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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10 01:21:24

에스테르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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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ztergom

1. 개요2. 언어 표기3. 역사4. 관광

1. 개요

헝가리 가톨릭의 중심지인 도시.

2. 언어 표기

헝가리어 Esztergom
슬로바키아어 Ostrihom[1]
크로아티아어 Ostrogon[2]
독일어 Gran[3]
튀르키예어 Estergon, استر‌غون(오스만어)[4] 또는 Ustergon, اوستر‌غون(오스만어)[5]

3. 역사

헝가리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로, 960년 마자르족의 족장 게저(Géza)가 이곳을 자신의 거처로 삼았으며 아들 이슈트반 1세는 에스테르곰에서 태어나 교황으로부터 헝가리 왕국국왕으로 승인받았다. 아르파드 왕조 시대에는 헝가리 왕국의 수도로서 도나우강을 낀 국제도시로 번성했으나 몽골제국의 침공으로 괴멸적인 피해를 입었다. 이후 벨러 4세부더로 수도를 옮기면서 정치적인 입지는 약해졌으나 여전히 종교적인 중심지로서의 입지를 공고했다.

14~15세기에 카로이 로베르트, 러요시 1세, 지그몬드, 마차시 1세 등의 치세에도 에스테르곰은 여전히 중요한 도시였으나 1526년 모하치 전투에서 오스만 제국에게 대패하면서 회복하기 힘든 피해를 입었다. 러요시 2세 전사 후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가문페르디난트 1세에르데이의 서포여이 야노시가 에스테르곰을 두고 서로 싸웠고 때로는 오스만 제국군까지 이 도시를 공격했다. 결국 1543년 쉴레이만 1세의 친정때 함락당해 150년 동안 오스만 헝가리에 속하게 되었다.

제2차 빈 공방전에서 오스만 제국군이 패퇴하면서 대튀르크 전쟁이 발발했고 1683년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해방되었다. 1699년 카를로비츠 조약으로 합스부르크 제국으로의 반환이 결정되면서 도시의 재건을 위해 헝가리인, 슬로바키아인, 독일인이 정착했고 옛 모습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19세기에 들어서 다시 발전이 정체되었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시대에는 그저 그런 시골 마을에 불과했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트리아농 조약으로 헝가리가 많은 영토를 잃고 나서야 다시금 중요성이 올라갔고 이때부터 많은 교육기관과 문화시설이 들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4. 관광

도나우강을 따라 여행하는 도나우벤드[6]의 중심지 가운데 하나로 비셰그라드와 묶어서 둘러보기 좋다.

헝가리 가톨릭의 중심지답게 에스테르곰 대성당이 가장 유명하며, 에스테르곰 왕궁도 볼만하다.

도나우강 건너편에는 슬로바키아슈투로보(Štúrovo)[7]가 있다. 프란츠 요제프 1세엘리자베트 폰 비텔스바흐의 막내딸 마리 발레리 마틸데 아말리에의 이름을 딴 다리를 건너서 갈 수 있다.

[1] 오스트리홈[2] 오스트르곤[3] 그란[4] 에스테르곤[5] 우스테르곤[6] 헝가리어로는 두녀커녀르(Dunakanyar)[7] 헝가리어로는 파르카니(Párkány). 원래 슬로바키아어 이름은 파르칸(Parkan)이었으나 1948년 슬로바키아어의 아버지 루도비트 슈투르의 이름을 따 현재 이름으로 바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