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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세계 대전, 제2차 세계 대전, 티토-스탈린 결렬, 유고슬라비아 전쟁(크로아티아 독립 전쟁, 슬로베니아 독립 전쟁, 보스니아 전쟁, 코소보 전쟁) | |||||
외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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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슬라브주의, 남슬라브, 슬라브족이여, 세르보크로아트어, 마케도니아어, 슬로베니아어, 유고슬라비아 디나르 | }}}}}}}}} |
유고슬라비아 연방인민공화국 (1945–1963) Федеративна НароднаРепублика Југославија | ||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 (1963–1992) Социјалистичка Федеративнаепублика Југославија | ||
국기 | ||
민간기 | 국장[1] | |
Братство и jединство Bratstvo i jedinstvo 우애와 단결 | ||
1943년 11월 29일 ~ 1992년 4월 27일 | ||
성립 이전 | 해체 이후 | |
민주연방 유고슬라비아 | 유고슬라비아 연방공화국 | |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공화국 | ||
북마케도니아 | ||
트리에스테 자유 지구[2] | 슬로베니아 | |
크로아티아 | ||
국가 | <colbgcolor=white,#191919>슬라브족이여 | |
위치 | 발칸 반도 | |
수도 | 베오그라드 | |
주요 도시 | 사라예보, 자그레브, 류블랴나, 프리슈티나 등 | |
정치체제 | 일당제, 연방제, 사회주의 국가[3] 마르크스-레닌주의(1945~1948) 티토주의(1948~1990) | |
최고지도자 | 서기장 | |
국가원수 | 대통령위원회[4] | |
정부수반 | 총리 | |
주요 지도자 | 요시프 브로즈 티토 | |
정당 | [[유고슬라비아 공산주의자 동맹|]] | |
언어 | 세르보크로아트어, 슬로베니아어, 마케도니아어 | |
종교 | 세르비아 정교회, 가톨릭, 이슬람, 개신교 | |
군대 | 유고슬라비아 인민군 | |
민족 | 세르비아인, 크로아티아인, 보슈냐크인, 슬로베니아인, 마케도니아인, 몬테네그로인, 알바니아인[5] | |
주요사건 | 1943년 건국 1991년 유고슬라비아 전쟁 발발 1992년 연방 해체 | |
통화 | 유고슬라비아 디나르 | |
구성국 | 세르비아 사회주의 공화국 슬로베니아 사회주의 공화국 몬테네그로 사회주의 공화국 크로아티아 사회주의 공화국 마케도니아 사회주의 공화국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사회주의 공화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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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언어별 명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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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르보크로아트어 (로마자)[7] | Socijalistička Federativna Republika Jugoslavija (Jugoslavija)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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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케도니아어 | Социјалистичка Федеративна Република Југославија (Југославиј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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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어 | Социалисти́ческая Федерати́вная Респу́блика Югосла́вия (Югосла́вия) | |
영어 | Socialist Federal Republic of Yugoslavia (Yugoslavia) | }}}}}}}}} |
1943년에서 1992년까지 발칸반도에 존재했던 공산주의 국가이다. 약자로는 СФРЈ/ SFRJ 또는 SFRY로 부른다. 한국에서는 후신인 유고슬라비아 연방공화국(신 유고 연방)과 구분하기 위해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을 통칭 구(舊) 유고 연방이라 한다.
2. 역사
유고슬라비아 침공 이후, 페타르 2세는 망명 정부를 수립하였고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은 유고슬라비아 민족해방 반파시스트 평의회(AVNOJ)를 창설하였다. 전쟁 중이던 1943년 11월 9일에 제2차 AVNOJ의 결의안에 따라 망명 정부를 대신하는 사실상의 임시 정부인 '유고슬라비아 민주 연방'이 선포되었다. 또한 AVNOJ에서 구성된 유고슬라비아 민족해방위원회(NKOJ)의 수상 겸 국방장관으로 요시프 브로즈 티토가 선출되었다. 티토는 1945년 11월 11일 총선거를 통해 왕정 폐지를 선언하고 공산당 일당 독재 체제를 이루었으며 '유고슬라비아 연방 인민공화국'을 선언하였다. 1963년 4월 7일에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으로 국명을 바꾸어 1992년 4월 27일까지 유지된다. 티토는 여러 민족과 인종이 얽히고 설킨 유고슬라비아를 통치했다. 동구권에 속해 있었지만 소련과는 거리를 두고 비동맹 운동을 창설하였다.3. 붕괴
1980년 유고 연방을 안정적으로 통치해 오던 티토 대통령이 87세를 일기로 사망하면서, 티토의 영도 하에 안정적으로 유지되고 있었던 유고슬라비아의 기반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티토 사후 유고 연방의 정치권력 체제는 집권여당인 유고슬라비아 공산주의자 동맹(SKJ)의 1당 독재를 유지하되, 각 공화국 출신의 대통령들이 1년에 한 번씩 번갈아 가면서 통치하는 집단 지도체제로 개헌되었으나, 1980년대 말에 슬로보단 밀로셰비치의 공작 아래 세르비아의 연방 내 권력 독점으로 흘러갔고 결국 연방에서 힘 좀 쓰던 세르비아는 연방 내 다른 공화국들을 차별하기에 이른다. 이에 따라 유고슬라비아 내에서 민족 및 지역 갈등이 점점 고조되었다. 사실 티토 이전부터 세르비아계는 티토의 '형제애와 일치' 정책에 상당한 불만을 품고 있었다. 세르비아가 불만을 가진 이유는 간단한데, 유고 연방에서 가장 지분이 큰 나라는 세르비아인 반면, 티토는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의 접경지대 출신이었다는 점이다.[8][9] 게다가 티토는 세르비아에 속해있던 보이보디나 자치주와 코소보를 연방 내 자치주로 분리시키기까지 했으니 세르비아의 불만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었다.[10]
정치인 슬로보단 밀로셰비치는 고위직으로 오르면서부터 대세르비아주의 성향을 드러내어 여러 사람들에게 경계심을 부르고 있었다. 밀로셰비치는 1987년 세르비아 대통령에 등극한 뒤 정치공작을 감행하며 세르비아인의 감정에 불을 지피는 방식으로 반관료혁명이라고 하는 시위를 조직해 몬테네그로와 코소보, 보이보디나 지역의 고위층들을 친 밀로셰비치파 인사들로 교체했으며 1988년에는 아예 1974년 제정 헌법을 무시하며 위헌적으로 헌법을 개정했다. 특히 코소보와 보이보디나 지역에서 알바니아계와 헝가리계 주도의 소요사태가 일어나자 이를 진압한다는 명목으로 두 주의 자치권을 박탈해[11] 타 공화국들이 반발했는데, 이 와중에 연방 주석직을 신설하려 하면서 갈등이 고조되었다.
한편 경제적으로도 유고슬라비아는 1980년대 오일 쇼크의 여파를 극복하지 못했는데, 이후에 여러 번 외채를 탕감받았으나 여전히 200억 달러가 넘는 외채를 끌어안고 있었다. 또한 급속한 물가상승과 두 자릿수의 높은 실업률, 저성장으로 경제 위기를 겪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위기를 극복하려는 노력은 국가간 경제격차와 정치적 견해 차이로 인한 각 공화국 사이의 갈등으로 무위로 돌아가기 일쑤라 별 효과를 보지 못했다. 주로 인구가 많은 세르비아 vs 경제권을 주도하고 있는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의 구도였다. 그 결과 경제 위기가 지속되면서 각 공화국 간의 갈등은 더욱 심화되었다. 지식인들은 갈등을 진정시키기는 커녕 오히려 부추겼으며, 각 공화국의 지도층 또한 불만의 표적이 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경기 침체의 원인을 다른 공화국이나 민족에게 돌려 책임을 회피했다. 더 나아가 이들은 민족의 이익을 위해 열심히 일한다는 느낌을 줄 목적으로 다른 공화국을 향해 자극적인 발언을 일삼으며 자신들의 공화국 이익이 우선이라는 태도를 보였으며, 때문에 갈등은 더욱 고조된다. 이러다보니 유고슬라비아 공산주의자 동맹 내 계파들은 각 지역별로 분열되어서 말만 하나의 정당인 상황이 되었다.
그러던 중 1989년 동구권 각지의 공산정권이 속속 붕괴되면서 사회 각계에서 개혁의 목소리가 터져 나오게 되었고, 이에 따라 집권 여당인 유고슬라비아 공산주의자 동맹도 대세에 따라 자연스레 일당 독재체제를 종식하기 위해 1990년 1월에 전당대회를 열었다. 그러나 이 당시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 지부가 1인 1표를 지지한데 반해 타 공화국 지부들은 1공화국 1표를 주장했던 상황이었고 당연히 충돌이 빚어지게 되었다. 이 자리에서 세르비아 대표단은 필리버스터를 발동했고, 슬로베니아 대표단이 퇴장당하는 사태가 벌어지자 이에 격분한 크로아티아 대표단이 함께 퇴장하면서 결국 반쪽짜리 전당대회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후 각 공화국별로 다당제 총선을 시행하는 가운데 세르비아와 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 간의 갈등이 여전히 지속되었고, 유고 연방은 국가 존속의 위기를 맞게 되었다. 이를 부추긴 대표적인 인물이 슬로보단 밀로셰비치였지만 다른 공화국의 지도자들도 이에 질세라 '평화 대신에 우리 민족의 독립' 운운하며 민족 간의 분열을 부추겼다. 보스니아 공화국만 해도 무슬림 지도자 알리야 이제트베고비치가 공공연하게 "보스니아를 독립시킬 수 있다면 전쟁도 불사하겠다"는 강경 발언을 하여 세르비아계 국민들의 반발을 불러왔다. 슬로베니아의 밀란 쿠찬과 북마케도니아의 키로 글리고로프는 유고슬라비아 공산당을 탈당해서 슬로베니아/마케도니아 사회당을 차렸으며, 크로아티아는 내부 혼란 와중에 프라뇨 투지만의 민주 크로아티아당이 급성장하면서 유고슬라비아 공산당 크로아티아지부가 이름을 바꾼 크로아티아 사회당이 수세에 몰렸다.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는 라도반 카라지치의 세르비아 민주당, 알리야 이제트베고비치의 민주행동당, 프라뇨 투지만의 크로아티아 자유당[12]까지 득세하면서 유고슬라비아 공산당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지부는 소외돼 복잡한 양상으로 치달았다.
특히 크로아티아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는 총선에서 유고슬라비아 공산주의자 동맹이 정권을 상실하면서 정권 위기가 걷잡을 수 없는 수준으로 치닫기 시작했다. 슬로베니아와 세르비아, 몬테네그로는 유고슬라비아 공산주의자 동맹 출신 인사들이 슬로베니아 사회당, 세르비아 사회당, 몬테네그로 사회당 등을 결성하여 정권 재창출에 성공했다. 그러나 크로아티아는 1990년 5월 총선에서 프라뇨 투지만의 민주 크로아티아당이 63%를 차지하여 정권교체가 일어나고 말았다.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는 한 술 더 떠서 1990년 10월 총선에서 보슈냐크인의 공화국을 세우겠다는 알리야 이제트베고비치(보슈냐크인)의 민주행동당 35%, 라도반 카라지치가 이끄는 세르비아 민주당이 30%, 크로아티아 투지만의 지원을 받은 크로아티아 자유당이 25%를 차지했고, 유고슬라비아 공산주의자 동맹은 고작 11% 득표로 처참히 몰락했다. 보스니아는 이후 보슈냐크인, 세르비아인, 크로아티아인들이 자기들이 정권을 잡겠다고 연립정부 수립을 거부해서 무정부 상태가 지속된다.
결국 대립이 고조되어 가던 1991년 6월 25일 유고 연방의 여섯 공화국 중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가 유고 연방을 탈퇴, 각자 독립을 선언하면서 내전이 발발했고 연방의 붕괴가 시작되었다. 유고 연방의 정치적 주도권을 장악하던 세르비아는 무력 진압을 결정했고, 이로 인해 세르비아 중심의 유고슬라비아 인민군(JNA)과 연방에서 탈퇴한 슬로베니아 공화국과 크로아티아 공화국 사이에 전쟁이 터졌다. 한편 전쟁이 치열해져 가던 1991년 9월에는 남부의 마케도니아가 유고 연방에서 탈퇴, 분리 독립을 선언했고 이듬해인 1992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공화국이 독립을 선언하면서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은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다. 티토 정권 시기 부통령 및 고위 관료를 지냈던 밀로반 질라스(Milovan Đilas, Milovan Djilas) 등 여러 유고 내 원로 인사들이 유고 연방의 분열을 필사적으로 막기 위해 전쟁을 중단하고 공화국끼리 서로 양보하여 통일을 유지할 것을 호소했지만, 실패로 돌아갔고 결국 질라스는 1995년 자신의 자택에서 의문사 이후 변사체로 발견되었다.[13] 사인이 심장마비 및 노환이었다는 세르비아 정부 측의 공식발표가 있었으나 확실히 밝혀진 것은 없다.
4. 구성국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 구성국 | |||||
슬로베니아 | 크로아티아 |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 세르비아 | 몬테네그로 | 마케도니아 |
5. 문화
노동자 자주관리제도를 채택한 특성[14]으로 인해 전반적인 봉급 수준이 동유럽 국가에서 가장 높았다 보니[15], 그만큼 문화도 풍성해질 수 있었다. 또한 서유럽과의 교류도 자유로워서 이미 1960년대부터 해외로 적지 않은 유고슬라비아인들이 가서 유학하거나 돈을 벌어다왔다. 또한 집세와 연료비는 쌌고 교육이나 의료는 공짜라서 더더욱 높은 소비력을 지닐 수 있었기 때문에 유고 국민들에게 엄청난 자부심을 심어주었지만 서방소비재의 수입이 크게 늘어나다보니 유고슬라비아의 산업경쟁력에는 큰 악영향을 끼쳤다. 1970년대 오일쇼크와 함께 원자재 수입비용이 크게 늘면서 경상수지 적자가 크게 늘어났으며 지역별로 불균형 발전 현상이 두드러지기 시작했고, 물가상승률도 급속히 높아지기 시작했다. 이 때문에 소비붐을 꺼트려서 유고슬라비아 경제의 건전성을 높이는 방안이 나오기는 했지만, 높은 구매력이 유고슬라비아인들이 유고슬라비아 체제에 대한 지지가 높은 이유였기 때문에 티토 생전에는 결국 손을 대지 못했고, 결국 티토 사후 본격적으로 긴축정책 및 외채감축으로 정책방향을 전환을 했지만 소비붐이 꺼지면서 지지를 잃게 생긴 유고슬라비아의 지도층들은 민족주의에 편승하면서 언론을 통해 타 공화국을 깎아내리고 티토를 격하하는 방향으로 생존을 도모하면서 훗날 유고 연방이 해체되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16]비동맹노선임을 감안해도 생각보다 표현의 자유가 꽤 보장되었으며 동독, 헝가리와 함께 동구권에서 서구풍 팝음악이 꽤 발달한 축에 속한 편이었다. 동유럽 공산권 국가들 중 유일하게 유로비전 송 콘테스트에 오랜 기간 참가했던 것은 물론 개최까지 했다. 무엇보다도 유로비전 송 콘테스트는 직전 대회 우승 국가에서 개최하는 것이 불문율이다. 즉, 개최국이었다는 것은 우승 경험이 있다는 것이다.[17] 1980년대, Idoli, Sarlo Akrobata, Elektricni Orgazam 등 베오그라드의 뉴웨이브(음악)/포스트 펑크 밴드들이 많이 등장하여 "베오그라드 얼터너티브 씬"을 형성하기도 하였다. 베오그라드 뉴웨이브 밴드들 중 세 밴드의 합작으로 발매된 파켓 아란즈만 앨범이 유고슬라비아권 청년들 사이에서 큰 유명세를 떨친 바가 있다. 그 밖에도 인더스트리얼로 분류되는, 1980년대부터 활동한 밴드 라이바흐(Laibach)의 사례처럼 서방 기준으로도 표현 수위가 꽤 강한 음악들까지 허용되는 수준이었다.
유고슬라비아의 특성과 다양성을 규정하던 것이 이른바 '1234567 국가'라는 얘기가 있었다.
1개의 연방국가, 2개의 문자(로마자와 키릴 문자), 3개의 종교(가톨릭, 정교회, 이슬람), 4개의 언어(세르보크로아트어, 슬로베니아어, 마케도니아어, 알바니아어), 5개의 민족(세르비아인, 크로아티아인, 슬로베니아인, 마케도니아인, 알바니아인)[18], 6개의 연방 구성국(세르비아,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몬테네그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마케도니아), 7개의 접경국가(이탈리아, 오스트리아, 헝가리, 루마니아, 불가리아, 그리스, 알바니아) |
6. 언어와 문자
유고 연방을 이루던 국가들 중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크로아티아 그리고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는 지역마다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동일한 언어가 사용되었으며, 한때는 이들을 합쳐 세르보크로아트어라고 불렀다. 그러나 분열 이후 각 공화국이 정치적 이유로 스스로의 언어를 세르비아어, 보스니아어 등으로 다르게 부르기 시작했고, 20여 년이 흐르면서 아직 소통에 크게 지장이 있는 정도는 아니지만 점차 각자의 언어가 분화되고 있는 중이다. 한편 슬로베니아와 마케도니아에선 독자적인 언어가 쓰이는데, 슬로베니아어는 크로아티아어와 계통상 가깝기는 하지만 의사소통에는 다소 지장이 있고, 마케도니아어 또한 불가리아어에 더 가깝기 때문에 원활한 소통에는 무리가 있다.문자로는 로마자와 키릴 문자가 현재까지 사용되고 있다. 옛날 서로마 제국에 속했던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는 로마자를 사용하며, 1835년에 류데비트 가이라는 사람이 보완한 정서법을 표준으로 쓴다. 반면 동쪽 공화국들은 과거 동로마 제국의 영향을 받아 키릴 문자를 사용하며, 부크 카라지치가 확립한 정서법을 쓴다. 몬테네그로는 로마자와 키릴 문자를 혼용하고 있고 독립 이후 로마자의 사용을 더욱 선호하는 추세다. 한편 보스니아는 동로마 제국 소속이었지만 오스만 제국의 지배 당시 이슬람교 문화권에 속하여 '아레비차(arebica)'라는 이름의 아랍문자를 변형한 알파벳을 오랫동안 써 왔다. 아랍 문자에서 유래한 문자들 중 유일하게 완전한 모음자가 존재하는 형태이기도 하다. 20세기에 들어서 조금씩 라틴 문자를 사용하기 시작했으며, 1941년에야 아레비차를 완전히 폐지하고 로마자 정서법이 자리잡기 시작했다.
역사의 기로에 설 때마다 자주 동방문화권과 서방문화권으로 갈라져서 편입되었던 까닭에 같은 언어를 씀에도 남보다도 못한 사이가 되었다.
7. 군사
자세한 내용은 유고슬라비아 인민군 문서 참고하십시오.8. 국가
자세한 내용은 슬라브족이여 문서 참고하십시오.9. 경제
조선업이 특히 강세였다. 연방 붕괴 직전인 1987년에는 유럽 1위, 세계 3위의 수주물량을 자랑했다.# 풀라의 울랴니크 사, 리예카의 5월 3일 조선소, 스플리트의 브로도스플리트 조선소 세 곳이 유고 연방의 조선업을 견인했다.[19] 주로 민수용 선박들을 건조했고, 주 고객은 친밀한 서구권 국가들이었다. 82%의 건조량이 서방으로, 그 나머지 20% 정도만이 소련에 판매되었다. 또 다른 조선 강자들인 일본과 한국, 그리고 스페인 정도만이 유고산 선박을 구입하지 않았다.#현재도 조선업은 크로아티아의 주력 산업이지만 내전과 경제체제의 변동을 거치며 한국과 중국 등의 후발주자에 밀려났다. 오늘날에는 과거의 위상을 많이 잃어버린 상태다.
10. 외교 관계
특이하게도 동유럽의 공산권 국가 치고는 제3세계의 주도국을 자처하면서 제2세계와 제1세계 사이에서 중립 외교를 펼쳤고, 미국, 유럽 등 서방 세계 국가들에게도 상당히 개방, 친화적이었다. 물론 동유럽 공산권 국가들답게 MiG-21 전투기와 MiG-29 전투기, AK-47 소총, PK 기관총 등 소련산 무기들을 구입하거나 면허생산권을 받아 자스타바 M70 소총, 자스타바 M84 기관총 등 AK-47이나 PK 등 소련제 총기들의 라이센스 변형 버전을 생산, 운용하기도 했었고, 한편으로는 F-86 세이버 전투기, 아에로스파시알 가젤 헬기 같은 미국산, 프랑스산 무기들을 구입하기도 할 정도였었다. 아예 서방과 소련 양쪽 사이에서 등거리 외교를 하며 군수 무기들을 사오는데 그치지 않고 자체적으로 소코(SOKO)라는 항공기업을 두어 G-2 갈레브, G-4 슈퍼 갈레브, J-21 야스트랩 훈련기/경공격기, J-22 오라오 공격기 등 자국산 군용기들을 생산하여 운용하거나 일부 해외 국가들로 수출했을 정도였으며, 탈냉전 이후 급격한 연방 해체와 내전으로 백지화됐지만 노비 에비안(NOVI AVION)이라는 차세대 자국산 제트전투기를 개발, 생산하여 유고 공군에 전군 배치하려는 계획을 추진한 적도 있었다.제3세계의 맹주를 자처했던 나라답게 인도, 인도네시아, 이집트, 리비아, 네팔, 스리랑카, 시리아, 이라크, 알제리[20], 쿠웨이트, 탄자니아, 잠비아, 우간다, 소말리아 등 냉전 당시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제3세계 비동맹 국가들과의 외교관계 역시 매우 좋았으며, 리비아의 경우 카다피 독재 정권 시절이던 1970년대와 1980년대 당시 유고슬라비아에서 군용 항공기와 밀, 과일 등 식량들을 수입하고 1970년과 1973년, 1975년, 1977년에 당시 리비아의 독재자였던 무아마르 카다피 전 국가원수와 유고의 티토 전 대통령이 서로 상대국들을 답방하며 정상회담을 매번 개최할 정도로 유고와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21]
10.1. 소련과의 관계
자세한 내용은 소련-유고슬라비아 관계 문서 참고하십시오.공산권의 수장인 소련과는 관계가 전반적으로 좋진 않았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당시 유고슬라비아 대통령이었던 티토가 소련과의 대립각으로 인해서 코민포름에서 제명되었던 탓에 소련에 대한 반감을 갖고 있었던데다, 제3의 노선을 택했기 때문에 하는 것마다 소련의 이오시프 스탈린과 충돌하기 일쑤였다. 다만 1953년에 스탈린이 죽고 1950년대와 60년대, 70년대에 소련에서 니키타 흐루쇼프와 레오니트 브레즈네프가 집권한 뒤부터는 소련과의 관계가 어느 정도 개선되기는 했다.
10.2. 한국과의 관계
유고슬라비아는 중립, 제3세계 국가였지만 한국과의 관계는 좋지 못했다.[22] 왜냐하면 1950년 한국 전쟁 때 UN과 미국이 발의했던 대한(對韓) 지원에 대해 반대를 했던 나라이기 때문이다. 반대는 UN 상임이사국이었던 소련 때문에 했다. 이 당시 소련은 주 UN 대사가 아예 불참하였으며 미국, 영국 등이 대한민국에 군사 및 물자원조를 발의하게 되자 자국 언론 등을 통해서 대한민국에 대한 군사 및 물자원조에 반대하는 입장을 밝혔으며 즉각 이를 철회하라는 주장까지 폈던 적이 있다. 그로 인해 유고슬라비아도 대한민국에 대한 군사 및 물자 원조에 대해 반대했으며 대한 지원에 대한 투표에도 기권 및 불참하는 등 대한민국에 부정적인 입장을 취했다.하지만 여기에 대한 유고슬라비아의 속사정은 조금 복잡했다. 스탈린과 사이가 안 좋았던 티토는 코민포름에서 제명당한 직후 UN의 비상임이사국으로 뽑힐 때도 소련의 반대를 미국과 영국의 지원으로 타개했을 정도로 공산권과 거리를 두었다. 심지어, 한국전쟁에 대해 북한이 주장하는 북침설(대한민국 국군이 먼저 38선을 넘었다는 것)을 유고슬라비아 언론에서 풍자했을 정도이다.[23] 이런 상태에서 비상임이사국에 오른 유고슬라비아는 동구권을 지원함으로서 일궈낸 서방과의 관계를 박살낼 생각이 없었고, 그렇다고 서방측 제안에 적극적으로 찬성을 한다면 소련과 동구권의 침공이 따를 것이었기에 그 어느 쪽도 선택할 수 없었다. 그래서 서방과 공산권 양쪽에서 의견을 낼 때마다 기권을 했다. 물론 당연하겠지만 공산권은 유고슬라비아를 비난했다.
하지만 UN에서 공식적으로 비상임이사국이었던 유고슬라비아의 기권으로 인해 오히려 다른 비상임이사국들도 서방세계의 대한 지원이 수월했던 것은 사실이다. 반대와 기권은 엄연히 다르다. 만약 유고슬라비아가 반대했다면 대한 지원은 애로사항을 겪었을 가능성이 높다. 찬성하게 되면 발칸 반도에 소련 주도 하의 침공이 예정되어 있고, 반대를 하게 될 경우 서방과 쌓아온 친선이나 교류가 끊기게 된다. 그래서 당시 투표 때 제일 곤란한 상황이었던 유고슬라비아 입장에서 선택한 것이 기권. 만약 소련의 힘이 약했다면 유고슬라비아는 찬성 쪽에 손을 들었을 가능성도 있다. 북한의 남침이 불법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서방과 함께 하는 것을 원했지만 소련의 눈치를 봐야만 했다. 이 때문에 북한의 김일성은 1960년대 후반까지 유고슬라비아를 "찌또도당"이라고 불렀을 정도이다.
사실 소련은 한국전쟁이 끝나면 곧바로 바르샤바 조약기구의 국가를 내세워 유고슬라비아를 침공하려고 했었다. 그러나 맥아더의 인천 상륙 작전의 성공과 북진을 보고 취소했다. 여전히 말 안 듣는 티토의 유고슬라비아는 소련에게 있어 골칫거리였고 침공계획을 세우지만 이를 알게 된 유고슬라비아는 전쟁이 있을 경우 미국과 함께 소련에 맞서 싸우겠다고 주장한다.[24] 미국과 영국은 대놓고 말은 못했지만 유고슬라비아를 몰래 지원하겠다고 약속했으며, 심지어 소련과 전쟁을 하려고 했다.
소련과 유고슬라비아의 반대와 기권에도 불구하고 UN의 대한 지원은 결국 통과되어 이들을 제외한 당시 UN 회원국 52개국이 대한민국 지원의사를 표명하게 되었고 21개국이 전투 및 의료지원 의사를 표명하였다. 1971년에 북한과 단독 수교하였다.
스포츠 분야에서는 1961년에 서울과 베오그라드에서 월드컵 예선 대륙간 플레이오프를 가졌으며, 1984년 사라예보 동계올림픽과 1988년 서울 올림픽에 대한민국과 유고슬라비아가 각각 참가하였다.
이후 노태우 정부의 북방정책에 따라 1989년에 대한민국과 유고슬라비아는 대사급 수교를 맺었고 1990년에 수도 베오그라드에 대사관을 설치했다. 1992년에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의 각 구성국이 독립국으로 떨어져나가면서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과의 외교 관계는 유고슬라비아 연방 공화국, 세르비아 몬테네그로를 거쳐 독립국 세르비아로 이어진다. 한국-세르비아 관계 참조.
[1] 1943년 11월 29일은 티토가 유고슬라비아의 통합 반파시스트 저항조직 AVNOJ(Antifašističko vijeće narodnog oslobođenja Jugoslavije)를 결성한 날이다. 여섯 개의 횃불은 유고슬라비아 구성국(세르비아,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몬테네그로, 마케도니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을 상징한다.[2] B구역 한정[3] 다만 냉전 시절로 넘어오면서 체제는 유지하면서 중립국 역할을 맡았다.[4] 각 지역 별로 대통령위원회 멤버를 한 명씩 선출한 뒤 1년마다 한 명씩 돌아가면서 대통령 직무를 수행한다. 마케도니아 -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 슬로베니아 - 세르비아 - 크로아티아 - 몬테네그로 - 보이보디나 - 코소보 순으로 돌아간다.[5] 그 외에 보이보디나 지역에 헝가리인, 루신인, 슬로바키아인, 루마니아인 등이 소수민족으로 거주했다.[6] 세르비아, 몬테네그로에서 주로 쓰였다.[7]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서 주로 쓰였다.[8] 이 때문인지 유고 연방이 해체된 지금도 세르비아 국내에 묻혀 있는 티토의 묘를 철거하고 그의 유해를 본래 출신지인 크로아티아로 이장시키자는 주장도 세르비아 현지에서 제기되고 있다.[9] 하지만 서방과의 교류가 더 활발해 더 부유해졌던 북부(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보스니아)와 비교적 가난했던 남부 사이의 마찰도 있었다. 북부의 자금 상당수가 남부에 투자된 것 역시 갈등의 원인이 되었다.[10] 특히 중세 시기 세르비아 왕국의 초기 강역이자 세르비아 정교회의 종교적 성지나 다름 없었던 코소보를 인구 비율상 알바니아인들이 많다는 이유로 연방 내 자치주로 분리시킨 것에 대한 불만이 가장 높았다.[11] 티토 시절에 연방 자치주로 세르비아에서 떼어낸 코소보와 보이보디나를 도로 세르비아의 자치주로 편입했다.[12] 프라뇨 투지만은 크로아티아 국적자였지만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헤르체고비나주는 사실상 크로아티아 땅으로 취급될 정도로 크로아티아인이 절대 다수인 지역이다.[13] 사실 정치적 권력이라도 있었다면 또 모르겠는데 이 당시의 질라스는 티토 시절 티토의 독재통치에 저항하다 이미 유고 연방 시기 집권 공산당에서도 축출당하고 정치적 권력을 잃어버린 무명의 노인이었다. 또한 이미 1980년대 중후반부터 각 공화국 가릴 것 없이 강성민족주의가 들끓으며 유고 내전 당시 유고슬라비아 연방으로부터 분리독립했던 슬로베니아의 밀란 쿠찬 전 대통령과 크로아티아의 프라뇨 투지만 전 대통령, 보스니아의 알리야 이제트베고비치 전 대통령, 마케도니아의 키로 글리고로프 전 대통령 등 구유고권 국가들의 지도자들 역시 그를 헛소리 하는 이상한 사람 취급했고, 유고 연방 내에서 주도권을 쥐고 있었고 보스니아 내전에서 전쟁범죄들을 주도했던 세르비아의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전 대통령 역시 그를 회색분자 겸 케케묵은 공산주의자/이상주의자로 몰아가며 그를 사회적으로 매장하려고 하였다.[14] 이는 체코계 미국인 경제학자였던 야로슬라프 바네크(Jaroslav Vaněk)의 '참여경제 모형'에 기반한 것이었는데, 사회주의에 시장경제를 접목시켜 자유와 평등의 두 마리 토끼를 잡고자 하는 취지에서 개발된 것이었다. 사회주의 모형 중에서도 가장 현실적이고 효율적인 편에 속했지만 사회주의와 시장경제의 단점을 모두 끌어안고 있었다.[15] 사실 단순 1인당 GDP상으로는 체코슬로바키아나 동독, 소련이 더 높았다. 하지만 이들 국가는 구매력은 유고슬라비아보다 높았을지언정 양질의 공산품이나 외제품을 사려면 발품을 팔거나 암시장에서 웃돈을 주고 사야 하는 등 소비의 질은 유고슬라비아에 크게 밀렸다.[16] 반대로 이 소비붐이 유고슬라비아 각 구성국 사이에서 티토에 대한 향수가 큰 이유이기도 하다. 10년간의 경기침체기를 거쳐 전쟁으로 인해 경제가 작살나고 실업률은 높은 등의 이유가 겹치고 있고, 외교적인 위상도 제3세계의 대표 국가 타이틀을 달았던 구 유고슬라비아에 비하면 엄청나게 추락하다보니 그렇게 된 것이다.[17] 1989년 대회에서 크로아티아계 밴드인 '리바'가 우승하여 1990년 자그레브에서 유로비전 송 콘테스트를 개최했다.[18] 몬테네그로의 주요 민족인 몬테네그로인, 그리고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주요 민족인 보슈냐크인이 빠졌다. 덧붙여서 세르비아 북부에 위치한 보이보디나 자치주에는 헝가리인, 슬로바키아인, 루마니아인, 루신인 등 수많은 소수민족이 존재했다.[19] 울랴니크와 5월 3일 조선소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해군에 함선을 납품하던 조선소였다. 브로도스플리트는 유고슬라비아 왕국 시절인 1922년에 설립되었다.[20] 1950년대 알제리 전쟁 당시 프랑스의 식민지배에 맞서 싸우던 알제리 민족해방전선 독립군에게 무기를 지원하기도 했으며, 알제리 독립 직후에는 알제리 제1대 대통령인 아흐메드 벤 벨라와 제2대 대통령인 후아리 부메디엔이 티토와 정상회담을 하기도 했다.[21] 실제로 2011년 리비아에서 카다피 정권이 몰락하고, 카다피가 도망자 신세로 리비아 국내를 떠돌다가 2011년 10월 반정부군 세력들에게 사살되기 전까지 당시 일부 해외 언론 사이에선 카다피가 사망하지 않고, 국외로 도주/망명할 경우 망명이 예상되는 해외 국가들로 세르비아와 크로아티아, 북마케도니아 등 예전 구 유고 연방에 속해있던 일부 동유럽 국가들이 거론되기도 했다.[22] 대부분의 제3세계 국가들은 제1세계, 친미, 친서방 진영의 국가들보다는 공산권과 비교적 더 친한 편이었다. 그런데 정작 유고슬라비아는 서방세계 국가들과 관계가 좋은 편이었다. 하필 왜 유독 한국에만 반대했는지는 후술.[23] 유고슬라비아는 공산권 국가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국가들과 다르게 남침(북한이 남한을 침공했음)을 주장하는 국가였다.[24] 유고슬라비아는 생각보다 국가 체급이 있어서 소련 주도의 바르샤바 조약군의 침공이 있을 시 어느 정도 동등한 위치에서 겨룰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