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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지미에시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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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 피아스트 왕조 대공
카지미에시 2세 스프라비애들리비
Kazimierz II Sprawiedliw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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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카지미에시 2세.jpg
출생 1138년
폴란드 대공국 크라쿠프
사망 1194년 5월 5일
폴란드 대공국 크라쿠프
재위기간 폴란드 공작
1177년 ~ 1191년
1191년 ~ 119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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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0000><colcolor=#fff> 부모 아버지: 볼레스와프 3세 크쉬보우스티
어머니: 베르크의 살로메아
배우자 츠노쳄의 헬레나
자녀 5남 2녀
가문 피아스트 가문
종교 가톨릭 }}}}}}}}}

1. 개요2. 생애3.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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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폴란드 대공국 피아스트 가문의 대공.

2. 생애

1138년경 폴란드 대공 볼레스와프 3세 크쉬보우스티와 베르크 백작 하인리히의 딸인 베르크의 살로메아 사이의 아들로 출생했다. 이복형으로 브와디스와프 2세 비그나니에츠가 있었고, 친형제로 볼레스와프 4세, 미에슈코 3세, 헨리크 산도미에르스키 등이 있었다. 그가 태어난 해 10월 28일에 아버지 볼레스와프 3세가 사망했다. 볼레스와프 3세는 죽기 전에 일명 <볼레스와프의 승계법>으로 명명된 유언장을 작성했다. 그는 이 유언장에서 전혀 언급되지 않았는데, 학자들은 볼레스와프 3세 사후에 태어났거나 애초에 사제로 길려지기로 예정되었을 거라 추정한다.

카지미에시는 웽치차에 있는 어머니 살로메아의 궁정에서 지냈다. 그러던 1144년 7월 27일, 살로메아가 사망했다. 볼레스와프 3세의 유언에 따르면, 살로메아가 관리하던 웽치차는 그녀가 사망하면 브와디스와프 2세에게 돌아가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볼레스와프 4세와 미에슈코 3세 등은 이에 반대했다. 막내 동생 카지미에시가 아무런 영지도 받지 못했다며, 그에게 웽치차를 물려줘야 하니 자신들이 인수하겠다는 것이었다.

브와디스와프 2세는 무력으로 두 사람을 침묵시키기로 마음먹고, 프세볼로트 2세에게 지원을 요청한 뒤 루스군이 도착하기를 기다리지 않고 군대를 이끌고 두 이복형제의 영지로 쳐들어갔다. 그러나 마조프셰의 보이보이드인 비세보르에게 뜻밖의 패배를 당하고 말았다. 이후 전세가 불리해졌지만, 프세볼로트 2세가 파견한 루스군이 볼레스와프 4세와 미에슈코 3세의 군대를 격파한 덕분에 겨우 역전시킬 수 있었다.

이후의 협상 결과, 윙체차는 브와디스와프 2세의 영지로 귀속되었고, 볼레스와프 4세는 위즈나를, 미에슈코 3세는 칼리슈와 그니에즈노를 브와디스와프 2세에게 추가로 넘겨야 했다. 그러나 브와디스와프 2세는 자신을 도와준 대가로 프세볼로트 2세에게 폴란드의 여러 거점을 넘겨줘야 했다. 한편 카지미에시는 별다른 영지를 받지 못하고 브와디스와프 2세의 궁정에서 지냈다. 그러다 1146년 브와디스와프 2세가 두 이복형제와의 내전에서 패배하고 신성 로마 제국으로 망명한 뒤 폴란드의 새 대공이 된 볼레스와프 4세의 궁정에서 지냈다.

1157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1세가 폴란드로 진군했다. 그는 저항을 포기하고 볼레스와프 4세와 함께 복종했으며, 황제의 이탈리아 원정에 지원군을 보내고 마그데부르크에 형제와 함께 출두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들은 약속 이행을 보장하기 위해 막내동생 카지미에시 2세를 독일에 인질로 보냈다. 그러나 프리드리히 1세가 돌아간 후, 그와 볼레스와프 4세는 약속과는 달리 마그데부르크에 출두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카지미에시는 별다른 해꼬지를 당하지 않고 독일에서 좋은 교육을 받았다. 1161년 5월 21일 볼레스와프 4세와 헨리크 산도미에르스키를 접견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볼 때, 그 이전에 조국으로 돌아왔던 것으로 추정된다.

1166년 헨리크 산도미에르스키가 볼레스와프 4세의 프로이센 원정에 참여했다가 마수리아 늪지대에서 프로이센인들의 매복 공격을 받고 전사했다. 볼레스와프 4세는 헨리크가 가지고 있던 영지를 온전히 자기 것으로 삼으려 했지만, 산도미에시 귀족들이 이에 반발해 1167년 가을 얀제이우프(Jędrzejów)에서 의회를 소집해 산도미에시 공국 전체를 카지미에시 2세에게 넘기고 미에슈코 3세를 폴란드 대공으로 받들려 했다. 볼레스와프 4세는 프로이센인들에게 참패해 막대한 병력 손실을 입은 상황에서 반란군을 어찌할 도리가 없다고 보고 그들과 협상했다. 그 결과 카지미에시 2세는 비실리카를 수여받았고, 미에슈코 3세는 알려지지 않은 영지들을 받았으며, 볼레스와프 4세는 산도미에시 지방을 계속 가질 수 있었다. 이때 카지미에시는 비실리카의 공작에 선임됨으로써 비로소 자신만의 공국을 확보했다.

1173년 1월 5일, 볼레스와프 4세가 크라쿠프에서 사망했다. 볼레스와프 4세는 유언장에서 자신의 영지를 유일하게 살아남은 레첵에게 마조프셰를 상속하고 카지미에시가 병약한 레첵을 돌봐주며, 레첵이 조기에 자녀 없이 사망할 경우 카지미에시가 레첵의 영지를 물려받으라고 밝혔다. 이후 폴란드 대공에 오른 미에슈코 3세는 신을 모든 폴란드의 공작(dux totius Poloniae)이라고 명시한 동전을 주조했다. 이후 귀족들의 권력을 약화시키고 중앙 집권화를 이루고자 했지만, 귀족들은 이에 반감을 품었다. 여기에 그의 장남 오돈이 아버지가 계모인 에우독시아 사이에서 낳은 아들들을 선호하고 자신을 수도원에 보내려 한다는 것을 눈치채고 귀족들에게 가세했다.

1177년 부활절, 여러 공작과 귀족들이 그니에즈노로 몰려들었다. 그들은 부활절 행사를 개최한다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반란을 일으키기 위해 모인 것이었다. 그후 그들이 봉기를 일으키자, 소폴란드 총독 헨리크 키에틀리츠도 가세했고 실레시아의 볼레스와프와 그의 장남 오돈도 반란에 가담했다. 그는 이에 맞서 항전했고, 한 때는 실레시아의 미에슈코가 볼레스와프를 축출하고 그에게 충성하면서 상황이 유리하게 돌아가는 듯했다. 이에 위기를 느낀 귀족들은 카지미에시에게 대공이 되어달라고 제안했고, 그는 잠시 망설인 끝에 받아들였다. 이후 상황은 카지미에시에게 유리하게 흘러갔고, 1179년 미에슈코 3세가 추종자들과 함께 실레시아의 라치부시로 도주하면서 내전이 막을 내렸다. 카지미에시는 폴란드의 새 대공이 되었고, 실레시아의 미에슈코는 소 폴란드에서 분리된 시비에르츠, 오시비엥침, 비톰 등지의 영주에 선임되는 대가로 카지미에시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카지미에시는 권력을 합법화하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다. 1180년 웽치차에서 열린 회의에서 사망한 성직자의 사유 재산인 동산을 인수할 수 있는 군주의 권리 및 군주가 전국을 여행하는 동안 관리들에게 어떠한 비용도 지불하지 않고 숙식할 수 있는 권리 등을 남용하는 문제를 규제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폴란드 내 강력한 성직자들과 평신도들을 공의회에 초대해 자신을 폴란드 대공으로 받들도록 했으며, 웽치차에서 채택된 결의안을 교황 알렉산데르 3세에게 보내, 사망한 주교들의 사유 재산을 모조리 몰수하는 군주들을 탐탁지 않게 여기던 그에게 앞으로는 주교의 재산을 몰수하지 않겠다고 약속함으로써, 교황청이 자신을 대공으로 인정하도록 유도했다.

카지미에시는 알렉산데르 3세에게 사절단을 보낼 때 성인의 유물을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알렉산데르 3세는 이를 약속했지만, 얼마 후인 1181년 8월 20일에 사망하는 바람에 이행하지 못했고, 뒤를 이어 교황에 선임된 루치오 3세가 1184년 모데나의 주교 이지에게 성 플로리안의 유물을 폴란드로 보냈다. 이 유물은 크라쿠프 대교구에 보관되었고, 폴란드에서 플로리안에 대한 공경이 빠르게 확산되었다.

카지미에시는 1166년 생애 처음으로 공작이 된 직후부터 교회를 적극적으로 후원했다. 1167년 가을 얀제이우프(Jędrzejów)에서 지역 시토회 수도원의 창설자인 야니크 대주교가 성 마리아 성당 축성식을 할 때 참석해 성 마리아 교회와 성 아달베르트 교회 뿐만 아니라 안제이우프 영주와 후계자들에게 소금 13수레 분량을 영구적으로 지급하기로 했다. 1176~1177년 필리카 강변의 국경도시인 술레오프에 시토회 수도원을 건설하고 그 지역의 소금, 십일조, 망아지 등 각종 수입을 관할할 권한을 부여했으며 동산 및 부동산 등 많은 선물을 주었다.

여기에 자신과 다른 사람들이 수도원에 기부한 모든 재산에 세금을 걷지 않기로 했다. 1179년에는 원초크에 시토회 수도원을 건설하고 역시 해당 지역의 수입을 기부했으며, 1185년 부르고뉴의 모나몬트 수도원에서 활동하던 시토회 수도자들을 코프르지브니카로 데려와서 그곳에서 사목하게 하고, 크프르지브니카와 여러 인근 마을을 기증했다. 일부 학자들은 카지미에시가 안제이우프, 술레오프, 원초크, 크프르지브니카에서 설립한 4개의 시토회 수도원은 해당 지역의 경제적, 종교적, 문화적 기반 마련에 큰 보탬이 되었다고 본다. 그는 이외에도 수도원 대학을 여러 곳에 세워서 신학자들을 지속적으로 길려내, 폴란드에 기독교가 완전히 자리잡도록 힘을 기울였다.

한편, 미에슈코 3세는 적군이 라치부시까지 압박해오자 신성 로마 제국으로 도주한 뒤 황제 프리드리히 1세에게 자신을 복위시켜주면 10,000 그지브나(grzywna)를 주겠다고 약속했으나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서부 포메라니아 공작이자 사위인 보구스와프 1세에게 도움을 호소했다. 보구스와프 1세는 그를 도와주기로 했고, 그니에즈노 대주교 즈지스와프 역시 미에슈코 3세를 지지했다. 1181년, 미에슈코 3세는 이들의 도움에 힘입어 그니에즈노와 칼리슈를 포함한 대폴란드 동부를 탈환했다. 그 후 1182년 아들 오돈과 공식적으로 화해하고 오돈이 오브라 강 지역 남부를 다스리는 것을 받아들였다. 카지미에시는 미에슈코 3세가 대폴란드 영지를 되찾는 것을 막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알려지지 않았다.

1182년, 카지미에시는 볼레스와프 3세의 딸 아나스타샤의 아들인 스뱌토슬라프 므스티슬라보비치를 할리치-블라디미르 루테니아의 공작에 앉히기 위해 브레스트로 진격했다. 그는 모든 저항을 물리치고 브레스트를 공략한 뒤 스뱌토슬라프를 공작에 앉혔다. 1183년 스뱌토슬라프가 중독 증세를 보이며 사망하자, 그는 또다른 조카인 로만 므스티슬라보비치를 새 공작에 세웠다.

1184년, 미에슈코 3세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6세에게 상당한 액수의 돈을 제공해 자신이 폴란드 대공으로 복위할 수 있게 해달라고 청했다. 그러나 카지미에시가 하인리히 6세에게 더 많은 금액을 지불하는 바람에 실패했다. 미에슈코 3세는 목표를 바꿔 형제 볼레스와프 4세의 아들이며 마조프셰 공작이었던 레첵을 설득해 카지미에시가 아닌 자신의 아들 미에슈코를 후계자로 지명하게 했다. 그러나 1185년, 레첵은 미에슈코가 통치를 무능하게 하는 데다 지나치게 권위적이라고 판단하고 카지미에시를 다시 후계자로 지명했다. 1186년 레첵이 사망한 후, 카지미에시는 미에슈코 3세와 협상한 끝에 마조프셰 일대를 자신이 가지는 대가로 미에슈코 3세의 아들 볼레스와프 미에슈코비치가 일부 영지를 수여받게 했다.

1187년 갈리치아 공작 야로슬라프 오스미오미슬이 사망하자 올렉 야로슬라비치가 새 공작에 선임되도록 지원했다. 그러나 그의 이복형제인 블라디미르 야로슬라비치가 반란을 일으켜 올렉을 몰아내고, 올렉을 지원한 폴란드에 보복하겠다는 명분을 내세워 폴란드를 침공해 여러 마을을 약탈했다. 1188년, 카지미에시는 보복 원정을 감행해 할리치나에서 블라디미르를 몰아내고 로만 므스티슬라보비치가 갈리치아 공작을 겸임하도록 했다. 블라디미르는 헝가리로 도주한 뒤 그곳의 국왕 벨러 3세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벨러 3세는 할리치나로 진군해 로만을 몰아내고 블라디미르를 복위시켰지만, 그를 계속 붙잡아두고 자신의 아들인 언드라시를 갈라치아의 실질적인 통치자로 삼았다.

1189년 또는 1190년, 블라디미르는 헝가리 감옥에서 탈출해 폴란드로 망명했다. 카지미에시는 앞으로는 폴란드의 영토에 침범하지 않고 우호적인 관계를 맺겠다는 약속을 받아낸 뒤 할리치나로 군대를 보내 언드라시를 축출하고 블라디미르를 공작에 복위시켰다. 당시 벨러 3세는 세르비아 방면으로 영토를 확장하는 데 골몰하고 있던 터라 그의 이같은 움직임데 별다른 대응을 하지 않았다.

1191년, 카지미에시 2세에게 불만을 품은 소폴란드 귀족들이 봉기를 일으켰다. 미에슈코 3세는 이들에게 가담해 크라쿠프를 공략한 뒤 그곳의 권력을 아들 미에슈코 또는 볼레스와프 미에슈코비치에게 맡겼다. 그러나 카지미에시 2세는 신속하게 크라쿠프를 되찾고 그의 아들을 붙잡았다가 미에슈코 3세에게 돌려줬다. 이후 북동쪽 국경을 끈질기게 습격하는 이교도 세력인 요트빙거 부족으로 시선을 돌렸다. 1192~1193년, 카지미에시는 브르자 강 북쪽 지역을 점령하고 있는 요트빙거에 대한 원정을 개시했다. 요트빙거족은 이 전쟁에서 크게 패하고 그에게 충성을 서약했으며, 매년 상당한 공물을 바치겠다고 약속했다.

1194년 5월 5일, 요트빙거족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귀환한 카지미에시는 크라쿠프에서 승리를 기념하는 연회를 벌였다가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크라쿠프 수도자이자 폴란드 역사 연대기 저자인 빈센티 카드우벡(Wincenty Kadłubek, 1150년경 ~ 1223년 3월 8일)에 따르면, 그는 잔치 중에 술을 마신 직후 사망했다고 한다. <폴란드 왕국의 연대기> 작가 얀 드우고시( Jan Długosz, 1415 ~ 1480)에 따르면, 작은 잔에 든 물을 마신 후 의식을 잃고 쓰러졌고, 몇 시간 후 병이 심해져서 사망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잔치 참석자 일부는 그가 병으로 쓰러졌다고 믿었고, 다른 이들은 크라쿠프 출신의 여인이 그가 자신을 사랑하도록 만들기 위해 약을 타넣은 것이 잘못되어 죽었다고 믿었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이 기록의 신빙성은 의심되며, 현대 학자들은 그의 갑작스러운 사망 때문에 누군가에 의해 독살당했다는 소문이 떠돌았을 테지만 사실 여부는 불분명하다고 본다. 일부 학자들은 그가 56세라는 당시로서는 적지 않은 나이인 점을 들어 병에 걸려 사망했을 가능성도 있다고 본다.

미에슈코 3세는 카지미에시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접하자 소폴란드를 장악하고 폴란드 대공을 자처하려 했다. 그러나 소폴란드 귀족들은 카지미에시의 아들인 레첵 1세를 대공으로 추대하기로 했다. 미에슈코 3세는 이를 막기 위해 군대를 일으켰지만, 1195년 9월 13일 모즈카와 전투에서 참패했다. 이후 무력으로 대공이 될 수는 없다고 판단하고, 카지미에시의 마망인인 츠노쳄의 헬레나와 협상한 끝에 1198년 쿠야비야를 카지미에시 2세의 두 아들인 레첵과 마조프셰 공작 콘라트에게 양도하는 대가로 폴란드 대공으로 인정받았다.

3. 가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