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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f><colcolor=#002395> 프랑스 부르봉 왕조 제7대 국왕 샤를 10세 Charles X | |||
출생 | 1757년 10월 9일 | ||
프랑스 왕국 베르사유 궁전 | |||
사망 | 1836년 11월 6일 (향년 79세) | ||
오스트리아 제국 일리리아 왕국 괴르츠 | |||
재위기간 | 프랑스 국왕 | ||
1824년 9월 16일 ~ 1830년 8월 2일 | |||
서명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fff><colcolor=#002395> 가문 | 부르봉 가문 | |
이름 | 샤를필리프 드 프랑스 (Charles-Philippe de France) | ||
아버지 | 프랑스의 도팽 루이 | ||
어머니 | 작센의 마리아 요제파 | ||
형제자매 | 마리 제피린, 루이 16세, 루이 18세, 마리 클로틸드, 엘리자베트 | ||
배우자 | 사보이아의 마리아 테레사 (1773년 결혼 / 1805년 사망) | ||
자녀 | 루이 앙투안, 소피, 샤를 페르디낭, 마리 테레즈 | ||
종교 | 가톨릭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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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의 국왕.루이 15세의 손자이자 왕태자인 도팽 루이 페르디낭의 아들이며, 부르고뉴 공작 루이(1751 ~ 1761)와 루이 16세(1754 ~ 1793)와 루이 18세(1755 ~ 1824)의 동생이다. 즉위하기 이전에는 아르투아 백작(Comtes d'Artois)[2], 앙굴렘 공작(Duc d'Angoulême), 베리 공작(Duc de Berry)[3] 작위를 받았다. 그 외에도 오베르뉴 공작(Duc d'Auvergne)도 받았다고 한다.[4]
정통 부르봉 왕조의 마지막 왕[5]이다. 그의 자손 두 명이 명목상의 왕위에 오르기는 했으나 골수 왕당파 외에는 그들을 왕으로 인정하지는 않는다.
덤으로, 나바라 왕국의 왕이란 칭호를 사용한 명목상 마지막 군주다.
2. 생애
2.1. 왕위에 오르기 전
혁명 이전의 샤를 10세(당시 아르투아 백작)
형제 중에서 가장 향락적이고 활발한 성격이었다. 활달한 성격이라 마리 앙투아네트와 함께 노는 일이 많았는데 이 때문에 마리 앙투아네트와의 사이에서 스캔들 소문이 돌기도 했다. 결혼 후 형들과 달리 즉시 결혼 의무도 해내서 아들을 얻었을 때는 마리가 길에서 아이는 언제 낳을 거냐는 시비를 듣고 울기도 했다. 이 스트레스로 왕비가 한창 놀 때 끼가 넘치는 아르투아 백작이 끼어 놀았던 것은 그들 사이의 소문을 부추겼지만 결혼 생활에 불성실한 아르투아는 여러 애인이 있었고 왕비와의 소문은 사실무근. 또한 사치가 매우 심해서 형 루이16세가 그의 빚을 대신 갚아주는 경우도 있었다.
1789년 7월 14일, 프랑스 혁명이 발발하자, 형 루이 16세가 혁명파에 굴복한 것에 실망하여 가장 먼저 영국으로 망명했다. 망명지에서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이자 합스부르크 제국의 수장 레오폴트 2세와 프로이센 왕국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에게 우리 혁명 났으니까 침공해 주세요라고 청하는 일명, 필니츠 선언을 하며 혁명 반대를 외쳤으나 딱히 자신이 나서는 활동은 하지 않았다. 사실은 이 무렵 레오폴트 2세와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 사이에서 폴란드 분할에 대한 얘기만 오갔었는데, 이때 샤를 10세의 요청으로 프랑스 침공이 일어난다.
1795년 프랑스의 키브론 섬에 왕당파의 군대와 함께 상륙할 예정이었으나, 마지막 순간에 취소하고 대신 1개의 칼을 주었다고 한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집권하자 나폴레옹을 암살하기 위해 왕당파를 지원하고 자객을 프랑스에 보냈다. 하지만 나폴레옹에 대한 암살이 실패하면서 성과는 얻을 수 없었다.
루이 18세의 왕정복고기에는 프랑스로 귀환했고 자식이 없는 루이 18세의 후계자로 여겨졌다. 복고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하였기 때문에 공화주의자와 혁명주의자에게는 많은 비난을 받았으며 1820년에는 그가 아끼는 차남 베리 공작 샤를 페르디낭이 암살당하기도 했다.[6]
2.2. 내치
1824년, 루이 18세가 사망하자 왕위를 계승했다. 다만 국왕이 되었을 때 나이가 많았는데 67세의 나이로 왕이 되었다. 초기에는 루이 18세에 비해 뛰어난 언변과 좋은 풍채, 또 정치범들을 사면시켜 주는 등의 유화 정책으로 좋은 인상을 주었으나 오래가지 않아 강경 왕정주의자(ultraroyaliste)이자 전제군주로서의 면모를 보여준다. 실제로 그가 즉위한 그해 치러진 총선에서 왕당파가 무려 400석 이상, 자유주의자들은 겨우 17석(…)을 차지하며 압승을 거뒀다.1825년 5월 절대왕정 시절 전통을 따라 랭스에서 대관식[7]을 치르고, 강경 왕정주의자 조제프 드 빌렐(Joseph de Villèle) 백작을 수상으로 임명하는 등 강력한 복고 정책을 시행한다. 참고로 이 대관식으로 말하자면, 루이 18세도 2번 혹은 3번이나 고려하면서 전례 관련 자료를 수집하는 등 매우 착실히 준비했으나 첫번째 시도는 나폴레옹이 엘바 섬을 탈출하면서 무산되었고 이후부턴 전통적인 랭스파와 왕권이 교권에 종속되는 것에 반발하는 파리파의 반발, 나폴레옹의 황제 대관식이 생생하게 살아있는 노트르담의 부적절성 등을 매우 골치아팠고, 결국 고민 끝에 그냥 하지 않았다. 하지만 샤를 10세는 민중의 적대적인 시선 속에서도, 비록 상당한 타협을 실시하고 프랑스 군주정이 유럽에서 가장 우월하다는 오만하고 국제정세적으로도 맞지 않은 자뻑이나, 개신교, 무슬림, 타 민족에 대한 차별적인 전례들을 모두 폐지하는 등 많은 수정을 실시하긴 했으나 이를 끝내 강행했다. 빌렐 내각은 1822년부터 신문 검열법(loi de tendance)을 통과시키고, 전제왕정에 적대적인 신문사들을 대거 매수하거나 없애려 한다. 또 가톨릭의 부흥을 앞세워 정교분리 원칙을 번복하고 프랑스를 다시 가톨릭 국가로 만들려는 시도를 한다. 1825년부터는 수도회의 재물을 도둑질하는 자를 기요틴형에 처하는 등의 법안들을 통과시키고, 신성모독을 저지르는 자 또한 손목을 절제한 후 기요틴형에 처하는 등 극단적인 형법을 복원한다. 극단적인 복고주의 정치로 1826년부터 의회의 심한 반발에 부딪히게 된 빌렐은 복고주의자들에게마저 버림받았고, 1827년에 치른 총선에서 그를 싫어한 공화주의자들과 중도 왕당파가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자 결국 1828년 사임한다.
빌렐의 대안으로 샤를 10세는 중도 왕정주의자 장바티스트 실베르 게 드 마르티냐크(Jean-Baptiste Sylvère Gaye de Martignac) 자작을 출범시킨 정부를 앞세우나, 그는 강경 왕정주의자들과 입헌주의자들을 타협시키는 정책을 내놓는 데 실패한다. 1830년부터는 프랑스 혁명 중에 살해된 폴리냐크 부인의 아들인 쥘 드 폴리냐크(Jules de Polignac) 공작을 수상으로 삼은 내각을 출범시킨다. 극단적인 전제왕정 복고주의자였던 폴리냐크 공작은 보나파르트주의자들과 프랑스 혁명에 가담한 공화주의자에게 사적으로 보복을 가하는 백색테러(terreur blanche)를 방치하고, 귀족들의 특권과 재산을 대거 회복시키기 위해 국채를 대규모로 지급했다. 하지만 조상 대대로 대토지를 상속받은 소수 대귀족을 제외한 대부분의 중소귀족들은 얼마 되지 않은 국채 매각 대금으로는 도저히 조상 전래의 토지를 매입할 수도 없었고 자연스럽게 국채 이자로 생활하는 연금 생활자가 되었는데, 이것이 샤를 10세의 의도와는 다르게 중소귀족들을 도시 부르주아로 재편하면서 자연스럽게 왕당파에서 입헌군주정이나 공화정으로 사상을 전환하게 만들었다.
2.3. 외치
1825년에는 독립혁명을 일으킨 아이티의 독립을 인정했다. 그러나 그 대가로 함대를 파견해 독립 배상금으로 1억 5천만 금 프랑을 물 것을 강요했다. 이 천문학적인 금액을 감당할 여력이 되지 못한 아이티는 손이 발이 되도록 빌면서 배상금을 9천만 금 프랑으로 깎았다. 2010년 미국 달러로 환산하면 9천만 프랑은 400억 달러였다. 1년 예산의 80%를 '배상금' 갚는 데 쓴 결과 아이티의 경제는 오늘날까지도 초토화된 상태로 이어지고있다.[8]1830년에는 오스만 제국이 약화된 틈을 타 바르바리 해적의 근거지가 되는 북아프리카 서부 해안을 점령하기로 마음먹었다. 때마침 당시 오스만 제국령 알자자이르 총독 후세인 이븐 파샤가 자신을 능멸한 프랑스 외교관 피에르 드발(Pierre Deval)의 뺨을 부채로 때린 것을 계기로 프랑스는 오스만 제국과 후세인 이븐 파샤에 사과를 요구했고, 이것이 거절당하자 이를 구실로 프랑스 왕국은 군대를 보내 알자자이르를 점령했고 후세인 이븐 파샤는 항복했다. 이로써 바르바리 해적은 완전히 토벌되고 프랑스는 북아프리카 서부 지중해 해안을 지배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지역에 주요 도시인 '알자자이르'의 프랑스어명 '알제'를 따 '알제리'라는 이름을 붙이고 통치했다.
2.4. 7월 혁명과 퇴위
1829년 새로 부임한 폴리냐크 내각은 지난 1827년 선거에서 왕당파가 패하고 좌파와 입헌군주파가 승리한 것에 부담을 느껴 의회를 해산하고 이듬해 다시 선거를 치르지만, 이번에는 오히려 좌파의 의석이 이전보다도 더 늘어나며 왕당파와 입헌파 의석을 줄여버리는 결과를 낳는다. 1830년 3월, 샤를 10세는 이에 대응해 폴리냐크 내각에 반대하는 의원들을 처벌하겠다는 연설을 한다. 결국 의원들과 시민들의 불만은 결국 극에 다다르고, 의원들은 입헌군주제를 요구하는 "221명의 청원서"를 발표한다. 샤를 10세는 이에 "나의 결정은 완고하다"라며 실책을 저지르게 되고, 결국 의원들과 시민들이 반발해, 1830년에 7월 혁명이 일어난다.1814년의 헌장을 근거로 왕권을 공고히 하는 4가지 왕령[9]을 선포한다. 그러나 이는 의원들과 시민들을 더욱 분노하게 만들었고 전국적으로 폭동과 반란이 일어나게 된다. 샤를 10세는 오귀스트 마르몽 원수가 지휘하는 부대를 보내 시민들에 대한 사격 등으로 강경 진압에 나서긴 했지만, 중과부적이었다. 게다가 나중에는 정부군도 시민들에게 가담하여 샤를 10세를 배신하였다. 샤를 10세는 의원들에 의해 정치권력을 박탈당하고 전제군주에서 이름뿐인 군주가 된다는 통고를 받는다. 이에 샤를 10세는 실권없는 군주가 될 수 없다며 거부하고 손자 샹보르 백작 앙리에게 양위하여 앙리 5세로 즉위시킨 다음에 오를레앙 공작 루이 필리프를 섭정으로 삼으려 했으나 이미 대세가 완전히 기울어졌고 그를 증오하는 의원들은 만장일치로 샤를 10세의 퇴위를 결정하여 사실상 폐위된다. 특히 샤를 10세가 임명한 오를레앙 공작은 섭정에 만족할 생각이 없어 결국 뜻을 이루지 못하고, 부르봉 왕가의 친척인 오를레앙 공작이 왕위에 올랐다.
2.5. 망명지에서의 사망
폐위된 샤를 10세는 프랑스에서 추방되어 망명길에 올랐다. 그는 우선 영국으로 망명하였는데, 당시 영국 총리 아서 웰즐리의 요구로 퐁티외 백작(Comté de Ponthieu)이라는 가명으로 입국하였다. 그에 대한 영국의 여론은 상당히 냉담해서, 그의 앞에서 대놓고 그가 혐오하던 프랑스 공화국 체제를 상징하는 프랑스 삼색기를 흔드는 영국인도 있었다.1833년에는 프란츠 1세의 초청으로 오스트리아 제국으로 이주했으며 보헤미아 왕국의 수도 프라하의 프라하성(Pražský hrad)에 정착하였다. 그러나 페르디난트 1세의 즉위식을 프라하성에서 개최하는 이유로 그는 다시 거처를 테플리츠(Teplitz, 현 체코 테플리체·Teplice)로 옮겼다. 1835년에는 따뜻한 곳에 있고 싶다는 뜻에 따라 한참 남쪽인 괴르츠(Görz, 현 이탈리아 고리치아)에 있는 코로니니 크론베르크 궁전(Palazzo Coronini Cronberg)으로 거처를 옮겼고 1836년에 콜레라에 걸려 사망했다.
그는 프랑스 국왕들의 왕실 묘당이었던 생 드니 대성당에 묻히지 못하고 사망한 곳인 괴르츠(현 슬로베니아 노바고리차)에 있는 코스타네비차(Kostanjevica) 수도원에 묻혔다.[10]
슬로베니아는 그의 무덤이 자국 영토에 있는 줄도 몰랐는데, 2016년 프랑스의 어느 단체에서 그의 묘를 반환하라는 요청이 들어왔고, 별로 내세울 것 없는 국경마을인 노바고리차에서는 절대 내놓을 수 없다고 고집을 부렸다. 프랑스에서 인기가 있었던 군주도 아니었던 관계로 더 이상의 요구는 없었기 때문에, 슬로베니아는 팔자에도 없던 외국 군주의 무덤이 생기게 되었다.[11] 나름 왕릉인 관계로, 관광명소가 되어 그때까지는 아무도 찾지 않던 마을 성당에 매년 1만 5천 명 정도의 관광객들이 찾게 되었다고 한다.
3. 가족 관계
사보이아의 마리아 테레사(1756년 1월 31일 ~ 1805년 6월 2일) |
아내는 비토리오 아메데오 3세의 3녀 사보이아의 마리아 테레사다.[12] 1773년에 마리아 테레사와 결혼해서 슬하에 2남 2녀를 낳았지만 마리아 테레사는 평생동안 남편인 샤를 10세와 그의 애첩을 피해 별거한 채로 혼자 살았고 결국 샤를이 즉위하기 전에 사망해서 프랑스의 왕비가 되지 못했고 묘지도 남편과 달리 이탈리아의 나폴리에 묻혀 있다.
3.1. 자녀
자녀 | 이름 | 출생 | 사망 | 배우자 / 자녀 |
1남 | 앙굴렘 공작 루이 앙투안 (Louis Antoine, Duke of Angoulême) | 1775년 8월 6일 | 1844년 6월 3일 | 프랑스의 마리 테레즈[13] |
1녀 | 소피 (Sophie) | 1776년 8월 5일 | 1783년 12월 5일 | |
2남 | 베리 공작 샤를 페르디낭 (Charles Ferdinand, Duke of Berry) | 1778년 1월 24일 | 1820년 2월 14일 | 양시칠리아의 마리아 카롤리나[14] 슬하 1남 1녀[15] |
2녀 | 마리 테레즈 (Marie Thérèse) | 1783년 1월 6일 | 1783년 6월 22일 |
3.2. 후손
슬하에 순서대로 장남 앙굴렘 공작 루이 앙투안[16], 장녀 소피, 차남 베리 공작 샤를 페르디낭, 차녀 마리 테레즈를 낳았지만 소피는 7세에 사망하고 마리 테레즈는 생후 5개월만에 사망하면서 딸들은 모두 요절했다.그나마 아들들은 딸들보다 비교적 오래 살아서 장남인 루이 앙투안은 루이 16세의 유일하게 살아남은 딸로 자신의 친사촌인 마리 테레즈 샤를로트와 결혼했으나 유산 후 자식이 없었다. 차남 베리 공작 샤를 페르디낭은 암살당했으나 외아들인 샹보르 백작 앙리[17]를 낳았다. 그러나 샹보르 백작 앙리도 자식을 낳지 못해서 부르봉 왕조의 직계는 단절되고 말았다. 그래서 루이 13세의 후손으로 먼 친척인 방계 오를레앙 공작 루이필리프 1세가 프랑스의 왕위를 잇게 되었다. 이 루이 필리프의 아버지 오를레앙 공작 루이 필리프 2세는 왕위에 접근할 목적으로 아들을 마리 테레즈 샤를로트와 결혼시키려 하거나(이 청혼은 왕실에서 까였다), 루이 16세 부부를 처형하는 데 앞장선 인물로[18] 샤를 10세나 마리 테레즈 입장에서는 그 아버지에 이어 그 아들에게서도 뒤통수를 맞은 것.[19]
참고로 여계로 갈 경우 보르보네파르마 계통[20] 순서로 이어진다.
이 가문의 당주들 중 하나이자 스페인 카를리스타의 대표인 카를로스 우고(5대손)는 1961년 프란시스코 프랑코가 자신의 사후에 왕정 복고가 될 것임을 선언하면서, 후안 카를로스와 카를로스 우고 중 하나를 차기 스페인 왕 후보로 지명하려고 했을 때 후안 카를로스가 지명된 것에 앙심을 품었다. 더불어 이때 프랑코가 제2차 바티칸 공의회로 인해 가톨릭교회와도 사이가 벌어지면서, 카를리스 우고는 극우반동주의(+나바라 분리주의)였던 카를리스타를 이끌고 스페인 공산당과 녹색당에 합류해서 좌파연합을 결성했다. 자세한 건 보르본 왕조 참조.
샤를 10세의 남자 직계는 단절되었지만 손녀이자 앙리 5세의 누나인 루이즈 마리 테레즈 다르투아가 보르본 왕조의 방계이자 파르마-피아첸차 공작인 카를로 3세와 혼인하여 자손을 남겼다. 여기서 루이즈의 장남인 로베르토 1세가 전처 양시칠리아의 마리아 피아 공주와 후처 포르투갈의 인판타 마리아 안토니아 사이에서 무려 24명의 자식을 낳았고, 그 자식들이 유럽 왕실들과 통혼하면서 샤를 10세의 여계 자손들은 현재도 꽤 많이 남아있다. 로베르토 1세의 딸들 중 하나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마지막 황후 치타이며, 아들 중 한 명이 룩셈부르크의 샤를로트 여대공의 남편 부르봉파르마의 펠릭스 공자이다. 또한 다른 아들 르네 공자의 딸, 즉 로베르토 1세의 손녀가 루마니아의 국왕 미하이 1세의 아내 안 드 부르봉파름, 전처 소생의 장녀 마리아 루이사 공녀는 불가리아 왕국 초대 차르 페르디난트 1세의 왕비다.[21]
4. 기타
현재까지 콜드플레이 하면 떠오르는 노래 중에 하나이자 가장 성공한 싱글 중에 하나로도 기억이 되는 노래 Viva la Vida는 샤를 10세의 비참한 최후를 담았다.프랑스가 낳은 위대한 수학자 중 한 명인 오귀스탱루이 코시[22]는 샤를 10세가 폐위될 당시에 새 국왕 루이필리프에게 충성을 맹세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일절 공직 취임이 금지되는 바람에 한동안 이탈리아로 망명해야 했었다.
만화 베르사이유의 장미에서는 작은형 프로방스 백작 루이와 붙어다니면서 조카 루이 샤를을 형수 마리 앙투아네트와 페르젠 백작의 사생아라고 비꼬며 마리 앙투아네트의 평판을 떨어뜨리고 왕실을 분열시키는데다,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자마자 잽싸게 해외로 도피한 것도 모자라 프로방스 백작과 함께 큰형 루이 16세 일가와 여동생 엘리자베트 공주가 죽든 말든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 연합군에게 프랑스와의 전쟁을 부추기는 악역으로 나온다.[23]
이노센트 루즈에서는 자신의 사치로 파산하자 형 루이 16세가 빚을 대신 갚아주어서 국가재정악화에 크게 보태며 삼부회 당시 평민대표들을 괴롭히다가 마리 루즈에게 쫄아서 도망가는 한심한 모습을 보인다.
경국의 재봉사 로즈 베르탱에선 의외로 고증을 잘 지켜 소극적인 형 루이 16세를 대신해서 그의 아내 마리 앙투아네트와 가면 무도회나 오페라에서 같이 놀고 시간이 나면 서로 티파티나 식사를 하는 등, 형수와 원만한 사이로 나오며 형제관계도 그럭저럭 괜찮다. 형 루이가 결혼한 후 얼마 안 있어 자신도 사보이아의 마리아 테레사와 혼인하는데 형제들 중 가장 먼저 아이를 임신시켜 아들 앙굴렘 공작 루이 앙투안을 낳는다.
[1] 그의 절대왕정 사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발언이다. 실제로 그는 입헌군주정 전환을 통보받자 주저않고 퇴위해버렸다.[2] 결혼 이전[3] 2개의 공작위는 결혼 이후. 전자는 1773년, 후자는 1776년[4] 공식적으로는 앙굴렘 공작이었지만, 최초로 받았던 작위인 아르투아 백작으로 주로 불렸다.[5] 말장난일 뿐이지만 프랑스'의' 마지막 왕이기도 하다. 루이필리프 1세는 사회계약설과 왕권민수설을 인식해 입헌군주제의 군주로서 본분을 다하겠다는 이유로 프랑스의 왕이 아닌 프랑스'인'의 왕을 자처하였다.[6] 당시 공화파들에게 샤를 10세의 즉위는 재앙으로 여겨졌다. 오죽하면 차라리 루이 18세의 장수를 바랐다는 썰도 나돌 정도. 루이 18세는 생각보다 꽉 막힌 왕이 아니었다. 부르주아를 비롯한 혁명파들의 기준에서야 꽉 막힌 왕이었지 그래도 이전의 루이 14세나 15세, 16세에 비하면 굉장히 많은 양보를 한 왕이었다. 특히 루이 18세는 이렇게 양보를 하지 않으면 왕권이 위태롭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최대한 선을 넘지 않으려 애를 썼다.[7] 대관식에서부터 왕의 손길이 닿으면 병이 낫는다는 의식을 했다. 연주창이라고 하여 목 주변의 림프선이 결핵균에 의해 감염되는 질환이 있다. 이 연주창은 손길이 닿을 경우 부어오른 부위가 일시적으로 가라앉는 현상이 일어나며, 중세기에는 이를 성유로 축복받은 왕만이 일으키는 기적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왕의 즉위식에서는 연주창 환자들에게 왕이 직접 자신의 손을 환자의 목에 갖다 대는 식전이 있었다. 당장 셰익스피어의 <맥베스>에서 맥베스가 거짓 왕이라는 증거로 내세운 것 중 하나가 바로 연주창을 치유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다만 샤를 10세 시절에 이르면 대혁명과 나폴레옹 제정을 거치면서 이런 중세적 전통에 대해서 샤를 10세 본인부터가 매우 창피해하면서 안하려고 했다. 샤를 10세는 전국에서 모여든 환자들을 돌려보냈다가 마지못해서 겨우 100여명의 환자들을 다시 불러 모으고 병원에서 매우 조용하게 연주창 치료의식을 행했는데, 최소 2000명의 환자를 모아놓고 공개적으로 했던 절대왕정 시기의 의식에 비해서 무척이나 간소화된 것이었고, 샤를 10세 본인도 "낫기를 바란다."라고 덧붙이면서 자기가 만진다고 낫는게 아니라는 뉘앙스의 덕담을 했다. 그외에 축성식에서는 국왕의 침실 문을 신부들이 3차례나 두들기고 신부들이 직접 자는 왕을 데리고 나오는 등 축성 이전의 왕은 진정한 왕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했는데 샤를 10세는 이를 간소화하고 안락의자에 앉아 있다가 자기가 직접 걸어나왔다. 그리고 보검을 나폴레옹의 원수들에게 들게 하는 등 눈치를 많이 봤다.[8] 배상금 자체야 아이티 혁명으로 악화된 유럽 열강들과의 관계개선을 위해 아이티에서 먼저 제시한 금액이었다만 그렇다고 해도 1억 5천만 금 프랑은 너무 과했다. 줄여준 8천만 금 프랑, 그러니까 400억 달러도 현재 아이티 총 GDP보다 살짝 많은 금액이다.[9] 언론의 자유를 완전히 억압하고, 의회를 해산하고, 부르주아 등 입헌군주제에 호의적인 계급을 선거인단에서 제외하고, 의원을 새로 선출하는 왕령이다. 샤를 10세가 민주주의를 완벽하게 혐오하고 전제군주제만을 옹호한다는 것을 잘 알 수 있다.[10] 괴르츠는 샤를 10세가 사망한 당시에는 오스트리아 제국령 괴르츠 백국의 영토였으나, 이 지역은 이탈리아계가 다수인 지역이었다. 제1차 세계 대전 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해체될 때 이탈리아계가 다수인 지역이 승전국인 이탈리아 왕국에게 넘어갔는데 괴르츠 또한 이탈리아에게 넘어가면서 고리치아(Gorizia)란 이름으로 바뀌었다. 그런데 이 지역은 슬로베니아인 또한 거주했던 곳이기 때문에 제2차 세계 대전 후 이탈리아가 패전국이 되면서 이스트리아 반도와 프리울리 지방 일부가 유고슬라비아 연방(슬로베니아 사회주의 공화국)에 넘어갔고, 이때 고리치아 중 슬로베니아인이 다수인 고리치아 교외 일부가 유고슬라비아로 넘어가 노바고리차(Nova Gorica)라는 이름으로 신설되었다. 그리고 1991년에 슬로베니아가 독립하면서 노바고리차는 슬로베니아 영토가 되었다. 샤를 10세가 마지막으로 거처하던 곳은 괴르츠 중심가에 있어 현재 이탈리아 영토이고, 샤를 10세가 묻힌 코스타네비차 수도원은 괴르츠 외곽에 있어 현재 슬로베니아 영토이다.[11] 1991년 처음으로 독립한 슬로베니아는 합스부르크 왕조, 카라조르제비치 왕조 등 외세의 지배를 받았던 탓에 자신들만의 군주가 있었던 역사가 존재하지 않는다.[12] 또한 샤를 10세의 여동생 마리 클로틸드는 마리아 테레사의 오빠 카를로 에마누엘레 4세와 결혼하고, 샤를 10세의 형 루이 18세도 마리아 테레사의 언니 마리아 주세피나와 결혼하면서 연이어 겹사돈을 맺었다.[13] 큰아버지 루이 16세의 장녀로 친사촌이다.[14] 양시칠리아 국왕 프란체스코 1세의 장녀.[15] 파르마 공작부인 루이즈 마리 테레즈, 샹보르 백작 앙리[16] 원래 샤를 10세는 손자 샹보르 백작 앙리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싶었지만 장남 루이 앙투안이 멀쩡히 살아있어서, 그를 건너뛰고 왕위를 계승시키는 게 불가능해서 루이 앙투안이 20분 가량 루이 19세로 프랑스 왕위에 앉아 있었다. 그래봐야 루이나 앙리나 둘 다 왕으로 인정 못 받는 건 똑같다는 게 함정[17] 아버지가 죽었을 때는 아직 어머니 뱃속에 있었으므로 그가 무사히 태어나자 "기적의 아이"라고 부르며 왕당파의 숭배 대상이 되었다. 정작 앙리 5세의 어머니 나폴리와 시칠리아의 마리아 카롤리나는 루이필리프 1세 시절 정권 타도 음모에 연루되었다가 체포되었을 때, 내연남(그것도 한둘이 아닌)의 사생아를 가진 사실이 드러나 정통파의 명분에 타격을 가했고 시가에서도 쫓겨났다. 경솔하고 골이 비었을 뿐 성격 자체는 선량하고 성실했다는 평.[18] 정작 본인도 혁명 정부 치하에서 쿠데타에 연루되어 루이 16세 부부와 똑같이 단두대에서 목이 잘렸다.[19] 이때문에 루이필리프는 망명 시절 부르봉 왕가의 친척들에게 왕따당했고 현재에도 부르봉 가문은 오를레앙 가문을 종가로 인정하지 않는다.[20] 카를 1세의 부인 치타 황후(고손녀)와, 불가리아 차르 페르디난트 1세의 왕비 마리아 루이사(고손녀), 미하이 1세의 부인 안 드 부르봉파름(5대손), 룩셈부르크의 장 대공(5대손)이 샤를 10세의 보르보네파르마계 후손들이다. 치타 황후와 안 왕비, 그 남편들 모두 본국에서 존경받는 인물들이니 그야말로 견부호자.[21] 아이러니하게도 페르디난트 1세는 샤를 10세가 퇴위당한 후 프랑스의 왕이 된 루이필리프 1세의 외손자다. 어머니 클레망틴 도를레앙이 루이필리프의 4녀이기 때문.[22] 현대 한국 고교수학 과정에서는 코시-슈바르츠 부등식 정도로 알려져 있으나 그는 미분적분학의 기틀을 마련하여 현대 수학의 기틀을 마련한 위대한 수학자 중 한 명이다.[23] 이 꼴에 엘리자베트 공주는 피를 나눈 형제이면서 우리들이 국민에게 살해되는 것을 바라고 있다니 지옥에나 떨어져야 마땅하다고 절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