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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10 07:25:46

루이 10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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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f><colcolor=#002395>
프랑스 카페 왕조 제12대 국왕
루이 10세
Louis X
파일:Louis X of France.png
출생 1289년 10월 4일
프랑스 왕국 파리
사망 1316년 6월 5일 (향년 26세)
프랑스 왕국 발드바른
재위기간 나바라 국왕
1305년 4월 ~ 1316년 6월 5일
샹파뉴 백작
1305년 4월 ~ 1314년 11월 29일[1]
프랑스 국왕
1314년 11월 29일 ~ 1316년 6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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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f><colcolor=#002395> 가문 카페 가문
아버지 필리프 4세
어머니 호아나 1세
형제자매 마르그리트, 필리프 5세, 블랑슈, 샤를 4세, 이자벨, 로베르
배우자 마르그리트 드 부르고뉴[2]
(1305년 결혼 / 1315년 사망)
헝가리의 클레망스[3]
(1315년 결혼)
자녀 호아나 2세, 장 1세
종교 가톨릭
별칭 완고왕(Le Hutin/The Stubborn) }}}}}}}}}
1. 개요2. 생애3. 가족
3.1. 자녀
4. 그 외5. 대중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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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 왕국 카페 왕조의 제12대 국왕. '미남왕 필리프 4세나바라 왕국 여왕 호아나 1세 사이에서 태어난 장남이었다. 프랑스 역사상 최초의 프랑스-나바라 동군연합의 왕이다.

"다투는 자(le Hutin)"라는 별명으로 알려져 있는데 루이 10세의 격정적이고 충동적인 성격을 반영한 것으로 여겨진다. 재위 기간이 무척 짧았음에도 불구하고 왕권 강화를 목표로 여러 개혁을 시도했다. 특히 그는 봉건제 약화를 위해 노력했는데, 1315년 농민 해방령을 선포하여 왕실 영지 내 농민들에게 자유를 부여하는 조치를 취했다.[4] 이러한 조치는 필리프 4세 때부터 이어져 온 봉건제 약화 정책의 연장선에 있었지만, 루이 10세의 개혁은 더욱 과감한 편이었다. 그중 농민 해방령 외에도 세금 체계와 관련된 개혁을 검토했으나, 이를 실현할 시간적 여유가 부족했다. 그는 왕실 재정 확충을 위해 도시와 귀족들에게 새로운 세금을 부과하려는 시도를 했으나, 귀족들과의 충돌이 잦아 정책 추진에 어려움을 겪었다.

이 과정에서 그는 당시 필리프 4세재무총감이었던 기욤 드 마리니를 비롯한 대귀족들을 처형하며 공포정치를 펼쳤다. 기욤 드 마리니는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던 인물이었는데, 루이 10세는 그에게 누명을 씌워 박피형과 교수형에 처했다. 기욤 드 마리니가 "나는 당신의 아버지를 충실히 섬겼고, 당신에게도 변함없이 충성을 바칠 것입니다."라고 호소했음에도 불구하고, 루이 10세는 극도로 잔인한 형벌을 내렸다. 또한 간통을 저질러 유폐된 자신의 왕비 마르그리트 드 부르고뉴를 교살하고 여러 귀족들을 처형하며 왕권 강화를 위한 과감한 조치를 취했으나 이러한 공포정책은 오히려 귀족들의 원성을 크게 샀다. 이러한 잔혹한 행위는 그의 이른 죽음에 암살설을 불러일으켰으며, 그럴싸한 음모론으로 남아 있다.

1315년에서 1317년에 걸쳐 발생한 대기근도 그의 통치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로 인해 재정 상황이 악화되어 정책 집행이 어려웠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개혁들이 진행되었으나 결국 미완에 그쳤다. 왕권 강화를 위한 개혁들은 그의 급하고 충동적인 성격 때문에 적잖은 갈등을 일으켰고, 이는 귀족들과의 대립으로 이어졌다.

첫번째 아내 마르그리트 드 부르고뉴와의 사이에서 딸 잔느를 두었으나 마르그리트가 기사 필리프 드 오네이와 간통을 저질렀다가 들통나는 일명 넬탑 사건으로 인해 친자인지 확실치 않은 상태였다. 이에 루이 10세는 1316년 왕명으로 마르그리트를 교살하고 헝가리의 클레망스와 재혼하여 적법한 후계자를 얻으려 했으나 결국 26세의 나이에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그의 죽음은 카페 왕조의 계승 위기를 불러왔고, 그의 동생 필리프 5세가 왕위를 계승하게 되었다.

루이 10세의 짧은 치세는 카페 왕조의 절대왕정 체제가 공고화되어 가는 과정에서 나타난 과도기적 혼란을 잘 보여주는 시기였다. 그의 정책과 통치는 왕권 강화와 봉건제 약화를 추구하며 후대 프랑스 왕들의 절대왕정 통치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2. 생애

1309년 프랑스의 왕자 시절[5] 부르고뉴 공작 로베르 2세의 장녀 마르그리트 드 부르고뉴[6]와 결혼해서 딸 잔느를 낳았다. 하지만 1314년 마르그리트가 동생 필리프 5세의 친구인 필리프 드 오네이와 불륜 관계였다는 사실이 드러나자[7], 그녀를 동생 필리프 5세의 아내인 부르고뉴 여백작 잔, 샤를 4세의 아내인 블랑슈 드 부르고뉴와 함께 감옥에 가두었다.[8] 그나마 부르고뉴 여백작 잔은 동서들의 불륜을 알고도 방관하기만 해서[9] 죄상이 가장 가볍다고 인정되어 잠깐 유폐되었다가 다시 명예를 회복할 수 있었지만, 실제로 불륜을 저지른 마르그리트와 블랑슈는 머리를 삭발당하고 내연남들이 교수척장분지형으로 끔찍하게 처형당하는 걸 직접 목도한 뒤 지하에 감금되었다.[10]

그렇게 마르그리트를 유폐시킨 후 1314년 부왕 필리프 4세가 사망하자 뒤를 이어 프랑스-나바라 왕국의 왕이 되었다.[11] 그래서 프랑스 왕으로는 '루이 10세'지만 나바르 왕으로는 '루이스 1세'가 된다. 즉위 당시 딸 잔느가 살아있었지만 위에서 서술한 마르그리트의 불륜 스캔들로 친딸인지 확실치조차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재혼을 위해 1315년 4월 30일 왕명으로 마르그리트를 교살했고[12] 이후 두 번째 부인으로 헝가리의 클레망스와 결혼했다. 하지만 즉위한 지 고작 2년도 채 안 된 1316년 6월 3일 테니스를 치다가 포도주를 마시고 3일 만에 2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13][14] 그리고 루이 10세의 이른 죽음이 카페 왕조 몰락의 단초가 되고 말았다.

자녀로는 전 부인 마르그리트에게서 얻은 잔느(1312~1349)[15]와 둘째 왕비 클레망스에게서 얻은 장 1세가 있었다. 루이 10세가 사망할 당시 장은 클레망스의 뱃속에 있다가 유복자로 태어났지만 고작 5일 만에 죽어 왕위 계승을 둘러싼 분쟁이 일어났다. 딸 잔느는 《살리카법》 때문에 프랑스의 왕이 되지는 못했지만, 1328년 샤를 4세의 죽음으로 나바라의 왕위를 상속받아 호아나 2세로 즉위했다. 나바라 왕국은 호아나 2세를 거쳐 여러 번 모계 계승을 거쳤지만 핏줄은 단절되지 않았고, 그 후 부르봉 왕조앙리 4세의 모계 조상이 되었다.

3. 가족

3.1. 자녀

자녀 이름 출생 사망 배우자 / 자녀
마르그리트 드 부르고뉴
(Marguerite de Bourgogne)
1녀 호아나 2세
(Joan II of Navarre)
1312년 1월 28일 1349년 10월 6일 필리페 3세
슬하 4남 5녀[16]
헝가리의 클레망스
(Clementia of Hungary)
1남 장 1세
(John I of France)
1316년 11월 15일 1316년 11월 20일

4. 그 외

5. 대중매체


[1] 프랑스 국왕으로 즉위하며 샹파뉴 백국이 프랑스 왕령(王領)으로 편입된다.[2] 부르고뉴 공작 로베르 2세의 차녀.[3] 헝가리어 이름은 '클레멘치어(Klemencia)', 프랑스어 이름은 '클레망스(Clémence)'로, 둘 다 같은 이름이다.[4] 실상은 국고 수입을 위한 현실적인 목적이었긴 했다.[5] 왕자 시절이라고 하지만 당시 루이 10세는 죽은 어머니 호아나 1세를 계승하여 상퍄뉴 백작 겸 나바라 국왕이었다.[6] 참고로 아버지 필리프 4세의 고종사촌으로 오촌 고모였다. 필리프 4세의 고모 프랑스의 아녜스(루이 9세의 막내딸)가 로베르 2세와 결혼하여 낳은 딸이 마르그리트.[7] 사건의 전모는 이렇다. 1313년 영국에 시집갔던 필리프 4세의 딸 프랑스의 이자벨이 친정에 방문하여 오빠들인 루이, 필리프, 샤를 형제에게 비단 주머니를 선물했고 그들은 이걸 자신들의 아내에게 선물했다. 필리프의 아내 잔은 그 주머니를 소중히 간직했지만 마르그리트와 블랑슈는 내연남인 필리프 드 오네이와 고티에 드 오네이[17]에게 선물했고, 오네이 형제는 마르그리트와 블랑슈보다 더 어리석었는지 이자벨이 참석한 연회에 보란듯이 이 주머니를 착용하고 다니는 미친 짓을 저지른다. 당연히 이걸 보고 매우 놀란 이자벨은 아버지 필리프 4세와 비밀리에 접선해 오빠들의 아내가 불륜을 저지르고 있다고 보고했고 필리프 4세가 비밀리에 조사하면서 며느리들의 불륜 사실을 알아낸 것.[8] 이 일은 딸 잔느가 필리프 드 오네이의 사생아라는 의혹을 받아 필리프 5세에게 왕위를 빼앗기는 명분이 되었다.[9] 그 이유는 불륜을 저지른 블랑슈가 다름아닌 잔의 여동생이었기 때문이다.[10] 이 필리프 4세의 며느리들의 단체 불륜 스캔들을 통칭 넬탑 사건이라고 부른다. 마르그리트와 블랑슈가 오네이 형제들과 밀회를 즐기던 곳이 넬탑이었기에 붙여진 이름. 이후 마르그리트는 간통죄로 탑에 유폐된 채로 살다가 남편에게 교살, 블랑슈도 샤를과의 혼인이 무효화되고 수도원에 평생 유폐된 채 살다가 사망했다.[11] 나바라 왕위는 그보다 전인 어머니 호아나 1세가 사망했을 때 물려받았다.[12] 그녀의 오빠인 기욤 드 마리니도 박피형과 교수형으로 처형당했다. 기욤 드 마리니는 필리프 4세의 재무총감으로 막강한 권력을 누리다가, 루이 10세에 의해 제거되었는데 아직까지 회자될 정도로 처형방식이 잔인한 걸로 유명하다. 먼저 파리에서 말꼬리에 매달려 끌려다녔고 램지 스노우가 보여줬던 박피 고문을 장터에서 받았다고 한다. 처형자들은 기욤 드 마리니의 피부를 조금씩 벗겼다는데 기욤은 누명을 썼던지라, 끝까지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며 비명을 지르고 괴로워했고 박피 고문이 끝난 후 교수형에 처해졌다. 시신은 좌우에 개 두마리를 매단 후 같이 방치했다고 하며 죽기 전 루이 10세에게 보낸 편지에 "나는 당신의 아버지(필리프 4세)를 충실히 섬겼고, 당신에게도 변함없이 충성을 바칠 것입니다."라고 호소했지만 처형은 그대로 진행되었고 사후에도 공개 박피형을 받은 가장 유명한 귀족이 되었다. 당시의 기준으로도 이단과 반란죄도 짓지 않은 고위 귀족에게 박피형을 내린 건 이례적이고 충격적이었던 모양. 여기에는 루이 10세의 충동적이고 극단적인 성향이 한몫 했다고 본다.[13] 공식적인 사인은 폐렴으로 인한 늑막염이지만 며칠 전까지만 해도 테니스 같은 구기종목을 활발하게 하던 사람이 폐렴이 악화되어 죽었다는 것으로 보아 독살 의혹이 제기된다.[14] 연대기에 따르면 과도한 음주와 격렬한 운동으로 사망했다고 하는데 루이 10세는 사냥을 마치고 돌아온 후 시원한 술을 너무 많이 마셨고 이로 인해 폐렴이나 흉막염에 걸렸다고 한다.[15] 단 루이 10세는 독주를 마시고 사망하기 직전에 잔느를 혈육으로 인정했다고 전해진다.[16] 카를로스 2세, 롱그빌 백작 필리프, 두라초 공작 루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