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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70125><colcolor=#ffffff> | |||
출생 | 1494년 11월 6일 | ||
오스만 제국 트라브존 (現 튀르키예 흑해주 트라브존도 트라브존) | |||
사망 | 1566년 9월 5일 (향년 71세) | ||
합스부르크 제국 헝가리 왕국 시게트바르 (現 헝가리 버러녀주 시게트바르구) | |||
묘소 | 이스탄불 쉴레이마니예 모스크 쉴레이만 대제 영묘[2] | ||
재위기간 | 오스만 파디샤[3] | ||
1520년 9월 22일 ~ 1566년 9월 5일 | |||
서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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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친 | 하프사 술탄 (출신: 크림 칸국 / 불명[4]) | ||
형제 자매 | 셰자데 오르한, 셰자데 무사, 셰자데 코르쿠트, 위베이스 파샤[5], 하티제 술탄, 베이한 술탄, 파트마 술탄, 샤 술탄, 하피제 술탄[6] | ||
반려[7] | 하세키 휘렘 술탄 (1533년 결혼[8] / 1558년 사별) (출신: 폴란드 왕국 - 우크라이나) | ||
후궁 | 마히데브란 (출신: 체르케스 / 알바니아 / 몬테네그로) | ||
귈펨 하툰 (출신: 폴란드 왕국 - 폴란드인 / 알바니아 / 이탈리아[9]) | |||
자녀 | 셰자데 마흐무트, 셰자데 무스타파, 셰자데 무라트, 셰자데 메흐메트, 미흐리마 술탄, 셰자데 압둘라, 라지예 술탄, 셀림 2세, 셰자데 바예지트, 셰자데 지한기르 | ||
종교 | 이슬람 (수니파) | ||
이명 | 튀르키예: 입법자 (Kanuni) | ||
유럽: 장엄제 (The Magnificent)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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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스만 제국의 제10대 술탄이자 4대 파디샤로 제국의 최전성기를 이룩했다. 한국 등 동아시아권에서도 대제(大帝)의 격으로 높여 부른다. 즉, 쉴레이만 대제. 쉴레이만이라는 이름은 그 유명한 이스라엘의 왕 솔로몬의 튀르키예어 표기이다.[12]로도스 섬과 헝가리 왕국을 정복하여 서유럽 국가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고, 종교개혁의 혼란기의 와중에 서유럽을 제패한 카를 5세와 라이벌로 대립하였다. 동시에 해군을 양성하였고 해적 출신의 하이르 앗 딘을 제독으로 고용, 프레베자 해전에서 베네치아 해군을 격파하여 향후 40여 년간 오스만 제국이 지중해의 패권을 쥐게 되었다. 다만 빈 공방전과 몰타 공방전에서는 패배하여 유럽 가톨릭 세력을 결딴내는 데에는 실패하였다.
또한 그는 정복군주임에 동시에 문무 다방면에 조예가 깊고 예술을 애호하는 등 명군주의 면모를 모두 갖춘 술탄으로, 심지어 적인 합스부르크 가문의 대사조차도 "도리에 어긋나는 모든 것들을 맹렬히 공격하고 무너뜨린 인물"이라며 그를 찬양했다. 그리고 "작렬하는 천둥과 번개의 모습과도 같다."고 비유했다.[13]
2. 생애
2.1. 즉위 이전
명군으로 평가받는 셀림 1세의 아들로, 7살에 교육받기를 시작해 신앙심과 학식 수준이 높은 호자’hoca’가 교육을 해주었다. 11살 때 할례 의식을 치르고 어머니 곁을 떠나고 랄라’lala’ 라는 교육 감독관에게 교육받았다. 이때 아랍어와 페르시아어를 배우고 15세에 아나돌루 에얄레트 산하 마니사의 총독(Sancakbeyi)을 지냈으며 일찌감치 차기 술탄으로 인정받았다.17살땐 셀림 1세에게 코스탄티니예 총독 ‘카이마캄'(kaymakam)으로 임명되었고, 술탄이 되기 전에는 에게 해의 사루칸 총독으로 지냈다. 총독 시절 그는 치안을 바로잡고 ‘카눈나메kanunname(오스만 세속 법전)’을 제정한다. 여기서 그는 즉위 전 통치경험을 얻었고 부황이 사망하자 26세라는 젊은 나이로 별다른 저항 없이 술탄의 제위에 올랐는데, 그 밖의 친족들은 셀림이 제위에 오르는 과정에서 모조리 숙청당했기 때문이다.[14][15]
2.2. 치세
쉴레이만은 제국의 10대 황제였는데, 무함마드의 동료도 10명이었던 관계로 무슬림들에게 행운의 숫자로 여겨졌다.2.2.1. 시리아의 반란
그의 집권은 매우 안정적으로 이루어졌으나 시리아에서 변고가 하나 발생하였다. 과거 셀림 1세의 맘루크 왕조 정복 때 오스만에 항복한 태수 잔비르디 알 가잘리는 원정에 공을 세워, 정복 후 시리아의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그는 비록 오스만의 신하가 되었으나 마음으로는 충성하지 않았고, 황제가 쉴레이만으로 바뀌었다는 소식을 접하자 술탄을 자칭하고 금요 예배에서 오스만 황제의 이름으로 기도하지 못하게 하고 시리아에서 오스만 관료와 군대를 몰아내고 주민들에게 오스만식 의복을 입는 것을 금했다. 그리고는 군대를 일으켜 다마스쿠스 요새를 점거하고 베이루트와 트리폴리를 점령했다. 하지만 정작 반란에 동참할 거라고 기대했던 이집트[16]에서 아무런 동요도 없었던데다, 사파비 제국의 황제 이스마일 1세에게 도움을 청했지만 거절당했다.어쨌든 일단 군사를 일으킨 잔비르디 알 가잘리는 알레포 공격에 나섰지만 보름 동안 공격했음에도 이렇다할 소득을 거두지 못하고 철수했고, 이윽고 쉴레이만이 파견한 진압군과 전투를 벌이다 전사했다. 후임 시리아 총독으로는 예니체리 지휘관 출신[17]인 아야스 메메드 파샤가 임명되었다.
2.2.2. 부황의 정복 사업 계승
이미 1세기 전에 증조부이자 정복군주였던 메흐메트 2세가 동로마 제국을 멸망시키고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수도를 옮겨 제국을 반석 위에 올려놓긴 했지만, 쉴레이만 1세는 제국의 영역이 여전히 성에 차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는 재위하자마자 메흐메트 2세가 못 다한 정복 사업을 완성하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즉위 초 10개월간 꾸준히 군비를 증강했다.
2.2.2.1. 벨그라드 함락
즉위 10개월이 지나고, 서유럽 정복의 전초전으로 벨그라드 공략에 나섰다. 현재 세르비아의 수도 베오그라드인 벨그라드[18]는 당시 헝가리 왕국의 영토로 헝가리어인 난도르페헤르바르(Nándorfehérvár)라 불렸으며, 오스만 제국과 바로 접하고 있는 헝가리 남부의 여러 요새들 가운데 가장 중요하고 큰 곳이었다. 당시 벨그라드를 장악한 헝가리는 오스만 제국의 유럽 진출에 있어 최대의 걸림돌이었다. 증조부 메흐메트 2세가 대패를 당하고 본인도 후녀디 야노시에게 전사할 뻔한 곳이었다.1521년 2월 6일에 출정식을 거행한 쉴레이만은 1520년 내내 준비한 10만의 군대를 편성해 들이쳤으며, 벨그라드의 헝가리군도 격렬히 항전[19]했지만 채 한달을 버티지 못하고 오스만의 깃발 아래 점령당했다. 성 내부의 세르비아인이 가톨릭이던 헝가리인과의 분쟁 끝에 오스만 군대에 성문을 열어준 것이다.[20] 이후 헝가리인은 몰살당했고 세르비아인들은 코스탄티니예의 페트라 지구로 이주되었다.[21] 쉴레이만은 시내의 성당에서 금요 예배를 드렸다.
2.2.2.2. 로도스 공방전
왕 중의 왕, 군주 중의 군주 동로마와 트레비존드의 가장 존귀한 황제, 페르시아와 아라비아, 시리아, 이집트의 강력한 제왕, 유럽과 아시아의 최고 지배자, 메카와 알레포의 통치자, 예루살렘의 왕, 모든 바다의 지배자인 술탄 쉴레이만이 로도스 섬의 구호 기사단장 필리프 드릴라당에게 인사를 전하노라.
로도스의 신임 기사단장이 된 것을 축하한다. 섬을 부강하게 만들어 전임자들보다 더 큰 영예를 얻을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다. 짐도 그대의 호의를 기대하는 바이다. 그렇게 하면 그대는 짐의 소중한 벗이 되어 짐과 더불어 환희를 누리게 될 것이다. 짐은 페르시아, 예루살렘, 아라비아, 이집트를 정복한 부황의 뒤를 이어 지난 가을에 난공불락의 요새 도시인 벨그라드를 정복했노라. 그후 이교도들을 공격하자 그들은 감히 맞설 엄두를 내지 못하였으므로 짐은 방비가 잘된 다수의 도시들을 거저 얻다시피 하고 그곳 주민들을 대부분 불태우거나 칼로 베어 죽이고 나머지는 노예로 만들었노라. 그런 다음 승리를 거둔 짐의 군대는 겨울 숙영지로 보내고 짐은 콘스탄티노플의 궁정으로 개선하려는 바다.
1521년 쉴레이만 대제가 신임 구호기사단장 필리프 빌리에 드 릴라당에게 보낸 사실상의 선전포고문.
로도스의 신임 기사단장이 된 것을 축하한다. 섬을 부강하게 만들어 전임자들보다 더 큰 영예를 얻을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다. 짐도 그대의 호의를 기대하는 바이다. 그렇게 하면 그대는 짐의 소중한 벗이 되어 짐과 더불어 환희를 누리게 될 것이다. 짐은 페르시아, 예루살렘, 아라비아, 이집트를 정복한 부황의 뒤를 이어 지난 가을에 난공불락의 요새 도시인 벨그라드를 정복했노라. 그후 이교도들을 공격하자 그들은 감히 맞설 엄두를 내지 못하였으므로 짐은 방비가 잘된 다수의 도시들을 거저 얻다시피 하고 그곳 주민들을 대부분 불태우거나 칼로 베어 죽이고 나머지는 노예로 만들었노라. 그런 다음 승리를 거둔 짐의 군대는 겨울 숙영지로 보내고 짐은 콘스탄티노플의 궁정으로 개선하려는 바다.
1521년 쉴레이만 대제가 신임 구호기사단장 필리프 빌리에 드 릴라당에게 보낸 사실상의 선전포고문.
그리고 1년이 지나자 이번엔 에게 해의 요충지인 로도스 섬을 공격했다. 이 또한 부황이 공략하려다 미처 이루지 못하고 사망한 곳으로, 성 요한 구호기사단이 긴 세월을 장악하며 요새화시킨 상태였다. 구호기사단은 해상 교역의 요충지인 이곳에서 해적질을 벌이며 오스만 제국이 아라비아 반도와 교류하는 것을 번번이 차단하고는 했다. 쉴레이만은 반년에 걸친 무자비한 공격 끝에, 결국 큰 피해를 기록하면서까지 1522년 이 난공불락의 섬을 정복했다. 이제 오스만 제국이 아라비아로 세력을 뻗는 것에 저항할 세력은 없었다.
이후 로도스 섬에서 쫓겨난 성 요한 구호기사단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의 아량으로 몰타 섬에 이주해 정착했고 거기서도 해적질을 벌이며 오스만 제국의 속을 썩인다.
1523년 6월에는 이브라힘 파샤가 대재상으로 임명되었다.
2.2.3. 헝가리 정복
부황의 숙원을 이루긴 했지만 이 정도는 쉴레이만의 성에 차지 않았다. 로도스를 정복한 이후 쉴레이만은 동유럽을 장악하는데 늘 거슬렸던 헝가리로 눈을 돌렸다. 헝가리는 증조부 메흐메트 2세 때부터 이미 사사건건 발칸 반도의 지배권을 놓고 다투던 앙숙이었다. 왈라키아 공국을 정복할 당시에도 헝가리는 성가시게 개입했다. 여기에 대해서는 후녀디 야노시 항목 참조. 결국 쉴레이만은 내친 김에 헝가리 본토를 정복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1526년 4월 21일, 술탄의 군대가 마침내 서쪽으로 움직였다. 쉴레이만은 드라바 강을 도하하기 위해 놓은 다리를 불살라 헝가리 정복의 의지를 다졌다. 한편, 이 소식을 접한 젊은 헝가리-크로아티아 국왕 러요시 2세[22]는 2만의 군대를 이끌고 도나우 강변에 배수진을 쳤다. 헝가리군은 국가의 존망을 걸고 오스만에게 결사적으로 맞섰던 것이다.[23]
그러나 긴 시간을 두고 헝가리 공략에 매진해온 쉴레이만의 군대는 경이적으로 활약했다. 모하치 전투에서 헝가리군은 문자 그대로 개박살났으며[24] 러요시 2세는 간신히 목숨을 건져 도망쳤지만 그 와중에 도나우 강에 빠져 죽었다. 헝가리 영내로 진주한 오스만군은 살육을 벌였고, 헝가리 왕국은 멸망했다.[25]
2.2.4. 제1차 빈 공방전
헝가리가 무너졌다는 소식을 듣고 유럽은 충격에 빠졌다. 당시 서유럽은 이탈리아 반도를 둘러싼 카를 5세와 프랑스 왕국간의 분쟁, 종교 개혁, 그리고 독일에서의 농민 반란으로 한창 혼란에 빠진 상태였다. 무엇보다 이제 코 앞에 강대한 이슬람 제국을 맞닥뜨린 오스트리아의 입장은 난처했다.한편 모하치에서의 대패로 국왕이 전사한 헝가리에는 다음 국왕으로 누구를 선출할지를 두고 혼란이 벌어졌다. 모하치에서 전사한 러요시 2세의 나이는 고작 20세였고 결혼은 하긴 했지만 후계를 이을 자식이 없었는데[26] 어린 시절 막시밀리안 1세의 궁정에서 자라 친합스부르크파였던 러요시는 자신이 후사 없이 죽으면 헝가리 왕위를 처남이자 매형[27]인 오스트리아 대공 페르디난트에게 넘긴다는 유언장을 남기고 유언장을 작성한 직후 전장에 나섰다가 죽어버렸다.
왕이 갑작스럽게 죽어버리자 이제 누구를 헝가리 왕으로 세울 것인가를 놓고 헝가리 귀족들은 둘로 분열되었다. 친합스부르크파 귀족들은 유언장을 근거로 당연히 페르디난트를 왕으로 추대하여 이슬람 세력에 맞서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 반합스부르크파 귀족들은 헝가리 동부 에르데이 지역의 유력 귀족인 서포여이 야노시(Szapolyai János 1487?~1540)를 왕으로 추대할 것을 주장하였다. 오랜 대립 끝에 쉴레이만의 지원을 받은 서포여이 야노시가 야노시 1세라는 이름으로 헝가리 국왕으로 즉위했고 이에 반발한 페르디난트[28]는 군대를 일으켜 헝가리를 침공해 수도 부더를 장악하고 서포여이를 헝가리 왕위에서 쫓아내 버렸다.
부더에서 쫓겨난 야노시 1세는 오스만 제국에 신종할 것을 조건으로 군대를 일으켜 페르디난트를 몰아내 달라고 쉴레이만에게 요청했고 모하치에 헝가리군을 쓸어버리면서 오스만 제국군의 강력함을 입증해보인 쉴레이만 1세는 유럽 제국과의 일전도 해볼 만하다고 생각했다. 당시 유럽에는 스페인과 이탈리아 남부 및 저지대 그리고 신대륙과 필리핀을 아우르는 강대한 합스부르크 왕가의 카를 5세가 버티고 있었다. 야노시의 요청을 받아들인 쉴레이만 1세는 다시 수년의 시간을 들여 오스트리아 공략에 매진했다. 그리고 마침내, 1529년 5월 10일에 합스부르크 왕가의 심장인 빈을 향해 최소 12만으로 추산되는 대군을 이끌고 거국적으로 출병했다. 다급해진 카를 5세도 스페인 등지에서 2만 3천의 군사를 징발해 빈에 투입했다.
그러나 빈을 향해 출정한 1529년의 봄과 여름은 그해따라 유난히 비가 많이 온 시절이었다. 계속해서 폭우가 쏟아지면서 상당수의 대포와 머스킷 등 화약무기가 물에 젖어 못 쓰게 되면서 행군 도중에 버리고 갔고 물자 수송을 위해 제국 동쪽에서 공수해 온 수만 마리의 낙타는 기후에 적응을 못해 대다수가 죽어버렸다. 또 폭우로 인해 발생한 홍수로 인해 물자 역시 상당수를 잃어버렸다. 오스만과 헝가리의 경계인 도나우 강까지 행군하는 동안 굶주림과 전염병으로 신음하는 오스만 병사들이 가득했다.
그럼에도 쉴레이만은 빈 공략을 포기하지 않았다. 8월 갖은 고생 끝에 헝가리에 도착한 쉴레이만은 신종할 것을 맹세한 야노시와 함께 헝가리 공략에 나섰고 수도 부더를 비롯해 3년 전 점령했다 철수한 헝가리의 수많은 도시들이 다시 오스만의 수중에 떨어졌다. 9월 말 쉴레이만은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에 도착했고 곧바로 도시를 포위하였다. 이른바 제1차 빈 공방전이었다. 페르디난트는 프라하로 물러나 형의 구원군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고 동방의 이교도가 마침내 유럽 한복판까지 밀고 들어왔다는 사실에 유럽인들은 긴장했다. 자칫하면 제2의 콘스탄티노폴리스 꼴이 날지도 몰랐다. 마찬가지로 쉴레이만 1세에게 있어서도 빈의 점령은 증조부 메흐메트 2세 못잖은 위업이 될 것이었다.
그러나 빈은 함락되지 않았다. 게다가 여러가지 악재가 겹쳐 쉴레이만의 군대는 난항을 겪었다. 땅굴을 파보기도 하고 포격을 퍼붓기도 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제풀에 지친 술탄의 군대는 포위 1개월만에 공성의 무리를 느끼고 퇴각했다. 훗날을 기약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빈 공략의 실패는 쉴레이만 1세가 결사적으로 시도했음에도 끝내 이루지 못한 매우 드문 사례 중 하나이며[29], 이는 유럽의 운명을 바꿔놓았다. 결국 그는 헝가리의 지배로 만족해야 했다. 이상의 자세한 것은 제1차 빈 공방전 항목 참조.
2.2.5. 헝가리 문제
1530년 페르디난트 1세는 오스만의 빈 포위 실패 이후 반격에 나섰으나 오스만의 선방으로 실패로 돌아갔고 이에 대한 반격으로 1532년 4월 25일, 쉴레이만이 이끄는 10만 대군은 빈을 향해 재차 북진하였다. 페르디난트 1세는 자신의 헝가리 국왕 즉위를 인정하는 대가로 무려 10만 두카트를 제시했으나 쉴레이만은 단칼에 거절하였고,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에스파냐의 국왕은 오래 전부터 터키인들과 겨루고 싶다고 말해왔다. 신의 은총으로 짐은 군대를 이끌고 그를 만나러 가노니, 자신이 생각하기에 스스로 크다고 여기면 전쟁터에서 나를 기다리고, 그러면 신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만일 그가 나를 만나고 싶어하지 않는다면 나의 제국으로 조공을 보내도록 하라.
그러나 호기롭게 출발한 2차 침공에서도 상황은 녹록지 않았다. 지난 공성에서 교훈을 얻은 카를 5세와 페르디난트 1세 모두 오스만의 침공에 대비해 단단히 방어태세를 갖춘 상황이었던 것이다. 빈으로 진격하던 도중 술탄의 군대는 헝가리의 작은 도시 쾨세그에서 크로아티아인 수비대장 니콜라 유리시치가 지휘하는 수비대의 결사적인 저항에 발목이 붙잡혔고 빈에는 카를 본인이 지휘하는 8만의 대군이 모여 있었으며 1차 빈 포위 때와 마찬가지로 궂은 날씨와 길어진 보급선으로 인해 오스만군은 고전하던 중이었다. 결국 쉴레이만은 2차 침공도 포기하고 수도 코스탄티니예로 돌아갔다.
2차 침공의 실패 이후 합스부르크를 쓰러뜨릴 수 없다고 생각한 쉴레이만은 결국 1533년 합스부르크 왕가와 평화조약을 맺으면서 페르디난트가 야노시 1세를 헝가리 국왕으로 인정하는 대신 페르디난트가 점유하고 있던 서부와 북부 헝가리 및 크로아티아 왕국에 대한 합스부르크의 점유를 인정했다. 하지만 평화조약을 맺은 이후로도 페르디난트는 계속해서 헝가리 전역 수복을 노렸고 결국 1538년 압력을 받은 야노시 1세는 후사 없이 죽을 경우 헝가리 왕위를 페르디난트에게 넘기기로 합의했다. 야노시는 그 당시까지 자식이 있기는 커녕 결혼도 하지 않은 상태였고 페르디난트는 얼씨구나 하고 좋아하고 있었는데...
페르디난트와 조약을 맺은 그 다음해 야노시 1세는 폴란드 국왕 지그문트 1세의 장녀 이자벨라와 결혼했고, 결혼을 한 바로 그 다음해에는 아들까지 보게 되었다! 그런데 아들이 태어난 지 9일 만에 야노시는 세상을 떠나버렸다!! 야노시 1세의 지지자들은 야노시의 아들인 이 갓난아기 서포여이 야노시 지그몬드를 헝가리 국왕 야노시 2세로 추대했으나 아직 아기여서 정식으로 대관식을 치르지 못했다. 이러다간 페르디난트에게 헝가리를 뺏겨버릴 것을 우려한 쉴레이만은 1541년 선왕 야노시 1세의 주군이자 야노시 2세의 보호자라는 명분으로 전적으로 헝가리를 침공해 부더를 비롯한 중부 지역은 직할 영토로 합병했고 에르데이를 위시로 한 동부 지역은 오스만의 신하국으로서 야노시 1세의 미망인 이자벨라와 야노시 2세가 공동으로 다스릴 수 있게 해주었다.
오스만이 재빨리 헝가리를 세력권으로 편입하자 눈뜨고 코베인 페르디난트는 헝가리를 침공했으나 실패했고 3년 후인 1544년 다시 침공했으나 역시 실패로 끝났다. 결국 1547년 오스만과 합스부르크는 아드리아노플에서 5년 기한의 휴전협정을 체결하면서 합스부르크는 나머지 헝가리 지역에 대한 영유권을 포기하고 오스만에게 매년 연공을 바치는 것으로 합의를 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쉴레이만은 카를 5세 및 페르디난트에게 제대로 굴욕을 주게 되는데 진정한 로마 제국의 황제는 자신 뿐이라는 이유로 엄연한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였던 카를 5세는 그저 스페인 국왕이라는 직함으로, 차기 황위 계승이 유력한 페르디난트는 독일왕이라는 직함으로 협정을 체결하게 한 것이다. 그러면 쉴레이만 본인은? 쉴레이만 본인은 로마 황제라는 직함으로 협정을 체결했다.
한편 헝가리 동부 지역의 왕으로 임명된 야노시 2세를 대신해 섭정이 된 주교 프라테르 죄르지는 오스만의 태세에 위협을 느끼고 페르디난트에게 힘을 실어주기로 결정해 1549년 자신이 섭정으로 있는 헝가리 동부 지역을 페르디난트에게 넘겨주기로 합의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죄르지는 정식 국왕인 야노시 2세와 야노시의 모후 이자벨라 야기엘론카와의 협의 없이 독단으로 왕국을 넘겨버렸고 이에 분노한 야노시의 모후는 죄르지와 내전을 벌였다. 그 와중에 합의에 따라 페르디난트의 군대가 동헝가리로 쳐들어왔고 내전에서 죄르지가 승기를 잡자 버티지 못한 야노시 2세와 이자벨라는 1551년 동헝가리 왕위를 포기하고 이사벨라의 친정인 폴란드로 망명했다. 그리고 반역을 주도한 죄르지는 페르디난트에게 암살당하며 토사구팽 당했다(...)
한편 죄르지의 배신에 격노한 쉴레이만은 1552년 동헝가리를 침공해 1555년까지 왕국의 대부분 지역에서 합스부르크군을 몰아냈고 폴란드로 망명한 야노시 2세를 다시 동헝가리 왕 및 에르데이 공작으로 복위시켰다.[30] 이렇게 해서 1699년 카를로비츠 조약으로 헝가리 전역을 상실할 때까지 오스만은 헝가리를 자신들의 세력권으로 삼으며 수시때때로 합스부르크 제국을 위협하였다.
2.2.6. 지중해 패권 차지
1530년 이탈리아 화가 티치아노의 그림. 왼쪽의 인물은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다.
하늘이 이토록 이슬람을 향해 눈에 띄게 환히 비춰주고 있는데, 이슬람의 위대함에 어찌 그 한계가 있겠는가? 이제 땅과 바다가 모두 술탄에게 굴복하였다. 모넴바시아와 나브플리오를 내어주고 암울해진 베네치아는 키프로스 부족들을 해방시켜 주었다. 도처에서 신성 로마 제국의 적을 찾으려 애쓰는 프랑스는 오스만 측에 은밀히 군사 지원을 해주었고, 부다에서는 오스만 깃발이 휘날렸다.
비록 육지에서는 합스부르크의 아성을 꺾을 수는 없었지만 여전히 오스만 제국은 강대했고 쉴레이만 1세의 야심은 강했다. 오스만과 마찬가지로 합스부르크 역시 오스만 제국의 영지를 어찌 할 입장은 아니었고, 이미 동유럽의 지배권은 안정되었다.
다음으로 쉴레이만이 노린 것은 지중해의 패권이었다. 프랑스와 연합하여 이탈리아의 합스부르크 세력을 남북으로 협공하는 것이 오스만 제국의 최종 목적이었다. 당시 지중해는 베네치아가 에게 해의 섬들을 차지해 해상 제국을 영위하고 있었고 합스부르크 왕가 역시 밀라노 공국이나 트리에스테 등을 기반으로 지중해에 영향력을 갖고 있었다. 카를 5세는 유럽과 아메리카는 물론이고 외가의 정복 사업을 이어받아 북아프리카에도 발을 뻗치고 있었다. 이는 이집트를 넘어 북아프리카를 장악하려는 오스만 제국에 있어서는 도전이자 응전이었다.
그러나 1535년 튀니지에서 술탄의 군대는 합스부르크 카를 5세의 원정군과 맞붙었다가 깨졌다. 이 패배로 튀니지 일부가 합스부르크 관할로 넘어가 버렸지만 쉴레이만은 이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고, 카푸단 파샤 (해군 제독) 하이르 앗 딘 바르바로사를 중용하여 대함대를 건조하며 때를 기다렸다.
1538년, 교황령과 베네치아 공화국을 주축으로 결성된 신성 동맹과 오스만 제국 함대의 일전이 있었다. 지중해의 패권을 다투기 위한 건곤일척의 승부였다. 이 프레베자 해전에서 오스만은 대승을 거두고 마침내 지중해 패권을 얻는데 성공한다. 비록 튀니지는 쉴레이만이 죽을 때까지도 스페인 땅이었지만, 아무튼 여세를 몰아 오스만의 군대는 북아프리카로 계속 진출해 알제리까지 영역을 확대했다. 이제 오스만 제국의 영역은 빈 포위의 실패로 체념한 서유럽을 제외하면 예전 로마 제국과 거의 일치하게 되었다.
1543년, 프랑스군과 함께 사보이아 공국령 니차를 포위한 오스만 해군
지중해의 무법자가 된 하이르 앗 딘은 1540년대에 서지중해를 마음껏 누비며 기독교 해안을 약탈했고, 이탈리아 도시들은 감시탑을 세우거나 그에게 바칠 배상금을 준비하기에 바빴다. 마요르카, 사르데냐, 이스키아 섬 등은 단골 약탈 대상이었고 합스부르크측 제독 안드레아 도리아도 감히 그에 맞서지 못하여 회피했다. 하이르 앗 딘이 은퇴한 후에도 그의 제자인 투르굿 (드라구트)과 시난 레이스가 여전히 서지중해를 공포에 몰아 넣았고, 1555년 트리폴리에 이어 1560년에는 제르바 섬을 수복하며 합스부르크 세력을 바르바리 해안에서 몰아냈다. 마지막 남은 주요 거점인 튀니스도 1574년에 오스만 령으로 돌아왔다.
2.2.7. 동방 원정
1530년대 중반부터 쉴레이만 1세는 눈을 동쪽으로 돌렸다. 오스만의 대군은 동방의 앙숙인 사파비 왕조의 페르시아를 공격하여 오랜 시간 교전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술탄의 군대는 당시 타흐마스프 1세의 치세에 놓여 있었던 페르시아로부터 이라크와 아르메니아를 빼앗는 성과를 거두었으며, 특히 유서 깊은 도시 바그다드를 획득하는 영예를 얻었다[31]. 또한 남쪽으로도 원정하여 아라비아 반도의 예멘, 아덴까지도 영역을 넓혔다. 아랍 세계가 오스만 제국의 깃발 아래 통합된 것이다.
그러나 1555년까지 이어진 3차례의 원정에서도 끝내 사파비 왕조를 복속시키는 것에는 실패했다.[32] 결국 1555년 오스만 제국과 페르시아 사이에 평화 협정이 맺어졌고 동쪽의 국경은 안정되었다.
그리고 1530년대 경. 인도 구자라트 지역의 이슬람 왕국이 포르투갈을 몰아내기 위한 구원 병력을 요청하자 쉴레이만은 수십문의 중포를 동반한 1만의 군대를 포르투갈 왕국이 당시 점유하고 있던 디우로 원정을 보낸다. 그러나 하필 군대가 아직 인도양에 있을 때 이슬람 왕국에서 정변이 일어나 친 포르투갈 정권이 들어서는 바람에 보급을 받지 못한 오스만 군은 디우를 함락시키기 일보 직전에 포기하고 돌아가야 했다.
2.2.8. 뛰어난 내치
쉴레이만 1세는 헝가리 점령, 제1차 빈 공방전, 프레베자 해전 등을 통해 정복 군주로서의 인상이 강하지만 실제로는 내치에 있어서도 대단한 군주였다. 괜히 입법자라는 별명이 붙은 것이 아니다. 그는 후대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그러했듯이 법을 정비하는 것에도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군하총회, 이집트 법전, 쉴레이만 법전 등이 그의 손에서 짜여졌다. 특히 군하총회는 법률로서 오스만 제국 내부의 분란을 진정시키는데 큰 기여를 했다.
게다가 그는 전통적인 이슬람 법인 샤리아가 미치지 못하는 규율까지도 '카눈'으로 정비시켰다.[33] 사유재산도 보장했으며 노예라 하더라도 쓸만한 인재는 관료로 올렸다.[34]
그는 예술과 건축에도 관심을 표명했다. 수많은 모스크가 그의 치세에 건립되었으며 회화와 공예, 문학 등 다방면의 예술이 발전했다. 예술인들은 술탄의 후원 하에 아낌없는 지원을 받았으며 국가 엘리트의 지위를 누렸다. 심지어 그 소문을 듣고 멀리 유럽에서까지 찾아올 정도였다. 쉴레이만 1세의 치세에서야 오스만의 문화는 비로소 페르시아의 영향을 벗어나 독자적인 틀을 갖출 수 있었다.
게다가 쉴레이만 본인도 문학적인 재능이 있었다. 그는 무히비(Muhibbi)[35]라는 필명을 쓰면서 다양한 작품을 만들었으며, 튀르크어와 페르시아어를 모두 구사하며 많은 시를 지었다. 그리고 재임 내내, 심지어 원정 와중에도 틈틈이 일기를 써서 당시의 정황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들을 후대에 남겼다.
이런 뛰어난 내치 덕분에, 잦은 원정에도 불구하고 신민들은 그를 성군으로 추앙했다. 그리고 역사는 이 시기를 오스만 제국의 최전성기라고 평가한다.
2.2.9. 실책
하지만 내정과 외정 모두 훌륭해보이는 쉴레이만 대제의 치세에도 두 가지 문제가 있었다. 그리고 이들 모두 오스만 제국이 쇠퇴하는 원인을 제공했다.먼저 쉴레이만 시대에 오스만 제국은 튀르크계 개국공신 세력이 완전히 몰락하고 데브시르메 징집자 세력이 정권을 장악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오스만 제국 전기의 역사 전체를 살펴볼 필요가 있는데, 메흐메트 2세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정복하기 이전까지는 튀르크계 개국공신들의 후손들이 대를 이어 정권을 장악해 왔다. 하지만 콘스탄티노폴리스 정복을 주도한 메흐메트 2세는 술탄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재상이자 개국공신 세력을 대표하던 할릴 파샤를 반역죄로 처형하고, 그 후임으로 데브시르메 출신인 자아노스 파샤를 임명했다. 다만 개국공신 세력을 완전히 몰아내지는 않고, 데브시르메 출신을 여당으로. 개국공신 세력을 야당으로 삼아, 서로를 견제하고 술탄에게 충성을 바치도록 했다.
그런데 쉴레이만 시대에 이르러 데브시르메 출신이 정권을 장악하게 되면서 이 균형은 무너진다. 재상을 비롯한 고위직을 이들이 독점하다 보니 개국공신 세력이 설 자리가 점차 사라졌고, 마침내는 돌이킬 수 없을 정도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리고 메흐메트 2세가 확립하여 쉴레이만 시대까지 이어진 오스만 제국의 전제군주제는 두 정치 세력을 교묘하게 경쟁시킬 때만 성립할 수 있었던 것이어서, 쉴레이만 이후 오스만 술탄들의 입지는 상당히 애매해지게 된다. 즉 황권이 약화되기 시작한 것으로, 이후 예니체리들이 술탄을 우습게 보며 갈아치우는 사태로 이어진다.[36]
다음으로 후궁 가운데 하나인 휘렘 술탄을 지나치게 총애하여, 제국의 불문율을 깨고 그녀를 정식 황후로 책봉했다. 이 부분은 항목을 참고해도 좋고 바로 아래의 '사적인 부분' 문단에 있으므로 여기에서는 생략하겠지만, 쉴레이만의 정책(?)으로 인해 하렘 세력이 정치에 관여하는 선례가 생겨나고 말았다. 그리고 쉴레이만 사후에도, 술탄의 모후나 애첩이 정치에 관여하게 되었다.
요컨대 쉴레이만 시대에, 데브시르메 세력의 정권 장악, 하렘 세력의 정치 간섭이라는 두 가지 문제가 나타났다. 그나마도 쉴레이만의 뒤를 이은 술탄이 유능한 인물이어서 황권을 강화할 수 있는 새로운 수단을 마련하고 휘렘 술탄은 어디까지나 예외였노라고 했다면 쉴레이만의 실책은 만회될 수 있었다. 하지만 '그의 뒤를 이은 술탄'이 막장 주정뱅이 셀림 2세. 셀림 2세가 국정에 관심없고 술과 여자에만 빠져 사는 동안 그의 누나와 재상이 정권을 농단했다. 이 때문에 오스만 제국은 성장세를 멈추고 정체하기 시작했으며 이어서 쇠퇴의 길을 걷는다.
2.2.10. 사적인 부분
기록에 따르면 쉴레이만 1세는 외모마저도 잘생긴 엄친아였다. 그를 묘사한 그림들을 보면 확실히 젊었을 때는 이목구비가 뚜렷한 미남이고 늙어서도 풍채 후덕하고 은염이 성성한 미노년이다. 키도 크고 인상도 또렷하며 패션 센스마저 특출한 옥골선풍형의 인물이었다. 베네치아 사람인 바르톨로메오 콘타라니는 막 즉위했을 당시의 쉴레이만을 직접 만나본 후 그의 모습에 대하여 "키가 크고 날씬하면서도 강인했는데, 얼굴은 특히 마르고 살이 없었다. 수염이 나있었지만 풍성하지는 않았다."라 말한 바 있다.터키 역사상 가장 유명한 러브 스토리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그는 오스만의 술탄 중에서 매우 보기 드문 애처가였다. 문제는 오스만 술탄 중에 그가 유일하게 결혼을 했다는 점[37]이지만(...) 공식 황후를 두지 않았던 선대의 술탄들과 달리, 그는 일평생 휘렘 술탄(록셀라나)이라는 여인을 애지중지 사랑하여 오스만 제국 최초의 황후로 책봉했다. 게다가 이 휘렘 술탄은 신하가 헌상한 노예 출신이었다.[38] 쉴레이만은 25년이나 휘렘과의 일부일처를 유지하는 순애보를 보였다. 그러나 휘렘은 상당히 야심만만한 여자였기에 자신의 자식 셀림이 술탄의 자리를 잇게 하려는 음모를 꾸몄고 쉴레이만은 그녀의 충동질 때문에 다른 후궁의 아들이었던 무스타파와 바예지트를 처형하는 등의 실책도 저질렀다.[39] 이후 휘렘의 뜻대로 그녀의 아들이 술탄이 되었지만 문제는 그 아들인 셀림 2세는 술독에 빠져 살았던 한심한 인간.... 후대 역사학자들은 후계자 선정에 실패한 것을 쉴레이만 1세의 큰 실책 중 하나로 꼽는다.
이브라힘 파샤라는 신하와의 우정이 유명하다.[40] 데브시르메 징집자 출신으로 황태자 시절부터 쉴레이만의 밑에서 노예 생활을 하다가 술탄 제위 후 초고속 승진을 거쳐[41] 총신이 되었으며 술탄과 신하라는 신분의 차이를 넘어 함께 식사를 하고 함께 잠을 잘 정도로 가까운 사이였다. 당시 '황제랑 재상이랑 사귄다카더라' 하는 루머가 떠돌 정도였다.(...) 쉴레이만은 자주 자신이 형제를 고를 수 있었다면 이브라힘을 골랐을 것이라는 말을 했으며 자신이 살아있는 동안 어떤 일이 있더라도 이브라힘을 처형하는 일이 없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이브라힘은 오스만 역사상 최단기간에 재상의 위치까지 올랐으며 1차 빈 공방전 당시 오스만군의 사령관으로 임명되기도 하였다. 심지어 쉴레이만은 자신의 여동생인 하티제 공주와 결혼까지 시켜주었다.[42] 그러나 날이 갈수록 강해지는 이브라힘의 권세에 쉴레이만은 날이 갈수록 불편해했고 결국 궁중의 암투에 휘말려 이브라힘 파샤는 처형당하고 만다.
상기 서술대로 내치와 외치 모두 위대한 업적을 이루었기에 기독교 세계의 정신적 지주인 교황보다도 더 위대하다고 자부하며 교황의 삼중관을 능가하는 사중관을 만들어 착용하기도 했다. 사중관 제작에 들어간 비용은 11만 5천 두카트에 달했다고 한다.[44]
2.2.11. 후계자 문제
가정적으로 보면 좋은 아버지가 아니었는데 특히 아들을 2명이나 살해했다. 쉴레이만의 아들 중에서 후계자로 유력했지만 가장 먼저 탈락한 황자는 마히데브란 소생인 무스타파였다. 무스타파는 재능은 있었으나 어머니가 휘렘에게 총애가 밀리자 찬밥 신세가 됐고, 형제들과 함께 자질을 시험받으러 총독으로 부임받을 때도 부황의 영지인 마니사가 아닌 아마시아로 임지가 정해졌고, 마니사는 셀림이 부임했다. 그나마 이브라힘 파샤의 지원을 기대할 수 있었으나, 이브라힘이 처형당하자 위기에 몰린다. 결국 무스타파는 1553년에 휘렘의 사위인 뤼스템 파샤[45]의 고변에 따라 역모 혐의로 처형된다.[46]이 때까지 살아남은 쉴레이만의 아들은 셀림, 바예지트, 지한기르였다. 하지만 지한기르는 병약해서 일찌감치 탈락했고 무스타파 사후에 병세가 악화[47]되어 요절한다.[48] 바예지드가 루멜리아에서 무스타파 추종자들이 일으킨 반란을 진압한 뒤, 쉴레이만은 아들들을 시험하려고 1559년에 셀림과 바예지드의 임지를 콘야와 아마시아로 바꿨다. 이 때 바예지트가 미적거리자 쉴레이만은 셀림을 후계자로 확정짓는다.
이에 바예지트는 어차피 셀림이 아버지만 없으면 그를 죽일 것은 분명했기에, 발악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셀림을 지지하던 소콜루의 토벌군에 밀려 페르시아로 망명한 뒤, 오스만과의 관계 개선을 노린 타흐마스프 1세에게 처형당한다.
2.2.12. 말년과 사망
1565년 몰타 포위전
쉴레이만의 정복 사업은 그가 죽기 전까지 지속되었다. 사파비조 페르시아와 평화 협정을 맺은 뒤 그의 시선은 다시 서쪽인 유럽으로 쏠렸다. 이미 그의 경쟁자였던 카를 5세도 세상을 떠나 유럽 세계는 강한 구심점을 잃었다.
1565년, 황제가 파견한 오스만 함대는 성 요한 구호기사단이 로도스 섬을 잃고 이주한 몰타로 출격했다. 격렬한 사투가 벌어졌다. 그러나 로도스와 달리 몰타에서는 뜻을 이루지 못하고 깨졌다.
페르디난트 1세의 후계자 막시밀리안 2세가 헝가리 국왕으로서 지위를 인정받는 대신 공물을 납부하기를 거부하자 1566년에는 72세의 노구를 직접 이끌고 12만의 대군으로[49] 또 다시 헝가리 원정에 나섰다.[50] 원정에 나선지 50일쯤에 헝가리의 백작 니콜라 즈린스키[51]가 3천명의 병력으로 지키는 시게트바르 요새에서 격렬한 사투가 벌어졌다. 시게트바르 요새를 공격한지 한 달이 넘었을때 마침내 오스만군은 성벽을 돌파하고 외성을 함락했다. 그래서 즈린스키 백작과 헝가리 수비군은 내성으로 후퇴했고 여기서 저항을 계속했다. 의자에 앉아있던 노쇠한 황제는 그 광경을 지켜보며 젊은 시절 말에 올라타 몸소 성을 공격하던 기억을 떠올렸을지도 모른다.[52]
요새를 함락시키기 직전인 9월 7일, 그는 병이 악화되어 시겟바르 요새의 진영에서 눈을 감았다. 사망 당일까지 일기를 썼다는 점이나 죽음을 극비에 부칠 수 있었다는 점 등을 생각하면 급사한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한데, 그의 마지막 일기에는 "요새는 저리도 타오르고 있건만, 승리의 북소리는 여전히 들리지 않는도다"라는 기록이 남아 있다. 결국 그가 죽고 난 지 불과 하루 뒤에야 해당 요새는 함락되었다.[53] 시신은 코스탄티니예로 운반되어 거기서 장례식이 치러졌다. 이때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황제의 죽음을 슬퍼하고 애도했다. 그리고 오스만 제국에는 다시는 그를 뛰어넘는 명군이 등장하지 못했다.
쉴레이만 1세가 사망했을 때 그를 보좌했던 재상 소콜루 메흐메트 파샤는 며칠간 쉴레이만 1세의 승하 사실을 함구했다고 한다. 소콜루 메흐메트 파샤가 쉴레이만 1세의 마차 안에 들어가 마치 황제에게 보고를 하는 것처럼 연극을 해서 다른 사람들은 황제가 아직 살아 있는 줄 알았다.
사망했을 때의 나이가 72세로 당시로서는 장수한데다 재위 기간이 46년이나 되다 보니, 쉴레이만 한 사람이 옥좌에 앉아있는 동안 유럽에서는 왕이 많이 바뀌었다. 가령 스페인에서는 카를 5세가 죽고 펠리페 2세가 등극했고, 헨리 8세부터 엘리자베스 1세까지의 잉글랜드 또한 그의 치세와 겹친다. 프랑스에서는 발루아 왕조의 문화적 전성기를 이룩한 프랑수아 1세부터 그 아들인 앙리 2세, 다시 그 아들들인 프랑수아 2세, 샤를 9세, 앙리 3세의 치세에 해당.[54]
3. 대중매체에서
3.1. 대항해시대 2
오스만 제국의 궁성에 가면 떡하니 반겨주는 바로 그 분. 실제로 훈남이니 뭐니하지만 작중에선 미중년은 고사하고 그냥 수염 덥수룩한 중년 아랍인의 전형으로 나온다.3.2. 도미네이션즈
자세한 내용은 도미네이션즈/유니버시티/쉴레이만 대제 문서 참고하십시오.3.3. 어쌔신 크리드 : 레벨레이션
인게임 | 설정화 |
왕이 되지 않은 시점이기에 왕자로 등장. 코스탄티니예로 향하는 배에 에치오와 함께 탑승하여 안면을 튼다. 이 때 에치오에겐 자신이 학생이라고 소개했으며, 여성을 배려하는 신사적인 면모도 보였다. 근데 정작 만나고 나서 뜨는 데이터베이스엔 떡하니 쉴레이만 왕자라고 뜬다.
후에 템플러들이 왕자를 죽이려 한다는 정보를 듣고 잠입한 에치오와 조우. 이 때 에치오는 쉴레이만이 왕자였다는 사실을 알게된다. 그리고 쉴레이만에게 달려드는 자객을, 들고 있던 류트를 뽀개서 자객의 목에 쑤셔 박아 죽인다. 이 때 다시 인사를 하는데,
에치오 : 학자에 왕자까지. 안 해본 일이 무엇입니까?
쉴레이만 : 전 모르는 사람과는 이야기하지 않죠. 쉴레이만이라고 합니다.
에치오 : 에치오 아우디토레(라고 합니다).
이후 템플러의 습격을 저지하지 못한 예니체리(예니체리들이 경비를 잘 못선다고 툴툴댄다.) 의 대장 타릭 바레티를 감시하는 일을 에치오에게 맡긴다. 에치오와 함께 있는 장면을 아흐메트 왕자가 보자 "제 유럽 쪽 협력자입니다."라고 둘러대기도 한다. 마누엘 팔레올로고스를 추적할 때는 배편을 마련해주기도 한다.쉴레이만 : 전 모르는 사람과는 이야기하지 않죠. 쉴레이만이라고 합니다.
에치오 : 에치오 아우디토레(라고 합니다).
나중에는 대신전을 열겠다고 소피아를 볼모로 열쇠를 내놓으라고 협박하는 아흐메트 왕자의 말을 듣고 에치오와 세계의 통치자로써의 관점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이때의 대화를 보면 그가 확실히 대제로써의 자질이 충분함을 볼 수 있다.
쉴레이만 : 아흐메트 왕자가 도착한 이후로 계속 미행했습니다만 이런 이야기를 들을줄은 몰랐군요.
에치오 :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쉴레이만 : 그는 성실한 자이지요. 하지만 그가 가지고 있는 템플러들의 환상은 위험합니다. 이는 진실의 눈앞에서 날아다닐 뿐이지요. 세계는 제각각의 색깔과 문양을 가진 양탄자입니다. 진정한 지도자는 이를 축하해야 하지요. 풀어헤치는게 아니라요.
에치오 : 그자는 '다름'이 가져오는 불협화음을 무서워하고 있습니다.
쉴레이만 : 그것이 우리가 살아남기 위해 법을 만드는 이유이지요. 모든 사람에게 평등하게 적용되는 카눈(Kanun, 법)을 말입니다.[55]
여담이지만 막판에 셀림 1세가 예니체리를 끌고 등장해선 "내 아들이 당신을 지지하지 않았다면 여기서 처리해버렸을 것이다."라고 한다.[56] 에치오는 이 말을 듣고 꼭지가 단단히 돌아서 칼을 뽑아 셀림을 찔러 버리려고 했지만 소피아가 말려서 관뒀다. 찔렀다간 에치오는 순식간에 수십 명의 예니체리와 싸워야 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 말은 반대도 되는데 저기서 에치오를 공격하지 않았기에 암살단이 가만히 있었던 것이기도 하다. 암살단은 고대부터 높으신 분들을 암살하는 게[57] 일이었다. 만약 셀림 1세가 에지오를 죽였다면 그의 통치는 1년도 가지 못했을 게 뻔하다. 감히 암살단의 멘토를 죽이고도 멀쩡히 살아있을 수 있을 리가 없다. 이를 볼때 암살단이 얼마나 무서운 조직인지 제대로 몰랐던 것으로 보인다. 애초에 에치오가 얌전히 죽어줄 인물도 아니다. 근데 셀림 1세의 제위 기간은 1512년부터 1520년까지 꽤 짧다. 아마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암살단을 건드린 모양이다. [58]에치오 :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쉴레이만 : 그는 성실한 자이지요. 하지만 그가 가지고 있는 템플러들의 환상은 위험합니다. 이는 진실의 눈앞에서 날아다닐 뿐이지요. 세계는 제각각의 색깔과 문양을 가진 양탄자입니다. 진정한 지도자는 이를 축하해야 하지요. 풀어헤치는게 아니라요.
에치오 : 그자는 '다름'이 가져오는 불협화음을 무서워하고 있습니다.
쉴레이만 : 그것이 우리가 살아남기 위해 법을 만드는 이유이지요. 모든 사람에게 평등하게 적용되는 카눈(Kanun, 법)을 말입니다.[55]
3.4. 위대한 세기
튀르키예에서 방영한 사극인 무흐테솀 유즈이을(=위대한 세기)에서 남주인공으로 등장한다. 다만 궁정내의 권력다툼과 하렘에만 포커스가 맞춰져 있다고 까는 쪽도 있고[59], 지금까지 사극가운데 고증과 시나리오 모두에 충실[60]하다고 보는 쪽으로 호불호가 극단적으로 갈린다. 한회분량이 1시간 반 이상(...)이고 그런게 139개나 있다.[61]
무흐테솀 유즈이을에서 쉴레이만은 겉으로는 이 세계의 주인인 파디샤로 완전체 비슷하게 등장하지만, 인간적인 측면도 상당히 부각시키고 있으며 휘렘 술탄이 본래 알렉산드라라는 이름을 가진 우크라이나 출신의 노예였다가 타타르에게 잡혀서 노예로 팔리고, 크림 한국의 궁정에 있다가 오스만 제국 궁정으로 '진상' 되었다는 비극적 주인공이라는 설정으로 나온다. 그러다가 궁정 시종장의 "술탄은 세계를 지배하지만 그의 여인은 술탄을 지배한다."는 말을 듣고 회심, 술탄을 유혹하는 모습으로 등장.
3.5. 꿈의 물방울, 황금의 새장
일본 만화 꿈의 물방울, 황금의 새장(夢の雫 黄金の鳥籠)에서는 금발의 미소년[62]으로 나온다.
자세한 것은 항목 참조.
3.6. 3000년의 기다림
총애하는 여인에게 놀아나 아들 무스타파를 살해하는 인물로 나온다.3.7.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3
오스만의 군주로 출연한다. 성우는 한국판은 노민, 일본판은 마츠이 노리오. 본 게임에 등장하는 쉴레이만은 노년의 모습인데, 정작 본인은 젊었을 때 가장 잘 나갔었다는 게 문제다. 일까?[63]캠페인 중에 직접적으로 등장하는 경우는 없지만, 일반 대전에서 플레이할 때에는 인공지능의 입담과 재치가 수준급이다. 이 외 사항은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3/오스만 참조.
3.8. 시드 마이어의 문명
문명 4·문명 5·문명 6, 문명: Reign of Power에서 오스만제국의 지도자로 출연한다. 4에서는 오스만을 대표하는 다른 황제인 메흐메트 2세와 함께 등장했으며 나머지는 단독 출연.3.9. 유로파 유니버설리스 4
행정, 외교, 군사 순으로 6,5,6의 능력치를 지닌 군주로 나온다. 참고로 이 게임의 능력치 상한은 6이다.[1] Süleyman-ı evvel[2] 장기는 헝가리 시게트바르주 투르베크 별도로 안치.[3] 수니파의 칼리파 겸직.[4] 그동안 크림 칸국의 공주로 알려져 있었으나 최근 연구를 통해 크림 칸국 공주가 아니었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5] 참고: 일부 출처에서는 셀림 1세에게 어린 나이에 죽은 아들이 있었다고 명시되어 있지만 일부에서는 이 자녀의 존재를 언급하지 않다. 이 주제에 대해서는 다양한 의견이 있다.[6] 참고: 딸의 수는 9명이라고 한다.[7] 이전까지의 후궁(하툰)과 달리 타국의 황후에 준하는 하세키 술탄이 책봉되기 시작했으며 쉴레이만 1세는 하세키 휘렘 술탄과 결혼식을 했다.[8] 처음 만난것은 1520년대. 결혼 이전까지는 애첩이었다.[9] 이탈리아 출신설에 의하면 시칠리아 출신으로 추정된다.#1, #2[10] 군주에게 들려주는 조언의 책[11] 공자가 정치의 본질에 대해 병(군대), 식(먹이는 것, 돈), 신(믿음)을 들고 그 중에 버릴 것이 있다면 앞의 것 둘을 순서대로 버리라는 말을 남긴 것과 거의 같다. 민무신불립(民無信不立, 백성들의 믿음이 없으면 그 나라는 존립할 수 없다.)[12] 비슷한 예로 살라흐 앗 딘의 풀네임에 있는 유수프(Yusuf)와 아이유브(Ayyub)는 각각 요셉과 욥에서 왔다.[13] 여기에서의 대사는 오지에 기슬랭 드 뷔스베크(Ogier Ghiselin de Busbecq)이라는 사람인데, 그는 예니체리, 관료 선발 제도인 데브시르메 제도, 여러 종교가 한데 공존하는 모습 등에 감명을 받아 당시 기준으로 열렬한 오스만빠였던 사람이다. 그가 남긴 글 가운데에는, 언제고 닥쳐 올 오스만 제국의 맹공에 "우리가 얼마나 준비되어 있지 않는가는, 감히 말하고 싶지도 않다."라는 것도 있다. 물론 동시대인의 증언으로 가치가 있는 글이지만, 적당히 간추려 읽도록 하자.[14] 오스만 황제의 친족 살해는 무라트 1세 사후 바예지트 1세가 처음 시행한 일로, 메흐메트 2세가 아예 법제화한 것이다. 이때 살해하는 '친족'은 남자라면 갓난아이라도 예외가 없었는데, 오스만 제국에서는 장남이 아니라 전임 황제의 아들들 가운데 가장 유능한 자가 제위를 이었기에 황제의 형제라고 하면 언제든지 황위 계승을 주장할 수 있는(반란을 일으켜서 성공하면 '가장 유능한 자'가 되는 것이므로) 위험인물이었기 때문.[15] 셀림 1세에게 쉴레이만 이외에도 아들들이 있기는 했는데 대부분 어려서 죽었고, 유년기를 넘긴 아들은 쉴레이만이 유일하다. 때문에 쉴레이만은 오스만 황제들 가운데 유일하게 황위 계승 분쟁 없이 안정적으로 즉위했다. 다만 엄밀히 말하면 위베이스라는 이복동생이 하나 더 있기는 했는데, 그 생모가 행동거지에 문제가 많다 하여 하렘에서 쫓겨났고 그 후 재혼을 했다는 게 문제. 이 경우 그 자식은 황위 계승권을 주장할 수 없지만 그래도 동생이므로 황위에 오른 쉴레이만이 여러모로 챙겨주었고 후에는 바그다드 대총독을 지내다 예멘 지역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던 중에 전사했다. 소식을 전해들은 쉴레이만은 동생이 죽었다며 통곡했다고.[16] 일단 맘루크 왕조의 중심지였던데다, 당시 이집트 총독이었던 하이으르 베이는 잔비르디 알 가잘리와 마찬가지로 본래 맘루크 왕조의 지방 총독이었다가 셀림에게 항복한 이후 이집트 정복에 공을 세운 인물이었다는 점에서 통하는 면이 있었다. 다만 잔비르디와 달리 하이으르 베이는 진정으로 오스만에게 항복했다는 점에서, 통하는 게 있다는 건 잔비르디가 헛짚은 셈. 오히려 하이으르 베이는 잔비르디의 연락을 받자마자 콘스탄티노플로 사람을 보내 반란이 일어났음을 고해 바쳤다.[17] 오스만 제국에서는 모든 지방관들에게 군사적 재능을 갖추고 있을 것을 요구했고, 승진이나 좌천을 결정할 때 중요하게 본 사항 가운데 하나가 군공이었다. 따라서 군사 장교 출신이라도 국경 지대의 지방관으로 임명하거나 하는 사례가 많았는데, 이것도 그 중에 하나. 이 경우 국경 지대는 아니지만 막 반란이 진압된 지역이라는 점에서 군사적 재능이 중요했을 것이다.[18] 베오그라드는 세르비아어 발음, 벨그라드는 오스만어-튀르키예어 발음이다.[19] 다만 쉴레이만 당시의 헝가리는 국가 막장 테크를 착실히 밟고 있었기에, 수비군도 7백 명에 불과했다.[20] 세르비아는 세르비아 정교회를 믿는 정교회 국가이고, 중세 세르비아 왕국이 멸망하자 헝가리 왕국 남부로 이주하는 경우가 많았다. 몽골 제국의 침공 이래 인구가 부족했던 헝가리는 세르비아인을 받아들여 남부 국경 수비대로 쓰는 경우가 잦았고 이는 헝가리가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가문에게 넘어간 이후에도 계속되어 결국 제1차 세계 대전으로 보이보디나 자치주가 헝가리에서 떨어져나가는 원인이 되었다.[21] 현재도 '베오그라드의 숲'이라는 이름의 공원이 있다[22] 그는 보헤미아 왕국의 국왕이기도 했다.[23] 다만 결사적으로 맞섰던 것 치고는 전략, 전술이 형편없었다. 오스만 제국은 총과 대포를 다수 활용하는 등 당시로서는 선진적인 전법을 구사하고 있었던 반면, 헝가리 측은 옆에 강이 흐르기는 하지만 탁 트인 평야에서 기병을 앞세우는 작전을 쓰기로 했던 것. 실제로 오스만 제국이 셀림 1세 시대에 이집트의 맘루크 왕조를 정복하고 페르시아의 사파비 왕조를 상대로 기선을 제압한 것이 두 나라 모두 기병을 앞세우다 벌집이 되었기 때문이며, 설령 헝가리가 이 전투들에 대해 몰랐다고 하더라도 바예지트 2세 대에 헝가리와 오랫동안 동군연합이었던 크로아티아 왕국에서도 똑같은 일이 있었다. 헝가리 역사상 중요한 전투임에는 분명하지만, 헝가리군이 괜히 박살난 게 아니다.[24] 오스만 제국의 입장에서, 모하치 전투는 총알과 포탄이 비오듯 쏟아지고 있는데 적군의 기병들이 불나방처럼 덤벼드는 싸움에 불과했다. 비록 전투 초반에는 헝가리 기병의 화살이 쉴레이만의 흉갑에 명중하기까지 했지만 부상을 입히지는 못했고, 너무도 싱겁게 결판이 난 나머지 쉴레이만은 "뭔가 이상한데?"라고 판단하고는 헝가리의 수도로 내처 진격하는 대신 며칠 동안 모하치 전장에 그대로 주둔했다.[25] 참고로 이때의 충격이 얼마나 컸는지, 오늘날까지도 헝가리인들은 힘든 일을 겪으면 "모하치의 패전보다 더하다."라는 표현을 쓸 정도.[26] 사실 사생아가 한 명 있긴 했는데 사생아라서 당연히 왕위 계승 자격이 없었다.[27] 러요시 2세는 카를 5세와 페르디난트 1세의 여동생인 마리아와 결혼했고, 페르디난트 1세는 러요시 2세의 누나 언너와 결혼했다.[28] 여담으로 헝가리 왕국과 동군연합이었던 크로아티아 왕국, 보헤미아 왕국의 귀족들은 페르디난트 1세를 새 국왕으로 선출했다.[29] 다만 오늘날 학자들 중에는, 빈 공략이 사전에 계획된 것이라는 주장도 있고 헝가리가 너무나도 싱겁게 무너진 나머지 "이참에 오스트리아까지...?!"라는 식으로 다소 우발적으로 공격했다는 주장도 있다. 결사적으로 시도까지는 아닌 셈.[30] 1570년 야노시 2세는 헝가리 왕위라는 직함을 페르디난트 1세의 아들 막시밀리안 2세에게 양도하고 에르데이 공작으로만 칭하면서 동헝가리 왕국은 에르데이 공국으로 이름을 바꾸게 되었다.[31] 유서가 깊기 이전에, 바그다드는 티그리스 강을 따라 내려가면 페르시아 만으로 연결된다는 면에서 전략적 의미가 컸다. 이후 바그다드는 사파비 제국의 명군 아바스 1세 때 일시 빼앗기지만 무라드 4세가 되찾아왔고, 1차 세계대전 때 영국군에게 빼앗기기 전까지 계속 오스만의 지배 하에 남았다.[32] 당시 사파비 페르시아는 국력이 열세이고 찰디란 전투에서 오스만한테 개발살난 이후 오스만 제국군과 전면전을 벌이는 대신, 싸움을 피하며 철저히 청야전술과 방어전을 폈다. 그러니 오스만 제국 쪽에서는 싸우기만 하면 이길 것 같은데 적이 싸워주질 않으니 전쟁에서 이겼다고 하기 어려웠고(실제로 당시 인구와 군사력은 오스만 제국 쪽이 우세했다.), 보급품 부족으로 인해 번번이 군사를 물려야 했다.[33] 로마법 대전이 이전까지의 로마 법을 집대성한 것이었던 것처럼, 쉴레이만 혼자서 법전을 썼다기보다 이전까지의 오스만 법을 총정리했다고 보는 것이 옳다. 부황인 셀림 1세에 이르기까지의 역대 황제들이 반포한 칙령을 총정리한 다음 서로 모순되는 것은 적당히 간추렸으며, 메흐메트 2세가 최초로 반포한 성문법도 영향을 주었을 듯 하다.[34] 다만 노예도 관료로 등용한 것은 쉴레이만 시대의 특징이라기보다, 오스만 제국의 역대 정책을 그대로 따른 것.[35] 연인이라는 뜻이다.[36] 비슷한 예로 로마 제국의 근위대 프라이토리아니와 아랍권의 맘루크가 있다. 이들 역시 권력이 커지면서 군주를 우습게 보아 죽이거나 갈아치우게 되며, 권력이 커진 부분만 놓고 보면 러시아 제국의 스트렐치도 유사하다 할 수 있다. 어쩌면 근위대가 막장 테크를 타게 되면 다 이렇게 되는지도[37] 후대의 오스만 2세와 이브라힘도 정식 부인을 두긴 했지만 그 직후 폐위되었기 때문에 기간은 극히 짧다.[38] 우크라이나 성직자의 딸이었는데 20대 초반 즈음에 포로로 잡혀 오스만 제국에 노예로 끌려왔다. 위대한 세기에서는 다름아닌 이브라힘 파샤가 시녀 중에 간택한 것으로 나온다. 자기 무덤을 팠다[39] 아들들 뿐만 아니라, 무스타파와 바예지트를 지지했던 신하들. 또는 이렇다 할 정견을 피력하지는 않았지만 휘렘의 입장에서 자신의 앞길을 막고 있다고 여겨진 신하들이 반역죄를 뒤집어쓰고 처형장으로 보내졌다. 아버지의 발뒤꿈치도 따라가지 못한 셀림과는 달리, 무스타파는 황제로 즉위했더라면 오스만 제국의 전성기를 이어갈 수 있었을 정도의 인물이라는 것이 문제. 당시 합스부르크 왕가에서 파견한 대사 뷰스벡은, '아들들 가운데 무스타파라는 자가 있는데, 놀라울 정도로 잘 교육받았고 사려 깊으며 이제 24세 또는 25세이기에 제위에 오를 만한 나이가 되었다. 부디 신께서 그런 힘을 가진 바르바리인이 우리에게 다가오지 않도록 해주시길 바랄 뿐이다' 라고 기록할 정도였다. 다만 뷰스벡이라는 사람은 오스만빠 기질이 다분했다는 점은 유의하자.[40] 이름이 별로 다양하지 않았는지 오스만 제국 역사상 '이브라힘 파샤' 라고 하면 수십 명이 해당되므로, 다른 '이브라힘 파샤' 들과 구분하기 위해 '파르갈르 이브라힘 파샤(Pargalı İbrahim Paşa)' 라고도 불린다. 이 밖에 '파르갈르(파르가 출신)' 대신 '프렝크(Frenk, 유럽인)', '마크불(Makbul, 총애받는)', '마크툴(Maktul, 처형된)', '다마트 (Damat, 부마)' 등의 별명도 쓰이며, 특히 '마크불' 과 '마크툴' 은 'Makbul Maktul' 로 묶여서 쓰이는 경우가 더 많은 편. '프렝크' 의 경우 어차피 유럽인이 고위직을 꿰차고 있는 마당이었으니 출신을 문제 삼은 건 아니고, 서유럽 르네상스 문화를 유독 좋아한다는 이유로 붙었다.[41] 3년 만에 황실 최하위직에서 최고위직이 되었다.[42] 쉴레이만 시대는 재상을 비롯해 고위 관료나 장교 거의 대부분이 예니체리 항목에 소개된 '데브시르메 제도'로 징집되었으며, 쉴레이만의 누이뿐 아니라 딸인 미리마 술탄과 손녀딸인 이스미한 술탄도 이들에게 시집갔다. 오히려 쉴레이만 사후에 오스만 제국이 쇠퇴하기 시작한 요인 가운데 하나가 데브시르메 징집자만 챙겨주다 보니 제국의 개국공신들인 튀르크계 귀족들이 완전히 몰락한 것이었으며(조선으로 비유하자면 탕평책이 무너지고 일당전제체제로 접어들었다고 보면 된다), 예니체리가 황제를 갈아치우는 사태가 바로 이 연장선상에 위치한다. 즉 '넘사벽의 신분 차이'가 아니라, 어느 나라에나 흔히 있는 귀족과 황실의 결혼에 가까웠다.[43] 사형당하기 며칠 전부터 쉴레이만은 여전히 이브라힘과 함께 식사를 하면서 사형선고가 어쩔 수 없는 것이라 주장했고 쉴레이만의 배려 덕에 이브라힘 파샤도 감옥에 수감되어있지 않아 도주의 가능성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도망치지 않고 사형을 받아들였다. 또한 쉴레이만은 말년에 이르러 이브라힘을 처형한 것을 크게 후회했으며, 자작시를 쓸 때에도 우정과 신의가 주제인 시 등 이브라힘을 떠올리며 쓴 듯한 작품이 많다고 한다.[44] 한화 약 290억 상당. 참고로 사중관은 쉴레이만이 직접 만들어 쓴 것이 아니라, 당시 동맹이었던 프랑스가 선물로 만들어준 것이라고도 한다. 이에 대해서는 여기 참고[45] 휘렘의 딸인 미흐리마 술탄과 결혼했다.[46] 마히데브란은 이후 끼니만 겨우 연명할 지경으로 고생하다가, 셀림 2세 때 복권된다.[47] 야사에 따르면 평소에 친했던 무스타파가 처형당하자 생긴 불안이 원인이었고 한다.[48] 휘렘의 다른 아들들인 압둘라(1523 ~ 1526), 메흐메트(1522 ~ 1543) 및 퓌레인 하툰 소생인 마흐무트(1512 ~ 1521), 생모 미상인 무라트(1519 ~ 1521)는 무스타파 주살 시점에 이미 세상을 떴다.[49] 오스만군 10만에 타타르인 1만 5천, 몰다비아 공국의 병력 7천으로 구성되었다.[50] 하지만 이때 쉴레이만은 통풍과 관절염에 걸려 거동이 불편한 상태였으며, 다른 질병에도 시달렸기에 실질적인 지휘권은 재상인 소콜루 메흐메트 파샤가 행사했다.[51] 크로아티아인 귀족으로 헝가리어로는 미클로시 즈리니. 제1차 빈 공방전에 참전했고 실전경험이 풍부한 베테랑 장군이었다. 그러다 보니 오스만군의 공성을 1달이 넘게 잘 막아냈을 정도로 뛰어났다. 다만 외부의 지원을 전혀받지 못한터라 필사적으로 싸웠음에도 결국엔 시게트바르 요새가 함락되었고 최후의 저항을 벌이다 오스만군의 총에 가슴을 두발 맞고 부상을 당했으며 이어 화살에 머리를 저격당해 사망한다. 사후 목이 베여져 효수된다. 이때 니콜라 즈린스키는 항복하라고 보낸 쉴레이만의 사절을 처형할 정도로 저항의지를 보였다. 그래서 헝가리에서는 니콜라 즈린스키를 영웅으로 떠받들며 그의 유품을 전시한 박물관까지 있다.[52] 노년인데다 건강이 나빠져 몸도 불편했던 쉴레이만이 아들들 사이의 제위 계승 분쟁과 이로 인해 악화되는 지병, 사랑하는 황후 휘렘의 죽음에 대한 상심, 국정 운영에 대한 스트레스가 겹쳐 심리적으로 크게 피폐해진 상태였다고 보는 학자도 있다. 코스탄티니예에 가만히 앉아 있어도 영 좋은 소식이 없으니 차라리 전투에 관심을 돌리고 싶어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휘렘이 죽고 나서 쉴레이만은 삶의 의욕을 잃기 시작해 정치도 의욕적으로 하던 예전과 달리 측근들에게만 맡길 정도로 소홀해졌다. 또한 쉴레이만은 정치보다는 군대와 전쟁을 더 좋아할정도로 영토 확장에 적극적으로 나섰다.[53] 하지만 이 전투에서 헝가리 측의 저항이 그야말로 결사적이었기에 오스만 측의 피해도 심각했다. 오스만 대군 12만 중 2만~3만여 명이 죽었을 정도였다. 대략 헝가리군의 10배의 피해가 났다. 특히 이 전투에서 고위급 지휘관인 파샤가 3명이나 전사했고 예니체리 병력도 7천명이나 전사했다. 물론 니콜라 즈린스키와 요새 내의 헝가리군(3천여 명)은 탈출한 7명을 제외하곤 전멸했지만...[54] 여담으로 쉴레이만보다 한 수 더 뜨는 굇수 황제가 있으니, 사파비 왕조의 타흐마스프 1세가 그 주인공이다. 11세의 나이에 황제가 된 덕에 재위 기간이 1524년부터 1576년까지 52년이나 된다. 1576년이면 쉴레이만의 뒤를 이은 셀림 2세도 죽고 무라트 3세가 황제 노릇을 못하고 있던 무렵이다.[55] 다만 여기서 말하는 카눈은 오직 형법만을 의미한다. 오스만 제국 시절 민사법은 각각 밀레트의 법(교회법, 이슬람법 등등)에 근거해 각 밀레트의 판관(성직자, 카디 등)이 판결을 내렸으며, 형법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적용되었다. 예를들어 살인, 강간같은 중죄나 절도같은 경범죄, 역적질까지 처벌내용은 카눈에 근거에 똑같이 처벌했다.[56] 안 그래도 셀림 1세는 에치오가 자신의 친구이자 충신인 타릭 바레티를 죽인 일로 분노한 상태였다.[57] 높으신 분들이면 그냥 찌르는 게 아니라, 아무리 성군이거나 명군이라도 템플기사단을 등에 업거나 그와 비슷한 사상을 가진 높으신 분들을 찔렀다. 덧붙여서 암살단은 폭군이나 독재자들을 제거하기도 하는데 이러면 99%는 템플기사단과 연결되어 있다. 그 반대로 템플기사단에게 비판적인, 암살단을 후원하거나 협력관계인 지도자나 통치자에게 암살단은 호의를 보냈다. 물론 이 경우 99%는 최소한 병크를 터트리지 않거나 터트려도 적게 터트리는 성군이나 명군들이다.[58] 다만 실제 셀림의 사인(死因)으로는 오랫동안 원정을 하느라 말을 탄 것에서 유추하여 탄저병이 아니었나 생각되고 있다.[59] 일단 이슬람주의자가 많고, 그 외에 일부 밀덕이나 역덕들. '하렘물인 건 알겠지만 전쟁은 언제 하나효?' 라든가, '나의 대제님은 이렇지 않아!' 하는 의견이 있다. 하기사 한국으로 치면 광개토왕이나 세종대왕이 나오는데 백제와의 전쟁이나 훈민정음 창제 같은 건 대강대강 지나가면서 사랑 타령은 사료에 없는 내용까지 창작해 가며 길게 늘어놓는다면 어떤 소리를 듣겠는가. 세종과 소헌왕후의 장장 1시간짜리 사랑놀음을 다 보고 나니 겨우 김종서와 최윤덕이 나오더라, 그런데 20분만에 출연 끝이고 전투 신도 조선군 갑사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개마무사가 앞장서서 돌격하고 뒤에서는 화랑이 화살을 쏘더라...... 라는 게 "일부 밀덕이나 역덕들" 이 받는 느낌이다.[60] 다만 깐깐하게 따지자면, 시나리오는 몰라도 고증은 영...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등장인물만 보더라도 잘못 묘사되거나 사료에 비추어 볼 때 각색한 부분이 많다.[61] 한국 방영분은 한회를 두개로 나누어 방영.[62] 두말할 필요 없는 고증오류. 다만, 쉴레이만과 휘렘의 아들로 쉴레이만의 뒤를 이은 셀림 2세는 슬라브계인 어머니의 유전자 탓에 정말로 금발이었다. 이 때문에 금발의 셀림(Sarı Selim)이라는 별명까지 얻었을 정도.[63] 이와 관련이 있는지 없는지는 모르지만, 영문 원판의 목소리는 외모에 비해 상당히 젊게 느껴지는 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