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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7-30 23:36:50

앙굴렘 공작 루이 앙투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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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부르봉 왕조 임시 국왕
루이 19세
Louis XIX
파일:1280px-Louis_Antoine_d'Artois.jpg
출생 1775년 8월 6일
프랑스 왕국 베르사유 궁전
사망 1844년 6월 3일 (향년 68세)
오스트리아 제국 괴르츠
재위기간 프랑스 국왕 (논란)
1830년 8월 2일 (약 20분)
서명 파일:루이 19세 서명.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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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f><colcolor=#002395> 가문 부르봉 가문
이름 루이 앙투안 드 프랑스
(Louis Antoine de France)
아버지 샤를 10세
어머니 사보이아의 마리아 테레사
형제자매 소피, 샤를 페르디낭
배우자 프랑스의 마리테레즈 (1799년 결혼)
종교 가톨릭 }}}}}}}}}
1. 개요2. 생애
2.1. 출생2.2. 즉위와 그 이후

[clearfix]

1. 개요

프랑스명목상 국왕. 따라서 공식적으로 왕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1775년 8월 6일, 후일 샤를 10세가 되는 아르투아 백작과 사보이아의 마리아 테레사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프랑스 혁명 이후 아버지와 함께 망명 생활을 했고, 혁명이 끝나자 귀국했다.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극단적인 보수주의자였다.

2. 생애

2.1. 출생

루이 16세 밑 항렬의 첫 왕자로서 사촌 동생 루이 조제프가 태어나기 전까지 둘째 큰아버지와 아버지 다음으로 계승 서열 3위였다. 덕분에 아들이 없던 첫째 큰아버지 루이 16세의 입지가 잠시 좁아지는 원인이기도 했다. 이후에 남동생 베리 공작 샤를 페르디낭이 태어나서 더더욱 그랬다. 그러다 루이 16세에게도 루이 조제프와 루이 17세가 태어났지만 그 직후 프랑스 혁명 크리.

앙굴렘 공작으로 불렸으며 아버지를 따라서 망명해 유럽 곳곳을 떠돌다가 부르봉 왕실의 부흥을 명분으로 외가를 떠난 사촌 여동생 마리 테레즈 공주와 결혼했다.

아내와 금슬은 매우 좋았는데 루이 19세가 마리 테레즈의 아버지 루이 16세처럼 우유부단하고 무능하고 여러 모로 닮아서였다고(...) 거기다 둘 다 혁명세력에 악감정이 큰 초왕당파여서 더더욱이 그랬다. 허나 1799년 결혼 후 1813년 아이를 유산함으로서 자녀는 남기지 못했다.

2.2. 즉위와 그 이후

아버지 샤를 10세7월 혁명으로 퇴위하자 1830년 8월 2일 약 20분간 형식적으로 재위했다. 20분 국왕체험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후 조카 앙리 샤를 페르디낭 마리(앙리 5세)에게 왕위를 물려주었고[1] 여생을 이 나라 저 나라에서 망명생활로 보내다가 1844년 6월 3일 사망했다.

[1] 루이 19세 역시 보수적 성향이 너무 강하였기 때문에, 당시의 정치적 상황과 혁명적 분위기를 고려하여 자신의 왕위를 유지하기 어려웠고 그 시점에서 정국의 안정을 위해서 이미 여론의 지지를 얻고 있던 앙리를 왕위에 올리기 위하여, 형식적으로 즉위하였다가 20분만에 양위하였다. 그러나 앙리 5세 역시 프랑스 의회에서 즉위를 인정하지 않아 일주일 만에 퇴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