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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15 18:28:11

몰다비아 공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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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다비아 공국
Principatul Moldovei
파일:몰다비아 국기.svg 파일:몰다비아 국장.svg
국기 국장
파일:몰다비아 공국(1789).svg
존속기간 1346년 ~ 1859년
위치 몰다비아
수도 바이아, 시레트(1343년 ~ 1388년)
수체아바(1388년 ~ 1564년)
이아시(1564년 ~ 1859년)
정치체제 선거군주제
국가원수 공작
주요 공작 슈테판 3세(1457~1504)
언어 루마니아어
종교 정교회[1]
민족 루마니아인, 루신인
주요사건 1346년 건국
1498년 오스만 제국의 속국이 됨
1859년 왈라키아 공국동군연합
멸망 이후 몰다비아 왈라키아 연합공국

1. 개요2. 어원3. 지리4. 역사
4.1. 건국 이전의 역사4.2. 몰다비아 건국사4.3. 보그다네슈 왕조4.4. 무사티니 왕조
4.4.1. 페트루 2세 ~ 알렉산드루 1세4.4.2. 혼란기4.4.3. 슈테판 3세: 위대한 자(cel Mare)
4.4.3.1. 외치
4.4.3.1.1. 초기 원정4.4.3.1.2. 왈라키아 쟁탈전4.4.3.1.3. 메흐메트 2세와의 전쟁4.4.3.1.4. 바예지트 2세와의 대결4.4.3.1.5. 폴란드와의 갈등과 코즈민 숲 전투
4.4.3.2. 내치
4.4.3.2.1. 정치, 사회적 기반 공고화4.4.3.2.2. 경제4.4.3.2.3. 군사 정책4.4.3.2.4. 문화 진흥
4.4.3.3. 말년
4.4.4. 보그단 3세 ~ 알렉산드루 4세 라푸슈네아누
4.5. 이오안 2세 야콥 헤라클리드4.6. 혼란기의 재림과 무사티니 왕조의 쇠락4.7. 대혼란기4.8. 바실레 루푸4.9. 이어지는 혼란4.10. 파나리오테스 체제4.11. 알렉산드로스 입실란티스의 봉기와 통치 체계 개편4.12. 몰다비아 왈라키아 연합공국의 성립
5. 역대 군주(보이보드)
언어별 명칭
루마니아어 Principatul Moldovei / Moldova
중세 루마니아어 Цара Мѡлдовєй (Țara Moldovei)
오스만 터키어 افلاک ﺑﻮﻏﺪان‬ (Eflak-ı Boğdan)[2]
튀르키예어 Boğdan Prensliği
그리스어 Ηγεμονία της Μολδαβία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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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현대 루마니아의 세 구성지역인 남부 왈라키아, 동부 몰다비아, 중서부 트란실바니아 중 동부의 몰다비아 지방에 세워졌던 보이보드(Voivode) 국가. 왈라키아 공국과 더불어 현대 루마니아의 전신이 되는 국가이다.[3] 오스만 제국의 봉신국이었다가 1859년부터 왈라키아 공국동군연합을 이루었으며 현대 몰도바 국명의 어원이 되는 나라이기도 하다.

2. 어원

기록상에서 몰다비아 공국을 가리키는 최초의 호칭은 몇몇 기록에서 건국자로 간주된 보그단 1세의 이름을 딴 보그다니아(Bogdania)였다. 하지만 이 호칭은 얼마 안가 사장되었고, 몰도바 강에서 유래한 몰다비아 또는 몰도바가 공국의 통칭으로 정착되었다. '몰도바'의 어원에 대해 여러 가설이 제시되었다. 디미트리에 칸테미르의 <Descriptio Moldaviae(몰다비아에 대한 설명)>가 전하는 전설에 따르면, 드라고슈가 별 모양의 점이 있는 오록스를 쫓았을 때, 몰다(Molda)라는 이름의 암컷 사냥개가 함께 했다. 몰다는 낯선 강둑에 이르렀을 때 오록스를 물어 죽였고, 이후 몰다와 루마니아어을 의미하는 apă를 합쳐서 강에 '몰도바'라는 이름이 붙여졌고, 이것이 나중에 나라 이름으로 지정되었다고 한다.

반면 일부 학자들은 고트족 용어인 멀다(𐌼𐌿𐌻𐌳𐌰, ᛗᚢᛚᛞᚨ, '먼지' 또는 '흙')가 어원이라고 주장하며, 또다른 학자들은 1334년 루테니아 왕국의 국왕 유리 2세 볼레슬라프를 섬기는 알렉세이 몰다오비치라는 이름의 보야르를 언급한 문서가 발견된 것을 근거삼아 몰다비아 공국은 이 보야릉의 이름에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한다. 오스만 제국에서는 몰다비아에 대해 'Boğdan Iflak(보그단의 왈라키아)' 및 'Kara-Boğdan(검은 보그다니아)'라고 불렀다. 프랑스어로는 Moldavie, 독일어로는 Moldau, 헝가리어로는 Moldva, 러시아어로는 Молдавия로 일컬어졌다.

3. 지리

15세기 후반 몰다비아 공국의 면적은 약 94,862 제곱 킬로미터로, 서쪽으로는 카르파티아산맥, 북쪽으로는 체레모시 강, 동쪽으로는 드네스트르강, 남쪽으로는 다뉴브강흑해에 미친다. 프루트 강은 북쪽에서 남쪽으로 몰다비아 공국의 중앙을 통과했다. 공국의 45.6%에 해당하는 핵심 지역은 현재 루마니아에 속하며, 31.7%는 몰도바, 22.7%는 우크라이나에 속한다. 이 지역은 대부분 구릉지로, 서쪽에는 산이 펼쳐졌고, 남동쪽에는 평야가 있다. 몰다비아에서 가장 높은 고도는 이네루 봉우리(2,279m)로 몰다비아 공국에서 가장 서쪽 지점에 있었다. 헝가리계 민족인 창고인이 거주하는 몰다비아 지역은 때때로 '창고인의 땅(Țara Ceangăilor)'으로 일컬어졌다.

디미트리에 칸테미르에 따르면, 몰다비아 공국은 하 몰다비아, 상 몰다비아, 베사라비아의 세 부분으로 나누어졌다. 16세기 초 베사라비아 남부와 티긴 지역 일부가 오스만 제국의 수중에 넘어갔다. 1812년 부쿠레슈티 조약에 따라 베사라비아는 러시아 제국의 일부가 되었지만, 1856년 파리 조약 이후 베사라비아 남부는 몰다비아 공국으로 반환되었다. 하 몰다비아는 12개 주로 구성되었고, 그 중심에는 1564년부터 몰다비아 공국의 수도였던 이아시가 있는 이아시 지역이 있었다. 이아시 지역의 남쪽에는 타르구 프루모스를 중심으로 하는 키릴리가투르 지역이 있었고, 이아시 서쪽에는 로만 시를 중심으로 하는 로만 지역이 있었고, 이아시 동쪽에는 바슬루이 시를 중심으로 하는 바슬루이 지역이 있었다. 더 남쪽에는 비를라트를 중심으로 하는 투토프스키 지역과 테쿠치 시를 중심으로 하는 테쿠츠키 지역이 있었다. 남서쪽에는 푸타나 시를 중심으로 하는 푸트냔스키 지역, 갈라치를 중심으로 하는 코훌루이스키 지역 및 팔키우(현재 유적만 남아 있다.)를 중심으로 하는 팔친스키 지역이 있었다. 북쪽에는 라푸쉬냐스키 지역이 팔친스키 지역과 접했다. 본래 주요 도시는 벤데르 였지만, 오스만 제국의 봉신이 된 뒤에는 라푸스나가 이 지역의 중심이 되었다. 벤데르 시의 드네스트르강변 너머에는 오르헤이 지역이 있었다.

상 몰다비아 역시 여러 구역으로 나뉘었다. 북쪽에는 드네스트르강변에 호틴 시를 중심으로 하는 호틴시차이나 지역이 있었고, 서쪽에는 도로호이 시를 중심으로 하는 도로호이 지역, 히를라우를 중심으로 하는 히를레프스키 지역이 있었다. 서쪽에 있는 두 지역은 모두 체르니브치 시를 중심으로 하는 체르니브치 지역과 접했으며, 각각 북쪽과 남쪽에서 체르니브치 지역을 둘러쌌다. 인근에는 1388년부터 1564년까지 몰다비아 공국의 수도로 기능한 수체아바 시를 중심으로 하는 수체아바 지역이 있었고, 훨씬 더 서쪽에는 피아트라 네암츠 시를 중심으로 하는 네암츠 지역과 바커우 시를 중심으로 하는 바커우 지역이 있었다. 남부 베사라비아는 부자크, 벨고로드-드네트로프스키, 킬리야, 이즈마일의 네 땅으로 나뉘었다.

현대 역사가들은 몰다비아 공국 최전성기인 15세기에 대략 25만에서 60만 사이의 인구가 거주했을 거라고 추정한다. 몰다비아 공국 인종 구성은 상당히 이질적이었다. 루마니아인의 기원인 블라흐족은 15세기와 16세기 초에 도시에 주로 거주했고, 시골에는 슬라브족의 일원인 루신인이 거주했다. 루신인은 초기엔 몰다비아 인구의 최대 40%에 달했지만, 몰다비아를 이끈 보야르 구성원의 20~25%만을 차지했다. 슈테판 3세의 치세에 발간된 <몰다비아 땅 연대기>는 몰다비아가 블라흐어와 루신인이 사용하는 슬라브어의 두 가지 언어를 사용하며, 블라흐인과 러시아인이 각각 절반씩 차지한다고 밝혔다. 그 외에도 타타르족이 집단으로 모여사는 마을이 여러 곳에 있었는데, 부자크 타타르인들은 흑해 연안에 살았다. 또한 헝가리인(특히 창고인), 불가리아인, 집시, 그리고 소수의 유대인, 독일인 및 기타 소수 민족도 몰다비아 공국에 살았다.

4. 역사

4.1. 건국 이전의 역사

몰다비아 일대는 과거에 왈라키아와 함께 다키아 왕국의 영토였다. 왈라키아는 다키아 전쟁이 끝난 후인 106년부터 271년까지 로마 제국의 직접 통치를 받았지만, 몰다비아는 로마 제국의 지배에서 벗어났다. 이 지역은 로마 제국의 영토와 가까웠지만, 흑해 북부 지역의 대초원에서 발흥한 기마 민족의 침략을 자주 받았고, 이 때문에 그곳에 대한 로마 제국의 영향력은 매우 미미했다. 4세기에 동부 카르파티아 지역의 수체아바, 드네스트르, 라르가, 몰도바, 시레트, 케레모스 강 계곡에 정착한 목축업자와 농부들이 곡물 재배와 가축 방목을 벌이면서 생게를 유지했다.

7세기경 프루트 강과 드네스트르강 사이의 일부 지역은 불가리아 제1제국의 영토가 되었다. 불가리아 제1제국이 무너진 뒤에는 동로마 제국의 영역이 되었다가, 불가리아 제2제국이 부흥한 후에는 남부가 불가리아의 일부가 되었고 북동부는 키예프 루스의 영토가 되었다. 1116년 키예프 대공 블라디미르 2세 모노마흐는 다뉴브 지역의 주지사를 임명했다. 키예프 루스가 분열된 후 드네스트르강과 프루트 강 사이의 지역은 루테니아 왕국의 통제를 받았다. 13세기 후반 ~ 14세기 전반에 드네스트르 강과 카르파티아 산맥 사이 땅의 남동쪽 지역은 킵차크 칸국의 지배를 받았다. 카르파티아 산기슭 지역은 킵차크 칸국의 영역에 직접적으로 포함되지는 않았지만, 그들의 영향을 상당히 받았다. 1340년대 중반, 헝가리 왕국이 킵차크 칸국군을 물리친 이래, 몰도바 강 유역의 땅은 헝가리 국왕에 편입되었고, 현지 귀족들은 헝가리 왕국에 공물을 바치는 대가로 자치권을 인정받았다. 그러던 14세기 중반, 몰다비아 공국이 역사의 무대에 등장했다.

4.2. 몰다비아 건국사

몰다비아 공국 초대 보이보드로 간주되는 드라고슈의 기원은 불분명하다. 헝가리 국왕 카로이 로베르트가 1336년에 발행한 왕실 헌장에 '왕의 봉신인 베두의 드라그와 드라고슈'에게 베두(현재 우크라이나의 베데블리야)의 주권을 인정한다는 내용이 있는데, 일부 학자들은 이 베두의 드라고슈가 몰다비아의 건국자 드라고슈와 동일인물이라고 추정한다. 또다른 학자들은 1349년 9월 15일에 반포된 카로이 로베르트의 왕실 헌장에서 줄레슈티의 영지를 부여받은 줄러가 그의 아버지라고 추정한다. 줄러는 다른 두 블라흐 군주인 쿠헤아의 보그단과 슈테판이 카로이 로베르트의 후계자인 러요시 1세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을 때 러요시 1세를 꿋꿋이 따르다가 보그단과 슈테판에게 추방되었다. 러요시 1세는 반란을 진압한 뒤 줄러와 그의 가족이 영지로 복귀하게 하라고 명령했다. 기록상에 전해지는 줄러의 여섯 아들 중에는 '드라고슈'도 있지만, 이 사람이 몰다비아의 건국자와 동일인물인지는 불명확하다.

15세기경에 집필된 몰다비아 연대기에 따르면, '천지창조 후 6867년', 드라고슈는 헝가리 왕국의 마라무레슈에서 오록스를 사냥하다가 몰다비아로 이주한 뒤 그곳에서 군림했다고 한다. 이후에 집필된 몰다비아-폴란드 연대기에 따르면, 드라고슈가 헝가리의 마라무레슈에서 오록스를 추격하다가 몰도바 강에서 오록스를 죽였다. 이후 귀족들과 함께 잔치를 벌였고, 그 나라가 마음에 들어서 그곳에 머물렀으며, 헝가리에서 블라흐족을 주민으로 데려왔다고 한다.

16세기 초 익명의 저자가 집필한 몰다비아-루스 연대기에 따르면, 드라고슈는 본래 '헝가리의 블라디슬라프 왕'으로부터 타타르족을 물리치는 임무를 부여받아 잘 수행한 뒤 마라무레슈에 정착한 로마인이었다. 그는 오록스를 몰다바 강에서 사냥한 뒤 마라무레슈로 돌아와 그곳에 살던 블라흐족을 설득해 몰다비아로 이주하도록 했고, '헝가리 왕 블라디슬라프'로부터 떠나도 좋다는 허락을 받은 뒤 카르파티아산맥을 넘은 뒤 드라고슈가 짐승을 죽인 바로 그 자리에서 정착했다고 한다. 이후 몰다비아의 문장엔 오록스의 머리가 새겨졌다.

20세기 루마니아의 종교 역사가이자 시카고 대학교 교수인 마르체아 엘리아데(Mircea Eliade, 1907 ~ 1986)는 저서 <잘목시스에서 칭기즈칸까지(De Zalmoxis à Gengis-Khan)>에서 '드라고슈 보이보드와 의식적 사냥'이라는 파트에서 드라고슈가 오록스를 사냥한 이야기를 다뤘다. 그는 사냥과 오록스 희생은 몰다비아 원주민들의 전설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추정하면서, 해당 지역 족장국의 건국이나 식민지화와 관련된 '영웅적 행위'를 전설로 승화했다고 주장했다. 또한 그는 이 전승은 헝가리 신화에서 쌍둥이 형제 후노르(Hunor)와 마고르(Magor)가 사슴을 쫓다가 헝가리에 정착한 이야기와 유사하다고 밝혔다.

대부분의 몰다비아 연대기는 드라고슈가 1359년에 몰다비아에 도착했다고 기술했지만, 몰다비아-폴란드 연대기만은 1352년이라고 명시했다. 현대 학계에서는 몰다비아의 건국 연도에 대해 현재까지 합의를 내리지 못했다. 일부 학자들은 1345년 세케이 백작 라크피 언드라시(Lackfi András, 1310 ~ 1359)가 트란실바니아를 침공한 타타르족을 격파한 뒤, 헝가리 국왕 러요시 1세가 드라고슈를 마라무레슈에 정착하여 타타르족을 막게 했을 거라며, 드라고슈는 1345년에 나라를 세웠을 거라고 주장했다. 또다른 학자들은 1347년 3월 27일 교황 클레멘스 6세가 러요시 1세의 요청에 따라 쿠마니아 로마 가톨릭 교구를 설립한 것과 연관 지으면서, 드라고슈가 1347년에 나라를 세웠다고 추정하며, 루마니아 역사가 블라드 조르제스쿠(Vlad Georgescu, 1937 ~ 1988)는 1352년 러요시 1세가 타타르족을 징벌하기 위한 원정을 단행했을 때 드라고슈도 가담했으며, 나중에 국경 지대의 수비대장으로 선임되었을 거라고 추정했다. 다른 학자들은 대부분의 몰다비아 연대기가 제시한 1359년이 몰다비아 공국의 건국 연도라고 추정한다.

드라고슈가 중심지로 삼은 곳 역시 불확실하다. 일부 전승에 따르면, 드라고슈는 시레트에 자리를 잡았다고 한다. 일부 학자들은 부코비나에서 드라고슈의 나라가 건국되었다고 추정한다. 17세기 몰다비아 연대기 작가 미론 코스틴(Miron Costin, 1633 ~ 1691)은 색슨 장인들이 드라고슈의 초대를 받고 몰다비아에 이주한 뒤 포도 재배를 도입했다고 기술했다.

이렇듯 거의 모든 몰다비아 연대기들은 드라고슈를 몰다비아의 건국자로 명시했지만, 이와 상반되는 기록들이 몇 개 있다. 러요시 1세는 1360년 3월 20일, 마라무레슈의 마라 강을 따라 세워진 6개 마을을 줄레슈티라는 인물에게 넘겼는데, 그 이유는 줄레슈티가 몰다비아의 많은 반항적인 블라흐인들을 순종하게 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15세기 폴란드 연대기 작가 얀 드우고시(Jan Długosz, 1415 ~ 1480)와 필리포 부오나코르시(Filippo Buonaccorsi, 1437 ~ 1496)는 블라흐족 지도자 페트루가 1359년 쉬페니트(현재 우크라이나의 슈핀치)에서 폴란드군을 격파했다고 기술했다. 현대의 많은 학자들은 드라고슈는 몰다비아에 거주하는 수많은 블라흐족 집단 중에서 러요시 1세에게 충성한 부족장일 뿐이라고 본다.

익명의 몰다비아 연대기와 몰다비아-폴란드 연대기에 따르면, 드라고슈는 2년간 통치했다고 한다. 일부 역사가들은 드라고슈가 1353년에 사망했다고 주장하며, 드라고슈가 1357년 타타르족과 맞서 싸우다가 전사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고, 대부분의 몰다비아 연대기의 서술을 받아들인 학자들은 1361년에 사망했다고 본다. 그 후 드라고슈의 아들 사스가 보이보드에 올라 4년간 다스렸지만, 사스가 사망한 뒤 마라무레슈의 전임 보이보드 보그단 1세가 사스의 아들 발슈를 축출하고 몰다비아를 장악했다. 보그단 1세가 몰다비아로 이동한 이유는 알려지지 않았다. 일부 학자들은 그가 러요시 1세에게 반항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몰다비아로 이동했을 거라고 추정했고, 빅토르 스피네이 등은 드라고슈의 사례를 본받았을 거라며, 몰다비아에 거주하는 블라흐족이 러요시 1세의 권위에 반대한다는 걸 잘 알았을 거라고 추정했다. 실제로 러요시 1세가 1360년 3월 20일에 발행한 문서에는, 블라흐 족이 몰다비아에서 공공연한 반란을 일으켰지만, 보그단이 전에 축출했던 상대인 줄러의 여섯 아들 줄 한 명인 줄레슈티의 드라고슈가 그들을 토벌하고 몰다비아에서 왕의 통치를 회복했다는 내용이 실려 있다.

1365년 2월 2일자 헝가리 왕실 헌장에 따르면, 보그단과 그의 아들들은 헝가리에서 은밀하게 도망친 뒤 몰다비아를 공격했다. 몰다비아 보이보드 사스의 아들 발슈는 그들에게 저항하려 했지만 중상을 입었고, 많은 부하를 잃은 뒤 마라무레슈로 피신했다. 러요시 1세는 이에 대한 보복으로 마라무레슈에 있던 보그단의 영지를 몰수해 발슈 일행에게 넘겨줬다고 한다. 보그단이 언제 몰다비아로 넘어갔는지에 대해서는 1359년, 1363년, 1364년, 1365년 등 다양한 년도가 제시되지만 어느 쪽이 옳은지는 불분명하다. 보그단은 헝가리의 간섭을 회피하고 독자적인 나라를 꾸리다가 1367년경에 사망했고, 라다우치에 있는 보그다나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1407년 비스트리차 수도원에 기록된 보이보드 목록에는 드라고슈와 사스가 언급되지 않고 보그단부터 시작하는데, 이는 당시 사람들이 몰다비아 공국의 건국자는 헝가리 왕국을 추종한 드라고슈가 아니라 보그단이라고 인식했음을 암시한다.

4.3. 보그다네슈 왕조

보그단 1세 사후, 보그단 1세의 장남 슈테판의 차남인 페트루 1세가 보이보드에 올랐다. 페트루 1세는 차남이었지만, 대다수 블라흐인의 지지를 얻고 보이보드를 맡을 수 있었다. 이에 형 슈테판은 여러 보야르와 함께 폴란드 국왕 카지미에시 3세의 궁정으로 가서 충성을 서약하고 공물을 납부할 테니 보이보드를 탈환하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1368년 6월 30일, 슈테판은 폴란드군과 함께 몰다비아로 진군했지만, 코트리 플로니니에서 숲길을 한창 행진하던 중 몰다비아군이 나무를 그들 머리 위로 대거 쓰러뜨리는 전법을 쓰는 바람에 참패했고, 죽지 않은 자들은 생포되었다. 몰다비아인들은 산도미르, 크라쿠프, 르비우 등 3개 지역의 깃발과 9개의 다른 귀족 가문의 깃발 등 풍부한 전리품을 확보했다. 그 후 페트루 1세는 형 슈테판에게 베사라비아의 통제권을 부여하면서 화해했다. 그러나 이후 페트루 1세의 행적은 알려지지 않았으며, 그의 무덤도 알려지지 않았다.

1368년, 보그단 1세의 차남 라슈쿠가 페트루 1세의 뒤를 이어 보이보드에 선임되었다. 그가 조카 페트루 1세의 뒤를 이어 보이보드가 될 수 있었던 경위는 알려진 바 없다. 1370년 폴란드 국왕 카지미에시 3세의 뒤를 이어 폴란드 왕위를 겸한 헝가리 국왕 러요시 1세는 동쪽과 북쪽 모두에서 몰다비아 공국을 압박할 수 있게 되었다. 동시대 헝가리 역사가 헝가리의 성직자이자 왕실 역사가 쿠쿨로이 야노시(Küküllòi János, 1320 ~ 1393)는 러요시 1세가 이때에 비로소 몰다비아를 복속했다고 기술했다.

1370년 초, 라슈쿠는 폴란드 출신의 프란치스코회 수도자 2명을 로마로 파견해 교황 우르바노 5세에게 자신이 정교회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하겠다고 알렸다. 그러면서 자기가 군림하고 있는 시레트에 가톨릭 교구를 설립해 달라고 요청했다. 우르바노 5세는 곧 프라하 대주교인 블라심의 얀 오코, 브로츠와프 주교인 포고르젤라의 프셰츠와프, 크라쿠프 주교인 플로리아노 모크르스코를 파견해 몰다비아의 상황을 조사하게 했다. 그들의 보고는 우르바노 5세의 후임자인 교황 그레고리오 11세에게 전달되었다.

그레고리오 11세는 1371년 플로리아노 모크르스코에게 폴란드 성직자 안제이 야스트체비에츠를 시레트의 초대 주교로 세우도록 지시했다. 시레트 주교는 교황청에 직접 종속되었으며, 그레고리오 11세는 라슈쿠에게 "몰다비아 지역과 왈라키아 사람들의 공작(dux Moldaviensis partium seu nationis Wlachie)"이라는 칭호를 부여했다. 그러나 라슈쿠의 아내 아나와 딸 아나스타샤는 가톨릭 개종을 거부했다. 이에 라슈쿠는 그레고리오 11세에게 아나와 이혼할 수 있는지 물어봤지만, 그레고리오 11세는 1372년 1월 25일자 편지에서 이혼은 불가하다고 답했다. 라슈쿠는 1375년경에 사망했고, 아버지 보그단 1세처럼 라다우치의 보그다나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4.4. 무사티니 왕조

4.4.1. 페트루 2세 ~ 알렉산드루 1세

라슈쿠 사후 몰다비아 귀족 코스테아와 보그단 1세의 딸 무샤타의 아들인 페트루 2세가 몰다비아 보이보드에 선임되었다. 페트루 2세는 폴란드 국왕 브와디스와프 2세 야기에우워와 좋은 관계를 맺었다. 1387년, 그는 성 십자가 헌양일에 르비우에서 거행된 행사에 참석해 브와디스와프 2세에게 경의를 표하고 몰다비아에서의 주권을 인정받았다. 또한 왈라키아 보이보드 미르체아 1세에게 브와디스와프 2세와 동맹을 맺을 것을 촉구했으며, 이는 1389년 12월부터 1390년 3월까지 라돔, 루블린, 수체아바에서 연이어 열린 협상 끝에 미르체아 1세가 폴란드와 손잡고 헝가리 왕국-크로아티아 왕국 국왕 지그문트에 대항하기로 하면서 성립되었다. 1388년 2월에는 브와디스와프 2세에게 은화 3,000 루블을 빌려주었고, 그 대가로 8,000 제곱키로미터에 달하는 할리치와 포쿠티아 시를 약속받았다.

페트루 2세는 수체아바 요새를 건설하고 수체아바의 비스트라차 수도원을 세웠으며, 시레트에 도미니코 수도원 건설을 지원했다. 그러난 한편 수체아바에 몰다비아 군주좌를 정해 옛 수도인 시레트에 있던 라틴 교구를 사실상 몰락시켰으며,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의 뜻에 반해 체타데아 알바에 군림한 정교회 주교 이오시프를 지켰다가 총대주교로부터 파문을 선고받았다. 한편, 그는 몰다비아 역사상 최초의 은화를 주조했다. 이 은화의 앞면에는 오록스의 두상이 새겨졌고, 뒷면에는 방패와 다양한 수의 플뢰르 드 리스가 새겨졌다. 이 디자인은 이후 몰다비아 통치자들이 주조한 동전의 표준이 되었다.

1391년 페트루 2세가 사망한 뒤, 동생 로만 1세가 몰다비아 보이보드에 선임되었다. 그는 형처럼 폴란드 국왕 브와디스와프 2세 야기에우워의 종주권을 인정했다. 그가 남긴 문서에는 전임자들 중 어느 누구도 사용하지 않았던 아래의 칭호가 사용되었다.
"위대하고 유일한 통치자, 신의 자비로 보이보드 로만이 몰다비아 산에서 해변까지 루마니아를 통치한다."

이 칭호의 사용은 그의 시대에 몰다비아 일대에서 부족 통합 과정이 끝났다는 걸 암시한다. 1393년 1월 5일에는 "루마니아 몰다비아의 보이보드이자 산에서 해변까지 왈라키아 전체의 상속자"라는 칭호를 사용했다. 그는 왈라키아나 문테니아의 통치자가 아니었지만, 자신의 주권이 왈라키아에도 미친다는 걸 주장하기 위해 이런 칭호를 사용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1392년에 발간된 몰다비아 공실 문서 <우리쿨 루이 로만 1세(Uricul lui Roman I)>에 따르면, 그는 아들 알렉산드루 및 보그단과 함께 이바누슈(Ivănuş)라는 인물에게 "그의 충실한 봉사에 보답하기 위해" 시레트의 3개 마을을 수여했다고 한다. 이 문서의 원본은 부쿠레슈티의 중앙 국립 역사 기록 보관소에 보관되었는데, 양피지에 밀랍 봉인과 빨간색 실크 끈을 달았으며, 슬라브어로 작성되었다. 1393년, 포돌리아 공작 표도르 코리아토비치가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총독 비타우타스를 상대로 카메니타 요새와 주변 영토를 놓고 싸우는 걸 도왔지만, 브라츠라우 전투에서 패배했다. 이후 표도르 코리아토비치는 헝가리로 망명했다.

1394년 로만 1세가 사망한 뒤, 아들 슈테판 1세가 보이보드에 선임되었다. 1395년 1월 6일, 몰다비아 공실 문서는 슈테판 1세가 몰다비아 땅과 국민의 이름으로 폴란드를 주권자로 받들며, 폴란드의 적, 특히"헝가리의 폭군에 대항하여" 무기를 들겠다고 밝혔다. 헝가리 왕국-크로아티아 왕국 국왕 지그문트는 이에 반발해 몰다비아에서 헝가리의 영향력을 배제하고 자국의 가신으로 대체하기 위해 군대를 일으키기로 했다. 1395년 초, 카니자의 슈테판이 이끄는 헝가리군 선봉대가 크리스투루 세쿠이에스크에서 오이투즈 고개 방향으로 침공했다. 이후 지그문트가 직접 지휘하는 헝가리군 주력 부대는 판가라시 고개를 통과해 슈테판 1세가 거주하는 할라우 시로 향했다.

지그문트는 판가라시 고개를 넘은 뒤 네암슈 요새를 요새를 포위했지만, 몰다비아군의 유격 전술로 인해 식량이 거진반 바닥나고 병사들이 피폐해지면서 공략에 번번이 실패했다. 이때 슈테판 1세가 앞으로는 헝가리 국왕을 주군으로 모실 테니 적대 행위를 중단해달라고 요청하자, 지그문트는 이를 받아들여 후퇴했다. 하지만 슈테판 1세는 곧바로 몰다비아인을 대거 동원한 뒤 트르구 네암슈 시 인근 비카즈 고개로 돌아가던 헝가리군을 추격한 끝에 1395년 2월 12일 긴다오아니 전투에서 기습 공격을 감행했다. 지그문트는 적군의 화살 세례로 인해 막대한 손실을 입고, 겨우 목숨만 건져 트란실바니아로 피신했다.

1399년 8월 12일, 슈테판 1세는 폴란드의 동맹자로서 타타르족을 상대로 한 보르스클라 전투에 군대를 파견했지만 패배를 면치 못하고 많은 병력을 상실했으며, 본인도 중상을 입었다. 그해 11월 28일 이전에 35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 라두우치에 있는 보그다나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슈테판 1세의 두 아들 보그단과 슈테판은 너무 어렸기에, 형제 이우가가 보이보드에 선임되었다. 그러나 1400년 6월, 이복형제인 알렉산드루 1세에게 축출되었다. 일부 기록에 따르면, 이우가는 형제 보그단과 함께 쿠르테아 데 아르게슈로 피신해 왈라키아 보이보드 미르체아 1세의 보호를 받았다. 다른 기록에 따르면, 미르체아 1세는 군대를 이끌고 몰다비아로 가서 알렉산드루 1세를 자신의 가신으로서 몰다비아에 앉히고 이우가를 인질로 삼아 데려갔다고 한다.

몰다비아 연대기 작가 그리고레 우레체(Grigore Ureche, 1590 ~ 1647)에 따르면, 알렉산드루 1세는 몰다비아의 정치, 행정 및 교회 조직의 중요한 작업을 수행했다. 그는 1408년 폴란드 상인들에게 폭넓은 특권을 부여해 무역을 장려했으며,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로부터 몰다비아 대주교구 수립을 인정받았다. 또한 1402년(다른 기록에는 1415년)에 세타테아 알바(Cetatea Alba, 하얀 요새)에서 수체르바로 '새로운 성 요한'[4]의 유물을 가져왔다. 이 유물은 처음엔 수체아바에 있는 미라우치 지역 교회에 안치되었다가, 나중에 수체아바에 있는 성 새 요한 수도원으로 이장되었다. 수체아바에서 새로운 성 요한의 유물을 가져오는 이 행사는 루마니아 국민의 대중 의식에서 특별한 의미를 가지며, 몰도바의 교회와 수도원의 많은 프레스코에 그려졌다.

한편, 그는 외교에서도 능수능란한 솜씨를 발휘했다. 폴란드 국왕 브와디스와프 2세 야기에우워의 종주권을 인정하고 1402년, 1404년, 1407년, 1411년 및 1415년에 그와 동맹 협약을 체결해 적에 대한 조언과 도움을 약속했다. 또한 폴란드 남부에서 몰다비아를 거쳐 다뉴브 강 어귀까지 이어지는 상업 도로를 통제해 막대한 이익을 창출했다. 그러면서도 헝가리 왕국과도 평화를 유지해, 갈등이 생기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였다. 그는 브와디스와프 2세의 가신으로서 튜튼 기사단과의 전투에 여러 번 참전했다. 특히 1410년 그룬발트 전투에 참전해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군이 튜튼 기사단을 격파하는 데 일조했다. 1420년 오스만 제국군 분견대가 칠리아 요새와 세타테아 알바 요새를 포위했지만 알렉산드루 1세가 급파한 부대에 격퇴되었는데, 이것이 몰다비아와 오스만 제국의 첫번째 전투였다.

4.4.2. 혼란기

1432년 1월 1일, 알렉산드루 1세가 사망한 뒤 장남 일리아슈가 보이보드에 선임되었다. 그는 폴란드 국왕 브와디스와프 2세 야기에우워에게 경의를 표했다. 그러나 1433년 형제 슈테판 2세가 왈라키아 보이보드 알렉산드루 1세 알데아의 후원을 받아 반기를 들었고, 그해 10월 이아시 인근의 로론 전투에서 슈테판 2세에게 참패한 뒤 폴란드로 도주했다. 1434년 2월, 일리아슈는 폴란드의 도움을 받아 보이보드에 복위하고자 돌아온 뒤 수체아바 인근 다르마네스티에서 재차 맞붙었지만, 또다시 패배했다. 하지만 몰다비아 보야르들이 슈테판 2세 지지자들과 일리아슈 지지자들로 나뉜 덕분에 세력을 보전할 수 있었다. 결국 슈테판 2세는 1435년 8월 일리아슈와 타협했다. 슈테판 2세는 비를라트, 테쿠치, 칠리아를 포함하는 소위 저지대의 통치자로 군림했고, 일리아슈는 상류 지대의 통치자가 되었다.

1436년 초, 슈테판 2세는 합의를 깨고 그를 상대로 전쟁을 일으켰고, 그해 3월 8일 키페레스티 전투에서 일리아슈를 물리쳤다. 이후 두 사람은 다시 공동 통치자로 군림하되, 슈테판 2세가 우선권을 가지는 것으로 합의했다. 1439년과 1440년, 타타르족이 몰다비아 공국을 공격해 비슬루이와 바를라트 시를 파괴했지만, 두 통치자는 이에 맞서 싸울 엄두를 내지 못했다. 1443년 5월, 슈테판 2세는 폴란드 국왕 브와디스와프 3세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에 여념이 없는 틈을 타 일리아슈를 폐위하고 그의 눈을 뽑아 폴란드로 추방했다.

이후 슈테판 2세는 또다른 형제 페트루 3세를 공동 보이보드로 삼고 통치를 이어갔지만, 1447년 7월 일리아슈의 아들인 로만 2세가 반기를 들어 그를 처단하고 보이보드 직위를 찬탈했다. 이후 페트루 3세와 맞선 끝에, 1447년 8월 그를 공동 통치자로 삼는 조건으로 화해했다. 1447년 12월, 페트루 3세를 암살하려는 시도를 벌였으나 실패했고, 페트루 3세는 트란실바니아로 피신해 그곳의 궁정백 후녀디 야노시의 영접을 받았다. 1448년 2월 오스만 제국군이 몰다비아를 침공하자 크라쿠프로 망명했고, 그해 7월 2일에 급사했다.

로만 2세 사후 페트루 3세가 후녀디 야노시의 지원을 받아 몰다비아에 복귀했다. 1448년 후녀디 야노시가 오스만 제국을 상대로 원정을 단행했을 때 3,000명을 지원했지만, 야노시의 원정은 2차 코소보 전투의 패배로 끝났다. 또한 칠리아 요새현재의 루마니아 도브루자 북부 툴체아 카운티의 칠리아 베체)를 후녀디 야노시에게 양도했다. 1448년 10월 30세의 나이로 사망했는데, 사망 경위는 알려지지 않았다. 이후 후녀디 야노시가 파견한 헝가리 장군 치우바르 보다가 임시로 군림했다. 이에 대해 루마니아 역사가이자 총리인 니콜라에 이오르가(Nicolae Iorga, 1871 ~ 1940)는 몰다비아 보야르들이 헝가리인이 군림하는 걸 받아들였을 리 만무하다며, 그는 몰다비아 제10대 보이보드 알렉산드루 1세의 사생아였을 가능성이 있다고 추정했지만, 진위는 불분명하다.

1449년 2월 로만 2세의 형제인 알렉산드루 2세가 보야르들의 추대를 받아 보이보드에 선임되었다. 그는 브라쇼브와 샤라 바르세에 거주하는 색슨 상인들에게 특권을 부여했으며, 네암츠, 몰도비타, 비스트리타 수도원에 영지를 헌납했다. 또한 타타르족과 전쟁을 치르는 폴란드 왕국에 군사 지원을 제공했다. 1449년 10월 12일, 일리아슈의 형제인 보그단 2세가 후녀디 야노시의 지원을 받아 반기를 들어 시레트 강 인근의 타마세니 전투에서 알렉산드루 2세를 격파하고 보이보드에 군림했다. 알렉산드루 2세는 폴란드의 삼보르 시로 도주했다.

1540년 초, 알렉산드루 2세는 폴란드군의 지원을 토대로 몰다비아를 되찾기 위한 원정을 단행했지만 실패했다. 1450년 2월 11일, 보그단 2세는 후녀디 야노시와 동맹을 맺고, 그를 몰다비아의 보호자로 지명했다. 이에 폴란드 당국은 이러다가 몰다비아가 헝가리 왕국에 완전히 귀속될 것을 우려해, 알렉산드루 2세를 몰다비아 보이보드에 앉히기 위한 원정을 재차 나서기로 했다. 그해 6월 24일, 르비우의 스타로스타 게네랄니인 피오트르 오드로바츠, 산도미에시 스타로스타 피오트르 코니에츠폴스키가 지휘하는 폴란드군과 디드리히 부자키가 지휘하는 리투아니아군이 르비우에서 집결했고, 알렉산드루 2세의 소규모 군대가 합류했다.

이후 폴란드군이 알렉산드루 2세를 앞세워 공세를 개시해 베사라비아 북부로 진군했다. 보그단 2세는 이에 대응해 청야 전술을 시행해 적의 보급난을 가중시키고, 적군을 몰다비아 내부로 깊숙히 유인한 뒤 부트나리우 강과 바라트 강이 합류하는 지점에서 폴란드군과 평화 협상을 한 끝에 9월 5일 평화 협약을 맺었다. 이에 따르면, 보그단 2세는 1453년까지 통치를 보장받되, 그 기간 동안 매년 50,000 플로린을 알렉산드루 2세에게 지불하기로 했고, 폴란드에게 연간 7,000 굴덴의 공물을 제공하기로 했다. 그렇게 합의를 맺은 폴란드군이 후퇴를 개시했지만, 그는 곧바로 합의를 깨고 크라스나 강과 바라트 강이 합류하는 크라스나 평원에서 적군을 기습 공격해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오직 알렉산드루 2세가 이끄는 몰다비아군과 소규모 폴란드인만이 빠져나갈 수 있었다.

1451년 10월 12일, 페트루 4세 아론이 루세니에서 정변을 일으켜 보그단 2세를 살해하고 보이보드 작위를 찬탈했다. 이후 페트루 4세에게 반감을 품은 몰다비아 보야르들이 알렉산드루 2세를 추대했다. 페트루 4세는 몰다비아를 분할하게 해줄 테니 협의해달라고 요청했지만, 알렉산드루 2세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국 페트루 4세 아론은 1452년 2월 24일에 축출되었고, 알렉산드루 2세가 집권했다. 1452년 2월 17일, 알렉산드루 2세는 후녀디 야노시에게 후녀디가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을 벌일 때 참여하겠다고 약속했다. 이와 동시에, 그는 폴란드 국왕에게 경의를 표했다.

1454년 8월 22일, 부정부패를 일삼는 알렉산드루 2세에게 반감을 품은 보야르들이 페트루 4세 아론을 옹립하고 그를 축출했다. 1455년 2월 알렉산드루 2세가 반격해 보이보드 직위를 일시적으로 상실했지만, 3월 25일 모길라 전투에서 알렉산드루 2세를 격파하고 보이보드 직위를 탈환했다. 알렉산드루 2세는 체타테아 알바(Cetatea Alba, 흰색 성채)로 피신했으며, 3개월 후인 5월 25일에 독살의 징후를 보이며 사망했다. 이리하여 입지를 굳힌 페트루 4세 아론은 몰다비아에 찾아온 폴란드 상인들에게 특권을 수여한 아버지의 칙령을 재확인했으며, 헝가리 왕국섭정 후녀디 야노시의 보호를 받았고, 후녀디 야노시가 1456년 베오그라드 공방전를 치른 후 얼마 안가 사망한 뒤에는 왈라키아 보이보드 블라드 3세의 보호를 받았다. 하지만 나중에는 오스만 제국 파디샤 메흐메트 2세의 압력에 굴복했고, 1456년 매년 오스만 제국에 2,000 굴덴의 공물을 바치는 대가로 몰다비아에서의 주권을 인정받았다.

한편, 보그단 2세의 아들 슈테판은 왈라키아 공국으로 망명한 뒤 그곳을 다스리던 블라드 3세와 친분을 맺었다. 1457년 4월, 슈테판은 블라드 3세가 제공한 왈라키아인 1,000명이 포함된 6천 병력을 이끌고 몰다비아 공국에 들어선 뒤 시레트 강을 따라 몰다비아 공국의 수도 수체아바로 전진했다. 페트루 4세 아론은 서둘러 군대를 모은 뒤 4월 12일 시레트 강변의 돌제스티에서 슈테판을 요격했다. 하지만 슈테판은 이를 거뜬히 격파했다. 뒤이어 4월 12일 오르비치에서 페트루 4세와 재차 맞붙어 또다시 승리를 거뒀고, 페트루 4세 아론은 폴란드로 망명했다. 이후 슈테판은 시레트 계곡의 디렙타테아에서 몰다비아 대주교 테옥티스투의 주관하에 대관식기름 부음을 거행하고 몰다비아 보이보드에 선임되었다. 이 인물이 바로 몰다비아 공국 역사상 최고의 군주인 슈테판 3세이다.

4.4.3. 슈테판 3세: 위대한 자(cel Mare)

4.4.3.1. 외치
4.4.3.1.1. 초기 원정
슈테판 3세는 몰다비아 보이보드에 등극한 직후 폴란드 국왕 카지미에시 4세 야기엘론치크가 그 나라로 망명한 페트루 4세 아론을 도울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몰다비아-폴란드 국경지대를 연이어 습격했다. 하지만 그는 폴란드 왕국과의 장기적인 갈등은 몰다비아 공국의 안위에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고 판단하고, 1459년 4월 4일 드니스테르 강에서 폴란드 왕국과 평화 협약을 맺었다. 그는 카지미에시 4세의 종주권을 개인적으로 인정했고, 타타르에 맞서 폴란드를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카지미에시 4세는 슈테판 3세가 적과 맞서 싸울 때 돕겠으며, 페트루 4세 아론이 몰다비아로 돌아오는 걸 금지하겠다고 약속했다. 이에 페트루 4세는 헝가리 왕국으로 망명해 트란실바니아의 세케이란트에 정착했다. 1461년, 슈테판 3세는 세케이란트를 여러 차례 침략해 약탈을 자행했다. 페트루 4세 아론은 그를 피해 헝가리의 수도 부더로 이동해 헝가리 국왕 마차시 1세의 보호를 받았다.

당대 사료에 따르면, 슈테판 3세와 블라드 3세의 관계는 1462년 초부터 악화되었다. 1462년 4월 2일, 카파(현재 크림 반도의 페오도시아)의 제노바 공화국 총독은 폴란드 국왕 카지미에시 4세에게 블라드 3세가 오스만 제국과 전쟁을 치르는 동안 슈테판이 왈라키아를공격했다고 보고했다. 또한 오스만 제국 파디샤 메흐메트 2세의 비서이며 메흐메트 2세에 관한 연대기를 집필한 투르순 베그는 블라드 3세가 메흐메트 2세의 침공에 맞서는 동안 몰다비아군으로부터 나라를 보호하기 위해 왈라키아-몰다비아 국경 인근에 7,000명을 배치해야 한다고 기록했다.

1462년 6월 말, 슈테판 3세는 블라드 3세와 메흐메트 2세가 전쟁을 치르는 틈을 타 흑해 연안의 항구 도시인 킬리야 시와 체타티아 알바 성이 있는 부자크 일대를 탈환하려 했다. 이 지역은 원래 왈라키아에 속했지만 14세기 후반에 몰다비아에 편입되었다. 하지만 오랜 내전으로 몰다비아가 혼란에 빠진 동안 왈라키아에 돌아갔고, 킬리야는 헝가리와 왈라키아가 공동 통치했다. 슈테판 3세는 오스만 분견대와 함께 요새를 8일간 포위했지만, 헝가리와 왈라키아 수비대 7,000명에게 격파되었다. 이때 그는 왼쪽 종아리 또는 왼쪽 발이 파편에 박히는 바람에 중상을 입었고, 평생 왼쪽 다리를 절어야 했다.

1465년 1월 24일, 슈테판 3세는 다시 킬리야를 포위 공격해 이틀 만에 항복을 받아냈다. 그 후 1467년 8월 18일 트란실바니아 귀족들이 세금 면제 특권을 회수한 마차시 1세의 결정에 반발해 반란을 일으지카, 슈테판 3세는 이들을 도와주기 위해 군대를 일으켜 세케이란트로 진군했다. 하지만 마차시 1세는 그해 9월 군대를 일으켜 트란실바니아로 진군해 반란군을 복종시키고 주동자들을 처벌한 뒤, 슈테판 3세를 반란의 주동자로 낙인찍고 보복을 결정했다. 1467년 11월, 마차시 1세는 대군[5]을 일으켜 브라쇼브를 떠나 오이투즈 고개를 거쳐 몰다비아로 향했다. 이에 맞서는 슈테판 3세의 병력은 12,000명이었다.

11월 19일 트로투술을 공략하고 바카우 목조 요새를 정복하고 불사른 마차시 1세는 시레 계곡을 지나 수체아바로 진군했다. 11월 29일부터 12월 7일 사이에 로만, 타르구 네암츠를 점령했고, 마주치는 모든 이들을 성별, 나이 등을 고려하지 않고 모두 죽였다. 이후 3일간의 행군과 약탈 끝에 1467년 12월 14일 당시 색슨족과 헝가리인이 거주했던 도시이자 가톨릭 주교좌의 소재지였던 바이아를 점령했다. 이에 슈테판 3세는 12월 14일 밤에 헝가리군을 기습 공격해 15일 새벽까지 전투를 치른 끝에 헝가리군을 물리쳤다.(바이아 전투) 이후 슈테판 3세는 헝가리군에 호응해 자신에게 반기를 들었거나 마차시 1세를 잡는 데 열의를 보이지 않은 보야르 20명과 지주 40명을 사로잡은 후 처형했다.

1468년 7월 28일, 슈테판 3세는 수체아바에 찾아온 폴란드 사절 앞에서 카지미에시 4세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그 후 1469년 슈테판 3세가 파견한 필리프 팝(Filip Pop)의 몰다비아군이 세클러란트로 진군해 약탈을 자행했으며, 페트루 4세 아론을 체포해 참수형에 처했다. 1470년 여름, 킵차크 칸국의 아흐메트 칸이 리투아니아 대공국폴란드 왕국의 동부 영토를 습격해 약탈을 자행한 뒤 몰다비아 공국으로 진군했고, 슈테판 3세는 이에 맞서 군대를 일으켰다. 당대 기록에 따르면, 양자간엔 여러 차례 소규모 접전이 있었고, 이어진 2차례 전투에서 몰다비아군이 모두 승리했다.

이에 킵차크 칸국군은 여성과 어린이 수천 명과 소, 말, 그리고 양떼 수백 마리를 데리고 후퇴했다. 슈테판 3세는 이들을 우회해 리프니치 인근의 라임나무 숲에 매복한 뒤, 숲에 들어선 그들을 습격했다. 이후 벌어진 리프니치 전투에서, 수많은 타타르인들이 전사했고, 많은 이가 도망치다가 드네스트르강에 빠져 익사했다. 여기에 칸의 아들을 포함한 수많은 타타르인이 생포되었고, 칸의 형제는 전사했다.[6] 슈테판 3세는 킵차크 칸국의 침략을 격파한 뒤 드네스트르 강변을 따라 여러 방어 시설을 건설했고, 올드 오르헤이와 소로차에 새로운 요새를 세웠다.
4.4.3.1.2. 왈라키아 쟁탈전
1471년, 왈라키아 공국의 보이보드 라두 3세가 킬리아 요새를 탈환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했지만, 수비대의 완강한 저항으로 공략에 실패했다. 이후 슈테판 3세는 왈라키아 공국을 복속하기로 마음먹고, 1472년 바사라브 3세를 섭외했다. 하지만 라두 3세는 오스만 제국 파디샤 메흐메트 2세와 무척 가까운 사이였기에, 그를 축출했다간 오스만 제국의 분노를 살 게 자명했다. 이에 슈테판 3세는 헝가리 왕국에 화해를 제안했고, 마차시 1세도 이에 응했다. 여기에 1472년 메흐메트 2세가 백양 왕조샤한샤 우준 하산이 제국 동부 영토를 침략하는 걸 막기 위해 아나톨리아로 가자, 그는 아예 오스만 제국에게 바치던 공물을 끊어버리고 왈라키아를 본격적으로 공략하기로 했다.

1473년 11월, 슈테판 3세의 몰다비아군과 바사라브 3세가 고용한 용병대가 밀코프 강을 건너 왈라키아로 진격했다. 그 해 11월 18일에서 20일 사이, 라두 3세는 프라호바의 게르기차 인근에서 침략군과 맞섰지만 패배를 면치 못하고 부쿠레슈티 성채로 피신했다. 이후 한동안 농성하던 그는 보이보드들이 대거 침략군에 가담했다는 걸 알게 되자, 11월 23일 밤에 다뉴브 강변 오스만 제국 요새인 지우르지우 요새로 피신했다. 11월 28일, 라두 3세는 13,000명의 오스만군과 함께 왈라키아를 탈환하려 했지만 몰다비아군과 6,000가량의 왈라키아군이 연합한 바사라브 3세 휘하 군대에게 격파되었다. 12월 23일, 라두 3세는 다시 30,000 가량의 오스만군의 선두에서 다뉴브 강을 건넜다. 슈테판 3세의 지원을 받지 못한 바사라브 3세는 몰다비아로 피신했다.

1474년 3월, 슈테판 3세의 지원을 받은 바사라브 3세가 라두 3세를 일시적으로 밀어냈다. 그러나 라두 3세는 몰다비아군이 철수하자마자 반격해 바사라브 3세를 도로 몰아냈다. 1474년 여름, 슈테판 3세의 지원을 받은 바사라브 3세가 라두 3세를 재차 몰아냈다. 바사라브 3세는 라두 3세가 재차 공격할 것을 우려해 트란실바니아 공 바토리 이슈트반에게 군사 지원을 요청했다. 트란실바니아군은 재빨리 왈라키아로 진군했지만, 바사라브 3세가 아닌 그의 사촌 바사라브 4세를 옹립하려 했다. 트란실바니아군은 바사라브 3세와 2차례 맞붙었는데, 처음에는 패배했지만 두 번째 전투에서는 격파했다. 한편, 슈테판 3세의 몰다비아군은 라두 3세를 지지하던 텔레아젠 요새를 며칠만에 함락하고 수비대를 학살하고 성채를 불태웠다.

슈테판 3세가 이렇듯 충실한 봉신인 라두 3세를 계속 축출하고 바사라브 3세를 왈라키아 보이보드로 앉히려 들자, 메흐멘트 2세는 몹시 격분했다. 그는 보복을 결심하고, 1474년 슈테판 3세에게 서신을 보내 왈라키아에 대한 공격적인 정책을 철페하고, 킬리야를 오스만 제국에 넘길 것이며, 납부하지 않은 공물을 당장 납부하라고 요구했다. 슈테판 3세는 이를 거부했고, 유럽 각지에 서신을 보내 오스만 제국이 몰다비아를 침공하려 하니 원군을 보내달라고 간청했다.
4.4.3.1.3. 메흐메트 2세와의 전쟁
1474년 10월 20일, 라두 3세는 오스만군의 지원을 토대로 바사라브 3세와 바사라브 4세를 몰아내고 보이보드에 복위했다. 또한 메흐메트 2세는 베네치아가 지배하던 슈코더르에 대한 공방전을 치르던 하딤 술레이만 파샤에게 포위를 풀고 소피아에 군대를 집결한 뒤, 몰다비아로 진격해 슈테판 3세를 굴복시키라고 지시했다. 5월 17일부터 8월 15일까지 3개월 가까운 기간 동안 힘겨운 공성전을 치르느라 지쳤던 오스만군은 슈코더르에서 몰다비아까지 한 달간 이동하며 악천후와 험난한 지형에 고통받았다. 1474년 9월 소피아에 집결하여 휴식을 취한 뒤, 왈라키아로 진군했다.

슈테판 3세가 나중에 교황청에 보낸 서신에 따르면, 오스만 기병대는 총합 30,000명에 달했다고 한다. 여기에 오스만 중갑 보병대와 크림 칸국과 발칸 반도의 여러 가신들이 보낸 군대가 가담했고, 불가리아 농민 2만 명이 동원되어 물 위에 다리를 건설하고 도로에서 눈을 치우며, 보급 마차를 운반하는 임무를 맡았다. 하딤 술레이만 파샤는 다뉴브 강을 건너 왈라키아 평원으로 가서 2주간 휴식을 취했고, 왈라키아 병사 17,000명을 추가로 확보했다.

슈테판 3세는 이에 맞서 기독교 세력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기를 희망했지만, 헝가리 왕국에서 1,8000명, 폴란드에서 2,000 기병대만 가세했을 뿐, 다른 데서는 별다른 지원을 받지 못했다. 슈테판 3세는 세케이 군인 5,000명을 고용했고, 몰다비아 병사 30,000명(이중 상비군은 10,000 ~ 15,000명)을 동원했으며, 대포 20문을 갖췄다. 그는 이 정도 병력으로는 적과 정면 대결을 벌이면 승산이 없다고 여기고, 계략을 통해 적군을 공략하기로 마음먹었다.

1474년 11월 몰다비아로 진군한 오스만 제국군은 진군로 주변의 모든 마을이 파괴되고 농경지는 불살라졌으며, 우물이 독을 타서 마실 수 없는 등, 적군이 청야 전술을 대대적으로 단행한 걸 확인했다. 하딤 술레이만 파샤는 신속한 승리를 위해 몰다비아로 깊숙이 진군했지만, 적 경기병대의 유격 전술로 인해 많은 군수물자가 피해를 봤으며, 오스만 장병들의 피해와 피로도 누적되었다. 한편, 슈테판 3세는 오스만군의 움직임을 정찰병을 통해 확인한 뒤, 바슬루이 시 인근 라코바 강 하구의 발라드 계곡과 숲 사이에 갇힌 습지 지역에 군대를 집중 배치한 뒤, 오스만 제국군이 이쪽으로 오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1475년 1월 10일 아침, 오스만 제국군은 몇 걸음 앞을 볼 수 없을 정도로 짙은 안개 속에서 발라드 계곡으로 진군했다. 당시 날씨는 추웠고, 눈이 녹기 시작해 발라드 초원 전체가 웅덩이로 가득했다. 수많은 사람과 말이 같은 곳을 지나가고 있었기에, 계곡은 진창이 되어 전진하기 매우 힘들었다. 슈테판 3세는 계곡 바닥에 병사 수천명을 배치해, 오스만군과 교전한 뒤 계곡 깊숙이 유인하도록 했다. 오스만군 선봉대가 나무 다리를 통해 발라드 강을 건너 진군하던 그 때, 계곡에서 적군 악공이 북을 치고 나팔을 부는 소리가 들리더니, 몰다비아군 수천 명이 그들을 덮쳤다. 이후 격투가 한동안 벌어지다가, 몰다비아군이 짐짓 전투력에서 열세를 보인 척하며 후퇴했고, 오스만군 선봉대는 그들을 궤멸하기 위해 계곡 깊숙이 진군했다.

한편, 후방에서 뒤따라가던 하딤 술레이만 파샤는 저 멀리서 북과 나팔 소리 및 전투 함성이 들리는 걸 보고, 적군이 계곡에 전부 집결했다고 여겼다. 그는 즉시 병사들을 독촉해 다리를 서둘러 건너서 아군과 합세하게 했다. 이윽고 충분히 많은 오스만군이 다리를 건넜다는 생각이 들자, 슈테판 3세는 포병대에게 다리를 향해 발포해 끊어버리도록 했다. 뒤이어 숲에 숨어있던 몰다비아 궁수들이 세 방향에서 계곡으로 밀려든 적을 향해 사격했다. 그들은 안개 때문에 적이 보이지 않았기에, 발소리를 따라 화살을 쐈다. 여기에 몰다비아 경기병대는 습격과 도주를 반복하면서 오스만군이 계곡으로 계속 밀려오도록 유도했다

이후 오스만군이 계곡에 배치된 몰다비아군 수천 명을 몰아붙일 때, 오스만 제국군 좌측면 인근 숲속에서 몰다비아 악공들이 돌연 나타나 전투 개시를 알리는 노래를 연주했다. 이에 하딤 술레이만 파샤는 적이 아군 좌측면을 공격하려 들 것이라 여기고, 공세를 잠시 중단하고 그쪽을 막기 위해 진형을 개편하도록 했다. 그러나 이것은 함정이었다. 오스만군 좌측면에서 나타난 이들은 악공들 및 소규모 병사 뿐이었고, 슈테판 3세와 몰다비아 주력군은 발라드 강 너머 오른쪽 숲에 매복했다. 오스만군이 자기들 좌측면을 지키기 위해 진형을 한창 짜고 있는 틈을 타, 슈테판 3세는 주력군을 이끌고 적의 우측면을 향해 돌진했다. 전혀 생각지도 않던 곳에서 공격당하자, 오스만 제국군은 공포에 휩싸였다. 많은 이가 순식간에 전사했고, 더 많은 이들은 무기를 내팽개치고 도주했다. 하딤 술레이만 파샤는 어떻게든 군대를 수습하려 애썼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자 결국 퇴각 명령을 내렸다. 이후 몰다비아군은 다뉴브강까지 적군을 추격해 대거 살육했다.

슈테판 3세는 바슬루이 전투에서 오스만 제국을 상대로 완승을 거두면서 유럽 전역에 명성을 떨쳤다. 폴란드 연대기 작가 얀 드우고시(Jan Długosz, 1415 ~ 1480)는 그를 "우리가 존경하는 다른 전쟁 영웅들보다 절대로 뒤지지 않으며, 튀르크에 대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둔 세계 통치자들 중 최초의 동시대 인물이다. 내 생각에 그는 튀르크에 대항하여 기독교 연합을 이끌기에 가장 합당한 인물이다."라고 극찬했다. 여기에 바사라브 3세가 그의 후원에 힘입어 왈라키아 보이보드로 등극했고, 바슬루이 전투에서 참패한 뒤 귀환하던 오스만 제국군 8,000명이 왈라키아로 진입할 때 습격해 격파했다.

슈테판 3세는 바슬루이 전투에서 사로잡은 고위급 장성들과 막대한 전리품을 폴란드 국왕이자 자신의 주군인 카지미에시 4세 야기엘론치크에게 보내 승전보를 알린 뒤, 군대와 자금을 제공해달라고 요청했다. 또한 교황청과 헝가리 국왕 마차시 1세에게 서신과 포로 몇명, 튀르크 군기를 보내며 지원을 요청했다. 그러나 카지미에시 4세는 돈과 인력이 모두 부족하다며 지원할 수 없다고 통보했고, 교황청은 아슬레타 크리스티(Athleta Christi, 그리스도의 승리자)라는 칭호를 수여하면서도 실질적인 지원을 해주지 않았다. 또한 마차시 1세는 슈테판 3세가 보낸 장교와 깃발들을 내세우면서, 자기가 오스만 제국을 상대로 대승을 거뒀다고 홍보할 뿐 슈테판 3세에게 별다른 지원을 해주지 않았다. 이렇듯 슈테판 3세가 완승을 거뒀음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지원을 받지 못하는 사이, 메흐메트 2세는 패전 소식에 격노해 며칠 동안 누구에게도 접견을 거부하고 복수할 계획을 구상했다.

1475년, 왈라키아 보이보드 바사라브 3세가 메흐메트 2세와 평화 협약을 맺고 반 오스만 연합에서 이탈했다. 이에 불만을 품은 슈테판 3세는 바사라브 3세에게 등을 돌리고, 그때까지 블라드 3세를 감금 중이던 헝가리 국왕 마차시 1세에게 블라드 3세를 석방해달라고 요청했다. 마차시 1세는 그의 요구를 받아들이기로 하고, 트란실바니아 남부의 수비를 블라드 3세에게 맡겼다.

1476년 봄, 메흐메트 2세가 90,000 ~ 150,000명에 달하는 대군을 일으켜 몰다비아로 진군했다. 여기에 왈라키아 보이보드 바사라브 3세도 10,000명을 오스만 제국군에 가담시켰고, 크림 칸국의 멜리 1세 기라이가 이끄는 타타르군 15,000명도 동쪽에서 몰다비아로 진격했다. 이에 슈테판 3세는 먼저 타타르군부터 격퇴하기로 하고, 프루트 강 유역에 있는 슈테파네슈티 마을 인근에서 타타르군을 요격해 격파했다. 그러나 뿔뿔이 흩어진 타타르군이 자기 고향을 파괴할 것을 우려한 많은 장병이 고향으로 돌려보내달라고 강하게 요구하자, 슈테판 3세는 어쩔 수 없이 그들을 돌려보내야 했다. 이로 인해 슈테판 3세에게는 12,000 ~ 15,000명 가량의 병력만 남았다. 이후 예정된 오스만 제국군에 맞서기 위해 청야 전술을 단행했다.

1476년 6월 하반기, 오스만 제국군이 다뉴브 강을 도하한 뒤 시레트 계곡을 따라 수체아바로 진군했다. 슈테판 3세는 이에 맞서 수체아바 요새에 잘 훈련된 전사들을 보내 수비를 강화했고, 경기병대를 파견해 적 보급로를 유린하도록 했으며, 자신은 후스 전쟁 시기에 후스파가 쓴 전법에 따라 참호, 울타리, 마차를 연결하여 요새화한 높은 고원, 발레아 알바에 진지를 세웠다. 7월 25일, 슈테판 3세는 루멜리아의 베일러 베이이자 지난해 바슬루이 전투 때 격파했던 하딤 쉴레이만 파샤가 이끄는 오스만 선봉대를 공격해 큰 피해를 입혔다. 하지만 오스만 주력군이 도착하자 요새화된 진영으로 후퇴했다.

7월 26일, 오스만 제국군은 적 진영을 향해 포격을 퍼부었고, 몰다비아군도 이에 대응해 포격을 퍼부었다. 이때 슈테판 3세는 4,000 가량의 기병대를 적 진영으로 돌격하게 했고, 1,000명으로 구성된 또다른 부대를 숲속에 매복시켰다. 몰다비아 기병 4,000명은 적군을 한 차례 들이친 뒤, 즉시 말머리를 돌려서 요새가 있는 쪽으로 후퇴했다. 오스만군 경기병대가 이들을 추격했다가 언덕에 진을 치고 있던 몰다비아 궁수대 및 석궁병의 일제 사격을 받은 데다, 사전에 숲에 숨어있던 몰다비아 병사 1,000명이 측면과 후방을 공격하는 바람에 혼란에 빠졌고,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메흐메트 2세는 아군을 구하기 위해 예니체리에게 몰다비아 진영을 공격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그들은 몰다비아 포병대와 궁수대의 공격을 받고 한 시간 만에 퇴각할 조짐을 보였다. 그러자 메흐메트 2세는 경비병 및 시파히를 전장으로 투입시키는 한편, 자신 역시 직접 전투에 참여하기로 했다. 파디샤가 전장에 뛰어들자, 예니체리의 사기가 고조되어 적진을 향해 돌격을 감행했다. 이윽고 황혼이 가까울 무렵 몰다비아 방어선이 돌파되었다. 이에 슈테판 3세는 1,000명을 남겨서 아군의 후퇴를 엄호하게 한 뒤 어둠을 틈타 후퇴했다. 아군의 후퇴를 엄호한 몰다비아군 1,000명은 대부분 생포되었다.

당대 사료에 따르면, 오스만군은 이 전투에서 30,000명을 상실했다고 한다. 반면 몰다비아군의 정확한 피해는 불분명하다. 그 후 슈테판 3세는 몰다비아 북서부로 후퇴해 또다른 군대를 편성했고, 오스만 제국군은 몰다비아 영토 상당 부분을 점령했지만 슈체아바, 네암츠, 호틴 등 요충지들을 공략하지 못했으며, 몰다비아 분견대들의 끊임없는 습격을 받았다. 그 결과 보급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으면서 기아에 직면했고, 전염병 마저 창궐해 많은 이가 목숨을 잃었다. 그러던 중 이슈트반 바토리가 트란실바니아에서 반 오스만 봉기를 일으켰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메흐메트 2세는 1476년 8월 본국으로 철수했다.

메흐메트 2세가 철수한 뒤 잃어버린 영토를 탈환한 슈테판 3세는 헝가리군과 함께 블라드 3세를 앞세워 왈라키아 원정을 감행하기로 했다. 1476년 11월, 25,000명에 달하는 헝가리-몰다비아 연합군이 트르고비슈테로 진군했다. 바사라브 3세는 이에 대항해 18,000명 가량의 병력을 일으켜 트르고비슈테 인근에서 저항을 시도했지만, 격전 끝에 패배를 면치 못하고 부쿠레슈티 성채에 갇혔다. 15일 간의 공방전 끝에 11월 16일 함락을 면치 못하게 되자, 바사라브 3세는 다뉴브 강 건너편으로 탈출했다. 하지만 1476년 12월 또는 1477년 1월 오스만 제국군의 지원에 힘입어 왈라키아로 복귀했다. 이때 블라드 3세는 사망했는데, 오스만 제국군에게 살해되었다는 설, 사냥 중에 사고로 죽었다는 설, 한 보야르에게 암살당했다는 설 등 여러 가설이 제기되었지만 정확히 어떻게 죽었는지는 불분명하다.

1477년 11월, 슈테판 3세가 재차 왈라키아로 쳐들어가서 바사라브 3세를 축출하고 바사라브 4세를 왈라키아의 새 보이보드로 옹립했다. 이후 슈테판 3세는 교황청베네치아 공화국에 사절을 보내 기독교 세력이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을 계속하도록 설득했다. 여기에 킵차크 칸국도 반 오스만 연합에 끌어들이려 했지만, 폴란드 왕국이 타타르족이 자국 영토를 통과한느 걸 허용하지 않으면서 좌절되었다. 슈테판 3세는 국제적 지위를 강화하기 위해 1479년 1월 22일 폴란드와 새로운 조약을 맺고, 카지미에시 4세가 특별히 요구한다면 콜로메아에서 그에게 개인적으로 충성을 맹세하겠다고 약속했다.

1479년 1월, 베네치아 공화국과 오스만 제국이 평화 협약을 맺었다. 그 해 4월, 헝가리와 폴란드가 오스만 제국과 평화 협약을 맺었다. 여기에 슈테판 3세가 옹립했던 바사라브 4세 마저 메흐메트 2세에게 경의를 표했다.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자, 슈테판 3세는 오스만 제국과 화해를 모색했다. 1480년 5월, 그는 1473년부터 납부를 중단했던 연례 공물을 갱신하고 메흐메트 2세를 주군으로 받들겠다고 제안했고, 오스만 제국은 이를 받아들였다. 이리하여 평화가 성립되었지만, 슈테판 3세는 평화기를 왈라키아군을 회복해 반격을 가할 준비를 갖추는 데 보냈다.
4.4.3.1.4. 바예지트 2세와의 대결
1481년 5월 3일, 메흐메트 2세가 사망했다. 그 후 두 아들 두 아들 바예지트 2세젬 술탄이 파디샤 자리를 놓고 내전을 벌였다. 이로 인해 왈라키아 보이보드 바사라브 4세에 대한 오스만 제국의 지원이 끊어지자, 슈테판 3세는 이 때를 틈타 그해 6월 왈라키아를 침공하여 람니쿠 발체아에서 바사라브 4세를 격파했다. 바사라브 4세는 오스만 제국으로 망명했고, 블라드 4세가 슈테판 3세에 의해 왈라키아 보이보드에 선임되었다. 1481년 11월, 바사라브 4세는 오스만 제국의 지원을 토대로 블라드 4세를 축출하고 보이보드에 복위했다. 그러나 1482년 3월 23일 고르지 글로고바에서 사망했다. 일설에 따르면, 그는 왈라키아 보야르들이 일으킨 음모에 휘말려 살해되었다고 한다. 다른 기록에 따르면, 슈테판 3세가 블라드 4세를 복위하기 위해 침공하자 이에 맞서 싸우다 전사했다고 한다.

이후 블라드 4세가 재차 왈라키아 보이보드로 등극했지만, 곧 오스만 제국의 종주권을 받아들였다. 슈테판 3세는 젬 술탄을 물리치고 입지를 굳힌 바예지트 2세가 자신을 가만두지 않을 거라 예상하고, 왈라키아와의 국경을 요새화했고, 모스크바 대공국이반 3세와 동맹을 맺었다. 1483년 10월, 헝가리 국왕 마차시 1세는 바예지트 2세와 5년 휴전 협정을 맺었다. 몰다비아는 헝가리의 봉신국이었기에, 오스만 제국은 몰다비아 역시 침공할 수 없었다. 단, 킬리야와 케타테아 알바를 비롯한 부코비나 일대는 휴전 적용 범위에서 제외되었다.

1484년 7월 6일, 바예지트 2세가 파견한 오스만 제국군 20,000명이 킬리야 요새를 포위했다. 그들은 9일간 공방전을 벌인 끝에 킬리야를 공략하고 그곳의 교회를 모스크로 전환했다. 여기에 오스만 제국의 가신인 크림 칸국의 칸 멜리 1세 기라이도 몰다비아를 침공해 8월 3일에 케타테아 알바를 점령했다. 두 항구가 공략되면서, 오스만 제국은 흑해를 완벽하게 장악했다. 슈테판 3세는 새로 동맹을 맺었던 이반 3세가 별다른 지원을 할 움직임이 없고, 마차시 1세 역시 침묵으로 일관하자, 승산이 없다고 판단하고 바예지트 2세를 직접 찾아가서 경의를 표했다. 바예지트 2세는 그가 킬리야에 대한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용인하는 대신 몰다비아에서 주권을 행사하는 걸 인정한 후 본국으로 귀환했다. 얼마 후, 마차시 1세는 키세우와 체타테아 데 발타를 포함한 트란실바니아 일부를 슈테판 3세에게 하사했다. 여러 학자들은 슈테판 3세가 두 항구 도시를 잃은 것에 대한 보상으로 이 영토를 줬을 거라고 추정한다.

1485년, 폴란드 국왕 카지미에시 4세가 오스만 제국이 드니에프르 강과 다뉴브 강 하구에 대한 통제권을 확보한 것에 위협을 느끼고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을 단행하기로 했다. 그는 20,000 병력을 이끌고 콜로메아로 진군했고, 슈테판 3세는 콜로메아로 즉시 달려가서 9월 12일에 그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사흘 후, 카지미에시 4세는 슈테판 3세의 동의 없이 오스만 제국이 킬리야와 체타테아 알바를 점령한 것을 인정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이에 바예지트 2세는 몰다비아에 군대를 파견해 수체아바를 약탈하게 했으며, 페트루 호르노다라는 사칭자를 보이보드로 앉히려 했다.

폴란드로 갔던 슈테판 3세는 조국이 침략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돌아온 뒤 11월에 카틀러부가 호수에서 폴란드의 지원을 받아 오스만군을 격파했다. 그 후 1486년 3월에 다시 슈체이아에서 오스만군과 맞서 싸웠다. 전승에 따르면, 그는 첫 전투에서 낙마해 중상을 입고 시신들 사이에 묻혔고, 사칭자 페트루 호르노다는 그가 전사했다고 선전하면서 몰다비아 보야르들에게 자신에게 귀순하라고 권고했다. 하지만 두 보야르가 슈테판 3세를 구출했는데, 푸레체 지역 출신인 한 보야르는 그에게 말을 건넸다. 이 보야르는 훗날 숱한 몰다비아 보이보드를 배출한 모빌라 가문의 시조로 간주된다. 판테체 출신이라고 전해지는 또 다른 보야르는 페트루에게 귀순한 척하면서, 이미 승리했으니 전장을 떠나 수체아바로 이동하라고 권고했다. 페트루 호르노다는 여기에 속아 그대로 따랐다가, 병력을 재건한 슈테판 3세가 반격을 가하는 바람에 완패하고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이 전승을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에 대해 학자들의 의견이 분분하지만, 대체로 참칭자 페트루 호르노다가 전사했지만 슈테판 3세는 오스만 제국군을 상대로 고전을 면치 못했다고 추정한다. 이후 슈테판 3세는 이 이상 전쟁을 치르는 건 무리라고 판단하고, 오스만 제국과 3년 평화 협약을 맺고 매년 공물을 바치기로 했다. 하지만 여전히 부코비나를 탈환하고 싶었던 그는 1486년 후반에 폴란드 세임이 오스만 제국에 대한 십자군을 단행할 계획을 발표하자 사절을 파견해 십자군 내 몰다비아의 역할을 협상하려 했다. 그러나 폴란드는 1489년 3월 21일에 슈테판 3세의 동의를 받지 않고 오스만 제국과 평화 협약으 맺으면서, 킬리야와 체타테아 알바의 손실을 인정했다. 슈테판 3세는 폴란드가 자신을 배신했다고 여기고, 헝가리 국왕 마차시 1세의 종주권을 인정하기로 했다.
4.4.3.1.5. 폴란드와의 갈등과 코즈민 숲 전투
1490년 4월 6일, 마차시 1세가 사망했다. 이후 합스부르크 가문막시밀리안 1세와 폴란드 국왕 카지미에시 4세의 두 아들인 얀 1세 올브라흐트, 울라슬로 2세를 포함한 여러 후보가 헝가리에 대한 권리를 주장했다. 슈테판 3세는 트란실바니아 영주들이 자신을 적극적으로 도와야 한다고 주장한 막시밀리안 편을 들었지만, 대다수 헝가리 영주와 성직자들은 9월 21일에 울라슬로 2세를 새 군주로 받들었다. 그 후 얀 1세 올브라흐트가 형제 울라슬로 2세를 몰아내고 헝가리 왕이 되려하자, 슈테판은 헝가리와 폴란드의 동군연합이 성사되면 자국에 대한 압박이 가중될 것을 우려해 울라슬로 2세를 돕기로 하고, 폴란드로 쳐들어가서 포쿠치아를 점령했다. 포쿠치아의 수입은 오스만 제국에 공물을 바치는 데 전용되었다. 울라슬로 2세는 자기를 지지해 준 것에 대한 보답으로 키세우와 체타테아 데 발타에 대한 슈테판 3세의 권리를 인정했다.

1492년 6월 7일, 카지미에시 4세가 사망하고 셋째 아들 얀 1세 올브라흐트가 폴란드 국왕이 되었다. 1494년, 얀 1세 올브라흐트와 슈테판 3세는 레보차에서 헝가리 국왕 라슬로 2세와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요하난 시세로와 접견한 뒤 오스만 제국에 대한 원정 계획을 세웠다. 그들은 부코비나로 진군해 킬리아와 케타테아 알바를 공략하는 걸 목표로 삼았다. 그러나 얀 1세 올브라흐트에겐 오스만 제국의 봉신이 된 몰다비아 공국을 정복한 뒤, 영지가 없는 막내 동생 지그문트를 몰다비아 보이보드로 세우겠다는 숨겨진 목표가 있었다.

1497년, 얀 1세는 40,000 병력을 동원해 몰다비아로 진군했다. 하지만 슈테판 3세는 정보원들을 통해 얀 1세의 진짜 목표를 사전에 확인한 뒤, 즉시 동원령을 내리는 한편 오스만 제국에 원군을 요청했다. 오스만 제국은 예니체리 500명을 파견하는 동시에, 또다른 봉신국인 왈라키아 공국크림 칸국에게 몰다비아 공국에 원군을 보내라고 지시했다. 두 나라는 총합 10,000명을 몰다비아에 파견했고, 슈테판 3세는 폴란드군의 진군로 주변을 초토화하는 청야 전술을 감행하고 주요 요충지에 수비대를 배치하면서 폴란드군이 몰려오길 기다렸다.

1497년 여름, 호틴에서 몰다비아 공국에 진입한 얀 1세의 폴란드군은 요새를 하나씩 공략하지 않고 몰다비아의 수도인 수체아바로 직공하기로 했다. 여러 신하는 슈테판 3세가 슈테판 3세가 지난날 바슬루이 전투 때 효과적인 청야전술을 단행해 오스만 제국군을 약화시킨 뒤 완승을 거둔 적이 있음을 상기하며 요새를 하나씩 공략하면서 신중히 진군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묵살되었다. 그렇게 얀 1세는 수체아바로 직공했지만, 현지 조달은 청야 전술로 인해 불가능해진 데다 보급 물자를 수송하던 부대가 몰다비아 유격대에게 번번이 공략되면서 원정군의 군량이 급격하게 줄어들었다.

1497년 9월 26일 수체아바에 도착한 폴란드군은 10월 16일까지 포위 공격했다. 그들은 대포 200문을 동원해 포격을 가했지만, 슈테판 3세가 공들여 강화한 성벽은 좀처럼 뚫리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 식량이 바닥나 버리면서 굶주림이 만연했고, 전염병 마저 창궐했으며, 다가오는 겨울에 대한 압박감이 심해졌다. 결국 수체아바를 공략할 도리가 없다고 판단한 얀 1세는 슈테판 3세에게 휴전 협상을 요청했다. 슈테판 3세는 폴란드군이 수체아바로 진군할 때와 같은 길로 폴란드로 돌아가야 하며, 그들이 퇴각하면서 자국의 다른 지역을 약탈하지 않는 조건으로 안전한 통행흘 허락했다.

얀 1세는 공식적으로는 슈테판 3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는 슈테판 3세의 조건을 따르게 되면 굶주린 폴란드군이 청야 전술로 황폐화된 지역을 통과하면서 그대로 죽어갈 것이라 여기고, 약속을 위배하고 딴 길로 가기로 했다. 그는 부코비나를 거쳐 스니아틴으로 이동하는 익숙하지 않은 길을 택했다. 그러자 슈테판 3세는 저들이 약속을 위반했으니 휴전이 결렬되었다고 선언하고, 폴란드군이 다시는 자국을 노리지 못하도록 결정적인 타격을 가하기로 마음먹었다.

슈테판 3세는 정찰병들을 통해 폴란드군의 진군을 살펴본 끝에, 시레트 계곡과 프루트 계곡을 분리하는 코즈민 숲에 군대를 매복시키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는 주력군을 숲속에 매복시킨 뒤, 소규모 경기병대를 파견해 폴란드군을 도발하게 했다. 폴란드군은 그들이 소규모 파견대일 뿐이라고 믿고, 추격하면 적 본대와 마주칠 수 있다고 여겼다. 폴란드 기사들은 중갑으로 완전 무장했고, 야전 경험이 풍부했기에, 무장 수준이 열세한 몰다비아군을 전멸시킬 수 있다고 확신했다. 그리하여 폴란드군은 기사들을 선봉에 내세워 적군을 추격했다.

슈테판 3세가 지휘하는 몰다비아군은 숲에 숨어서 적군이 숲길을 지나가는 걸 가만히 지켜봤다. 적군이 숲이 우거지고 언덕이 많아서 행군에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꿋꿋이 진군하면서 숲길에 깊숙이 진격했을 때, 몰다비아군은 요란한 함성을 내지르며 나무 여러 그루를 쓰러뜨려서 적의 행군 대열을 여러 조각으로 쪼갠 뒤 사방에서 덮쳤다. 몰다비아군은 창과 칼을 사용해 폴란드 농민군을 학살했으며, 기사들을 말에서 끌어내린 뒤 큰 망치, 곤봉을 마구 쳐서 죽였다. 폴란드군은 이에 맞서 싸우려 애썼지만, 숲길이 워낙 좁고 험준해서 몰다비아군의 매복 공격에 맞서 전투 대열을 짤 수 없었고, 이로 인해 속수무책으로 무너졌다.

결국 폴란드군은 전의를 상실하고 막대한 무기와 군기, 갑옷 등을 내동댕이치고 도주했다. 프루트 강에 겨우 닳은 도망자들은 재편성할 시도도 하지 않고 서둘러 강을 건너 코드리 플로니니에 이른 뒤, 포쿠치아를 거쳐 르비우로 이동했다. 이 전투에서 슈테판 3세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보그단 3세도 참여했는데, 전투 도중에 폴란드 기사의 창에 스치는 바람에 한쪽 눈을 잃었지만, 고함을 힘껏 내지르며 계속 싸워서 몰다비아군의 전의를 끌어올렸다고 전해진다.

코즈민 숲 전투는 폴란드군에게 심대한 타격을 입혔다. 폴란드군 5,000명이 죽거나 다쳤고, 수레 6,000여 대를 상실했다. 여기에 크라쿠프, 르비우, 산도미르 일대의 군기 3개와 지방 깃발 9개, 상당히 많은 폴란드 귀족 가문의 깃발들이 노획되었다. 몰다비아군의 사상자는 알려지지 않았는데, 미미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렇게 몰다비아 원정이 참담한 실패로 끝난 뒤, 주변 국가들이 이 기회를 노려 폴란드-리투아니아에 대한 공세를 개시했다.

1498년, 오스만 제국 실리스트라 에얄레트의 파샤 발리 베이가 이끄는 오스만군이 몰다비아 군대의 지원을 받으며 드네스트르강을 건너 루테니아로 쳐들어가서 그 일대를 황폐화시키고, 사노크, 프셰보르스크에 입성한 뒤 100,000명에 달하는 주민을 본국으로 끌고 가서 노예로 팔았다. 그 해 여름엔 크림 칸국 소속 타타르인들이 포돌레와 볼린을 공략해 막대한 전리품과 포로를 챙기고 돌아갔다. 그해 가을에는 오스만 제국군이 삼보르까지 쳐들어가서 심각한 약탈을 자행한 뒤 귀환했다. 슈테판 3세 또한 이 시기에 포쿠치아를 몰다비아 공국의 영토로 편입했다. 얀 1세는 도저히 당해낼 수 없다고 여기고 1499년 4월 15일에 슈테판 3세와 평화 협약을 맺었다.
4.4.3.2. 내치
4.4.3.2.1. 정치, 사회적 기반 공고화
슈테판 3세가 재위 기간 동안 내부적으로 추진한 정책은 보이보드 및 중앙 권력을 강화하고 사회 평화를 보장하는 걸 주요 목적으로 삼았다. 그는 이를 위해 왕실이 토지를 점유하고 특권을 확보해 권력 기반을 다지고, 군사 능력주의를 기반으로 한 새로운 귀족 계급(소 보야르)를 창설해 군사력 강화를 꾀했다. 또한 옛 보야르 가문과 화해하고 망명자들을 소환했으며, 군사 총독(pârcălabii)의 비중을 높이고 상당한 수의 그의 가족 구성원을 도입함으로써 왕립 의회의 충성심을 보장하고자 했다. 특히 대 보야르 계급에 대한 정치적 균형을 맞추기 위해, 소보야르와 자유 농민의 증진에 끊임없는 관심을 보였다.

자유 농민은 본래 자기들이 소융한 땅을 영주로부터 받지 않았기 때문에 군 복무를 수행할 의무가 없었다. 슈테판 3세는 이제 그들에게 군 복무를 강요하면서, 그 대가로 정치 활동에 참여할 수 있도록 했다. 군사 의무를 독점했던 대 보야르들은 이로 인해 특권적인 지위를 위협받았다. 또한 영주 바로 아래에 지방 행정 지도자인 파르칼라브(pârcălab)를 배치해 중앙 정부의 지방 통제력을 강화했다. 이때 그는 파르칼라브에 친척 및 믿을 수 있는 보야르만 앉혔으며, 파르칼라브는 국가의 내정을 맡은 총리 격인 보르니치(Vornic)를 제외하고 항상 궁정 관리 앞에 배치되었다. 한편, 슈테판 3세는 해외에서 몰다비아로 이주한 이들을 환대했다. 그는 아르메니아인들의 정착촌을 최초로 건설했으며, 오스만 노예 무역에서 탈출한 이탈리아인들도 받아들였다.

슈테판 3세는 보이보드 궁정에서 일하는 고위 관리들의 지위를 가능한 한 보장했다. 이 때문에 많은 이들이 오랫동안 같은 지위를 유지했고, 이는 국가 행정의 안정을 보장했다. 이 결과, 슈테판 3세는 47년이라는 긴 통치 동안 단 2차례의 보야르 음모에 직면했다. 하나는 1471년 처남인 이사야가 세 보야르와 함께 마차시 1세와 손잡고 음모를 꾸민 혐의로 체포되어 처형된 것이고, 또 하나는 1504년 슈테판 3세가 죽기 이틀 전에 그의 아들 보그단 3세를 제거하기 위해 음모를 꾸몄다가 발각되어 음모자들이 대거 처형된 것이었다.
4.4.3.2.2. 경제
슈테판 3세의 통치 기간 동안, 몰다비아의 교통 인프라는 제대로 개발되지 않았다. 이는 교통을 편하게 했다간 오스만 제국 등 외부 침략자들이 이를 활용해 몰다비아를 철저하게 짓밟을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강을 건널 때는 일반적으로 여울목이 이용되었고, 너무 깊을 경우에는 도개교가 이용되었다. 고정된 다리는 큰 강 위에는 나무로, 개울 위에는 돌로 세워졌다.

몰다비아의 주요 수입원은 다뉴브 강에서 흑해로 이어지는 무역로를 독점하면서 벌어들인 수익과 상품에 매긴 관세였다. 보이보드는 소금과 은의 채굴과 거래를 독점했고, 생선, 밀랍, 모피 거래도 독점했다. 세관은 주요 무역로에 위치했으며, 관세제도에는 국경에 위치한 외부세관과 국내세관이 포함되었다. 수입 관세는 수체아바에서만 납부되었고, 수출 관세는 체르니브치(폴란드 왕국), 킬리야(오스만 제국), 체타테아 알바(크림 칸국), 아주드(헝가리 왕국), 푸트나(왈라키아 공국) 등 외부 세관에서 납부되었다. 다만 1480년대에는 킬리아와 체타테아 알바가 각각 오스만 제국과 크림 칸국에 넘어갔다. 또한 라푸스나, 로만, 바카우, 바슬루이, 발라드 및 테쿠치에는 운송세를 납부하는 내부 세관이 있었다.

슈테판 3세는 그로스 몰다비다(gros moldovenesc)라는 자체 동전을 발행한 몇 안 되는 몰다비아 보이보드 중 한 명이었다. 동전은 직경 13mm의 은으로 만들어졌으며, 국가의 문장이 찍혀 있고 앞면에는 MONETAMOLDAVIE , 뒷면에는 STEFANVSVOIEVODA라는 문구가 새겨졌다. 그러나 화폐 공급량은 적었고, 동전 주조는 주로 정치적 목적에 따라 결정되었다. 주로 보야르나 용병에게 군사 서비스에 대한 지불을 할 때 쓰였고, 무역을 촉진하기 위한 목적으로 발행될 때는 별로 없었다. 무역에 쓰이는 화폐는 이웃의 강력한 국가들이 발행한 동전이 주로 쓰였다.
4.4.3.2.3. 군사 정책
슈테판 3세는 추구하는 정치적 목표에 따라 전략적 방어와 전략적 공격 전략을 모두 사용했다. 전략적 방어는 일반적으로 국경 방어, 괴롭힘, 결정적인 전투 및 추격을 주요 단계로 삼았다. 전략적 공격은 병력을 은밀하게 동원해 집중 공격하여 적을 물리친 뒤 추격하는 전술을 활용했다. 전략적 방어는 몰다비아를 침공한 외국군과의 전투에 활용되었고, 전략적 공격은 왈라키아 공국의 보이보드들을 축출하고 자기 입맛에 맞는 보이보드를 새로 선임하기 위해 군사 활동을 벌일 때 활용되었다.

몰다비아군은 무력 충돌이 있을 경우에만 동원되는 비영구군이었다. 군대는 '소군'과 '대군'으로 구성되었다. 슈테판 3세의 군사적 행동 대부분은 보야르와 궁중 부대로 구성된 '소군'에 의해 수행되었는데, 그 수는 수천 명이었다. 파르칼리브는 평상시엔 자기가 맡은 영지를 관리했다가, 소집령이 떨어지면 보이보드가 정한 집합 장소로 사병들을 이끌고 갔다. '대군'은 몰다비아의 주권이 위협받는 예외적인 경우에만 동원되었다. 대군에는 '소군' 외에도 농민, 마을 주민들, 귀족 및 수도원에 속한 토지 없는 농민들, 경비병 및 기병이 포함되었다. 슈테판 3세는 1475~1476년 메흐메트 2세와 대규모 전쟁을 치를 때만 대군을 동원했다.

슈테판 3세의 군대는 15세기 후반 유럽에서 사용할 수 있는 모든 주요 무기를 사용했다. 방어 무기는 방패, 사슬 갑옷, 판금 갑옷 등으로 구성되었고, 군대에 소집된 농민들은 두꺼운 솔기나 보호용 가죽 껍질 이 달린 3-5cm 두께의 누비 린넨 옷을 입었다. 공격 무기는 근접 무기와 총기로 구성되었다. 근접 무기는 , 단검, , 도끼, 미늘창, 쟁기, 곤봉, , 석궁 등으로 구성되었다. 총기류는 산탄총, 화승총, 화포 등으로 구성되었다. 바슬루이 전투에 동원된 몰다비아 화포 20문은 각각 포탄 7발을 발사했다고 전해진다. 근접 무기는 대군조차 적절하게 무장해야 한다는 점을 고려해 대부분 국내에서 제조되었다. 폴란드 연대기 작가 얀 드우고시는 슈테판 3세가 화살, 활, 칼 없이 군대에 입대하지 않은 자들을 가차없이 참수형에 처했다고 밝혔다. 총기류는 해외에서 수입되었다.

슈테판 3세는 국가 방어 전략의 핵심 요소로서 영구 요새 시스템 구축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였다. 그는 국경 방어(특히 드네스트르강 여울목), 내부 교차점, 수도인 수체아바 방어를 위한 요새 체계를 설계했다. 그는 수체아바, 네암툴루이, 호티눌루이, 로마누 등 기존의 요새들의 방어력을 대폭 강화하고, 킬리아와 로만, 오르헤이, 소로카 등지에 새로운 요새를 건설했다. 그가 세운 요새의 방어 수준은 매우 강력해, 1476년 메흐메트 2세가 네암츠, 수체아바, 호틴 요새를 포위 공격했지만 공략에 실패하고 철수했고, 1497년 폴란드 국왕 얀 1세 올브라흐트가 수체아바 요새를 공격했으나 격퇴될 정도였다.

베네치아 의사 마테오 무리아노는 1502년 슈테판 3세의 주치의로 일하던 중에 슈테판 3세가 자기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기록했다.
"나는 이 나라의 보이보드가 된 이래로 36번 싸워서 34번 이겼고 2번 패했다."
4.4.3.2.4. 문화 진흥
슈테판 3세는 1487년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을 마무리한 뒤, 12개가 넘는 석조 교회를 세웠고, 가장 부유한 보야르들이 그를 본받아 몰다비아 각지에 교회를 세웠다. 슈테판 3세는 수도원 공동체의 발전도 지원했다. 보로네츠 수도원은 1488년에 지어졌고 타즐라우 수도원은 1496년에서 1497년 사이에 지어졌다. 그의 시대에 세워진 교회들은 네오비잔틴고딕의 구성 요소를 빌려 지역 전통의 요소와 섞은 방식으로 세워졌다. 특히 별 모양을 형성하는 바닥이 있는 벽과 탑은 슈테판 3세 시대에 세워진 교회에 가장 특징적인 요소였다. 보이보드는 여기에 더해 트란실바니아와 왈라키아에 교회를 짓는 데 자금을 지원하여 몰다비아 건축이 공국의 경계를 넘어 퍼지는 데 기여했다. 푸트나 수도원의 무덤은 슈테판 3세 가족의 왕실 묘지로 지어졌다. 슈테판의 묘지는 아칸서스 잎으로 장식되었는데, 이는 다음 세기 동안 몰다비아 미술의 특징적인 장식 요소가 되었다.

슈테판 3세는 몰다비아의 역사학과 교회 슬라브 문학의 발전에도 기여했다. 그는 몰다비아 공국 연대기 수집을 지시했으며, 그의 치세에 3개의 슬라브 연대기가 완성되었다. 또한 비잔틴 문학 의 관습을 없애고 새로운 스토리텔링 정경을 도입했다. 이러한 역사 기록의 일부는 슈테판 3세 본인이 수정하고 구술하기도 했다. 가장 오래된 몰다비아 연대기로 알려진 비스트리차 연대기는 1359년에서 1506년까지의 몰다비아 역사를 서술했고, 푸트나 연대기는 푸트나 수도원의 역사를 기록하는 동시에 1359년부터 1526년까지 몰다비아의 여사를 다뤘다. 이 연대기들은 슈테판 3세의 초상화와 그의 신하들의 초상화를 미니어처로 화려하게 담기도 했다.
4.4.3.3. 말년
1498년경부터 슈테판 3세의 아들이자 공동 통치자인 보그단 3세가 아버지의 권력을 상당 부분 물려받고 루카 아르모레와 이오안 타우투를 포함한 보야르 및 행정가 집단들의 보좌를 받았다. 보그단 3세는 폴란드와의 평화 협약에 관한 협상을 비준했다. 1501년 2월, 슈테판 3세의 대표단이 베네치아에 찾아와서 그의 건강이 날로 악화되고 있으니 전문 의사를 보내달라고 요청했고, 베네치아 도제 아고스티노 바르바리고는 당대 탁월한 의사인 마테오 무리아노를 몰다비아로 파견했다.

1500년, 슈테판 3세는 오스만 제국에 조공을 바치는 걸 중단했다. 이후 그의 군대는 오스만 제국 변경을 침공했지만, 킬리야나 케타테아 알바를 탈환하지 못했다. 1502년 킵차크 칸국의 타타르족이 남부 몰다비아를 침공했지만, 슈테판 3세는 크림 칸국의 타타르족으로부터 지원을 받고 이들을 물리쳤다. 또한 그는 오스만 제국에 맞서기 위해 헝가리에 지원군을 보냈다. 1503년 2월 22일, 헝가리와 오스만 제국은 몰다비아도 포함된 새로운 평화 협약을 체결했다. 이후 슈테판 3세는 다시 오스만 제국에 매년 조공을 바쳤다.

1503년 말, 마테오 무리아노가 사망했다. 이에 또 다른 몰도바 대표단이 베네치아로 파견되어 새 의사를 보내달라고 요청하는 동시에 오스만 제국에 대항하는 새로운 동맹을 제안했지만 별다른 호응을 얻지 못했다. 1504년 6월 말, 슈테판 3세가 임종을 눈앞에 두던 그 때 보그단 3세에 반대하는 여러 보야르가 반역을 꾀하다가 발각되어 모조리 처형되었다. 1504년 7월 2일, 슈테판 3세는 숨을 거뒀다. 일부 기록에 따르면, 그는 임종 직전에 보그단 3세에게 파디샤에게 계속 조공을 바치라고 촉구했다고 한다. 그의 유해는 푸트나 수도원에 안장되었고, 장남 보그단 3세가 몰다비아의 새 보이보드로 등극했다.

4.4.4. 보그단 3세 ~ 알렉산드루 4세 라푸슈네아누

몰다비아 공국 최고의 군주였던 슈테판 3세 사후 보이보드이 오른 보그단 3세는 폴란드 국왕 알렉산데르 야기엘론치크에게 그의 여동생 엘즈비에타와 결혼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했고, 이를 위해 요새 2개를 넘기는 등 후한 선물을 건넸다. 그러나 2차례의 요청 모두 거절당하자, 보그단 3세는 폴란드 남부를 습격했다. 1506년, 알렉산데르는 보그단 3세가 몰다비아 내 가톨릭이 융성하도록 도와준다면 그의 청혼을 받아들이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알렉산데르는 그해 8월 19일에 사망했고, 뒤이어 폴란드 왕위에 오른 지그문트 1세는 없었던 일로 처리했다. 이후 폴란드와 몰다비아군은 서로의 영토를 수시로 침공해 약탈을 자행했다.

1507년 10월 28일, 보그단 3세는 왈라키아를 침공해 람니쿠 사라트 시 주변을 황폐화했다. 침략 원인은 알려지지 않았는데, 몰다비아 보야르 포페스티의 보그단이 자기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가 축출된 뒤 왈라키아가 그를 보호하자, 장차 왈라키아가 포페스티의 보그단을 앞세워 몰다비아 보이보드를 찬탈하도록 부추길 거라고 의심했기 때문일 수도 있고, 자기도 아버지 슈테판 3세처럼 왈라키아에 대한 군사적 우위를 이어가려는 열망일 수도 있다. 당시 헝가리 국왕 울라슬로 2세를 대신해 외교 임무를 맡은 베오그라드의 막심 대주교[7]와 협상하던 왈라키아 보이보드 라두 4세는 이 소식을 접하자 즉시 람니쿠 시라트 시로 달려간 뒤 몰다비아군과 대치했다. 이때 그는 왈라키아와 몰다비아 국민은 형제이므로 서로 전쟁을 해서는 안 된다고 호소했다. 그 후 보그단 3세는 그와 평화 협약을 맺고 몰다비아로 철수했다.

1509년 10월 4일, 보그단 3세는 드네스트르강 인근 호틴에서 폴란드군에게 패배했다. 그 후 폴란드와 외교 협상을 벌인 끝에 1510년 1월 17일 정치, 경제적 이익을 받는 대가로 엘즈비에타와의 결혼을 포기했다. 같은 해 크림 칸국타타르인 무리가 몰다비아를 침략해 약탈을 자행하고 74,000명을 노예로 데려갔다. 그해 11월, 보그단 3세는 타타르인의 새 침공을 막아냈다. 1511년 타타르인들이 또다시 침공해 몰다비아 각지를 황폐화했다. 폴란드 왕국은 이러다가 저들이 자국까지 쳐들어올 것을 염려해 구원군을 보냈고, 보그단 3세는 1512년 5월 타타르족을 가까스로 물리쳤다.

1514년, 보그단 3세는 타타르족의 연이은 파괴로 나라가 황폐화된 상황에서 오스만 제국의 침공까지 받으면 더는 버틸 수 없다고 판단하고, 이오안 타우투를 오스만 제국의 수도 코스탄티니예에 보내 협상했다. 그 결과 몰다비아는 왈라키아와 거의 동일한 조건, 즉 모든 면에서의 자치, 오스만 종주권 인정, 연간 공물 지불 등의 조건으로 오스만 제국의 봉신이 되기로 했다. 1517년 4월 20일 고향인 후시에서 사망했고, 아버지가 안장된 푸트나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그 후 아들 슈테판 4세가 보이보드에 올랐지만, 아직 미성년자였기에, 몰다비아 추밀원이 국가를 대신 이끌었고, 그 수장은 헤트만(hetman: 군 사령관) 루카 아르보레였다. 1518년, 몰다비아는 폴란드와 동맹 협약을 채결했다. 같은 해 크림 칸국타타르인이 몰다비아로 쳐들어왔지만, 그해 8월 8일 폴란드의 도움을 받아 프루트 강변 세르방카 시 인근 치우루에서 격파했다.

1522년 친정을 맡은 슈테판 4세는 1523년 헤트만 루카 아르보레와 그의 두 아들을 살해하고 그들이 부정부패를 일삼고 폴란드 국왕 지그문트 1세와 야합하는 등 반역죄를 저질렀다고 비난했다. 이에 여러 보야르가 반란을 일으켰지만 곧 진압된 뒤 처형되었다. 같은 해에 폴란드를 약탈한 후 귀환하던 오스만군을 습격해 격파하고 전리품을 빼앗았다. 그러나 1527년 1월 14일 호틴에서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일부 기록에서는 그가 스탄카라는 여인에게 독살당했다고 주장하나 진위는 불분명하다. 슈테판 4세는 생전에 아들 이오안 3세 첼 비테아즈를 낳았지만, 통치하기에는 너무 어렸기에 슈테판 3세의 아들인 페트루 5세 라레슈가 소규모 귀족, 상인, 자유 농민들의 적극적인 지원에 힘입어 보이보드에 선임되었다.

페트루 5세 라레슈는 슈테판 4세의 숙청을 피해 망명 생활 중이던 보야르들에게 온건한 태도를 취했고, 그중 일부가 조국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허용했다. 또한 초기에 폴란드 왕국과 좋은 관계를 유지했으며, 1527년 오스만 제국이 폴란드와 몰다비아 중 한 나라를 침공할 시 상호 지원을 제공하는 동맹 조약과 상업 협약을 체결했다. 여기에 헝가리 왕국에도 경의를 표해 슈테판 3세가 확보했던 트란실바니아 일부 영지의 소유권을 인정받았고, 딸인 아나와 왈라키아 공국 보이보드 블라드 6세와 결혼시킴으로써 왈라키아와의 우호 관계를 구축했다.

1526년 모하치 전투 이후, 헝가리 왕국은 합스부르크 가문페르디난트 1세를 지지하는 세력과 헝가리 대귀족 서포여이 야노시를 지지하는 세력으로 분열되었다. 헝가리를 온전히 편입하려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압력이 가중되면서 입지가 위태로워지자, 서포여이 야노시는 오스만 제국 파디샤 쉴레이만 1세에게 도움을 요청하며 봉신국이 되겠다고 자청했다. 쉴레이만 1세는 즉시 군대를 파견해 합스부르크군을 격파했고, 헝가리 왕국은 양분되었다. 페트루 5세는 상황을 쭉 살펴보다가 트란실바니아 내 영지에 대한 통제권을 강화하고 확장할 적절한 시기라고 판단했다.

1529년 여름, 페트루 5세는 군대를 이끌고 트란실바니아로 진군해 비스트리차 요새를 포위했다. 당시 그는 오스만 제국의 봉신으로서 페르디난트 1세 편을 들은 이들을 징벌하겠다는 명분을 내걸었다. 그해 10월 21일, 페트루 5세는 펠디오아라에서 비스트리차를 구하러 파견되었던 합스부르크군을 격파하고 대형 야전포 50문을 포획했다. 이후 비스트리차 요새를 함락하고, 브라쇼브를 압박한 끝에 4,000 플로린의 배상금을 부과했다. 그러나 서포여이 야노시는 그가 자기를 돕는 게 목적이 아니라 트란실바니아를 뜯어먹으려는 야욕이 있다는 걸 눈치채고 당장 트란실바니아에서 철수하지 않으면 쉴레이만 1세에게 고발하겠다고 위협했다. 결국 페르투 5세는 트란실바니아에서 철수해야 했지만, 상당한 전리품을 가져갔다.

1530년 말, 페르투 5세는 폴란드 왕국이 오스만 제국과 대결하는 데 관심을 보이지 않고 몰다비아를 지배하려는 열망이 있다는 걸 눈치채고, 이를 꺾기 위해 포쿠티아를 침공했다. 초기에는 페트루 5세가 소규모 접전에서 승리를 거두고 포쿠티아를 거의 완전히 점령했지만, 1531년 8월 22일 오베르틴 전투에서 폴란드 헤트만 얀 타르노프스키가 이끄는 폴란드군에게 패배했고, 3개의 상처를 입은 채 몰다비아로 물러났다. 이렇듯 그가 폴란드와 마찰을 벌이자, 헝가리 문제에 전념하기 위해 폴란드와 마찰을 벌이고 싶지 않았던 쉴레이만 1세는 불만을 품었다.

1534년, 이탈리아 출신 상인었다가 오스만 재상 이브라힘 파샤의 심복이 된 알로이시오 그리티가 혼란에 빠진 트란실바니아를 안정시키는 임무를 부여받고 그곳에 갔다가 트란살비나 보이보드 이슈트반 마일라트에게 체포되어 메디아슈에 감금되었다. 페트루 5세는 쉴레이만 1세로부터 그리티를 풀어주라는 명령을 받았고, 가신 후루를 보내 그 일을 하도록 했다. 그러나 후루는 그리티를 돕는 대신 그를 유인해 적에게 넘겼고, 적들은 그 자리에서 그리티를 죽였다. 이후 라레슈는 몰다비아에 들어간 그리티의 아들들을 죽였다. 당시 오스만 제국군은 사파비 제국과의 전쟁에 몰두했기 때문에, 페트루 5세를 당장 응징할 수 없었다.

1538년, 폴란드 왕국은 그를 몰아내고 꼭두각시를 몰다비아 보이보드로 앉히려는 음모를 꾸몄지만 실패했다. 이에 폴란드 국왕 지그문트 1세는 쉴레이만 1세에게 그를 처벌해달라고 요청했다. 그해 8월, 쉴레이만 1세는 "몰다비아를 위한 성전(Gazây-i Kara Boğdan)"이라고 칭하며 군대를 일으켰고, 도브로게아 남부에 도착한 뒤 기독교인 시난 켈레비를 페트루 5세에게 보내 당장 자신에게 출두해 경의를 표하라고 명령했다. 보야르들은 승산이 없으니 항복하라고 조언했지만, 페트루 5세는 파디샤의 명령을 거부하고 저항하기로 마음먹었다. 이후 왈라키아 보이보드 라두 7세가 파견한 왈라키아 병사 3,000명을 포함한 20만에 달하는 오스만 제국군이 몰다비아로 진군해 9월 9일 이아시 인근에서 크림 칸국이 파견한 타타르군과 합세했다. 페트루 5세는 보토샤나 인근의 숲이 우거진 드라샤니 언덕에 자리를 잡고 전투를 준비했다. 그러나 첫번째 전투가 벌어진 직후, 여러 보야르들이 그를 배신하고 오스만 제국군에 투항했다. 결국 페트루 5세는 트란실바니아의 키세우 성채로 망명했다.

1538년 9월 17일, 쉴레이만 1세는 수체아바에 입성한 뒤 슈테판 3세의 검을 포함한 몰다비아 왕국 금고를 압수했다. 이후 슈테판 3세의 또다른 아들인 슈테판 5세가 쉴레이만 1세에 의해 몰다비아 보이보드로 선임되었다. 여기에 몰다비아 보이보드는 즉위한 직후 파디샤를 반드시 알현해 경의를 표해야 하며, 공물은 15,000 굴덴에서 30,000 굴덴으로 2배 늘어났으며, 드네스트르강 우안(티기나와 그 주변 18개 마을) 일대가 오스만 제국에 양도되어 튀르크인이 그곳에 정착하게 되었다. 튀르크린들이 새로 정착한 이 지역은 일명 '티하나 지구'로 일컬어져 19세기까지 존재했으며, 몰다비아에 대한 오스만 제국의 통제를 유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슈테판 5세는 트란실바니아의 키세우 성채로 피신한 페트루 5세 라레슈가 언제라도 자기를 타도하려 할 것을 두려워했다. 1539년 2월, 동헝가리 왕국의 국왕 서포여이 야노시에게 페트루 5세를 자기에게 넘겨달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페트루 5세는 쉴레이만 1세에게 용서를 청하는 서신을 보냈고, 쉴레이만 1세는 이를 받아들여 페트루 5세가 코스탄티니예로 갈 때까지 안전을 보장해줬다. 여기에 메뚜기 무리가 몰다비아에 출몰하는 바람에 식량 생산량이 크게 줄어들어 백성들이 굶주림에 시달렸고, 그는 이 때문에 '라쿠스타(lăcustă, 메뚜기)'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1540년, 슈테판 5세는 자기에게 반란을 일으킬 것으로 의심되는 보야르들을 연회에 초대한 뒤 모조리 참수했다. 이에 다른 보야르들이 12월 20일에 정변을 일으켜 수체아바에 있는 궁전 전망대에서 취침 중이던 슈테판 5세를 살해했다. 그 후 보그단 3세의 아들인 알렉산드루 3세 코르네아가 보이보드에 선임되었다. 알렉산드루 3세는 반 오스만 제국 감정을 품은 보야르들의 강력한 권고에 따라 오스만 제국의 지배하에 있던 체타네아 알바, 킬리야, 티히나를 공격했으며, 현재 우크라니아 미콜라이프 지역의 오세아코프를 공략할 계획도 세웠다.

오스만 제국의 보복을 염려해 폴란드 헤트만 얀 텡친스키를 수도 수체아바에서 반갑게 맞이하고 폴란드 왕국과 굳건한 동맹을 맺어 오스만 제국을 견제하려 했다. 여기에 합스부르크 가문페르디난트 1세, 카를 5세에게 잇따라 사절을 보내 합스부르크 제국을 섬길 테니 보병과 기병들을 대거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두 통치자가 이에 응하지 않으면서 무산되었다. 1541년 1월 9일, 오스만 제국 파디샤 쉴레이만 1세의 허락을 받아낸 페트루 5세 라레슈는 몰다비아로 떠난 뒤 브라일라에서 보야르들의 환대를 받은 뒤 갈라치에서 알렉산드루 3세 코르네아를 체포해 처형했다. 여기에 지난날 자신을 배신했던 보야르들인 미후, 트로투샤누, 크라스나슈, 코즈마는 로만 요새에서 체포한 뒤 1541년 3월 11일 처형했다. 알렉산드루 3세와 보야르들의 수급은 쉴레이만 1세에게 전달되었다.

오스만 제국의 지원에 힘입어 보이보드에 복위한 페트루 5세 라레슈는 1541년 쉴레이만 1세의 지시에 따라 파가라슈에서 트란실바니아 보이보드 마즐라트 이슈트반을 체포해 코스탄티니예로 압송했다. 1542년 비스트리차를 점령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이후 오스만 제국에 대항하는 십자군 계획이 논의되었을 때 은밀히 참여 의사를 밝혔고, 십자군 수장으로 내세워진 브란덴부르크의 요아킴 2세에게 20만 플로린을 빌려줬다. 그러나 십자군은 1542년 부다 공방전에서 오스만 제국군에게 격퇴되었다. 이후 페트루 5세는 오스만 제국에 대항할 생각을 접고, 내치에 힘을 기울였다. 그는 프로보타와 라슈카 수도원을 설립했고, 몰도비타 수도원과 비스트리차 수도원을 복구했고, 아토스 수도원에 상당한 금액을 기부했다.

1546년 9월 3일, 페트루 5세 라레슈가 사망했다. 그 후 아들 일리아슈 2세 라레슈가 몰다비아 보이보드에 선임되었다. 그러나 일리아슈 2세는 온갖 문제를 일으켰다. 그는 젊은 튀르크 고문들과 함께 항현은 매일 즐겼으며, 세간에서는 하다르라는 튀크르 고문이자 남자 친구와 동성애 관계라는 소문이 나돌았다. 여기에 생활방식이 무척 사치스러웠으며, 이에 쓸 돈을 마련하기 위해 세금을 악착같이 뜰어갔고, 자기 말을 듣지 않는 여러 보야르를 처형했다. 이로 인해 그에 대한 민심이 악화했다.

급기야 1548년 4월 7일, 몰다비아 공국 중심지인 수체아바의 포르타르(지사)이자 헤트만(사령관)인 페트루 바르티치를 처형하자, 바르티치 가문 인사들은 트란실바니아와 폴란드로 피신했고, 보야르들의 반감은 위험할 수준으로 고조되었다. 1549년, 로만의 마카리에 주교가 바르티치를 무단으로 처형한 것에 비난을 퍼붓자, 일리아슈 2세는 마카리에 주교를 강제로 끌어내렸다. 그러나 여론이 몹시 악화하여 입지가 위태로워지자, 1551년 초 마카리에를 복위하고 바르티치가 묻힌 보로네츠 수도원에 많은 기부금을 납부하는 등 성직자들과 화해하려 애썼다.

그러나 상황이 점점 악화되어 도저히 보이보드 직위를 수행하지 못할 것 같자, 그는 가능한 한 많은 재물을 모은 뒤 코스탄티니예로 찾아가서 파디샤 쉴레이만 1세에게 합당한 조공을 가지고 가서 국가의 재정적 의무를 줄여달라고 설득하고 싶다고 했다. 이에 보야르 100명이 그가 가지고 간 재물에서 조공으로 바칠 몫을 떼내는 걸 감독하기 위해 동행했다. 1551년 5월 코스탄티니예에 도착한 일리아슈 2세는 쉴레이만 1세 앞에서 이슬람으로 개종하고 메흐메트라는 이름을 사용하고 할례를 받았다. 이후 쉴레이만 1세는 6월 11일에 몰다비아 보야르들의 요청에 따라 그의 동생인 슈테판 6세 라레슈를 새 보이보드로 옹립하기로 했다.

슈테판 6세 라레슈는 1552년 7월 오스만 제국의 트란실바니아 원정에 참여해 부르젤란트와 세케이란트를 황폐화하는데 일조했다. 그러나 귀환하던 도중에 예르데이 귀족 이슈트반 바토리와 이탈리아 출신 합스부르크 제국 용병대장 조반니 바티스타 카스텔도가 이끄는 적군의 기습 공격을 받아 전리품을 모조리 상실하고 가까스로 귀국했다. 1552년 9월 11일 밤, 프루트 강 유역에 있는 투쇼라 마을 인근에서 사냥하던 중 카스텔도와 내통한 보야르 무리의 습격을 받고 살해되었다. 이후 모친 엘레나는 남은 아들 이오안 5세 사술을 보이보드로 올리려 했다간 보야르들에게 또다시 살해될 것을 우려해, 전 고등판무관이었던 보야르 이오안 1세 졸데아를 새 보이보드로 옹립하고 17세된 딸 룩산드라를 결혼시켰다.

이오안 1세 졸데아는 수체아바로 가서 대관식기름 부음을 받으려 했지만, 시포테에 들렀다가 폴란드 왕국의 세니아위스키 가문과 몰다비아의 보이니치(Vornic, 왕실 감독관)을 맡은 이온 모조크의 지원을 받은 알렉산드루 4세 라푸슈네아누애 의해 체포되어 코가 베어졌고, 수도자로서 여생을 보냈다. 이에 이오안 1세와 결혼했던 룩산드라는 다시 알렉산드루 4세의 아내가 되었다. 그러나 엘레나는 1553년 아들 콘스탄틴을 보이보드로 옹립하려는 음모를 꾸몄다가 발각되어 콘스탄틴과 함께 목이 졸려 죽었다.

알렉산드루 4세 라푸슈네아누는 보이보드 등극 후 폴란드의 트렘보울라(오늘날 우크라이나 서부의 테레보레)로 가서 가족과 재회했고, 다시 바쿠타로 가서 폴란드 국왕 지그문트 2세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전쟁 시 몰다비아 기병 7,000명을 보내겠다고 약속했다. 이리하여 몰다비아 공국은 폴란드 왕실의 통제를 받았다. 1553년 1월, 알렉산드루 4세는 바쿠타에서 타타르족을 사대하는 폴란드에 수천 군인을 보냈다. 또한 그 해 5월 11일 미르체아 5세를 도와서 현직 왈라키아 공국 보이보드 라두 8세를 몰아내고 미르체아 5세를 옹립했다. 그러나 그는 곧 미르체아 5세와 마찰을 벌였고, 1554년 2월 28일에 군대를 보내 미르체아 5세를 축출한뒤 라두 7세의 아들인 파트라스쿠 첼 분을 새 보이보드로 옹립했다. 1558년 트란실바니아 내 자기 영지였던 키세우와 발타 성채를 되찾기 위해 원정을 떠나 샤라 바르세를 약탈한 뒤, 트란실바니아 공국과의 협상 끝에 두 영지를 돌려받았다.

이렇듯 그는 몰다비아 보이보드에 오른 이래 승승장구했지만, 오스만 제국은 폴란드 왕국의 지원을 받는 그를 의심했다. 1555년 오스만 궁정으로부터 코스탄티니예에 출두하라는 통보를 받았지만, 그는 가지 않는 대신 뇌물을 뿌려서 오스만 관리들이 자기를 건드리지 않도록 했다. 얼마 후, 그의 궁정에서 지내던 이오안 2세 야콥 헤라클리드가 이탈리아인 궁정 의사 조르지오 비안드라타, 몰다비아 정교회 총대주교 요아시프 2세와 공모해 알렉산드루 4세를 독살하려 했지만 발각당하자 몰다비아에서 탈출한 뒤 동헝가리 왕국으로 망명했다. 이후 기회를 엿보던 이오안 2세는 1560년 3월 3일 합스부르크 제국에 몰다비아 보이보드로서 경의를 표했고, 5월에 사절단을 페르디난트 1세에게 보내 자신이 몰다비아의 진정한 보이보드가 되게 해준다면 합스부르크 제국에 충성을 바치겠으며, 공물을 주기적으로 바치겠다고 약속했다.

1560년 후반, 이오안은 합스부르크 제국의 지원을 토대로 원정군을 구성했으며, 폴란드 귀족이자 외교관 올브라흐트 라스키에게 몰다비아의 요충지인 호틴 성채의 소유권을 약속하는 대가로 10,000 두카트를 받아냈다. 그는 이 자금을 스페인 아르케부스 부대를 고용하는 데 썼다. 그러나 폴란드 국왕 지그문트 2세는 알렉산드루 4세가 폴란드의 봉신으로서 충실한 것에 만족하고 있었는데 그 때문에 이 관계가 파탄날 것을 우려해, 이오안을 반역자로 간주하고 진압군을 보냈다. 이오안은 루테니아 사령관 미콜라이 시에니아프스키의 군대에게 무장해제된 뒤 몇 달간 구금되었다.

이후 석방된 이오안은 20,000 굴덴에 달하는 뇌물을 오스만 궁정에 퍼부었다. 그 결과, 낙소스 공국의 명목상 공작이자 궁정 권력자 조셉 나치의 회의를 얻는 데 성공했고, 이를 통해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몰다비아 보이보드가 되는 걸 용인받았다. 이후 올브라흐트 라스키의 협력을 토대로 자포로제 카자크를 회유해 대규모 병력을 구성했다. 1561년 11월 18일, 스페인 아르케부스 부대와 자포로제 카자크, 폴란드 자원병들로 구성된 이오안의 군대는 베르비아 마을 인근에서 알렉산드루 4세를 격파했다. 알렉산드루 4세는 후시로 후퇴한 뒤 다시 맞섰지만 2번째로 패한 뒤 킬리야로 이동했다가, 몰다비아 국고를 가져온 부인 룩산드라와 함께 코스탄티니예로 이동했다. 그러나 1562년 3월 오스만 궁정에 의해 로도스로 추방되었다.

4.5. 이오안 2세 야콥 헤라클리드

알렉산드루 4세 라푸슈네아누를 몰아내고 몰다비아 보이보드에 오른 이오안 2세 야콥 헤라클리드는 몰다비아 공국을 개신교 국가로 만들려는 야심을 품고 있었다. 그는 수체아바에 입성한 직후인 1561년 12월 2일 몰다비아 내 모든 기독교 종파에 대한 관용 칙령을 반포했다. 그는 몰다비아 내 개신교도들을 정교회로 강제 개종시켰던 알렉산드루 4세의 정책을 규탄했고, 개신교 교회를 송유주들에게 돌려줬으며, 다른 곳에서 박해를 받고 있는 개신교도들을 몰다비아로 초대했다. 또한 색슨족 루터교회의 주교를 임명해, 그동안 파괴된 교회를 재건하도록 했다. 그는 뒤이어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페르디난트 1세에게 서신을 보내 알렉산드루 4세가 무차별 살인자이자 정교회 광신자라고 규탄하고, 개신교 선교사 7명을 꼬챙이에 꿰어 죽이는 만행을 저질렀으니 그를 절대로 지지하지 말라고 청원했다.

그는 뒤이어 바슬루이 칙령을 반포했다. 이 칙령에서는 루마니아인이 본래 로마인이었다고 암시하며, 보야르들이 조상들의 로마적 미덕에 따라 살도록 격려했다. 또한 부자크에 대한 몰다비아의 통치를 회복하겠다고 약속했으며, 뒤이어 왈라키아 공국을 합병한 뒤 그리스를 탈환하겠다고 밝혔다. 일부 학자들은 그가 고대 다키아를 제건하려는 계획을 세웠을 거라고 추정한다. 1562년 2월에는 동헝가리 왕국에 트란실바니아 내 키세우와 체타테아 데 발터의 반환을 요구했다. 그러나 동헝가리 왕국을 섣불리 공격했다간 그들의 주권자인 오스만 제국의 분노를 살 것을 우려해 무력 행사를 자제했다.

1562년 4월 24일, 오스만 제국 파디샤 쉴레이만 1세는 수체아바 외곽에서 거행된 의식을 통해 이오안을 가신으로 인정했다. 일부 기록에 따르면, 그는 이를 위해 15,000 두카트와 말 100마리를 오스만 술탄의 공식 사절인 페르하트에게 넘김으로써 이를 성사시켰다고 한다. 이제 자신감을 얻은 이오안은 그해 6월 트란실바니아에 소속된 세케이란트 주민들이 반란을 일으킨 뒤 몰다비아와 통합시키려는 계획을 세웠다. 연대기 작가 니콜라에 코스틴에 따르면, 이오안은 서포여이 야노시가 중병에 걸려 운신이 어렵다는 소식을 접하자 병사 700명을 이끌고 트란실바니아 국경으로 진군했지만, 서포여이 야노시가 회복되었다는 소식을 접하자 트로투스 강변에서 진군을 멈췄다고 한다. 그 후 보야르 오라슈를 보내 서포여이 야노시와 세케이족 사이의 평화 협상을 중재하도록 하면서도, 용병대장 폴 세케이에게 세케이란트의 독립적인 군벌로 활동하도록 독려했다. 그러나 그 해 가을에 서포여이 야노시가 세케이란트에 대한 통제권을 확보하면서, 그의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한편, 이오안은 심복 피에르 루셀을 포함한 사절들을 서유럽 국가들에 잇달아 보내 오스만 제국에 대한 십자군을 결성해 달라고 요청했지만 별다른 호응을 얻지 못했다.

1562년 상반기, 이오안은 왈라키아 보이보드 페트루 1세의 누이인 도브라와 결혼하기로 마음먹고, 페트루 1세의 어머니인 치아나에게 사절을 보내 다이아몬드 반지를 예물로 바쳤다. 이에 왈라키아에서도 말 2마리, 보석이 박힌 쿠카 모자, 24,000 두카트를 보내는 등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고, 양자는 곧 화려한 결혼식을 거행하려 했다. 그러나 결혼식은 취소되었고, 양국간의 관계는 급격히 악화되었다. 이에 대해 일각에서는 이오안이 페트루 1세를 페위할 음모를 꾸민다는 정보가 치아나에게 전달되었을 거라고 추정한다.

이오안은 몰다비아 보이보드가 된 직후 폴란드에서 친분을 맺었던 개신교 인사들에게 몰다비아를 방문해달라고 촉구하는 초대장을 보냈다. 이에 폴란드의 저명한 칼뱅파 주교 얀 라스키가 찾아와 주민들을 상대로 포교 활동을 벌였고, 뒤이어 코트나리에 콜레기움을 설립하고 인본주의 학자 요하네스 좀머를 학장으로 세웠으며, 몰다비아 청소년들에게 장학금을 제공했고, 독일의 개신교 인문주의 학자들을 대거 초대해, 몰다비아를 동유럽 종교 개혁의 교육 중심지로 만들려 했다. 또한 로고테테(국무장관)에 루터교를 받아들인 몰다비아 학자 루카 스트로이치가 선임되었다. 그러면서 몰다비아 내 가톨릭 교회 재산을 루터교 신자들에게 넘기는 등 가톨릭 억압 정책도 은밀히 추진했으며, 이혼에 대한 효과적인 금지 조치를 포함한 새로운 법률과 관습을 도입했다. 그러나 이에 대해 정교회 신학자 니콜라에 코스틴은 이오안이 이혼에 대한 금지를 빙자해 몰다비아 신민들을 억압하고, 유물함, 오클리드, 성배를 압수해 금괴로 만들어 신민들의 분노를 샀다고 비판했다.

이오안의 급격한 서구화 개혁과 몰다비아를 동유럽의 개신교 전파지로 삼으려는 계획 추진은 몰다비아 내 정교회 성직자들과 보야르들의 강한 반감을 샀다. 그는 반대 세력이 준동하는 걸 막기 위해 강경책을 동원했다. 1562년 성 조지의 날(4월 22일)에 잠재적인 보이보드 경쟁자로 여긴 전 스톨니치 안드레이카를 수체아바의 헝가리 수비대의 주관하에 처형하게 했으며, 대 보야르 7명을 체포해 모조리 살해함으로써, 자신의 권위에 대한 어떠한 도전도 차단하려 했다. 그러나 정교회 성직자들의 반발이 그치지 않자, 그는 개신교를 몰다비아에 전파하려는 계획을 중단하기로 했다. 안드레이카로부터 몰수한 페레데니의 영지를 정교회에 속한 모르 수도원에 반환했으며, 한스 폰 운그나트가 남슬라브어로 번역한 개신교 서적을 몰다비아에 퍼트리기 위해 파견한 볼프강 슈라이버를 박대했다. 또한 주님 공현 대축일에 참석하고, 복음에 입맞춤하기 위해 절하는 등 정교회 의식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1562년 10월, 서포여이 야노시가 오스만 제국 궁정에 사절을 보내, 이오안이 페르디난트 1세와 공모해, 트란실바니아를 합스부르크 가문의 손아귀에 넣으려 하고 있으며, "트란실바니아와 폴란드의 모든 도적이 그의 휘하에 모여 오스만 제국에 대한 반기를 준비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유일한 해결책은 알렉산드루 4세를 몰다비아 보이보드로 복위하는 것뿐이라고 밝혔다. 이에 쉴레이만 1세는 페르디난트 1세에게 몰다비아에서 용병을 철수하라고 요구했고,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을 피하고 싶었던 페르디난트 1세는 받아들였다.

이 때문에 전력 공백이 발생하자, 이오안은 민심을 어떻게든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려 노력했다. 1563년 1월 6일 수체아바 대성당에서 정교회 방식으로 대관식을 거행했으며, 몰다비아 '왕'이라는 비전통적인 칭호를 사용했고, 동전 외에도 새로운 왕관과 독특한 인장을 주조했다. 주화에 새겨진 그의 초상화에는 머리띠, 칼, 홀이 그러졌으며, 동전엔 "나라의 아버지이자 데스포티스인 헤라클리스(Herclis Despote Patris Patriae)"라는 문구가 새겨졌다. 그러나 이러한 조치는 돌아선 민심을 돌리기엔 역부족이었고, 도리어 그의 지지층이었던 개신교도들이 그를 배신자로 간주하고 등을 돌리는 결과만 초래했다. 한편, 폴란드 귀족이자 개신교 신자 마르친 즈보로프스키의 딸과 결혼해 폴란드군의 후원을 받으려 했지만, 보야르들의 강력한 반발에 직면하자 취소했다.

1363년 1월, 이오안은 올브라흐트 라스키를 상속인으로 지명했다. 그러나 라스키에게 진 빛을 갚는 게 지연되자 두 사람 사이의 관계는 악화되었고, 이오안은 그해 2월 호틴에 대한 라스키의 권리를 불인정하고 수비대를 호틴에 배치해 라스키의 침략에 대비했다. 이후 폴란드 왕실의 직접적인 지원을 받기로 하고 지그문트 2세에게 충성을 서약했다. 지그문트 2세는 이에 대한 보답으로 몰다비아가 오스만 제국과 전쟁을 벌일 경우 폴란드군 7,000명을 보내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이오안이 군사력을 강화하기 위해 모든 몰다비아 가정에 두카트라는 새로운 세금을 부과하자, 민심은 더욱 악화되었다.

1563년 8월, 자포로제 카자크의 헤트만 드미트로 이바노비치 비슈네베츠키가 몰다비아 보이보드를 차지하기 위해 올브라흐트 라스키와 손잡고 몰다비아로 진군했다. 이오안은 이에 깜짝 놀라 드미트로에게 평화를 제안해 말 1,000마리와 소 수천 마리를 선물로 약속했다. 드미트로는 협상에 응했지만, 나중에 그와 다툰 라스키가 입장을 바꿔 드미트로를 공격했고, 결국 드미트로의 군댄는 궤멸된 뒤 코스탄티니예로 보내져서 갈고리에 꿰어졌다. 그 후 올브라흐트 라스키는 몰다비아 헤트만 슈테판 7세 톰샤와 동맹을 맺고 이오안에게 정식으로 전쟁을 선포한 뒤, 이오안을 수체아바에 가두고 3개월간 공성전을 벌였다. 여기에 보야르들은 이오안의 용병들을 시포테니에서 열린 축하 행사에 초대했다가 매복 공격해 모조리 죽였으며, 슈테판 7세 톰샤는 반개신교 포그롬을 조장해 여러 개신교 가문을 몰살했다.

이오안은 수체아바 내부에서 수비대가 성문을 열고 항복하려 한다고 여기고, 그들의 지휘관인 데르비치 대위를 처형했다. 그러나 이 조치는 수비대의 반감을 샀고, 결국 수체아바 내부의 헝가리 용병대가 반기를 들고 다른 부대들은 그를 위해 싸우지 않겠다고 통보했다. 결국 이오안은 항복하기로 하고, 1563년 11월 5일에 정식 예복을 입고 수체아바 성벽 바깥의 아레나 평원에서 슈테판 7세 톰샤와 대면했지만 곧바로 피살되었다.

4.6. 혼란기의 재림과 무사티니 왕조의 쇠락

이오안 2세 야콥 헤라클리드를 처단하고 보이보드에 오른 슈테판 7세 톰샤오스만 제국의 인정을 받지 못했다. 지난날 이오안 2세에게 밀려났던 알렉산드루 4세 라푸슈네아누는 오스만 궁정에 200,000 굴덴을 바치고 몰다비아 보이보드로 복위하는 걸 허락받았다. 이후 몰다비아로 돌아와 슈테판 7세 톰샤와 내전을 벌였고, 오스만 제국군크림 칸국타타르족은 알렉산드루 4세를 옹립한다는 명분을 내걸고 몰다비아로 진군해 약탈을 자행했다. 결국 1564년 3월 슈테판 7세 톰샤가 밀려나 귀족 이온 모조크, 포체드닉, 베베리타, 스팬치오그와 함께 폴란드 왕국으로 망명했다. 그러나 폴란드 국왕 지그문트 2세는 슈테판 7세를 보호하기 위해 오스만 제국과 대결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오스만 제국 측이 그를 죽이라고 요구하자, 지그문트 2세는 이를 받아들여 5월 5일에 슈테판 7세 톰샤와 보야르들을 르비우에서 참수했고, 그의 유해는 르비우에 안장되었다.

알렉산드루 4세는 복위한 뒤 처음에는 자신을 축출하는 데 관여했던 모든 보야르에게 용서를 약속했다. 입지가 굳건해지자마자 대 보야르들을 초대하는 성대한 만찬을 벌인 뒤, 외국 용병들을 동원해 그들을 모조리 죽였다. 폴란드 연대기 작가들에 다르면, 1564년 11월부터 보야르 12명이 수체아바에서 살해되었다고 한다. 한편, 오스만 제국은 그에게 몰다비아 공국이 스스로를 방어할 수 없도록 모든 도시의 성채를 파괴하라고 요구했다. 이에 알렉산드루 4세는 모든 성읍에 나무를 가득 채우고 불을 질렀다. 하지만 방화는 요새에 큰 피해를 입히지 않았으며, 이는 요새의 파괴를 피하기 위한 계략이었다. 다만 호틴만은 오스만 제국 수비대가 배치되었고, 이곳 수비대는 종종 몰다비아 시골들을 약탈했다.

1568년 3월 5일 이전에 오한과 고열에 시달리던 그는 3월 5일 트란실바니아 궁정에 주치의인 안드레이를 보내달라고 요청했지만, 안드레이는 그가 사망한 후에야 도착했다. 또한 그는 나라가 혼란에 빠지는 걸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오스만 제국 궁정에 자기가 살아있는 동안 장남인 보그단 4세를 몰다비아 보이보드에 임명해달라고 요청했다. 3월 9일 국가 평의회를 소집한 뒤 모든 신하 앞에서 홀을 보그단 4세에게 전달한 후 모두에게 그를 보이보드로 받들라고 요청했다. 모두가 그의 뜻을 받들겠다고 맹세하자, 그는 보그단 4세에게 보이보드 직위를 넘겨준 뒤 파호미(Pahomie)라는 이름으로 수도자가 되어 이아시에서 조용히 지내다가 5월 5일에 사망했다.

보그단 4세는 즉위 당시 15세의 어린 나이였기에, 어머니 룩산드라가 섭정했다. 1570년 어머니가 사망한 후, 그는 폴란드 출신 젊은 귀족들에게 둘러싸여 다양한 오락에 빠져들었고, 사치스러운 습관에 물들었다. 곧 몰다비아 재정이 고갈되자, 이를 만회하기 위해 무거운 세금을 부과해 민중의 반감을 샀다. 여기에 폴란드 왕국에 경의를 표하고 가톨릭 성직자들을 받아들이자, 호틴의 파르칼라브(pârcalab: 성주)를 역임하던 이에레미아 골리아를 비롯한 여러 보야르들은 이러다가 몰다비아의 정교회가 쇠락하고 가톨릭이 지배하고 폴란드가 자국을 지배할 것을 두려워했다. 오스만 제국 역시 몰다비아에 폴란드의 영향력이 너무 강해지는 것을 우려했다.

1571년, 몰다비아 보야르들의 집단 호소를 접한 오스만 제국 궁정은 슈테판 4세의 아들로 코스탄티니예에 있던 이오안 3세 첼 비테아즈를 몰다비아의 새 보이보드로 세우기로 했다. 이오안 3세가 튀르크인과 네살리아 용병군을 이끌고 몰다비아로 진군했다. 이에 대응해, 보그단 4세는 폴란드 국왕 지그문트 2세에게 원조를 요청했고, 폴란드 헤트만 미콜라이 멜레츠키가 이끄는 3,000 병력이 몰다비아로 이동했다.

1571년 말, 이오안 3세의 용병군은 이아시에 도착한 뒤 몰다비아 보이보드를 칭했다. 이후 프루트 강 유역에서 이오안 3세의 용병대와 보그단 4세와 폴란드 연합군이 대치했다. 당시 병력 규모는 보그단 4세 쪽이 2배 이상 많았지만, 승리를 확신하지 못해 2달간 소규모 접전만 벌였다. 그러다가 1572년 2월 오스만 제국군 6천 명이 이오안 3세를 돕기 위해 전장에 도착하자, 미콜라이 멜레츠키는 승산이 없다고 판단하여 폴란드로 철수했다. 그 후 보그단 4세는 , 파리, 코펜하겐을 거쳐 모스크바로 망명했다. 이후 루스 차르국 차르 이반 4세의 지원을 받아 몰다비아 보이보드로 복위하려 했지만, 별다른 호응을 얻지 못하다 1574년 7월 급사했다.

보그단 4세를 몰아내고 보이보드에 오른 이오안 3세 첼 비테아즈는 음모에 가담했을 것으로 의심되는 자들을 가차없이 죽이고, 그들의 재산을 몰수했으며, 죄수들의 고문을 친히 주관해 보야르들의 증오를 받았다. 한편, 그는 오스만 제국에 연간 35,000 두카트에 달하는 공물을 바치면서도 이웃 국가와의 무역을 증진하고 앞면에 자신의 이미지와 "몰다비아의 아버지"라는 문구가 새겨진 구리 동전을 주조했다. 또한 수도를 수체아바에서 이아시로 옮겼다. 1572년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 지그문트 2세가 사망한 뒤 폴란드-리투아니아 왕위 선거가 열렸을 때, 그는 루스 차르국의 차르 이반 4세를 지원했지만 실패하고 앙리 3세가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에 선임되었다.

1574년, 오스만 제국 궁정은 이오안에게 사절을 보내 공물을 2배 바치라고 요구했다. 그는 이를 거부하고 전쟁을 준비했다. 그는 오스만 제국의 압제로부터 몰다비아를 해방하겠다는 명분을 내걸고 농민들을 대거 징집해 대규모 병력을 양성했으며, 여러 폴란드 영주들로부터 지원을 약속받았고, 자포르제 카자크는 헤트만 이반 스비르고프스키의 1,200 병력을 파견했다. 한편, 오스만 제국 궁정은 페트루 6세 슈체아풀을 새 보이보드로 세우기로 했다.

1574년 봄, 오스만 제국군은 왈라키아 보이보드 알렉산드루 2세 미르체아의 지원을 받으며 몰다비아로 진군했다. 이오안은 이에 맞서 몰다비아 기병 900명과 카자크들을 먼저 파견했고, 이들은 폭샤니 인근의 질리슈테에서 오스만 제국군을 기습 공격했다. 오스만 제국군이 이 때문에 혼란에 빠진 사이, 이오안이 주력군을 이끌고 도착해 오스만군을 격파하고 막대한 전리품을 확보했다. 몰다비아-카자크 연합군은 뒤이어 왈라키아로 진군해 부쿠레슈티를 점령한 후 빈틸라를 왈라키아 보이보드로 옹립한 후, 브라일라로 향해 튀르크 보조부대를 격파하고 도시를 불태웠지만, 성채를 함락하지는 못했다.

이오안은 다음으로 몰다비아에 위치한 튀르크군 요새인 부자크로 향했다. 카자크군은 도중에 벤더리에서 대규모 튀르크-타타르 분견대를 격파한 뒤 벤더리 마을을 점령했지만 요새를 공략하지 못했다. 10,000명의 튀르크군이 요새를 구원하고자 이동했지만, 인근에서 역습을 받고 파괴되었다. 이후 포코틸로가 이끄는 카자크 600명이 폴란드에서 보낸 보트 25척을 타고 드네스트르강을 따라 벤더리로 이동했다. 이오안은 그들에게 드네스트라강변의 애커만 요새를 공략하라고 지시했다. 이들은 곧바로 진군해 애커만 마을을 점령했지만, 성벽을 허물 장비가 없었기 때문에 성채는 공략하지 않고 막대한 전리품을 가지고 돌아왔다.

그러나 오스만 제국은 새로운 군대를 소집해 남쪽에서 몰다비아로 진군했고, 크림 칸국도 동쪽에서 군대를 파견했다. 이오안은 오스만 제국군을 막기 위해 보야르 이에레미아 골리아에게 오스만 제국군이 다뉴브강을 건너는 걸 저지하도록 했다. 이에레미아 골리아는 이사케아 인근의 오블루치스키가 오스만 제국군이 건너기 가장 좋은 길목이라고 판단하고 그곳에 주둔했다. 그러나 나중에 오스만 제국이 제공한 뇌물 3만 갈벤을 받고 그들이 건너게 했으며, 적군이 얼마 되지 않는다는 허위 보고까지 올렸다. 이에 이오안은 35,000 가량의 병력을 이끌고 그곳으로 달려갔다.

1574년 7월 10일, 양군은 카굴 호수 근처에서 마주쳤다. 다뉴브 강변을 건넌 오스만 제국군이 생각보다 훨씬 많다는 걸 알게 된 몰다비아-카자크 연합군은 동요했고, 안 그래도 이오안의 왕권 강화 정책으로 많은 동료가 희생된 것에 불만이 있었던 보야르들은 곧바로 오스만 제국군에 귀순했다. 이에 이오안은 로슈차니 마을 인근 계곡으로 후퇴한 뒤 적군에게 포위되어 사흘간 항전했다. 그러나 도저히 승산이 없자, 이오안은 7월 14일에 자신과 병사들의 생명을 보존하는 조건으로 항복했다. 그러나 오스만 제국군은 그를 체포해 참수했고, 유해를 네 마리의 낙타에 묶어 조각냈다. 자포르제 헤트만 이반 스비르고프스키도 처형되었고, 수많은 몰다비아-카자크 연합군 장병들도 피살되었다. 여기에 크림 칸국에서 몰려온 타타르인들이 몰다비아를 철저하게 약탈하고 수많은 몰다비아인들을 노예로 끌고 갔다.

이오안 3세 첼 비테아즈가 무너진 뒤 보이보드에 오른 페트루 6세 슈체아풀은 오스만 제국에 철저히 복종하고 공물을 2배로 늘려서 바치자, 몰다비아 보야르 및 민중의 반감이 갈수록 강해졌다. 1577년 11월 초, 자포로제 카자크의 헤트만 이오안 4세 포트코아바가 반 오스만 성향 몰다비아 보야르들의 초대를 받고 카자크 600명을 이끌고 몰다비아로 진군했다. 그는 몰다비아 반란군과 합세한 뒤 이아시로 진군했고, 페트루 6세는 11월 18일 저항을 포기하고 이아시에서 탈출했다. 11월 말 이아시에 도착한 이오안 4세 포트코아바는 몰다비아 보이보드를 칭했다. 11월 30일, 병력을 규합한 페트루 6세가 이아시 탈환 작전에 착수했지만 격퇴되었다. 이에 페트루 6세는 오스만 제국에 도움을 요청했고, 오스만 제국 궁정은 트란실바니아 공 바토리 크리슈토프를 시켜 이들을 진압하게 했다. 이오안 4세는 1578년 초 바토리 크리스토프의 형이자 폴란드 국왕인 스테판 바토리를 찾아가 자기를 인정해달라고 요청하려 했다가 폴란드군에 체포된 뒤 1578년 6월 르비우에서 처형되었다.

1577년 12월 31일 몰다비아 보이보드로 복위한 페트루 6세는 1578년 2월 3일 이오안 4세 포트코아바의 형제인 알렉산드루 5세 포트코아바의 침공에 직면했다. 알렉산드루 5세 포트코아바는 2,000명의 카자크를 이끌고 실리스트라의 다우드 베이가 이끄는 오스만 제국군을 격파하고 2월 9일 페트루 6세를 축출한 뒤 이아시를 장악했다. 그해 2월 28일 다우드가 트란실바니아에서 온 기병 400명과 소총병 600명과 합세해 반격에 나섰고, 페트루 6세도 형의 지원을 받으며 여기에 가세했다. 이후 이아시 공방전을 벌인 끝에, 3월 13일 알렉산드루 5세 포트코아바를 축출하고 페트루 6세가 복위했다.

1579년, 몰다비아 공국 제22대 보이보드 페트루 5세 라레슈의 아들인 이오안 5세 사술이 몰다비아의 가톨릭 개종을 추구한 알바니아 출신 모험가 바르톨로메오 브루티의 재정 지원을 토대로 오스만 제국 관원들을 매수했다. 그 결과 오스만 제국 궁정은 그해 12월 2일에 페트루 6세를 끌어내리고 이오안 5세를 몰다비아의 새 보이보드로 선임했다. 이오안 5세는 빚을 내가며 막대한 뇌물을 마련해 오스만 궁저에 퍼부은 끝에 몰다비아 보이보드로 오른 이상 한 몫 단단히 뽑아야겠다고 여기고, 여러 독창적인 세금을 부과하고 거기서 확보한 자금 대부분을 개인 자산에 충당했다. 특히 바카리트(văcărit) 세는 몰다비아 역사에서 가장 악명 높은 세금으로, 몰다비아에 거주하는 소 10마리 중 한 마리를 무조건 몰다비아 보이보드의 재산으로 삼는다는 것이었다.

그가 몰다비아 보이보드에 선임되는 데 크게 기여했던 바르톨로메오 브루티는 몰다비아 재정을 담당하면서 여러 특권을 획득했다. 반면 또다른 공로자인 치아나는 별다른 보상을 받지 못하자 불만을 품고, 이오안 5세에 불만을 품은 보야르들과 야합해 오스만 제국에 그를 페위시켜달라고 청원했다. 1582년 8월, 이오안 5세는 오스만 제국이 자기를 폐위시키고 페트루 6세 슈체아풀을 복위하기로 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100대의 수레(그 중 40대는 통화로만 채워졌다.)가 동원될 만큼 큰 재산을 가지고 나라를 떠났다. 이후 트란실바니아에 새로 산 영지로 가려 했지만, 도중에 체포된 뒤 9월 28일에 르비우에서 처형되었다.

이오안 5세 사술이 처형된 뒤, 알레포에서 유폐 생활을 하던 페트루 6세 슈체아풀을 1582년 10월 17일에 몰다비아 보이보드로 복위했다. 일전에 이오안 5세 사술을 지원했던 바르톨로메오 브루티는 그가 복위한 후에도 몰다비아를 가톨릭으로 개종하겠다는 사명을 포기하지 않고, 일부 보야르를 포섭했으며, 나중에는 페트루 6세에게도 영향력을 행사했고, 예수회를 설득해 몰다비아에 선교단을 보내도록 했다. 그러나 몰다비아인들이 정교회를 확고하게 믿었기 때문에, 선교 성과는 별볼일 없었다.

페트루 6세는 가능한 한 많은 외국 상인을 유치하여 농업과 무역을 활성화하기 위한 조치를 취했다. 1588년 8월 27일, 잉글랜드 왕국 상인들은 다른 상인들이 12%의 세금을 낸 데 비해 3%만 세금을 납부하는 상업적 특권을 부여받았다. 이 협정은 전 코스탄티니예 주재 잉글랜드 대사였던 윌리엄 하버네의 주관하에 체결되었다. 또한 그는 재정 혼란을 방지하기 위해 페트루는 납세자 범주 목록을 작성하도록 했다. 1591년 2월 20일에 완료된 이 토지 등록은 현재 몰다비아에 알려진 가장 오래된 재산 및 인구 통계다. 또한 수도사 아자리에는 그의 권고에 따라 슬라브어로 슈테판 3세의 죽음부터 페트루 5세 라레슈의 통치까지의 몰다비아 연대기를 집필했던 마카리에의 기록을 이어썼으며, 1583년 이아시에 갈라타 수도원을 건설하기도 했다.

한편, 알렉산드루 4세 라푸슈네아누사생아로 자처한 아론 트리아눌코스탄티니예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예레미아스2세 트라노스와 친분을 맺었다. 예레미아스 2세는 정교회 국가인 몰다비아 공국에서 가톨릭이 부상하는 걸 매우 좋지 않게 여겼고, 현 몰다비아 보이보드 페트루 6세 슈체아풀이 이를 수수방관하는 것에 불만을 품었다. 잉글랜드 대사 에드워드 바튼 역시 가톨릭 세력의 약화를 희망해, 몰다비아 공국에서 가톨릭 신자들을 몰아내려는 예레미아스 2세의 계획에 협조하기로 했다.

아론은 예레미아스 2세와 잉글랜드 대사의 지원에 힘입어 몰다비아 보이보드가 되기 위한 계획을 추진했다. 그는 오스만 제국 궁정에서 유대인 의사로 활동하면서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던 솔로몬 벤 나탄 아슈케나지와 친분을 맺었고, 하렘에 있는 여러 여인에게 다이아몬드 반지와 에메랄드 목거링를 포함한 호화로운 선물을 제공해 그들의 호의를 얻어냈다. 여기에 오스만 제국의 이슬람 신학자이자 무라트 3세의 교사인 호카 사데딘 에펜디의 지지를 얻어냈으며, 상인과 채권자들로부터 20%의 이자로 1억 1천만 악체(약 917,000 두카트)를 빌린 뒤 오스만 궁정 관리들에게 뇌물로 바쳤다.

1591년 9월, 오스만 제국 파디샤 무라트 3세는 아론이 첫해에 60,000 새퀸을 제공하고, 전임자들보다 더 많은 공물을 매년 바치는 조건으로 그가 몰다비아 보이보드로 집권하는 걸 받아들이기로 했다. 이후 몰다비아 보이보드 페트루 6세 슈체아풀은 오스만 궁정에 의해 폐위되어 합스부르크 제국으로 망명했고, 아론이 몰다비아 보이보드로 등극했다. 그는 오스만 제국 관리들을 매수하기 위해 막대한 돈을 상인 및 채권자들로부터 빌린 터라, 이를 갚기 위해 몰다비아 국민들을 철저하게 수탈했다. 몰다비아 연대기에 따르면, 그는 돈을 뜯어내기 위해 농민들을 다양한 고문법을 도입했고, 세금을 내는 각 가족으로부터 소 한 마리씩 징수하는 "전례 없는 세금"을 만들었다고 한다.

한편, 아론은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예레미아스 2세 트라노스의 권고에 따라 몰다비아 내 가톨릭 신자들을 박해했다. 1592년 4월, 몰다비아를 가톨릭으로 개종하기 위해 보야르들을 포섭하고 예수회가 몰다비아에 선교단을 보내도록 주선했던 알바니아 출신 모험가 바르톨로메오 브루티가 긴급 체포된 뒤 처형되었고, 30,000 두카트에 달하는 전 재산이 몰수되었다. 이후 대부분 가톨릭 신자인 창고인이 정착한 사바오아니, 라카치우니의 재산을 몰수했다. 그해 5월 라푸슈나와 오르헤이에서 폭동이 발발한 뒤, 아론은 반역을 꾸민 궁정 신하인 로고테테 자하리아 바르르데아누와 보르니치 콘드라에 부시움을 처형하라고 명령했다. 이후 수체아바의 파르칼라브인 안드레이 코르코델을 체포하려 했지만, 안드레이가 오스만 제국 영토로 도망치면서 실패했다. 이후 몰다비아군을 이끌고 반란군 지도자 보그단 이오나슈쿠를 공격해 라우트 강변에서 격파했다. 보그단은 부상을 입은 채 체포된 뒤 수도원에 보내졌고, 추종자들은 신체 절단형에 처해졌다.

1592년 6월, 몰다비아의 여러 보야르들이 무라트 3세에게 아론의 심각한 폭정으로 수많은 이가 죽어가고 있다며, 아론을 폐위해달라고 요청했다. 무라트 3세는 그들의 요청을 수락해 아론을 폐위하고 알렉산드루 6세를 몰다비아 보이보드로 세우기로 했다. 그러나 알렉산드루 6세가 미처 몰다비아에 부임하기 전에, 자포로제 카자크의 지원을 받은 페트루 7세 카자쿨이 몰다비아를 장악했다. 이후 아론에게서 돈을 꼭 받아내야 했던 채권자들과 예니체리의 강력한 청원을 받은 무라트 3세는 1592년 8월 아론을 보이보드로 복위하기로 하고, 또다른 가신인 트란실바니아 공 바토리 지그몬드에게 페트루 7세를 축출하고 아론이 몰다비아 공국에 복귀하게 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1592년 10월, 아론은 바토리 지그몬드가 파견한 시브리크 가스파르의 헝가리군이 페트루 7세를 몰아내면서 몰다비아로 복귀했다. 그는 복귀하기 전에 신임하는 몰다비아인인 포스트엘닉 오페라를 파견해 이아시 궁정을 장악하도록 했다. 오페라는 아론에게 적대적인 보야르인 네스트로 우레체를 체포하려 했지만, 네스트로는 체포를 피해 폴란드-리투아니아로 도주했다. 이후 이아시 인근 숲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페트루 7세를 체포한 뒤 코를 벤 후 무라트 3세에게 보냈고, 무라트 3세는 페트루 7세를 갈고리에 꽂게 했다.

그리하여 몰다비아 보이보드에 복위한 아론은 라레슈티, 클리마우티, 자바데니 등 자기에게 반항적인 보야르들의 영지를 몰수했고, 동부 카르파티아에서 저항을 벌였던 보야르 바르티치를 처형했다. 이후 몰다비아에서 반가톨릭 정서를 부추겼으며, 몰다비아로 이주한 후스파를 인정하고, 페트루 6세 슈체아풀 치세 때 폐쇄된 모라비아 형제단 교회를 재건했다. 1593년 1월에는 대놓고 가톨릭 탄압을 천명하고 예수회를 추방했다. 몰다비아에서 활동하던 잉글랜드 선교사 토머스 월콕스는 본국에 이러한 움직임이 "폐하(엘리자베스 1세)의 장수와 번영을 위해 매일 기도하는" 다양한 몰다비아 개신교도들을 기쁘게 했다고 보고했다.

이렇듯 자기에게 반항하는 보야르들을 숙청하고 반가톨릭 정책을 지속적으로 추진하던 아론은 오스만 제국에 막대한 공물을 내놓아야 하는 상황에 염증을 느끼고, 그들로부터 독립하기로 마음먹었다. 1594년, 교황 클레멘스 8세의 주도로 오스트리아 대공국, 교황령, 스페인, 페라라 공국, 만토바 공국, 토스카나 대공국이 가담했다. 이후 트란실바니아 공국의 바토리 지그문트가 가담하자, 아론도 9월 16일에 신성 동맹에 가담하기로 했다. 왈라키아 보이보드 미하이 2세는 이웃한 두 공국이 신성 동맹에 가담하자 자기도 가담하기로 했다.

1593년 11월 13일, 이아시부쿠레슈티에서 오스만 제국에 대항하는 봉기가 발발했다. 레반트계 유대인 채권자들은 돈을 주겠다는 아론과 미하이 2세의 꼬드김에 넘어가 두 도시를 방문했다가 모조리 살해되었다. 이후 미하이 2세는 8,000 장병을 이끌고 왈라키아 남쪽의 도나우강 일대에 설치된 오스만 요새들(지우르지우, 투르누, 하르쇼바, 실리스트라)를 연이어 공격해 심한 파괴를 자행했고, 이를 응징하기 위해 쳐들어오던 오스만 제국군을 스타네슈티 마을 인근의 파디나[8] 세르파테스티에서 궤멸했다. 아론 역시 트란실바니아의 헝가리인, 루마니아인과 함께 오스만 제국을 상대로 전쟁을 개시해 1594년 3월 체타테아 알바, 이스마일, 킬리야를 점령했고, 도브루자에서 크림 칸국의 타타르군을 격파하고 오블루치아를 점령했다. 아론은 이 승리를 통해 통치권을 도브루자 북부 전체로 확대했고, 많은 전리품을 확보했다.

그러나 1595년 5월 3일 또는 5월 4일, 아론은 트란실바니아 공 바토리 지그몬드로부터 오스만 제국에 대항하는 군사 작전을 논의하자는 초청장을 받고 그곳으로 향했다가 긴급 체포되었다. 바토리 지그몬드는 아론이 신성 동맹을 이탈하고 무라트 3세와 단독으로 평화 협약을 맺으려 했기에 자기가 손을 썼다고 주장했지만, 대다수 연대기 작가들은 아론이 바토리 지그몬드에게 충성 서약을 하기를 거부했기 때문이라고 추정했다. 이후 빈슈 데 조스의 마르티누치 성에 투옥되었고, 1597년 6월에 독살당했다. 아론 트리아눌은 일반적으로 몰다비아 공국 초기 역사를 이끌었던 무사티니 왕조의 마지막 일원으로 간주된다.

4.7. 대혼란기

아론 트리아눌이 트란실바니아 공 바토리 자그몬드에게 체포된 뒤, 몰다비아군 헤트만 슈테판 8세 라즈반이 바토리 지그몬드의 도움과 군인들의 지지에 힘입어 몰다비아 보이보드에 선임되었다. 그러나 폴란드-리투아니아는 자국의 속국으로 여기던 몰다비아 공국이 트란실바니아의 봉신이 되는 걸 원하지 않았다. 그 해 8월, 폴란드군이 몰다비아를 침공해 그를 축출하고 몰다비아의 친 폴란드 성향 보야르인 이에레미아 모빌라를 보이보드로 옹립했다. 슈테판 8세는 수체아바로 이동해 트란실바니아군의 지원을 받으며 항전했으나, 그해 12월 수체아바 인근의 아레니에서 폴란드군에게 참패한 뒤 트란실바니아로 도망치다가 도중에 체포된 뒤 총살형에 처해졌다.

이에레미아 모빌라를 몰다비아 보이보드로 옹립한 폴란드군은 몰다비아의 요충지인 호틴과 수체아바에 주둔하면서 지역 주민들에 대한 수탈과 폭력을 자행했고, 몰다비아인들은 이에 깊은 불만을 품었다. 이후 이에레미아는 동생 시미온 모빌라를 왈라키아 공국의 보이보드에 앉히기 위해 미하이 2세를 몰아내려는 음모를 꾸몄다. 그러나 1599년 10월 28일 셀림바르전투에서 트란실바니아군을 격파하고 트란실바니아 공국을 석권한 미하이 2세는 몰다비아 공국 마저 무력으로 공략할 계획을 세웠다.

1600년 4월 14일, 미하이 2세는 줄러페헤르바르를 떠나 왈라키아로 돌아가면서 미할카 반이 자신을 대신해 트란실바니아를 통치하도록 했다. 1600년 5월 1일 브러쇼 인근에 숙영지를 세운 그는 장병들에게 지난날 자기를 축출하려는 음모를 꾸몄던 이에레미아 모빌라를 추방하기 위해 몰다비아로 쳐들어가겠다고 선언했다. 5월 6일, 미하이 2세는 카르파티아산맥을 등반했다. 이때 그는 적군이 산길을 막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통행이 가장 어려워서 경계가 허술한 산으로 향했다. 이 때문에 상당한 손실을 입었지만, 그의 군대는 몰다비아에 도착한 뒤 공세를 개시했다. 이에레미아 모빌라는 미처 이를 막을 병력을 모으지 못하고 바커우로 도주했지만, 적군이 그곳까지 이르자 가족과 함께 호틴으로 피신했다.

1600년 6월 1일, 미하이는 몰다비아 공국의 중심지인 이아시에 도착한 뒤 몰다비아 보야르들의 충성 서약을 받아냈다. 이후 루돌프 2세에게 서신을 보내 이에레미아 모빌라가 오스만 제국, 크림 칸국와 연합해 왈라키아를 침공하려 했다고 주장하면서, 트란실바니아, 몰다비아, 왈라키아에 대한 자신의 영구 통치를 인정해달라고 요청했다. 그해 7월 6일자 공식 문서엔 "루마니아 땅과 트란실바니아 및 몰다비아 전체의 군주"를 칭했다. 하지만 1600년 9월, 얀 자모이스키가 윙드 후사르를 앞세워 몰다비아로 진군해 이에레미나 모빌라를 복위했다. 미하이 2세는 이에 대항하려 했지만, 1600년 10월 20일 부코프 전투에서 참패했다. 얀 자모이스키는 여세를 이어가 왈라키아 공국으로 진군해 왈라키아 보야르들의 충성 서약을 받아낸 뒤 이에레미아의 형제인 시미온 모빌라를 새 보이보드로 옹립했다.

그 후 이에레미아는 친폴란드 성향 보야르들을 우대하면서 몰다비아에서 통치를 그럭저럭 이어갔고, 수체아바 수도원을 재건했다. 그러다가 1606년 7월 10일에 이아시에서 사망했고, 수체아바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그는 사망하기 전에 아들 콘스탄틴 모빌라를 후계자로 지명했지만, 동생 시미온 모빌라는 이를 인정하지 않고 정변을 일으켜 콘스탄틴을 추방하고 몰다비아 보이보드에 선임되었다. 그러나 폴란드-리투아니아의 간섭으로부터 벗어나려 했다가 이들과 갈등을 벌인 끝에 1607년 9월 14일 이에레미아 모빌라의 미망인 엘리자베타의 사주로 독살되었다.

그 후 시미온 모빌라의 아들 미하이 2세 모빌라가 몰다비아 보이보드에 선임되었다. 이에 콘스탄틴 모빌라의 어머니 폴란드의 여러 지역에서 30,000명의 군인으로 구성된 군대를 모은 뒤 1607년 10월 몰다비아로 진군해 미하일 2세 모빌라를 축출했다. 미하이 2세 모빌라는 11월에 반격해 이아시를 탈환했지만, 그해 12월 프루트 강 인근의 슈테파네슈티에서 콘스탄틴 모빌라와 엘리자베타를 지지하는 군대에게 결정적으로 패배했다. 이리하여 미하이 2세 모빌라는 왈라키아 공국으로 축출되었고, 콘스탄틴 모빌라가 몰다비아 보이보드로서의 입지를 굳혔다. 하지만 아직 어렸기에, 어머니 엘리자베타가 섭정을 맡았다.

엘리자베타는 자신을 '몰다비아의 귀부인(Doamnă a Țării Moldovei)'이라 칭했으며, 가톨릭 수도자들에게 선물을 보내는 등 가톨릭 신앙이 몰다비아에서 번창하도록 강력히 지원했다. 한편, 시미온 모빌라의 미망인이자 미하이 2세 모빌라의 어머니인 마르게리타는 남은 아들들과 함께 트라고비슈테로 피신한 뒤 다시 또다른 아들 가브릴 모빌라, 모이세, 이온과 함께 트란실바니아로 망명했다.

1610년, 트란실바니아 공 바토리 가보르가 몰다비아와 왈라키아를 상대로 공격적인 정책을 취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이에 엘리자베타는 왈라키아 보이보드 라두 10세와 우호 관계를 맺었다. 1610년 12월 20일, 바토리 가보르가 이끄는 용병들이 왈라키아로 쳐들어와 5일간 샤라 바르세 일대를 약탈한 뒤 눈덮인 카르파티아 산맥을 건너 왈라키아 본토로 진입했다. 미처 군대를 모집하지 못한 라두 10세는 트라고비슈테를 떠나 몰다비아로 피신했고, 바토리 가보르의 용병들은 왈라키아를 잔인하게 약탈했다. 한편 라두 10세는 몰다비아의 로만에서 군대를 끌어모은 뒤 복수전을 준비했다.

1611년 3월, 오스만 제국이 바토리 가보르를 압박해 트란실바니아로 돌아갸게 한 뒤 라두 9세를 보이보드에 복귀시켰다. 그해 6월, 라두 10세가 몰다비아 공국의 지원에 힘입어 라두 9세를 축출하고 보이보드에 복위했다. 1611년 9월, 오스만 제국군이 라두 9세를 왈라키아 보이보드로 복위하기 위한 대대적인 공세를 단행했다. 라두 10세는 몰다비아로 퇴각하려 했지만, 9월 30일 바카우 인근 숲에서 추격대에 따라잡혀 가을비로 인해 진흙에 갇힌 대포와 보급품이 담긴 마차를 전부 잃었고, 숙련병 상당수와 주력군의 퇴각을 확보하기 위해 스스로 희생한 폴란드 흉갑기병들도 상실했다.

가까스로 몰다비아로 망명한 라두 10세는 엘리자베타와 콘스탄틴 모자에게 오스만 제국에게 등을 돌리고 신성 로마 제국의 봉신이 되라고 설득했다. 오스만 제국 궁정은 이에 대응하기 위해 콘스탄틴을 슈테판 9세 톰샤로 교체하기로 했다. 엘리자베타와 콘스탄틴은 오스만 제국을 피해 호틴 요새로 철수한 뒤 폴란드군의 보호를 받았다. 이후 콘스탄틴은 폴란드군과 처남들의 도움을 받아 상당히 큰 군대를 모은 뒤, 1612년 7월 이아시로 진군했다. 슈테판 9세 톰샤는 이에 맞서 오스만 제국군과 크림 칸국이 파견한 타타르군의 지원을 받았다.

1612년 7월 3일 ~ 13일, 콘스탄틴 모빌라는 프루트 강둑에 있는 사스 호른 전투에서 참패했다. 그 직후 타타르군에 체포된 그는 인근 여관으로 끌려가던 중 드네스트르강을 건너다가 익사했다. 그 후 슈테판 9세 톰샤는 콘스탄틴 모빌라를 지지했던 보야르들을 대거 숙청하고, 그들의 영지를 농민들에게 나눠줬다. 1613년, 슈테판 9세는 오스만 제국 파디샤 아흐메트 1세의 지시에 따라 왈라키아 보이보드 라두 9세와 함께 트란실바니아 공 바토리 가보르를 상대로 벌인 오스만 제국군의 원정에 참여했다. 오스만군은 바토리 가보르를 성공적으로 몰아낸 뒤 베틀렌 가보르를 트란실바니아 공으로 옹립했다. 이후 몰다비아 공국, 왈라키아 공국, 트란실바니아 공국은 3자 동맹을 체결했다. 그 해 여름, 친 폴란드 성향 보야르들이 그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킬 음모를 꾸몄다. 하지만 그는 이 음모를 적발한 뒤, 보야르들을 연회에 초대한 뒤 그 중 75명을 참수했다.

1615년 9월, 네키포르 벨디만, 발도빈, 스투르자, 볼, 미르자 등 친 폴란드 성향의 보야르들이 용병대를 동원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그들은 한때 이아시를 포위하고 슈테판 9세에게 물러나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슈테판 9세는 병력을 끌어모아 반격을 가했고, 파쿠라 분수 인근에서 적군을 격파하고 여러 보야르를 생포한 뒤 처형했다. 그러나 그해 11월, 폴란드군이 알렉산드루 7세 모빌라를 앞세워 몰다비아로 진군하자, 다수의 보야르들이 대거 폴란드군에 가세했다. 그는 도저히 대적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왈라키아로 도주했다.

1616년 봄, 슈테판 9세는 왈라키아 보이보드 라두 9세의 지원을 받아 몰다비아로 진군했다. 그는 이아시를 불태우는 등 기세를 떨쳤지만, 끝내 몰다비아 보이보르로 복위하지 못하고 물러나야 했다. 얼마 후, 오스만 제국군이 몰다비아를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지배로부터 해방하겠다는 명분을 내걸고 쳐들어왔다. 그해 8월 초 할라우와 보토샤니 사이의 드라샤니 호수 인근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오스만 제국군이 승리를 거뒀고, 8월 3일 저녁에 알렉산드루 7세와 어머니 엘리자베타 및 다른 형제들이 오스만 제국군에 생포된 뒤 코스탄티니예로 압송되었다.

슈테판 9세는 오스만 제국 궁정의 호의를 잃었기 때문에 몰다비아 보이보드로 복귀하지 못했고, 그 대신 왈라키아 보이보드 라두 9세가 몰다비아의 보이보드로 옮겨졌다. 라두 9세는 몰다비아를 3년간 다스리다가 1619년 2월 9일 오스만 궁정 관원들에게 막대한 뇌물을 건넨 가슈파르 그라치아니에게 밀려났다. 가슈파르는 무장 경비대 500명을 조직하고 오르헤이아 농민들의 반란을 잔혹하게 진압해, 누구도 자기에게 맞설 엄두를 못 내게 하려 했다. 오스만 제국은 그가 드네스트르강 너머로 국경을 확장하려는 폴란드-리투아니아를 저지하기를 희망했지만, 그는 오히려 폴란드-리투아니아와 손잡고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독립한 뒤, 미하이 2세가 이뤄냈던 것처럼 왈라키아 공국트란실바니아 공국을 석권하여 루마니아의 통일을 이루려 했다. 그는 폴란드-리투아니아 헤트만 스타니스와프 주키에프스키와 동맹을 맺었고,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페르디난트 2세에게 사절을 보내 경의를 표했다.

오스만 제국 파디샤 오스만 2세는 가슈파르가 반 오스만 정책을 추진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카푸쿠(Kapucu: 오스만 제국 파디샤가 파견한 공식 사절)와 수행원 300명을 파견해 그를 폐위하려 했다. 가슈파르는 이들을 모조리 학살했다. 이에 격분한 오스만 2세는 1620년 이스칸데르 파샤가 이끄는 20,000명을 파견해 몰다비아를 공략하도록 했다. 가슈파르는 스타니스와프 주키에프스키에게 급히 구원을 요청했고, 스타니스와프는 폴란드 세임에 자금 지원을 요청했다. 그러나 세임은 오스만 제국과 전면전을 벌이고 싶지 않아 이를 거절했다. 다만 상원의 비밀 평의회가 일부 자금을 지원해줬다. 그는 얼마 안 되는 자금을 풀어서 8,000명 가량의 보병과 수백 명의 윙드 후사르를 이끌고, 1620년 9월 야전 원수 스타니스와프 코니에츠폴스키와 함께 몰다비아 공국으로 향했다.

1620년 9월 10일, 몰다비아-폴란드 연합군과 오스만 제국군이 이아시 근처의 체초롱에서 격돌했다. 주키에프스키와 코니에츠폴스키는 절망적인 수적 열세에다 훈련도 제대로 되지 않아 사기가 낮은 병사들을 이끌고 사력을 다해 싸웠으나, 끝내 수적 열세를 버티지 못하고 둘다 전사하고 말았다. 가슈파르는 한밤중에 전장에서 탈출한 뒤 트란실바니아로 망명하려 했지만, 9월 29일 튜쇼라에서 몰다비아 헤트만 바실레 셉틸리치와 두미트루 고이아에게 체포된 뒤 참수형에 처해졌다. 이후 오스만 제국은 알렉산드루 8세 일리아슈를 몰다비아 보이보드로 옹립했다. 1621년, 알렉산드루 8세는 오스만 제국 파디샤 오스만 2세폴란드-리투아니아 원정에 참여했지만 호틴 전투에서 패배를 면치 못했다.

1621년 10월, 오스만 궁정은 슈테판 9세 톰샤를 몰다비아 보이보드로 복위하기로 했다. 슈테판 9세는 복위 후 친 폴란드 성향의 보야르들과 화해를 도모하려 했다. 그러나 2년 후인 1623년 8월 오스만 제국 궁정에 의해 폐위되었고, 배에 타서 보스포루스 해협을 항해하던 중 외국인들 사이에서 일어난 폭동에 휘말려 사망했다. 그 후 라두 9세가 몰다비아 보이보드로 옮겨져 3년간 통치하다가 1626년 1월 13일에 이아시에서 병사했다. 이후 대 보야르들은 논의 끝에 미론 바르노브스키모빌라를 새 보이보드로 선임하기로 결의했다. 그들은 사절단을 코스탄티니예로 파견해 오스만 제국 궁정의 승인을 받았다. 이후 미론은 오스만 궁정이 승인해준 대가로 총 10만 크라운에 달하는 자금을 보냈다. 1625년,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 지그문트 3세 바사는 페트루 모빌라에게 통치권을 부여할 것을 요구했지만, 페트루 모빌라가 사촌인 그의 집권을 받아들이기로 하면서 무산되었다.

미론은 통치 기간 동안 여러 기념물을 세웠다. 1627년 이아시에 성모 승천 교회를 세웠고, 1629년 이아시 카운티의 바르노바 마을에 바르노바 수도원을 세웠으며, 1629년 비스트리타 계곡의 한구 수도원 정착지를 건설했다. 또한 1609년부터 건축되던 드라고미르나 수도원을 1627년에 완성했다. 한편 1628년 1월 16일에 농민이 보야르 및 수도원 영지에서 떠나는 걸 금지하는 법안을 반포해, 농노제 확립에 일조했다.

1629년 6월, 미론은 공물 지불에 황금 봉지 40개[9]를 추가해달라는 오스만 재상의 요청을 거부했다가, 폴란드와 모의했다는 혐의를 뒤집어쓰고 폐위된 뒤 폴란드의 우스티 영지로 은퇴했다. 이후 알렉산드루 5세 코코눌이 몰다비아 보이보드에 선임되었다. 19세기 루마니아 역사가이자 작가인 니콜라이 안드리에스쿠보그단(Nicolai Andriescu-Bogdan, 1858 ~ 1939)는 저서 <야시 시의 역사(Istoria orasului Iaşi)>에서 알렉산드루 5세가 오스만 관리들에게 100,000개가 넘는 베네치아 금화를 제공해 몰다비아 보이보드에 가까스로 선임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는 보야르들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는 등 무능한 모습을 보였고, 결국 1630년 4월 29일에 오스만 제국 궁정에 의해 해임되었다.

이후 모이세 모빌라가 막대한 뇌물을 오스만 궁정에 바친 뒤 몰다비아 보이보드에 선임되었지만, 1631년 11월 4만 두카트를 오스만 궁정에 바친 알렉산드루 8세 일리아슈에게 밀려났다. 알렉산드루 8세는 1633년 4월 바실레 루푸가 반란을 일으키면서 축출되었다. 이후 미론 바르노브스키모빌라가 몰다비아를 안정시키려는 보야르들의 초대를 받아 돌아왔고, 1633년 5월 3일 이아시에 도착한 뒤 보이보드로 취임했다. 그는 오스만 제국 당국의 인정을 받기 위해 보야르 사절단과 함께 코스탄티니예로 이동했다. 그러던 중 부쿠레슈티에서 왈라키아 공국 보이보드 마테이 바사라브와 대면했는데, 마테이 바사라브는 바실레 루푸가 보이보드 직위를 찬탈하기 위해 그를 제거하려는 음모를 꾸몄다는 소문이 돌고 있으니 코스탄티니예로 가지 말라고 권고했다. 하지만 그는 오스만 제국의 비위를 거슬렀다가는 몰다비아 공국이 위험해진다고 판단해, 그 말을 듣지 않고 코스탄티니예로 향했다.

6월 20일 코스탄티니예에 도착한 미론은 바실레 루푸로부터 미론이 오스만 제국과의 관계를 단절하고 폴란드와 붙으려 한다는 고발을 받은 오스만 제국 당국에 의해 체포되었다. 오스만 파디샤 무라트 4세는 그가 이슬람으로 개종한다면 살려주겠다고 약속했지만, 미론은 이를 거부했다. 결국 1633년 7월 2일 코스탄티니예 광장에서 참수되었다. 이후 모이세 모빌라가 오스만 궁정에 의해 새 보이보드로 선임되었고, 실리스트라의 파샤인 메흐메트 압자의 지원에 힘입어 바실레 루푸 등을 복종시켰다. 얼마 후 폴란드-리투아니아오스만 제국 간의 전쟁이 터졌을 때, 그는 가문과 깊은 연관이 있는 폴란드에 우호적인 입장을 내비쳤고, 오스만 궁정에 거짓 정보를 제공했다. 이 사실이 나중에 발각되자, 오스만 파디샤 무라트 4세는 1634년 4월 그를 끌어내리기 위해 카푸쿠(Kapucu: 파디샤의 공식 사절)를 파견했다. 모이세는 이 소식을 전해듣고 그동안 보이보드를 역임하면서 확보한 재산을 죄다 끌고 폴란드-리투아니아로 망명했다.

4.8. 바실레 루푸

모이세 모빌라가 축출된 뒤, 오스만 궁정에 막대한 뇌물을 바친 바실레 루푸가 몰다비아 보이보드로 등극했다. 그는 몰다비아 보야르 및 성직자들과 좋은 관계를 맺고자 노력했으며,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와 유대 관계를 맺고 정교회 신앙을 몰다비아에서 활성화하고자 노력했다. 또한 이아시에 '세 계층의 수도원(Mănăstirea Trei Ierarhi)', 르비우에 성 파라스케비 성당을 세우는 등 주목할 만한 기념물을 건설했으며, 바실레 아카데미 등 학교를 건설했고, 인쇄소를 세워서 여러 교회 서적 및 법률 서적을 루마니아어로 인쇄하도록 했다.

이렇듯 그의 치세에 몰다비아의 문화는 눈에 띄게 진흥되었고, 무역 규모도 눈에 띄게 늘어났지만, 지배 계급만 경제 부흥의 해택을 받았고, 농민들은 막대한 세금에 짓눌렸다. 파산한 농민들은 종종 집을 버리고 오스만 제국의 압제에 맞서 싸우는 유랑 농민인 하이두크인이 되었다. 1646년에 몰도바 공국을 방문한 가톨릭 주교 마크 반디니(Mark Bandini)는 루푸가 그의 통치 기간 동안 20,000명 이상의 사람들을 유죄 판결하고 처형했다고 기술했지만, 현대 학자들은 이 수치가 과장되었을 거라고 추정한다.

바실레는 자기 딸 마리아를 리투아니아 헤트만 야누시 라지비우와 결혼시키는 등 폴란드-리투아니아와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면서 왈라키아 보이보드 마테이 바사라브를 밀어내고 자기 아들 이오안을 왈라키아 보이보드로 선임하려 했다. 이에 자극받은 마테이는 트란실바니아에 거주했던 몰다비아 공위 경쟁자 이오안 모빌라를 지원했다. 오스만 제국은 마테이와 바실레간의 갈등을 비밀리에 부추김으로써, 봉신들이 서로 지리멸렬해져 자국으로부터 독립할 엄두를 내지 못하게 하려 했다. 바실레 루푸는 왈라키아의 여러 보야르들을 회유했고, 몇몇 오스만 고위 관리들에게 뇌물을 줘서 파디샤가 마테이를 폐위하도록 부추기려 했다. 그러나 마테이는 능수능란한 외교술로 오스만 관리들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일 수 있었고, 바실레 루푸를 지지한 보야르들을 처형했다.

1637년 11월, 바실레 루푸가 산악 지대를 넘어 왈라키아를 급습했지만 포차니에서 마테이에게 격파되었다. 1639년, 바실레 루푸는 아들 이오안과 함께 마테이의 퇴위를 위해 전쟁을 재차 벌이면서, 파디샤 무라트 4세로부터 마테이를 폐위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그러나 그해 12월 네니쇼르 마을 인근 전투에서 패배하고 몰다비아로 후퇴했다. 이후 양자는 트란실바니아 공 라코치 죄르지 1세의 중재에 따라 휴전 협약을 맺었고, 1644년에 휴전을 갱신했다. 두 군주는 평화의 표시로 상대 국가에 수도원을 건설하기로 했다. 그러나 화해는 오래가지 못했다. 마테이는 새로운 트란실바니아 공 라코치 죄르지 2세의 지원을 받았고, 바실레 루푸는 자포리자 카자크의 헤트만인 보흐단 흐멜니츠키크림 칸국의 칸 이슬람 3세 기라이의 지원을 받았다. 양자는 몇 차례 소규모 접전을 치렀지만 승패를 가리지 못했다.

1648년, 보흐단 흐멜니츠키가 카자크를 이끌고 폴란드-리투아니아를 상대로 반기를 들었다. 이때 몰다비아 농민들은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귀족들의 억압에 맞서 싸운다는 카자크의 대의에 공감해, 그들에 가세하여 폴란드군에 맞서 싸웠다. 반면 몰다비아 보야르들은 폴란드-리투아니아 대귀족들을 지원했다. 바실레는 카자크의 봉기에 고무된 몰다비아 농민들이 자국에서 대거 반란을 일으킬 것을 우려해, 폴란드-리투아니아군을 지원했다. 이에 보흐단 흐멜니츠키는 그를 배신자로 간주하고 응징하기로 마음먹었다. 1650년, 16,000명에 달하는 카자크군이 크림 칸국에서 파견된 타타르족과 함께 몰다비아로 침공해 몰다비아 전역을 파괴하고 이아시를 불태웠다. 결국 바실레는 보흐단과 동맹을 맺어야 했고, 자기 딸 룩산드라를 보흐단 흐멜니츠키의 아들인 티모페이 보그다노비치 흐멜니츠키와 결혼시키겠다고 약속했다.

1651년 6월 28일 ~ 7월 10일에 벌어진 베레스테치코 전투에서 카자크군이 폴란드-리투아니아군에 참패하자, 바실레는 강제로 맺어야 했던 카자크와의 동맹을 파기하기로 마음먹고,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 얀 2세 카지미에시 바사와 동맹을 맺으려 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보흐단 흐멜니츠키는 그에게 압력을 행사하기로 마음먹고, 1652년 봄 카자크군을 몰다비아 국경으로 집결했다. 1652년 6월 1일 바토그 전투에서 카자크군이 폴란드-리투아니아군을 격파한 뒤, 보흐단이 당장 자기와 동맹을 맺지 않으면 징벌 원정을 가하겠다고 위협하자, 바실레는 보흐단과의 협상을 재개했다. 그 결과 룩산드라와 티모페이의 결혼이 성립되었다.

그러나 몰다비아의 친 오스만 제국 성향 보야르들은 카자크와 손잡은 통치자에게 등을 돌렸고, 왈라키아 보이보드 마테이 바사라브와 트란실바니아 공 라코치 죄르지 2세는 이 때를 틈타 몰다비아 보이보드 직위를 주장하는 게오르게 슈테판을 몰다비아 보이보드로 옹립하기로 하고, 1653년 4월에 힘을 합쳐 침공했다. 연합군의 공세에 버티지 못한 바실레 루푸는 4월 13일 이아시를 떠나 우크라이나로 피신한 뒤, 1653년 5월 보그단 흐멜니츠키의 지원을 받아 카자크와 함께 몰다비아 공국을 탈환한 뒤 왈라키아를 침공했다. 마테이는 이에 대응하고자 출진해 핀타 전투에서 바실레 루푸를 격파했지만 그 과정에서 부상을 입었다. 바실레 루푸는 핀타 전투 패전 후 카자크로 도주했다가 크림 칸국으로 이동한 뒤, 다시 코스탄티니예로 피신했으나 곧 일곱 개의 탑에 투옥되었다. 이후 그곳에서 옥고를 치르다 1661년경에 사망했다.

4.9. 이어지는 혼란

바실레 루푸를 축출하고 몰다비아 보이보드에 등극한 게오르게 슈테판은 오스만 제국 궁정에 많은 돈을 주고 경의를 표함으로써 보이보드 직위를 승인받았다. 그러나 트란실바니아 공 라코치 죄르지 2세가 폴란드-리투아니아에 대항하기 위해 왈라키아, 몰다비아, 스웨덴 제국,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카자크와 동맹을 조직하자, 오스만 제국은 이 동맹이 장차 다뉴브 3공국(트란실바니아 공국, 왈라키아 공국, 몰다비아 공국)에 대한 자국의 영향력을 약화하는 계기가 될 것을 우려했다. 오스만 제국의 시선이 곱지 않다는 걸 느낀 게오르게 슈테판은 1656년 5월 17일 루스 차르국과 협약을 체결했다. 이에 따르면, 루스 차르 알렉세이 미하일로비치가 몰다비아가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독립하고 킬리야, 티기나, 체타테아 알바를 탈환하는 대가로, 루스 차르국의 봉신이 되어 충성을 다하기로 했다.

1658년 3월 3일, 오스만 제국 궁정은 게오르게 슈테판의 충성심이 의심된다며 그를 폐위하고 게오르게 기카를 몰다비아의 새 보이보드로 옹립하기로 했다. 게오르게 슈테판은 왈라키아 보이보드 콘스탄틴 셰르반과 트란실바니아 공 라코치 죄르지 2세의 지원을 받아 몰다비아 보이보드 작위를 탈환하려 했지만, 스트룽가 전투에서 게오르게 기카에게 패배했다. 이후 폴란드, 오스트리아, 브란덴부르크, 모스크바, 스웨덴 등지를 떠돌며 자기가 몰다비아 보이보드로 복위하도록 도와달라고 호소했지만, 아무런 호응을 얻지 못했다.

오스만 제국의 선택을 받고 몰다비아 보이보드에 오른 게오르게 기카는 1658년 12월 오스만-크림 칸국 연합군과 함께 트란실바니아 약탈전에 참여했다. 1659년 10월, 콘스탄틴 셰르반이 라코치 죄르지 2세가 보내준 트란실바니아군의 지원에 힘입어 몰다비아로 진군해 게오르게 기카를 공격했다. 그는 몰다비아에서 속절없이 밀려났고, 콘스탄틴 셰르반이 몰다비아 보이보드로 등극했다. 하지만 그 해 11월 슈테파니타 루푸크림 칸국의 지원을 받고 콘스탄틴 셰르반을 몰아냈다. 1661년 1월 말, 콘스탄틴 셰르반이 추종자들을 이끌고 몰다비아로 진군해 슈테파니타를 일시적으로 밀어냈지만, 그해 2월 슈테파니타에게 도로 축출되었다.

당시 몰다비아는 오랫동안 이어진 내전과 튀르크족 및 타타르족의 연이은 약탈, 극심한 기근으로 인해 매우 피폐해졌고, 사람들은 굶어 죽지 않기 위해 나무 껍질과 골풀로 만든 빵을 먹어야 했다. 슈테파니타 루푸는 몰다비아를 재건하기 위해 왈라키아 공국과의 관계를 호전하고 무역 및 경제를 진흥하는 데 힘을 기울였으며, 농민들이 체납한 세금을 면제받도록 했다. 그러나 장기간 투옥 생활하면서 몸이 약했던 그는 투르크인과 타타르인이 카자크에 맞서기 위해 티히나에서 요새를 건설하는 걸 돕던 중 병에 걸려 1661년 9월 29일에 2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슈테파니타 루푸 사후, 푸트나 출신의 몰다비아 보야르이자 보이니크, 술잔 관리인, 반(Ban)의 직위를 역임한 유스트라티에 다비자가 몰다비아 보야르들의 추대로 보이보드에 선임되었다. 1663년 오스만 제국의 장군 세라스키에(Seraskie)와 왈라키아 공국의 보이보드 그리고레 1세 기카와 함께 신성 로마 제국에 대항하는 오스만 제국군 원정에 참여했다. 이들은 에르세쿠이바르 요새(현재 슬로바키아의 노베 잠키 시)를 43일간 포위공격한 끝에 1663년 9월 24일에 함락했다. 몰다비아군과 왈라키아군은 그해 12월 많은 전리품을 실은 마차를 가지고 본국으로 귀환했다. 1664년, 다비자와 기카는 르웬츠(현재 슬로바키아 레비체) 요새를 포위하기 위해 사리 후세인 파샤 휘하 오스만 제국군과 함께 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그들은 지시에 따라 이동했지만, 그해 7월 9일 ~ 19일 베네덱 전투에서 신성 로마 제국군에 패배한 뒤 귀환했다.

당시 몰다비아 공국은 수십 년간 정계 혼란과 부정부패, 기근, 튀르크족과 타타르족의 습격 등으로 인해 재정 파탄에 시달렸다. 다비자는 통치 첫해에 수체아바에 조폐국을 다시 도입했다. 하지만 심각한 인플레이션과 평가 절하로 인해 몰다비아 통화의 가치가 땅바닥에 떨어졌기 때문에, 주조소는 주로 스웨덴과 리보니아 실링과 릭스달러를 위조한 주화를 발행했다. 그의 치세 동안 유일하게 위조되지 않은 동전은 시장에서 가장 작은 단위로 쓰이던 구리 동전인 살라이(şalăi) 뿐이었다. 1665년 9월 11일 또는 9월 21일에 사망했고, 이아시 인근의 바르노바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유스트라티에 다비자 사후, 다비자의 딸 아나스타샤의 남편인 게오르게 두카가 다비자의 아내인 다피나 등의 후원에 힘입어 몰다비아 보이보드로 추대되었다. 그러나 1666년 5월 오스만 제국이 공물을 제때 내지 않았다는 이유로 폐위했고, 일리아슈 알렉산드루가 그를 대신해 몰다비아 보이보드가 되었다. 일리아슈 알렉산드루의 치세 동안 몰다비아 공국이 오스만 제국 궁정에 바쳐야 하는 조공은 25,000 레이로 인상되었다. 그는 겸손하고 친절하며, 자비로운 성격이었으며, 누군가에게 "부채 상환"을 선고했을 때 그 사람을 돕기 위해 자기 주머니에서 재산을 꺼내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1668년 11월, 게오르게 두카가 오스만 제국 궁정에 막대한 뇌물을 지불한 끝에 일리아슈 알렉산드루를 몰아내고 몰다비아 보이보드에 복위했다. 그러나 이번엔 심한 가뭄으로 몰다비아 전역이 빈곤해졌고, 1671년 10월 미할체아 힌쿠와 아포스톨 듀락이 처참한 삶을 살아가는 주민들에게 과도한 과세를 거두는 게오르게 두카를 타도한다는 명분을 내걸고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군은 이아시를 점령하고 보야르와 상인의 안뜰과 집을 약탈했으며, 세금을 철저히 거둬들여 백성의 증오를 받던 그리스 세리들을 체포해 모조리 죽였다. 게오르게 두카는 일부 보야르와 함께 다뉴브 강을 건너 달아났다가, 오스만 제국군크림 칸국이 파견한 타타르 분견대의 도움을 받고 귀환했다. 이후 이에푸레니 전투에서 보야르 알렉산드루 부후슈가 이끄는 토벌대가 반란군을 격파했다. 이리하여 직위를 지켜낸 게오르게는 반란이 일어난 일대 사람들을 타타르인들의 노예로 삼거나 교수형에 처하거나 꼬챙이에 산채로 꽂히는 형벌을 받았다.

1672년 8월 10일, 게오르게 두카는 폴란드-리투아니아와의 전쟁을 치르기 위해 출진한 파디샤 메흐메트 4세를 카메니타에서 접견했다가, 메흐메트 4세의 분노를 사는 바람에 폐위되었고, 슈테판 페트리세이쿠가 그를 대신해 몰다비아 보이보드가 되었다. 당시 당시 폴란드-리투아니아와 전쟁을 치르던 중이었던 메흐메트 4세는 폴란드인의 정치 운동을 감시하고, 카메니타와 호틴에 주둔한 수비대에게 식량과 군용 물자를 공급하며, 군대에 필요한 다리를 건설하는 임무를 페트리스쿠에게 맡겼다. 그러나 그는 임무 수행을 매우 버겁게 여겼고, 자신과 보야르 및 몰다비아 국민에 대한 오스만 제국 지휘관들의 모욕적인 언행에 반감을 품고 폴란드-라투아니아와 손잡기로 했다.

1673년 11월 11일, 얀 3세 소비에스키가 이끄는 폴란드-리투아니아군이 호틴에서 오스만 제국군을 쳐부술 때, 그가 이끌던 몰다비아군은 즉시 폴란드-리투아니아군과 손잡고 오스만 제국군에 타격을 입혔다. 그러나 폴란드군은 11월 말에 그를 축출하고 이아시를 강제로 점거했고, 그는 어쩔 수 없이 러시아로 피신했다. 이후 두미트라슈쿠 칸타쿠지노가 폴란드-리투아니아군에 의해 몰다비아 보이보드로 선임되었다.

얼마 후, 폴란드-리투아니아군은 자국 국왕 미하우 코리부트 비시니오비에츠키가 급사했다는 소식을 듣고 철수했다. 이에 페트리세이쿠가 몰다비아로 돌아와서 두미트라슈쿠를 몰아내고 몰다비아 보이보드에 복위했다. 그 후 그는 오스만 제국의 보복을 두려워 해 루스 차르국과 손잡기를 희망했다. 1674년 초, 그는 대수도원장 페도르를 모스크바로 보내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자국을 보호해주면 루스 차르국의 시민이 되겠다고 밝혔다. 모스크바 궁정은 이를 긍정적으로 검토했지만, 오스만 제국과 정면 대결을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즉답을 피했다. 그 대신, 그가 몰다비아 보이보드 직위를 유지할 수 있도록 병력과 물자를 지원해주겠다고 약속했다.

1674년 2월 22일, 오스만 제국군의 지원을 받은 두미트라슈쿠 칸타쿠지노의 공세에 밀린 슈테판 페트리세이쿠는 친러시아 보야르들과 함께 폴란드로 망명했다. 이리하여 몰다비아 보이보드에 복위한 두미트라슈쿠 칸타쿠지노는 오스만 제국 궁정의 지시에 따라 수체아바, 네암슈, 호틴 요새 성벽 일부를 파괴했다. 또한 폴란드-리투아니아군의 침공을 막기 위해 몰다비아에 주둔한 타타르족은 몲다비아인들을 상대로 심각한 약탈을 자행했다. 한편, 그는 세금 시스템을 인두세로 대체했다. 주민들은 이름, 별명, 거주지, 국고에 갚아야 할 금액이 기재된 서류를 항시 휴대해야 했다.

1675년 11월 10일, 오스만 궁정은 안토니에 루세트가 두미트라슈쿠 칸타쿠지노를 대체하도록 했다. 안토니에 루세트는 몰다비아 대주교구의 소재지를 수체아바에서 이아시로 이전했다. 또한 슈테판 3세 시대에 건설된 이아시의 고스다르 성당을 복구했으며, 키릴 문자가 새겨진 돌 십자가를 설치했다. 이 십자가는 1906년에 부쿠레슈티로 옮겨져서 현재까지 남아있다. 1678년 11월, 오스만 제국 궁정은 게오르게 두카를 몰다비아 공국의 새 보이보드로 옹립하기로 했다. 게오르게 두카는 오스만 제국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막대한 공물을 보냈고, 오스만 제국은 그런 그를 기특하게 여겨 1680년에 드니에스터 강 건녀편의 네미리브, 소로카 강변의 시가나우카에 궁정을 둔 오스만 제국 치하 우크라이나 일대의 헤트만으로 선임해, 그곳에 거주하는 카자크를 통제하도록 했다. 그는 오스만 제국의 든든한 후원을 기반으로 삼아, 보야르들에게 딸의 결혼식 비용을 충당하겠다는 명분을 내걸고 막대한 세금을 뜯어내는 등 억압적으로 통치했다. 보야르들은 그런 그를 타도하려고 음모를 꾸몄지만 조기에 발각되어 숙청되었다.

1683년 4월, 게오르게 두카는 제2차 빈 공방전를 개시한 오스만 제국군을 돕기 위해 빈으로 진격했다. 그러나 빈 공방전은 오스만 제국군의 참패로 끝났다. 그 사이, 보야르들은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 얀 3세 소비에스키의 지원 약속을 받고 반란을 일으켜 슈테판 페트리세이쿠를 몰다비아의 새 보이보드로 옹립했다. 게오르게는 급히 귀국길에 올랐지만 1683년 12월 25일 체포되어 폴란드-리투아니아로 끌려갔고, 1685년 3월 31일 르부프 감옥에서 옥사했다. 그리하여 몰다비아 보이보드에 오른 슈테판 페트리세이쿠는 요새에 주둔한 튀르크족과 타타르족을 학살했다. 그 후 루스 차르국에 재차 사절을 보내 러시아 시민이 되기를 간청했고, 모스크바에 새로운 대사관을 설립했다. 그러나 루스 차르국은 국제 정세가 복잡하기도 했고, 폴란드에서 10년을 보낸 뒤 폴란드인 덕분에 왕위를 되찾은 그를 불신했기에 대답을 회피했다. 루스 차르국이 도와주지 않자, 그는 자보로제 카자크와 동맹을 맺고 카자크 용병대를 대거 고용했다. 그러나 1684년 3월, 크림 칸국에서 파견한 타타르군에게 패퇴한 뒤 폴란드의 즈볼린으로 피신했다.

타타르군은 슈테판 페트리세이쿠를 몰아낸 뒤 두미트라슈쿠 칸타쿠지노를 몰다비아 보이보드로 복위했다. 그러나 몰다비아 공국은 그의 세번째 치세에 극심한 기근에 시달렸고, 수많은 사람이 거리에서 굶어죽었다. 당대 기록에 따르면, 늑대 무리가 도시에 들어와 매장되지 않은 시신을 먹어치웠다고 한다. 이로 인해 민심이 흉흉해져 대규모 폭동이 일어날 조짐이 보이자, 오스만 제국 궁정은 1685년 6월 25일에 그를 폐위하고 콘스탄틴 칸테미르를 몰다비아의 새 보이보드로 옹립했다. 콘스탄틴 칸테미르는 세금 징수원들의 수탈로부터 백성들을 도와주면서 착하고 성실한 통치자로서 백성들의 존경을 받았다고 한다. 또한 그는 폴란드와 오스트리아에 대한 오스만 제국의 전쟁에 참전했다. 몰다비아는 그의 치세에 두 차례 침공받았다. 한 번은 타타르족이 침략해 약탈을 자행했고, 또 한 번은 폴란드-리투아니아군의 침략을 받았다. 그럼에도 그는 폴란드와 오스트리아에 오스만 제국의 계획을 종종 알렸으며, 그의 아들 안티오와 디미트리에는 몰다비아가 러시아와 연게해 오스만 제국과 대적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온 네쿨리스에 따르면, 콘스탄틴은 서명만 쓸 수 있을 정도로 문맹이었지만, 자식들이 좋은 교육을 받도록 했으며, 몰다비아에서 활동하는 학자들과 두루 교류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1691년 루마니아의 저명한 학자 미론 코스틴과 형제 벨리치코 코스틴을 반역 혐의로 처형했다. 디미트리에 칸테미르는 저서 <콘스탄틴 칸테미르의 생애>에서 미론 코스틴이 정말로 반역을 꾸몄기 때문에 처형되었다며 아버지를 옹호했다. 하지만 미론 코스틴이 정말로 반역을 꾀했는지는 불분명하다.

1693년 3월 콘스탄틴 칸테키르가 사망한 뒤, 차남 디미트리에 칸테미르가 몰다비아 보이보드로 등극했다. 그러나 디미트리에가 왈라키아 공국 전임 보이보드 셰르반 칸타쿠지노의 미망인 마리아와 서신을 교환하면서 음모를 꾸미는 기미가 보이자, 왈라키아 공국 보이보드 콘스탄틴 브랑코비아누는 자기 딸 마리아를 전임 몰다비아 보이보드 게오르게 두카의 아들인 콘스탄틴 두카와 약혼시켰다. 그해 4월, 콘스탄틴 두카는 콘스탄틴 브랑코비아누의 지원에 힘입어 디미트리에를 몰아내고 몰다비아 보이보드에 즉위했다. 콘스탄틴 두카는 집권 이래 반대파에 대한 잔인한 탄압을 가해 민심을 잃었고, 통치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세금을 인상하고 담배세, 옥수수세, 소 10마리 중 한 마리를 몰수하는 바카리트(văcărit) 세를 도입했다. 오스만 제국 총독이 그의 잔혹한 행위에 분노하자, 콘스탄틴 브랑코비아누는 총독의 분노를 잠재우기 위해 재정을 털어서 뇌물을 줘야 했다.

그러던 1695년, 콘스탄틴 두카가 공물 납부를 제때에 하지 않자, 오스만 제국 궁정은 공물 납부를 독촉하기 위해 카푸쿠(Kapucu: 오스만 제국의 공식 사절)를 파견했다. 그런데 카푸쿠는 몰다비아에 도착한 지 얼마 안가서 피살되었다. 이에 오스만 제국 궁정은 그가 카푸쿠 살인을 사주했다고 간주하고, 그 해 12월 8일에 전격 해임하고 디미트리에 칸테미르의 형인 안티오 칸테미르를 새 보이보드로 옹립했다. 1699년 11월 16일 오스만 제국합스부르크 제국 간의 평화 협약인 카를로비츠 조약이 체결되었을 때, 안티오 칸테미르는 협상 과정에 참여해 중재 임무를 수행했다.

1700년 9월 12일, 오스만 제국 궁정은 왈라키아 보이보드 콘스탄틴 브랑코비아누의 로비에 응해 안티오 칸테미르를 폐위하고 콘스탄틴 두카를 몰다비아 보이보드로 복위하기로 했다. 콘스탄틴 두카는 복위한 이래 칸테미르 가문 지지자들을 박해했다. 그러나 아내 마리아가 사망한 후 콘스탄틴 브랑코비아누와의 관계가 냉각되었고, 그의 이익에 어긋나는 정책을 추진하기도 했다. 1703년, 콘스탄틴 브랑코비아누는 콘스탄틴 두카를 몰아내기 위해 오스만 제국 관리들을 설득했다. 오스만 관리들이 그가 몰다비아 보이보드를 겸임하는 게 어떠냐고 제안했지만, 그는 자기로부터 더 많은 돈을 뜯어내려는 복심이 숨겨져 있음을 눈치채고 거절했다. 이후 그 해 7월 26일 콘스탄틴 두카가 폐위되었고, 미하이 라코비차가 몰다비아 보이보드로 선임되었다.

미하이 라코비차는 밖으로는 몰다비아 보이보드 직위를 노리는 여러 경쟁자들의 암투에 맞서야 했고, 안으로는 보야르들의 권세를 억제해야 했다. 그는 그리스인 추종자들에게 의존해 이들에 대적했으며, 특별세를 계속 부과하는 등 재정 마련에 골몰했다. 1705년 2월 13일, 연이은 과세에 불만을 품은 보야르 및 민중들의 소요로 몰다비아 공국에 불온한 기류가 흐르는 걸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었던 오스만 제국 궁정에 의해 폐위되었고, 안티오 칸테미르가 대신 부임했다. 안티오 칸테미르는 높은 세금을 부과했지만, 이전 통치자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공정한 통치를 했기에 민중의 인기를 샀다고 전해진다. 또한 1707년 2월 이아시 아카데미를 설립했다. 그러나 그에게 밀려났던 미하이 라코비차가 코스탄티니예에서 몰다비아 보이보드로 복위하기 위해 2년간 로비 활동을 벌였고, 결국 오스만 제국 궁정은 1707년 7월 31일 그를 폐위하고 미하이 라코비차를 몰다비아의 새 보이보드로 선임했다. 그러나 미하이 라코비차는 1709년 10월 28일 루스 차르국표트르 1세와 내통하고 있다고 의심한 오스만 제국 궁정에 의해 코스탄티니예로 소환되었다.

4.10. 파나리오테스 체제

오스만 제국은 몰다비아 보야르들이 보이보드를 선출하고 자기들이 승인하는 구조로는 통제가 제대로 되지 않는다고 판단하고, 이후부터는 보야르들의 선출권을 박탈하고 파나리오테스 출신 인사를 임의로 앉히기로 했다. 이렇게 도입된 파나리오테스 체제의 첫번째 보이보드인 니콜라에 마브로코르다트는 1710년 11월 21일 루스 차르국표트르 1세와 내통할 지도 모른다고 의심한 오스만 파디샤 아흐메트 3세에 의해 폐위되었다. 이후 디미트리에 칸테미르가 몰다비아 보이보드에 선임되었다. 몰다비아 연대기 작가 이온 네쿨리스(Ion Neculce, 1672 ~ 1745)에 따르면, 크림 칸국의 칸 데블레트 2세 기라이의 시종이자 재무관인 다불 이스마일이 디미트리에와 두터운 친분을 맺고 있었고, 데블레트 2세는 재무관의 조언에 따라 오스만 제국 당국에 그를 추천했다고 한다.

디미트리에 칸테미르는 짧은 치세 동안 덜 부유한 사회 계층을 위해 몇 가지 개혁을 단행했다. 그는 데세아틴(deseatin, 십일조) 세, 특히 벌집에서 나오는 제품의 10분의 1세를 폐지했는데, 이는 소규모 귀족인 양봉가들에게 혜택을 주기 위한 조치였다. 또한 로만 출신의 칼리시 소녀 길드, 이아시 출신의 부리 길드, '가난한 주부' 길드를 위한 특권을 부여하는 등, 빈곤하게 지내는 이들을 배려하는 면모를 보였다.

오스만 제국 정부는 그에게 러시아 제국과의 전쟁을 돕도록 했다. 그러나 그는 오스만 제국이 쇠락하고 있으며, 발칸반도흑해에 깊은 관심을 보이는 러시아 제국이라면 몰다비아의 독립을 도와줄 거라고 여겼다. 디미트리에는 1710년 연말에 러시아군을 염탐하겠으니 러시아 차르 표트르 1세와 협상하러 가는 걸 허락해 달라고 요청했고, 오스만 제국 파디샤 아흐메트 3세는 수락했다. 이후 러시아 진영으로 간 그는 1711년 1월에 열린 폅상에서 표트르 1세가 몰다비아의 해방과 자치를 보장한다면, 몰다비아인은 오스만 제국에 대항하는 러시아군을 돕겠다고 제안했다. 표트르 1세는 손해볼 것 없는 협약이라 여기고 받아들였다. 그 후 디미트리에는 표트르 1세 편으로 돌아섰고, 러시아 측에 17,000명의 병력을 제공했다. 그러나 1711년 7월 프루트 전투에서, 러시아-몰다비아 연합군은 발타치 메흐메트 파샤가 지휘하는 오스만 제국군에 격파되었다.

그 후 디미트리에는 러시아로 망명했고, 니콜라에 마브로코르다트가 몰다비아 공국의 새 보이보드로 등극했다. 그는 몰다비아 보이보드로서 재위하면서 보야르들의 횡포를 억제하고 농민을 보호하는 정책을 시행해 백성들의 호응을 얻었다. 또한 몰다비아 공국에 주둔하던 스웨덴군과 폴란드군을 오스만 제국의 협력하에 몰아냈다. 그러던 1716년 왈라키아 공 슈테판 칸타쿠지노가 처형된 뒤, 아흐메트 3세의 지시에 따라 왈라키아 공국의 보이보드로 부임했다. 이후 오스만 제국은 미하이 라코비차가 반 합스부르크 가문 인사이므로 합스부르크 제국과의 전쟁을 적극적으로 도울 거라 여기고 몰다비아 보이보드로 선임했다. 얼마 후, 트란실바니아 공국에 주둔한 오스트리아군 사령관 에티엔 드 스테인빌이 프랑수아 에르나우 대위 휘하 세케이인 병사 300명을 몰다비아로 파견했다. 미하이 라코비차는 이들의 기습 공격으로 거의 사로잡힐 뻔했지만 겨우 도주할 수 있었다. 이후 크림 칸국의 지원을 받아 이아시에서 오스트리아군을 격파하고, 오스트리아 장교 페렌츠를 사로잡아 참수형에 처했으며, 오스트리아군과 협조한 많은 몰다비아인을 학살했다.

이후 미하이는 오스만 제국의 요청에 따라 합스부르크 제국으로부터 독립을 꾀했던 전임 트란실바니아 공 라코치 페렌츠 2세를 복위하기 위한 원정을 감행했지만, 비스트리차에서 현지 주민들의 강력한 저항을 받자 동부 카르파티아산맥 너머로 철수했다. 합스부르크 제국은 이에 대응해 몰다비아로 별동대를 파견해 약탈과 파괴를 자행했다. 여기에 급료를 지불받지 못한 크림 칸국의 타타르인들이 항의하자, 그들이 몰다비아의 보야르 영지들을 약탈하는 걸 허용했다. 이에 강한 반감을 품은 보야르들이 오스만 제국 궁정에 그를 쫓아내달라고 호소했고, 결국 1726년 10월 5일에 강제로 폐위된 뒤 그리고레 1세 기카로 교체되었다. 그리고레 1세 기카는 전임자가 무거운 세금을 강요해 보야르와 왈라키아 농민들의 강한 반감을 샀기에 폐위된 점을 고려해 세금을 대폭 인하했지만, 여전히 그리스인들에게 중임을 맡겼다. 미하이 라코비차의 형제 드미트리에 라코비차는 그를 축출하기 위해 불만을 품은 보야르들을 끌여들어 크림 칸국의 지원을 받아 그를 몰다비아에서 축출하려 했다. 하지만 그리고레 1세는 오스만 제국과 몰다비아인들의 도움을 받아 이들을 격퇴했다.

1733년 4월 16일, 왈라키아 보이보드 콘스탄틴 마브로코르다트가 그리고레 1세 기카와 자리를 바꾸면서 몰다비아 보이보드로 등극했다. 콘스탄틴 마브로코르다트는 왈라키아에서 했던 것처럼 농노제 억제 정책을 추진했다. 그러나 이에 불만을 품은 보야르들의 로비 활동에 넘어간 오스만 제국 궁정이 1743년 7월 29일에 그를 폐위하고 이오안 마브로 코르다트를 새 보이보드로 선임했다. 그러나 이오안은 파티에 시간을 보내고 무분별한 지출을 했으며, 사치에 쓸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세금을 늘리고 보야르들로부터 기부금을 강제로 수령했다. 보야르 중 일부는 그의 등쌀에 못 이겨 폴란드-리투아니아로 망명했다.

1747년 5월 오스만 제국 궁정은 몰다비아 보야르들의 탄핵을 받아들여 그를 폐위하고 그리고레 1세 기카를 몰다비아의 새 보이보드로 옹립했다. 1748년 4월 왈라키아 보이보드 콘스탄틴 마브로코르다트가 그리고레 1세와 자리를 바꿔 몰다비아 보이보드로 선임된 뒤 1년간 맡다가 1749년 8월 31일에 물러났고, 요르다케 스타브리치가 카이마캄(Caimacam: 임시 통치자)을 맡았다. 그 해 12월 7일 콘스탄틴 라코비차가 몰다비아 보이보드에 선임되었다. 그는 그리스인들을 요직에 앉히고 세금을 대폭 인상해 오스만 제국에 바칠 공물을 마련하는 한편, 개인적으로도 재산을 늘리고자 노력했다. 이에 보야르와 신민들의 불만이 고조되었고, 외국인 혐오증이 갈수록 심해졌지만, 다들 오스만 제국의 비호를 받는 그를 상대로 봉기를 일으킬 엄두를 내지 못했기에 별다른 소요 사태가 벌어지지 않았다.

1753년 7월 14일, 왈라키아 보이보드 마테이 기카가 콘스탄틴 라코비차와 자리를 바꿔 몰다비아 보이보드로 선임되었다. 그는 막대한 빚을 갚기 위해 농민들에게 막대한 세금을 매겼으며, 몰다비아 궁정 직위를 그리스인, 아르메니아인, 아랍인들에게 끊임없이 판매했다. 여기에 1755년 성 사바 수도원에 면세 권리를 박탈하고 연간 100 탈러의 세금을 거뒀으며, 성금요인 수도원의 키시너우 마을 소유권을 박탈했다. 그러면서도 합스부르크 제국러시아 제국에 사절을 종종 보내서 그들과 친밀하게 지내려 했다. 그러나 이 움직임은 오스만 제국 궁정에 포착되었고, 파디샤 오스만 3세는 그가 반역을 꾀하고 있다고 의심해 1756년 2월 19일 마테이를 추방했다.

그 후 몰다비아 보이보드로 복귀한 콘스탄틴 라코비차는 1년간 통치했지만, 1757년 3월 20일 그의 수탈을 견디지 못한 보야르들의 간절한 청원을 받아들인 오스만 제국 궁정에 의해 스카를라트 기카로 교체되었다. 스카를라트 기카는 오스만 제국 궁정에 매해 금주머니 300개를 지불했고, 기카 가문의 수입을 늘리기 위해 서민이 납부해야 하는 간접세를 대거 거둬들였다. 그러면서도 합스부르크 제국, 러시아 제국, 폴란드-리투아니아와 활발하게 교역해 안정적인 수입원을 확보하고자 노력했다. 1578년 8월 스카를라트 기카가 왈라키아 보이보드로 자리를 옮긴 뒤, 이오안 테오도르 칼리마치가 몰다비아의 새 보이보드로 선임되었다. 그는 1761년 6월까지 역임하다가 장남 그리고레 칼리마치에게 보이보드 직위를 넘기고 퇴위했다.

그리고레 칼리마치는 오스만 궁정에 바치던 공물량을 일부 줄였고, 1762년 로고파트(Logofat: 궁정 총리) 게오르가치에게 몰다비아 법원 관습법에 관한 책을 반포하도록 했다. 그러다가 1764년 3월 29일 그리고레 2세 기카가 그를 대신하여 몰다비아 보이보드로 선임되었다. 그리고레 2세는 세금 징수를 정례화하고 특별세 남용을 종식함으로써 과중한 세금에 고통받는 백성들을 안정시키려 노력했다. 또한 지지아 강 인근 치피레슈티에 펄프 공장을 설립했으며, 메트로폴리스 인근에 학교를 세웠다. 1767년 1월 23일 그리고레 칼리마치가 다시 몰다비아 보이보드로 선임되었다.

1768년, 제7차 러시아-튀르크 전쟁이 발발했다. 러시아 제국은 몰다비아 주민들의 반란을 유도하기 위해 밀사들을 파견했다. 이에 그리고레는 밀사 한 명을 죽이고 다른 한 명을 체포했다. 1769년 러시아군이 몰다비아로 쳐들어올 기미가 보이자, 그는 오스만 궁정에 군대를 모집할 돈이 없으니 자금을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오스만 궁정은 그에게 금화가 가득 담긴 수백 자루를 보냈지만, 그는 이 돈으로 빚의 일부를 갚았을 뿐, 군인들에게 급료를 지급하지 않았다. 이에 병사들은 대거 러시아군에 귀순했다. 그의 행위를 전해들은 오스만 궁정은 그가 러시아 제국과 결탁했다고 판단하고, 1769년 6월 14일 전격 폐위한 뒤 코스탄티니예로 소환한 후 그 해 9월 9일에 참수한 뒤 잘린 머리를 공개적으로 전시했다.

그리고레 칼리마치가 처형된 뒤 몰다비아 공국에 러시아군이 진주하면서, 보이보드는 몇 년간 공석으로 남았다. 그러다가 1774년 퀴췩 카이나르자 조약이 체결되면서 오스만 제국과 러시아 제국간의 평화가 성립된 뒤, 그리고레 2세 기카가 몰다비아 보이보드로 복위했다. 1775년 합스부르크 제국이 러시아와 비밀리에 협상해 몰다비아 북서쪽 포아르타 일대를 장악하고 부코비나로 칭했다. 이리하여 체르너우치, 스토로지네츠, 푸트나[10], 그리고 수체아바 상당 부분이 합스부르크 제국의 수중에 넘어갔다. 그리고레 2세는 오스만 제국 궁정에 사절을 보내, "저들이 점령한 지역은 부와 가치 측면에서 남은 몰다비아를 능가한다"라며, 합스부르크 제국의 만행을 좌시하지 말아달라고 촉구했다. 그러나 오스만 제국은 그가 강력하게 반발해 협약이 깨지면, 가뜩이나 막대한 손실을 입은 자국이 더 많은 희생을 치를 것을 우려했다.

1777년 9월, 압뒬하미트 1세는 집행 대리인인 아흐메트 카라 히살리아가를 몰다비아에 파견했다. 그는 몰다비아의 수도 이아시에 도착한 뒤 병에 걸린 척하면서 역대 튀르크 총독이 거주하는 베일리츠 저택으로 와달라고 청했다. 그리고레 2세가 10월 1일에 문병하러 찾아가자, 아흐메트는 무사들을 시켜 그를 곧바로 체포한 뒤 폐위를 선언했다. 그 후 10여 일간 가혹한 고문에 시달리던 그는 10월 12일 이아시에서 참수형에 처해졌다. 그 후 몰다비아 보이보드에 선임된 콘스탄틴 모루지오스만 제국군에 보급품을 전달하는 데 힘썼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합스부르크 제국의 동향을 관찰하기 위해 에 특사를 파견했다. 이후 프로이센 왕국, 오스만 제국, 러시아 제국이 합스부르크 제국을 견제하기 위해 서로 화해하기로 했고, 그는 몰다비아 보이보드 직위를 보장받았다. 내치에서는 폴란드-리투아니아에서 브랜디밀수하는 바람에 관세를 받지 못하여 재무부가 손실을 입고 있다며, 폴란드-리투아니아 당국에 항의했으며, 국경을 폐쇄해 더 이상의 밀수가 일어나지 않게 하려 노력했고, 궁정 사치를 줄이고 재정 낭비를 막으려 노력했다. 또한 이아시 아카데미에 각별한 주의를 기울였으며, 장학금을 설립했다.

1782년 6월 8일, 오스만 궁정은 러시아 제국 당국으로부터 자국 사절이 몰다비아에서 제대로 된 영접을 받지 못한다는 불만을 접수하자, 이를 빌미삼아 콘스탄틴 모루지를 폐위하고 알렉산드루 마브로코르다트 델리베이를 새 보이보드로 선임했다. 1785년 1월, 몰다비아 주재 오스트리아 영사 라지체비치(Rajtschewitsch)가 자신은 "황제와 왕실 폐하이시며, 사도이자 로마의 카이저이신" 요제프 2세를 대표해 이곳에 부임했는데, 현직 몰다비아 보이보드는 자기를 제대로 환영해주지 않았다고 항의했다. 당시 오스만 제국은 합스부르크 제국과의 전쟁을 최대한 회피하고 싶었기에, 전쟁의 빌미를 조금도 주지 않기 위해 그해 1월 12일에 알렉산드루를 폐위하기로 했다.

이후 몰다비아 보이보드로 부임한 알렉산드루 마브로코르다트 피라리스는 러시아 제국과 오스만 제국 간의 전쟁이 발발할 기미가 감돌자, 그리스인의 해방을 이끌겠다는 러시아 정부의 주장에 감화되어 그들을 돕기로 하고, 오스만 제국군의 실태와 기밀을 러시아 정부에 낱낱이 일러바쳤다. 그러던 1786년, 그는 로만 주교 로마노스 레오나토스를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청의 허락을 받지 않고 몰다비아 대주교로 선출했다가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프로코피우스의 규탄을 받았다. 그해 12월 14일, 오스만 궁정은 이 일로 정교회 신자들이 동요할 것을 우려해 그를 폐위하기로 했다. 이후 코스탄티니예로 이동하던 중, 이러다가 러시아 제국과 밀통한 일이 들통날 것을 염려한 끝에 러시아로 도피했고, 차리나 예카테리나 2세를 알현했다.

그 후 오스만 당국은 알렉산드루 입실란티를 새 보이보드로 선임했다. 1787년 제8차 러시아-튀르크 전쟁이 발발하자 오스만 제국 편에서 러시아군에 대적했고, 오스만 궁정으로부터 몰다비아에 주둔한 오스만군의 지휘권을 수여받았다. 그러나 전세는 러시아 쪽으로 점점 기울였고, 급기야 합스부르크 제국이 러시아 제국과 연합해 몰다비아를 침략하면서 입지가 급격히 위태로워졌다. 결국 1788년 4월 19일 오스트리아군이 몰다비아 공국의 중심지인 이아시를 공략했을 때 생포되었다. 그 후 1788년 5월 18일 오스만 제국에 의해 몰다비아 보이보드로 선임된 마놀레 기아니 루세트합스부르크 제국이 점령하고 있는 몰다비아를 탈환하기 위해 왈라키아 보이보드 니콜라에 마브로게니와 오스만군, 크림 칸국과 손잡았다. 1788년 여름 오스만 제국군이 몰다비아로 진격했을 때 참여해 여러 전투에 참전했다. 그러나 1788년 10월 튀르크인들이 그가 적과 내통하고 있다고 의심해 목숨이 위태로워지자 소규모 병력과 함께 러시아군에 귀순했다.

이후 4년간 공석이었던 몰다비아 보이보드는 1792년 3월 러시아군이 몰다비아에서 철수한 뒤 알렉산드루 모루지가 오스만 제국에 의해 몰다비아 보이보드로 선임되었다. 그는 러시아군이 주둔하는 동안 약탈당한 몰다비아의 질서를 회복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1793년 1월 10일, 왈라키아 보이보드였던 미하이 수추가 알렉산드루 모루지와 자리를 바꿔서 몰다비아로 부임했다. 그 후 1795년 5월 6일까지 다스리다가 알렉산드루 칼리마치로 대체되었다. 알렉산드루 칼리마치는 오스만 제국의 요구에 따라 포도주 통에 대한 세금을 인상했다. 그러면서도 그리스 시인이자 그리스인의 독립을 꾀한 리가스 페레오스의 문학 작품에 자금을 지원했다. 그러나 고령의 나이에 통치하는 데 지친 그는 3차례나 퇴위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했고, 1799년 3월 마침내 퇴위를 허락받았다.

그 후 콘스탄틴 입실란티가 몰다비아 보이보드로 선임되었지만, 1801년 7월 4일 러시아 제국과 우호적인 태도를 보이는 그를 경계한 오스만 당국에 의해 폐위되었고, 알렉산드루 수추가 새 몰다비아 보이보드로 선임되었다. 이 시기, 왈라키아와 몰다비아 보야르들은 오스만 제국에 공물 납부량을 고정할 것과 공물을 늘리는 걸 금지할 것을 지속적으로 요구했다. 당시 오스만 제국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단행한 이집트 원정의 여파에 시달린 데다 러시아 제국의 압력이 거셌기에, 이들의 요구를 받아주기로 했다. 이리하여 왈라키아에 619자루, 몰다비아에 135자루의 고정 조공이 확립되었다. 여기에 두 공국의 통치자 임기는 7년으로 고정되었다.

그러나 러시아 제국은 몰다비아에 자신들에게 우호적인 인사가 군림하기를 원했기에, 알렉산드루 수추가 정교회 신자들을 학대한다는 등의 여러 혐의를 걸고 비난을 퍼부으며 오스만 궁정을 압박했다. 이에 오스만 제국은 1802년 9월 알렉산드루 수추를 왈라키아 보이보드로 보내고 알렉산드루 모루지를 몰다비아 보이보드로 세웠다. 알렉산드루 모루지는 나름대로 치적을 쌓았다. 삼바르 강에 제지 공장을 세웠고, 가뭄이나 서리가 닥칠 경우를 대비해 14개의 부쿠레슈티 수도원에 마력 제지 공장을 설립하고 운영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다. 또한 우편 서비스 체계를 조직했으며, 동로마 제국 후기 법학자 콘스탄티노스 아르메노풀로스와 동로마 황제 레온 6세의 법령집을 번역해 형사 및 정치 규정에 써먹고자 했다. 그리고 도로를 포장하고, 샘물 수집을 위한 저수지를 건설하고, 분수 및 공공 수도를 세웠으며, 폭사니 시의 물 공급을 개선하고, 홍수 예방을 위해 강의 빙하를 깨기 위한 특수 부대를 창설했다. 그리고 이아시에 고아원을 설립하고 흑사병 환자를 위한 특별 병원을 설립했으며, 폭사니, 바를라드, 키시나우, 갈라치에 4개의 그리스-루마니아 학교를 세웠다.

1806년 8월, 알렉산드루 모루지는 러시아 제국과 우호 관계를 돈독히 하면서 나폴레옹 1세가 이끄는 프랑스 제1제국과 오스만 제국의 사이를 이간질했다가 이를 알게 된 프랑스 측의 항의로 인해 오스만 궁정으로부터 몰다비아 보이보드 직위에서 폐위되었다. 이후 스카를라트 칼리마치가 몰다비아 보이보드를 맡았지만 그해 10월 26일에 오스만 제국이 다시 알렉산드루 모루지를 몰다비아 보이보드로 복위했다. 이후 알렉산드루 모루지는 1807년 3월 17일까지 통치했지만, 러시아군이 몰다비아를 공략하면서 축출되었다. 알렉산드루 한제를리가 뒤이어 몰다비아 보이보드에 올랐지만, 몰다비아 공국이 러시아군의 지배하에 있었기에 이아시로 갈 수 없었고, 그 대신 오스만 제국군에 종군했다. 그러다가 1807년 7월 24일 스카를라트 칼리마치로 교체되었는데, 이 이유는 출처마다 의견이 다르다. 1858년 페르디낭 회퍼가 발간한 프랑스어 전기 작품 <누벨 전기 일람(Nouvelle biographie générale)>에 따르면, 그는 셀림 3세에 대한 반대 세력이 커지는 것에 불안감을 느끼고 스스로 폐위를 요청했다고 한다. 반면 코스탄티니예를 방문한 프랑스인 대위 오베르는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더 많은 뇌물을 제공하라는 요구를 받았지만 이를 충족하지 못해 결국 축출되었다고 한다.

이후 스카를라트 칼리마치가 몰다비아 보이보드로 부임했지만, 1810년 6월 13일 제9차 러시아-튀르크 전쟁 중에 러시아군에 생포된 뒤 하르키우로 이송되었다. 그 후 1812년 러시아와 오스만 제국간의 전쟁이 종식되면서 풀려난 스카를라트 칼리마치는 정권을 재편하고 질서를 회복하며, 어려움에 처한 백성들의 처지를 완화하기 위해 노력했다. 보야르들에게 세금을 면제하고 일반 백성들에게 부과된 세금을 감면했다. 또한 1813~1814년에 왈라키아에서 유행한 페스트가 몰다비아로 확산하는 걸 막기 위해 방역 조치를 취했으며, 도로 공사와 포장도로 공사를 실시했다. 또한 몰다비아 내 그리스어 교육을 지원했다. 그러나 1819년 6월 러시아 제국과 공모한 혐의로 기소되어 폐위되었다.

4.11. 알렉산드로스 입실란티스의 봉기와 통치 체계 개편

스카를라트 칼리마치의 뒤를 이어 몰다비아 보이보드에 선임된 미하이 수추 2세파디샤 마흐무트 2세의 궁정에서 직위를 역임했고, 1820년 알바니아 통치자 알리 파샤의 반란을 진압하는 데 협력했다. 그러나 1820년 11월 이아코보스 리조스 네룰로스의 설득을 받아들여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그리스인의 독립을 꾀한 필리키 에테리아(Φιλική Εταιρεια: 친구 협회)에 가입했다. 그러던 1821년 1월, 알렉산드로스 입실란티스가 그리스 혁명군을 이끌고 몰다비아로 진입하는 계획을 세웠고, 미하이 수추 2세는 이를 은밀히 지원했다.

1821년 2월 22일, 알렉산드로스 입실란티스가 몰다비아를 침공했다. 미하이 수추 2세는 즉시 이에 호응해 병사들에게 무기를 제공하고 상당한 군자금도 헌납했다. 그러나 알렉산드로스 입실란티스의 봉기는 오스만 제국군의 반격으로 실패했고, 미하이 수추 2세는 3월 29일 보야르들의 탄핵에 밀려 이아시 궁정을 떠나 스콜레니로 이동했다가, 3월 31일 러시아 제국에 속한 키시너우로 망명했다. 그 후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그리고리오스 5세는 그와 알렉산드로스 입실란티스를 파문했다. 그 후 오스만 제국은 1822년 6월까지 몰다비아와 왈라키아에 군정을 실시하며 혁명 세력을 모조리 제거하려 했다.

그러던 1822년 봄, 그리고레 4세 기카, 이오안 스투르자, 이오르다케 라슈카누, 게오르게 쿠자 및 기타 9명의 몰다비아 및 왈라키아 보야르들이 콘스탄티니예로 찾아가서 오스만 제국의 주권을 인정하고 공물을 납부하며, 오스만군의 주둔을 받아들일 테니 전통 영주의 통치를 복원해달라고 요청했다. 1822년 7월 1일, 오스만 파디샤 마흐무트 2세는 이를 받아들이고, 앞으로는 오스만 당국이 파나리오테스에 속한 인사를 임의로 왈라키아나 몰다비아 보이보드로 선임하지 않고 보야르들이 선출하고 오스만 당국이 승인하는 구조로 회귀하기로 했다. 그 후 그리고레 4세 기카는 왈라키아 보이보드로 선임되었고, 이오안 스투르자는 몰다비아 보이보드로 선임되었다.

이오안 스투르자는 통치 초기에 예산을 정상화하고 공무원을 임명하는 것뿐만 아니라 외무부와 법무부를 개편하고 종교 자유와 관련된 여러 제한을 폐지하는 등 여러 행정 조치를 취했고, 농노제 폐지를 공식화했다. 1826년 10월 오스만 제국과 러시아 제국 간에 아케르만 협약이 체결되어 몰다비아와 왈라키아가 자치권을 얻었고, 그들의 통치자느 현지 보야르들로부터 임명되었고 러시아 정부의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러시아로 망명했던 보야르들이 오스만 제국의 사면을 받고 몰다비아로 돌아온 뒤, 그는 정치적 위기에 직면했다. 1827년, 오스만 제국 파디샤 마흐무트 2세는 아케르만 협약 무효를 선언했다. 이로 인해 제10차 러시아-튀르크 전쟁이 발발했다. 1828년 4 월에 러시아 군대가 몰다비아에 입성했고, 그 해 5월 7일에 그를 폐위했다. 마흐무트 2세는 이를 보상해주기 위해 사모스 섬에 가신 공국을 세우고 이오안을 사모스 공으로 선임했다.

그 후 러시아군이 몰다비아 공국과 왈라키아 공국 전역을 장악했다. 그들은 1834년까지 몰다비아와 왈라키아를 포괄하는 다뉴브 공국의 총독을 선임했다. 1834년 러시아 제국이 오스만 제국과 평화 협약을 맺고 철수한 후, 미하이 스투르자가 러시아 제국과 오스만 제국의 합의하에 몰다비아 보이보드로 선임되었다. 미하이는 스위스 교육자 요한 하인리히 페스탈로치가 추진한 교육 정책을 높이 평가하고, 이아시에 루마니아 역사상 최초로 현대식 대학 자격을 갖춘 기관인 미하일레아나 아카데미를 세운 게오르게 아사치를 지원했다. 이후 아카데미는 루마니아의 국가적 각성의 중심지가 되었다. 또한 숙련된 행정가였던 그는 몰다비아의 경제 성장과 국가 현대화에 기여할 공공 및 행정 정책에 중점을 두었다. 그의 치세 동안 약 250km의 도로와 400개의 돌다리가 건설되었으며, 기반시설은 맥아담(MacAdam)과 포틀랜드(Portland) 방법에 따라 만들어져서 강력한 내구성을 자랑했다.

그의 정적들은 팜플렛과 회고록을 통해 미하이가 행정 체계의 복잡성과 법률 체계 변화의 맥락을 이용하거나 국가 수반의 지위가 제공하는 지렛대를 이용하여 백성들을 수탈해 재산을 늘리고 부정부패를 용인했다고 비난했다. 하지만 현대 학계는 이건 모함일 뿐이라고 본다. 그는 국가에서 가장 유능한 경제 주체로 지명된, '그에게 호의적이고 자본, 노동, 공동 참여 가능성 및 의지를 가진' 대 보야르들을 우대하면서, 그들과 함께 공공 정책을 조정했다. 당시 그의 가문은 산림, 농경지 및 농촌 노동력을 보유한 수많은 지역의 소유자이자 대규모 경제 행위자로서, 개발 과정의 혜택 중 일부를 자연스럽게 얻었다. 하지만 그는 새로운 법안을 적용해 농민에 대한 행정부와 소유주의 착취를 줄였다. 또한 초기에는 유대인의 이민을 제한했지만, 나중에는 유대인들이 상업 활동을 벌인다면 국가 경제를 활성화시키고 몰다비아 주민들의 상품 구매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다는 걸 깨닫고, 유대인들이 몰다비아에 정착하도록 장려했다.

미하이는 시대의 변화에 따라 노예제를 폐지하고 자치령과 수도원에 속한 집시들을 해방시켰다. 그 대신 본래 소유자에게 보상을 제공했다. 그는 이 새로운 노동력을 장인, 공예가 등 현재 사회에서 생산적인 노동자에 포함시키려 했다. 그러면서도 보야르 가문의 사유 재산에 남아있는 다른 집시들은 계속 구속되도록 허용했다. 한편, 그는 1835년 예술 공예 연구소를 설립하는 등 몰다비아의 교육을 장려했다.

이렇듯 점진적인 개혁을 벌여서 몰다비아의 경제를 발전시키고 교육 열기를 끌어올리는 데 기여했지만, 몰다비아 정교회에 강력하게 간섭하면서 문제가 발생했다. 그는 교회와 수도원의 수입을 통제해 교회 분야에서도 국가의 권위를 강요하려 했다. 1835년 봉헌되지 않은 몰다비아 수도원에 관한 법률을 반포해 수도원 자산 관리에 대한 국가 통체를 확립했고, 1839년에 제정된 또다른 법률은 교회 자산의 관리를 직접적으로 다루기 위한 부서 설립과 몰도바 수도원 생활에 엄격한 규율 도입을 규정했다. 이로 인해 국민들에게 많은 지지를 받던 몰다비아 대주교 베냐민 코스타체와 마찰을 벌인 끝에 1842년 1월 그를 강제로 사임시켜 강한 반발을 초래했다. 게다가 그는 재산을 불리려는 탐욕이 무척 강해, 보야르의 칭호를 돈을 받고 수여했다. 그 결과 통치 초기 몰다비아 보야르는 853명이었지만, 통치가 끝날 무렵엔 3,750명에 달했다.

1848년, 서유럽에서 발발한 1848년 혁명의 불길이 몰다비아에 미치면서 젊은 보야르들이 35가지 요구 사항이 담긴 각서를 미하이 스투르자에게 제출했다. 그는 주동자들을 체포해 감옥에 수감했다가 나중에 국외로 추방했다. 1849년 5월 1일 발타-리만 협약이 체결되면서 왈라키아와 몰다비아에 관한 러시아 제국과 오스만 제국의 통제가 확립된 뒤, 그 해 6월 러시아 당국의 압력으로 그리고레 알렉산드루 기카에게 자리를 넘긴 뒤 물러났다.

그리고레는 공공 사업, 전문 도로 및 건설 엔지니어 학교, 남용 중단, 관세를 12%에서 5%로 낮추어 수출 및 수입 촉진 등 국가 복지 측면에서 많은 개선을 이루고자 했다. 또한 이아시의 코푸에서 민병대 막사를 건설했으며, 염전 개발을 위한 새로운 시스템을 수립했다. 그가 추진한 가장 중요한 정책은 1851년에 시행한 농업 및 공교육 조직이었다. 노동일 단축, 농업 이외의 작업에서의 사용 중지, 십일조 폐지, 이미지 제고, 농민의 지위 향상 등을 통해 소유자와 노동자 간의 관계를 규제함으로써 농민의 상황을 개선하고 이주 조건을 완화했다. 그리고 63개의 카운티에 초등학교를 설립하고, 법학과 철학의 두 학부를 몰다비아 최초의 현대 대학 기관인 미하일레아나 아카데미에 설립했다. 또한 루마니아어를 모든 교육기관에서 의무적으로 가르쳐야 했으며, 외국어도 가급적 가르치도록 했다. 고아를 위한 시설도 설립하고, 임산부들을 위한 교육 기관도 세웠으며, 가난한 여성들을 위한 학교, 수술 학교 및 갈라타 간호학교도 설립했다.

1853년 1월, 그리고레와 관련된 허위 문서, 헌장, 심지어 유언장을 오스만 제국 궁정에 발송한 무리가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 위조자들은 행정위원회 의장 니콜라에 긴타를 포함한 고위 관리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었으며, 그리고레의 가까운 동료 일부는 아예 칸타가 위조 사업의 공범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이 사건에 엄청난 충격을 받고 우울증에 시달렸다. 그는 질병으로 인해 통치권을 니콜라에 수추에게 임시로 위임한다는 헌장을 발표했다. 이후 그는 수면마비에 시달리는 등 상태가 더욱 악화되자, 하르 파셰슈티의 마브로코르다트 수도원에 들어가서 요양 생활을 했다. 그해 3월 23일, 그는 이아시로 돌아와서 통치를 재개했다.

1853년 크림 전쟁이 발발했고, 그해 6월 러시아군이 몰다비아에 입성했다. 그해 10월 오스만 제국이 러시아 제국을 상대로 전쟁을 선포했고, 그리고레는 이로 인해 왈라키아 보이보드 바르부 슈티르베이와 함께 물러나야 했다. 두 사람은 으로 망명했고, 몰다비아와 왈라키아는 러시아군의 통치를 받았다. 1854년 전세가 불리해진 러시아군이 본국으로 철수하면서 공백이 발생하자, 오스트리아군이 그들을 대신해 몰다비아와 왈라키아에 입성했다. 그해 10월 11일, 오스만 제국군 장성 데르비쉬 파샤는 그리고레에게 초대장을 보냈다. 그는 이를 받아들여 10월 28일 이아시로 돌아와서 주민들의 환영을 받고 통치를 재개했다. 그러나 그가 이끄는 정부는 몰다비아에 진주한 오스트리아군의 점령 비용을 지불해야 했고, 1856년년에는 700만 레이에 달하는 적자를 기록했다.

1855년 12월 10일, 그리고레는 "이 땅에서 노예 제도가 소멸될" 수 있도록 집시 노예 제도를 폐지하기 위한 법률 초안을 임시 의회에 제출했다. 1855년 12월 22일, 의회는 그의 법안을 만장일치로 통과했다. 또한 그는 1856년 2월 5일 검열 제도를 폐지했고, 루마니아 자유주의 성향 학자들의 작품 출간을 지원했다. 또한 프랑스 엔지니어의 도움을 받아 전신을 도입했다. 여기에 노조를 합법화하는 것에 긍정적인 입장을 표명했다. 오스만 제국 외무장관 푸아드 파샤갸 그에게 노동조합 후원을 중단하라고 경고하자, 그는 공국 주민들이 자기들의 희망을 표현하기 위해 평화적인 의견 수렴을 했을 뿐이며, 음모나 중상은 일절 없고, 자기는 이들에게 어떠한 후원도 한 바 없다고 주장했다. 한편, 그는 왈라키아와 몰다비아의 연합에 반대하는 오스만 제국의 입장에 동의하지 않았고, 통치 마지막 몇 주 동안 외국 군주 아래 양국의 연합을 강력하게 옹호했다.

1856년 3월 30일, 크림 전쟁의 종결을 알리는 파리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때 몰다비아와 왈라키아는 공식적으로 오스만 제국의 종주권 아래 두되, 두 공국의 최종 조직에 관한 국민의 의지를 표현하기 위해 임시 의회가 설립되어 즉시 소집되며, 오스만 제국은 파리 조약에 서명한 국가들의 동의가 있어야만 이들 공국에 개입할 수 있었다. 그 후 그리고레는 1856년 6월 3일에 발타-리만 조약에서 정한 7년 임기가 끝나면서 퇴위해야 했다. 그 후 몰다비아 공국의 카이마캄(Caimacam: 임시 통치자)으로 부임한 테오도르 발슈는 강력한 보수주의자로, 전임자의 자유주의 개혁 정책을 모조리 폐지했다. 그리고레 알렉산드루 기카가 선임한 주지사들을 모조리 해임하고 이아시 법학부를 폐지했으며, 검열 폐지 조치, 노조 합법화 정책도 모두 폐지했다. 여기에 더해, 전임 보이보드가 재정 낭비를 일삼았다고 비판하고, 조사위원회를 창설해 전임자의 횡령을 조사하도록 했다. 한편, 오스만 제국의 입장에 따라 몰다비아 공국과 왈라키아 공국의 연합 주장을 강력하게 반대했다.

그러던 1857년 3월 1일, 테오도르 발슈가 이아시 궁정에서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그 후 전임 몰다비아 보이보드 슈테판 보고리디의 아들이자 그와 함께 노조 합법화를 강력히 반대한 인사였던 니콜라에 보고리디가 새 카이마캄으로 부임했다. 그는 오스트리아 제국과 오스만 제국의 노선을 따라 왈라키아와 몰다비아의 통합을 강하게 반대했다. 심지어 두 국가의 통일 문제를 다루기로 되어있던 임시 의원 선거 유권자 명단을 위조하기도 했다. 1857년 7월 7일 선거가 열렸을 때, 몰다비아에서는 공포 분위기와 연합당의 보이콧 아래 진행되었다. 연합주의자들은 오스트리아 법원과 보고리디의 비밀 서신을 입수했는데, 거기에는 선거 조작에 대한 확실한 증거가 있었다. 이에 유럽 각지에서 강력한 항의가 벌어졌고, 급기야 프랑스, 러시아, 프로이센, 사르데냐 대사들이 코스탄티니예에서 영사관을 철수하겠다고 위협하자, 오스만 제국은 별 수 없이 9월 22일에 선거를 다시 실시하기로 했다.

한편, 그는 1856년 파리 조약에 따라 몰다비아에 합병된 남부 베사라비아에 거주하는 불가리아인들을 지원했다. 그가 카이마캄으로 임명된 직후, 불가리아 이민자 대표단은 그에게 브랜디에 대한 독점권을 청산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자 그는 자신은 불가리아 사람이므로 어떤 요청이 들어와도 들어주겠다고 약속했다. 1858년 6월 28일 불가리아 대표단의 요청에 따라, 그는 성 베드로 고등학교가 발행한 크리소불(증명서)을 승인했다. 또한 친구인 게오르기 스토이코프 라코프스키의 요청에 따라 1857년 갈라트에 불가리아 지방자치단체와 인쇄소 설립을 허용했고, 오스만 제국 당국이 라코프스키를 체포한다는 정보를 입수하자 즉시 라코프스키에게 이 사실을 알려 러시아에 망명하도록 했다.

1857년 9월 22일 선거 결과, 연합주의자들이 압승을 거두었다. 그 후 그의 영향력은 갈수록 축소되었다. 심지어 아내 예카테리나 코나키는 남편에 맞서 몰다비아와 왈라키아의 연합을 이루기 위해 보석을 기증했고, 남편이 오스만 제국 고위 인사들에게 보낸 편지를 훔쳐서 노조 운동을 벌이는 인사들에게 넘기는 등 노골적으로 남편에 대적했다. 결국 위상이 실추된 그는 1858년 10월 직위에서 물러나야 했다.

4.12. 몰다비아 왈라키아 연합공국의 성립

니콜라에 보고리디가 물러난 후, 1859년 1월 17일에 열린 몰다비아 선거 결과, 왈라키아와 몰다비아의 통합을 추구한 알렉산드루 이오안 쿠자가 몰다비아 보이보드로 선출되었다. 그 후 그는 왈라키아 측에 통합안을 진행하자고 강력히 호소했다. 한편 왈라키아에서는 몰다비아와의 통합을 꺼리는 보수주의자들이 정계를 장악했지만, 각자 후보를 내세우며 분열했기에 합의를 이루지 못했다. 그 사이에 양국의 통합을 강력히 원하는 국민당이 알렉산드루를 적극 지원하면서, 알렉산드루는 1859년 2월 5일 선거에서 왈라키아 보이보드로 선출되었다. 이후 수년간 알렉산드루가 두 개 정부의 단독 통치자로 군림하는 형국으로 이어졌다. 그러던 1862년 2월 5일, 알렉산드루는 연합주의자들의 지원에 힘입어 두 나라의 의회와 정부를 통합하여 정치적 연합을 달성하고, 스스로 돔니토르(Domnitor, 군주 또는 통치자)를 칭했으며, 국호를 '루마니아 연합공국'으로 정했다. 이리하여 몰다비아 공국은 왈라키아 공국과 함께 역사의 무대에서 퇴장했다.

5. 역대 군주(보이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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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테판 2세 페트루 3세
로만 2세 페트루 3세 로만 2세 페트루 3세 치우바르 보다
알렉산드루 2세 보그단 2세 페트루 4세 아론 알렉산드루 2세 페트루 4세 아론
알렉산드루 2세 페트루 4세 아론 슈테판 3세 보그단 3세 슈테판 4세
페트루 5세 라레슈 슈테판 5세 알렉산드루 3세 코르네아 페트루 5세 라레슈 일리아슈 2세 라레슈
슈테판 6세 라레슈 이오안 1세 졸데아 알렉산드루 4세 라푸슈네아누 이오안 2세 야콥 헤라클리드 슈테판 7세 톰샤
알렉산드루 4세 라푸슈네아누 보그단 4세 이오안 3세 첼 비테아즈 페트루 6세 슈체아풀 이오안 4세 포트코아바
페트루 6세 슈체아풀 알렉산드루 5세 포트코아바 페트루 6세 슈체아풀 이오안 5세 사술 페트루 6세 슈체아풀
아론 트리아눌 알렉산드루 6세 첼 라우 페트루 7세 카자쿨 아론 트리아눌 슈테판 8세 라즈반
이에레미아 모빌라 미하이 1세 이에레미아 모빌라 시미온 모빌라 미하이 2세 모빌라
콘스탄틴 모빌라 미하이 2세 모빌라 콘스탄틴 모빌라 슈테판 9세 톰샤 알렉산드루 7세 모빌라
라두 미네아 가슈파르 그라치아니 알렉산드루 8세 일리아슈 슈테판 9세 톰샤 라두 미네아
미론 바르노브스키모빌라 알렉산드루 9세 코코눌 모이세 모빌라 알렉산드루 8세 일리아슈 미론 바르노브스키모빌라
모이세 모빌라 바실레 루푸 게오르게 슈테판 바실레 루푸 게오르게 슈테판
게오르게 기카 콘스탄틴 셰르반 슈테파니타 루푸 콘스탄틴 셰르반 슈테파니타 루푸
유스트라티에 다비자 게오르게 두카 일리아슈 알렉산드루 게오르게 두카 슈테판 페트리세이쿠
두미트라슈쿠 칸타쿠지노 슈테판 페트리세이쿠 두미트라슈쿠 칸타쿠지노 안토니에 루세트 게오르게 두카
슈테판 페트리세이쿠 두미트라슈쿠 칸타쿠지노 콘스탄틴 칸테미르 디미트리에 칸테미르 콘스탄틴 두카
안티오 칸테미르 콘스탄틴 두카 미하이 라코비차 안티오 칸테미르 미하이 라코비차
니콜라에 마브로코르다트 디미트리에 칸테미르 니콜라에 마브로코르다트 미하이 라코비차 그리고레 1세 기카
콘스탄틴 마브로코르다트 그리고레 1세 기카 콘스탄틴 마브로코르다트 이오안 마브로코르다트 그리고레 1세 기카
콘스탄틴 마브로코르다트 요르다케 스타브리치 콘스탄틴 라코비차 마테이 기카 콘스탄틴 라코비차
스카를라트 기카 이오안 테오도르 칼리마치 그리고레 칼리마치 그리고레 2세 기카 그리고레 칼리마치
그리고레 2세 기카 콘스탄틴 모루지 알렉산드루 마브로코르다트 델리베이 알렉산드루 마브로코르다트 피라리스 알렉산드루 입실란티
마놀레 기아니 루세트 알렉산드루 모루지 미하이 수추 1세 알렉산드루 칼리마치 콘스탄틴 입실란티
알렉산드루 수추 알렉산드루 모루지 스카를라트 칼리마치 알렉산드루 모루지 알렉산드루 한제를리
스카를라트 칼리마치 요르다케 루세트로즈노바누 베냐민 코스타체 스카를라트 칼리마치 미하이 수추 2세
베냐민 코스타체 슈테판 보고리디 이오안 스투르자 미하이 스투르자 그리고레 알렉산드루 기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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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370년 즈음에 공작이 정교회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하고 가톨릭 교회를 설립했었으나 국민들 대다수가 여전히 정교회를 믿어 결국 흐지부지됐다.[2] 해석하자면 보그단왈라키아. 몰다비아 공국의 초창기 통치 가문이었던 보그다네슈 가문에서 유래했다.[3] 트란실바니아 공국헝가리인의 자치 공국이었고 라코치 페렌츠 2세의 반란이 진압된 1711년 이후 합스부르크 가문 직할령으로 격하되었다.[4] 1300 ~ 1332, 사도 요한과 혼동하지 않기 위해 '새로운 요한'으로 일컬어진다. 트라페준타 제국 출신으로, 흑해 연안에서 기독교를 전교하고 궁핌한 사람들을 돕다가 타타르족에게 체포된 뒤 처형되었다. 사후 정교회에 의해 성인으로 시성되었다.[5] 당대 사료에는 40,000 명에 달했다고 기술되었지만, 현대 학자들은 25,000명일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6] 폴란드 연대기 작가 얀 드우고시(Jan Długosz, 1415 ~ 1480)에 따르면, 아흐메트 칸은 아들의 몸값을 쉽게 지불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는 슈테판 3세에게 사절 100명을 보내면서, 만약 슈테판이 아들에게 자유를 돌려주지 않거나 그를 털 끝이라도 건드리면 엄중한 처벌을 내리겠다고 위협했다. 슈테판 3세는 이에 분노해 아흐메트 칸의 위협을 묵살하고, 사절들 앞에서 칸의 아들을 네 조각으로 자르고 코가 잘린 한 명을 제외한 모든 사절을 꼬챙이에 꿰뚫었다. 그 후 코가 잘린 사절을 킵차크 칸국으로 보내 아흐메트 3세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를 알리게 했다고 한다.[7] 1486년 헝가리 국왕 마차시 1세에 의해 세르비아 데스포티스로 직함을 맡아서 10년간 헝가리군이 오스만 제국과 맞서 싸우는 걸 돕다가 1496년 수도사가 되었다.[8] Padina(지붕)는 일반적으로 언덕 꼭대기에서 땅이 침하되면서 형성된 원형 또는 길쭉한 함몰 모양의 구호이다.[9] 한 봉지에 500개의 황색 금이 들어 있었다고 한다.[10] 슈테판 3세가 묻힌 푸트나 수도원이 있는 곳으로 푸트나 수도원은 유네스코 세계유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