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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 하늘색은 오스트리아령 실레시아, 빨간 선은 프로이센 왕국의 슐레지엔 주이다. 보통 둘을 합쳐 실레시아의 경계를 구성한다.
↑ 실레시아의 문장. 노란색 바탕에 하얀 곡선이 가슴에 그려진 검은 독수리로 대표된다. 지배자가 바뀌어도 독수리의 생김새나 디테일이 변할 뿐 이 구도는 그대로였다. 이 구도의 문장은 구체적으로는 저지 실레시아의 문장이었지만 실레시아 전체를 대표할 때 쓰이는 문장이기도 했다. 사진의 문장은 현 폴란드 돌니실롱스크 주의 문장이다.
↑ 고지 실레시아의 문장. 파란 바탕에 황금색 독수리로 대표되며 역시 지배자가 바뀌어도 구도는 그대로였다. 사진은 현 폴란드 실롱스크 주의 문장이며 같이 고지 실레시아로 분류되는 오폴레 주의 문장 역시 독수리가 조금 정교할 뿐 색깔과 구도가 같다.
↑ 체코 북동부 체코령 실레시아의 문장. 구도의 형태는 전통적인 노란바탕+하얀곡선이 그려진 검은 독수리 그대로이다.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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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폴란드의 남서부, 독일 작센 주의 일부, 체코 북동부 일부에 걸친 역사적인 지역으로 현재 대부분 폴란드의 영토이다. 면적은 약 40,000㎢에 800만 명 이상의 인구가 거주한다. 역사적 이유로 보통 고지 실레시아(오버 슐레지엔)와 저지 실레시아(니더 슐레지엔)로 나뉘는데, 오데르강의 흐름에 따른 명칭이라 강의 상류인 고지 실레시아가 좀 더 남쪽에 있다. 지리적으로는 오데르강이 이 지역을 관통해서 흐르고 최고 높이 1,603m의 수데티 산맥이 지나기 때문에 산이 거의 없는 폴란드에서 남쪽의 고 타트라 산맥과 더불어 산을 볼 수 있는 몇 안되는 곳이기도 하다. 또한 지하자원이 상당히 많은데, 고지 실레시아는 역청탄이 매우 풍부해서 유럽의 대표적인 탄광지대 중 하나이고 저지 실레시아에서는 구리가 대량으로 산출된다. 과거에는 대규모 은광도 있었는데 이곳의 타르노프스키에 고리(Tarnowskie Gory) 은광이 2017년 새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여러 문화의 교차로인데다 세계대전 기간 동안 전쟁의 화마를 어느 정도 비켜났기에 도처에 아름다운 관광지가 넘치며 구 시가지가 보존된 소도시들이 많다.
↑ 실레시아 최고의 명소 중 하나인 폴란드 크시옹시 성(Zamek Książ)[1]. 브로츠와프 근교에 위치한다.
역사적 지역이라 실레시아의 경계는 명확히 규정할 수 없는데 보통 오스트리아령 실레시아, 프로이센 왕국이 설치한 슐레지엔 주를 합친 영역을 그 경계로 본다. 따라서 보통 실레시아로 인식되는 지역이 국가에 따라 다른 명칭의 주에 편입되어 있는 경우도 있다. 주요 도시로는 브로츠와프(폴란드, 돌노실롱스키에 주)[2], 오폴레(폴란드, 오폴스키에 주), 카토비체(폴란드, 실롱스키에 주), 오스트라바(체코, 모라바슬레스코 주), 괴를리츠(독일, 작센 주) 등이 있다. 언어에 따라 이 지역을 칭하는 많은 명칭 중 라틴어 명칭이 항목명인 '실레시아'이다.
언어 상으로는 대다수가 각각 독일어, 폴란드어, 체코어를 사용하나 독일에 잔류한 지역에는 독일어의 방언으로 분류되기도 하는 슐레지엔어(저지실레시아어)와 폴란드의 실레시아 지역에는 폴란드의 방언으로 분류되기도 하는 실레시아어가 각각 쓰이기도 한다.
2. 역사
실레시아는 역사적으로 폴란드 왕국, 보헤미아 왕국-합스부르크 제국, 프로이센 왕국-독일 제국 등이 직간접적으로 차례로 지배해온 비교적 복잡한 역사를 지니고 있다. 오늘날 이 지역은 완전한 동유럽으로 인식되기 때문에 당연히 폴란드와 체코의 역사에 포함되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오스트리아와 독일의 영토였던 기간이 더 길다.실레시아 지역은 9세기 이후 대 모라비아 왕국과 보헤미아 공국의 지배를 받다가 약 990년 경 폴란드가 실레시아 지역을 정복한 후 1335년까지 폴란드 왕국의 일부였다. 그 뒤 보헤미아 왕국에 다시 합병된 후 종교개혁기까지 보헤미아의 통치를 받았다.
한편 동방식민운동(Ostsiedlung)의 영향으로 약 15세기 초부터 독일인들이 이 지역 인구의 다수를 차지하기 시작했다. 이후 근대 유럽에 국민국가가 형성되는 대부분의 기간 동안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의 독일계 국가들이 실레시아 지역을 통치했다.
여러 나라가 이 지역을 지배한 만큼 주변국들이 자국사에서 강조하고 있다. 동방식민운동으로 약 15세기 초부터 독일인이 다수를 차지하기 시작했다는 점, 근대 이후 유럽에 국민국가가 형성되는 대부분의 시간동안 독일이 실레시아 지역을 통치했다는 점 때문에 여전히 실레시아 지역의 역사를 독일의 역사로 봐야 한다는 관점이 있다. 그런데 과거 수백년 동안 주로 폴란드인을 위시로 슬라브족이 실레시아 지역을 차지했고, 현재 실레시아 대부분을 폴란드가 70년 이상 차지하며 폴란드인이 실레시아의 인구 대부분을 차지하는 상황에서 실레시아의 역사를 폴란드의 역사로 봐야 한다는 관점 역시 설득력이 낮지 않다. 물론 대 모라비아 왕국과 보헤미아 왕국을 자신들의 전신으로 보는 체코의 주장 역시 유효하다.
그렇기에 독일이든 오스트리아든 폴란드든 체코든 그 어느 나라도 실레시아 지역의 역사를 자국만의 역사라고 주장하기 어렵다. 역사는 특정 시대의 사건들만 가지고 바라봐서는 안 되는 것이기에 실레시아의 역사는 어느 한 나라의 역사로 귀속하지 않고 그 자체로 봐야 할 것이다. 따라서 이 항목의 이름도 이 지역을 칭하는 가장 중립적인 라틴어 이름인 '실레시아'이다.
2.1. 고대 ~ 보헤미아의 지배 ( ~ 990s)
기원전 4세기 경, 켈트족이 이 지역에 들어와 살았다. 그 뒤 1세기경 게르만 부족들이 이 지역에 거주했으며, 약 6세기 경부터 이 빈 자리를 슬라브족이 들어와 채웠으며 실레시아에도 슬라브족이 거주하게 되었다. 이 지역에 거주하던 슬라브족에게 나중에 실레시아인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어쨌든 실레시아인들은 9세기 경 대 모라비아 왕국의 영향력에 들게 되었고, 왕국이 907년 마자르족의 침공으로 기록조차 못 남기고 갑작스레 멸망하자 대 모라비아 왕국의 후계국 중 하나였던 보헤미아 공국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보헤미아는 모라비아가 일부만 차지했던 실레시아의 남은 부분까지 천천히 정복했다. 915년~921년까지 재위한 브라티슬라프 1세는 중부 실레시아를 정복하고 자신의 이름을 딴 도시 브라티슬라프를 세웠으며 그의 후계자인 볼레슬라프 1세는 나머지 실레시아 대부분을 차지했다. 보헤미아의 군주들은 실레시아에 가톨릭을 전도함[3]과 동시에 이 지역을 동-서유럽을 잇는 주요 무역로로 만들었다. 이에 따라 실레시아의 중심도시 브라티슬라프는 주요 무역 중심지로 거듭났다.
2.2. 폴란드의 지배, 실롱스크 공국 (990s ~ 1335)
실레시아는 10세기 후반부터 신성 로마 제국 본국과 폴란드 왕국이 노리는 땅이 되었다.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오토 3세는 보헤미아를 무시하고 오데르강과 그 수원을 제후국 중 하나인 마이센 변경백령(Markgrafschaft Meißen)[4]의 경계로 삼아 실레시아 일부의 영유권을 주장했다. 하지만 폴란드 최초의 왕 미에슈코 1세 역시 이것을 무시하고 약 990년 경 보헤미아로부터 실레시아 전체를 정복했다. 자신의 영토가 폴란드에 넘어감에도 불구하고 오토 3세는 눈엣가시 제후국이었던 보헤미아의 약화를 바라 폴란드를 지원했다. 1034년 미에슈코 2세 사후 폴란드가 이교도 반란으로 극도의 혼란에 빠지자 보헤미아의 브르제티슬라프 1세는 1039년 대규모로 폴란드를 침공해 수도 포즈난과 그니에즈노를 파괴한 뒤 실레시아를 탈환했다. 하지만 1040년 즉위한 카지미에시 1세의 통치 아래 혼란을 수습하고 국력을 회복한 폴란드는 1054년 실레시아를 다시 빼앗았다. 이후에도 이 지역을 놓고 갈등이 계속되다가 1137년 두 나라가 크워즈코 평화조약을 맺으면서 실레시아와 보헤미아의 국경이 명확히 정해짐에 따라 두 나라의 갈등은 종지부를 찍었다.↑ 1138년 분열 직후의 폴란드. 노란색이 실롱스크 공국, 빨간색이 장자가 자신의 영지에 더해 통치하는 연장자령. 분홍색은 연장자령에 더해 장자가 속국으로 지배하는 서 포모제. 연장자령, 좀 더 구체적으론 크라쿠프를 통치하는 장자들이 폴란드의 고공(Maximus Dux)[5]으로서 폴란드를 대표하는 군주가 되도록 했으며, 다른 공국들은 고공의 우월을 인정하는 것이 볼레스와프 3세의 유언 내용이었다. 하지만 이 시스템은 볼레스와프 3세의 아들 대가 다 지나기도 전에 붕괴되었고 각 공국들은 독립된 국가가 되어 크라쿠프, 폴란드 고공 자리를 놓고 다투었다.
↑ 실롱스크 공국 1172년. 주황색은 볼레스와프, 초록색은 콘라드, 노란색은 미에슈코에게 돌아가며 분열된 실롱스크 공국. 나중에 노란색과 초록 지역이 합쳐져 오폴레-라치부시 공국[6])이 되었고 이 나라는 고지 실레시아의 기원이 된다.
1138년 볼레스와프 3세의 유언에 따라 그의 아들들이 왕국을 나누어 가지면서 약 200년에 이르는 폴란드 분열 시대가 시작되었다. 볼레스와프 3세의 장자 브와디스와프는 실롱스크 공 브와디스와프 2세로서 실롱스크 공국을 중심으로 연장자령[7]과 포메른을 더해 지배했다. 하지만 그는 다른 영토를 가져간 동생들과 싸우다 결국 쫓겨나버렸고 실롱스크 공작위는 그의 형제인 마조프셰 공 볼레스와프 4세에게 돌아갔다. 하지만 1163년 신성 로마 제국으로 망명했던 브와디스와프 2세의 세 아들들이 제국의 지원을 얻어 실레시아를 탈환했다. 이들은 실레시아를 1172년까지 공동 통치했지만 결국 땅을 나누어 가지기로 했고, 이 작은 공국은 다시 분열되어 큰형 볼레스와프는 실레시아의 북부를, 둘째 콘라드는 실레시아 중부를, 막내 미에슈코는 실레시아 남부를 나누어 가졌다. 콘라드가 성직자의 길을 가면서 콘라드의 땅은 미에슈코의 영토에 흡수되었고 이렇게 만들어진 볼레스와프와 미에슈코의 영토는 각각 저지 실레시아와 고지 실레시아의 기원이 되며, 고지 실레시아 지역에는 곧 오폴레-라치부시 공국이 들어섰다.
↑ 실롱스크 헨리크 군주국. 1241년.13세기 초 실롱스크 공국의 헨리크 1세는 실레시아를 토대로 성장하여 분열된 폴란드 중 절반 가까이를 다시 통합했다. 그는 1232년 크라쿠프도 차지해 폴란드 고공이 되어 있었고 곧 왕으로 대관하려 했지만 현지 귀족들의 반발로 실패했다. 1238년 그가 사망할 때 유능한 아들 헨리크 2세에게 실롱스크 공작위와 폴란드 고공위를 물려주었고 헨리크 2세는 선왕의 업적을 이어받아 폴란드 통합을 계속했다. 그러나 1241년 헝가리 침공을 위해 미리 폴란드를 격파하기로 한 몽골군이 침공, 레그니차 전투에서 헨리크 2세가 전사하면서 폴란드 통합의 꿈은 수포로 돌아갔다. 또한 이 전투에서 실롱스크 공국의 군대가 전멸하고 몽골군의 파괴 행위, 헨리크 2세의 청야 전술 때문에 실레시아 전역이 황폐해지면서 폴란드에서 가장 강했던 실롱스크 공국의 국력은 크게 약해졌다. 이 시기 실롱스크 공국의 수도이자 폴란드 전체의 정치 중심지로 기능하던 브로츠와프도 잿더미가 되어 버렸다.
↑ 보헤미아로의 병합 직전 실레시아의 공국들. 가장 아래 노란색 공국은 치에신 공국인데 이 나라는 후일 폴란드와 체코슬로바키아 간 40년에 걸친 골치 아픈 국경분쟁의 단초가 된다.
헨리크 2세 사후 실레시아 외부의 공국 영토들은 모두 떨어져 나갔다. 또한 수많은 피아스트 왕가의 방계들이 실레시아 곳곳에 살림을 차리고 나라를 세우면서 이 작은 공국은 또다시 여러 나라로 분열되었다. 1300년 보헤미아 국왕 바츨라프 2세가 폴란드 고공위를 차지하면서 실레시아 지역은 보헤미아의 영향을 강하게 받게 되었지만 여전히 실레시아 공국들의 통치자들은 자신들이 폴란드의 일부라고 생각했다. 1306년 보헤미아와 폴란드의 동군연합이 끝난 뒤, 위대한 브와디스와프 1세가 폴란드 고공이 되어 폴란드 통합의 막바지 작업을 수행하자 폴란드를 다시 분열시키려는 의도로 독일 기사단국, 브란덴부르크, 보헤미아는 반국가 동맹을 맺고 끊임없이 폴란드를 공격했다. 이 시기 실레시아의 피아스트 공작들은 실레시아에 대한 브와디스와프 1세의 종주권을 인정했고 1320년 브와디스와프 1세가 폴란드의 왕으로 즉위하며 통합 작업을 마무리하자 실레시아 피아스트 공작들은 다시 실레시아 지역이 폴란드 왕국의 경계 안에 있다고 선언하며 폴란드에 남길 원했다. 하지만 이미 실레시아 전역이 보헤미아의 영향에 들어간 뒤였기에 이 선언은 크게 의미가 없었고, 당시 폴란드 왕위를 차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폴란드와 충돌하던 룩셈부르크 왕조의 보헤미아 왕국 국왕 카를 4세는 1335년 폴란드 국왕 카지미에시 3세와 트렌첸 조약을 맺어 폴란드 왕위를 영구히 포기하는 대신 실레시아의 보헤미아로의 병합을 인정받았다. 이후 1348년 남슬라우 조약으로 이 약속은 다시 확인되었다. 이 시점부터 20세기 중반까지 약 600년간 실레시아는 폴란드 역사에서 떨어져 나가게 되었다.
한편 동방식민운동에 따라 약 12세기 후반부터 실레시아에는 독일인이 많이 들어와 살기 시작했다. 다른 폴란드 지역과 마찬가지로 실레시아의 인구도 매우 적었는데 실롱스크 공국의 통치자들은 지역 발전을 위해 독일인의 이주를 장려했다. 하지만 그 움직임이 더디던 12세기 때와 달리, 헨리크 1세 치하에서 실롱스크 공국이 전성기를 누릴 때 헨리크 1세는 독일인의 활발한 이주를 허락했다. 특히 발전된 채광 기술을 가지고 있던 독일인 덕분에 곳곳에 광산이 세워져 실레시아의 지하자원들을 이용할 수 있게 되었고 광산 주위로 독일인 마을이 여럿 세워졌다. 13세기 중반 이후 몽골 제국의 침입으로 실레시아가 황폐화되자 실레시아의 공작들은 독일인들을 더 많이 받아들여 지역 재건에 도움을 받았다. 실레시아가 폴란드에서 떨어져 나간 뒤 1400년 경, 실레시아의 인구는 100만 정도로 추정되는데, 이때 저지 실레시아의 인구는 폴란드인과 독일인이 각각 절반씩 차지했다고 한다. 하지만 갈수록 독일인의 우세가 심화되어 갔다. 다만 좀 더 동쪽에 위치하던 고지 실레시아에는 이주의 물결이 적었고 여전히 절대다수가 폴란드인이었다. 이 지역에서의 폴란드인 우세는 제1차 세계 대전 이전까지 비교적 오랫동안 유지되었다.
2.3. 보헤미아의 지배 (1335 ~ 1526)
보헤미아 왕국이 룩셈부르크 왕조 지배하에서 14세기 중반 전성기를 누리자 실레시아도 경제적으로 크게 발전했다. 실레시아는 유럽 동서를 잇는 무역로인 '왕의 길(Via Regia)' 이 지나는 곳에 위치해 수많은 교역물품이 오갔고 중심도시 브라티슬라프는 중부유럽의 주요한 대도시로 성장했다. 하지만 룩셈부르크 왕조가 몰락한 뒤 실레시아는 곧 후스 전쟁의 중심이 되면서 번영은 몰락으로 바뀌고 말았다.
1378년 카를 4세 사후 룩셈부르크 왕조에 내분이 발생하자 왕국의 영토 각지에 대한 통치권이 약화되었고 강도귀족(Raubritter)들이 출현해 설쳤는데, 실레시아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다 15세기 초반 후스파의 물결이 보헤미아를 덮쳤을 때, 보헤미아 지역과 모라비아 지역 등 왕국의 절반 이상이 후스파의 수중에 떨어졌지만 실레시아는 반 후스파 입장을 견지하며 당시 왕이던 카를 4세의 차남 지크문트를 지지했다. 분쟁기간 동안 실레시아의 군대가 왕국의 후스파 영토로 종종 침공해 들어가 보헤미아는 내전 상태에 빠져들고 실레시아 내부에서도 후스파와 가톨릭 귀족 간 분규가 일어났다. 1458년 포데브라트 가문의 후스파 귀족 이르지(Jiří z Poděbrad)가 즉위하자 실레시아에는 개종의 압력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러자 실레시아는 이르지의 라이벌이자 가톨릭 신자이던 헝가리-크로아티아 국왕 마차시 1세를 지지했고 1466년 이르지가 교황에게 파문을 먹고 헝가리에게 침공당했을 때, 실레시아는 헝가리군과 싸우지 않고 마차시 1세를 환영했다. 그리고 다른 가톨릭 귀족들과 함께 마차시 1세를 보헤미아의 왕으로 삼아버렸다. 그렇게 헝가리 영토가 된 실레시아는 1490년 마차시 1세 사후 '또다른 왕이던' 블라디슬라프[8]의 보헤미아로 다시 돌아왔다. 후스 전쟁 기간동안 실레시아는 분쟁의 중심이 되면서 무역로가 이 지역을 회피해버렸기 때문에 실레시아는 경제적으로 크게 망가졌다. 또한 농지가 황폐화되어 인구도 줄었다.
다시 보헤미아로 돌아온 실레시아는 재건되지 못했다. 당시 왕이던 블라디슬라프는 지지기반이 없고 귀족들을 통제할 능력이 없어 귀족 의회의 예스맨으로 전락한 어리고 무능한 왕이었고 그 무능함에 반한 헝가리의 귀족들마저 이 자를 울라슬로 2세로 헝가리 국왕에 선출[9]함에 따라 왕은 보헤미아를 비우고 헝가리 수도 부다에 머물러 버렸다. 따라서 보헤미아는 귀족들이 설치는 장이 되어 몰락했고 실레시아 또한 왕국과 함께 몰락했다.
2.4. 합스부르크 왕조의 지배 (1526 ~ 1740)
블라디슬라프의 아들 루드비크가 당대 동유럽을 휩쓸던 오스만 제국과의 모하치 전투에서 전사하자 보헤미아의 귀족 의회는 루드비크의 매부인 합스부르크 가문 출신의 오스트리아 대공 페르디난트 1세를 보헤미아의 왕으로 선출해 실레시아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이 시기 실레시아는 빠르게 프로테스탄트화 되었는데 15세기 후스 전쟁에서 헝가리 왕을 지지하면서까지 가톨릭을 고수했던 것과 비교하면 좀 특이한 현상이었다. 브레슬라우의 시 의회는 1523년부터 종교 개혁을 결의하고 가톨릭 관습들을 폐지해 나갔다. 페르디난트 1세가 사망하는 1564년 실레시아 전체에서 가톨릭 신자의 수는 10%남짓에 불과했다. 페르디난트 1세가 합스부르크 제국에서 점차 중앙집권을 강화하면서 귀족들의 힘이 약해져 갔고 프로테스탄트의 새로운 경제 이념을 받아들이면서 실레시아 지역도 빠르게 재건되고 다시 번영하기 시작했다.
↑ 30년 전쟁 기간 독일 각지의 인구 감소. 실레시아 역시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1618년 프라하 창문투척에 이은 보헤미아 봉기(30년 전쟁의 시작) 때, 실레시아도 봉기에 동참했다. 봉기가 실패로 끝난 뒤 실레시아는 프로테스탄트 연맹에 참가하기도 하고 중립으로 남기도 했는데, 여러 차례 제국군과 반 합스부르크 동맹 간의 전쟁터가 되어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1626년 황제군 사령관 발렌슈타인에게 데사우 다리 전투에서 크게 격파당한 신교군의 용병대장 에른스트 폰 만스펠트(Ernst von Mansfeld)는 군대를 재정비한 뒤 그대로 헝가리로 침공해 들어갔는데, 이때 실레시아를 가로질러 갔다. 그러자 만스펠트를 추격하던 황제군이 실레시아를 침공해 큰 피해를 입혔다. 만스펠트가 1626년 겨울 병으로 사망하고 만스펠트의 군대가 흩어지자, 발렌슈타인은 1627년 실레시아의 자간 공국과 글루가우 공국의 공작이 되었고 이 지역에 황제군 사령부를 세웠다. 따라서 실레시아는 필연적으로 반 제국 연합의 1차적인 목표가 되었다. 1632년 스웨덴, 브란덴부르크, 작센으로 구성된 반 제국군이 먼저 실레시아를 침공해 전쟁이 재발했고 실레시아는 프로테스탄트 연맹에 참가했는데, 처음 기세를 올리던 연합군은 스웨덴 국왕 구스타브 2세 아돌프가 전사하고 복권된 제국군의 명장 발렌슈타인이 다시 활약해 밀려났다. 이런 와중 주요 동맹이었던 작센이 1635년 갑자기 동맹을 빠져나가면서 실레시아는 엄청난 피해를 입고 다시 제국에 복속되었다. 이후 실레시아는 중립을 지켰고 잠시 평화로웠지만 1639년부터 전쟁이 끝날때까지 다시 전쟁통이 되어 저지 실레시아 전체가 심하게 파괴되었다.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이 체결되었을 때 중심도시 브레슬라우는 파괴를 면했지만, 1100개의 마을, 113개의 성이 파괴되는 등 실레시아의 나머지 지역은 크게 황폐해졌고 실레시아 인구의 3분의 1이 난리통 속에 죽거나 터전을 버리고 떠나갔다.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브레슬라우를 포함한 실레시아의 주요 도시들은 종교의 자유를 인정받았지만 그렇지 못했던 나머지 지역들의 프로테스탄트들은 억압당했고 빠르게 재가톨릭되었했다.
↑ 연방 서쪽 고지 실레시아 지역의 노란 영토가 오폴레-라치부시 공국.
한편 30년 전쟁 당시 폴란드-리투아니아는 1645년부터 1666년까지 고지 실레시아의 대부분인 오폴레-라치부시 공국을 잠시나마 다시 지배했다. 여기 얽힌 외교전이 참 복잡하다. 1637년 폴란드-리투아니아 바사 왕조의 브와디스와프 4세 바사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체칠리아 레나타(Cäcilia Renata von Österreich)와 결혼했는데 한창 30년 전쟁으로 정신이 없던 합스부르크 제국은 연방에 지참금을 지급하지 않았다. 이때 연방은 보헤미아에 흩뿌려진 작은 영토들을 조금 가지고 있었는데, 이 영토들을 넘기고 지참금으로 고지 실레시아를 받고자 했지만 합스부르크 제국은 이를 거절했다. 이것을 이용해 합스부르크의 적이던 프랑스가 연방에 승전 후 고지 실레시아를 주는 조건으로 전쟁 참여를 꼬드기는 제안을 했지만 연방은 참전을 거부했다. 그런데 1641년 반 합스부르크 연합의 맹주격이던 스웨덴이 다시 합스부르크 제국의 보헤미아 왕국을 침공해 저지 실레시아 전체를 휩쓸고 고지 실레시아로 진격하자 놀란 연방은 덴마크에 합스부르크 편에 참전해 스웨덴에 맞서라고 설득하기도 했으며, 이것을 가지고 다시 합스부르크에 고지 실레시아를 요구했다. 1644년 페르디난트 3세는 실레시아 전역에서 참패해 이 지역 전체를 점령당하고 말았고 결국 연방의 제의를 받아들여 오폴레-라치부시 공국을 넘겼다. 짧은 지배였지만 이 20년동안 고지 실레시아의 독일화를 상당히 늦출 수 있었고 덕분에 고지 실레시아는 마지막까지 폴란드인이 다수를 점하는 곳이 되었다. 1655년 대홍수 당시에는 연방의 왕 얀 2세 카지미에시 바사가 이곳으로 피신한 뒤 반격을 지휘하기도 했다. 연방의 지배는 1666년 합스부르크의 레오폴트 1세가 12만 굴덴으로 이 지역을 다시 사들이면서 끝났다. 연방의 지배기간 동안 프로테스탄트가 다수였던 고지 실레시아는 다시 합스부르크의 지배를 받게 된 뒤 빠르게 재가톨릭화 되었다.
전쟁으로 큰 피해를 입었지만 실레시아는 빠르게 재건되었고 인구는 오히려 전전 125만 명에서 150만 명으로 늘었다. 합스부르크 제국의 다른 영지들과는 달리 실레시아는 종교 개혁의 영향을 빨리 받았고 주요 무역로가 지났기에 경제적으로 매우 발달해 있었다. 따라서 이 지역은 제국의 노른자 땅이었는데, 합스부르크 제국은 오래 전 플랑드르 지역을 잃었고[10] 드넓은 오스만 헝가리와 트란실바니아 공국도 복속된 지 얼마 되지 않은 데다 가난했기 때문에 실레시아는 보헤미아,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 오스트리아 대공국 본토와 더불어 합스부르크 제국의 경제를 지탱하는 지역이 되었다. 18세기 초, 실레시아가 차지하는 인구와 면적이 작음에도 불구하고 합스부르크 제국 1년 세입의 4분의 1 가까이를 차지했다. 그러다 보니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이 왕국으로 업그레이드한 프로이센 왕국이 이 부유한 땅을 노리기 시작했다.
2.5. 프로이센, 독일 제국의 지배 (1740 ~ 1918)
1740년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에서 합스부르크 제국을 몰아낸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이하 프리드리히 대왕)는 실레시아의 대부분을 점령했다. 실레시아에서 프로이센 왕국군을 몰아내려는 합스부르크 제국의 시도는 번번이 실패했고 오히려 1742년 5월 코투지츠 전투에서 대패해 보헤미아까지 점령당할 위기에 처하자 마리아 테레지아는 1742년 6월 11일에 브레슬라우 조약으로 실레시아 대부분을 프로이센에 넘겼다.[11] 이후 7년 전쟁에서의 승리를 통해 프리드리히 대왕은 유럽 강국들에게 실레시아 통치를 승인받았다. 프로이센령이 된 실레시아에는 처음으로 근대적인 행정조직이 설치되어 국왕 직속 행정관의 통치를 받게 되었다. 전쟁으로 실레시아의 경제는 타격을 받았는데, 전쟁을 벌여가며 차지한 중요한 땅인 만큼 프리드리히 대왕은 사비까지 들여가며 실레시아의 재건에 힘썼다.[12] 1806년 나폴레옹 전쟁 시기, 실레시아는 처음으로 프랑스군의 침략을 받았고 소수의 요새를 제외한 전 지역을 점령당했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이 러시아에서 패배한 뒤 1813년 실레시아는 반 나폴레옹 봉기의 최선봉이 되었는데, 전쟁기간 브레슬라우로 피신해 있던 프로이센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는 이곳에서 '나의 국민에게(An mein Volk)'라는 조서를 발표해 독일인들의 무장 봉기를 호소했다. 1815년 나폴레옹 전쟁이 끝난 뒤, 프로이센은 기존의 실레시아 지역에 작센 왕국에게서 빼앗은 라우지츠(Lausitz) 일부 지역을 묶어 슐레지엔 주를 설치했다.
프로이센 왕국과 독일 제국의 통치 시기 실레시아의 역사는 대규모 산업화와 독일화로 요약된다. 이 지역의 주된 산업인 광업은 실레시아가 프로이센령이 된 직후인 18세기 중반부터 활발히 성장하기 시작했고 이 지역의 경제 활성화를 위해 처음 프로이센 정부는 각종 보호무역 특혜를 주었다. 하지만 나중에 자유무역체제로 전환했고 산업의 기계화를 진행하면서 많은 수공업자들이 피해를 보기도 했다. 나폴레옹 전쟁이 끝났을때 실레시아의 주 산업 중 하나는 리넨 섬유 산업이었는데, 자유무역 체제하에서 수공업 위주로 섬유를 생산하던 실레시아의 방직공들은 당시 산업 혁명을 선도하던 영국의 방직공들에게 경쟁 상대가 되지 못해 큰 피해를 입었다. 이 때문에 프로이센 정부도 실레시아 방직산업의 기계화를 추진했는데, 이로 인해 일자리와 전통을 잃게 된 많은 수공업자들이 이 상황에 불만을 가져 1844년 대규모 봉기를 일으키기도 했다.
↑ 아돌프 폰 멘젤(Adolph Friedrich Erdmann von Menzel)의 '압연 공장(Eisenwalzwerk, Iron Rolling Mill)'. 1872년. 고지 슐레지엔 쾨니히스휘테(Königshütte)의 압연공장에서 노동자들이 철길을 만드는 모습을 담았다.
이런 성장통에도 불구하고 19세기 중반을 지나며 산업화가 진행되었고 1846년 브레슬라우와 고지 실레시아를 잇는 철도가 놓인 것을 시작으로 실레시아 곳곳에 철도가 깔리며 산업화를 촉진했다. 이 과정에서 산업화의 요건을 충족하지 못한 기존의 주요 도시들 몇몇은 도태되었고 카토비츠, 쾨니히스휘테(현 폴란드 호주프), 보이텐(현 폴란드 비톰), 글라이비츠(현 폴란드 글리비체) 같은 석탄이 풍부한 고지 실레시아의 신흥 공업도시들이 등장했다. 19세기 중반 아직 독일 통일이 마무리되지 않았던 시기 슐레지엔 주는 루르 공업지대를 낀 라인란트에 이어 프로이센에서 두번째로 산업이 발달한 곳이었다. 하지만 경제적 성장에도 불구하고 프로이센의 지나친 절대주의로 불만에 차 있던 실레시아인들은 민주주의를 위해 1848년 혁명 당시 동참하기도 했다. 1871년 독일 통일 후엔 고지 실레시아가 집중적으로 산업화되었다. 이에 따라 실레시아 내에서 비교적 적었던 고지 실레시아의 인구가 급격히 증가했다.
↑ 1905년 슐레지엔 주. 초록색은 리그니츠 지역, 노란색은 브레슬라우 지역, 보라색은 오펠른 지역. 1919년 리그니츠 지역과 브레슬라우 지역을 묶어 저지 슐레지엔 주로 개편했고 오펠른 주는 고지 슐레지엔 주가 되었다.
한편, 근대적인 행정조직이 생기면서 훨씬 효율적인 행정이 가능해졌고, 이런 행정력을 이용해 프로이센/독일은 이 지역에 남은 폴란드인 등 슬라브인들의 독일화를 진행했다. 독일 정부는 폴란드인 교사를 줄이고 점진적으로 폴란드어 교육을 금지했다. 원래부터 독일인이 다수를 점하던 저지 실레시아의 폴란드인들은 빠르게 독일에 동화되어 갔지만 여전히 무시 못할 숫자가 자신들의 관습을 지켰다. 폴란드인이 다수였던 고지 실레시아에서는 독일화가 상대적으로 더디지만 꾸준하게 진행되었다. 1819년 67%를 점하던 폴란드인 비율이 1910년까지 53%로 줄었다. 고지 실레시아의 인구가 급격히 증가하면서 폴란드인의 숫자도 늘어갔지만 독일인은 그보다 훨씬 빠른속도로 늘었다. 고지 실레시아의 폴란드 민족주의자들은 독일화에 맞서 폴란드어 신문을 발간하거나 폴란드 구전을 전승하고 폴란드어 교육을 실시해 폴란드인의 문화를 지켜갔다. 어쨌든 이런 상황, 이런 민족 분포 때문에 슐레지엔 주는 행정 문서를 발행할 때 독일어와 폴란드어 둘 다 사용했다.
당시 슐레지엔 주를 포함한 실레시아 지역 전체의 민족에 따른 인구 구성은 다음과 같다. 1905년 슐레지엔 주의 인구는 494만이었는데, 이 중 약 76%가 독일인, 22%가 폴란드인이었으며 나머지는 체코인 등 기타 슬라브 민족이었다. 110만에 달하는 폴란드인 중 105만 명은 고지 실레시아에 거주해서 고지 실레시아의 170만 인구 중 다수를 차지했다. 하지만 저지 실레시아에는 5만 정도만 거주해서 저지 실레시아 전체 인구 중 1.5% 정도에 불과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일부 남은 슐레지엔에는 68만 명이 거주했는데, 이 중 45%가 독일인, 33%가 폴란드인, 나머지는 체코인이었다.
2.6. 전간기와 제2차 세계 대전 (1918 ~ 1945)
↑ 1921년 고지 실레시아 주민투표 결과. 연두색은 친 폴란드표 과반 지역, 주황색은 친 독일표 과반지역이다. 전체적으로 동부 지역에서 친 폴란드 표가 우세하지만 애매하게도 도심지는 친 독일표가 압도적이었다.
1919년 슐레지엔 주의 행정구역이 개편되어 저지 슐레지엔 주와 고지 슐레지엔 주로 나뉘게 되었다. 한편 베르사유 조약으로 구 독일 제국 동부 영토 상당부분이 신생 폴란드 제2공화국에 할양되었는데 고지 실레시아는 독일인과 폴란드인이 섞인 곳으로 할양 여부가 불투명한 곳이었다. 또한 앞서 설명했듯 고지 실레시아는 고도로 산업화된 지역으로 바이마르 공화국이나 폴란드나 탐낼 수밖에 없었다. 이에 협상국은 1921년 3월에 고지 슐레지엔 주의 소속을 결정할 주민 투표를 하기로 하고 그때까지 두 민족의 투표를 위한 캠페인을 허락했다. 하지만 이 캠페인은 독일인과 폴란드인이 각각 베를린, 바르샤바에서 지원을 얻어 준군사조직을 만드는 행위로 변질되었고 폴란드인은 현지 정치인이던 보이치에흐 코르판티(Wojciech Korfanty)의 지휘하에 1919년 8월과 1920년 8월 두차례 무장봉기를 일으켜 현지 독일인 준군사조직, 바이마르 공화국의 준군사조직인 '자유군단(Freikorps)'과 충돌을 벌였다. 이러는 사이 1920년, 베르사유 조약에 따라 고지 슐레지엔의 체코인 다수 지역 훌트신(체코어: 흘루친)이[13] 체코슬로바키아에 할양되었다. 결국 실시된 투표에서 1,186,758명이 투표에 참가한 가운데 59.4%의 투표자가 독일에 남길 원했고 40.6%만이 폴란드에 넘어가길 원했다. 이 결과는 몇가지 특기할 점이 있는데, 주로 고지 슐레지엔 동쪽에서 친 폴란드 표가 많았는데 동부라도 카토비츠, 글라이비츠 등 주요 도시 자체는 친 독일 표가 압도적이었다. 하지만 도시가 아닌 교외 에서는 보통 친 폴란드 표가 앞섰다. 그리고 언어적, 문화적으로 폴란드인이라도 경제적으로 부강한 독일에 남길 원하는 사람들이 상당했다. 어쨌든 이 결과로 고지 슐레지엔 주 전체를 독일에 남길 수도 없었고 영토를 분할하기에도 결과가 너무 애매했다.
↑1922년 제네바 합의 결과. 연두색은 폴란드 할양 지역, 연보라색은 체코슬로바키아 할양 지역, 주황색은 독일에 남은 지역이다.
영국은 이 결과를 가지고 폴란드인이 확실한 우세를 점했던 고지 실레시아의 동쪽 극히 일부만 넘기는, 즉 어떤 산업시설도 폴란드에 넘기지 않는 방식으로 일을 끝내려 했는데, 이에 반발한 폴란드인들이 분할 영토를 최대한 늘릴 목적으로 바르샤바에 있는 폴란드 제2공화국 정부의 지원까지 받아 4월 말 재차 봉기를 일으켰다. 폴란드인과 독일인 준군사조직은 6월 말까지 대립했고 협상국의 중재로 대립을 풀었다. 하지만 이 애매하기 짝이 없는 투표 결과 때문에 협상국은 한동안 머리를 싸매다가 문제를 국제연맹으로 넘겼다. 결국 국제연맹에서 독일과 폴란드가 합의한 끝에 두 국가는 1922년 5월 제네바 합의를 이끌어냈고 폴란드는 고지 실레시아의 동쪽 일부를 가져가게 되었다. 하지만 이 지역은 면적은 좁아도 탄광을 비롯하여 고지 실레시아 전체 산업시설의 80%가 있었고, 인구의 절반이 사는 핵심 지역이었다. 친 독일 표가 압도적이었던 카토비츠(카토비체), 쾨니히스휘테(호주프) 같은 주요 도시들도 폴란드에 넘어갔다. 폴란드는 할양받은 영토에 실롱스크 자치주를 설치하고 폴란드 침공 때까지 이 지역을 자치주로 인정했다.
↑ 검은색 동그라미 안 영역이 테셴 지역.
실레시아에서 영토 분쟁이 벌어지던 곳은 고지 슐레지엔 주 뿐이 아니었다. 폴란드 제2공화국 정부와 체코슬로바키아 제1공화국 정부는 1918년 독립 직후부터 고지 실레시아의 테셴[14] 지방을 놓고 다투었는데, 이 지역은 과거 폴란드 실롱스크 공국의 일부였던 치에신 공국이 지배하던 곳이었다. 보헤미아와 합스부르크 제국의 영토가 되면서도 줄곧 피아스트 가문의 귀족들이 실질적으로 지배하다 17세기 중반부터 작센의 베틴 가문, 합스부르크 가문이 이 지역의 공작을 역임했다. 하지만 외세의 지배를 받으면서도, 1910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인구조사에 따르면 이 지역의 다수는 폴란드인들이었고 체코인들은 이 지방의 서쪽 일부에 모여 살았다. 제1차 세계 대전 직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패망하고 체코인+슬로바키아인과 폴란드인의 독립국 형성 움직임이 시작되었을 때 테셴 지역에는 체코인, 폴란드인 자치정부가 각각 들어섰다. 이 지역은 체코인들에게는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땅이었는데, 체코 실레시아의 보후민과 슬로바키아의 코시체를 연결하는 철도가 이 지역을 지났기 때문이다. 만약 1910년의 인구조사에 따라 이 지역이 분할되면 이 철도의 일부가 폴란드에 넘어가게 되어 두 지역 연결에 엄청난 차질이 불가피했다. 따라서 체코인들은 철도 주변, 철도 서쪽의 땅만은 확보하고자 했다. 또한 철도 서쪽의 영토는 고지 실레시아의 탄맥이 닿는 곳으로 석탄도 매우 풍부했다. 양측 정부들은 국경 조정을 놓고 협의했지만 결국 합의에 도달하지 못했고 1910년의 인구조사 결과에 따라 테셴 지방은 분할되었다.
↑ 1910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인구조사. 테셴 지역. 색이 짙을 수록 폴란드인이 많은 지역.
이 상황을 용납할 수 없었던 신생 체코슬로바키아 정부는 1919년 1월 23일 폴란드령 테셴의 주둔군 사령관에게 철도 동쪽으로 물러나라고 최후통첩을 보냈고 폴란드가 당연히 거부하자 결국 폴란드군과 체코슬로바키아군 간 국지전이 벌어지고 말았다. 오랫동안 군사작전을 준비했던 체코슬로바키아군은 무려 15,000명을 투입해 3일 간의 전투 끝에 결국 수적으로 열세하던 폴란드군을 몰아냈고 이 상황에 경악한 1차대전 승전국들의 중재로 일단 전투가 멈췄다. 폴란드는 이 국지전 직후 서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을 침범하면서 스스로 대규모 전쟁을 자행하는 바람에 이 지역에 신경을 쓸 수 없었고 한동안 체코슬로바키아군이 테셴 서부 전체를 지배하는 상황이 계속되었다. 같은 시기 체코슬로바키아 정부 역시 1919년 내내 헝가리의 소비에트 정부와 슬로바키아를 놓고 전쟁을 벌였다. 1920년 1월 두 나라는 이 지역의 재분할을 위해 주민투표를 하기로 했지만 군사적인 긴장이 계속되고 민간에서도 상대 민족에 대한 각종 테러와 암살이 난무하자 도저히 이런 상황에서는 주민투표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은 양측 정부는 주민투표 안을 포기했다. 결국 이 문제는 1920년 7월 벨기에에서 열린 스파 회의[15]에서 곁다리로 다뤄졌고, 이미 큰 전쟁을 치른 뒤라 또다른 전쟁을 벌이기 싫었던 폴란드는 체코슬로바키아가 점령한 영토를 그대로 넘겼다. 이에 따라 체코슬로바키아는 철도 서쪽의 영토를 모두 획득하면서 이 지역 면적의 58%, 인구의 68%를 가져갔다. 복수의 칼을 갈던 폴란드는 18년 뒤 위기에 처한 체코슬로바키아의 상황을 이용해 1938년 10월 1일 뮌헨 협정으로 빼앗긴 영토 전체를 되찾고 추가로 일부 지역을 더 얻었다. 체코슬로바키아는 뮌헨 협정으로 실레시아의 남은 부분까지 나치 독일에 합병당했다.
↑테셴 지방에서의 국경 변천. 갈색 선은 1918년 독립 직후의 국경. 빨간색은 1920년부터 뮌헨 협정까지, 그리고 제2차 세계 대전 후의 국경. 하늘색 영토는 폴란드가 뮌헨 협정으로 얻은 땅. 이 하늘색 영토를 놓고 1958년까지 두 나라는 다시 분쟁을 벌였고 결국 보다 못한 소련이 나서서 나치의 산물인 뮌헨 협정을 백지화하며 이 지역에 대한 폴란드의 권리를 포기하게 만들었다.
폴란드 침공으로 나치 독일은 폴란드의 고지 실레시아를 집어삼켰다. 나치 독일은 실레시아 지역의 폴란드인들을 대거 추방했고 이들을 23개의 '폴렌라게(Polenlager)'[16]라는 노동수용소로 보냈다. 1940년에는 그 악명높은 아우슈비츠[17]가 고지 실레시아 끝자락에 세워졌고 1941년에는 그로스-로젠 수용소가 세워졌다. 1942년엔 이 지역에 연합군 공군 포로들을 수용하는 슈탈라크 루프트 3 수용소(Stalag Luft III)가 세워졌는데, 이 수용소는 1944년 3월 연합군 포로들의 대탈주로 유명하다. 영국 공군 포로들을 중심으로 수용소 아래에 무려 9m 깊이의 땅굴을 파고 수백 명의 포로들을 탈출시키려 했지만 했지만 추운 겨울밤 출구의 문이 얼어버려 시간을 지체했고 하필 그때 연합군 공군의 공습으로 땅굴 일부가 무너져내려 또 시간을 지체했다. 이런 시련 끝에 76명이 탈출하는 데 성공했지만 73명은 곧 붙잡혔고 하인리히 힘러의 지시하에 나치는 제네바 협약을 어기고 이들 중 50명을 처형했다. 이 드라마틱한 이야기는 1963년 '대탈주'라는 이름으로 영화화되었다.
당시 저지 실레시아에는 원유 정제시설, 화학 공장이 많았는데, 1943~44년 기간동안 이 시설들은 연합국 공습의 표적이 되어 많이 파괴되었다. 폭격을 당한 공장 중 하나는 치클론 B를 생산하는 IG 파르펜 휘하의 아우슈비츠 3[18] 수용소였다. 다만 고지 실레시아의 다른 광산 지대는 상대적으로 폭격이 적었고 피해도 미미했다.
1945년 초 실레시아 지역은 소련군에 점령되었고 얄타 회담에서 전후 실레시아 지역을 폴란드에 넘기기로 합의했기 때문에 전쟁이 끝나기 전부터 독일인 추방이 시작되었다. 2월부터 4월까지 수만의 고지 실레시아 독일인들이 소련 내륙으로 이송되어 다시는 못 돌아오기도 했고 심지어는 NKVD가 세운 실레시아 즈고다 노동수용소(Zgoda labor camp)에 보내져 사망하기도 했다.
2.7. 전후 ~ 현재 (1945 ~)
연합국은 얄타 회담, 포츠담 회담을 통해 이미 실레시아 대부분을 폴란드에 넘기기로 합의했다. 잘 알다시피 여기에는 이오시프 스탈린의 의사가 강력히 개입했고 스탈린은 1939년 폴란드 침공으로 얻어낸 영토를 영구히 확보하고자 독일로부터 땅을 빼앗아 폴란드에 보상격으로 내주었다.[19] 스탈린은 폴란드가 그토록 원했던 르부프와 갈리치아 동부를 확보한 대신 비아위스토크를 폴란드에 반환했고 실레시아, 포메라이나 등 독일 동부 지역을 폴란드에 보상으로 내주었다. 전쟁 전 실레시아에는 약 500만의 독일계 주민들이 살았는데, 전쟁이 끝났을 때에는 많은 수가 죽거나 소련군을 피해 중서부로 피난한 상황이었다. 폴란드 인민정부의 영토가 된 실레시아에서는 독일계와 폴란드계 분류작업이 실시되었고, 1947년까지 다른 구 독일 지역에서와 마찬가지로 정부 주도하에 남아있던 독일계 실레시아인들을 대부분 추방했다.하지만 모든 독일인이 추방된 것은 아니었는데, 독일계인지 폴란드계인지 확실치 않은 사람 중에서 주 사용 언어가 폴란드어이거나 폴란드인의 관습을 가진 사람들은 폴란드에 충성할 것을 맹세하고 시민권을 획득하여 남을 수 있었다. 또한 고지 실레시아에서 독일계 실레시아 방언을 쓰는 일부 실레시아인들은 민족적 의미에서 독일화된 슬라브인인 '실레시아인'으로 판단되어 추방을 면했다.[20] 그리고 당시 폴란드 인민정부는 아직 완전한 정부체계를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추방 과정에서 허술함이 일부 있어서 추방당하자마자 다시 실레시아로 들어온 독일인도 있었으며, 광산 지역에서 일하는 숙련된 노동자 일부를 인민정부가 의도적으로 남기기도 했다. 독일인이 떠나가 비어버린 실레시아에는 소련에 편입된 구 폴란드 영토에서 떠나 온 폴란드인들이 대거 몰려들어 새로 정착했다. 1947년 폴란드령 실레시아의 인구는 대부분 순수 폴란드인으로 300만 가까이 다시 순식간에 불어났다. 일부 남은 독일인들은 처음에는 박해를 받다가 인민정부의 체계가 점차 잡히면서 이들에 대한 박해가 조금씩 완화되었다. 저지 실레시아에서는 독일어 교육이 허용되었다. 하지만 고지 실레시아에서는 인민정부 통치기 내내 허용되지 않았다.
2차 대전기 고지 실레시아의 산업시설들은 큰 피해를 입지 않았다. 연합군은 독일의 주요 도시와 산업시설들을 대부분 폭격했고 상술했듯 저지 실레시아의 산업 시설은 여러차례 폭격했지만 고지 실레시아는 영국에서 날아오기에는 거리가 조금 멀었기 때문에 산업시설들이 비교적 온전하게 남았다.[21] 고지 실레시아에서 산출되는 대량의 석탄은 전후 폴란드 인민 공화국의 재건에 큰 도움을 주었고 그 과정에서 저지 실레시아의 산업시설들도 모두 복구되었다. 1946년 폴란드 정부는 실레시아의 산업시설들을 모두 국유화했는데, 대부분 산업 시설의 주인이었던 독일 자본가들은 당연히 어떤 보상도 받지 못하고 이 시설들을 압류당한 뒤 추방되었다. 공산정권이 붕괴될 때까지 실레시아는 폴란드 경제에 큰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민주화 이후 전 세계적으로 2차 산업이 쇠퇴함에 따라 실레시아에서의 생산량도 점차 줄어갔고 지금은 조금씩 3차 산업 위주로 경제구조가 개편되고 있다.
1990년에 통일된 독일은 오데르-나이세 선을 승인하며 폴란드령 실레시아를 영구적인 폴란드 영토로 인정했다. 시간이 지나 폴란드의 상처가 아물고 독일과의 갈등도 많이 완화되면서, 2005년 1월 폴란드 의회(셰임)는 20% 이상의 인구가 독일어를 사용하는 고지 실레시아의 약 20개 지자체에 독일어를 이중 언어로서 사용하는 것을 허용하고 독일어를 행정 보조 언어로 삼았다. 2011년 폴란드 인구조사에 따르면 실롱스크 지역 3개 주(실롱스크 주, 돌니실롱스크 주, 오폴레 주)의[22] 인구는 856만 명, 이 중 독일인 인구는 약 118,814명이고 오폴레 주에만 78,595명의 독일인이 거주해 주 인구의 7.73%를 차지하고 있다. 이들은 거의 대부분 오폴레 주 동부, 즉 고지 실레시아로 인식되는 곳에 거주하고 있다. 그러나 돌니실롱스크(저지 실롱스크)주에는 5032명의 독일인만 거주해 주 인구의 0.17%를 구성했다. 폴란드령 실레시아의 독일인 인구는 2002년 140,895명에 비하면 다소 감소했다.
↑ 독일인이 특히 많은 주가 오폴레 주. 오폴레 주 동쪽의 주는 실롱스키에 주이다.
한편 독일에 극히 일부 남은 실레시아는 동독의 드레스덴 지구에 편입된 뒤, 베를린 장벽 붕괴 후 1990년 통일 독일의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작센 주에 편입되었다. 이곳에 남은 실레시아인들은 자신들의 정체성과 문화가 작센의 그것과는 다르다고 여겼고 1992년 작센 주로부터 허락을 받아 실레시아의 깃발과 문장을 쓸 수 있도록 허락받았다. 체코의 실레시아에서는 전후 독일인들을 모두 추방했다. 하지만 약 4만 명의 폴란드계 실레시아인들은 일부 남아 현재까지 이 지역에 살며 체코의 소수민족을 구성한다. 현재 이 지역은 체코 공화국의 개편된 행정구역에 따라 모라바슬레스코 주에 속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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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주요 도시
[1] 독일어 이름은 퓌르텐슈타인 성(Schloss Fürtenstein)[2] 독일어로는 니더슐레지엔[3] 보헤미아 공국은 867년 보리보이 1세(Bořivoj I)에 의해 창건되었다.(프르제미슬 왕조) 그가 884년 세례를 받으면서 보헤미아는 서슬라브 국가 처음으로 기독교화 되었다.[4] 현재 독일 작센 주의 전신[5] 폴란드어로는 Książę zwierzchni[6] 독일어 표기는 Herzogtum Oppeln und Ratibor, 폴란드어 표기는 Księstwo opolsko-raciborskie, 체코어 표기는 Opolsko-ratibořské knížectví이다.[7] 크라쿠프, 그단스크 등 폴란드 핵심도시와 폴란드 영토의 약 3분의 1을 차지하는 지역이었다. 유언에 따르면 장자인 브와디스와프가 실레시아 공국에 더해 지배하기로 되었으나 형제들 모두가 이 지역을 탐낸데다 브와디스와프 역시 고공으로서 동생들의 영토에 대한 지배를 강화하려 했기에 사이가 좋을 수 없었다. 이들은 주구장창 싸운 끝에 결국 브와디스와프 2세는 쫓겨났다. 이 지역, 특히 크라쿠프를 차지하는 공작은 크라쿠프 공작이자 폴란드 고공으로서 폴란드를 대표하는 군주가 되었기에, 아들들의 대가 지나고서도 분열된 각 공국들은 이 타이틀을 얻고자 다퉜다.[8] 1469년 마차시 1세가 가톨릭 귀족들에 의해 '무단으로' 보헤미아의 왕이 되고 교황의 승인까지 받으면서 보헤미아에는 기존의 이르지와 더불어 두 명의 왕이 생겼다. 마차시 1세는 모라비아와 실레시아를 점령하며 눌러앉아 보헤미아의 왕좌를 고수했고, 1471년 이르지의 사후에는 폴란드 야기에우워 왕조의 블라디슬라프가 즉위하여 공동왕 시대가 계속되었다. 이 상태는 1490년 마차시 1세가 사망하면서 끝났다.[9] 다만 울라슬로 2세의 어머니 오스트리아의 엘리자베트가 얼베르트 왕의 딸이자 라슬로 5세의 누이였고 선대왕인 울라슬로 1세의 조카였던 혈연도 어느정도 고려되기는 했다.[10] 그러나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으로 되찾아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라는 이름으로 100년 남짓한 기간동안 통치했다.[11] 테셴 공국과 오파바강 이남의 트로파우 공국(이곳을 통치하던 집안이 리히텐슈타인의 주인 리히텐슈타인 가문이다), 예게른도르프 공국, 나이세 공국 남부 등은 합스부르크령으로 남았고 합스부르크령으로 남은 실레시아 지역은 이후 오스트리아령 실레시아가 되었다. 추가로 실레지아에는 속하지 않지만 역시 프로이센이 점령한 보헤미아 왕관령의 글라츠 백국도 프로이센에 할양되었는데 프로이센은 글라츠 백국을 한동안 실레지아와는 별개의 행정구역으로 통치하다 1818년 슐레지엔 주에 통폐합하였다.[12] 프리드리히 대왕은 프로이센 왕국의 국체는 브란덴부르크, 슐레지엔, 마그데부르크, 할버슈타트로 구성되면 충분하며, 동프로이센은 전쟁이 나 지키지 못할 상황이 되면 버렸다가 되찾으라는 유언을 남기기도 했다. 호엔촐레른 가문에게 있어서 슐레지엔은 본토인 브란덴부르크 다음으로 중요한 입지였다.[13] 1938년 뮌헨 협정으로 나치 독일은 이 지역을 다시 확보했다.[14] 독일어 명칭이다. 폴란드어로는 치에신, 체코어로는 테신이라고 읽는다.[15] Spa Conference. 주요 현안은 바이마르 독일군의 무장 해체와 배상금에 관한 상세를 논의하는 것이었다.[16] 실레시아의 폴란드인들을 수용하기 위해 세운 노동 수용소 시스템[17] 처음에는 유대인 절멸을 목적으로 세운 것이 아니었다. 해당 항목 참조.[18] 모노비츠 노동수용소(Monowitz concentration camp)라고도 불린다. 치클론 B 이외에 합성 고무를 생산했다.[19] 이 지역들은 대부분 12~13세기의 폴란드 분열 혹은 18세기 후반 폴란드 분할 전까지 폴란드의 영토였기 때문에 이것을 근거로 폴란드 인민정부는 편입된 구 독일 영토를 ‘수복 영토(Ziemie Odzyskane)’라는 공식적인 명칭으로 불렀다. 그단스크 포모제를 제외한 포메른 지역은 12세기 후반부터 그라이펜 가문의 지배를 받다 독일화되었고 실레시아는 위에서 설명했다시피 약 14세기 초부터 폴란드에서 점차 떨어져 나갔다. 반면 동프로이센은 폴란드가 기사단국을 봉신으로 삼아 간접지배했지 직접지배한 적이 없었다. 아무튼 이 지역을 제외한 나머지 ‘수복 영토’는 대부분 폴란드 분할 당시 프로이센이 빼앗은 지역이다.[20] 실레시아 민족은 폴란드인과는 다른 민족으로 인식되어 폴란드 인구 통계에도 소수민족으로 따로 잡힌다. 2011년 센서스 기준 폴란드 내 실레시아인들은 41만 명이다. 실롱스크 3개 주 전체 인구는 약 850만 명이다.[21] 영국의 수도 런던에서 작센의 주도 드레스덴까지의 직선 거리는 약 970km, 고지 실레시아까지는 무려 1,300km나 된다.[22] 독일과 오스트리아가 설정한 슐레지엔보다 약간 더 크며. 1999년 폴란드의 행정구역 개편으로 바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