부 수입의 43%가 이자를 내는 데 사용되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다.

결국 루이 15세는 치세 말년에 직접 국사를 돌보며 사법제도와 조세제도를 개혁하려고 했으나 때는 이미 늦어 있었다. 노쇠한 국왕은 국정 능력이 너무나 떨어졌고, 고등법원들을 폐지하는 등 어느 정도의 성과를 보이긴 했으나 이들 대부분이 루이 16세가 즉위한 이후 다시 되돌려지게 되었다.[16]

3.3. 사생활

문란한 사생활과 무책임함으로 인해 신하들과 백성들의 인기도 잃어버리게 되었다. 어느 정도였냐 하면 1774년 5월 10일 천연두에 걸려서 사망할 당시, 숱한 스캔들로 인해 사제고해성사 집전을 거부했을 정도였다.[17] 심지어 천연두에 걸린 것도 천연두에 걸린 예쁜 시골집 소녀를 사냥길에 무작정 강간하여 전염되었다는 비방문이 퍼질 정도로[18] 인기가 없었다. 이러다 보니 루이 15세의 장례 행렬은 축제와도 다름없었으며, 백성들은 모두 루이 15세의 뒤를 이어 즉위한 손자 루이 16세와 그의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를 환호했다. 하지만 루이 15세가 행한 실패들의 대가는 뒤를 이은 손자 부부가 몽땅 뒤집어 쓰게 되었다.[19]

얼마나 인기가 없었는지 야사에 의하면 그런 와중에도 툭하면
"내가 죽은 뒤에 도팽(왕세자)이 알아서 잘 하겠지. 내가 죽은 다음에 홍수가 나든 말든 알 바 아니지만."
이라는 엄청난 말을 하고 다녔다고 하며, 또한 임종할 때마저도
"아프레 무아, 르 델뤼주"(Après moi le déluge, "내가 죽은 다음은 될 대로 되라지...'')
라고 말했다는 소문이 전해지는 걸 생각해 보면 루이 15세에 대한 인식이 어땠는지 알 수 있다.

사실 루이 15세가 실제로 저런 말을 한 적은 없었다. 당대에 널리 퍼져있었던 비방문들에 적혀 있었던 것이지만 그의 평판이 워낙에 나빴기 때문에 모두가 사실처럼 받아들였다.

4. 여담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499px-Koning_Louis_XV%3B_Hyacinthe_Rigaud.jpg
루이 15세, 이아생트 리고, 1730년

5. 가족

5.1. 조상

본인 부모 조부모 증조부모
루이 15세
(Louis XV)
<colbgcolor=#fff3e4,#331c00> 부르고뉴 공작 루이
(Louis de France, Duc de Bourgogne)
<colbgcolor=#ffffe4,#323300> 프랑스의 루이 왕세자
(Louis de France, Dauphin de France)
루이 14세
(Louis XIV)
스페인의 마리아 테레사[27]
(María Teresa de Austria)
바이에른의 마리아 안나 빅토리아
(Maria Anna Victoria von Bayern)
바이에른 선제후 페르디난트 마리아[28]
(Ferdinand Maria von Bayern)
사보이아의 엔리케타 아델라이데[29]
(Enrichetta Adelaide di Savoia)
사보이아의 마리아 아델라이데 공녀
(Maria Adelaide di Savoia)
사르데냐 국왕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
(Vittorio Amedeo II di Savoia)
사보이아 공작 카를로 에마누엘레 2세
(Carlo Emanuele II, Duca di Savoia)
사부아느무르[30]의 마리 잔 밥티스트
(Marie-Jeanne-Baptiste de Savoie-Nemours)
안 마리 도를레앙
(Anne-Marie d'Orléans)
오를레앙 공작 필리프 1세[31]
(Philippe I d'Orléans, Duc d'Orléans)
잉글랜드의 헨리에타[32]
(Henrietta of England)

5.2. 자녀

자녀 이름 출생 사망 배우자/자녀
1녀 파르마 공작부인 엘리사베타
(Élisabeth, Duchess of Parma)
1727년 8월 14일 1759년 12월 6일 파르마 공작 필리포 1세[33]
슬하 1남 2녀[34]
2녀 안 앙리에트 공주
(Princess Anne Henriette)
1727년 8월 14일 1752년 2월 10일
3녀 마리 루이즈 공주
(Princess Marie-Louise)
1728년 7월 28일 1733년 2월 19일
1남 프랑스의 도팽 루이
(Louis, Dauphin of France)
1729년 9월 4일 1765년 12월 20일 스페인의 마리아 테레사 라파엘라
슬하 1녀
작센의 마리아 요제파
슬하 4남 3녀[35]
2남 앙주 공작 필리프
(Philip, Duke of Anjou)
1730년 8월 30일 1733년 4월 7일
4녀 아델라이드 공주
(Princess Adelaide)
1732년 3월 30일 1800년 2월 27일
5녀 빅투아르 공주
(Princess Victoria)
1733년 5월 11일 1799년 6월 7일
6녀 소피 공주
(Princess Sophie)
1734년 7월 27일 1782년 3월 2일
7녀 테레즈 공주
(Princess Theresa)
1736년 5월 16일 1744년 9월 28일
8녀 생 드니 수도원장 루이즈마리
(Louise-Marie, Prioress of Saint Denis)
1737년 7월 15일 1787년 12월 23일

5.3. 가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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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비 마리아 레슈친스카

15세의 나이로 7세 연상인 폴란드의 공주 마리아 레슈친스카[36]와 결혼했다. 하필 나라도 없는 공주인 마리아가 프랑스의 왕비로 선택된 이유는 레슈친스키 가문에 대대로 자식이 많았기 때문에 왕위 계승자를 빨리 얻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유력한 왕비 후보였던 공주들이 심사위원들간 이해관계의 불일치로 떨어져나간 반면 그녀는 권력이 없다보니 이해관계와도 무관했고[37] 나라도 없는 공주를 왕비로 만들어주면 나중에 은혜를 갚을 거라고 기대했던 심사위원들의 욕심이 작용했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기대하던 대로 마리아 레슈친스카는 2남 8녀를 낳았는데 이중 성인으로 성장한 아들은 장남 루이 페르디낭 뿐이었다. 초반에는 금슬이 좋았다고 하지만 얌전하고 순종적인 왕비에게 질린 모양인지 루이 15세는 오래지 않아 정부를 들였고 종국에는 왕비도 바람둥이 남편과 항시적인 임신에 짜증나서 완전히 별거 상태가 되었다. 자녀들을 출산한 뒤로는 임파선염을 핑계로 잠자리를 거절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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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대중매체에서

7. 참고 문헌



[1] 초상화가 그려진 당시 5세[2] 초상화가 그려진 당시 10세[3] 중세 의학이론에서는 신체에 4가지 체액(피, 점액, 흑담즙, 황담즙)이 존재하고, 질병은 이 체액의 균형이 깨져 생기는 것으로 보았다. 때문에 환자의 피를 뽑는 것으로 신체 균형을 회복해 병을 치료한다는 사혈치료가 많이 이루어졌는데, 문제는 이게 한 두 방울 뽑는 수준이 아니라 몇 리터씩 뽑아내는 게 다반사였다는 것이다. 이러니 과다출혈로 죽은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었다.[4] 루이 15세의 숙부인 스페인 왕 펠리페 5세가 있었으나 펠리페 5세는 너무 멀리 있었으며, 위트레흐트 조약으로 프랑스 왕위 계승권을 상실했다.[5] 루이 14세의 친동생 오를레앙 공작 필리프 1세의 아들로 루이 14세의 조카이자 사위였다.(부인이 루이 14세의 사생아 딸이었다.) 훗날 프랑스 혁명기에 활동했던 오를레앙 공작 루이필리프 2세의 증조부였으며, 프랑스의 마지막 국왕 루이필리프 1세의 고조부였다.[6] 섭정은 부르봉 왕가의 역사에서 총 세 번 이루어졌는데 1610년 마리 드 메디시스의 루이 13세에 대한 섭정, 안 도트리슈의 루이 14세에 대한 섭정과 1715년 오를레앙 공의 섭정이 바로 그것이었다. 이 중 마지막 섭정이 가장 큰 논란을 일으켰던 것이, 국왕의 어머니였던 전대 섭정들과는 달리 섭정자가 야심 많은 남자였기 때문이었다. 섭정 기간 동안 왕이 죽으면 남성 섭정자는 왕이 될 수 있는 가장 유력한 후보였다.[7] remontrance, 왕의 칙령에 '베토'(반대, veto)를 던질 수 있는 권리[8] 단, 이에 대해선 여러 반론들이 존재한다.[9] 미시시피는 프랑스 최초의 식민지 회사가 아니었다. 1614년에 설립된 Compagnie de Rouen 를 시초로, 프랑스 식민지 회사는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었다.[10] 사실 프랑스 법상 국왕의 성년은 만 13세라, 이것도 어떤 의미로는 늦은 편이다. 현대인의 눈으론 13세나 16세나 국왕 노릇 하기엔 어린 편이지만.[11] 여기서 프랑스인들의 정치 취향을 엿볼 수 있다. 프랑스의 대다수 국민들은 강인한 리슐리외와 마자랭을 기억하고 동경하는 반면, 안정만을 중시했던 플뢰리는 그저 준수했던 통치자로 보고 있다. 위키백과 문서도 플뢰리가 독보적으로 짧다.[12] 직역하면 '20번째'라는 의미로 20번째 세제 개편안이어서 그렇게 불렀다고 한다. 귀족 및 성직자 과세와 별개로 간접세와 관세 조정 등 일괄적인 조세정책 개편으로 이해하면 된다. 단지 앞의 두 개가 당대에는 너무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을 뿐이다.[13] 정부에서 만든 법들을 고등법원들의 관할 아래에서는 효력을 가지지 못하게 한 권리[14] 물론 왕들은 이 건의권을 무시할 수 있는 특별 칙령을 내릴 수 있었지만 루이 15세는 이를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15] 이는 루이 15세가 처음이 아니었고, 앙리 4세 등 다수의 왕이 애첩에게 권력을 준 적이 있었다.[16] 루이 16세는 루이 14세나 루이 15세와는 달리 성격이 유해서 왕족들이나 귀족들의 발호를 적극적으로 제어하지 못했다.[17] 좀 더 정확히는 당시의 공식 내연녀였던 뒤바리 부인을 내보내야 고해성사를 해주겠다고 했다.[18] 물론 헛소문이다. 하지만 퐁파두르 부인이 나이 든 후에는 10대 소녀들을 숱하게 상간녀로 들였다가, 내보내기를 반복하는 지저분한 사생활 때문에 이런 소문이 퍼질 만 했다.[19] 게다가 하필이면 손자이자 후계자인 루이 16세도 성품은 나쁘지 않았지만 리더십이 모자란 사람이었던 탓에, 조부의 실책을 끝내 수습하지 못하고 제 명에 못 죽게 된다.[20] 라미예 전투에서 존 처칠에게 패배한 이후 빌레루아는 패장임에도 불구하고 루이 14세와의 인연 때문에 궁정 조신으로 살다가 루이 15세의 섭정 중 한 명이 되었지만 오를레앙 공작 필리프 2세에 의해 추방되었다.[21] 왕비와 첫날밤 8번이나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22] 1번째 며느리는 숙부인 펠리페 5세의 딸토 친사촌인 마리아 테레사 라파엘라였는데 항렬상 사촌인 루이 15세보다 16살이나 어렸고 2번째 며느리인 마리아 요제파는 에스파냐의 사촌 동생 카를로스 3세의 처제였다.[23] 덕분에 애첩 퐁파두르 부인이 곁에 같이 있다가 왕의 안색을 살펴서 적절한 선에서 상대의 이야기를 자르고 내보내기도 했다고 한다.[24] 루이 15세의 첩이 되기 전 낳은 딸이었다.[25] 숙부 펠리페 5세의 아들.[26] 같은 부르봉 왕조인 스페인-프랑스 동맹을 강화하기 위해 큰딸을 사촌 동생에게 시집보냈다.[27] 스페인 국왕 펠리페 4세의 장녀이자 앙리 4세의 외손녀이다.[28]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페르디난트 2세의 외손자이다.[29] 비토리오 아메데오 1세프랑스의 크리스틴의 3녀.[30] 사보이아 가문의 프랑스계 방계 가문.[31] 루이 13세의 차남이자 스페인 국왕 펠리페 3세의 외손자이다.[32] 잉글랜드 국왕 찰스 1세의 4녀이자 앙리 4세의 외손녀이다.[33] 펠리페 5세의 5남이자 루이 14세의 증손자.[34] 오스트리아의 요제프 대공비 이자벨라, 파르마 공작 페르디난도 1세, 스페인의 왕비 마리아 루이사.[35] 루이 16세, 루이 18세, 샤를 10세, 샤르데냐의 클로틸데 왕비, 엘리자베트 공주[36] 다만 결혼 당시 마리아의 아버지 스타니스와프 1세 레슈친스키는 폴란드 국왕에서 폐위되어 프랑스로 망명한 상태였다.[37] 그러나 이는 결국 장인이 나라 없는 왕이란 사실이 본인의 체면에 먹칠을 한다고 생각한 루이 15세가 폴란드 왕위를 두고 전쟁에 개입하면서 안좋은 쪽으로 작용했다.[38] 아버지 루이 15세의 친사촌.[39] 다만 너무 어린 나이에 결혼해 14세에 첫 딸을 낳으면서 난산으로 고생했다.[40] 루이 오귀스트, 루이 스타니슬라스 그자비에, 샤를 필리프.[41] 셋 중에 맏이인 오귀스트는 시대를 잘못 만나 혁명으로 목이 잘리는 최후를 맞이했으나, 그자비에와 샤를 필리프는 끝까지 살아남아 혁명기 프랑스의 전성기를 이끈 나폴레옹이 제정을 성립하고 훗날 유배당하고 나서야 사이좋게 왕위에 올랐다. 둘은 맏형과는 달리 끔찍한 최후를 맞진 않았다.[42] 마리아 요제파의 언니 마리아 아말리아는 시아버지 루이 15세의 사촌 동생 카를로스 3세의 아내였다.[43] 아버지 루이 15세의 친사촌.[44] 루이 15세의 삼촌인 펠리페 5세의 아들이니 루이 15세와는 사촌, 마리에게는 5촌 당숙이었다[45] 죽을 때까지 수도자로 살겠다는 서약. 자세한 것은 수도자 항목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