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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0000><colcolor=#fff> 미에슈코 1세 Mieszko I | |
폴란드의 공작 | |
재위 | 960년 ~ 992년 |
전임 | 시에모미수 |
후임 | 볼레스와프 1세 흐로브리 |
출생 | 930년경 |
사망 | 992년 5월 25일 (향년 62세) |
폴란드 영지 포즈난 | |
가문 | 피아스트 왕조 |
종교 | 기독교 |
부친 | 시에모미수 |
배우자 | 보헤미아의 두브라우카 할덴슬레벤의 오다 |
자녀 | 볼레스와프 1세 흐로브리 외 4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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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에슈코 1세(Mieszko I)는 오늘날의 폴란드 지역에 거주하였던 폴란인의 지도자로, 이후 폴란드 왕국 피아스트 왕조의 시조가 되는 인물이다.피아스트 가문의 시조인 피아스트는 그의 고조부[1]로 피아스트의 아들 시에모비트의 아들 레스테크의 아들 시에모미수의 아들이 바로 미에슈코이다.[2]
2. 생애
2.1. 초기 생애
오데르강 동쪽의 그니에즈노(Gniezno)를 중심으로 한 폴란인(Polanie)들의 지도자로 알려진 시에모미수(Siemomysł)의 아들이다. 마워폴스카(Małopolska) 연대기에 따르면, 920년 또는 931년에 출생했다고 하지만, 학자들은 이를 신뢰할 만한 출처로 간주하지 않는다. 그의 출생년도는 연대기마다 922년에서 945년 사이로 기재되었는데, 학계에서는 그의 말년 활동으로 미뤄보건대 922년보다는 945년에 가까웠을 것으로 추정한다.'미에슈코(Mieszko)'라는 이름은 여러 기록에서 Mieszk , Mieszka , Misika , Mieszek , Mysko 등 다양한 형식으로 기재되었다. 이 이름의 유래는 불분명하다. 폴란드 크라쿠프의 주교로서 교회 개혁가이자 역사가인 윈센티 카우베크(Wincenty Kadłubek, 1150 ~ 1223)에 따르면, 그의 부모가 맹인으로 태어난 그를 보고 혼란스러워 했기 때문에 '혼란'이라는 의미인 미에슈코로 지어졌다고 한다. 13세기에 편찬된 <대폴란드 연대기>에서도 맹인인 아들을 낳은 뒤 7년 동안 다른 아들을 낳지 못하자, 외아들이 나라를 혼란스럽게 만들 거라며 이런 이름을 지어줬다고 밝혔다.
반면 15세기 폴란드 역사가 얀 디우고시(Jan Długosz)는 명성을 가질 것으로 예상된다는 의미인 미에치스와프(Miećsław)를 축약한 이름이라고 주장했으며, 19~20세기 슬라브어 문헌학자인 알렉산데르 브뤼크너(Aleksander Brückner, 1856 ~ 1939)는 불곰(miś/misko)에서 유래했다고 추정했다. 20세기 초반 독일의 몇몇 역사가들은 스칸디나비아 이름인 Dagome가 폴란드로 전해지면서 미에슈코로 변역되었으며, 그의 정체는 폴란인들을 복종시킨 노르만족이라고 주장했다. 현대의 일부 폴란드 학자들은 서슬라브족의 일원이었던 벤트인의 왕이라는 뜻의 'Vindakonungr'가 나중에 폴란드어로 번역되면서 미에슈코가 되었다고 주장했다.
중세 연대기가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그는 7살 때까지 시각 장애인이었다가 어느 날 기적적으로 시력을 회복했다고 한다. 12세기에 편찬된 <폴란드 연대기>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맹인이었던 아들이 시력을 되찾자, 시에모미수 공은 나이가 많고 신중한 사람들을 불러모아서 소년의 실명과 회복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긴급하게 물었다. 그들은 미에슈코의 눈이 먼 것은 폴란드가 이전에는 눈이 멀었다는 것을 의미하며, 미에슈코가 시력을 되찾은 것은 이제부터 폴란드가 그에 의해 계몽되고 이웃 국가들보다 높아지게 될 것이라고 답했다."
그가 초년기에 눈이 멀었다가 회복되었다는 일화는 대부분의 연대기에 그대로 반영되었지만, 현대 학계에서는 신약성경의 인물인 바울로가 기독교인을 박해하러 가던 중 눈이 멀었다가 나중에 회복된 후 기독교로 개종한 것을 본떠서 만든 전형적인 중세 우화일 뿐 사실일 가능성은 없다고 간주한다. 이외에 그의 초기 생애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 없다.
2.2. 통치
2.2.1. 초기 치세
950~960년 사이에 시에모미수의 뒤를 이어 폴란인의 지도자가 된 그는 마조프셰와 포메라니아 중부 및 동부 일대, 그리고 오드라 강변 지역에 거주하는 폴리비안 슬라브 부족들을 빠르게 복속시켰다고 전해진다. 독일측 연대기에 따르면, 그는 리시카비키(Licikaviki)라는 종족의 왕이었다고 한다. 학계에서는 리시카비키라는 명칭의 유래에 대해 포메라니아에 거주하다가 미에슈코에게 복속된 루부시(Lubusz) 족의 오기라는 설, 미에슈코의 조부인 레스테크에서 파생되어 미에슈코가 다스리는 민족 전체를 가리킨다는 설 등이 제기되고 있지만 아직까지 합의되지 않았다.이 무렵, 독일 귀족들은 여전히 기독교를 받아들이지 않은 슬라브인들이 거주하는 오데르강 일대에 대한 확장 정책을 추구했다. 963년, 변경백 게로는 루사티아 부족과 슬루피아 부족을 정복했고, 이로 인해 미에슈코 1세의 영역과 맞닿게 되었다. 당시 미에슈코 1세는 포메라니아 서부 일대에 거주하는 울린인과 벨레티인을 상대로 전쟁을 벌였으나 고전을 면치 못했다. 게다가 작센 빌룽 가문의 비흐만 2세가 포메라니아 서부로 망명한 뒤 그곳에 사는 슬라브인들을 이끌고 963년 미에슈코 1세를 상대로 2차례 승리를 거두고 미에슈코의 이름없는 형제를 살해했다고 한다.
2.2.2. 기독교 개종
이렇듯 독일 제후들의 위협이 가시화되자, 미에슈코는 964년부터 보헤미아 통치자인 볼레슬라프 1세와 협상했다. 그 결과 965년에 볼레스와프 1세의 딸 두브라우카와 결혼했다. 그리고 966년에 세례성사를 받고 가톨릭으로 개종했다. <폴란드 연대기>에 따르면, 그는 두브라우카와 결혼하기 전에는 7명의 아내를 취했지만, 두브라우카와 결혼하려면 이들과 헤어지고 그리스도인이 되겠다고 약속해야 한다는 압력을 받자 받아들였다고 한다. 미에슈코는 기독교 개종을 통해 독일 변경백들이 이교도들을 기독교로 강제 개종시키겠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쳐들어올 가능성을 차단하고자 했을 것이다. 일부 학자들은 중앙 집중화 정책에 방해가 되는 "오래된" 사제 계급을 제거하기 위해 기독교 개종을 감행했을 거라 추정하기도 한다.
기독교 걔종 후, 라틴 문화가 폴란드에 유입되기 시작했다. 교육을 받고 글을 읽을 줄 아는 최초의 고문이 궁정에 신설되었고, 교회 조직의 창설이 시작되었다. 968년에는 포즈난에 라틴 예식을 따르는 선교 주교단이 설립되었다. 폴란드 최초의 주교로 일컬어지는 요르단(Jordan)이 창설한 이 주교단은 다른 지역의 대주교가 아닌 교황의 직속 주교구를 자처했다. 그러나 기독교 개종을 거부하고 옛 슬라브 신앙과 관습을 고집하는 슬라브인은 여전히 많았고, 미에슈코는 이들이 일으킨 반란을 진압하는 데 상당한 노력을 기울어야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2.2.3. 확장 정책
기독교 개종을 감행해 독일과 보헤미아와의 관계를 개선한 뒤, 미에슈코는 포메라니아 정복 전쟁을 감행했다. 967년 2개의 기병부대로 구성된 보헤미아 지원군과 합세한 뒤 비흐만 2세가 이끄는 슬라브인들과 맞붙어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고 비흐만 2세를 전사시킨 뒤 오데르 강 어귀를 정복했다. 뒤이어 노테치(Noteć)강 유역을 공략하고 970년 산토크(Santok)에 요새를 건설했댜. 972년 작센 동부 변경백 오도가 폴란인의 땅을 침공하자, 그는 이에 맞서 세디니아에서 2차례 맞붙었다. 첫번째 전투에서는 오도가 승리했지만, 두번째 전투에서는 미에슈코가 패퇴를 가장해 적을 유인하는 사이 그의 동생인 치데부르(Czcibor)가 적군의 측면을 기습하는 작전이 성공하면서 미에슈코가 승리를 거두었다.
973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오토 1세는 미에슈코와 오도를 크베들린부르크에 소환해 두 사람이 자신의 허락 없이 전쟁을 벌인 것에 책임을 물으려 했다. 일부 사료에서는 미에슈코가 황제의 명령에 복종하여 크베들린부르크로 갔다고 하지만, 다른 사료에서는 위협을 느끼고 아들 볼레스와프를 대신 보냈다고 한다. 오토 1세가 어떤 판결을 내렸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크베들린부르크 회의가 끝난 지 몇 주 후인 5월 7일에 사망한 후 내전이 벌어졌기 때문에 판결이 집행되지 않았을 거라 추정된다.
오토 1세 사후, 바이에른 공작 하인리히 2세가 오토 1세의 어린 아들 오토 2세를 밀어내고 제위를 차지하려는 음모를 꾸몄다. 미에슈코는 보헤미아 공작 볼레스와프 2세와 함께 이 음모에 가담했다. 그러나 음모는 조기에 발각되었고, 오토 2세는 977년 보헤미아를 공격해 볼레스와프 2세를 복종시켰다. 979년, 오토 2세는 미에슈코 1세의 영역으로 진군했다. 원정의 과정과 결과에 대해서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황제가 악천후로 인해 12월에 튀링겐과 작센 국경으로 돌아왔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볼 때 이렇다할 승리를 거두지 못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 후 양자는 980년 봄 또는 여름에 새로운 협정을 체결했고, 977년 아내 두브라우카가 사망한 뒤 홀아비로 지내던 미에슈코 1세는 북방변경백 디트리히의 딸인 할덴슬레벤의 오다와 재혼했다.
980년대 초, 미에슈코는 자신의 딸 또는 자매를 스웨덴 왕 에이리크 인 시그르셀리와 결혼시킨 뒤 스웨덴과 힘을 합쳐 포메라니아에 영향력을 행사하던 덴마크인들을 몰아내려 했다. 덴마크인들은 991년경 폴란-스웨덴 연합군에게 패배했고, 포메라니아 방면 덴마크 세력 지도자는 추방되었다. 한편, 오토 2세는 982년 이탈리아에서 칼라브리아의 아랍인들에게 패배했다. 이로 인해 신성 로마 제국의 위세는 위축되었고, 983년 폴라비아의 슬라브인들이 대규모 봉기를 일으켜 제국의 지배에서 벗어났다. 같은 해 오토 2세가 사망하고 어린 아들 오토 3세가 제위에 오르자, 미에슈코 1세는 바이에른 공작 하인리히 2세를 재차 지원해 이득을 챙기려 했다. 그가 제국 내전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는 기록이 부족해서 불분명하지만, 985년 자신의 영역으로 쳐들어온 폴라비아 슬라브인들을 상대할 때 오토 3세에게 충성을 바친 작센군의 지원을 받은 걸 보면 입장을 조기에 바꿔서 오토 3세에 가담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986년 오토 3세의 군대가 보헤미아를 황폐화시키자, 미에슈코는 즉시 황제를 알연한 뒤 막대한 선물을 넘겼다. 일부 연대기에 따르면, 그는 낙타를선물로 주었다고 한다. 이후 그는 오토 3세의 슬라브 원정에 가담해 각지를 황폐화하고 수많은 적병과 민간인을 살상했다. 두 사람이 공격한 지역의 위치는 기록이 미비해서 불확실한데, 일부 학자들은 폴라비아였을 거라 추정하고, 다른 학자들은 보헤미아였을 거라 본다. 990년, 미에슈코는 단독으로 보헤미아와 전쟁을 일으켜 실레시아 일대를 정복하고 브로츠와프, 글로구프, 오폴레에 요새를 건설했다. 또한 비슷한 시기에 마워폴스카(Małopolska)를 정복하고 장남 볼레스와프의 영지로 삼았다.
2.2.4. 말년
991년경, 미에슈코는 다고메 유덱스(Dagome Iudex)로 명명된 유언장을 작성했다. 그는 이 유언장에서 자신의 국가를 교황의 보호하에 두고 자국의 국경이 어디까지인지를 설정했다. 이 유언장 덕분에, 미에슈코의 통치 말기에 폴란드 대공국의 국경을 대략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이에 따르면, 당시 폴란드 대공국은 발트해에서 고대 프로이센, 루테니아, 크라쿠프, 모라비아 및 루사티아 상부, 그리고 그니에즈노를 포함한 오데르 강 어귀까지 이르렀다. 다만 문서에서는 모라비아에서 루사티아 상부까지 국경이 이어진다고 명시되었지만, 구체적으로 어떻게 확립되었는지는 명시되어 있지 않았다. 여기에 "인접 지역"으로 동부 포메라니아, 마조프셰, 시에라츠와 윙치차, 실레시아 및 루사티아의 일부가 거론되었다.그 후 크베들린부르크 회의에 참석해 오토 3세와 황제의 모후인 테오파노 황후에게 선물을 교환하고 브레나 원정에 동행했던 그는 본국으로 귀환한 직후인 992년 5월 25일 포즈난에서 열병에 시달리다 사망했다. 사후에 포즈난 대성당에 안장되었다고 전해지나 현존하지 않는다. 일각에서는 그가 축복받은 성모 마리아 교회 지하에서 발견된 석관에 묻혔다고 주장했지만, 학계에서는 신빙성이 떨어진다고 간주하고 있다. 사후에 볼레스와프 1세 흐로브리, 미에슈코, 람베르트 등 그의 세 아들들이 아버지가 물려준 영토를 나눠 가졌다. 그러나 얼마 후 볼레스와프 1세가 정변을 일으켜 이복형제 미에슈코, 람베르트와 계모 오다를 몰아내고 폴란드의 유일한 대공이 되었다.
3. 가족
미에슈코는 965년 보헤미아 공작 볼레스와프 1세의 딸 두브라우카와 결혼하기 전에 7명의 아내를 두었다고 전해지지만, 이들과의 사이에서 얼마나 많은 자녀를 낳았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그는 두브라우카와의 사이에서 볼레스와프 1세 흐로브리, 블라디보이를 낳았다. 977년 두브라우카가 사망한 뒤 980년 북방변경백 디트리히의 딸인 할덴슬레벤의 오다와 재혼해 미에슈코, 시비엥토페우크 미에슈코비치, 람베르트를 낳았다. 이중 사비엥토페우크는 991년 이전에 사망했고, 다른 두 아들은 볼레스와프 1세와 함께 아버지의 영지를 나눠 가졌다. 그러나 볼레스와프 1세가 모든 영지를 무력으로 탈취한 후, 이들은 어머니 오다와 함께 해외로 망명해야 했다.4. 여담
폴란드 10즈워티 지폐의 인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