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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요시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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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d2a3e><colcolor=#ffffff> 헝가리 왕국 앙주 왕조 제2대 국왕
폴란드 왕국 앙주 왕조 초대 국왕
러요시 1세
I. Lajos
파일:Louis_I_(Chronicon_Pictum).jpg
출생 1328년 3월 5일
헝가리 왕국 비셰그라드
사망 1382년 9월 10일 (향년 54세)
헝가리 왕국 너지솜버트
재위 헝가리 왕국크로아티아 왕국의 왕
1342년 ~ 1382년
폴란드 왕국의 왕
1370년 ~ 1382년
배우자 보헤미아의 마르케타
(1342년 결혼/1349년 사망)
보스니아의 엘리자베타
(1353년 결혼)
아버지 카로이 로베르트
어머니 폴란드의 엘즈비에타
형제자매 카로이, 라슬로, 언드라시, 이슈트반
자녀 커털린, 마리어, 야드비가

1. 개요2. 언어별 표기3. 생애4. 가족
4.1. 자손4.2. 사위
5. 기타
5.1. 게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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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헝가리 왕국-크로아티아 왕국 앙주 왕조 제2대 국왕, 폴란드 왕국 앙주 왕조 초대 국왕. 나폴리 왕국, 리투아니아 대공국, 세르비아 왕국, 베네치아 공화국, 킵차크 칸국, 보스니아, 몰다비아 공국, 왈라키아 공국, 불가리아 제2제국 등 주변국들을 상대로 대대적인 공세를 가해 헝가리-크로아티아의 영토를 크게 늘리고 내치에 힘쓰며 헝가리의 최전성기를 이끈 명군이었다. 그러나 폴란드는 내팽겨치고 딸들의 상속에만 골몰하는 바람에 귀족들에게 막대한 권한을 양보하면서 폴란드 왕권을 약화시켰고, 영토 확장 과정에서 주변국들의 원한을 사 후대에 헝가리-크로아티아가 전란에 시달리는 단초를 제공했다.

2. 언어별 표기

헝가리어Nagy Lajos (러요시 대왕)
크로아티아어Ludovik Veliki (루도비크 대왕)
슬로바키아어Ľudovít Veľký (류도비트 대왕)
폴란드어Ludwik Węgierski (헝가리의 루드비크)

3. 생애

파일:lajos1_territory.jpg
파일:Screenshot_20231001_200244_YouTube.jpg
러요시 1세 시대 최대 판도. 말년인 1380년 판도.
1328년 3월 25일 헝가리 국왕 카로이 로베르트와 폴란드 국왕 브와디스와프 1세의 딸 엘즈비에타의 3남으로 출생했다. 두 형 카로이와 라슬로는 유년기에 사망했기에, 그가 사실상 장남이었고 언드라시[1]와 이슈트반이라는 두 명의 남동생이 있었다. 어린 시절 우수한 학자들로부터 프랑스어, 독일어, 라틴어 등 각종 언어와 제왕학 등 다양한 교육을 받았다. 특히 역사와 점성술에 큰 관심을 보였으며, 신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 신앙심이 두터웠다. 9살 때 아버지와 보헤미아 왕국 국왕 얀 루쳄부르스키가 동맹 협정을 맺을 때 참관했으며, 10살 때 아버지와 함께 오스트리아 공국 원정에 참여했다.

1338년 3월 1일, 얀 루쳄부르스키의 후계자이며 모라비아 변경백인 카렐비셰그라드에서 카로이 왕과 러요시 왕자와 새로운 계약을 체결했다. 카를은 폴란드 왕국 국왕 카지미에시 3세가 남자 후계자를 두지 못하고 사망한다면 카로이 왕이나 러요시가 폴란드 국왕이 되는 것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또한 카를의 딸인 보헤미아의 마르케타와 러요시를 약혼시키기로 했다. 폴란드 왕 카지미에시 3세 역시 이 협약에 동의하여 공식적으로 러요시를 후계자로 지명했다. 그 대신, 카로이는 폴란드가 튜튼 기사단에게 빼앗긴 포메른 및 여러 영토를 되찾는 것을 도와주고 폴란드를 다스릴 때 폴란드인만 고용하겠다고 약속했다.

1338년 에르데이 공작에 취임했고, 1342년 7월 16일 아버지가 사망한 뒤 5일 후인 7월 21일에 세케슈페헤르바르에서 에스테르곰 대주교 텔레그디 처나드에게 기름 부음을 받고 성 이슈트반 왕관을 썼다. 당시 그의 나이는 17세로 당대에는 성년으로 취급받았지만, 어머니 엘즈비에타가 수십년간 공동 섭정을 맡아서 그에게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러요시는 즉위 직후 새로운 토지 보조금 제도를 도입했다. 왕실로부터 토지를 수여받은 자의 형제자매와 다른 친적들은 토지를 물려받을 수 없으며, 아들이 없으면 딸이 아버지로부터 토지를 물려받을 수 있었다. 또한 토지 소유자들은 그곳에서 일하는 농노들에게 사형을 집행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았다. 1342년 9월, 카로이 로베르트 왕의 최측근이었던 드루게트[2] 빌모시(Druget Vilmos 1300~1342)가 사망했다. 그는 자신의 영지를 형제인 미클로시에게 물려줬다. 그러나 러요시는 새 법을 적용해 토지를 몰수했다.

러요시는 라코비치 가문을 무척 총애했다. 이 가문에서 그의 치세 동안 고위직을 맡은 인물은 총 8명이었다. 이 중 라코비치 언드라시가 가장 큰 신임을 받아 헝가리 왕실군 총사령관을 맡았다. 1342년 말 또는 1343년 초, 언드라시는 세르비아 왕국을 침공해 스테판 우로시 4세 두샨이 카로이 1세 치세 말기에 빼앗아갔던 모에시아의 바나트를 탈환했다.

그러던 1343년 1월 20일 나폴리 왕국 국왕 로베르토[3]가 사망했다. 로베르토는 유언장에서 손녀 조반나 1세를 유일한 후계자로 지명하고, 러요시의 남동생이자 조반나 1세의 남편인 언드라시의 상속권을 배제했다. 이에 러요시는 동생이 상속권을 되찾게 해주기로 마음먹고, 모라비아의 카렐에게 사절을 보내 나폴리 왕국을 공동으로 압박하기로 했다. 또한 어머니 엘즈비에타는 1343년 여름에 막대한 금과 은을 가지고 나폴리로 가서 7개월 동안 조반나 1세와 교황 클레멘스 6세에게 언드라시가 나폴리의 공동 왕이 되도록 해달라고 요청했다.

한편, 러요시는 세금 납부를 거부한 에르데이의 작센인들을 상대로 원정을 개시해 1344년 여름에 이들의 항복을 받아냈다. 이후 일찍이 아버지에게 뼈아픈 패배를 안기고 헝가리로부터 독립한 왈라키아 공국의 지배자 바사라브 1세를 응징하려 하자, 바사라브 1세는 위협을 느끼고 아들 니콜라에 알렉산드루를 그에게 보내 봉신을 자처했고, 그는 이에 만족하여 수도로 귀환했다. 이리하여 왈라키아에 대한 헝가리의 종주권은 명목상이나마 복원되었다. 러요시는 여세를 몰아 1344년 12월 기독교를 믿지 않는 리투아니아인을 상대로 십자군 원정을 감행했다. 이 원정에 보헤미아 왕 얀 루쳄부르스키, 모라비아의 카렐, 부르봉의 피에르 1세, 에노의 기욤 2세도 가담했다. 십자군은 빌뉴스를 포위 공격했지만, 리투아니아인의 격렬한 저항을 극복하지 못하고 철수했다.

1345년 2월 말, 헝가리로 돌아온 러요시는 자기가 없는 틈을 타 에르데이와 세폐세크(Szepesség)[4] 일대를 습격하여 약탈을 자행한 킵차크 칸국을 응징하고자 라코비치 언드라시를 파견했다. 언드라시는 킵차크 칸국의 영역으로 쳐들어가서 적군을 상대로 뼈아픈 타격을 안긴 뒤 각지를 약탈한 후 귀환했다. 그해 4월 폴란드 국왕 카지미에시 3세와 모라비아의 카렐이 전쟁을 벌이자, 그는 일전에 맺은 합의에 따라 카지미에시 3세를 지원했다.

1345년 6월, 러요시는 크로아티아로 진군했다. 당시 크로아티아는 이반 넬리피치가 카로이 1세를 상대로 승리를 거둔 이래 헝가리의 직접적인 통제에서 벗어나 있었다. 러요시가 쳐들어왔을 때 이반 넬리피치는 이미 죽었고, 그의 미망인 블라디슬라바 쿠르자코비치(Vladislava Kurjaković)와 아들 이반 넬리피치(Iván Nelipčić)는 도저히 대적할 도리가 없다고 여기고 항복했다. 다른 크로아티아 귀족들도 러요시가 크로아티아에 있는 동안 앞다투어 귀순했다. 그동안 베네치아 공화국의 압제에 시달리던 자다르 역시 그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베네치아 총독을 몰아냈다.

크로아티아 원정을 마치고 수도로 귀환한 러요시는 1345년 9월 18일, 남동생 언드라시가 아베르사(Aversa)에서 암살당했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접했다. 그는 조반나 1세가 권력을 독차지하기 위해 언드라시를 죽였다고 확신하고, 교황 클레멘스 6세에게 "남편을 살해한 여왕을 폐위시키고 언드라시의 아들(칼라브리아 공작 카를로 마르텔)을 나폴리 국왕으로 세우려 하니 허락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면서 자신이 조카의 섭정을 맡겠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교황이 언드라시 암살 사건에 대해 조사하지 않자, 러요시는 나폴리 왕국의 본토인 남부 이탈리아를 침공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먼저 남부 이탈리아의 여러 도시들에 사절을 보내 헝가리군에 협조해달라고 요청했다. 이때 베네치아 공화국이 자다르를 탈환하기 위해 함대를 파견하자, 자다르 시민들은 원군을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나폴리 왕국과 일전을 준비하고 있는 상황에서 베네치아와 갈등을 벌일 이유는 없다고 여기고 응하지 않았고, 자다르는 1346년 12월 21일 베네치아에 항복했다. 1347년 4월 24일, 헝가리군 선봉대가 바사리 미클로시(Vásári Miklós ?~1358)의 지휘하에 이탈리아로 건너갔다. 여러 분견대가 잇따라 이탈리아로 진군했는데, 대부분이 독일인 용병대였다. 이들은 우디네, 베로나, 모데나, 볼로냐, 우르비노, 페루자를 거쳐 라퀼라까지 진격했고, 조반나 1세는 1348년 1월 11일 마르세유로 도주했다.

조반나 1세의 친척인 타란토 공작 로베르트와 두라초 공작 카를로[5]는 러요시를 찾아가 항복 의사를 밝혔다. 러요시는 이들을 우호적으로 받아들이면서, 이들의 형제이며 여전히 헝가리에 맞서고 있는 타란토의 필리포와 두라초의 루도비코를 설득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그들이 시키는 대로 형제들을 설득한 뒤 함께 귀순하자, 러요시는 태도를 싹 바꿨다. 그는 남동생 언드라시가 살해된 일에 대해 그들의 책임을 추궁하며 온갖 비난을 퍼붓고 현장에서 체포했다. 다음날인 1348년 1월 23일, 두라초 공작 카를로는 러요시 1세의 명령에 따라 참수되었다. 다른 인사들은 러요시의 어린 조카 카를로 마르텔과 함께 헝가리로 이송되었다.

1348년 2월, 러요시는 나폴리로 진격했다. 나폴리 시민들이 공물을 바치겠으니 군대를 입성시키지 말고 그와 수행원들만 도시에 들어와달라고 요청하자, 그는 공물을 더 바치지 않는다면 자신의 병사들이 도시를 철저히 약탈할 것이라고 위협하며 거절했다. 그는 역대 나폴리 왕들의 칭호인 "시칠리아와 예루살렘의 왕, 풀리아 공작과 카푸아 공작"을 왕호에 덧붙였고, 여러 요충지에 용병들을 주둔시키는 등 남부 이탈리아를 자국의 영역으로 확고히 하겠다는 의사를 공공연히 드러냈다. 여기에 동생의 죽음에 연루된 모든 공범을 잡기 위해 의심되는 자들을 모조리 잡아들여 가혹한 고문을 가했다.

처음에 러요시에게 복종했던 이탈리아 귀족들은 그의 이같은 강압 정책에 분노해 봉기를 일으켰고, 교황 클레멘스 6세는 헝가리가 나폴리 왕국을 차지해버리면 너무 강해져서 교황령까지 위협할 것을 우려해 그가 나폴리를 통치하는 것을 승인하지 않았다. 급기야 추기경 회의를 소집한 뒤 조반나 1세의 남편 살해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러요시 1세는 더 많은 병력을 이탈리아에 상륙시켜서 이탈리아 귀족들을 굴복시키려 했지만, 때마침 중세 흑사병이 돌면서 많은 병사들이 죽어나가자 어쩔 수 없이 1348년 5월 헝가리로 철수했다. 그는 울리히 볼프하르트(Ulrich Wolfhardt)를 나폴리 총독으로 임명했지만, 울리히는 조반나 1세가 9월에 나폴리로 귀환하는 것을 막지는 않았다.

1348년 8월 5일 베네치아와 8년간 휴전을 맺기로 합의한 러요시는 1349년 말 에르데이의 보이보드 러크피치 이슈트반(Lackfi István 1305~1353)이 이끄는 새로운 헝가리군을 나폴리로 파견했다. 그들은 카푸아, 아베르사 등 여러 요새를 파괴했지만, 독일 용병들이 도중에 반란을 일으키는 바람에 헝가리로 철수할 수 밖에 없었다. 이후 흑사병헝가리에 도래하면서 많은 이들이 사망했고, 급기야 왕비 마르케타마저 흑사병에 걸려 사망했다. 러요시 역시 흑사병에 걸렸지만 간신히 살아남았다. 이런 상황에서 전쟁을 이어가는 건 무리라고 여긴 러요시는 교황 클레멘스 6세에게 조반나 1세를 폐위한다면 나폴리 왕국에 대한 영유권 주장을 그만두겠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교황이 제안을 거부하자, 그는 1350년 4월 나폴리로 친정했다. 그는 바를레타(Barletta)에서 용병들의 반란을 진압한 뒤 각지를 진군하며 약탈과 파괴를 자행해 누구도 감히 원정을 방해할 엄두를 내지 못하게 하려 했다. 그러나 민중은 이에 두려움을 품긴 커녕 격렬하게 저항했고, 원정은 갈수록 힘겨워졌다. 하지만 그는 이에 굴하지 않고 병사들을 독려했고, 요새를 공략할 때 친히 사다리를 타고 기어올라갈 정도로 분투했다. 8월 3일 나폴리 왕국의 핵심 요새인 아베르사가 함락되자, 조반나 1세는 또다시 나폴리에서 마르세유로 망명했다.

그러나 아베르사를 공략하던 중 왼쪽 다리에 화살이 박혀 중상을 입은 데다, 주민들의 저항이 갈수록 심해지고 군자금이 바닥나서 더 이상 원정을 이어갈 수 없었던 러요시는 헝가리로 철수했다. 그 후 러요시와 조반나 1세의 남편인 루이지(루이지 1세)는 교황청의 중재에 따라 6개월간 휴전을 맺기로 했다. 교황청은 러요시에게 조반나 1세가 언드라시 암살 사건에 얼만큼 관여했는지를 다시 조사하겠다고 약속했고, 러요시는 헝가리로 끌고 갔던 공작들을 풀어주는 대가로 30만 플로린을 받기로 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자신을 살레르노의 공작이자 산탄젤로의 영주라고 칭하며, 조부인 카로이 마르텔 이래로 나폴리 왕국에 지분이 있음을 과시했다.

나폴리 왕국과의 전쟁을 마무리한 러요시는 1351년 6월 폴란드 국왕 카지미에시 3세의 요청에 따라 헝가리군을 이끌고 크라쿠프로 진군했다. 그는 그곳에서 카지미에시 3세와 합세한 뒤 루테니아 왕국의 여러 도시들을 공략한 리투아니아인과의 전쟁을 준비했다. 그러던 중 카지미에시 3세가 병에 걸려 후방에 후송되면서, 그가 폴란드-헝가리 연합군의 유일한 사령관이 되었다. 그해 7월, 러요시는 리투아니아 대공 켕스투티스(Kęstutis)[6]를 공격했다. 이에 켕스투티스는 8월 15일 그에게 사절을 보내 헝가리 왕의 종주권을 인정하고 형제들과 함께 부더에서 세례를 받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켕스투티스는 폴란드-헝가리 연합군이 철수한 뒤 약속을 이행하지 않았다.

러요시는 켕스투티스를 징벌하기 위해 재차 공세를 개시했지만, 그의 원정에 참여한 프워츠크 공작 볼레스와프 3세가 리투아니아군의 습격으로 전사하면서 군대의 사기가 떨어지자 어쩔 수 없이 부더로 철수했다. 이때 교황 사절들이 그를 찾아와서 스테판 우로시 4세 두샨을 정벌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는 이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1351년 말 의회를 소집했지만, 귀족들은 거듭된 전쟁에 지친 데다 막대한 전쟁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자기들의 재산을 갈취하는 그에 대한 불만을 공공연히 드러냈다. 러요시는 이들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1222년 언드라시 2세가 귀족들의 특권을 공인한 금인칙서를 따르겠다고 선언했다. 단, 아들을 두지 못한 귀족들이 후계자를 임의로 결정하는 것만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대신, 남자 후손이 없는 귀족의 재산을 친척에게 물려주고, 남자 친척이 없으면 왕실에 넘기게 했다.

1352년 3월, 러요시는 벨츠(Belz)를 포위 공격하던 카지미에시 3세와 합류해 성공적으로 함락시켰다. 그러나 리투아니아 대공 알기르다스(Algirdas)[7]가 타타르 용병들을 대규모로 고용해 포돌레로 쳐들어오자, 러요시는 본국이 침탈당할 것을 우려해 헝가리로 귀환했다. 교황 클레멘스 6세는 그해 5월에 리투아니아와 타타르에 대한 십자군을 선포하고, 러요시가 향후 4년간 헝가리 교회 수입에서 십일조를 징수할 권리를 승인했다. 그러면서 헝가리에 인접한 이교도들과 교회 분열주의자들의 땅을 점령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다. 이에 고무된 러요시는 1354년 4월 대규모 병력을 이끌고 킵차크 칸국을 향한 원정을 개시했다. 헝가리군이 킵차크 칸국에 밀려와서 각지를 약탈하고 파괴하자, 자니베크 칸은 두려움을 느끼고 다시는 리투아니아인들을 돕지 않고 헝가리를 적대하지 않겠다는 조건하에 러요시와 평화 협약을 맺었다. 이후 킵차크 칸국은 헝가리를 공격하지 않았다.

러요시는 여세를 몰아 세르비아 왕국을 침공했다. 헝가리군의 강력한 전투력에 밀린 스테판 두샨은 교황의 우위를 인정하겠다고 밝혔고, 러요시는 이에 만족하며 수도로 귀환했다. 1355년, 러요시는 리투아니아에 맞서는 카지미에시 3세에게 원군을 보내는 한편 스위스 서약 동맹과 전쟁을 치르고 있는 오스트리아 공작 알브레히트 2세[8]에게도 보조군을 보냈다. 이 무렵 베네치아 대표단이 찾아와서 달마티아가 베네치아의 영토라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6,000 내지 7,000 황금 두카트를 주겠다고 제안했지만, 러요시는 달마티아 탈환 계획을 포기하기를 거부했다. 그는 베네치아를 협공하기 위해 오스트리아 공작 알브레히트 2세와 아퀼레이아 총대주교 니콜라우스와 동맹을 맺고, 크로아티아 영주들을 부추겨 달마티아 요새인 킬리스(Klis)를 공략했다.

1356년 여름, 러요시는 베네치아를 급습해 7월 27일 트레비소를 포위했다. 그는 가을에 돌아갔지만, 헝가리군은 포위를 이어갔다. 얼마 후 교황 인노첸시오 6세가 베네치아와 헝가리의 평화 협약을 중재했다. 교황은 러요시를 "교회의 기수"로 임명하면서, 교황령에서 자신에게 반란을 일으킨 영주들을 토벌해달라고 요청했다. 러요시는 러크피치 미클로시에게 분견대를 맡겨 교황을 돕게 한뒤, 자신은 1357년 7월 달마티아로 진군해 스플리트, 트로기르, 시베니크를 별다른 저항 없이 공략하고 여세를 몰아 자다르를 탈환했다. 1358년 2월 보스니아 통치자 트브르트코 1세(Tvrtko I)는 달마티아에 가지고 있는 모든 영토와 여러 섬들을 헝가리에게 넘기고 러요시를 주권자로 섬기겠다고 맹세했다. 뒤이어 라구사 공화국도 러요시의 종주권을 받아들였고, 달마티아의 여러 도시들은 매년 공물과 해군을 제공하며는 대가로 자치권과 무역의 자유를 인정받았다.

이렇듯 러요시가 주변 국가들을 상대로 적극적인 공세를 개시하던 와중인 1355년 12월 20일, 1346년부터 세르비아 제국차르를 칭하고 발칸 반도에 위세를 떨쳤던 스테판 우로시 4세 두샨이 급사했다. 뒤이어 차르에 오른 그의 아들 스테판 우로시 5세는 "강인한 왕"이라는 평판을 받으며 만인의 존경과 두려움을 샀던 부친과는 정반대의 인물이었다. 그는 외모가 훤칠하고 온화한 성품의 소유자였으나, 좋은 군인이 아니었고, 현명한 정치가도 아니었으며, 아버지가 애써 일궈낸 제국을 지켜야 한다는 사명감도 없었다. 일찍이 두샨에 의해 각지의 데스포티스로 세워졌던 신하들은 유약한 차르의 등극을 틈타 독자적인 행보를 보이기 시작했고, 세르비아는 붕괴 위기에 직면했다. 러요시는 이 때를 틈타 세르비아를 몰아붙이기로 하고, 1359년 세르비아를 쳐들어갔다. 스테판 우로시 5세가 전투를 회피하자, 그는 세르비아 북부의 여러 마을을 약탈한 뒤 귀환했다.

1360년경, 러요시는 헝가리 왕국에 거주하는 유대인을 가톨릭으로 개종시키기로 마음먹었다. 이에 거부한 자들은 강제 추방되었고, 그들의 부동산은 몰수되었다. 다만 추방된 유대인들은 개인 자산을 가지고 갈 수 있었고 대출금을 회수할 수 있었다. 1361년 8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4세와 오스트리아 공작 루돌프 4세는 러요시의 동맹자인 아퀼레이아 총대주교를 상대로 동맹을 맺었다. 헝가리 서쪽 국경에 강력한 연합이 결성되는 것을 염려한 러요시는 지난날 자신과 맞섰던 조반나 1세의 남편인 루이지 1세에게 형제 중 한 명을 부더로 보내달라고 요청한 뒤, 그 형제를 데리고 루돌프 4세와 총대주교간의 화해를 중재했다.

이후 카를 4세에게 사절을 보내 화해를 주선했지만, 황제는 러요시의 어머니를 창녀라고 모욕했다. 어머니가 모욕당한 것에 분노한 러요시는 군대를 총동원하여 트렌첸으로 진격했다. 그러나 동맹을 맺어뒀던 이들이 원군을 보내주지 않는데다 신성 로마 제국과 정면 대결하는 것은 무익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던 그는 카지미에시 3세의 중재에 따라 카를 4세와 평화 협상을 벌였다. 1363년 5월 8일, 양자는 우헤르스케흐라디슈테(Uherské Hradiště)에서 평화 협약을 맺고 화해했다.

1363년 3월 31일, 교황 우르바노 5세는 키프로스의 피에르 1세의 요청에 따라 지중해의 무슬림에 대한 십자군을 선포했다. 이때 우르바노 5세는 러요시에게 십자군에 동참할 것을 촉구하면서, 3년간 헝가리 교회 수입에서 십일조를 거둬들이는 권리를 승인했다. 하지만 러요시는 주변국과의 마찰이 심했기에 군대를 섣불리 보내지 못했다. 1364년 9월 키프로스의 피에르 1세가 크라쿠프에 방문해 러요시를 비롯한 12명의 유럽 군주들에게 십자군에 참여해 달라고 요청했다. 러요시는 원조를 약속했지만 이를 이행하지 못했다. 이후 유대인이 추방된 뒤 국가 경제가 악화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러요시는 1364년 유대인이 헝가리로 돌아오는 것을 허용하겠다는 칙령을 반포했다.

1365년 2월, 러요시는 테메슈바르에 군대를 집결시켰다. 그는 당초에 공물을 바치기를 거부하는 왈라키아 공국을 응징하려 했지만, 왈라키아 공작 블라디슬라프 1세가 복종 의사를 밝히자 방향을 바꿔 불가리아 쪽을 공략하기로 했다. 당시 불가리아 제2제국의 차르 이반 알렉산더르는 1355년 후계자로 정했던 미하일 아센 4세가 흑사병에 걸려 사망하자 막내 아들 이반 시슈만을 후계자로 지명했다. 이에 내심 자신이 후계자가 되리라 여겼던 또다른 아들 이반 스라치미르가 반발하여 영지로 삼고 있던 비딘에서 외교권을 자기 마음대로 행하고 중앙 정부의 지시를 제대로 따르지 않는 등 불만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러요시는 그런 그에게 비딘의 종주권을 자신에게 넘긴다면 불가리아의 왕으로 임명하겠다고 제안했다. 스라치미르가 거절하자, 러요시는 1365년 5월 1일 비딘을 침공해 6월 2일 함락시키고 스라치미르를 사로잡았다. 그는 즉시 스라치미르를 포함한 포로들이 가톨릭세례를 받도록 강요했다.

1366년 초, 동로마 제국 황제 요안니스 5세가 부더에 있던 러요시를 찾아와서 발칸 반도에 진출하고 있는 오스만 베이국을 물리쳐달라고 요청했다. 황제는 가톨릭과 정교회의 통합을 추진하겠다고 약속했고, 러요시는 원군을 보내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교황 우르바노 5세가 황제가 약속을 이행하기 전에 원군을 보내지 말라고 권고했고, 요안니스 5세가 정교회 성직자들의 강력한 반대로 인해 교회 통합을 이루지 못했기에 헝가리군이 투입되는 일은 없었다.

한편, 러요시는 왕국 내 이교도들을 가톨릭으로 개종시키는 데 사력을 다했다. 그의 치세 동안 쿠만인들의 개종을 이뤄냈고, 비딘을 공략한 뒤 정교회 신자인 불가리아인을 개종시키기 위해 프란치스코회 수사들을 그곳에 대거 파견했다. 여기에 더해 1366년 왕국 내 모든 세르비아인 사제를 가톨릭으로 개종시키고 세례를 다시 받게 하라는 칙령을 반포했다. 그는 어머니와 함께 수십 개의 새로운 수도원을 세웠는데, 특히 프란치스코회와 바오로회를 적극적으로 후원했다. 그는 1367년 페치(Pécs) 신학 대학교를 설립해 헝가리 성직자들을 양성하려 했다. 그러나 대학은 재정난으로 인해 제대로 운영되지 못하다가 1390년 문을 닫았다.

1368년, 왈라키아 공국의 블라디슬라프 1세가 헝가리를 상대로 반기를 든 뒤 이반 시슈만과 동맹을 맺고 비딘을 포위했다. 러요시는 이에 맞서 그 해 가을에 도나우 강 하류로 진군하면서 에르데이 보이보드 러크피치 미클로시에게 왈라키아를 침공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이들은 이알로미차 강 계곡을 행진하던 중 왈라키아인들의 습격을 받고 괴멸되었고, 미클로시는 가까스로 전장을 탈출했다. 이 소식을 접한 러요시는 본군을 이끌고 왈라키아로 쳐들어가 약탈과 파괴를 자행했고, 블라디슬라프 1세는 1369년 여름에 귀순했다. 이후 러요시는 이반 스트라치미르를 비딘의 통치자로 복위시켰고, 스트라치미르는 그 대가로 러요시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두 딸을 인질로 보냈다.

1360년대 후반부터 나병으로 의심되는 피부병을 앓기 시작한 러요시는 가톨릭에 더욱 깊이 빠졌다. 그는 매일 기도를 드리고 종교적 사색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1370년 11월 5일 카지미에시 3세가 사망한 뒤 11월 17일 폴란드 국왕으로 등극했다. 하지만 헝가리-크로아티아에 전력을 쏟고 싶었던 그는 폴란드 공주였던 어머니 엘즈비에타를 폴란드의 섭정으로 세운 뒤 헝가리로 돌아갔다. 이때 폴란드 왕관과 보석들, 그리고 카지미에시의 두 딸 안나와 야드비가가 헝가리로 이동했기에, 폴란드인은 자국이 헝가리의 속국이 되어버렸다며 불만을 품었다.

1371년 9월 26일, 오스만 베이군마리차강 전투에서 세르비아군을 궤멸시켰다. 이에 세르비아 영주들 중 한 명인 라자르 흐레벨랴노비치는 러요시에게 충성을 맹세하며 튀르크군에 맞설 병력을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교황 그레고리오 11세 역시 러요시에게 튀르크에 맞서 싸우라고 촉구했다. 그러면서도 밀라노 공작 베르나보 비스콘티(Bernabò Visconti)가 교황령을 위협하고 있으니 이를 격퇴하기 위해 지원군을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여기에 더해, 베네치아 공화국과 전쟁을 벌이고 있던 파도바 공국으로부터 원군을 보내달라는 요청이 들어왔다. 그는 어느 쪽을 먼저 도울 지를 고심한 끝에 러크피치 미클로시에게 파도바를 구원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베네치아군은 1373년 9월 23일 트레비소에서 헝가리군을 격파하고 미클로시를 포로로 잡았고, 러요시는 어쩔 수 없이 베네치아와 평화 협약을 체결했다.

1373년 가을, 폴란드 귀족들이 엘즈비에타의 통치에 집단 반발해 독립할 움직임을 보였다. 그는 크라쿠프로 가서 이들과 1년간 협상한 끝에 1374년 9월 17일 폴란드 귀족들이 왕에게 지불하는 세금을 대폭 줄이고 폴란드군을 외국에 보낼 시 보수를 약속했다. 그 대가로 귀족들로부터 자신의 딸들이 폴란드를 상속받는 것을 인정받았다. 그러나 피아스트 왕조의 일원이었던 그니에프코보 공작 브와디스와프가 폴란드 국왕을 자칭하면서 러요시에 맞섰다. 그는 브워츠와베크(Włocławek), 이노브로츠와프(Inowrocław), 즈워토리아(Złotoria) 등지를 빠르게 확보했다. 러요시는 즉각 군대를 이끌고 그를 공격했고, 브와디스와프는 지지자들에게 배신당하여 세력을 빠르게 상실하자 기사 울리히 폰 오스텐이 소유한 국경 도시 드레즈덴코로 피신했다. 이후 브와디스와프는 울리히와 호담공 필리프가 보낸 부르고뉴 공국 군대의 지원에 힘입어 러요시에 계속 저항했다.

1375년 5월, 왈라키아의 새로운 통치자 라두 1세가 불가리아 차르 이반 시슈만, 오스만 술탄국의 무라트 1세와 동맹을 맺고 헝가리에 대항했다. 그는 왈라키아로 군대를 파견해 왈라키아-불가리아 연합군을 격파하고 세베린 바나트를 공략했다. 그러나 1375년 여름에 왈라키아군이 에르데이로 쳐들어가 약탈을 자행했고, 이들과 함께 하던 튀르크군은 바나트를 철저히 약탈했다. 설상가상으로, 리투아니아군이 루테니아 왕국을 석권한 뒤 폴란드로 쳐들어와서 1376년 11월 크라쿠프에 거의 도달했다. 이에 폴란드인들은 크라쿠프에서 엘즈비에타를 상대로 폭동을 일으켰다. 이때 160여 명에 달하는 하인들이 살해당하자, 엘즈비에타는 헝가리로 도주했다. 브와디스와프 역시 공세를 이어가 여러 요새를 공략했다.

러요시는 일단 폴란드 문제부터 해결하기로 하고, 크라쿠프로 가서 폭도들을 처형하고 질서를 재정비한 뒤 브와디스와프를 몰아붙인 끝에 1377년 3월 브제시치 쿠야프스키(Brześć Kujawski)에서 브와디스와프에게 1만 플로린을 주고 헝가리의 펀논헐머에서 수도원장 직을 맡게 해주는 대가로 폴란드 왕위를 포기하게 했다. 이후 1377년 여름 루테니아로 친정해 리투아니아군을 격파하고 헤움과 벨츠를 공략했다. 이후 옛 루테니아 왕국 대부분 지역을 헝가리 왕국에 합병시켰다. 결국 라트노 공작 페도르, 포돌레 공작 알렉산더르와 보리스 등 리투아니아 공작들은 러요시의 패권을 인정했다.

1377년, 그동안 러요시를 주군으로 섬기던 보스니아의 트브르트코 1세가 왕으로 등극했다. 그가 이를 승인했는지는 기록이 미비해 불분명하다. 1378년 베네치아와 제노바가 전쟁을 벌이자, 러요시는 제노바를 지원했고 트로기르를 제노바 함대의 정규 기지로 내주었다. 1378년 9월 20일 교황 우르바노 6세에게 반기를 든 추기경들이 대립교황 클레멘스 7세를 세우면서 서방교회 대분열 시대가 개막했다. 그는 우르바노 6세를 합법적인 교황으로 인정하고 그를 위해 병력과 물자를 지원했다.

나폴리 여왕 조반나 1세가 클레멘스 7세를 지지하자, 우르바노 6세는 1380년 6월 17일 그녀를 파문하고 러요시의 궁정에 머물고 있던 두라초의 카를로를 나폴리의 합법적인 왕으로 인정했다. 카를로는 헝가리 왕위를 주장하지 않겠다고 약속해 러요시의 지원을 이끌어낸 뒤 남부 이탈리아로 쳐들어가 1년 안에 왕국 전역을 장악하고 1381년 8월 26일 조반나 1세의 항복을 받아낸 뒤 카를로 3세로서 나폴리 왕위에 올랐다. 한편, 러요시는 아메데오 6세의 중재를 받아 베네치아와 평화 협상을 벌인 끝에 1381년 8월 24일 사보이아 백국토리노에서 평화 협약을 맺었다. 베네치아는 달마티아를 포기하고 헝가리에 매년 7,000 플로린을 바치겠다고 약속했다. 또한 러요시는 테베의 성 바오로의 유해를 부더센틀린치(Budaszentlőrinc)에 있는 바오로 수도원으로 옮기도록 했다.

1382년 건강이 악화된 러요시는 폴란드 고위 성직자들과 영주들을 조욤(Zólyom 현재 슬로바키아 즈볼렌)에 소집한 뒤 딸 마리어와 마리어의 약혼자 지기스문트에게 충성을 맹세하게 했다. 1382년 9월 10일 너지솜버트에서 사망했고, 세케슈페헤르바르 대성당에 안장되었다.

4. 가족

4.1. 자손

4.2. 사위

5. 기타

부다페스트 영웅 광장(Hősök tere) 14인의 동상 위인 중 1명이다.

5.1. 게임에서


[1] 헝가리어 발음은 '언드라시', 이탈리아어 발음은 '안드레아'로 둘 다 같은 이름이다.[2] 드루게트 가문은 프랑스계로 대대로 트란스카르파티아운그바르 일대에서 영주 노릇을 했다.[3] 헝가리어 발음은 '로베르트', 이탈리아어 발음은 '로베르토'로 둘 다 같은 이름이다.[4] 현재의 슬로바키아 스피슈주.[5] 조반나 1세의 여동생 마리아의 남편이기도 했다.[6] 비타우타스의 아버지.[7] 딸 야드비가와 결혼하는 브와디스와프 2세의 아버지.[8] 독일왕 알브레히트 1세의 4남. 이후 합스부르크 가문의 독일왕,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들은 모두 이 사람의 후손이다.[9] 보스니아어 발음은 '엘리자베타', 헝가리어 발음은 '에르제베트'로 둘 다 같은 이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