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란드 인민공화국 (1952–1989) Polska Rzeczpospolita Ludowa | ||
국기(~1980) | 국장 | |
1944년 12월 31일 ~ 1989년 12월 29일[1] | ||
역사 | ||
성립 이전 | 멸망 이후 | |
폴란드 총독부 | 폴란드 제3공화국 | |
1944년 12월 31일 폴란드 임시정부 수립 1947년 2월 19일 폴란드 인민정부 창립 1952년 7월 22일 인민공화국 헌법 제정 1956년 6월 28일 포즈난 항쟁 1970년 12월 14일 크리스마스 항쟁 1989년 12월 29일 붕괴 | ||
지리 | ||
위치 | 폴란드 | |
수도 | 바르샤바 | |
인문환경 | ||
언어 | 폴란드어 | |
민족 | 폴란드인 | |
국가 | 돔브로프스키의 마주레크 (Mazurek Dąbrowskiego) | |
종교 | 가톨릭, 개신교, 정교회 | |
정치 | ||
정치체제 | 일당제, 공산주의, 인민민주주의, 군정(1981~1983) | |
집권당 | 폴란드 통일노동당 | |
최고지도자 | 폴란드 통일노동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 | |
국가원수 | 대통령 → 국가평의회 의장 | |
정부수반 | 총리 | |
주요 지도자 | 볼레스와프 비에루트 브와디스와프 고무우카 보이치에흐 야루젤스키 | |
경제 | ||
통화 | 즈워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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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폴란드에 수립된 사회주의 국가. 소련의 위성국이었다.
2. 형성
- 친소파 폴란드(폴란드 공화국)
통일노동당은 80%라는 득표율을 바탕으로 볼레스와프 비에루트가 대통령의 자리에 오르면서 권력을 공고히 하였다. 이 득표율은 1946년에 모든 우익 정당을 불법으로 규정하고 통일노동당과 그 자매 정당만을 합법 정당으로 규정했던 것과 부정선거를 통해서 이룩한 투표율이었고 일설에 의하면 스탈린 본인이 고른 숫자였다고 한다. 냉전 후 발표된 NKVD의 당시 비밀 보고에 따르면 실제로 통일노동당이 얻은 득표율은 대략 10%대 정도로[2]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1948년에는 통일노동당과 사회당이 합당하면서 폴란드 본토의 정계가 일당 우위 정당제로 바뀌었으며, 1952년에는 신헌법을 채택하면서 아주 확실하게 공산주의 국가(폴란드 공화국 → 폴란드 인민공화국)로 탈바꿈했다. 그러나 이때까지도 런던에 머무르고 있던 폴란드 제2공화국의 망명 정부는 1947년의 선거를 부정선거로 선언하고 친소파 폴란드의 승인을 거부한 채로 1990년 폴란드 제3공화국이 수립될 때까지 런던에 머무르면서 공산주의 폴란드에 대항하는 반정부 운동을 펼쳤다.
- 사회주의 폴란드(폴란드 인민공화국)
3. 영토
새로운 폴란드를 세우는 데 있어서 가장 논란이 됐던 부분은 바로 영토 문제였다. 원래 전쟁 당시 폴란드 망명 정부는 전후 동프로이센, 상부 슐레지엔, 그리고 포메른 지방의 일부 국경 지대를 할양받는 것으로 만족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는 전후 소련이 폴란드 침공 당시 점령했던 영토를 폴란드에 돌려준다는 가정 하의 얘기였고 스탈린은 당연히 폴란드 침공 과정에서 차지한 영토를 다시 내놓을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대신 독일의 동프로이센 남부 지방과 슐레지엔, 포메른 동부 지역의 대부분, 브란덴부르크와 작센의 일부가 폴란드 영토가 되었다. 전후 폴란드의 영토변화▼ |
■ 새로 얻은 이전 나치 독일의 영토. ■ 소련에게 빼앗긴 영토. ■ 연두색으로 변경된 국경선은 오데르-나이세 선. ■ 파란색으로 변경된 국경선은 커즌 선. |
이 결과 폴란드 인민공화국은 폴란드 제2공화국의 영토 중 빌노(Wilno, 현 리투아니아의 수도 빌뉴스),[3] 르부프(Lwów, 현 우크라이나 르비우), 브제시치(Brześć, 현 벨라루스 브레스트) 등 약 17만 8천 ㎢를 소련에 잃었으나 독일로부터 약 10만 1천 ㎢의 영토를 할양받아 영토 손실을 어느정도 벌충했다. 하지만 소련에게 빼앗긴 영토가 너무 컸으므로 전후 폴란드의 면적은 전쟁 전에 비해 오히려 7만 7천 ㎢가 줄었다.
기본적으로 폴란드가 소련에 잃은 땅의 대부분(서부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은 상당수의 우크라이나인, 벨라루스인 인구를 포함하는 소수민족 다수 지역인데다 척박하고 개발도 거의 안 된 지역이었다. 하지만, 독일로부터 얻어낸 지역은 원래 살던 독일인은 소련군이 모두 쫓아내어 비웠으므로 더 이상의 분쟁의 여지 없이 폴란드인만으로 채울 수 있었고, 우크라이나의 갈리치아 지역이나 벨라루스 서부 지역 등과 비교해서 그단스크(단치히), 브로츠와프(브레슬라우)와 같은 도시를 포함하여 공업이 상당히 발달한 지역이었던데다가 전쟁 전 독일 식량 생산량의 1/4을 담당하던 곡창지대였다.[4] 게다가 굉장히 좁은 해안선을 가진 전간기 영토와 달리 새로이 확정된 영토는 훨씬 넓은 해안선을 보장하여 사실상의 내륙국 신세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결국 냉정하게 보면 전후 국토 면적이 줄어든 거랑 르부프나 빌노를 상실한 것 정도를 제외하면 폴란드라는 국가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이득이라고 볼 수 있는 교환이었다. 강철의 대원수의 지시에 강제로 따라야해서 문제였지. 특히 르부프의 경우 폴란드 인민공화국 정부는 두고두고 아쉬워했지만, 결국 소련의 결정을 따랐다.[5] 물론 공산 폴란드는 소련의 위성국이었던지라 소련의 결정을 따르지 않을 수도 없었다. 영토 변화에 대해 더 자세하게 설명하자면
- 우크라이나 서부 갈리치아 지역은 폴란드 입장에서 비교하자면 영국의 북아일랜드 비슷하게 특별한 산업 기반은 없는 대신에 민족문제로 인한 분란만 심각한 이를테면 계륵같은 지역이었다. 물론 갈리치아 일대에는 농촌과 도시 전반에 상당한 수의 폴란드인 인구가 거주하고 있었고 이들은 대개 근세 갈리치아가 크림 칸국의 침략으로 초토화된 직후 황무지를 개간하기 위해 정착한 폴란드인 농민들의 후손 혹은 폴란드화한 우크라이나인들의 후손으로 지배민족-피지배민족 개념과도 관계가 먼 사람들이 많았다.[6] 그럼에도 르부프 등 대도시를 제외하면 갈리치아 지역 일대에는 우크라이나인 인구가 더 많았고, 19세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시절 오헝제국에서 폴란드 민족주의자들을 견제하기 위해서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을 은근슬쩍 키워주었던 배경으로 우크라이나 민족주의 세력이 폴란드 민족주의 세력을 서서히 압도하게 되었다. 결국 이러한 배경 하에서 스테판 반데라이 이끄는 OUN의 폴란드인 학살과 추방 등등 복잡한 현대사를 거치며 결국 우크라이나 민족에게 넘어가고 말았다. 갈리치아 지역이 폴란드에서 우크라이나로 넘어간 책임을 물으려면 소련 외에도 스테판 반데라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등에도 물어야 한다.
- 빌뉴스의 경우 폴란드-리투아니아 동군연합과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시절 리투아니아 대공국 영토였지 폴란드 왕국의 영토였던 적이 없었다. 폴란드 제2공화국의 빌뉴스 합병은 폴란드 제2공화국이 과거 제1공화국 연방을 계승했다는 폴리투 연방 재건주의자들이나 범민족주의를 내세운 로만 드모프스키(Roman Dmowski, 1864–1939)에 의해 일어난 일인데, 리투아니아인 민족주의자들이 여기 동의하지 않은 것은 당연했다.
- 벨라루스 서부 지역 역시 전통적으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중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영토였지 폴란드 왕국의 영토는 아니었다. 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해당 지역의 엘리트층은 폴란드인(정확하게 말하면 폴란드화한 리투아니아인과 벨라루스인), 도회지 인구는 유대인, 농촌 인구는 정교회를 믿는 벨라루스인 인구로 나뉘어져 있었다. 그러나 19세기 러시아 제국이 지배하는 기간동안 벨라루스 서부 지역의 폴란드인 인구 상당수가 러시아 제국의 가톨릭 탄압을 피해 미국으로 이민을 떠나면서 폴란드인 인구가 격감한 상황이었다.
- 반면 새로 얻은 지역 중 슈체친을 비롯한 포모제 동부와 실롱스크는 원래 폴란드 왕국 시절 영토였으나 동방식민운동과 폴란드 고공 분할 시대, 보헤미아 왕국의 룩셈부르크 왕조로 인해 신성 로마 제국에 편입되었고, 폴란드 회랑이 있던 옛 서프로이센과 단치히, 동프로이센 남부인 바르미아마주리는 중세 튜튼 기사단이 정착한 이래 독일 기사단국의 영토로서 주민 상당수가 독일인 혹은 독일화된 슬라브인들과 발트 민족들이었다. 독일 기사단국과 그 후신인 프로이센 공국은 폴란드 국왕의 봉신국이이기는 했으나 폴란드 역시 이 지역에 대해 민족자결주의를 기반으로 영유권을 주장할 수 있는 근거는 수백 년에서 천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7]
물론 이렇게 폴란드 동부를 소련(우크라이나, 벨라루스, 리투아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이 가져가는 대신, 독일 동부를 폴란드에 떼어준 것은 폴란드 침공 당시 빼앗은 폴란드 영토를 확정하기 위한 스탈린의 생색내기였으나, 그 빼앗은 영토(서부 벨라루스와 우크라이나)는 소비에트-폴란드 전쟁 전후하여 폴란드가 전간기 러시아 내전 당시 무너지기 일보직전인 벨라루스 인민공화국과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8]의 영토를 전쟁을 돕는 댓가로 일부 획득하거나 혼란스러을 정국을 타서 차지한 영토로서 민족 구성이 매우 복잡한 지역[9]이었다. 원래 소련이 폴란드를 침략해 우크라이나로 합병한 지역은 1차 대전 직후에 영국의 존 커즌 외무장관이 전후 폴란드-우크라이나 경계로 삼은 커즌 선과 거의 일치한다. (위의 그림에서 커즌 선과 2차 대전 이후 확정된 국경선 참조.) 영국을 비롯한 1차 대전 연합국, 즉 서방측은 폴란드에 호의적이고, 소비에트 러시아에 적대적이었지만, 그들도 이곳을 폴란드령이라기보다는 우크라이나령으로 보았다는 것이다.[10]
폴란드가 동부를 잃고 대신 서부를 얻고 그 서부에 살던 독일계는 거의 다 쫓아내면서, 전체적으로 서쪽으로 이동한 국경선 덕분에 민족과 국가의 영역은 예전보다 잘 일치하게 됐다. 정확히 말하자면 폴란드는 역사상 최초로 단일 민족 국가가 되었다. 스탈린에게 빼앗긴 영토는 사실 벨라루스인-우크라이나인이 다수인 지역이었고 #, 대신 독일로부터 뜯어낸 서부의 영토는 독일인이 다수인 지역이었지만, 나치의 대규모 유대인 학살과 전후 독일인 추방, 소련과의 폴란드인-우크라이나인 인구 교환 등 강제적인 민족 대이동이 일어난 결과, 폴란드는 단일민족국가가 된 것이다. 이렇게 새로 바뀐 영토로 인해 추후에 불거진 논쟁은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독일-폴란드 영토 논란 문서를 참고.
이때 원래 커즌 선 서쪽에 있던 비아위스토크 지역만은 폴란드에 돌려주었다. 그러나 커즌 선 서부에 위치한 르부프(르비우)는 전통적으로 폴란드계 주민이 다수를 차지했던 도시였으며 폴란드에 있어서도 의미깊은 역사 도시였으나 이를 반환하지 않고 그대로 집어삼켰다. 다만 르부프를 비롯한 동부 갈리치아 지역은 폴란드계 주민 못지않게 우크라이나계 주민도 많이 살았으므로, 만약 르부프가 폴란드의 영토로 남았다면 현실의 르비우와는 정반대로 우크라이나 쪽에서 르부프를 자신들이 수복해야 할 영토라고 주장하는 일이 일어났을 것이다.
4. 역사
- 폴란드 인민공화국/역사 참조.
5. 사회
5.1. 경제
- 폴란드 인민공화국/경제 참조.
폴란드는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엄청난 피해를 입은 국가 중 하나로 전쟁 이전 폴란드의 인구는 3500만 명 정도였으나 종전 후에는 인구가 2400만까지 줄어드는 막대한 인명피해를 입었으며 산업기반도 38% 가량이 파괴되었다. 이후 소련의 지원 아래 경제를 복구해야 했으며 그 과정에서 강력한 공업화 정책과 집단농업화를 감행했다.
폴란드 인민공화국의 경제정책은 전형적인 "사회주의 계획경제"로 유지되었다. 폴란드 인민공화국 정부는 저임금 저복지 정책에 기대는 노동집약적 산업과 중공업 육성을 위한 거대한 중공업단지를 구축했으며 전간기의 기반을 넘어 이러한 구조를 성장시켰다. 초기에는 빠르게 경제가 성장하는 듯 싶었으나 이는 소비를 도외시한 중공업 집중투자와 저임금 노동, 낮은 복지수준 덕이었고, 이렇게 외형적인 경제성장만 추구하다 1960년대 후반부에 성장룰이 둔화되었다. 그러다가 폴란드 정부에서 1970년대에는 경제성장을 낙관한 상황에서 서방으로부터 거액의 돈을 빌리고 경제개방 정책을 시행했고 처음엔 상당한 효과를 내서 경제가 다시 빠르게 발전하였다. 그러나 오래 지나지 않아서 1970년대 중반기에 오일 쇼크가 닥쳐오면서 수출이 급속히 악화되는 바람에 경제는 다시 악화되었으며 이러한 상황에서 잦은 반소 시위마저 일어났다. 결국 이 여파는 1990년대까지도 폴란드 경제에 막대한 후유증을 남겼다.[11] 물론 근본적인 체제변혁 과정에서 바르샤바 조약기구 국가들 모두가 1990년대에 극도록 가난해진 상태였지만, 폴란드는 그런 경향이 좀 더 심했다. 그래도 1978년 공산권 최초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하는 등 여러모로 인기가 있었다.
1988년 기준으로 폴란드의 국민의 1인당 국민소득은 6천 달러에 약간 못 미쳐서 당시 한국과 비슷했지만, 실제 국민소득은 한국에 미치지 못했다. 이는 사회주의 국가 특유의 사유재산 소유제도 금지 때문으로, 모든 국부가 국가소유였기 때문에 실제 개인소득은 비슷한 규모의 국가총생산을 갖는 자본주의 국가보다는 적었기 때문이었다.[12] 그래도 당시 대한민국도 먹고사는 문제는 심각하지 않았으니까 폴란드 또한 의식주는 그럭저럭 괜찮은 편이었고, 1990년대 혼란기에 공산권 세력에 대한 향수가 자리잡은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폴란드 국토가 19세기부터 산업화가 잘 이루어진 지역이었다보니 공산권 국가들 사이에선 소련, 동독, 체코와 함께 상위권에 위치한 나라 중 하나였으며, 폴란드산 공산품들은 비교적 품질이 좋은 제품으로 인기 있었다. 헝가리산 와인이나 체코산 맥주 등등이 구 공산권 내에서 뇌물로 애용되었던 것과 같은 맥락이다.
다만 비교적 괜찮았다 뿐이지 동독의 트라반트나 헝가리 와인들이 헝가리 인민공화국 시대 생산량을 늘리느라 품질이 대폭 저하되었던 사례 등에서 보듯 서방산 제품들에 비해서는 품질이 그닥 높지는 않았다.
5.2. 교육
2차 대전 동안 절대다수의 폴란드의 아동들은 교육을 받을 수 없었으며, 교육을 책임질 만한 지식인들은 나치와 소련에 살해당하거나 정치적으로 망명을 떠났다. 망명을 떠나 살아남은 사람들도 소수에 불과하다. 이러한 현실을 타파하고 공산주의 이념을 아동들에게 주입하기 위해 종전 후 폴란드 공산정권은 적극적으로 교육제도 개혁에 나섰다. 그 결과 7년 과정의 초등학교 과정과 4년 과정의 중고등학교 과정이 도입됐으며, 노동자들을 체계적으로 양성하기 위한 직업 학교도 폴란드 곳곳에 설립되었다. 1970년대의 통계에 따르면 이러한 공교육 제도 도입의 효과로 폴란드 전역에서 문맹률이 대폭 개선되었다. 이미 1978년에 98.74%의 문해율을 달성했다. #폴란드 제2공화국이 1919년 수립될 당시 농촌 지역으로만 따지면 70% 가까운 인구가 문맹이었다. 물론 이건 러시아 제국이 의도적으로 폴란드를 우민화시키려고 했던 정책에 따른 결과지만. 이후 폴란드 제2공화국에서 피나는 노력 끝에 1937년에는 문맹률이 18%까지 낮아졌다.
노동자 사이에서 의무교육도 마치지 못한 사람들의 비율도 4~5%대로 크게 떨어졌다. 또한 나치에 의해 대부분 파괴당한 대학교도 재건되어 1950년대 말에 이르면 인구 당 대학생의 비율이 전쟁 전보다 3~4배 가량 증가하는 성과를 얻었다.
5.3. 여권신장
제2공화국 시대부터 이루어진 인권 신장을 넘어 이 시절 폴란드에서는 여성들의 권리 신장 및 사회 진출이 급속도로 빨리 이루어지면서 냉전 말기에 이르러서는 서유럽보다도 여성들의 사회적 지위가 높다고 평가받았다. 실례로 1980년대 통계에서 의학, 건설, 공학 등의 남초현상이 두드러지는 분야에서 직업을 갖고 있던 여성들의 비율이 서유럽보다도 높았으며 심지어 의학에선 여성이 과반수를 차지했다.6. 종교
가톨릭은 탄압(국가 무신론)을 받았지만, 요한 바오로 2세만 봐도 알 수 있듯이 다수 폴란드인들의 신앙심을 꺾을 수는 없었다. 다만 가톨릭이 국교는 아니었으며, 폴란드가 민주화된 후에도 끝내 가톨릭이 폴란드의 국교 지위를 공식적으로 되찾지는 못했다.개신교와 정교회는 가톨릭보다도 더욱 강한 탄압을 받았으며, 폴란드 인민공화국의 가톨릭 탄압이 완화되는 중에도 개신교와 정교회에 대한 탄압은 그다지 완화되지 않았다.
7. 기타
- 다른 공산주의 국가와는 달리 낫과 망치나 별 등 공산주의를 나타내는 상징이 없는 것이 특징. 물론 국기와 국가도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다. 현재의 폴란드 제3공화국 국장과의 차이는 왕관이 없었다는 것이다.
- 국력에 비해 국제무대에서의 영향력이 큰 편이었다. 한국전쟁 정전 협정 이행여부를 감시하는 중립국감독위원회, 제네바 합의를 감시하는 국제감시위원회의 공산권 대표 국가였고, 두 차례나 소련 추천 UN 비상임이사국을 역임했다.
8. 역대 국가원수
폴란드 인민공화국 국가평의회 주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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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역대 폴란드 통일노동당 당수
폴란드 통일노동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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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영어판 위키백과에 따라 임시정부 수립연도 기준이다.[2] 50%라는 자료도 있는데 50%는 폴란드 인민공화국 헌법 제정 시 득표율이다. 그나마 이것도 실 득표율은 아니다. 폴란드 제3공화국 수립 이후 레흐 바웬사 정부에서 당시 폴란드 선거를 재조사한 결과 통일노동당의 지지율은 10%대 남짓이었던 것으로 발표됐다.[3] 폴란드가 전간기인 1920년 빌뉴스 위기를 통해 합병했다. 폴란드 침공이 완료된 직후 리투아니아로 반환되었다가 소련이 리투아니아를 병합하면서 소련의 영토가 되었다.[4] 그러나 2차 대전 직후 이 지역의 경제는 독일인 인구가 거의 다 추방된 영향 & 갈리치아 등에서 재산도 못 챙기고 피난 온 폴란드인 난민들이 새로 정착하느라 이것저것 혼란스러웠던 영향으로 전후 초반기 동안 생산력이 독일령 시절의 절반도 못 미치기도 했다.[5] 극우 성향의 폴란드 민족주의자들은 소련이 빼앗아서 다른 공화국에 편입시킨 편입한 리투아니아 빌뉴스, 우크라이나 서부, 벨라루스 서부 흑루테니아 지역을 되찾아야 한다고 주장한다.물론 서쪽의 새 영토를 독일에게 돌려주자고 하진 않는다[6] 단 폴란드 2공화국 말에 폴란드 민족주의를 내세워 이 지역을 차지하고 타 동슬라브계 민족이나 유대인에게 동화정책을 펼치거나 차별하는 일은 있었다.[7] 전에는 독일 기사단국이 프로이센 왕국의 전신이었다고 서술되었는데, 프로이센 역사에서 쾨니히스베르크와 동프로이센이 중심지였던 적은 한순간도 없었다. 프로이센 왕국의 전신은 호엔촐레른 가문의 중심지였던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이다. 왜 베를린이 프로이센 왕국과 독일 제국의 수도였는지 생각해보자.[8] 이전에 멸망한 서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은 대놓고 폴란드와 전쟁을 벌였다.[9] 해당 지역들은 홀로코스트 이전까지는 도회지 주민 대다수가 유대인이었으며, 농촌 주민 상당수는 우크라이나어를 사용하는 우크라이나인이나 벨라루스어를 사용하는 벨라루스인들로 폴란드어를 사용하는 폴란드인들과 정체성이 서로 달랐다. 언어만 다른 것이 아니라 종교도 벨라루스인들은 주로 벨라루스 정교회, 우크라이나인들은 주로 우크라이나 그리스 가톨릭이나 우크라이나 정교회, 폴란드인들은 로마 가톨릭 등으로 나뉘었기 때문이었다.[10] 같은 맥락에서 제1차 세계 대전 직후 루마니아 역시 헝가리로부터 상당한 양의 영토를 얻어냈으며, 체코슬로바키아 역시 오스트리아와 헝가리로부터 독립할 수 있었다.[11] 비슷한 이유로 1980년대 멕시코 경제 역시 심각한 타격을 입었는데 멕시코가 2020년대에도 아직 후유증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는 반면, 폴란드의 현 상황은 이보다는 훨씬 나은 편이다.[12] 사회주의 국가가 자본주의 전환 이후 경제 발전에 성공하지 못한 원인 중 하나가 이런 소득이 뻥튀기 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소수의 올리가르히들이 이렇게 민영화되는 국부를 사유화해서 독점, 자본주의 국가 같으면 그나마 주식이나 증권등으로 어느정도 분배되었을 국부를 홀로 독점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