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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01 22:26:12

안초 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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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안초 3세.jpg
Antso III.a Gartzeitz
가문 세메노 왕조
생몰년도 미상 ~ 1035년 10월 18일
출생지 팜플로나 왕국
사망지 팜플로나 왕국
재위
기간
팜플로나 왕국 국왕 1000년 또는 1004년 - 1035년
히스파니아의 렉스 1034년 - 1035년
아버지 가르치아 3세 산치츠
어머니 세메나 페르난디츠
형제 우라카 가르체이츠, 엘비라 가르체이츠, 가르치아 가르체이츠
배우자 안차 오이바르코아(정부), 무니아도나
자녀 가르치아 4세 산치츠, 페르난도 산치츠, 세메나 산치츠, 온찰루 산치츠, 라미로 산치츠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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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팜플로나 왕국 9대 국왕. 히스파니아의 렉스. 안초 대왕(Antso Nagusia) 또는 산초 대왕(Sancho el Mayor)으로 일컬어지는 군주로, 카스티야, 알라바, 리바고르자, 아라곤, 레온 등 이베리아 반도 내 기독교 국가들을 통합하여 팜플로나 왕국의 최전성기를 이끈 명군이다.

2. 생애

팜플로나 8대 국왕 가르치아 3세 산치츠아스투리아스 왕국의 국왕 오르도뉴 1세의 친족인 세아 백작 페르난 베르무데츠의 딸 세메나 페르난디츠의 아들이다. 형제로 우라카 가르체이츠, 엘비라 가르체이츠, 가르치아 가르체이츠가 있었다. 아버지 가르치아 3세의 통치 기록은 1000년에 마지막으로 확인되며, 안초 3세가 처음으로 팜플로나 국왕으로 언급되는 시기는 1004년이다. 일각에서는 그가 카베라 전투의 여파로 사망했고 사촌인 비구에라 왕 산초 라미레스가 팜플로나를 이끌었을 것이라 추정하지만, 이를 입증할 증거는 부족하다.

당시 팜플로나 왕국은 알 하지브 알 만수르의 연이은 침략으로 인해 후우마이야 왕조의 봉신으로 전락하여 코르도바에 매년 조공을 바쳐야 했다. 하지만 1002년 알 만수르가 사망한 후 후우마이야 왕조가 내란에 휩쓸리면서 기독교 국가들을 신경쓸 여력이 없어지자, 안초 3세는 이 때를 틈타 기독교 국가들을 통합하기 위한 확장 정책을 추진했다. 1010년경 카스티야 백작 산초 가르시아의 딸 무니아도나와 결혼하여 카스티야 백국과 연합했고, 1015년 무슬림들을 소브라베 주에서 밀어내고 그 땅을 점거했다. 1017년 2월 5일 장인이 사망한 뒤 카스티야 백작에 오른 가르시아 산체스의 보호자를 자처했다.

1018년 초 리바고르자 백작 기예르모 이사르네스(Guillermo Isárnez)가 발 다란(Val d'Aran)을 자기 것으로 만들기 위해 공세를 벌이던 중 암살당했다. 당시 리바고르자는 1010년 기예르모 이사르네스와 필라르 백작 레몽 3세, 그리고 레몽 3세의 아내인 카스티야의 마요르 가르치아 사이에 분할되어 있었다. 레몽 3세가 기예르모의 영지를 자기 것으로 삼아 리바고르자 백작을 자처했지만, 안초 3세는 자신 역시 리바르고자 백국의 상속권이 있다고 주장하며 군대를 동원해 레몽 3세를 축출하고 그 땅을 점거했다. 이들간의 분쟁은 1025년 안초 3세가 레몽 3세의 주군이 되고, 마요르 가르치아는 레몽 3세와 결혼을 무효화한 뒤 수도원에 들어가는 조건으로 리바르고자로의 귀환을 허용하는 것으로 막을 내렸다.

1029년, 카스티야 백작 가르시아 산체스가 레온 국왕 알폰수 5세의 딸인 산차와 약혼한 뒤 결혼식을 치르러 레온으로 향했다가 카스티야에서 추방됐던 귀족의 아들들에게 암살당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안초 3세는 즉시 카스티야 백작령을 점거한 뒤 자신의 아들이자 죽은 백작의 조카인 페르난도 1세를 카스티야 백작으로 세워서 카스티야를 자신의 영향력 아래에 놓이게 했다. 이후 레온 왕국의 수도 레온의 바로 위에 있는 차 강과 피수에르가 강 사이의 국경 지대를 점령하고, [1] 전임 백작을 살해한 레온 왕국을 응징하겠다는 명분을 내걸어 레온으로 쳐들어갈 태세를 갖췄다.

이에 두려움을 느낀 레온 국왕 베르무두 3세는 자신의 누이인 산차와 안초 3세의 아들 페르난도의 결혼을 주선하고 안초 3세가 빼앗아간 영토를 '지참금'으로 가지는 것을 인정했다. 그러나 안초 3세는 얼마 안가 레온 왕국과의 전쟁을 재개했고, 1034년 레온 왕국의 수도 레온과 사모라, 아스토르가 등을 함락시키고 베르무두 3세를 갈리시아로 축출한 뒤 스스로 레온 국왕을 겸임했다. 이리하여 팜플로나 왕국은 서쪽의 갈리시아 국경에서 동쪽의 바르셀로나까지 이어지는 이베리아 반도 내 기독교 국가들을 통합했다.

한편, 그는 내치에도 힘을 기울였다. 프랑스에서 전래된 봉건제를 이베리아 반도에 도입했으며, 통치 체제를 프랑스 식으로 재편하고 여러 도시를 육성하고 길을 닦았으며, 산 후안 데 라 페냐 수도원장에 클뤼니 수도원의 방식을 익힌 수도사 파테르노를 앉힘으로써 서유럽에서 맹위를 떨치던 클뤼니 대수도원 개혁을 팜플로나 왕국에 그대로 실시하게 했다.

이렇듯 팜플로나 왕국의 최전성기를 이끈 안초 3세는 1034년 자신을 '히스파니아의 렉스(Hispaniarum rex)'라고 명시한 동전을 주조하는 등 기세를 올렸지만 1035년 10월 18일에 사망했고, 산 살바도르 데 오냐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그가 건설한 왕국은 아들들에 의해 분할되었다. 장남 가르치아 4세 산치츠가 팜플로나의 국왕이 되었고, 차남 페르난도 산치츠는 카스티야 백작을 맡다가 1037년 안초 3세에게 축출된 뒤 갈리시아에 망명했던 베르무두 3세가 왕국을 되찾기 위해 쳐들어오자, 가르치아 4세 산치츠와 함께 이에 맞서 싸워 1037년 9월 4일 타마론 전투에서 베르무두 3세를 전사시킨 뒤 곧바로 레온 왕국의 국왕 페르난도 1세가 되었다. 또한 온찰루 산치츠는 소브라베와 리바고르자의 왕이 되었다.

한편, 안초 3세는 무니아도나와 결혼하기 전에 안차 오이바르코아라는 정부와 관계를 맺어 라미로 산치츠를 낳았다. 정식 결혼으로 얻은 아들은 아니었지만, 안초 3세는 이 아이 역시 자신의 아들로 인정했다. 라미로는 1043년 온잘루가 사망한 뒤 소브라베와 리바고르자의 왕이 되었다가 페르난도와 연합해 가르치아 4세를 상대로 내전을 벌였고, 이를 통해 아라곤을 확보한 뒤 아라곤의 초대 국왕 라미로 1세가 되었다.


[1] 이 땅은 카스티야 백국과 레온 왕국이 오랫동안 영토 분쟁을 벌인 지역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