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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1 18:44:24

바실레 루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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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8d0000><colcolor=#fff> '''
몰다비아 제54대 보이보드
바실레 루푸
Vasile Lupu
'''
파일:바실레 루푸.jpg
출생 1595년
오스만 제국 불가리아 아르바나시
사망 1661년 (향년 66세)
오스만 제국 코스탄티니예
재위 몰다비아 보이보드
1차: 1634년 4월 ~ 1653년 4월 13일
2차: 1653년 5월 8일 ~ 7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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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8d0000><colcolor=#fff> 부모 아버지: 니콜라에 루푸
어머니: 미상
배우자 투도스카, 예카테리나 체르케자
자녀 이오안, 마리아, 룩산드라, 슈테파니타 루푸, 이오안, 알렉산드루
가문 루푸 가문
종교 기독교 }}}}}}}}}
1. 개요2. 생애3.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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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몰다비아 공국 제54대 보이보드.

2. 생애

1595년경 오스만 제국 불가리아 아르바나시에서 출생했다. 그의 가문은 오스만 제국에 귀속한 알바니아의 그리스계 집안이며, 아버지 니콜라에 루푸는 몰다비아 공국 포로이슈테의 보야르였으며, 어머니는 이름이 알려지지 않으나 루마니아 출신인 것만은 분명하다. 그는 가문 대대로 축적한 막대한 재산을 바탕으로 장차 몰다비아 보이보드가 된 뒤 미하이 2세가 한때 그랬던 것처럼 왈라키아 공국트란실바니아 공국을 아우루는 대국을 세우려는 야심을 품었다.

1633년 4월, 몰다비아 공국의 보이보드지만 나랏일에 관심을 가지지 않고 사치와 향락에 빠져 지내는 알렉산드루 8세 일리아슈를 상대로 정변을 일으켜 알렉산드루 4세를 축출했다. 그 후 5월 2일에 미론 바르노브스키모빌라가 새 보이보드로 옹립되었지만, 바실레는 미론이 오스만 제국 궁정의 인정을 받기 위해 코스탄티니예로 간 틈을 타 오스만 파디샤 무라트 4세에게 미론이 오스만 제국과의 관계를 단절하고 폴란드와 붙으려 한다고 고발했다. 무라트 4세는 이를 믿고 7월 2일 미론을 코스탄티니예 광장에서 참수했다.

이후 오스만 궁정에 의해 새 보이보드로 선임된 모이세 모빌라가 실리스트라의 파샤 메흐메트 압자의 지원에 힘입어 바실레 등을 복종시켰다. 그러나 그는 폴란드-리투아니아오스만 제국간의 전쟁이 발발했을 때 가문과 깊은 연관이 있는 폴란드에 우호적인 입장을 내비쳤고, 오스만 궁정에 거짓 정보를 제공했다. 이 사실이 나중에 발각되자, 무라트 4세는 1634년 4월 모이세 모빌라를 폐위했다. 그 후 오스만 궁정은 막대한 뇌물을 건넨 바실레를 새 보이보드로 옹립하기로 했다.

그리하여 고대하던 몰다비아 보이보드에 오른 바실레는 몰다비아 보야르 및 성직자들과 좋은 관계를 맺고자 노력했으며,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와 유대 관계를 맺고 정교회 신앙을 몰다비아에서 활성화하고자 노력했다. 또한 이아시에 '세 계층의 수도원(Mănăstirea Trei Ierarhi)', 르비우에 성 파라스케비 성당을 세우는 등 주목할 만한 기념물을 건설했으며, 바실레 아카데미 등 학교를 건설했고, 인쇄소를 세워서 여러 교회 서적 및 법률 서적을 루마니아어로 인쇄하도록 했다.

이렇듯 그의 치세에 몰다비아의 문화는 눈에 띄게 진흥되었고, 무역 규모도 눈에 띄게 늘어났지만, 지배 계급만 경제 부흥의 해택을 받았고, 농민들은 막대한 세금에 짓눌렸다. 파산한 농민들은 종종 집을 버리고 오스만 제국의 압제에 맞서 싸우는 유랑 농민인 하이두크인이 되었다. 1646년에 몰도바 공국을 방문한 가톨릭 주교 마크 반디니(Mark Bandini)는 루푸가 그의 통치 기간 동안 20,000명 이상의 사람들을 유죄 판결하고 처형했다고 기술했지만, 현대 학자들은 이 수치가 과장되었을 거라고 추정한다.

바실레는 자기 딸 마리아를 리투아니아 헤트만 야누시 라지비우와 결혼시키는 등 폴란드-리투아니아와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면서 왈라키아 보이보드 마테이 바사라브를 밀어내고 자기 아들 이오안을 왈라키아 보이보드로 선임하려 했다. 이에 자극받은 마테이는 트란실바니아에 거주했던 몰다비아 공위 경쟁자 이오안 모빌라를 지원했다. 오스만 제국은 마테이와 바실레간의 갈등을 비밀리에 부추김으로써, 봉신들이 서로 지리멸렬해져 자국으로부터 독립할 엄두를 내지 못하게 하려 했다. 바실레 루푸는 왈라키아의 여러 보야르들을 회유했고, 몇몇 오스만 고위 관리들에게 뇌물을 줘서 파디샤가 마테이를 폐위하도록 부추기려 했다. 그러나 마테이는 능수능란한 외교술로 오스만 관리들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일 수 있었고, 바실레 루푸를 지지한 보야르들을 처형했다.

1637년 11월, 바실레 루푸가 산악 지대를 넘어 왈라키아를 급습했지만 포차니에서 마테이에게 격파되었다. 1639년, 바실레 루푸는 아들 이오안과 함께 마테이의 퇴위를 위해 전쟁을 재차 벌이면서, 파디샤 무라트 4세로부터 마테이를 폐위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그러나 그해 12월 네니쇼르 마을 인근 전투에서 패배하고 몰다비아로 후퇴했다. 이후 양자는 트란실바니아 공 라코치 죄르지 1세의 중재에 따라 휴전 협약을 맺었고, 1644년에 휴전을 갱신했다. 두 군주는 평화의 표시로 상대 국가에 수도원을 건설하기로 했다. 그러나 화해는 오래가지 못했다. 마테이는 새로운 트란실바니아 공 라코치 죄르지 2세의 지원을 받았고, 바실레 루푸는 자포리자 카자크의 헤트만인 보흐단 흐멜니츠키크림 칸국의 칸 이슬람 3세 기라이의 지원을 받았다. 양자는 몇 차례 소규모 접전을 치렀지만 승패를 가리지 못했다.

1648년, 보흐단 흐멜니츠키가 카자크를 이끌고 폴란드-리투아니아를 상대로 반기를 들었다. 이때 몰다비아 농민들은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귀족들의 억압에 맞서 싸운다는 카자크의 대의에 공감해, 그들에 가세하여 폴란드군에 맞서 싸웠다. 반면 몰다비아 보야르들은 폴란드-리투아니아 대귀족들을 지원했다. 바실레는 카자크의 봉기에 고무된 몰다비아 농민들이 자국에서 대거 반란을 일으킬 것을 우려해, 폴란드-리투아니아군을 지원했다. 이에 보흐단 흐멜니츠키는 그를 배신자로 간주하고 응징하기로 마음먹었다. 1650년, 16,000명에 달하는 카자크군이 크림 칸국에서 파견된 타타르족과 함께 몰다비아로 침공해 몰다비아 전역을 파괴하고 이아시를 불태웠다. 결국 바실레는 보흐단과 동맹을 맺어야 했고, 자기 딸 룩산드라를 보흐단 흐멜니츠키의 아들인 티모페이 보그다노비치 흐멜니츠키와 결혼시키겠다고 약속했다.

1651년 6월 28일 ~ 7월 10일에 벌어진 베레스테치코 전투에서 카자크군이 폴란드-리투아니아군에 참패하자, 바실레는 강제로 맺어야 했던 카자크와의 동맹을 파기하기로 마음먹고,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 얀 2세 카지미에시 바사와 동맹을 맺으려 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보흐단 흐멜니츠키는 그에게 압력을 행사하기로 마음먹고, 1652년 봄 카자크군을 몰다비아 국경으로 집결했다. 1652년 6월 1일 바토그 전투에서 카자크군이 폴란드-리투아니아군을 격파한 뒤, 보흐단이 당장 자기와 동맹을 맺지 않으면 징벌 원정을 가하겠다고 위협하자, 바실레는 보흐단과의 협상을 재개했다. 그 결과 룩산드라와 티모페이의 결혼이 성립되었다.

그러나 몰다비아의 친 오스만 제국 성향 보야르들은 카자크와 손잡은 통치자에게 등을 돌렸고, 왈라키아 보이보드 마테이 바사라브와 트란실바니아 공 라코치 죄르지 2세는 이 때를 틈타 몰다비아 보이보드 직위를 주장하는 게오르게 슈테판을 몰다비아 보이보드로 옹립하기로 하고, 1653년 4월에 힘을 합쳐 침공했다. 연합군의 공세에 버티지 못한 바실레 루푸는 4월 13일 이아시를 떠나 우크라이나로 피신한 뒤, 1653년 5월 보그단 흐멜니츠키의 지원을 받아 카자크와 함께 몰다비아 공국을 탈환한 뒤 왈라키아를 침공했다. 마테이는 이에 대응하고자 출진해 핀타 전투에서 바실레 루푸를 격파했지만 그 과정에서 부상을 입었다. 바실레 루푸는 핀타 전투 패전 후 카자크로 도주했다가 크림 칸국으로 이동한 뒤, 다시 코스탄티니예로 피신했으나 곧 일곱 개의 탑에 투옥되었다. 이후 그곳에서 옥고를 치르다 1661년경에 사망했다. 이후 게오르게 슈테판이 몰다비아의 보이보드로 등극했다.

3. 가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