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00><colcolor=#fff> '''''' | |||
본명 | 마테이 바사라브 Matei Basarab | ||
출생 | 1580년 | ||
왈라키아 공국 브란코베니 | |||
사망 | 1654년 4월 19일(향년 73~74세) | ||
왈라키아 공국 트르고비슈테 | |||
재위기간 | 왈라키아 보이보드 | ||
1632년 9월 ~ 1654년 4월 9일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000><colcolor=#fff> 부모 | 아버지: 브란코베니의 단치울 어머니: 스탄카 | |
배우자 | 엘리나 나스투렐 헤레스쿠 | ||
가문 | 크라이오베슈티 가문 | ||
종교 | 기독교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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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왈라키아 공국 58대 보이보드.2. 생애
슈테판 수르둘과 알렉산드루 3세 첼 라우 통치 기간 동안 고위 간수 직위를 역임한 브란코베니의 단치울과 브란코베니 출신의 정부 스탄카의 아들이다. 조부 카라칼의 바슬란은 왈라키아 공국을 창건한 바사라브 가문의 후예를 자처했고, 왈라키아 보이보드를 여럿 배출한 크라이오베슈티 가문의 일원이었다. 그는 훗날 보이보드에 올랐을 때 이점을 기반으로 삼아 '바사라브'라는 이름을 체택했다. 마테이는 일찍이 크라이오바의 자유민과 길드원으로 구성된 분견대 지휘관으로서, 미하이 2세의 휘하에서 활약했다.1629년 ~ 1632년에 집권한 레온 톰샤는 오스만 제국 관리들에게 막대한 뇌물을 준 걸 회수하기 위해 백성들에게 훨씬 더 높은 세금을 부과했다. 하지만 이걸로 충족되지 않자, 그는 보야르들에게 나머지 금액을 자비로 지불하도록 강요했다. 여기에 그리스에서 왈라키아로 이주한 이들에게 막대한 권리를 부여해, 보야르들의 반감을 샀다. 이리하여 반란이 빗발치자, 오스만 제국 궁정은 1632년 7월 레온 톰샤를 폐위하고 라두 11세를 왈라키아 보이보드로 선임했다.
하지만 마테이는 이에 따르지 않기로 마음먹고, 그 해 9월 트란실바니아 공 라코치 죄르지 1세의 지원을 받고 반란을 일으켜 라두 11세를 축출했다. 라두 11세는 지지자들을 끌어모아 반격을 꾀했지만, 그 해 10월 30일 플럼부이타 수도원 인근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참패하고 목숨을 잃었다. 그 후 마테이 바사라브는 오스만 제국 궁정에 뇌물을 바쳐서 그들의 인정을 받고 왈라키아 보이보드에 선임되었다.
이렇게 집권한 마테이는 입지를 다지기 위해 주변 국가들과 우호 관계를 돈독히 하고자 노력했다. 오스만 제국에 공물을 꼬박꼬박 바치고 파디샤에게 경의를 표해 그들의 호의를 사는 한편, 1635년 트란실바니아 공 라고치 죄르지 1세와 동맹을 맺었다. 여기에 1636년, 1637년, 1639년에 각각 신성 로마 제국, 폴란드-리투아니아, 베네치아 공화국과 평화 및 우호 협정을 맺었다.
한편, 마테이는 내치에 힘을 기울였다. 그는 외국과의 무역량을 늘리는 데 힘을 기울여 자국의 경제 발전을 도모했으며, 키예프 대주교 표트르 모길라의 도움으로 캄푸룽과 고보라의 인쇄소를 설치했다. 또한 46개의 정교회 성당과 수도원을 새로 지었고, 아토스 산과 다뉴브 강 남쪽의 비딘과 시스토프 등 많은 성당을 복원했다. 왈라키아 수도원들은 세금 면제 및 교회 복원을 위한 정부 지원의 혜택을 받았다. 또한 마테이는 종교 및 시민 생활에서 슬라브어를 루마니아어로 대체하는 데 공헌했다. 그는 <고모라의 규칙>[1]과 <법률 지침>[2]을 루마니아어로 발간했다. 또한 마테이는 국방력을 강화해 22년의 통치 기간 동안 병력 규모를 40,000명으로 늘렸고, 여러 요새를 건설했다.
이 무렵, 1634년 몰다비아 보이보드에 선임된 바실레 루푸는 마테이를 밀어내고 자기 아들 이오안을 왈라키아 보이보드로 선임하려 했다. 이에 자극받은 마테이는 트란실바니아에 거주했던 몰다비아 공위 경쟁자 이오안 모빌라를 지원했다. 오스만 제국은 마테이와 바실레간의 갈등을 비밀리에 부추김으로써, 봉신들이 서로 지리멸렬해져 자국으로부터 독립할 엄두를 내지 못하게 하려 했다. 바실레 루푸는 왈라키아의 여러 보야르들을 회유했고, 몇몇 오스만 고위 관리들에게 뇌물을 줘서 파디샤가 마테이를 폐위하도록 부추기려 했다. 그러나 마테이는 능수능란한 외교술로 오스만 관리들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일 수 있었고, 바실레 루푸를 지지한 보야르들을 처형했다.
1637년 11월, 바실레 루푸가 산악 지대를 넘어 왈라키아를 급습했지만 포차니에서 마테이에게 격파되었다. 1639년, 바실레 루푸는 아들 이오안과 함께 마테이의 퇴위를 위해 전쟁을 재차 벌이면서, 파디샤 무라트 4세로부터 마테이를 폐위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그러나 그해 12월 네니쇼르 마을 인근 전투에서 패배하고 몰다비아로 후퇴했다. 이후 양자는 트란실바니아 공 라코치 죄르지 1세의 중재에 따라 휴전 협약을 맺었고, 1644년에 휴전을 갱신했다. 두 군주는 평화의 표시로 상대 국가에 수도원을 건설하기로 했다.
그러나 화해는 오래가지 못했다. 마테이는 새로운 트란실바니아 공 라코치 죄르지 2세의 지원을 받았고, 바실레 루푸는 자포리자 코자키의 헤트만인 보흐단 흐멜니츠키와 크림 칸 이슬람 3세 기라이의 지원을 받았다. 양자는 몇 차례 소규모 접전을 치렀지만 승패를 가리지 못했다. 1653년 4월, 마테이는 바실레 루푸에 대한 음모를 조직했다. 그는 몰다비아 보이보드를 주장하는 게오르게 슈테판을 몰다비아 보이보드로 옹립하기로 하고, 트란실바니아 공 라코치 죄르지 2세와 함께 몰다비아를 침공했다.
연합군의 공세에 버티지 못한 바실레 루푸는 우크라이나로 피신한 뒤 그해 5월 보그단 흐멜니츠키의 지원을 받아 카자크와 함께 몰다비아 공국을 탈환한 뒤 왈라키아를 침공했다. 마테이는 이에 대응하고자 출진해 핀타 전투에서 바실레 루푸를 격파했지만 그 과정에서 부상을 입었다. 바실레 루푸는 핀타 전투 패전 후 카자크로 도주했다가 크림 칸국으로 이동한 뒤, 다시 코스탄티니예로 피신했으나 곧 일곱 개의 탑에 투옥되었다.
1654년 4월, 세이멘[3] 분견대가 수도 트라고비슈테를 점령하고 봉기를 일으켰다. 그들이 임금 대폭 인상을 요구하자, 그는 이들과 어떻게든 협상하려 했다. 그러나 핀타 전투에서 입은 부상이 악화되면서 4월 9일 협상 도중 사망했고, 트라고비슈테에 묻혔다. 1658년 당시 왈라키아에 있던 안티오크의 총대주교 마카리와 그의 비서인 학자 폴 드 알레포가 이끄는 성직자 협의회에 의해, 마테이가 생전에 세운 수도원인 아르노타 수도원으로 유해가 옮겨졌다. 사후 콘스탄틴 셰르반이 왈라키아 보이보드에 선임되었다.
마테이는 생전에 피에라슈티의 대 로고테테스인 라두 나스투렐의 딸이자 왈라키아 출신 루마니아 번역가 우드리스트 나스투렐의 딸인 엘리나 나스투렐 헤레스쿠와 결혼했지만 자녀를 낳지 못했다.