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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01 23:16:40

헨리케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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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nrike I.a, Gizena
가문 블루아 가문(샨파냐 왕조)
생몰년도 1244년 ~ 1274년 7월 22일
출생지 미상
사망지 나바라 왕국 팜플로나
재위
기간
샹파뉴 백작 1270년 - 1274년
나바라 왕국의 국왕 1270년 - 1274년
아버지 티발트 1세
어머니 부르봉의 마르그리트
친형제 엘레오노르, 페드로, 마르그리트, 티발트 1세, 베아트리체
이복 형제 블랑슈, 아그네스, 마르케사 길 데라다
배우자 아르투아의 블랑슈
자녀 티발트, 호아나 1세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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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나바라 왕국 20대 국왕.

2. 생애

1244년경 나바라 왕국의 국왕이자 샹파뉴 백작인 티발트 1세와 부르봉 백작 아르캄보 8세의 딸인 마르그리트의 아들로 출생했다. 친형제로 엘레오노르, 페드로, 마르그리트, 티발트 2세, 베아트리체가 있었고, 이복 형제로 블랑슈, 아그네스, 마르케사 길 데라다가 있었다. 14세의 나이에 호스네 백작이 되었고, 호스네 백국의 연간 수입의 4/5인 5,000리브르를 형이자 나바라 국왕인 티발트 2세로부터 매년 지급받았다.

1265년 베아른 자작 가스통 7세의 딸 콩스탕스와 약혼했지만, 샹파뉴 백국-나바라 왕국과 베른이 연합하면 장차 잉글랜드 왕국의 프랑스 영지를 위협할 것을 우려한 잉글랜드 국왕 헨리 3세의 압력을 받으면서 포기했다. 사실, 그는 이 결혼에 거의 관심이 없었고 라카라 가문의 처녀와 혼외정사를 가져 사생아인 후안 헨리케 데 라카라를 낳았다. 1269년 아르투아 백작 로베르 1세의 딸이자 프랑스 국왕 루이 9세의 조카인 아르투아의 블랑슈와 결혼했다.

1270년 형이 루이 9세의 제8차 십자군 원정에 참여했을 때, 나바라 총독으로 발탁되어 그를 대신해 통치를 행사했다. 티발트 2세는 루이 9세가 병사한 뒤 귀국길에 올랐으나 1270년 12월 7일 시칠리아의 트라파니에서 전염병에 걸려 죽었다. 그는 이 소식을 전해듣고 1271년 3월 1일 나바라 국왕 및 샹파뉴 백작으로 선임되었다. 이 무렵 카스티야 왕자 펠리페가 카스티야 왕국의 국왕이자 자기 형인 알폰소 10세에 맞서 반란을 일으키기로 마음먹고, 그에게 자신의 편을 들면 나바라 왕국에 영토를 일부 떼주겠다고 제의했다. 그러나 그는 일이 잘못될 것을 우려해 펠리페의 제의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실제로 펠리페의 반란은 실패했다.

1272년 카스티야 국왕 알폰소 10세와 만나 2살된 아들 티발트와 알폰소 10세의 딸 비올란테와 결혼시키는 문제를 상의했다. 그러나 티발트는 1273년에 유모가 에스텔라 성 창문에서 실수로 떨어뜨리는 바람에 사망했다. 그해 딸 호아나를 낳고 왕위 계승자로 지명했지만, 1274년 7월 22일에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그는 음식을 과도하게 섭취해서 무척 뚱뚱했고, 지방이 지나치게 쌓여서 숨이 막혀 죽었다고 한다. 사후 유일한 자녀인 호아나가 나바라 여왕이자 샹파뉴 여백작 호아나 1세로 등극했고, 어머니 블랑슈가 섭정을 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