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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5-28 14:29:55

카를로스 4세(나바라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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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카를로스 4세(나바라 왕국).jpg[1]
Karlos IV.a Nafarroakoa
가문 트라스타마라 왕조
출생 1421년 5월 29일
카스티야 왕국 페냐피엘
사망 1461년 9월 23일 (향년 40세)
아라곤 왕국 카탈루냐 지방 바르셀로나
재위
기간
나바라 왕국 국왕 1441년 ~ 1461년
나바라 왕국 총독 1441년 ~ 1451년
카탈루냐 공국 총독 1458년 ~ 1461년
아버지 추안 2세
어머니 수리아 1세
형제 후안, 수리아 2세, 레오노르, 페르난도 2세(이복 형제), 후아나(이복 누이)
배우자 클레페의 아그네스 (1439년 결혼 / 1448년 사망)
자녀 아나(사생아), 펠리페(사생아), 후안(사생아)

1. 개요2. 생애3.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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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나바라 왕국 대립 왕. 어머니 수리아 1세와 맺었던 약속을 지키지 않고 나바라 왕위를 독차지한 아버지 추안 2세에 반기를 들었으나 진압되었다. 이후 아버지에게 복종한 뒤 카탈루냐 총독으로 부임했다가 또다시 체포되었고, 카탈루냐인들의 대규모 반란에 놀란 아버지가 석방시킨 뒤 카탈루냐로 돌아갔으나 얼마 안가 사망했다.

2. 생애

1421년 5월 29일 카스티야 왕국 페냐피엘에서[2] 아라곤 국왕 페르난도 1세의 둘째 아들 후안과 나바라 국왕 카를로스 3세의 딸 수리아 1세의 아들로 태어났다. 형제로 후안, 수리아 2세, 레오노르가 있었다. 그는 나바라 왕국의 올리테 왕궁에서 교육받았으며, 카를로스 3세로부터 수리아 이후 나바라 왕위 계승자로 확인받고 비아나 공의 칭호를 받았다. 1439년 클레베 공작 아돌프 1세의 딸 아그네스와 결혼했다.

1441년 4월 1일, 나바라 여왕 수리아 1세가 산타 마리아 라 레알 데 니에바(오늘날 세고비아)에서 사망했다. 그녀는 1420년 남편 후안과 결혼했을 때 자신의 권리를 아들에게 물려주며, 자신이 먼저 죽으면 후안은 나바라를 떠나는 협약을 맺었다. 또한 죽기 2년 전에 작성한 유언장에서도 자신의 왕권을 아들 카를로스에게 물려주겠다고 밝혔다. 그러면서도 다음의 문구를 덧붙였다.
"그리고 우리의 사랑스런 왕자, 우리의 사랑스러운 아들이 우리의 죽음 이후 상속의 권리로 나바라 국왕과 네무르 공작이 될 수 있지만, 그의 아버지이자 왕이신 분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우리는 그에게 간청한다. 우리는 아버지의 동의와 축복 없이는 이러한 칭호를 취해서는 안 되니, 할 수 있는 가장 큰 부드러움으로 아버지에게 승인을 구하길 바란다."

수리아 1세는 아마도 남편의 동의를 받고 아들이 왕위를 물려받는 모양새를 연출해 부자간의 사이가 원만하기를 원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남편 후안이 나바라 왕국의 실권을 포기할 생각이 전혀 없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후안은 수리아 1세의 유언장을 확대 해석해 아들을 나바라의 총독으로 삼을 뿐 왕으로 세우기를 거부하고 자신이 나바라 국왕 직위를 독차지했다. 이후 카를로스는 나바라 총독으로서 통치를 행사하는 한편, 카스티야 국왕 후안 2세와 아버지의 전쟁에 동참했다. 그러면서도 내심 아버지가 자신이 마땅히 취해야 할 왕위를 빼앗았다고 여겨 반감을 품었다.

그러던 1447년, 후안은 아라곤의 명문 귀족 파드리케 엔리케스의 딸인 후아나 엔리케스와 재혼했다. 이후 1450년 1월 1일 나바라 왕국의 올리테에 자신만의 궁정을 세웠으며, 카를로스에게 위임했던 나바라 왕국 통치를 행사하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부자간의 관계는 더욱 악화되었고, 급기야 1451년 후아나의 꼬드김에 넘어간 후안은 현 나바라 총독인 카를로스를 해임하고 후아나를 총독으로 삼기로 했다. 이에 분노한 카를로스는 나바라 귀족들을 모아 아버지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

그리하여 나바라 왕국과 아라곤 왕국과의 관계가 끊어지자, 카스티야 국왕 후안 2세의 심복인 알바로 데 루냐는 카스티야군을 나바라 왕국과의 국경지대에 집중 배치해 대대적으로 침공할 준비에 착수했다. 카를로스는 이에 위협을 느껴 추종자들과 함께 나바라 왕국 밖의 산 세바스티안으로 피신했다. 이후 아라곤의 후안과 카를로스간의 군사적 충돌이 몇 차례 벌어졌지만 사상자는 얼마 되지 않았고, 1451년 5월 양자는 일댠 화해하고 카스티야군을 공동으로 저지하기로 합의했다.

1451년 8월, 카스티야군은 알바로 데 루나의 지휘하에 나바라 왕국으로 쳐들어가 부라돈 성을 함락하고 카를로스를 에스텔라에 가둬놓고 포위했다. 아라곤의 후안은 아들을 돕기 위해 사라고사로 진군했지만, 아버지를 믿지 못한 카를로스는 카스티야군과 동맹을 맺기로 한 뒤 그들을 돌려보냈다. 이리하여 아버지와 완전히 갈라선 그는 1451년 10월 23일 에이바르에서 아버지와 맞붙었다. 이 전투에서 참패한 카를로스는 포로로 잡힌 뒤 아라곤으로 끌려가 한 요새에 수감되었다가 1453년 5월 24일 아버지가 살아있는 한 왕을 자칭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맹세를 강요받은 후 풀려났다. 하지만 석방된 후 맹세를 어기고 왕위를 차지하기 위해 레린 백작 루이스 데 보몽과 손잡고 아버지에 대항했다.

그러다가 1453년 12월 7일 카스티야 왕비 마리아[3]의 중재로 카스티야 왕국과 아라곤 왕국이 바야돌리드에서 1년간 휴전 협약이 맺어졌을 때, 카를로스 역시 아버지와 휴전하기로 했다. 1년간 휴전이 끝난 후 양자간의 전쟁이 재개되었고, 1455년 3월 27일 보몽 가문의 사병대가 산 후안 데 피에 데 푸에르토를 공략했으며, 1455년 8월 4일에는 토랄바 전투에서 아라곤 왕국군을 격퇴했다. 이에 분노한 후안은 1455년 12월 3일 바르셀로나에서 카를로스와 그를 지원하던 여동생 수리아 2세의 나바라 왕위 계승권을 박탈하고 막내딸 레오노르를 나바라 왕위 계승자로 지명했다.

카를로스는 1456년 투델라를 공격했으나 공략에 실패한 데다 푸아 백작 가스통 4세으로부터 지원군을 받아낸 아라곤군의 반격이 거세자 나폴리에 있는 삼촌이자 아라곤-시칠리아-나폴리 국왕 알리폰소 5세의 도움을 받기로 하고 그해 5월에 나바라를 떠나 나폴리로 향했다. 이후에도 보몽 가문을 비롯한 나바라 귀족들은 카를로스를 위해 아라곤군과 격전을 치렀고, 1457년 3월 16일 카를로스를 나바라 국왕으로 선포하고 카스티야 왕국에 지원을 요청했다. 그러나 후안 2세의 뒤를 이어 카스티야 국왕에 오른 엔리케 4세는 바야돌리드 협약에서 합의된 대로 아라곤 왕국과 평화를 유지하고 싶었기에 나바라 귀족들의 요청을 들어주지 않았다.

게다가 1454년에 후안을 아라곤과 카탈루냐의 대리 통치자로 임명했던 알폰소 5세는 조카를 위해 아우와 싸우기를 거부했다. 그 대신, 후안과 카를로스의 갈등을 해결해주기 위해 발렌시아 귀족이며 자신의 측근이었던 루이스 데스푸이그를 중재자로 보내 양자를 화해시키게 했다. 카를로스와 후안 모두 이에 동의해, 1458년 3월 6개월간의 휴전 협정을 체결했다. 이후 알폰소 5세가 합의안을 제시할 예정이었지만, 그가 1458년 6월에 사망하는 바람에 무산되었다.

이리하여 아라곤-시칠리아 국왕[4]이 된 후안 2세는 1459년 12월 카를로스와 평화 협약을 맺고 그를 카탈루냐의 총독으로 세웠으며, 후아나 엔리케스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페르난도를 몽블랑 공작에 세웠다. 또한 그는 여전히 지지자들의 수중에 남아있는 나바라 영토를 아버지에게 돌려주겠다고 약속했으며, 나바라와 시칠리아에 다시는 거주하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1460년 3월 카탈루냐 공국으로 향한 카를로스는 그해 3월 31일에 바르셀로나에 도착한 뒤 통치를 행사했다. 1460년 9월, 후안 2세는 레리다에서 카탈루냐 궁정을 소집하고 아들 카를로스에게 카스티야 공주 이사벨과 결혼하지 말고 포르투갈의 카타리나 공주와 결혼하라고 권고했다.[5] 그러나 카를로스는 카스티야 국왕 엔리케 4세의 사절과 비밀리에 만났고, 그의 수행원들은 후안 2세가 페르난도 왕자에게 나바라 왕위를 주기 위해 그를 독살하려 한다고 주장했다. 이 일을 첩자를 통해 전달받은 후안 2세는 처음에는 믿지 않으려 했지만, 시간이 지나 사실인 게 분명해지자 고뇌했다. 그러다 아내 후아나의 부추김에 따라 1460년 12월 2일 카를로스를 체포해 아라곤의 어느 요새에 가두었다.

그러자 카탈루냐와 아라곤, 나바라 등지에서 대규모 반란이 일어났다. 봉기의 규모에 경악한 후안 2세는 1461년 카를로스를 석방하고 왕위 상속인으로 인정했지만, 페르난도 역시 계승권이 있다고 못박았다. 그러던 1461년 9월 23일, 바르셀로나로 돌아간 카를로스가 사망했다. 이에 대해 일각에서는 후아나 엔리케스가 그를 독살했다는 소문이 떠돌았지만, 후대 학계는 이를 근거없는 비난으로 일축하고 기록에서 드러나는 증상으로 보건대 폐질환으로 사망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추정한다. 그 후 나바라인들은 카를로스의 여동생 수리아 2세를 왕으로 내세우며 후안 2세에 맞섰고, 카탈루냐인들은 팔라스 소비라 백작 로제 3세의 지휘하에 대대적인 반란을 일으켰다.

3. 여담

카를로스는 생전에 아리스토텔레스, 세네카, 아이소포스, 키케로, 호메로스, 베르길리우스 등 고대 문학가 및 철학자들의 산문과 철학서, 연설 등을 읽는 데 많은 시간을 들였다. 그가 보관한 저서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 사본 몇 권과 이에 대한 주석들이 있었으며, 많은 수의 신학 저서도 있었다. 또한 라틴어와 스페인어로 된 고전 및 중세 작품들도 그의 도서 목록에 끼여 있었다. 특히 레오나르도 브루니가 번역한 라틴어판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 저서를 탐독했는데, 때로는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아리스토텔레스 윤리학에 담긴 다음 문구를 인용하기도 했다.
Nam cum ambo sint amici sanctium est honori veritatem prefferre
둘 다 내 친구이지만, 명예보다 진실을 더 중시하는 것이 우리를 감동시키는 첫 번째 이유이다.


[1] 카를로스 4세를 묘사한 상상화, 호세 모레노 카르보네로 작, 1881년.[2] 당시 부친이 카스티야 영지를 관리하던 때라서 카스티야에서 태어났다.[3] 아라곤 국왕 페르난도 1세의 딸이자 후안의 여동생이었다.[4] 나폴리 왕위는 알폰소 5세의 사생아인 페르디난도 1세에게 넘어갔다.[5] 카를로스의 아내 아그네스는 1448년에 자식을 낳지 못한 채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