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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리치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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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동갈리치아 (우크라이나령 갈리치아)
2.1. 주요 지역
3. 갈리치아 서부 (폴란드령 갈리치아)4. 신갈리치아 (서갈리치아)

1. 개요

우크라이나어: Галичина(할리치나)
폴란드어: Galicja(갈리치야)
독일어: Galizien(갈리치엔)
러시아어: Галиция(갈리치야)
영어: Galicia[1]

파일:갈리치아 지도.png

우크라이나 서부와 폴란드 남부를 이르는 역사적 명칭. 중심도시로는 오늘날 우크라이나의 주요 도시 중 하나인 르비우와 폴란드 제2의 도시 크라쿠프가 있다.

갈리치아라는 이름은 이바노프란키우스크주에 위치한 중세 도시인 할리치(Галич)[2]에서 파생되었다. 지역의 행정 중심지가 르비우로 이전된 후 할리치는 점점 쇠락해 오늘날에는 인구 6,000여명 규모의 마을로 남아 있다.

2. 동갈리치아 (우크라이나령 갈리치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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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640px-Ukraine-Halychyna.png

전통적 의미의 갈리치아에 가까운 지역으로 오늘날 르비우주, 테르노필주, 스타니슬라비우주에 해당되며 적루테니아(Червона Русь)에 포함되는 이 지역은 키예프 루스의 지배하에 있었으며 키예프 루스가 분열될 때 갈리치아 공국이 들어섰고 주변의 볼히니아 공국과 합쳐져서 갈리치아-볼히니아 공국이 성립되었다. 이후 잠시 루테니아 왕국이라는 타이틀도 획득한다.[3] 그러나 왕위가 끊겨 볼히니아리투아니아 대공국이, 갈리치아는 폴란드 왕국이 각기 지배하다가 두 나라가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으로 합쳐져서 같이 지배를 받았으나 1772년 제1차 폴란드 분할갈리치아-로도메리아 왕국이 되어 합스부르크 제국으로 넘어갔다.[4]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브루실로프 공세의 무대였으며 이후 1918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해체되면서 다시 신생 폴란드 공화국의 영토가 되었다. 갈리치아 동부 지역의 우크라이나인은 인구의 12%를 차지하는 당시 폴란드 최대의 소수민족이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제2차 세계 대전이 터졌고 나치 독일소련폴란드 침공으로 폴란드를 다시 갈라먹으면서 소련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소련 우크라이나 SSR 치하로 들어가면서 우크라이나로 편입된 갈리치아 동부 대부분 지역의 폴란드인들은[5] 오데르강 인근의 포메른슐레지엔 등 새로 편입된 폴란드 영토로 추방되었다. 다만 지금도 동갈리치아의 최서단지역[6]은 폴란드 영토이기는 하다.

소련 붕괴 후 우크라이나의 영토로 확정되었다. 이 지역은 자카르파탸주를 제외한[7] 소련의 어떤 다른 지역보다도 루스계 국가와 낯선 지역이다. 하다못해 발트 3국양차대전 사이 독립국이긴 했어도 이전에 러시아 제국의 지배를 받았지만 갈리치아 지역은 이전까지 줄곧 중부유럽 가톨릭 세력의 지배만 받아 오다가 소련에 편입되었다.[8] 1991년 치러진 소련 존속에 관한 전연방 국민투표에서도 과반수가 찬성한 우크라이나의 다른 지방[9]들과는 달리 갈리치아 3주는 찬성률이 20%도 채 안 되었다.[10]

가톨릭 국가인 폴란드-리투아니아, 합스부르크 제국(오스트리아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포함), 폴란드 제2공화국의 지배를 받았다 보니 동방 가톨릭 교회(우크라이나 그리스 가톨릭) 신자가 많은데 이 점은 우크라이나의 다른 지역이 우크라이나 정교회를 주로 믿는 것과 대조된다. 비교적 자유주의적이고 관용적이었던 합스부르크 왕조가 이 일대를 다스렸던 시절 폴란드인이나 우크라이나인이나 어느 정도 자치를 누리고 민족주의 정당 및 단체 설립과 민족주의적 언어, 문화적 교육 같은 것에 크게 간섭하지 않았던 덕분에 19세기 후반에 들어서는 폴란드 민족주의자들과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 모두 이 일대를 근거지로 하며 활동했다. 오늘날 이 지역은 우크라이나에서 가장 민족주의 열풍이 심한 지역으로[11] 유로마이단 때의 핵심 지지 지역이었다. 참고로 폴란드도 갈리치아 서부 지역에 속하는 동남부 마워폴스카 지역이 가장 보수적인 지역이다.

2.1. 주요 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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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갈리치아 서부 (폴란드령 갈리치아)

폴란드령 갈리치아 대부분[12]은 엄밀히 말하면 전통적 의미의 갈리치아가 아니었지만 오스트리아가 갈리치아-로도메리아 왕국 영역으로 편입시켜서 갈리치아에 포함된 지역이다. 이 지역은 소폴란드(마워폴스카) 지역이라고도 하며[13] 폴란드에게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지역이다. 크라쿠프를 중심으로 한 이 지역은 왕위 계승 분쟁으로 원래 수도였던 포즈난이 파괴되자 카지미에시 1세가 이곳으로 천도하면서 폴란드 왕국의 중심지가 되었으며, 1596년에 지그문트 3세가 폴란드의 수도를 바르샤바천도하기 전까지 수도권으로서 황금기를 누렸다. 근동과 동유럽, 중부유럽, 서유럽의 무역로 중심에 위치하였던 마워폴스카는 크라쿠프를 중심으로 예술, 과학 분야의 신문물을 접할 수 있던 발전된 지역이었다. 중세 시절에는 소금이 귀해서, 이 지역의 비엘리츠카 소금 광산은 이 지역의 황금기에 이바지하였다. 이렇게 확장해 나간 폴란드 왕국은 위의 갈리치아 동부까지 영향력을 확장하였고 리투아니아 대공국과도 연합하여 폴란드-리투아니아라는 이름으로 동유럽의 패자가 되었지만 후에 찾아온 대홍수폴란드 분할합스부르크 제국이 차지했다.

합스부르크 제국의 일부로서 갈리치아는 갈리치아-로도메리아 왕국으로 편입되었으며 크라쿠프는 예외적으로 크라쿠프 자유시라는 부분적으로 독립된 보호시[14]로 남았다. 오스트리아 치하의 갈리치아도 다른 유럽 열강들과 같이 1848년 혁명 이전까지는 심각하게 민족주의와 자유주의가 탄압받았으나 1848년 혁명 이후 오스트리아 제국이 재편되면서 보헤미아 왕국과 갈리치아도 함께 부분적인 자치를 인정받아서 폴란드를 분할한 다른 열강인 프로이센 왕국러시아 제국 치하의 폴란드에 비해 자유로웠고 문화적인 탄압도 적었기에 19세기 후반 폴란드 민족주의자들은 이 지역을 근거지로 활동했다. 정부와 의회, 학교 등에서 폴란드어의 사용이 허가되었고 갈리치아 지역은 나라없는 폴란드 민족의 문화 및 예술적 중심지로서 기능하였다.[15]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폴란드의 독립에 이바지한 유제프 피우수트스키도 합스부르크 왕조의 묵인 하에 크라쿠프에 군사학교를 두고 세력을 불렸다.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러시아가 이 지역으로 침공하기도 하였으나 갈리치아 동부 지역과는 달리 이 지역에서 러시아군은 손쉽게 밀려났다. 이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패망하자 갈리치아는 폴란드 제2공화국의 일부가 되었다. 전간기 당시 크라쿠프는 바르샤바, 포즈난, 르부프, 빌노 등과 더불어 폴란드의 주요 도시 중 하나로서 기능하였고 신생 폴란드의 문화 예술적 중심지로서 대우받았다. 하지만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폴란드가 나치 독일에 점령당하자 폴란드 총독부의 치하에 들어갔으며 폴란드 다른 지역들과 같이 홀로코스트와 폴란드인의 강제노동과 학살이 자행되었다. 그 악명높던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절멸수용소도 이 지역에 위치했다.

전후 폴란드 인민공화국 치하에서 폴란드에서 가장 큰 제철소가 크라쿠프 외곽에 들어섰고 이와 함께 공업화가 진행되었다. 이와 함께 공업지대와 함께 노바 후타(Nowa Huta)라는 소련식 계획도시도 세워졌다. 이로 인해 나치 독일 점령 시절 하락했던 인구와 경제력이 일정부분 향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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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신갈리치아 (서갈리치아)

폴란드 분할빈 회의 사이 위의 갈리치아를 제외한 오스트리아령 폴란드를 일컫는다. 다만 폴란드 분할 이후 얼마 안가 이 지역은 나폴레옹바르샤바 공국으로 넘어가고 이후 빈 회의에서 러시아령 폴란드로 넘어갔으며 그 뒤로 이 지명이 쓰이지 않게 되었기에 큰 비중은 없다. 프로이센이 폴란드를 분할하며 원래 폴란드나 리투아니아 땅이었던 곳에 남프로이센, 신동프로이센이라는 이름을 붙였지만 서갈리치아와 같은 이유로 얼마 안가 쓰이지 않게 된 것과 같다.
[1] 참고로 스페인의 갈리시아와 스펠링이 같다. 그래서 '갈리시아'라고도 부른다. 키릴 문자로는 'ㅊ' 발음이 나는 문자로 표기하기 때문에 갈리치아라고 부른다.[2] 폴란드어로는 Halicz(할리치)[3] 중세 유럽에서 왕위는 교황만이 수여 가능한 것으로서 루테니아는 가톨릭이 아닌 정교회였지만 루테니아 왕국의 다닐로 왕이 가톨릭과 힘을 합쳐 몽골 제국과 싸우겠다는 의지를 보여주자 당시 교황이 힘을 더해주기 위한 차원에서 왕위를 승인해 준 것이다.[4] 단, 볼히니아는 러시아 제국으로 넘어갔다.[5] 전쟁 전에는 르부프 주 인구의 57%, 타르노폴 주 인구의 50%, 스타니스와부프 주 인구의 23%를 차지했다.[6] 프셰미실 일대[7] 자카르파탸주가 있는 카르파티아 루테니아(Карпатьска Русь)는 천년이 넘는 시간 동안 헝가리 왕국의 영토였다.[8] 다만 1차대전 초반 동부전선에서 러시아가 열세를 드러내기 이전에 러시아가 동맹국에 대한 공세를 펼쳐 동맹국 일부 영토를 점령한 적이 있었는데, 갈리치아의 상당 지역이 그 점령지에 속하기는 한다. 그러나 러시아 제국은 단지 10개월 정도 이 지역을 점령했을 뿐이었고, 따라서 이곳이 러시아의 정식 영토로 병합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9] 키이우 시(찬성률 44.6%) 제외.[10] 이 사진을 봐도 알 수 있듯이 르비우주 찬성률 16.4%, 스타니슬라비우주 찬성률 18.2%, 테르노필주 찬성률 19.3% 정도로 매우 낮게 나온다.[11] 주로 반러 우크라이나 민족주의다. 그러나 반폴란드 감정도 만만찮은데, 20세기가 되기 전만 해도 귀족지주폴란드인이, 의사 같은 전문직은 유대인이 독점하다시피 하고 당시에는 주로 루테니아인이라 불렸던 이곳의 우크라이나인은 피지배층이었기 때문이다. 나치가 갈리치아를 점령하자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은 나치에 협력해 유대인과 폴란드인을 때려잡았다. 물론 우크라이나인들 역시 나치에게 학살당했지만...[12] 전통적 갈리치아의 최서단 지역이 폴란드령으로 편입되었다.[13] 대폴란드(비엘코폴스카) 지역은 초기 폴란드의 중심지였던 포즈난, 그니에즈노 일대. 이 지역에서 피아스트 왕조 초대 군주 미에슈코 1세에 의해 역사에 처음으로 폴란드 국가가 들어섰다.[14] 크라쿠프 자유시도 실패한 봉기 이후 오스트리아 제국의 일부인 크라쿠프 대공국으로서 편입되었다.[15] 대신 경제적으로는 굉장히 어려웠기에 갈리치아의 농민들은 돈을 벌기 위해 포젠이나 러시아령 폴란드로 떠나는 일이 많았다. 반대로 포젠이나 러시아령 폴란드의 지식인들은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갈리치아로 이주하는 일이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