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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da121a><colcolor=#f2cc0c> 나바라 왕국 제21대 국왕 호아나 1세 Joana I.a Nafarroakoa | |
출생 | 1273년 1월 14일 |
프랑스 왕국 아르시외르센 | |
사망 | 1305년 4월 2일 (향년 32세) |
프랑스 왕국 뱅센 성 | |
재위 | 나바라 왕국의 왕, 샹파뉴 백국의 백작 |
1274년 7월 22일 ~ 1305년 4월 2일 | |
배우자 | 필리프 4세 (1284년 결혼) |
자녀 | 마르그리트, 루이 10세, 블랑슈, 필리프 5세, 샤를 4세, 이자벨, 로베르 |
아버지 | 헨리케 1세 |
어머니 | 아르투아의 블랑슈 |
형제 | 티발트(티보) |
종교 | 가톨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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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나바라 왕국의 21대 여왕, 샹파뉴 여백작, 프랑스 왕비. 상파뉴 가문 마지막 여왕이자 백작2. 생애
1273년 1월 14일 프랑스 왕국 샹파뉴 백국의 아르시외르센에서 나바라 왕국 20대 국왕이자 샹파뉴 백작 헨리케 1세와 아르투아 백작 로베르 1세의 딸이자 프랑스 국왕 루이 9세의 조카인 블랑슈의 딸로 출생했다. 형제로 티발트(티보)가 있었으나, 3살 때인 1273년 유모가 에스텔라 성 창문에서 실수로 떨어뜨리는 바람에 사망했다. 헨리케 1세는 곧바로 나바라 의회를 소집한 뒤 나바라 귀족들에게 유일하게 남은 자식인 호아나를 차기 국왕으로 섬기길 맹세하게 했다.이듬해인 1274년 7월 22일 아버지가 30세의 나이로 돌연사하면서 1살의 나이에 여왕이 되었고, 어머니 블랑슈가 섭정을 맡았다. 블랑슈는 장례식을 마친 뒤 팜플로나 대성당에서 의회를 소집해 여왕이 성년이 될 때까지 나바라 왕국을 다스릴 총독을 뽑았다. 카스칸테의 영주이자 티발트 2세 치세 때 궁재를 맡았던 페드로 산체스 데 몬테아구도와 나바라 왕국의 수도 팜플로나를 구성하는 3개 자치구 중 하나인 나바레리아 대표자인 가르시아 알모라비드, 왕실군 사령관인 곤살로 이바녜스 데 바스탄이 경합했다. 의회는 논의 끝에 페드로 산체스 데 몬테아구도를 나바라 총독으로 선임했다.
얼마 후, 아라곤 왕국의 하이메 1세가 나바라 왕위를 노리고 아들 페드로 왕자(훗날 페드로 3세)를 나바라 왕국에 파견했다. 페드로는 여러 나바라 귀족들과 접촉해 지난날 산초 레미리스, 페드로 1세, 그리고 알폰소 1세가 나바라 왕위를 겸했던 과거를 상기시키면서, 아라곤 국왕들은 나바라인들의 관습을 존중했지만 샹파뉴 백국 출신 국왕들은 이를 무시하고 프랑스식 법률을 강요하고 착취를 일삼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자신을 왕으로 세우거나 후계자로 선정한다면 나바라인들의 관습이 존중받고 특권을 인정해주겠다고 제안했다.
1274년 8월 27일, 팜플로나 대성당에서 의회가 재차 열렸다. 나바라 총독 페드로 산체스 데 몬테아구도, 팜플로나의 주교, 그리고 다수의 귀족들은 아라곤 왕국과 마찰을 벌이는 것은 좋지 않으니 여왕을 페드로 왕자와 맺어주는 게 좋겠다고 주장했다. 반면 가르시아 알모라비드와 나바레리아 및 산 미구엘 자치구 의회는 카스티야 국왕 알폰소 10세를 여왕의 후견인으로 삼자고 주장했다. 블랑슈와 그녀를 추종하는 샹파뉴 출신 귀족들은 프랑스 국왕 필리프 3세의 보호를 받기를 희망했다. 의원들은 논의 끝에 총독과 주교를 대표로 삼은 사절단을 페드로 왕자에게 보내 자세한 사항을 협의하기로 했다.
나바라 대표단은 타라조나에서 페드로 왕자와 만났다. 페드로는 자신에게 나바라 왕위를 승계받을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면서도, 자신의 아들인 하이메 왕자와 호아나 여왕을 결혼시킨다면 여왕의 권리를 보장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면서 이 결혼이 성사될 경우 나바라 왕국을 지켜주겠으며, 나바라 의회가 국정을 자유롭게 운영하도록 해주겠다고 덧붙였다. 1274년 11월 1일, 올리테에서 팜플로나의 3개 자치구 출신 귀족들 외에도 60개 넘는 마을에서 선정된 성주와 변호사들이 참석한 나바라 의회가 재차 소집되었다. 그들은 페드로 왕자의 제안을 검토한 끝에 나바라 왕국의 안위를 보장받으려면 그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이 최선이니, 하이메 왕자를 팜플로나로 초대하여 1년간 지내게 한 후 결혼식을 거행하고 공동 왕으로 세우기로 결의했다.
그러나 역시 나바라 왕위를 노리고 있던 카스티야 국왕 알폰소 10세가 이를 가로막았다. 그는 나바라 왕국과 카스티야 왕국의 국경 지대인 라 리오하에 군대를 집결시킨 뒤 장남 페르난도 데 라 세르다에게 지휘권을 맡겼다. 페르난도는 곧장 군대를 이끌고 나바라 왕국 영내로 쳐들어가서 11월 18일 멘다비아를 공략한 후 비아나를 포위했다. 하지만 비아나 수비대와 시민들의 격렬한 저항으로 인해 쉽사리 공략하지 못하다가 겨울 추위가 도래하자 많은 병력을 잃고 멘다비아로 철수했다. 블랑슈 왕비는 카스티야 왕국군을 물리친 비아나 시민들에게 찬사를 보내며, 그들의 세금을 몇 년간 면제하고 특권을 부여했다.
1275년 4월 14일, 블랑슈는 샹파뉴 백작령에 잠시 들르겠다며 딸을 데리고 팜플로나를 떠났다. 그녀는 샹파뉴에 도착하자마자 프랑스 국왕이자 사촌인 필리프 3세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그러면서 프랑스 왕의 두 아들 루이 또는 필리프와 호아나를 결혼시키겠다고 약속했다. 필리프 3세는 즉시 수락하고 팜플로나에 사절을 보내 이 사실을 알리며, 나바라 왕국의 안위를 보장해줄 테니 자신이 여왕의 후견인이 되는 것을 받아들이라고 권고했다.
나바라 총독 페드로 산체스 데 몬테아구도와 대다수 귀족들은 블랑슈 왕비의 선택을 받아들이기로 하고 프랑스 국왕에게 충성을 서약했다. 그러나 친 카스티야 성향인 가르시아 알모라비드, 곤살로 이바녜스 데 바스탄은 일부 귀족들과 함께 나바레리아 자치구 주민들에게 반란을 선동했다. 나바레리아 주민들은 자치구를 둘러싼 성벽 위에 농성전에 필요한 무기를 세우고 식량을 비축했다. 나바라 의회는 이를 문제삼아 나바레리아 귀족들의 포도원, 과수원 및 토지 작물을 베어버리는 식으로 처벌을 내렸다. 그러나 나바레리아 측은 이에 굴하지 않고 농성을 이어갔고, 알폰소 10세에게 사절을 보내 속히 팜플로나로 와달라고 청했다.
나바라 총독 페드로 산체스 데 몬테아구도는 군대를 이끌고 나바레리아 자치구를 둘러싼 성벽 앞으로 가서 설득을 시도했지만, 가르시아 알모라비드는 위협적인 태도를 보이며 그의 권위를 인정할 수 없다고 답했다. 결국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던 페드로 산체스는 총독 직을 사임했고, 호아나 1세의 후견인을 자처한 필리프 3세는 프랑스군 장군이자 남작인 외스타슈 드 보마르카이를 나바라 총독으로 세웠다. 외스타슈는 툴루즈에 기사와 석궁병들을 소집한 뒤 팜플로나에 입성했다. 그 후 나바레리아에 복종하라고 명령했으나 묵살당하자, 나바라 의회를 소집한 뒤 나바레리아 자치구 인사들을 멘다비아를 점령한 카스티야군과 내통한 반역자로 간주하고 토벌하기로 결의했다.
1276년 7월 4일, 프랑스군 및 팜플로나의 다른 2개 자치구(산 세르닌, 산 니콜라스)에서 모집한 민병대를 이끌고 나바레리아 성채를 포위했다. 그 후 2개월간 이어진 공방전 끝에 9월 말 프랑스군이 성벽을 돌파하면서 종결되었다. 가르시아 알모라비드, 곤살로 이바녜스 데 바스탄 등 일부 귀족은 탈출했지만, 미처 피하지 못한 주민들은 참혹한 최후를 맞이했다. 프랑스군과 2개 자치구 민병대는 나바레리아로 쏟아져 들어가서 그 일대를 철저히 약탈하고 남자를 죽이고 여자를 강간했으며, 곳곳에 불을 질렀다.
많은 주민이 대성당으로 피신했지만, 약탈자들은 대성당 역시 쳐들어가 닥치는 대로 죽이고 약탈했다. 그 결과 대성당에 보관된 재물들을 포함한 모든 귀중품들이 도난당했으며, 금박을 입힌 헨리케 1세의 묘관도 파괴되었다. 나바레리아에 있던 건물들은 대성당을 제외하고 전부 파괴되었고, 인접한 산 미구엘과 유대인 지구도 화재가 번지면서 큰 피해를 입었다. 그 후 나바레리아는 거의 반 세기 동안 버려졌다가 1324년 카페 왕조의 샤를 4세에 의해 재건되었다.
나바라 왕국의 수도 팜플로나에서 이같은 참극이 벌어졌지만, 아라곤 왕국과 카스티야 왕국은 내부의 반란과 무슬림들의 침략으로 인해 이를 제대로 이용하지 못했다. 그 사이에 프랑스 본토에서 파견한 추가 병력이 나바라 왕국 전역을 통제했고, 강대국인 프랑스를 적대할 수 없었던 아라곤과 카스티야 왕국은 프랑스가 나바라 왕국을 보호국으로 삼는 것을 받아들였다.
한편, 호아나 1세는 1275년 필리프 3세의 아들 필리프와 약혼했다. 이후 파리의 프랑스 궁정에서 자란 그녀는 1284년 8월 16일 필리프와 정식으로 결혼했다. 1285년 필리프 3세가 사망하고 남편 필리프가 필리프 4세로서 즉위하면서, 그녀는 프랑스 왕비가 되었다. 또한 필리프 4세는 나바라의 공동 왕 필리페 1세로 즉위했고, 나바라 왕국은 이때부터 프랑스의 일부가 되었다. 참고로 호아나의 프랑스식 이름은 잔(또는 잔느)이다.
호아나 1세와 필리프 4세 부부는 서로를 깊이 사랑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녀는 필리프 4세와의 사이에서 4남 3녀를 낳았는데, 그 중 딸 마르그리트, 블랑슈, 아들 로베르는 요절하고 무사히 성장한 아이들은 루이, 필리프, 샤를, 이사벨라였다. 루이, 필리프, 샤를은 각각 루이 10세(나바라의 루이스 1세), 필리프 5세(나바라의 필리페 2세), 샤를 4세(나바라의 카를로스 1세)로 즉위하게 된다. 또한 유일하게 장성한 딸 이사벨라는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2세와 혼인해 에드워드 3세의 모후가 되었다.
호아나는 프랑스 왕비가 된 이래 나바라에 단 한 번도 찾아가지 않고 궁정에 머물렀다. 1294년 필리프 4세는 자신이 아들 루이가 아직 미성년자일때 사망할 경우 그녀가 프랑스 왕국의 섭정을 맡는다는 법령을 공포했다. 그녀가 이렇듯 프랑스에서 왕비로 지내는 동안, 나바라 왕국에서는 필리프 4세가 선임한 총독들이 통치를 이어갔다. 그녀의 이름으로 칙령이 내려지고 그녀의 얼굴이 새겨진 동전이 발행되긴 했지만, 그녀는 나바라에 대해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았다.
반면, 호아나는 샹파뉴 백국에 보다 많은 관심을 뒀다. 그녀는 정기적으로 샹파뉴를 방문해 백작으로서의 의무를 수행했다. 프랑스와 잉글랜드가 전쟁을 벌이고 있던 1301년,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1세의 딸 엘레오노르와 결혼했던 바르 백작 앙리 3세는 장인의 지시에 따라 샹파뉴를 침공했다. 당시 남편은 잉글랜드군과 대적하느라 샹파뉴 방위를 도와줄 수 없었지만, 그녀는 홀로 군대를 일으켜 앙리 3세를 격파한 뒤 플랑드르 백국의 지하감옥에 수감했다. 앙리 3세는 4년간 감옥에 갇혀 있다가 일부 요새를 샹파뉴에 넘기는 대가로 풀려났다.
3. 사후
1305년, 호아나 1세는 출산하던 중 아기와 함께 사망했다. 그녀의 유해는 파리의 코르델리에 수녀원에 안장되었다. 1308년, 트루아의 주교 기샤르는 마법으로 그녀를 살해했다고 의심한 필리프 4세에 의해 체포되어 감옥에 수감되었다가 1313년에 겨우 풀려났다. 호아나 사후 장남 루이 10세가 나바라 국왕이자 샹파뉴 백작 루이스 1세로 즉위했다가 1314년 11월 29일 아버지가 사망한 후 프랑스 왕위를 겸임했다. 그러나 2년만에 갑작스럽게 사망했고, 루이 10세의 갓 태어난 아들 장 1세가 왕위에 올랐으나 5일만에 사망했다.이후 루이 10세의 동생 필리프 5세는 살리카법을 앞세워 루이 10세의 딸 잔의 왕위 계승권을 부정하고 자신이 프랑스 국왕이자 나바라 국왕으로 즉위했다. 하지만 필리프 5세 역시 즉위 6년만에 29세의 나이로 갑작스럽게 사망했고, 필리프 5세의 자녀인 잔, 마르가리트, 이사벨, 블랑슈는 살리카법 때문에 프랑스 왕위를 계승받지 못했다. 이에 따라 필리프 5세의 동생인 샤를 4세가 왕위에 올랐으나, 즉위 6년만인 1328년 33세의 나이로 자식을 두지 못한 채 사망했다. 이리하여 프랑스에서의 카페 왕조는 단절되고 필리프 드 발루아가 필리프 6세로서 발루아 왕조를 개창했다. 한편 루이 10세의 딸이자 호아나 1세의 손녀인 잔은 1328년 살리카법이 적용되지 않는 나바라 왕국의 여왕 호아나 2세로 즉위했다.
4. 가족
4.1. 자녀
자녀 | 이름 | 출생 | 사망 | 배우자/자녀 |
1녀 | 프랑스의 마르그리트 (Margaret of France) | 1288년 | 1300년 | |
1남 | 루이 10세 (Louis X) | 1289년 10월 4일 | 1316년 6월 5일 | 마르그리트 드 부르고뉴 슬하 1녀[1] |
헝가리의 클레망스 슬하 1남[2] | ||||
2녀 | 프랑스의 블랑슈 (Blanche of France) | 1290년 | 1294년 4월 13일 | |
2남 | 필리프 5세 (Philippe V) | 1292년 | 1322년 1월 3일 | 부르고뉴 여백작 잔 2세 슬하 4녀 |
3남 | 샤를 4세 (Charles IV) | 1294년 | 1328년 2월 1일 | 슬하 1남 1녀 |
마리아 폰 룩셈부르크 슬하 1남 1녀 | ||||
잔 데브뢰 슬하 3녀 | ||||
3녀 | 잉글랜드의 왕비 이사벨라 (Isabella, Queen of England) | 1295년 | 1358년 8월 22일 | 에드워드 2세 슬하 2남 2녀[4] |
4남 | 프랑스의 로베르 (Robert of France) | 1296년 혹은 1297년 | 1308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