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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25 18:19:16

필리프 5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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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카페 왕조 제14대 국왕
필리프 5세
Philippe V
파일:Philippe V.jpg
출생 1292년
프랑스 왕국 리옹
사망 1322년 1월 3일 (향년 29세)
프랑스 왕국 롱샹
재위기간 프랑스 국왕
1316년 11월 20일 ~ 1322년 1월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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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f><colcolor=#002395> 가문 카페 가문
아버지 필리프 4세
어머니 호아나 1세
형제자매 마르그리트, 루이 10세, 블랑슈, 샤를 4세, 이자벨, 로베르
배우자 부르고뉴 여백작 잔 2세[1]
자녀 잔, 마르그리트, 이자벨, 블랑슈, 필리프
종교 가톨릭
별칭 장신왕 (Le Long/The Tall) }}}}}}}}}
1. 개요2. 생애3. 통치
3.1. 통화 개혁3.2. 행정과 세금3.3. 종교 개혁과 귀족과의 관계
4. 성전 기사단 해체 이후5. 귀족 반발6. 백년전쟁의 전야7. 이른 죽음8. 가족
8.1. 자녀

[clearfix]

1. 개요

프랑스 왕국 카페 왕조의 제14대 왕.

'미남왕' 필리프 4세차남으로 제12대 왕 루이 10세의 동생이자, 나바르(나바라)의 여왕 호아나 2세(잔느)와 제13대 왕인 '유아왕' 장 1세의 숙부였다. 프랑스 왕으로는 '필리프 5세', 나바르 왕으로는 '펠리페 2세'였다.

2. 생애

루이 10세가 테니스를 치다가 포도주를 마시고 3일 만에 사망하면서 필리프가 섭정이 되었는데, 유복자로 태어난 조카 장 1세마저 태어난지 5일 만에 요절하면서 프랑스의 왕위 계승을 둘러싼 다툼이 전개되었다.

루이 10세에게 남은 호적상 유일한 자녀였던 잔느에게 귀족들의 지지가 몰렸지만 필리프 5세는 그녀의 모후 마르그리트 드 부르고뉴가 루이 10세에 의해 간통죄로 쫓겨났던 시기에 잔느가 태어났다며 혈통에 의문을 제기했다.[2] 더불어 1317년 파리 대학 법학자들과의 회의를 통해 프랑크 왕국의 토지 상속법이었던 《살리카법》을 교묘히 이용하여 확대 해석했다. 《살리카법》은 모계 계승이 불가능하다고 되어 있었지만 외손자는 계승이 가능했다. 《살리카법》의 본래 의미는 여성의 경우, 기사로서 병역의 의무를 다할 수 없으나 외손자일 경우, 전쟁에 나갈 수 있으니 상속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이미 《살리카법》은 몇백년 전에 사문화된 법률이었다. 아들까지 갈 것 없이 남편과 공동 즉위한다면 병역의 의무를 남편이 지면 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필리프 5세는 《살리카법》을 확대 해석하여 외손자는 물론 아예 모계 계승 자체를 막아버렸다. 즉, 여성은 왕위에 오를 수 없는 것으로 못을 박아 잔느의 왕위 계승권을 박탈하고, 자신의 정통성을 부각시킨 것이었다. 그래서 카페 왕조 이후의 발루아 왕조부르봉 왕조에서는 여왕이 즉위하지 못했으며, 프랑스 역사에서 여왕이 한 번도 즉위하지 못한 것이다. 더불어 이 어거지 확대 해석은 그 후《살리카법》자체가 없었던 신성 로마 제국[3]으로 점점 퍼져 나가 훗날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잔느는 비록 프랑스의 여왕이 되지 못했으나 나바라에서는 《살리카법》이 적용되지 않아, 숙부들인 필리프 5세와 샤를 4세가 죽고, 카페 왕조의 본가가 단절되자 1328년 나바라의 여왕 호아나 2세로 즉위했다.

필리프 5세는 비록 어거지로 프랑스와 나바라의 왕이 되었지만 그때 이용한 《살리카법》이 불과 몇년 후 백년전쟁을 발발시켜 프랑스 전역을 기나긴 전쟁의 구렁텅이로 밀어넣게 될 것이라고는 생각치 못했을 것이다. 필리프 5세는 즉위한 지 6년 만에 29세의 나이로 죽었는데 딸 넷은 장성했으나, 아들 필리프는 태어난 지 1년 만인 1317년에 사망하여 후계자가 없었다. 장성한 딸이 넷이나 되었으니 후계자는 충분했지만 스스로 이용한 《살리카법》 때문에 그들은 즉위할 수 없었다.

필리프 5세의 후손은 필리프 4세의 아들들의 후손[4]들 중 유일하게 단절되지 않은 혈통이었다. 유일하게 현재까지 후손이 이어지는 필리프 5세의 차녀 마르그리트의 후계는[5] 손녀사위인 발루아-부르고뉴 가문'호담공' 필리프 2세의 후손으로 이어지며, 용담공 샤를이 로렌(로트링겐, 로타링기아)의 왕이 되어 서프랑크는 아니지만 중프랑크의 왕이 되나 싶었으나 그마저도 실패하고 결국 펠리페 1세 대에서야 에스파냐의 왕위를 획득하게 된다.[6]

3. 통치

3.1. 통화 개혁

필리프 5세가 단행한 가장 중요한 경제 개혁 중 하나는 통화 개혁이었다. 당시 프랑스는 여러 차례의 전쟁과 왕국 내부의 정치적 불안정으로 인해 극심한 재정난에 시달리고 있었으며, 특히 화폐 가치 하락과 물가 상승이 심각한 문제였다. 이러한 상황은 왕실의 세입에도 큰 타격을 주었는데, 이를 해결하기 위해 필리프 5세는 화폐의 순도를 다시 높이고, 파리뿐만 아니라 주요 도시들에 새로운 조폐소를 설립하여 화폐 발행을 중앙 집중화하려는 조치를 취했다.

그는 파리뿐 아니라 루앙, 리옹, 투르, 보르도 등의 주요 도시에 조폐소를 설치해 화폐 주조권을 왕실이 통제하려고 했다. 이전에는 각 지역의 영주나 귀족들이 자신들만의 화폐를 발행하는 경우가 많아 통일된 경제 관리가 어려웠는데, 필리프 5세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고자 중앙 정부의 통제를 강화해 화폐의 신뢰성을 회복하려 했다. 이를 통해 왕실은 세입을 늘리고, 경제적 안정을 도모할 수 있었다.

특히 그는 금화와 은화의 순도를 회복하는 정책을 펼쳤다. 이전의 왕들은 군사비와 왕실 운영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화폐의 금속 순도를 낮추는 방법을 사용했지만, 이는 결국 통화 가치를 떨어뜨리고 인플레이션을 초래했다. 필리프 5세는 이러한 문제를 바로잡고자 귀금속 비율을 높인 새로운 동전을 주조했으며, 이를 통해 시장의 신뢰를 회복하려고 했다. 이러한 개혁은 물가를 안정시키는 데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지만, 단기간 내에 완전한 효과를 보지는 못했다. 필리프 5세의 통화 개혁은 화폐 가치 안정화와 중앙집중적 경제 관리 강화라는 측면에서 프랑스 경제에 중요한 전환점을 마련했다.

3.2. 행정과 세금

필리프 5세는 중앙집권적 통치를 강화하고 지방 귀족들의 권한을 제한하는 행정 개혁을 추진했다. 그의 주요 목표는 왕권 강화를 통해 왕국 전체의 정치적 안정을 도모하고, 지방 행정의 효율성을 높이는 것이었다.

우선, 필리프 5세는 바이야(bailli)와 세네샬(sénéchal) 제도를 개선하여 지방 관료들이 더 직접적으로 왕실의 통제를 받도록 했다. 바이야와 세네샬은 각각 왕국의 여러 지방에서 세금 징수와 사법권을 행사하는 관리들이었으나, 이들은 지방 귀족들의 영향력 아래에 놓여 있는 경우가 많았다. 필리프 5세는 이들 관리들이 왕실에 더 충성하도록 장려하면서 지방 권력자들의 자율성을 줄이고 중앙 정부의 통제를 강화하려 했다.

또한, 필리프 5세는 감찰 제도를 도입하여 중앙에서 임명된 관리들의 부패나 무능을 방지하고자 했다. 감찰관은 왕의 대리인으로 지방에 파견되어 행정의 투명성을 확보하는 역할을 했으며, 이를 통해 지방 귀족들의 권력을 약화시키고 왕실의 권위를 더욱 공고히 했다.

법률과 행정의 통일화도 필리프 5세가 중점적으로 추진한 개혁 중 하나였다. 이전까지는 지역마다 서로 다른 법이 적용되었고, 지방 귀족들은 이를 통해 자치권을 행사했다. 필리프 5세는 중앙 정부의 통제를 강화하기 위해 왕실 법정의 권한을 확대하고, 법적 통일성을 도모하려 했다. 이를 통해 귀족들의 자율적 사법권을 제한하고 왕실의 재판권을 지방까지 확장하려 했다.

재정난을 해결하기 위한 세금 개혁도 필리프 5세의 중요한 개혁 중 하나였다. 그는 기존의 봉건적 세금 체계가 왕실 재정에 불리하다고 판단하고, 왕실이 직접 징수할 수 있는 세금을 늘리려 했다.

필리프 5세는 소득에 기반한 세금을 도입하여 귀족뿐만 아니라 일반 시민들로부터도 세입을 얻으려 했다. 특히 상인들과 도시민들에게 부가세를 부과함으로써 상업 활동에서 세입을 창출하려 했으나, 이에 대해 상인들과 귀족들의 저항이 있었다.

또한, 그는 농민들에게 부과되던 병역 의무를 현금 세금으로 대체하는 방안을 제안했다. 이를 통해 군사적 부담을 줄이면서도 왕실 재정을 안정화하려는 시도였다. 이 정책은 군역을 면제받기 원하는 농민들 사이에서 긍정적인 반응을 얻었지만, 왕실 군사력의 약화를 초래할 위험이 있었다.

3.3. 종교 개혁과 귀족과의 관계

필리프 5세는 왕권 강화를 위해 로마 가톨릭 교회와의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며, 교황 요한 22세와 협력하여 성직자 과세 권한을 획득하고, 템플 기사단 해체 이후 그들의 재산을 왕실에 귀속시키는 등 재정적 안정을 도모했으며, 이러한 중앙집권적 개혁은 왕실의 권위를 높이는 데 기여했지만 지방 귀족들의 강한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결국 그의 개혁은 프랑스의 중앙 집권 정치 구조의 기초를 마련하면서도 사회적 긴장을 초래하는 결과를 낳았다.

4. 성전 기사단 해체 이후

필리프 5세의 아버지 필리프 4세는 1307년 템플 기사단을 해체하고 그들의 자산을 몰수하는 과정을 주도했다. 템플 기사단의 해체로 발생한 재산 분배 문제는 교황청의 협의 하에 이루어졌다. 필리프 5세의 재위 기간 동안, 템플 기사단의 자산은 성 요한 기사단 (말타 기사단)으로 대부분 이관되었으며, 왕실은 이 과정에서 일부 자산을 확보할 수 있었다. 템플 기사단의 군사적 공백은 다른 기사단과의 협력으로 채워졌고, 필리프 5세는 이를 통해 왕실 군사력을 강화하려는 시도를 지속했다.

5. 귀족 반발

필리프 5세의 개혁은 귀족들이 오랫동안 행사해왔던 세습적 권한을 약화시키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봉건제 하에서 귀족들은 자신의 영토를 자치적으로 통치하고, 경제적·군사적 권력을 유지할 수 있었으나, 필리프 5세는 이러한 봉건적 특권을 제한하고 왕실의 통제를 강화하려 했다.

우선, 그는 귀족들의 사법권을 왕실이 직접적으로 통제하려 했으며, 법적 분쟁을 왕실 법정으로 가져오도록 요구했다. 이는 귀족들이 오랜 세월 동안 유지해온 독립적인 사법권을 침해하는 것으로 간주되어 강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지방 귀족들은 자신의 영지에서 독립적으로 세금 징수나 군사적 의무를 수행하는 권리를 강조했으나, 필리프 5세는 이들을 제한하고 왕실에 대한 충성을 더욱 강조했다.

또한, 필리프 5세는 귀족들의 군사적 의무를 재조정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기존 봉건 제도 하에서는 귀족들이 자신의 봉토에서 군대를 모집하고 왕실에 군사적 지원을 제공해야 했지만, 필리프 5세는 군사적 지원 대신 현금 세금을 징수하려고 했다. 이는 귀족들의 군사적 권한을 약화시키고 왕실에 대한 경제적 의존도를 높일 것이라는 우려를 낳았다.

이러한 개혁은 지방 귀족들의 조직적인 저항을 촉발했다. 필리프 5세가 임명한 지방 관리들의 권한을 거부하거나, 정책에 협조하지 않는 방식으로 저항하며 지방 행정의 효율성을 저해했다. 특히, 중부와 남부 프랑스에서는 세금 정책에 대한 불만이 고조되어 일부 귀족들이 왕실의 통제에 반발하는 무력 행동을 취했다. 필리프 5세는 군대를 동원해 이러한 반란을 진압했지만, 이는 왕실 자원을 크게 소모시켰다.

교회와의 관계도 귀족들의 반발에 영향을 받았다. 필리프 5세는 교황청과 긴밀한 관계를 통해 왕권을 강화하려 했으나, 귀족들은 왕실-교회 동맹이 자신들의 권한을 약화시키는 요소로 작용한다고 보았다. 일부 귀족들은 교회 지도자들과 연대하여 필리프 5세의 개혁에 반대했으며, 이로 인해 왕실과 교회 간의 관계도 복잡해졌다.

필리프 5세는 귀족들의 반발에 대응하기 위해 타협을 시도했다. 그는 일부 개혁을 완화하고, 세금과 군사적 의무와 관련된 양보를 통해 지방 귀족들의 충성을 얻으려 했다. 또한, 결혼 정책과 영지 분배를 통해 귀족들과 동맹을 맺고, 그들의 지지를 끌어내기 위한 노력을 했다. 반란을 일으키지 않은 귀족들에게는 영지를 분배하거나 보호해주는 방식으로 충성심을 확보했다.

하지만 필리프 5세는 일부 반란 지역에 대해서는 강경하게 대응했다. 왕실 군대를 동원해 반란을 진압하고, 반란에 가담한 귀족들에게 처벌을 가했다. 이러한 강경 대응은 일시적으로는 효과가 있었으나, 귀족들의 불만을 완전히 해소하지는 못했다.

6. 백년전쟁의 전야

필리프 5세의 왕위 계승 과정에서 벌어진 살리카법 해석 문제는 프랑스 왕국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 중 하나였으며, 후대에 잉글랜드와의 긴장 관계를 격화시켜 백년전쟁의 전조를 마련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필리프 5세는 형 루이 10세가 갑작스럽게 사망한 이후 섭정으로 임명되었고, 그의 유복자인 조카 장 1세가 태어나자 왕위 계승권 문제로 갈등이 빚어졌다. 장 1세가 태어난 지 5일 만에 사망하면서 왕위 계승 논란은 더 심각해졌고, 루이 10세의 딸 잔느가 유력한 왕위 계승 후보로 떠올랐다.

그러나 필리프 5세는 살리카법을 이용해 잔느의 왕위 계승을 무효화하고 자신의 왕위를 정당화했다. 살리카법은 여성의 왕위 계승을 금지하는 법으로, 본래는 군사적 의무를 감당할 수 없는 여성들이 왕위에 오를 수 없다는 의미로 해석되었다. 하지만 필리프 5세는 이를 더욱 확장해, 모계로의 계승 자체를 막는 것으로 해석했다. 이로 인해 루이 10세의 딸 잔느는 왕위를 계승할 수 없게 되었고, 필리프 5세는 자신의 왕위를 정당화하며 즉위할 수 있었다.

필리프 5세가 살리카법을 이용해 왕위에 오른 결정은 장기적으로 큰 영향을 미쳤다. 이는 훗날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3세가 프랑스 왕위를 주장하는 도화선이 되었기 때문이다. 에드워드 3세는 프랑스 왕 필리프 4세의 딸이자 자신의 어머니인 이사벨라를 통해 프랑스 왕위 계승권을 주장했다. 하지만 살리카법에 의해 모계를 통한 왕위 계승이 금지되었기 때문에, 프랑스 왕위는 에드워드 3세에게 넘어갈 수 없었다. 이로 인해 에드워드 3세와 프랑스 왕국 사이의 긴장이 점점 고조되었으며, 결국 백년전쟁으로 이어졌다.

필리프 5세는 자신의 왕위를 지키기 위해 당시에는 정당한 법 해석을 내세웠지만, 그 결과로 후대에 큰 정치적, 군사적 혼란을 초래했다. 살리카법의 엄격한 적용은 프랑스 왕위 계승권을 복잡하게 만들었고, 이를 통해 프랑스와 잉글랜드의 왕실 간 갈등이 격화되었다. 필리프 5세의 즉위는 당시에는 왕국의 안정을 도모하는 것이었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백년전쟁이라는 씨앗을 뿌린 셈이 되었다.

7. 이른 죽음

그는 당시로서도 젊은 나이인 1322년, 불과 29세에 사망했는데 정확히 어떤 질병으로 사망했는지에 대한 명확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다만 기록에 따르면 몇 개월간 병을 앓다가 사망했다고 전해진다. 일부 사료에서는 결핵이나 폐렴 같은 호흡기 질환으로 사망했을 가능성도 제기되지만 명확하지 않다. 당시 1315년부터 시작된 대기근의 영향으로 많은 이들이 식량을 풍족하게 먹지 못했고, 왕이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었다. 또한 당시 의료 수준이 낮아 제대로 된 치료를 받기 어려웠으며, 오히려 잘못된 조치로 일찍 죽는 경우가 많았다. 어쨌든 그는 급진적인 정책으로 형인 루이 10세의 기조를 이어받아 귀족들과 첨예하게 대립했다. 따라서 과도한 스트레스와 당시에 유행했던 대규모 전염병들이 연계되어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8. 가족

8.1. 자녀

자녀 이름 출생 사망 배우자 / 자녀
1녀 부르고뉴 여백작 잔 3세
(Joan III, Countess of Burgundy)
1308년 5월 1347년 8월 외드 4세
슬하 1남
2녀 부르고뉴 여백작 마르그리트 1세
(Margaret I, Countess of Burgundy)
1310년 1382년 5월 9일 플란데런 백작 루이 1세
슬하 1남[7]
3녀 비에누아의 도핀 이자벨
(Isabella, Dauphine of Viennois)
1312년 1348년 4월 비에누아의 기그 8세
포코니 공 장 3세
4녀 프랑스의 블랑슈
(Blanche of France)
1313년 1358년 4월 26일
1남 프랑스의 필리프
(Philippe of France)
1316년 6월 24일 1317년 2월 24일

[1] 부르고뉴 백작 오토 4세의 장녀이자 샤를 4세의 첫번째 아내 블랑슈의 언니다.[2] 참고로 친아버지로 의심받는 필리프 드 오네이(당연히 필리프 4세에게 마르그리트와의 간통이 걸려 교수척장분지형으로 처형당했다.)는 필리프의 왕자 시절 시종으로 친한 친구 사이였던 것으로 의심된다.[3] 다만 신성 로마 황제의 경우엔 선출직인데다 여성의 출마를 금지하고 있었기에 해당 사항이 없었다.[4] 루이 10세의 아들 장 1세는 태어난 지 5일만에 죽었고, 샤를 4세의 외동딸은 후사를 남기지 못했다.[5] 필리프 5세의 장녀 잔느는 부르고뉴 가문에 시집갔으나 외아들이 22세에 요절해 혈통이 단절되었고, 3녀 이자벨은 후손을 남기지 못했다.[6] 가계는 이렇다. 프랑스 카페 왕조 제14대 왕 필리프 5세- 부르고뉴 여백작 마르그리트 1세(플랑드르 백작 루이 1세와 혼인)- 플랑드르 백작 루이 2세- 플랑드르 여백작 마르그리트 3세- 부르고뉴 공작 '용맹공' 장 1세- 부르고뉴 공작 '선량공' 필리프 3세- 부르고뉴 공작 '용담공' 샤를 1세- 부르고뉴 여공작 '부귀공' 마리- 미남왕 펠리페 1세를 거쳐 8촌 운손 대에서야 마침내 타국에서나마 왕위를 획득할 수 있었다. 참고로 펠리페 1세의 장남이 그 유명한 스페인계 합스부르크 왕조의 초대 왕이자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였던 카를 5세였다.[7] 플란데런 백작 루이 2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