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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d0000><colcolor=#ffe400> 호세 카를로스 마리아테기 José Carlos Mariátegui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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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호세 카를로스 마리아테기 라 치라 José Carlos Mariátegui La Chira | |
출생 | 1894년 6월 14일 | |
페루 모케구아[1] | ||
사망 | 1930년 4월 16일 (향년 35세) | |
페루 리마 | ||
국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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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 부프란치스코 하비에르 마리아테기 레케호[2] 모 마리아 아말리아 라 치라 바레호스[3] 형제 훌리오 세자르[4] 남매 기예르미나[5] | |
학력 | 독학 | |
직업 | 지식인, 언론인, 사회운동가, 철학자 | |
종교 | 무종교 | |
소속 | 페루 사회당[6] | |
서명 |
1. 개요
페루의 지식인, 언론인, 사회운동가, 철학자다. 35세의 나이로 일찍 사망하기 전에 다작 작가로 활동한 그는 20세기의 가장 영향력 있는 라틴 아메리카 사회주의자 중 한 사람이다. 그는 사회주의 혁명이 유럽식 공식을 기계적으로 적용한 결과가 아니라 지역 조건에 따라 라틴 아메리카에서 유기적으로 진화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대표적으로 마리아테기는 사회주의 사상을 잉카 문명의 평등 사상과 함께 결부시켜 해석했다.2. 생애
마리아테기는 1894년 페루 모케구아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외가가 있는 사얀에서 자랐으며, 이 마을은 산악지대부터 이어지는 통상로 위에 위치하고 있어 항상 여행자들로 붐볐다고 한다. 산악지대의 라티푼디오에서 노동력을 착취당하는 원주민/농민의 생활상을 전해 들으며 어린시절을 보낸 마리아테기는 8살 때 왼쪽 다리를 다쳐 평생 다리를 절게 되었고, 가난한 집안 형편으로 인해 학업을 중도에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15살이 되던 해에 <라 프렌사(LaPrensa)>에서 일하게 됐으며, 처음에는 원고 심부름꾼에 불과했던 그는 점차 저널리스트로서의 재능을 보이기 시작하며,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던 1914년부터 정기적으로 <라 프렌사>에 글을 실었고, 이 신문사의 편집위원이 됐다.저널리스트가 된 이후 마리아테기는 페루 모더니즘 문학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로 여겨졌던 아브라함 발델로마르가 만든 문학모임인 콜로나다(Colónida)에서 활동했고, 이 모임을 통해 난생 처음 마르크스주의와 사회주의를 접했다고 하다. 이를 통해 사회주의자가 된 마리아테기는 1919년 신문 <이성(LaRazón)>을 발행하면서 그 색채가 더 강해졌다. 1918년 12월부터 1919년 1월,그리고 1919년 초중반에 재차 일어난 노동자들의 총파업을 통해 노동운동이 새로운 사회운동으로 강력하게 부상했다. 마리아테기와 그의 동료들은 <이성>이라는 잡지를 통해 노동자 총파업과 대학개혁운동을 지지하는 일련의 글들을 발표하고, 노동자들과 학생, 지식인들의 연대를 이끌어내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마리아테기는 국내외 노동계급의 활동과 프랑스 사회주의, 헝가리 공산주의 등에 관한 새로운 소식들을 전하며 노동자들의 연대를 촉구했다. 또한 1919년 두 번째 노동자 총파업 기간 중에는 학생들과 노동자들에게 신문사 사무실을 모임 장소로 제공하여 학생과 노동자,지식인의 연대를 도모하고 모임 참가자들과 운동의 방향과 계획들에 관한 다양한 방법들을 논의했다. 1919년 프랑스 파리에 도착한 마리아테기는 앙리 바르뷔스(Henri Barbusse)를 통해, 로맹 롤랑(Romain Rolland)을 비롯한 <끌라르떼> 그룹[7]의 인물들과 교류했다.
마리아떼기에게 1919년부터 1923년까지의 유럽 체류는 인생의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1919년에 파리에 도착한 마리아떼기는 앙리 바르뷔스(HenriBarbusse)를 통해 로맹 롤랑(Romain Rolland)을 비롯한 《끌라르떼(Clarté)》그룹35)의 인물들과 교류했다.ㅈ또한 이탈리아에서는 베네데토 크로체(BenedettoCroce)와 지오반니 파피니(GiovanniPapini)등을 만났고,특히 안토니오 그람시(AntonioGramsci)와 팔미로 톨리아티(PalmiroTogliatti)가 창건한 《신질서(L'OrdineNuovo)》그룹36)의 주도로 1921년에 이탈리아 공산당(PartitoComunistaItaliano)이 창설된 것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마리아테기는 독일의 뮌헨과 베를린, 오스트리아의 비엔나, 체코의 프라하, 헝가리의 부다페스트 등지를 여행했으며, 독일에서는 몇 달 동안 마르크스의 원전들을 탐독했다.
이후 마리아테기는 1923년 3월 17일 페루 리마로 다시 귀국했으며, 빅토르 라울아야 데 라 토레가 이끌던 아메리카 민중혁명 연합(APRA)의 강력한 지지자가 되었다. 마리아떼기가 1920년대 초반에 아야 델 라 또레와 함께 인민대학의 활동에 적극 참여하고,아메리카인민혁명동맹이 발간한 잡지 『끌라리다드(Claridad)』의 편집을 맡는 등 1920년대 후반까지 아메리카인민혁명동맹과 공조했다. 1925년 《현재의 상황》이라는 논설에서 파시즘을 맹렬히 비난하고 사회적 억압과 불의가 횡행하는 사회에서 지식인이 앞에 나서 사회를 계도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1926년 마르크스주의를 표방하는 문예지 《아마우타 Amauta》를 발간했다. 더 나아가 마리아테기는 1928년 페루 공산당을 창당했다.
3. 아마우타 창간
4. 이데올로기
우리는 아메리카의 사회주의가 모사와 모방이길 원치 않는다. 그것은 영웅적 창조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현실에, 우리 자신의 언어로 인도아메리칸 사회주의에 생명을 불어넣어야 한다.[8]
제3세계의 붉은 별 p.104
제3세계의 붉은 별 p.104
마리아테기의 이데올로기는 쉽게 말해 마르크스-레닌주의의 라틴아메리카 현지화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레닌의 노동자 농민 동맹이론을 본 받았으며, 낡은 형태의 경제적 착취를 계속 살려 놓는 데 책임이 있는 라티푼디스타스(latifundistas, 대규모 토지 소유주)의 권력에 도전하고 있는 원주민 농촌 공동체의 반란적 동원을 동원함으로써, 생산하는 계급 사이에서 페루 변화의 주제는 인구가 주로 인디오인 원주민 공동체를 포함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마리아 테기의 사회주의는 결코 과거의 회복이나 고대 잉카 세계의 원시적 공산주의의 회복은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과거의 상기를 통해 현재 식민지의 사적 소유관계에 맞선 투쟁에 옛 공동체주의적 요소를 일정부분 이용하자는 취지였다. 과거 마오쩌둥이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중국화를 주장한 것이 옛 사회 질서의 회복을 뜻하는 것이 아니었듯이, 마리아테기의 잉카 사회주의도 그러했다.
마리아테기는 1920년 바쿠 총회로 대표되었던 동방 민중의 혁명운동의 의미를 광범위하게 인식한 최초의 인물 중 하나였다. 그는 1925년에 출판된 <동방과 서방>에서 혁명의 조류는 서방에만 영향을 주지 않았다. 동방 역시 요동치고 있고, 반항적이며, 소란스럽다. 근대의 역사 안에서 가장 뚜렷하게 이 역사를 뛰어 넘고 있는 현실들 중의 하나는 동방의 정치적 사회적 변혁이다는 점을 강조했다. 따라서 마리아테기는 식민지 민중의 봉기가 사회주의를 향하는 것이 정치적 이득이고 역사적 필요임을 강조한, 그리고 본질적으로 식민적인 관계에 대항하는 유사한 반란이라는 측면에서 페루 사회의 혁명적 요소를 토착 농민에게서 찾았던 몇 안 되는 사회주의자들 중 하나였다.
5. 영향
마리아테기의 사상은 남미의 여러 좌파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비록 1930년 마리아테기가 사망한 후 마리아테기의 사상은 1960년대에 다시 출간되기 전까지 비교적 세상에 알려져 있지 않았으나, 마오이즘이 라틴아메리카 좌파들에게 받아들여지면서, 마리아테기의 사상 또한 여러 좌파들에게 영향을 줬다.혁명가 체 게바라의 경우 자신의 첫번째 부인 일다를 통해 마오쩌둥과 마리아테기 양자 모두를 알게 되었다. 오늘날에도 페루내 거의 모든 공산주의 조직들은 그를 존경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