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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베르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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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f><colcolor=#002395>
프랑스 카페 왕조 제2대 국왕
로베르 2세
Robert II
파일:로베르 2세.jpg
출생 972년 3월 27일
서프랑크 왕국 오를레앙
사망 1031년 7월 20일 (향년 59세)
프랑스 왕국 믈룅
(現 프랑스 일드프랑스 센에마른주 믈룅)
재위기간 프랑크인의 왕
996년 10월 24일 ~ 1031년 7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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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f><colcolor=#002395> 가문 카페 가문
부왕 위그 카페
모후 아키텐의 아델라이드
배우자 이탈리아의 로잘라 (968년 결혼/987년 이혼)
부르고뉴의 베르타 (996년 결혼/1000년 이혼)
아를르의 콩스탕스 (1001년 결혼)
자녀 아드비사, 위그, 앙리 1세, 아델[1] , 로베르, 외드
종교 가톨릭
별칭 경건왕(Le Pieux/the Pious)
현명왕(Le Sage/the Wi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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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3. 공동왕 장남 위그4. 로베르 2세 시대의 사회상
4.1. 봉건제 정착4.2. '하느님의 평화' 운동4.3. 3계급의 확립4.4. 수도원의 등장4.5. '기적을 행하는 왕'4.6. 경제성장과 무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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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 왕국 카페 왕조의 제2대 왕.

그의 재위기는 영주들이 개인적인 성채들을 건축하기 시작하였으며[2], 화폐 사용이 발달해 농업 생산량이 증대함으로서 경제가 발전하는 등 사회적, 경제적으로 봉건제의 안정기로 접어드는 시기였다. 독실한 신앙을 가졌던 로베르는 재위기 동안 교회의 재산을 보호하고 영주들의 권리를 보호하는 데에 주력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그의 시대에 왕권은 미약하지만 꾸준히 성장했다.

2. 생애

왕조의 시조인 위그 카페와 아키텐 공작 기욤 3세의 아델라이드 사이에서 태어났다. 972년 오를레앙에서 태어났으며, 아직 아버지가 왕이 되지 못했던 어린 시절 서유럽에서 가장 유명한 학교 중 하나였던 랭스 대성당 학교에 보내져 랭스 대주교 아달베롱과 그의 비서인 철학자 겸 수학자 제르베르 도리악에게 교육을 받았다. 그 이유는 위그 카페가 왕이 되기 위해선 왕국에서 가장 중요한 성직제후였던 랭스 대주교를 끌어들여야 했기 때문이다. 그 덕분에 라틴어를 읽을줄 몰랐던 아버지와는 달리 당대의 문어이자 공적 언어였던 라틴어를 자연스럽게 쓰고 구사할 수 있게 되었으며, 논리학, 수사학, 자연철학, 음악 등에서 뛰어난 지식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987년 아버지 위그 카페가 왕이 되자, 자신의 가문에 왕위를 세습시키고 싶었던 위그 카페는 이슬람의 위협에 맞서야 한다는 명분을 들어 랭스 대주교를 설득, 결국 로베르를 공동왕로 삼는데 성공한다. 그는 오를레앙에서 대관식을 받으며 '뫼즈 강에서 대양에 이르는 지역의 왕'으로 임명된다. 990년부터는 적극적으로 정치에 관여해, 종교 관련한 문제에서 교회와 신민들 사이에 중재를 자처하거나 왕실에서 반포하는 포고장에 자신의 이름을 서명하는 등 정치행위를 하기 시작한다. 그는 자신이 반포하는 포고장에 공공선(res publica)이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하며, 이러한 공공선을 지키기 위해 교회의 조언에 의지해 일을 결정함으로서 왕권을 남용하지 않겠다고 말한다. 왕실의 정통성을 위해서라도, 왕국의 행정부에 포진한 성직자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서라도 교회와 밀착할 필요가 있었는데, 풍부한 교양과 지식을 갖추고 신실한 신앙심까지 가지고 있는 로베르는 교회와 왕실을 밀착시키는 일에 제격이었다. 성직자들은 로베르를 경건한 통치자로 묘사한다. 이후로 아버지가 진행하는 군사 원정이나 공의회 등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그는 결혼을 무려 세 번이나 했다. 첫 번째 결혼은 부왕 위그 카페의 뜻에 따라 플랑드르 백작의 미망인이었던 로잘라와 했으나 그녀는 그보다 나이가 많았고, 부왕이 죽자 바로 이혼했다. 두 번째 결혼은 부르고뉴의 공작 콘래드의 딸이자, 당대 프랑스 북부에서 가장 강력한 영주였던 블루아 백작 외드 1세의 미망인 베르타였다. 그녀와 결혼함으로서 로베르는 아들도 낳고 블루아 백작의 영지도 잠식하여 왕령지도 늘리는 일석이조를 노렸으나, 그녀와 로베르가 사촌지간이었기 때문에 교황이 승인하지 않았고, 이로 인해 파문당하기도 했다. 다만 두 목적 중 하나였던 왕령지 확대는 어느정도 이루었다. 결국 두 번째 결혼은 취소되었고, 1001년 프로방스 백작의 딸 콩스탕스와 결혼하게 되었다. 다만 그녀와는 프랑스 남부 끝과 북부라는 문화 차이 때문인지, 사이는 그리 좋지 못했던 듯하다.

1002년 로베르의 할아버지인 위그 르 그랑의 막내아들[3] 부르고뉴 공작 앙리 1세가 후계자 없이 사망하며서 계승분쟁이 발발하자, 여기에 개입해 몇번의 전투 끝애 1005년, 아발롱과 오셰르를 점령하고 법적으로 부르고뉴 공국 영지를 왕에게 환수시킨다. 그러나 부르고뉴 각지에서 영주들이 왕을 맞길 거부하며 농성하자 일일히 그들을 상대해야 했다. 로베르는 거의 10년 이상이 걸린 끝에 1015년 상스(sens)를, 1016년 부르고뉴 공국의 중심도시인 디종을 점령하고 마침내 부르고뉴 전역을 되찾았다. 로베르는 디종은 랑베르 주교에게 수여한 뒤 부르고뉴 공작위는 차남 앙리에게 주었으나, 장남 위그가 사망하면서 앙리가 공동왕이 되자 그 동생인 로베르에게 공작위를 물려주었다. 이로서 로베르는 프랑스 북부에서 가장 부유한 영지 중 하나인 부르고뉴를 왕실에 충성하는 지역으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한편 1007년경 파리 자작 부샤르 1세가 사망하자 그의 영지를 환수했으며, 1017년경 부샤르 1세의 아들인 르노 드 방돔이 사망하자 그의 영지였던 멜룬과 드뢰 백작령을 몰수한다.

1022년에는 당시 오를레앙에서 시작되어 11세기 내내 유럽 각지를 준동시킬 이단 세력을 대거 탄압했다. 중세 첫번째의 공식적인 이단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이었다. 그들은 성사 거부, 과격한 금욕주의[4], 십일조 거부를 포함한 교회 조직에 대한 전면적 거부, 십자가 파괴를 포함한 모든 종류의 성상과 우상의 파괴, 삼위일체에 대한 전면적 거부, 죄를 지은 후 용서받는다는 개념의 거부[5] 등을 주장하는 이전에 없이 과격한 교리를 내세우는 이단이었고, 따라서 탄압도 이에 비례해 전례없이 강경해 진 것으로 보인다.

이후, 바그다드에서 대대적인 기독교 박해가 일어난 것의 책임을 유대인에게 돌려 왕국 내 유대인 공동체에 대한 가혹한 탄압과 학살을 가했다. 그러나 교황은 로베르의 행위를 좋게 보지 않았고, 세르지오 4세는 유대인에 대한 탄압을 멈추라고 명령했다.

이후 장남 위그가 사망하자 차남 앙리를 공동왕에 임명했다. 그러나 왕비인 콘스탄스를 비롯해 여러 영주들이 앙리가 너무 '여성적'이라며 막내아들 로베르를 공동왕에 임명할 것을 요구했는데, 명분상으로는 가장 뛰어난 자가 왕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지만[6] 진짜 의도는 콘스탄스가 섭정함으로서 권력을 쥐려던 것이었다. 로베르는 앙리의 공동왕 즉위를 지지하는 몇몇 영주들과 동맹을 맺고 앙리의 즉위를 밀어붙여 결국 관철시킨다. 이후 노르망디, 플랑드르 등의 영지에서 후계자 관련 분쟁이 발발하자 이를 조정하고 중재하는 데에 힘썼다. 이후 왕비가 느베리 백작과 손잡고 아들들을 선동해 반란을 일으키게 부추기자 이에 대해서도 대응해야 했다. 반란은 큰 무리 없이 진압되었다.

1031년 멜룬에 있는 저택에서 열병으로 인해 죽었다고 한다.

3남 로베르는 부르고뉴의 공작이 되었는데, 그의 후손 앙리는 포르투갈 백작 엔히크가 되었고, 그의 아들 엔히크는 포르투갈의 왕 '아폰수 1세'라고 칭하며 독립하여 포르투갈의 초대 국왕이 되었다. 이후 보르고냐(부르고뉴) 왕조, 아비스 왕조, 브라간사 왕조를 거쳤지만 세 왕조 모두 카페 왕조의 방계 왕조들이었다.[7]

여담으로 로베르 2세와 콩스탕스의 딸 아델은 노르망디 공작 리샤르 3세의 미망인이었는데, 플랑드르 백작 보두앵 5세와 재혼하여 마틸다를 낳았다. 바로 이 마틸다가 바로 노르망디 공작이자 잉글랜드를 정복한 윌리엄 1세의 왕비였다. 엘리트 교육을 받아서 라틴어를 읽고 쓸 줄 알았기에 아들, 딸들에게 라틴어를 가르치기도 했다.

3. 공동왕 장남 위그

1007년에 출생한 로베르 2세의 장남으로 별칭은 대왕(Le Grand)이었다. 1017년 11세에 공동왕으로 즉위하여 부왕의 그늘 아래에서 통치권을 행사했지만 반란을 일으켰고, 1025년 9월 17일 19세의 나이로 요절했다.

나의 펜은 그가 보여주었던 훌륭하고 탁월한 모든 자질을 표현할 수 없도다. 모든 면에서 그는 최고 그 이상이었다. 그 어떤 애도도 그의 장점을 아우를 수 없다.
- 글래버의 랄프

4. 로베르 2세 시대의 사회상

4.1. 봉건제 정착

9세기 이후 카롤링거 가문이 내분과 분할로 약화되기 시작하면서, 여러 사회적 변화들이 일어났다. 가장 큰 변화는, 백작위를 비롯한 여러 지방 행정관 작위가 세습되기 시작한 것이었다. 더불어 농노제가 정착했으며, 지방 영주들은 이제 바이킹과 이슬람 등의 침략에 맞서 스스로가 자신이 사는 지역을 방어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그 카페 즉위 이전까지는 여전히 왕이 프랑크 왕국 전역에 걸쳐 폭넓은 사법권과 통치권을 행사할 수 있었으며, 도로나 교량, 도시 등 공적인 공간에 대한 세금을 매기거나 공권력을 투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위그 카페의 즉위에 즈음해 명백한 상하관계였던 왕과 영주들의 관계는 상하관계라기보다는 차라리 수평관계에 가깝게 바뀌었다. 위그 카페는 '영주들 중 가장 뛰어난 자'로서 즉위했고, 이는 왕이 더이상 왕국 전체의 유일한 통치자가 아닌 '영주들의 대표자' 정도로 격하되었다는 것에 불과했다. 실제로 위그 카페는 자치성이 강한 프랑스 남부에는 전혀 통치권을 행사하지 못했으며, 프랑스 북부에서도 노르망디나 플랑드르 등 일부 자치성이 강한 지역에 대해서도 통치권을 거의 행사하지 못했다.

이는 의례의 변화로도 나타났다. 이전까지는 영주가 왕에게 입조해 무릎을 꿇으며 경의를 표함으로서 충성을 맹세했다. 이는 왕이 신의 대리인이라는 관념의 표현이기도 했다. 그러나 위그 카페가 즉위하면서 무릎을 꿇으며 경의를 표하는 행동은 노예가 주인에게 하는 것으로, 자유인이 하느님에게 하는 것으로 인식되었고 영주가 왕에게 하는 것은 부적절하다는 인식이 퍼져나갔다. 대신 손등에 키스를 하는 의례가 정착했는데, 이는 영주와 왕이 사실상 동급이나 마찬가지라는 인식의 표현이었다.

한편 백작들은 점점 스스로 영주를 임명하기 시작했다. 일부 백작들은 다스리는 영역이 너무 넓을 때 자작을 임명해 그 지역을 대신 통치하도록 했으며, 때로는 성채 방어를 위해 성백을 임명하기도 했다. 물론 모든 성백이 임명직이었던 건 아니고, 일부 지역 토호는 스스로 성채를 짓고 성백을 자처하기도 했다. 이와 함께, Pagus 단위로 구성되어 도시가 통치의 중심이었던 이전 시대에서, 점점 모트 앤 베일리라 불리는 초기 형태의 영주의 개인 성채가 정착하고, 영주에게 귀속되지 않는 자유 토지가 사라지기 시작했으며, 장원이 통치의 중심지로 옮겨가기 시작했다. 몇몇 힘이 강한 영주들은 법을 사유화하고 자신이 마음대로 사법권을 행사해 그 지역 내에서 사실상 왕이나 다름없는 권력을 행사하기도 했다. 우리가 아는 봉건제의 모습이 로베르 2세 시대에 마침내 완성된 것이다. 이전까지는 오로지 왕만이 할 수 있었던 ban[8]이 이제 영주들이 사적으로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4.2. '하느님의 평화' 운동

10세기 이후 프랑스를 중심으로 서유럽에서는 '하느님의 평화'라고 불리는 일련의 사회운동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이 운동은 일종의 공의회 운동으로, 전쟁을 억제하고, 교회의 재산을 보호하며, 약자를 구원하고, 통치권을 안정시키며, 경제를 안정시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운동을 곧 가톨릭 교회로부터 지지와 후원을 얻게 되었고, 곧 서유럽 전역에 퍼져 나간다.

로베르 2세는 이 하느님의 평화 운동을 후원했을 뿐만 아니라, 그 운동을 직접 실천하기 위해 노력했다. 로베르는 1011년 오를레앙에서 공의회를 개최해, 위에서 말한 종류의 내용들을 확인하고, 반포했다. 그 내용이란 곧 교회에 대한 사법적 면책, 즉 교회에 대한 사회적 보호를 포함해 성직자의 비무장화 같은 내용 뿐 아니라 통치권 안정이라는 명목으로 그 당시에 형성되던 농노제를 포함한 봉건적 질서에 대한 공식적인 인정과 확인을 포함했다. 또한 기근에 맞서서 식량이나 가축을 훔치는 행위를 규제했으며, 당시 하나의 사법적 행위로 인정받았던 페데(fede), 즉 사적인 전쟁이나 복수에 대한 규제와 사순절 기간동안의 비무장도 주장했다.

하지만 이 운동은 프랑스 북부, 특히 카롤루스 왕조의 본거지였던 프랑스 북동부에서는 거의 힘을 쓰지 못했다.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평화 운동은, '지역적 영주나 교회'가 기반이 되어 수립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 운동은 본질적으로 지역 영주와 교회의 이권을 보호하고 왕과의 대등한 관계를 수립하는 것에 쐐기를 박는 운동이나 마찬가지여서, 여전히 왕만이 질서를 수립하고 반포할 수 있다는 관념이 우세했던 북동부에서는 이 운동에 시큰둥했다. 페데는 여전히 남발되었으며, 폭력은 근절되지 않았다. 북동부의 주교들은 남부와는 달리 이미 하나의 제후로서 자리잡은지 오래라, 굳이 자신들의 권리를 보호받는 것을 재차 확인할 필요가 없었다.[9] 이에 일부 남부 주교들은 농민들을 선동해 영주의 성채를 파괴함으로서 강제적인 비무장화를 이루려 시도했으나, 영주의 군대에 패배함으로서 하느님의 평화 운동은 종말을 맞이한다.

그러나 이 운동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 의의를 가지고 있다. 무엇보다도, 봉건질서를 신의 이름으로 정당화했다는 점,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쟁과 폭력을 근절하려 노력했다는 점이 가장 중요한 점이었다. 로베르는 이 운동을 적극 이용함으로서 공의회를 통해 교회에 영향력을 투사하려 노력하는 한편, 영주와 교회의 권리 보호에 힘썼다.

4.3. 3계급의 확립

봉건 시대의 세 계급이란, 기도하는 자(성직자)-싸우는 자(귀족)-일하는 자(기타 자유민과 농노)를 뜻한다. 카롤링거 왕조 후기부터 출현하기 시작한 이 세 계급의 구조는 로베르 2세 시기 들어 카페 왕조가 안정화되고 봉건제가 정착하면서 본격적으로 출현했다. 성직자 계급은 이제 점점 전통적인 책무인 기도와 미사 집전에서 벗어나, 특히 수도원들을 중심으로 하나의 영주화되기 시작했다. 수도원은 토지를 가지고 농노를 소유하며 그들에게서 세금을 걷고 노동력을 징발했으며, 교회법을 바탕으로 사법권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때로는 수도원이나 교회를 털러 오는 도적이나 이민족에 맞서서 스스로 무장하기도 했다.

귀족들은 이제 사실상 완전히 확립된 영주의 세습 현상에 발맞추어 가문을 중심으로 자신들을 재편했다. 족보 기록이 탄생하였으며, 성씨를 쓰기 시작했다. 성채를 중심으로 장원과 재산을 보호하며 스스로 무장하고 영지 내에서 사법권을 행사했다. 또 교회와 자신들에게 신속된 자유민, 농노들을 보호하는 것을 의무로 삼아 스스로를 정당화했다. 북동부의 주교들은 귀족이란 곧 모두 왕실의 후예라고 주장함으로서 왕과 귀족 간의 전통적인 상하관계를 되살리려 노력했으나, 결국 실패했고 귀족들은 스스로의 기원을 내세우기 시작했다.

한편 자유민들은 점점 더 농노로 예속되기 시작했다. 영주와 독립적으로 땅을 소유하는 자유민들은 줄었으며, 농노가 되거나 최소한 영주의 보호를 받는 존재가 되었다. 그들은 세금 외에도 영주에게 사적으로 봉사하는 의무까지 수행해야 했다.

이러한 질서는 그 당시 사회적 맥락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필요'했다. 성직자 계급은 스스로를 보호받기 위해 귀족이, 먹고 살기 위해 농노가 필요했으며, 귀족과 농노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이는 이상적인 모습이고, 당시의 사회는 이러한 의무들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정확히는 그런 것처럼 보였다). 주교들이 보기에 영주들은 농민을 보호하기 위해서가 아닌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싸웠으며, 성직자는 가난한 자를 위해서가 아닌 귀족과 스스로를 위해 기도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계급 체계는 어찌 됬건 간에 작동했다.

4.4. 수도원의 등장

10-11세기 동안, 교회를 개혁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활발해졌으며 그 결과 베네딕토회적 전통에 의해 수도원들이 건설되기 시작했다. 수도원은 현실과 격리된 작은 공동체에서 하느님의 신조를 지키며 생활하는 것을 목표로 건설된 것으로, 기존 교회 조직과 밀착해 공의회를 활용한 정치를 펼쳤던 위그 카페 및 이전의 카롤링거 국왕들과 달리 로베르 2세는 이 수도원을 적극 끌어들였다. 수도원은 처음에는 주교들에게 예속된 상태였지만 하느님의 평화 운동 등을 거치며 점점 더 독립적으로 변했으며, 왕과 영주들은 수도원에 토지를 하사하고 기부를 함으로서 그들을 자신들의 편으로 끌어들였다. 수도원들은 면세 특권을 받았고, 하나의 군벌이자 영주처럼 행사하는 기존 교회 조직을 비난했다. 무엇보다도 수도원들은 고대의 지식을 보존하고, 서로서로 지적 네트워크를 형성해 교류하는 역할을 맡았다. 이런 점에서 로베르는 기존의 주교들과는 달리 정치적으로 스스로 독립된 존재가 아니었던 수도원을 선호한 것이다.

4.5. '기적을 행하는 왕'

프랑스 아날학파 사학자 마르크 블로크의 책 제목으로도 유명한데, 중세 시대부터 프랑스 혁명 이전까지 왕들이 행사한 권능이었던 '기적', 특히 질병 치유는 왕이 신에게 선택받았다는 것을 증빙하는 중요한 의례 행위였다. 로베르 2세는 이러한 '기적'을 최초로 행한 왕으로도 유명하다. 그는 병자에게 손을 댐으로서 질병을 치유했으며(정확히는 그렇다고 보인 것이지만), 당대에 신의 징조로 여겨진 불길한 사건에 대해 전례들을 참고해 이것을 해석하는 역할을 했다. 봉건제의 정착으로 인해 왕과 영주의 지위가 동등해졌음에도 불구하고, 왕은 여전히 '신의 뜻을 대리하는 자'였다. 로베르는 기적이라는 새로운 의례를 통해 이 점을 무엇보다도 강조하고자 했으며, 이는 곧 왕의 권위를 강화하는 길이었다. 특히 로베르는 대관식에서, 여러 사람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이러한 의례를 행함으로서 왕의 신적 권위를 더욱 높였다. 그리고 이 의례는, 경건왕 루이 9세 이후 정기적인 의례행위로 바뀌어 왕권 강화를 더욱 부채질했다.

4.6. 경제성장과 무역

9세기 동안, 바이킹과 이슬람의 침략, 이민족의 약탈로 인해 경제적 쇠퇴기를 맞은 서유럽은 10세기 이후부터는 다시금 경제적으로 재도약하기 시작했다. 바이킹들 중에서도 약탈 대신 교역을 선택하거나, 아예 롤로처럼 현지에 정착하는 경우가 늘어났고, 이슬람의 위협도 점점 줄었다[10]. 마자르 족을 비롯한 이민족의 약탈도 현저히 줄었고, 무엇보다도 지방분권화가 촉진되면서 지방의 영주들과 토호들은 스스로를 무장하고 백성들을 보호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에 힘입어 무역이 다시금 재개되었고, 기술발전과 잉여 생산물의 증가에 힘입어 농업 생산량이 꾸준히 증가하기 시작했다. 정착한 약탈자들, 특히 노르만인들은 교회에서 약탈한 귀금속을 가지고 화폐를 주조해 경제를 활성화시켰고, 이에 교회와 수도원들도 화폐를 주조하였다. 이 화폐가 각지에 퍼져나가면서 화폐경제가 점점 활성화되었다. 이러한 경제적 변화는 특히 봉건제가 안정기에 접어든 로베르 2세의 시기부터 본격화되었다.

또한 미경작지나 지금까지 야생의 공간으로 남아있던 일부 황무지가 개간됨으로서 인구가 증가하고 식량도 증가하는 선순환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귀족과 성직자들은 개간과 생산량 증대를 적극 후원하고 장려했으며, 이에 따라 그들이 얻는 세금도 늘어났다. 귀족들은 제분소를 설치하거나 교량을 짓는 등 사회간접자본을 투자함으로서 이러한 변화를 부채질했다. 이에 따라 시장이 건립되고, 무역이 내륙까지 퍼져나갔다. 영주나 성주가 건설한 성들이 이러한 무역로를 보호함으로서 이전보다 더 안정적으로 교류가 가능해졌다.

화폐의 경우, 위그 카페의 즉위를 기점으로 점점 통일성이 떨어지고 각 지역마다 별개의 화폐를 주조하는 현상이 두드러졌다. 신성로마제국이 동쪽으로 확장하면서 새로운 은 광산이 발굴되었고, 이에 따라 전 유럽의 화폐 공급량이 늘어났다. 그러나 이와 함께, 왕이나 영주가 일부러 질 낮은 화폐를 발행함으로서 악성 인플레를 유도하는 중세시대의 나쁜 관행 또한 탄생했다. 한편, 로베르 2세는 하느님의 평화 운동의 일환으로, 재산권 보호라는 이름 하에 위조화폐 제작자들을 강하게 처벌하기 시작했다.
[1] 플랑드르의 마틸다의 어머니[2] 도시에서 장원으로 정치적, 경제적 중심지가 넘어가는 시기였다.[3] 즉 로베르의 막내숙부[4] 모든 종류의 육체적 성관계 일체 거부[5] 한번 죄를 지으면 어떤 식으로든 용서받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6] 이는 위그 카페의 즉위에도 적용되었던 명분이다[7] 보르고냐 왕조의 서자 출신이 아비스 왕조를 세웠고 브라간사 왕조는 아비스 왕조의 서자 출신이 세운 분가이다.[8] 어떠한 것에 대한 금지령을 뜻한다. 때로는 군사 소집령을 뜻하기도 했는데, 여기서는 주로 전자를 의미한다. 금지령의 정치적 의미에 대해선 메로빙거 왕조 문서 참조[9] 북동부 주교들은 위그 카페의 즉위에 즈음한 사회적 변화, 즉 왕권의 약화와 영주권의 강화로 인한 사회적 혼란의 부작용에 대해서는 위기감을 느꼈다. 그들은 ban을 비롯한 일체의 사법권과 판단권은 오로지 왕만이 할수 있는 일이라 보았다. 반면 하느님의 평화 운동은 이러한 현실을 오히려 인정하고 이를 바탕으로 평화를 확립하려 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10] 물론 이슬람과 얼굴을 맞대고 살던 스페인은 예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