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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f><colcolor=#002395> 프랑스 부르봉 왕조 임시 국왕 앙리 5세 Henri V | |||
출생 | 1820년 9월 29일 | ||
프랑스 왕국 튈르리 궁전 | |||
사망 | 1883년 8월 24일 (향년 62세) |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프로스도르프 궁전 | |||
재위기간 | 프랑스 국왕 (논란) | ||
1830년 8월 2일 ~ 1830년 8월 9일[1] | |||
서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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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샹보르 백작 앙리 샤를 페르디낭 마리 디외도네 다르투아 (Henri Charles Ferdinand Marie Dieudonné d'Artois, Comte de Chamboard) | ||
아버지 | 베리 공작 샤를 페르디낭 | ||
어머니 | 양시칠리아의 마리아 카롤리나[2] | ||
형제자매 | 루이즈 엘리자베트, 루이, 루이즈 마리 테레즈[3] | ||
배우자 | 오스트리아에스테의 마리아 테레사 여대공[4] (1846년 결혼) | ||
종교 | 가톨릭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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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부르봉 왕조 루이 15세의 마지막 남계 직계후손.[5]프랑스 왕국의 정식 국왕이 아니라 명목상 왕위 요구자였기 때문에, 당대에는 앙리 5세라고 많이 불렸지만[6] 현대에 들어서 앙리 5세라 부르는 경우는 거의 없으며, 대부분 샹보르 백작(Comte de Chambord)으로 부른다.
2. 생애
젊은 시절 | 중년기 |
2.1. 초기 생애
1820년 9월 29일 샤를 10세의 차남 베리 공작 샤를 페르디낭과 베리 공작 부인 마리카롤린(양시칠리아의 마리아 카롤리나)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샤를 페르디낭은 앙리가 태어나기 전인 1820년 2월 14일에 암살되었기 때문에 유복자다.샤를 10세의 차남의 아들로 태어났으니, 원래대로라면 왕위계승 순위에서 밀려 크게 관심받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샤를 10세의 장남(즉, 앙리의 큰아버지)이자 왕위계승권자인 루이 앙투안(루이 19세)에게 자식이 없는 데다가, 샤를 10세의 차남이자 앙리의 아버지인 샤를 페르디낭마저 젊은 나이에 암살당하자, 부르봉 왕조는 직계후손이 끊길 위기에 처했다. 그렇게 되면 부르봉 왕조의 분가인 오를레앙 가문[7]으로 왕위가 넘어가게 되는데, 오를레앙 가문은 100년 넘게 왕위를 빼앗으려는 음모를 꾸몄기 때문에 부르봉 본가의 입장에서 오를레앙 가문은 불구대천지 원수나 다름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앙리가 태어나자 후계자 가뭄을 겪던 부르봉 왕조는 한숨 돌리게 되었고, 부르봉 왕조의 지지자들은 앙리를 '기적의 아이'라고 부르며 탄생을 축하했다.
하지만 1830년에, 안 그래도 이전에 일어난 대형 사건과 그 결과에 대한 여파로 민심이 나빠졌는데, 할아버지 샤를 10세의 실정(失政)으로 샤를 10세의 폐위를 요구하는 7월 혁명이 일어났다. 그리하여 샤를 10세가 퇴위한 직후 큰아버지가 루이 19세로 서류상으로만 20분간 즉위했고, 다시 앙리가 앙리 5세로 7일간 명목상의 국왕이 되었다.
2.2. 망명 생활
부르봉 왕조가 멸망하고 루이필리프가 왕이 되자, 앙리는 샹보르 백작 이외의 모든 작위를 잃고 가족들과 함께 망명을 떠났다. 처음에는 왕당파의 복위 운동이 있기도 했으나, 1832년 그의 어머니 부르봉양시칠리아의 마리 카롤린이 프랑스에 잠입해서 왕당파 반란을 선동하다 실패해 수감당하고, 이듬해엔 아버지가 13년 전에 죽었을 터인 진짜 기적의 아이를 출산하는 사태가 벌어지자[8] 복위 운동은 힘을 잃었다.큰어머니 마리 테레즈는 자식이 없어서 앙리를 친아들처럼 대하며 아꼈는데, 앙리가 시대의 흐름에 반하여 전제군주제의 옹호자가 된 데에는 큰어머니의 영향도 있었다.[9] 마리 테레즈와 앙리 모두 오를레앙 왕조 치하에서도, 공화정 치하에서도 살기 싫어해서, 프랑스를 떠나 이곳저곳 떠돌며 살았다.
이후 1848년 2월 혁명이 일어나 루이필리프가 퇴위하자, 앙리는 내심 기뻐하면서 왕위 계승권을 주장하였으나 그 주장은 무시되었고, 프랑스 제2공화국이 출범했다. 앙리 5세는 1849년 총선에서 군주주의자들이 과반이 넘는 의석을 차지하자 자신의 입지가 강화될 기회라며 기뻐했지만, 막상 그 군주주의자들이 중심이 된 질서당이 샤를 루이 나폴레옹과 갈등을 일으키자, 루이 나폴레옹은, 1852년에 헌법을 개정하여 질서당을 무력화시키고 나폴레옹 3세로 즉위하여 프랑스 제2제국이 출범했다.
2.3. 기회를 스스로 포기하다
프로이센 왕국과의 전쟁에서 패하여 나폴레옹 3세도 퇴위한 직후 실시된 1871년 총선에서 부르봉 정통파와 오를레앙파가 의회 다수를 차지했고, 아돌프 티에르가 파리 코뮌 강제진압으로 왕당파와 공화파 모두에게서 비토당하면서, 앙리에게도 드디어 기회가 찾아왔다. 거기다 티에르의 후임 대통령은 법통주의자 파트리스 드마크마옹. 이 기회를 잘만 활용했으면 프랑스에서 왕정복고가 이루어질 가능성이 높았지만, 앙리는 그 기회를 스스로 버렸다.샹보르 백작 앙리는 기본적으로 전제군주제를 선호하는 인물이었으나 시대의 흐름은 충분히 인식하는 인물이었다. "특권이니, 절대주의니, 앵톨레랑스니 떠들어대는 무지하고 어수룩한 자들"을 운운하며 앙시앵 레짐이나 절대왕정과는 명확히 선을 긋기도 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입헌군주제와 공화정의 삼색기 대신 부르봉 왕조 백기를 국기로 재지정해 달라'는 조건을 걸고, 그 조건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절대로 왕위에 오르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이것으로 프랑스의 군주정 복고 시도는 완전히 끝나고 왕당파도 몰락했다.[10] 이후 앙리는 프랑스인들은 물론 타 유럽 왕실로부터도 천치 취급을 받았다. 교황 비오 9세는 "그 모든걸 냅킨 한장 때문에!"[11]라고 한탄했고, 프랑스 제3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인 아돌프 티에르는 "샹보르 백작이 프랑스 공화국의 수립자임을 부정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라고 비꼬았다.
그러면 위에서 분명히 시류를 읽을 줄 안다던 앙리가 왜 그런 평가와 상반된 짓을 하면서 복고의 희망을 꺾어버렸는가? 그 배경에는 부르봉 본가와 오를레앙계의 오랜 악연에 더해, 샹보르 백작 본인의 불우한 개인사에서 비롯된 악감정도 짙게 깔려 있다. 샹보르 백작은 7월 혁명으로 오를레앙 왕조가 들어서면서 해외로 망명했지만, 오를레앙 왕조의 외교적인 압박으로 한 곳에 오래 머무르지 못하고 영국과 오스트리아를 전전하며 소년 시절을 보냈다. 장성한 후에 양시칠리아 왕국의 마리아 카롤리나 공주와 결혼하려고 했으나[12], 오를레앙 왕조가 혼담을 가로채 마리아 카롤리나 공주를 루이필리프의 5남 오말 공작 앙리와 결혼시켰다.[13] 같은 해에 샹보르 백작이 승마 사고를 당하자 고자가 되었다는 소문까지 퍼졌다. 이후 모데나 레조 공작 프란체스코 4세의 장녀이자 자신의 6촌이기도 한 마리아 테레사[14]와 결혼했으나 그녀가 불임이여서 후사를 볼 수 없었다. 이러한 상황이 지속되면서 오를레앙파에 대한 증오심은 대단했다.
그런데 프랑스 제2제국이 붕괴한 직후 부르봉 정통파와 오를레앙파가 부르봉 가문의 수장인 샹보르 백작 앙리를 왕으로 세우고, 오를레앙 가문의 수장인 파리 백작 필리프[15]를 그 양아들로 삼아 다음 왕으로 세운다고 합의했다. 샹보르 백작은 보나파르트 왕조보다 7월 왕정을 더 증오해서, 급기야는 이사벨 2세와의 통교 과정에서 오를레앙 가문에게 왕위를 물려주느니 차라리 나폴레옹 4세를 양아들로 삼겠다는 뜻까지 내비칠 정도였다.
하지만 상술한 나폴레옹 3세 몰락 이후 총선에서 보나파르트파는 완전히 박살이 난 상태였고[16], 부르봉 정통파와 오를레앙파 가운데 어느 한쪽도 압도적인 과반을 차지하지 못한지라 결국 부르봉 정통파와 샹보르 백작이 군주정복고를 이루려면 오를레앙파와 손잡는 수밖에 없었는데, 이는 백작 입장에서 정말 받아들일 수 없는 선택지였다. 허나 군주정복고를 위해 부르봉 왕조 본가와 오를레앙 가문의 대동단결을 이루자는 대의 앞에서는 딱지를 놓기가 곤란했다. 그래서 핑계로 댄 것이 부르봉 왕조 백기의 부활이다. 앙리의 의도대로 부르봉 왕조 백기를 부활시키자는 조건 덕에, 두 가문이 합쳐져 오를레앙 가문이 프랑스 왕실의 왕통을 잇는 것은 막을 수 있었다. 비록 본인은 온 유럽에서 천치 취급을 받게 되었지만.
2.4. 사망과 그 이후
이후 앙리 5세는 평생 프랑스 땅을 밟지 못하고 유럽 각지를 떠돌다 1883년 8월 24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아이젠슈타트에서 객사했다. 자녀를 얻지 못해 부르봉 왕조 본가의 지위는 스페인의 알폰소 13세에게 넘어갔다.[17]그 자신은 자녀가 없었지만 그의 누나인 루이즈 마리 테레즈 다르투아는 파르마피아첸차 공작 카를로 3세와 혼인하여 자손을 남겼고, 그 손녀인 부르봉파르마의 공녀 지타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마지막 황제 카를 1세의 황후가 되면서 이 집안은 잠시나마 부활했다. 또 지타 황후의 남동생인 펠릭스는 룩셈부르크 샤를로트 여대공의 부군이 되었고 지타 황후의 이복언니 마리아 루이사는 불가리아 왕국의 차르 페르디난트 1세의 왕비가 되었으며, 지타와 펠릭스의 조카인 안 드 부르봉파르므는 루마니아 왕국의 마지막 국왕 미하이 1세와 혼인했다.
현재 부르봉 왕조의 계보는 루이스 알폰소 데 보르본(1974년 4월 25일 ~ )으로 이어지고 있으며, 그의 추종자들로부터 루이 20세로 불리고 있다. 루이스 알폰소 데 보르본은 알폰소 13세의 차남 세고비아 공작 인판테 하이메의 손자이고[18], 스페인의 現 국왕 펠리페 6세의 6촌 동생이지만, 프란시스코 프랑코의 외외증손자로 더 유명하다.[19]
스페인의 여왕 이사벨 2세와 토스카나 대공국의 마지막 대공 페르디난도 4세와는 이종사촌간, 양시칠리아 왕국의 마지막 국왕 프란체스코 2세와는 외사촌간이다.
3. 가계
본인 | 부모 | 조부모 | 증조부모 |
앙리 5세 (Henri V) | <colbgcolor=#fff3e4,#331c00> 샤를 페르디낭 (Charles Ferdinand) | <colbgcolor=#ffffe4,#323300> 샤를 10세 (Charles X) | |
루이 페르디낭 (Louis Ferdinand) | |||
작센의 마리아 요제파 (Maria Josepha von Sachen) | |||
사보이아의 마리아 테레사 (Maria Teresa di Savoia) | |||
비토리오 아메데오 3세 (Vittorio Amedeo III) | |||
마리아 안토니아 페르난다 (Maria Antonia Fernanda) | |||
양시칠리아의 마리아 카롤리나 (Maria Carolina di Sicily) | |||
프란체스코 1세 (Francesco I) | |||
페르디난도 1세 (Ferdinando I) | |||
마리아 카롤리나 (Maria Carolina von Österreich) | |||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클레멘티나 (Maria Clementina von Österreich) | |||
레오폴트 2세 (Leopold II) | |||
스페인의 마리아 루이사 (Maria Luisa d'Espana) |
4. 여담
만약 7월 혁명이 없었다면 할아버지 샤를 10세와 큰아버지 루이 19세의 뒤를 이어 1844년부터 1883년까지 무려 39년 가량을 재위했을 것이다.[1] 어디까지나 공식적인 재위 기간은 아니고 명목상의 재위 기간이다.[2] 양시칠리아 왕국 2대 국왕 프란체스코 1세의 장녀, 루이필리프 1세와 프란츠 2세, 토스카나 대공 페르디난도 3세의 처조카이다.[3] 파르마 공작 카를로 3세의 아내.[4] 모데나 레조 공작 프란체스코 4세의 장녀. 합스부르크로트링겐 가문의 분가이자 모데나 레조 공국의 공가 다스부르고에스테 가문의 일원이기도 하다.[5] 국왕을 넘어 직통 라인 전체로 보자면 루이 15세의 아버지이자 본래 프랑스 국왕이 될 예정이었던 프티 도팽 루이의 마지막 남계 직계후손이기도 하다. 루이 15세의 할아버지이자 루이 14세의 아들인 그랑 도팽 루이는 차남 펠리페 5세를 통해 대가 끊기는 걸 염려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스페인에 후손들이 많이 남아있는 것과 대조적이다. 물론 앙리의 아버지 샤를 페르디낭과 고조부 루이 15세가 워낙 사생아들을 많이 뿌렸던지라 사생아를 통한 남계 후손은 아직도 이어지고 있으며 계승권이 없어서 의미가 없을 뿐 여계 후손도 상당히 많이 남아있다. 루이 15세의 큰딸인 루이즈 엘리자베트의 후손들과 앙리 5세의 누나 루이즈 다르투아의 후손들이 상당히 많이 남아있다.[6] 앙리 5세의 사망을 다룬 1883년 8월 25일자 르 갈루아(Le Galois)지 기사에서 프랑스 제3공화국 체제가 수립된 지 12년이나 지난 시점임에도 기사에서 대문짝만하게 앙리 5세라고 명시를 하고 아예 그 옆에 대놓고 "vive Philippe VII"(필리프 7세 만세)라는 기사를 작성하여 이들을 거의 군주라고 인정하는 뉘앙스를 많이 보인다. 앙리 5세 다음에 필리프 7세(파리 백작 필리프로 오를레앙 루이필리프 국왕의 손자)를 국왕으로 인정한 것을 보면 해당 언론사가 오를레앙파 지지자인 것으로 추정.[7] 루이 13세의 차남이자 루이 14세의 동생 오를레앙 공작 필리프를 시조로 하는 가문.[8] 이후 아이를 낳은 당사자인 마리 카롤린은 1831년에 이탈리아 출신의 귀족과 비밀결혼을 했다고 주장했지만, 아들의 섭정을 맡겠다는 왕의 어머니가 외국인과 非 왕족 남성의 아이를 낳았다는 것은 당시로선 굉장히 심각한 문제였다.[9] 마리 테레즈는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의 장녀다. 프랑스 혁명 와중에 부모가 혁명정부에게 처형되었기 때문에, 민중과 공화정을 무척 싫어했고 전제왕정을 지지했다. 또한 자신의 부모님을 구하는 것에 적극적이지 않았던 외사촌 프란츠 2세와 프란츠 2세의 가문도 굉장히 혐오해서, 합스부르크 가문과 결혼하라는 프란츠 2세의 제안을 거절하고 자신의 친사촌인 루이 19세와 결혼했다.[10] 물론 이 협상이 실패하고 한방에 몰락한 건 아니고 서서히 의석 수가 줄어들면서 몰락해 갔다. 좌파로 유명한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이 1930년대 당시 극우였던 청년 시절에도 부르봉 왕조 복원 단체에 참가해 시위를 벌였던 적이 있었을 정도로 제2차 세계 대전전까지는 주류까진 아니더라도 소수나마 복고를 주장하는 의석이 약간 있긴 했었다.[11] 깃발 문제를 냅킨에 비유한 것. 이해하기 쉽게 표현을 바꾸면 '행주 조각 만도 못한 깃발 문제 가지고 왕위를 포기한다는게 말이 되느냐' 정도가 적당하다.[12] 앙리에게는 5촌 당이모였다. 어머니 마리아 카롤리나의 친사촌이다.[13] 그 업보인지는 몰라도 오말 공작 앙리와 마리아 카롤리나는 슬하에 7남 1녀를 낳았지만 전부 사산되거나 요절해서 오말 공작가의 가계는 그대로 단절되었다.[14] 마리아 테레사의 어머니인 모데나 레조 공작부인 마리아 베아트리체가 샹보르 백작의 아버지 베리 공작 샤를 페르디낭의 외사촌이었다. 샹보르 백작과 마리아 테레지아 모두 사르데냐 국왕 비토리오 아메데오 3세의 증손자들이다.[15] 루이필리프의 장남이자 왕태자였던 페르디낭 필리프(1842년 사망)의 맏아들. 포르투갈 국왕 카를루스 1세의 장인이자, 후안 카를로스 1세의 외할머니 루이즈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참고로 부계로는 앙리와 대략 16촌간인데 모계로는 6촌이다.(필리프의 할머니 마리아 아말리아가 앙리의 어머니 마리아 카롤리나의 고모)[16] 그나마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고향인 코르시카에서나마 의석을 약간 건지긴 했다.[17] 그러나 루이스 알폰소 데 보르본이 만약 프랑스에서 왕정복고가 일어난다면 왕이 될 수 있을지는 불분명하다. 보르본 가문은 루이 14세의 직계이나,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에서 승리하여 스페인의 왕위를 얻은 대가로 위트레흐트 조약에 따라 프랑스의 왕위계승권을 영구히 포기했기 때문이다. 보르본 가문의 국적은 스페인이며, 프랑스인 오를레앙 가문의 부계 후손이 오늘날까지 파리 백작과 프랑스 왕위의 정당한 왕위 계승자를 자칭하고 있는 점, 오를레앙 가문의 부계 후손이 대통령 같은 프랑스 고위 정치인과 종종 교류한다는 점이 걸림돌이다.[18] 앙리의 사후 가장 가까운 남계 혈족인 (루이 14세의 태자였던 그랑 도팽 루이의 후손) 카를리스타 왕위 요구자들이 한동안 살리카법에 근거하여 명목상의 프랑스 왕국 국왕을 칭하다가 1936년 카를로스계가 단절되면서 당시 퇴위한 스페인 국왕 알폰소 13세에게 명목상의 프랑스 왕위가 넘어갔는데, 이후 알폰소 13세의 차남 하이메가 청각장애를 이유로 스페인 왕위 계승을 포기하면서 명목상의 프랑스 왕위 계승은 포기하지 않아 명목상의 프랑스 왕위는 하이메에게 계승되었고, 이후 하이메의 후손들이 명목상의 프랑스 왕을 칭하고 있다.[19] 그의 외할머니가 프랑코의 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